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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 절망적인 종속 – 가치의 오디세이

전에는 동일한 도구를 다루는 것인 평생의 전문직이었는데, 이제는 동일한 기계에 봉사하는 것이 평생의 전문직으로 된다. 기계는 노동자 자신을 유년시절부터 특정 기계의 한 부분으로 전환시키는 데 악용한다. 그리하여 노동자 자신의 재생산에 필요한 비용이 현저히 감소할 뿐 아니라, 동시에 공장 전체에 대한, 따라서 자본가에 대한 노동자의 절망적인 종속이 완성된다. 다른 모든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 경우에도 우리는 사회적 생산과정의 발전에 기인하는 생산성 증대와 그 발전의 자본주의적 이용에 기인하는 생산성 증대를 구별하지 않으면 안 된다 – 자본론 1권 15장, pp. 566-7; MEW 23, 445

자본주의적 생산은 사용가치의 생산을 매개로 한 가치의 생산이다. 그러므로 가치생산이 원인이고, 사용가치생산이 결과다. 가치생산이 내용이고 사용가치생산이 그 형식이다. 다만 이 형식 – 혹은 형태 – 은 가치생산이라는 내용의 존재양식이므로, 사용가치생산 없는 가치생산은 있을 수 없다.

가치생산은 (원인) 자본가 사이의 경쟁을 통해 생산성을 높인다 (결과). 가치생산에 대한 자본가의 욕구에는 한계가 없기 때문에 생산성의 증대에도 한계가 없다. 자본주의는 무의식적으로 사회적 생산과정을 급속도로 발전시킨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가치는, 이 추상적 논증을 현실화해야 했다. 사용가치는 가치를 팔벌려 환영하지 않았고, 우선 가치는 사용가치를 무릎꿇려야 했다. 번번히 접신을 거부하는 노동력 사용가치를 굴복시키기 위해 가치는 기계라는 우회로를 택했다. 공장제 대공업의 “자본주의적 이용”은 가치의 사용가치 정복전이었으며, 가치에 대한 사용가치의 절망적 종속화의 과정이었다. 가치는 가격과 같은 단순한 숫자도 아니지만, 노동-자본 관계의 추상적 표현도 아니다. 그것은 자본주의의 혼이다. 가치는 사용가치 안에 가만히 머물러 안식하지 않았다. 가치는 자신을 부정하고 사용가치 속으로 스스로를 내던져 그것을 자신의 틀에 맞게 변형시키고 새롭게 창조하는  과정을 거쳐야 했다. 오직 그 후에야 가치는 자기 자신으로 되돌아와 진정한 실질적인 자본이 될 수 있었다. 자본주의는 그야말로 가치의 오디세이이며, 자본론은 가치의 경험의 학인 것이다.

무한히 반복되는 가치의 오디세이는 쉬지 않고 “사회적 생산과정의 발전에 기인하는 생산성 증대”를 추동한다. 가치가 바로 이 지점에서 멈출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가치는 언제나 그것의 “자본주의적 이용”으로까지 나아가 자신의 운동의 산물, 곧 총체로서의 자본주의를 “절망적인 종속”의 체제로 완성시키고 또 재완성시킨다. 가치는 어떤 장벽도 용인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가치의 긍정적인 측면은 계승하고 부정적인 측면은 철폐하자는 주장은 하나의 공상에 불과하다. 그 공상이 현실화하는 순간, 자신에 대한 어떠한 장벽도 용인하지 않는 가치가 긍정적으로 계승된 자기자신을 우선 철폐하고야 말 것이기 때문이다.

(141) 노동시간 단축의 수단이 그 연장의 확실한 수단이 된다는 역설

노동시간을 단축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 노동자와 그의 가족의 모든 생활시간(Lebenszeit)을 자본의 가치증식에 이용할 수 있는 노동시간으로 전환시키기 위한 가장 확실한 수단으로 된다는 경제적 역설이 이로부터 나온다 – 자본론 1권 15장, p. 547; MEW 23, p. 432

노동자: 어이 자본가. 지난 1년간 기계를 이용해서 생산을 해봤는데, 생산성이 두 배로 높아졌어. 노총에 나가봤더니 다른 회사 노동자들도 같은 얘기를 하더라고. 너 정말 기계 잘 들여왔다. 니네 자본가들 돈에만 환장한 줄 알았는데 꽤 쓸모있어. 훌륭해. 이제 노동시간 반으로 줄이자. 어차피 반만 일해도 생산량은 똑같애.

자본가: 뭔소리여. 법정근로시간이 정해져 있는데. 너는 나랑 자유롭고 평등한 조건 하에서 고용계약서에 싸인했던거 아니여? 주당 40시간 노동은 내 권리라고!

노동자: 자자. 흥분하지 말고 차분히 내 말좀 들어봐. 내가 월급을 받으면 그걸로 생활에 필요한 사용가치들을 구매한단 말이야. 저기 가치 말고 사용가치라는 것도 있어요. 버스도 타야되고, 하루 세끼 먹어야 되고, 가끔 외식도 하고, 한 달에 한번은 영화도 먹고 술도 마시고. 인문학 강의도 듣고. 이걸 다 생산하는데 시간이 이제 절반만 필요하다니까? 굳이 내가 계속 40시간을 일해야 할 이유가 없잖아. 내가 뭘 더 달라는게 아니잖아.

자본가: 나는 사용가치 같은 거 먼지 몰라도 지금까지 잘 살았고, 앞으로도 그런 것에 관심둘 생각 전혀 없음. 그리고 40시간은 너희들 대표자가 국회에서 정한거야. 왜 이제 와서 딴소리여.

노동자: 아놔. 내가 그동안 굳이 얘기를 안했는데, 내 노동시간이 필요노동시간과 잉여노동시간으로 구분되어 있는 거 다 알고 있다고. 너한테 중요한 건 어차피 비율 아니야? 필요노동시간 절반으로 줄었으니까 공평하게 잉여노동시간도 절반으로 줄이자. 내가 착취 없애라고 까지는 안할게.

자본가: 웃기고 있네. 너네는 무조건 40시간 일해야 돼. 노동시간 줄일 거면 내가 미쳤다고 기술개발하냐? 나도 다 살자고 이러는거야. 다른 자본가들 다 난리라고. 옆 공장은 생산성이 두배 반이나 올랐어. 걔네가 덤핑하면 나 쫄딱 망한다.

노동자: 정말 이해가 안되네. 너네 전국경제인연합회랑 한국경영자총협회에 모여서 뭐하냐? 같이 모여서 합의를 해라. 합의를. 비용 갹출해서 기술개발 같이 하면 되지 서로 피곤하게 뭐하는 짓들이여.

자본가: 허허. 니가 잘 모르나본데 다들 금메달 딸 각오로 피터지게 노력해야 되는거야. 그래야 사회 전체적으로 기술수준도 높아지고 모두들 부자가 될 수 있다고. 보이지 않는 손인가 발인가가 다 알아서 한다고. 이게 내 철학이야 철학.

노동자: 다시 차분히 생각해봐. 우리가 계속 40시간 씩 일하면 생산량이 두배로 늘어날 거 아니냐, 생산성이 두 배로 늘어났으니까. 그지? 우리들 몫 빼고 남는 분량이 이제 예전에 비하면 세배야 세배. 이거 어디다 팔거야. 사용가치 이거 만만한게 보면 안된다. 그러다가 재고 쌓이고 은행빚 못갚고 공황오고 이런거 아니여? 무턱대고 너무 많이 생산하면 다 망한다고.

자본가: …

노동자: 음… 니가 이해도 못하는 것같고 또 욕심 있는거 다 아니까 우리가 통크게 양보할게. 계속 40시간씩 일할테니까 우리 몫을 두 배로 올려줘. 비율 그래도 유지하자. 그러면 우리가 저금 안하고 공장 물건 아낌없이 사 줄테니까. 재고 쌓이면 서로 골치 아프잖아. 그리고 니네 신고전파 경제학인가 뭔가 그거 생산성 두배 오르면 임금도 두배로 올라야 된다며. 그래야 균형인가 뭔가 아마 다시 성립될걸. 그거 되게 중요하다. 그러니까 학교에서 배운대로 해. 노동시간 안 줄일려면 대신 월급 올려. 상생하자.

자본가: 허허. 경제학 같은 소리하고 있네. 그런 건 교수님들이나 하는 얘기고 우리는 그냥 본능 따라 살면서 가끔 호탕하게 웃어주면 끝이야. 그리고 니네가 사주긴 뭘 사줘 이것들아. 우리나라 무역입국한거 모르남? 상사맨들이 외국에 내다 팔면되지.

노동자: …

자본가: 그리고 이놈들이. 생각해 보니까 열이 확 오르네. 이제 기계 들여와서 니네 기술이나 경험도 별로 필요 없거든! 외국 사람들 중에 니네 월급 반만 줘도 일한다는 애들 널렸어. 걔네 며칠 빡쎄게 뺑뺑이 돌린다음에 현장에 투입하면 되는데 어디서 개소리야. 그렇지 않아도 밤중에 기계 놀리는 거 아까워 죽겠는데. 이것들이 지금까지 기술 좀 있다고 뻣뻣하게 나와서 스트레스 받았는데.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로 안다더니 딱 그 짝이구만. 어디서 재료 나부랭이가 인간 행세야. 너네 이제 필요 없으니까 셋 셀 동안에 꺼져라. 아쉬우면 밤에 나와서 일하던가.

(132) 경제학적 설명과 역사적 요소

수학자와 기계학자는 – 약간의 영국 경제학자들도 그런 말을 모방하고 있지만 – 도구는 단순한 기계이고, 기계는 복잡한 도구라고 설명하고 있다 … 그러나 경제학적 입장에서는 그러한 설명은 아무 소용이 없다. 왜냐하면, 그 설명에는 역사적 요소가 빠져 있기 때문이다 – 자본론 1권 15장, 500; MEW 23, 492

어떤 설명이 경제학적 의의를 갖기 위해서는 역사적 요소를 포함해야 한다는 마르크스의 주장은 이상하게 들린다. (상품관계에 바탕을 둔) 경제학적 설명이 일반적으로 질적 차이를 사상하고 모든 것을 수치화하는 반면, 역사적 설명은 연속성보다는 질적 변화와 구분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경제학적 설명은 역사적 요소를 포함해야 하기는 커녕 오히려 배척해야 하는 것 같다.

이것은 경제를 고유한 논리를 갖는 하나의 독자적이고 자립적인 영역으로 이해하는 관점에서 출발한다. 이에 따르면 경제적 논리는 수치화하는 논리, 효율화하는 논리, 개별성과 사익을 강조하는 논리이며, 경제적 논리가 지배하는 사회의 영역이 바로 경제다. 사회는 필연적으로 경제의 영역과 비경제의 영역으로 분할되며, 경제적 논리는 비경제적 논리와 대립하고 경쟁한다. 여기서 공세를 취하는 것은 물론 경제다. 경제영역은 비경제영역을 하나하나 복속해 나가고 (민영화, 규제완화, 자유무역협정), 경제논리로 비경제영역의 작동원리를 해명하는 방식으로 계몽을 시도하며 (인적자본론, 조폭 경제학), 그것이 어느 정도 한계에 도달한 이후에는 비경제영역을 경제논리의 산물인 것처럼 이론화하여 적군을 아군으로 만드는 (신제도주의 경제학) 정신승리의 단계에까지 나아간다.

경제의 가열찬 공세는 그 한계를 모른다. 고리타분하고 비효율적이며 현상유지에 급급한 비경제의 영역이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의 경제의 투쟁은 계속된다. 이러한 세계관에 역사의 자리가 있다면 그것은 GDP로 표현되는 ‘양’의 역사 뿐이다. 기계와 도구 사이의 허다한 질적 차이는 ‘양’의 용광로 속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만다.

마르크스의 경우에는 경제적 논리와 비경제적 논리가 외적으로 대립하는 대신 내적 (대립 속의) 통일을 이루고 있다. 우선 종적으로 경제는 역사적으로 특수한 사회적 지배관계(즉, 비경제)의 존재양식이다. 횡적으로는 공공부문, 가정 등과 같은 비경제영역은 경제영역과 마찬가지로 이 역사적으로 특수한 사회적 지배관계의 원활한 재생산을 위한 도구로서 기능한다. 그래서 경제영역의 무차별적 확장보다는 경제영역과 비경제영역 사이의 적절한 분할선을 찾아내려는 노력이 더 중요하다. 우리는 이 사실을 경제위기를 통해 재확인한다.

그런 의미에서 마르크스의 “경제학적 입장”에 입각한 설명에서는 역사적 요소가 빠질 수 없다. 첫째, “경제학적 입장” 그 자체의 역사성의 측면에서 그렇다. 석기시대의 도구에 대한 경제학적 설명과 기계제 대공업 시대의 기계에 대한 경제학적 설명은 근본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는데, 설명의 틀을 제공하는 경제학 자체가 다르기 때문이다. 영원불멸의 경제학적 입장 같은 것은 없다. 둘째, 비슷한 맥락이지만, 경제의 본질에 해당하는 사회관계가 끊임없이 변화하기 때문이다. 도구를 사용하는 매뉴팩쳐시대의 자본주의가 대표하는 사회관계와 기계를 사용하는 대공업시대의 자본주의가 대표하는 사회관계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달리 표현하면 도구를 사용하는 생산에서 기계를 사용하는 생산으로의 이행은 사회관계의 변화를 반영하는 것이며 (즉, 자본에 대한 노동의 형식적 종속에서 실질적 종속으로의 변화), 동시에 이러한 물적 생산조건의 변화 없는 사회관계의 변화란 있을 수 없다. 경제학적 설명의 대상이 역사적 변화의 산물인 이상, 제대로된 경제학적 설명은 사회관계의 변화 – 즉 역사적 요소 – 를 반영하지 않을 수 없다.

기계와 도구의 차이에 대한 경제학적인 설명은 보통 기계가 도구에 비해 더 높은 노동생산성을 가져다준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류의 설명은 기계와 도구를 동질화하는 것에서 출발하므로 애초에 글러먹었다 – 기계는 기껏해야 고도화된 혹은 배수화된 도구로 전락할 뿐이다. 진정한 경제학적 설명은 기계와 도구가 각각 표현하는 사회관계들의 차이, 이들 사이의 역사적 이행에 주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