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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소득, 청년수당, 청년배당 — 정부가 더 유능해지는 게 중요

1. 나는 주부나 학생에게 임금 또는 그 어떤 사회적 수당을 줘야 한다는 생각—요샌 이게 ‘기본소득론’이다—이 그 자체로는 딱히 ‘진보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임금이 노동자의 생계비이고, 그것이 직접 자본에 고용되지 않은 가족들(주부, 자녀 등)의 생계까지 포함하는 것이라면, 직접적으로 명시되지만 않았을 뿐 애초 임금 개념에 주부나 자녀에 대한 수당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즉 그동안 ‘비공식 영역’에 대한 지불이 이루어지지 않은 게 아니다.1 (물론 주부 등의 기여를 ‘직접적으로 사회적으로 인식한다’라는 점에서 일정한 진보성이 있다는 것은 인정한다. 하지만 그 의의는 흔히 생각하는 것만큼 크다고 보진 않는다.)

2. 그런데도 요즘 특히나 그와 같은 수당들이 강조되는 까닭은, 한마디로 고용이 불안해지고 임금이 줄었기 때문이다. 물론 역사적으로 보면, 이러한 임금 저하는 국가의 기능 확대에 의해 일정 정도 보완되거나 심지어 상쇄되고도 남았다. 그러나 이른바 ‘신자유주의’ 기간에 국가 기능이 퇴보하면서, 세계화 진전에 따라 인구구성이 다변화하면서, 가족의 형태가 다양해질 뿐 아니라, 가장 중요하게는 자본 수익성이 떨어지면서, 가계들의 재생산이 위태로워진 것이다.

3. 이러한 사태에 대응하는 방식은 다양할 수 있다. 임금을 전처럼 올리자고 할 수도 있고, 국가가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할 수도 있다. 기본소득은 그런 여러 해법들 중 하나.. 내가 보기에는 우리 같이 발전의 여지가 아직 많은 나라에 있어서는 임시방편 성격에 지나지 않는 하나의 해법(미봉책)일 뿐이다. 성남시가 하는 ‘청년배당’이 그 예다. 적어도 현재 시점에서 그것은, ‘얘들아 미안하다. 국가가 무능한데 지방정부 차원에선 어쩔 수가 없구나. 이거라도 받고 기죽지 말고 다니렴’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4. 이렇게 보면, 서울시의 ‘청년수당’은 정말 이상한(?) 정책이다. 겉보기엔 청년배당과 거의 같지만, 그 취지가 완전히 다르다. 서울시에 따르면 청년수당은 고용정책의 일환이다. 즉 ‘부모님 임금도 줄고, 국가가 해주는 것도 없으니, 이거라도 받아서 생계에 보태쓰라’는 돈이 아니다. 그것은 일종의 연구용역비 같은 것이다. (실제로 활동계획서를 내고 심사를 통과해야 받을 수 있다.) 국가 입장에선 ‘소득이전’이 아니라 ‘비용지출’이다. 연구용역비로 빵 사먹으면 안 된다. 사 먹으려면 그것이 연구의 일환(이를테면 회의)임을 증빙해야 한다.

그러면 이런 돈을 왜 청년에게 주나. 일자리창출, 노동시장 효율화, 고용주 지원 등 기존의 고용정책들이 다 망했기 때문이다. 서울시 등에서는 이런저런 기존의 일자리정책들을 살펴보니 효과가 별로 없으므로 차라리 애들한테 돈을 주는 게 낫겠다는 것이다. 글쎄..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또한, 우리 같이 발전의 여지가 많은 나라에선, 궁극적인 해법이 아니다. 정부가 더 유능해지는 게 훨씬 중요하다.

5(곁다리). 언젠가 박원순 시장은 청년수당 받아서 술도 사먹을 수 있는 것 아니냐는 발언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과연 박시장다운 인간미 넘치는 발언이지만, 이것은 위 4에 엄밀히 따르면 경솔한 표현이다. 그걸로 별일없이 술이나 사마셔? 그랬다간 비용회수에 들어가야 하는거다. 기업이 고용지원금으로 그랬다면 어쩔건가? 그러나 나는 박시장의 표현이 잘못되었다기보다는, 오히려 청년수당을 고용정책으로 밀어붙이는 것 자체가 넌센스라고 본다. 물론 현실적으로야 중앙정부(복지부)와의 다툼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지만 말이다.


  1. 여기서 만약 누군가가, 주부에 대한 임금 비지불을 주부에 대한 착취와 동일시하면서, 후자의 문제를 들어 주부임금을 정당화하려 한다면, 나는 주부에 대한 임금 지불이 이뤄져도 여전히 착취는 발생한다고 대답하겠다.

기본소득론: 그 계급적 성격 명확히 해야 현실성도 있다

강의 때문이기도하고 또 어떤 토론회에 토론자로 초청되기도 해서, 기본소득론에 대해 좀 살펴봤다. “모두에게 기본소득을”이라는 아이디어 자체는 나쁘지 않은데, 그래서 가능만 하다면 한번 해볼만도 한 일이라고 생각은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난 이게 말이 안 된다고 본다. 일시적인 사회분위기에 밀려 설사 진짜로 실행된다고 해도 지지부진하다가 그 의도된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채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되리라고 생각한다.

이러던 차에… 이번주에 나온 주간지 {한겨레21}의 ‘1000호 기념 특대호'(2014.3.3 제1000호)에서 기본소득이 커버스토리로 다뤄지고 있는 걸 보았다. 기본소득론이 이 정도였나? 내친김에 기본소득론에 대하여 간략하게 짚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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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소득론에 대해 내가 가장 걱정하는 것은 재원마련 문제에 대해 너무 안일하게 보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은 배당이나 이자, 증권양도소득 등에 과세하고, 탄소세 등 환경세와 토지세를 걷으며, 지하경제를 양성화해 무려 180조 원이 넘는 기본소득 재원을 마련하겠다고 말한다.

그런데 여기엔 ‘어떻게?’가 없다. 그리고 이 ‘어떻게?’에는 여러 차원이 있다. 첫째, 가장 기본적으로, 위와 같은 방식의 재원마련은 결코 가능해 보이지 않는다는 거다. 배당, 이자, 증권양도소득, 토지보유 등에 과세를 한다는 것은 곧 이 사회의 고액자산가들과 자본가들에 대하여 선전포고를 한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최근 이건희 회장이 자신이 대주주로 있는 삼성전자와 삼성생명, 삼성물산 등 3개 상장 계열사로부터 총 1천79억원의 배당금을 2013회계연도에 받을 것이라는 보도가 있었다(링크). 그밖에 그의 자산은 한해에 3~4조 원씩 불어나니(링크), 결국 위와 같은 과세체계가 실행될 경우 그는 한해에 이래저래 1조 원에 육박하는 돈을 세금으로 더 내야할 수도 있다. 물론 이것은 이건희씨만의 문제가 아니며, 전체 자본가, 전체 대자산가에 대한 문제다. 이것을 어떻게 강제할 것인가? 이에 대한 실효성 있는 실행방안이 없는 한, 기본소득론은 한 마디로 공염불인 것이다. [사정이 이러한 한에서, ‘기본소득은 이건희에게도 주자는 것이므로 보편적이다’라는 주장은 하나마나한 것이다. 뭐가 보편적인가? 1조 원 뜯어가고 360만 원 주는 건데..]

둘째, 위 사항은 기본소득 문제란 결국 계급이슈임을 드러내준다. 이건희씨에게 1조원을 내도록 만약 강제할 수 있다면, 그것은 결국 그와 직접적인 이해관계를 마주하고 있는 사람들, 즉 노동자들의 단결된 힘으로써 강제될 수 있을 따름이다. 여기에 각종 사회세력들의 전방위적인 압박이 양념으로 필요할 것이다. 특히 현재와 같이 노동자 세력이 약화돼 있는 상황에서는 더더욱 그러하다. 사실 ‘노동자 중심성’, ‘노자관계 중심성’이라는 말의 경제적 의미도 바로 이거다. 적-녹-보 연대, 물론 중요하지만, ‘녹’이나 ‘보’에서는 ‘돈’이 안 나온다.

그런데 기본소득이 계급이슈라는 것은, 이를 위한 재원마련 문제에 대해서도 일정 정도 함의를 준다. 즉 현재 기본소득론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그 재원마련을 다양한 세목을 신설해서 하기보다는 (근로)소득세를 더 걷어서 하는 것이 더 현실적이고 말이 된다는 얘기다. 물론 이를 위해선 임금인상이 선행되어야 하며, 오로지 그럴 때에만 소득세 인상이, 그리고 나아가 기본소득이 의미를 지닐 수 있다. 그런데 이번 {한겨레21}에 나온 재원마련안을 보니 기본소득론자들도 종합소득세(근로소득 포함)에 50%의 기본소득세를 부과해 27조 원의 재원을 마련하겠다고 했는데, 이들은 이런 얘기를 하면서도 임금인상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다. 그리고 그러한 임금인상을 위한 계급투쟁의 당위성도 인정하지 않는다. 즉 이러한 증세 문제를 계급이슈로 보지 않는다는 뜻이다. 바로 이런 대목에서, 기본소득론이 얼마나 현재 운동진영의 퇴행적이고 패배주의적인 분위기를 반영하는가가 드러난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데 이는 기본소득론만의 문제는 아니다. 복지국가 주장하는 대부분의 논의들이 그렇다. 그들은 오로지 ‘시민의 자발성’만을 바라볼 뿐이며, 그러한 시민들이 한데모여 소리지르면 자본가들이 알아서 돈을 내줄 줄 안다.]

셋째, 현재와 같은 기본소득 재원마련안은 경제학과 세제에 대한 심대한 몰이해에 기반해 있다. 기본적으로 없던 세금이 부과되면 비용이 증가하거나 가격이 높아져, 기존과 같은 물량보다 적게 생산되거나 소비된다. 나는 이 문제를 ‘지하경제 양성화’와 관련해 풀어낸 적이 있다(링크). 요컨대, 지하경제 양성화란 이를테면 ‘현금가 임플란트’가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하고, 그에 따라 임플란트 가격이 모두 ‘카드가’로 되어 임플란트 소비량이 현저히 줄어들 수 있다는 얘기다. 그래서 이러한 효과를 고려하지 않은 ‘지하경제 양성화의 세수효과’는 크게 과장된 거란 말씀이며, 또한 여기서도 임금인상 없는 지하경제 양성화는 치과의사에게만 해로운 게 아니라 일반 소비자(=노동자)에게도 해로우며, 그런 의미에서 지하경제 양성화조차도 계급이슈란 말씀이다.

뿐만 아니다. 기본소득론자들은 이를테면 환경세를 대대적으로 걷겠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러한 ‘목적세’적인 성격의 세금을 걷어서 환경이 아닌 ‘기본소득’에 쓰겠다? 이것은 이를테면 박근혜 정부가 기초노령연금을 국민연금에 연계시키자, 나아가 국민연금 기금을 기초노령연금 재원으로 삼자고 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사실 탄소세 등 환경세를 걷는 것 자체는 어려운 일이 아니다. 점점 더 현실성 있게 다가오고 있다. 다만 그것은 시간문제인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왜 그럴까? 다름아니라 시민들의 환경문제에 대한 인식이 점점 높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와 동시에 자본이 점점 ‘환경산업’에 관심을 보여가고 있기 때문이다. 무슨 말이냐면, 현재의 추세가 지속돼 환경세를 실제로 거둘 수 있게 된다면 이는 환경에 대한 대중의 관심과 우려가 그만큼 커졌음을 방증하는 것이며, 따라서 이런 상황에서 환경보호를 명목으로 거둬들인 돈 30~40조 원을 환경보호가 아닌 다른 곳에 쓰기가 매우 어려우리란 것이다. 가장 중요하게는 자본이 가만 있지를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환경이 그렇게 소중한 가치로 인정받고 자본도 따라서 산업재편 노력을 한다면, 환경세로 거둔 재원은 환경보호에 앞장 선 자본에 대한 ‘상금’으로 쓰여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실제로 그것이 어떻게 쓰일 것인지는—즉 ‘자본을 위한 환경’에 쓰일지 ‘대중을 위한 환경’에 쓰일지는—실제 현실에서 각종 투쟁과 갈등의 결과로서만 결정될 것이다. 어쨌든 여기에서도 다시 한 번, 심지어 환경세를 걷는 문제조차도 계급이슈임이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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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정이 이러한데도, 기본소득론의 곳곳에는 그것이 계급이슈임을 애써 감추려는 의지가, 심지어 ‘계급’에 대한 적대까지도 뭍어있다. 이를테면 이들은 ‘소득은 노동에 대한 대가가 아니다’라면서(그런데 이 말은 마르크스식 정치경제학의 견지에서 봐도 맞는 말이긴 하다. 소득/임금은 노동에 대한 대가가 아니라 노동력 재생산비용이다),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노동’은 아니지만 사회적으로 유용하거나 개인의 자아실현과 관련 있는 다양한 활동들을 증진하는 데 기본소득이 도움이 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이것은 오히려 한국사회에서 임노동이 그만큼 덜 발달했음을 보여줄 따름이다. 인디음악인이나 평론가, 각종 ‘예술행위’ 종사자들이 기본소득의 주된 수혜자들로 광고되지만, 실상 이들 중 상당수는 선진 자본주의 나라들에선 ‘버젓한 직업인’으로 존재한다. 한국에서 그들이 먹고살기 어려운 것은 그들이 ‘임노동화’되지 않아서이거나 자본이 그들을 위한 재원을 내놓지 않기 때문이다. 거꾸로, 자본이 그들 삶의 재생산을 위한 재원을 내놓지 않는 것은 그들이 자본의 재생산에 기여하지 않는다고 보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자본의 관점은 사회 전체의 관점으로 위장돼 일반 대중의 의식을 규정한다. 즉 ‘대중은 평론가란 쓸데없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라는 거다!

결국 (기본소득론과 같이 현체제를 인정하는 한) 평론가들의 사회적 유용성이 인정받는 거의 유일한 길은, 그들이 자본의 재생산에 기여함을 보여주는 것 외에는 없다. 물론 그들은 이미 지금도 자본의 재생산에 기여하고 있을 것이다. 따라서 문제는 자본으로 하여금 이를 ‘인정’하고 그들의 삶의 재생산을 위한 재원을 내놓도록 하는 것인데, 이를 어떻게 강제할 수 있겠는가? 노동자들의 단결된 힘 외에 그런 수단이 있는가? 단순히 말하면, [임금인상→잉여소득의 소비처 필요→평론 소비→평론가 고용시장 발달→평론가 임금지급 정례화]같은 식이다. 이렇게 평론은 사회적으로 유용한 직종이 되며, 만약 이랬는데도 제대로 먹고살기 어려운 평론가가 있다면 그들에게 기본소득(이 됐든 실업수당이 됐든)을 주면 된다. [이번 {한겨레21} 기사에서도 나타나듯, 기본소득론자들과 (보편적)복지론자들은 서로 싸운다. 그런데 위와 같이 기본소득의 ‘잔여적’인 성격이 명확해지면 둘의 차이는 그야말로 별 게 아닌 것으로 드러날 것이다.]

그런데 재밌는 점은, 기본소득도 위의 임금인상과 비슷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요컨대 위 연쇄의 ‘임금인상’ 자리에 ‘기본소득 지급’만 넣으면 된다. 이것은 물론 기본소득에 대한 색다른 해석이다. 왜냐하면 기본소득론자들은 평론가들에게 지급되는 기본소득만을 언급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와 같이, 즉 평론이 임노동의 영역에 매우 불완전하게 편입되고 있는 한국에서와 같은 미발달한 자본주의 하에서 기본소득은 자본주의(적 사회관계)를 가일층적으로 발전시키는 역할도 한다. 이를테면 이번 {한겨레21} 특집에서도, 기본소득이 ‘배짱이’만 늘릴 거라는 추측을 반박하면서 다음과 같은 사례를 언급한다.

실제로도 배짱이는 늘지 않았다. 2008~2009년 아프리카 나미비아의 한 가난한 마을에서 주민 930명에게 월 100나미비아달러(약 1만5천원)를 아무 조건 없이 지급했더니, 실업률이 1년 새 15%포인트 떨어졌다. (44쪽)

무엇보다 장소가 미국이나 영국이 아니라 후발국인 나미비아라는 것이 중요하다. 위 사례는 ‘기본소득이 배짱이를 늘리지 않았음’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그런데 나는 이것이 왜 기본소득론자 입장에서 ‘장점’이어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그들은 기본소득을 ‘대안’으로 삼고있는데, 그렇다면 기본소득이 자본주의가 인정하지 않는 ‘배짱이’를 증식시켜야 하는 것이 아닌가?], ‘기본소득은 자본주의적 관계의 진전을 촉진함’을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이렇게 보면, 좀 더 일반적으로, 기본소득이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대안이라는 의의도 크게 퇴색되지 않을 수 없다.

핵심은 ‘권리’다. 부양의무자, 자산 등을 심사할 필요 없이 무조건적으로 지급하는 방식은, 선별적 복지에서 전면적인 보편복지로의 패러다임 전환을 뜻한다. 또 기본소득은 노동과 소득을 분리시킨다. 소득은 더 이상 노동의 대가가 아니게 된다. (44쪽)

여기서 보듯, 기본소득의 ‘대안적 성격’은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음미되고 있다. 노동-소득연계의 분리 문제는 위에서 다뤘으니 생략하고[앞서 평론가의 예에서 보듯, 기본소득론이 노동-소득 연계를 초월한다는 그 옹호자들의 주장은 별 근거없는 것이다], ‘무조건성’에 대해 마저 보자. 이것은 의외로 기본소득론자들이 기본소득의 우월함을 주장하기 위해 즐겨쓰는 근거인데, 내가 보기엔 정말 너무도 터무니없는 주장이다. 왜냐하면 기본소득 지급단계에서 ‘무심사’, ‘무조건성’은 그 이전단계에서 부양의무자 존재여부, 자산정도, 소득수준 등에 대한 면밀한 정보의 수집과 심사를 반드시 전제하기 때문이다. 앞서 말했듯이, ‘이건희에게도 기본소득을’, ‘이건희 손자에게도 무상급식을’이라는 슬로건은 오로지 ‘이건희에게서 1조 원의 세금을’ 위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이게 뭔 소리냐고? 좀 더 현실적으로 말하면 이렇다: ‘연봉1억원 의사와 연봉5백만원 활동가에게 동등한 기본소득을’은, ‘전자에게 세금 5천만원, 후자에겐 세금 0원을’ 위에서만 가능하단 말씀이다. 이런 상황에서 ‘보편성’이라는 것이 왜 그렇게 내세울 만한 장점이 되는지 잘 모르겠다. 세상사가 그리 간단친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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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해보자. 기본소득론의 매력은 그것이 현재 한국 자본주의가 직면하고 있는 다양한 문제들을 그야말로 ‘한 큐에’ 해결해주는 것처럼 보인다는 데서 나오는 것 같다. 그런 점에서 나는, 기본소득론이 현재와 같이 좌파운동진영이 파편화된 상황에서는 다양한 세력들을 모아내고 좀 더 활발한 논의의 장을 여는 데 적지 않게 기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이 가진 치명적인 약점도 바로 그러한 ‘보편성’에서 나온다. 우리가 정말로 현재의 위기를 타개하고자 한다면, 기본소득론이란 비현실적이거나 퇴행적인 것임을 인정해야만 한다. 그보다 우리에겐 현대 자본주의의 작동원리에 좀 더 깊이 천착하는 대안이 필요하다. 현재 그러한 대안은 그 무엇보다 노동–자본 간의 계급모순에 대한 심각한 인식에 기반을 둔 것이어야만 한다. 간단히 말해 그것은 가장 직접적으로는 ‘임금인상’을 가져올 계급투쟁의 전면화와 첨예화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끝)

나를 실망시키지 않는 그 분: 채만수 (on 기본소득)


채만수 선생의 글을 좋아한다. 이것은 그의 매우 독특한 “문체” 때문만은 아니다. 내용적으로 보더라도, 구체적인 사항들에서는 동의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지만, 총론적으로는 거의 언제나 그가 옳은 입장에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물론 그의 글을 읽는 데는 바로 그 독특한 문체에서 오는 재미를 빼놓을 수 없다. 예전엔 그의 글을 읽노라면, 어설프게 마르크스를 흉내내는 것 같단 생각이 많이 들었는데, 요새는 그 경지가 단순한 “흉내”를 넘어선 것 같다. 아마도 그도 나도 그만큼 변화하고 (어떤 면에선) 성장했다는 뜻이리라.

그러나 나와는 달리 많은 사람들이 그의 문체를 불편하게 여기는 것 같다. 예의없고 과격하고 제멋대로라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나는 문체의 특징 때문에 많은 이들의 채만수 선생의 글들의 내용을 제대로 보지 않는 (또는 “못하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 있고, 또 바로 이 내용에 집중했을 때야말로 채만수 선생의 진정한 면모가 드러난다고 생각한다. 바로 이렇게 “내용”에 주목해서 그의 글을 읽다보면, 나는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오히려 그가 매우 온건하다는 인상을 받는다. 아마도 지금 이 글을 읽는 사람들, 이런 판단이 의외라고 여길 것이다. 그러나 난 진짜 그렇게 생각한다. 그러니까… 그가 주로 구사하는 특징적인 표현들을 그저 “표현”의 문제로 보고 그것이 자아내는 일종의 착각—그를 실제 이상으로 과격하게 드러내는 착각—효과를 걷어냈을 때 남는 그의 핵심적인 주장들만 놓고 보면, 나는 그가 예의 그 “예의없고 과격하고 제멋대로”인 글들에서 결국 하고 있는 것이란 매우 원론적인 원칙들을 확인하는 데 대체로 그치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바로 그런 점에서 그는 온건하고, 또 바로 그런 점에서 나는 그가 좀 더 나아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번에 《참세상》에 오른 그의 글도, 내가 읽기엔 그랬다(원래 이 글은 채소장이 몸담고 있는 곳의 기관지인 《정세와 노동》에 실린 것이다). 거기 달린 덧글들을 보니, 온통 그의 글의 내용보다는 그 독특한, 좀 더 정확히는 싸가지없고 과격하며 그저 남을 조롱하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 같은 그 문체! 바로 그 문체에 대한 비난만이 난무한다. 그러나 이 긴 글에서 결국 그가 내놓은 주장은 대체로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을 것 같다.

기본소득 주장은 분배문제만을 건드리고 있을 뿐이며, 이는 마르크스의 기본 입장에 정면으로 배치된다. 자본주의 경제에서 분배란 생산과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엮여있음을 제대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생산의 문제를 동시에 제기하지 않는 분배에의 문제제기란 (소)부르주아적 공염불에 지나지 않는다. (이건 인용이 아니라 내 요약이다.)


어떤 이들은 위와 같은 당연한 얘길 하려고 그렇게 쌍욕을 아끼지 않았느냐고 채소장을 비난하겠지만, 채소장 입장에선 위와 같은 당연한 “기본”조차 잊고 있는 그 기본소득 논자들한테야말로 어떤 욕을 퍼붓더라도 성이 차지 않을 것이다. 글에서 직접 조롱당한 사람들은 기분이 나쁘겠지만, 분명 채소장의 일갈에는 경청할 부분이 적지 않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대목이 그 중 하나다.

그런데 서유럽과 북유럽의 저 소위 사회민주의의 체제는 과연, 저들이 암묵 중에 상정하는 것처럼, 탁상의 산물로서 그것을 획득하려는 운동 속에서, 그러한 운동의 성과로서 형성되고 발전되어 온 것이던가? 결코 아니지 않은가?

저들 소위 사회민주주의 체제는 분명 그 사회의 노동자계급이 사회민주주의적 복지제도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본주의를 타도하고 사회주의를 건설하려고 혁명적으로 진출한 결과이며, 노동자들이 그렇게 혁명적으로 진출하는 조건 속에서 자본주의를 지키기 위해 독점자본가계급이 어쩔 수 없이 후퇴한 결과일 뿐이다. 1930년대 대공황과 제2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그리고 특히, 1930년대에는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전반적 위기와는 정반대로 승승장구했고, 제2차 대전기에는 나찌 독일의 침략과 파괴ㆍ살육에 대항하여 2000만 명 이상의 희생을 치르는 대전쟁을 겪으면서도 꾸준히 성장ㆍ발전하던 사회주의 쏘련을 보면서, 그 사회의 노동자계급이 혁명적으로 진출한 결과인 것이다. 바로 자본주의를 타도하고 사회주의를 건설하려는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진출, 그리고 그러한 혁명적 진출을 자극한 사회주의 쏘련의 존재와 그 발전이야말로 저들 소위 사회민주주의 체제가 형성되게 된 원인이자 배경이었던 것이다.


끝으로 채소장의 문체에 대해 조금 덧붙이자면… 한번 슥 보면 눈치챌 수 있듯이 그의 문체는 마르크스의 그것으로부터 많은 영감을 얻어 만들어진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재밌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마르크스의 그 문체로부터는 통쾌함을 느끼고 그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지만 채소장의 그것으로부터는 불쾌함만을 느낀다는 점이다. 이에 대해 나는, 그들이 좀 더 넓은 마음을 가졌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어차피 채소장이 자신을 욕하는 것도 아니잖은가?

말하자면 채소장은 (그에겐 조금 실례가 되는 표현인지도 모르지만) “너훈아” 같은 사람이다. 보통은 “너훈아”한테, “나훈아”를 따라한다는 이유로 뭐라 하지는 않지 않은가? “너훈아”를 보고 쉽게 볼 수 없는 “나훈아”를 떠올리며 흐뭇해하듯, 우리는 채만수를 보며 마르크스와 그의 조롱대상들을 함께 떠올리며 킥킥대면 된다. 그러나 조금 더 안목이 있는 사람이라면, “나훈아”를 따라하면서도 여전히 “너훈아”도 자기만의 색깔을 가지고 있을 것임을 눈치채고 또 그것을 그 자체로 음미할 줄 알 것이듯이, 채만수에게서도 그 “마르크스적 조롱체”의 뒤에 깃들어 있는 핵심을 읽어내고 또 그것을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공정하고 비판적으로 판단하는 것은 다름아닌 독자들의 지혜의 깊이에 달려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