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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소득론: 그 계급적 성격 명확히 해야 현실성도 있다

강의 때문이기도하고 또 어떤 토론회에 토론자로 초청되기도 해서, 기본소득론에 대해 좀 살펴봤다. “모두에게 기본소득을”이라는 아이디어 자체는 나쁘지 않은데, 그래서 가능만 하다면 한번 해볼만도 한 일이라고 생각은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난 이게 말이 안 된다고 본다. 일시적인 사회분위기에 밀려 설사 진짜로 실행된다고 해도 지지부진하다가 그 의도된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채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되리라고 생각한다.

이러던 차에… 이번주에 나온 주간지 {한겨레21}의 ‘1000호 기념 특대호'(2014.3.3 제1000호)에서 기본소득이 커버스토리로 다뤄지고 있는 걸 보았다. 기본소득론이 이 정도였나? 내친김에 기본소득론에 대하여 간략하게 짚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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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소득론에 대해 내가 가장 걱정하는 것은 재원마련 문제에 대해 너무 안일하게 보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은 배당이나 이자, 증권양도소득 등에 과세하고, 탄소세 등 환경세와 토지세를 걷으며, 지하경제를 양성화해 무려 180조 원이 넘는 기본소득 재원을 마련하겠다고 말한다.

그런데 여기엔 ‘어떻게?’가 없다. 그리고 이 ‘어떻게?’에는 여러 차원이 있다. 첫째, 가장 기본적으로, 위와 같은 방식의 재원마련은 결코 가능해 보이지 않는다는 거다. 배당, 이자, 증권양도소득, 토지보유 등에 과세를 한다는 것은 곧 이 사회의 고액자산가들과 자본가들에 대하여 선전포고를 한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최근 이건희 회장이 자신이 대주주로 있는 삼성전자와 삼성생명, 삼성물산 등 3개 상장 계열사로부터 총 1천79억원의 배당금을 2013회계연도에 받을 것이라는 보도가 있었다(링크). 그밖에 그의 자산은 한해에 3~4조 원씩 불어나니(링크), 결국 위와 같은 과세체계가 실행될 경우 그는 한해에 이래저래 1조 원에 육박하는 돈을 세금으로 더 내야할 수도 있다. 물론 이것은 이건희씨만의 문제가 아니며, 전체 자본가, 전체 대자산가에 대한 문제다. 이것을 어떻게 강제할 것인가? 이에 대한 실효성 있는 실행방안이 없는 한, 기본소득론은 한 마디로 공염불인 것이다. [사정이 이러한 한에서, ‘기본소득은 이건희에게도 주자는 것이므로 보편적이다’라는 주장은 하나마나한 것이다. 뭐가 보편적인가? 1조 원 뜯어가고 360만 원 주는 건데..]

둘째, 위 사항은 기본소득 문제란 결국 계급이슈임을 드러내준다. 이건희씨에게 1조원을 내도록 만약 강제할 수 있다면, 그것은 결국 그와 직접적인 이해관계를 마주하고 있는 사람들, 즉 노동자들의 단결된 힘으로써 강제될 수 있을 따름이다. 여기에 각종 사회세력들의 전방위적인 압박이 양념으로 필요할 것이다. 특히 현재와 같이 노동자 세력이 약화돼 있는 상황에서는 더더욱 그러하다. 사실 ‘노동자 중심성’, ‘노자관계 중심성’이라는 말의 경제적 의미도 바로 이거다. 적-녹-보 연대, 물론 중요하지만, ‘녹’이나 ‘보’에서는 ‘돈’이 안 나온다.

그런데 기본소득이 계급이슈라는 것은, 이를 위한 재원마련 문제에 대해서도 일정 정도 함의를 준다. 즉 현재 기본소득론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그 재원마련을 다양한 세목을 신설해서 하기보다는 (근로)소득세를 더 걷어서 하는 것이 더 현실적이고 말이 된다는 얘기다. 물론 이를 위해선 임금인상이 선행되어야 하며, 오로지 그럴 때에만 소득세 인상이, 그리고 나아가 기본소득이 의미를 지닐 수 있다. 그런데 이번 {한겨레21}에 나온 재원마련안을 보니 기본소득론자들도 종합소득세(근로소득 포함)에 50%의 기본소득세를 부과해 27조 원의 재원을 마련하겠다고 했는데, 이들은 이런 얘기를 하면서도 임금인상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다. 그리고 그러한 임금인상을 위한 계급투쟁의 당위성도 인정하지 않는다. 즉 이러한 증세 문제를 계급이슈로 보지 않는다는 뜻이다. 바로 이런 대목에서, 기본소득론이 얼마나 현재 운동진영의 퇴행적이고 패배주의적인 분위기를 반영하는가가 드러난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데 이는 기본소득론만의 문제는 아니다. 복지국가 주장하는 대부분의 논의들이 그렇다. 그들은 오로지 ‘시민의 자발성’만을 바라볼 뿐이며, 그러한 시민들이 한데모여 소리지르면 자본가들이 알아서 돈을 내줄 줄 안다.]

셋째, 현재와 같은 기본소득 재원마련안은 경제학과 세제에 대한 심대한 몰이해에 기반해 있다. 기본적으로 없던 세금이 부과되면 비용이 증가하거나 가격이 높아져, 기존과 같은 물량보다 적게 생산되거나 소비된다. 나는 이 문제를 ‘지하경제 양성화’와 관련해 풀어낸 적이 있다(링크). 요컨대, 지하경제 양성화란 이를테면 ‘현금가 임플란트’가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하고, 그에 따라 임플란트 가격이 모두 ‘카드가’로 되어 임플란트 소비량이 현저히 줄어들 수 있다는 얘기다. 그래서 이러한 효과를 고려하지 않은 ‘지하경제 양성화의 세수효과’는 크게 과장된 거란 말씀이며, 또한 여기서도 임금인상 없는 지하경제 양성화는 치과의사에게만 해로운 게 아니라 일반 소비자(=노동자)에게도 해로우며, 그런 의미에서 지하경제 양성화조차도 계급이슈란 말씀이다.

뿐만 아니다. 기본소득론자들은 이를테면 환경세를 대대적으로 걷겠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러한 ‘목적세’적인 성격의 세금을 걷어서 환경이 아닌 ‘기본소득’에 쓰겠다? 이것은 이를테면 박근혜 정부가 기초노령연금을 국민연금에 연계시키자, 나아가 국민연금 기금을 기초노령연금 재원으로 삼자고 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사실 탄소세 등 환경세를 걷는 것 자체는 어려운 일이 아니다. 점점 더 현실성 있게 다가오고 있다. 다만 그것은 시간문제인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왜 그럴까? 다름아니라 시민들의 환경문제에 대한 인식이 점점 높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와 동시에 자본이 점점 ‘환경산업’에 관심을 보여가고 있기 때문이다. 무슨 말이냐면, 현재의 추세가 지속돼 환경세를 실제로 거둘 수 있게 된다면 이는 환경에 대한 대중의 관심과 우려가 그만큼 커졌음을 방증하는 것이며, 따라서 이런 상황에서 환경보호를 명목으로 거둬들인 돈 30~40조 원을 환경보호가 아닌 다른 곳에 쓰기가 매우 어려우리란 것이다. 가장 중요하게는 자본이 가만 있지를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환경이 그렇게 소중한 가치로 인정받고 자본도 따라서 산업재편 노력을 한다면, 환경세로 거둔 재원은 환경보호에 앞장 선 자본에 대한 ‘상금’으로 쓰여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실제로 그것이 어떻게 쓰일 것인지는—즉 ‘자본을 위한 환경’에 쓰일지 ‘대중을 위한 환경’에 쓰일지는—실제 현실에서 각종 투쟁과 갈등의 결과로서만 결정될 것이다. 어쨌든 여기에서도 다시 한 번, 심지어 환경세를 걷는 문제조차도 계급이슈임이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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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정이 이러한데도, 기본소득론의 곳곳에는 그것이 계급이슈임을 애써 감추려는 의지가, 심지어 ‘계급’에 대한 적대까지도 뭍어있다. 이를테면 이들은 ‘소득은 노동에 대한 대가가 아니다’라면서(그런데 이 말은 마르크스식 정치경제학의 견지에서 봐도 맞는 말이긴 하다. 소득/임금은 노동에 대한 대가가 아니라 노동력 재생산비용이다),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노동’은 아니지만 사회적으로 유용하거나 개인의 자아실현과 관련 있는 다양한 활동들을 증진하는 데 기본소득이 도움이 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이것은 오히려 한국사회에서 임노동이 그만큼 덜 발달했음을 보여줄 따름이다. 인디음악인이나 평론가, 각종 ‘예술행위’ 종사자들이 기본소득의 주된 수혜자들로 광고되지만, 실상 이들 중 상당수는 선진 자본주의 나라들에선 ‘버젓한 직업인’으로 존재한다. 한국에서 그들이 먹고살기 어려운 것은 그들이 ‘임노동화’되지 않아서이거나 자본이 그들을 위한 재원을 내놓지 않기 때문이다. 거꾸로, 자본이 그들 삶의 재생산을 위한 재원을 내놓지 않는 것은 그들이 자본의 재생산에 기여하지 않는다고 보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자본의 관점은 사회 전체의 관점으로 위장돼 일반 대중의 의식을 규정한다. 즉 ‘대중은 평론가란 쓸데없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라는 거다!

결국 (기본소득론과 같이 현체제를 인정하는 한) 평론가들의 사회적 유용성이 인정받는 거의 유일한 길은, 그들이 자본의 재생산에 기여함을 보여주는 것 외에는 없다. 물론 그들은 이미 지금도 자본의 재생산에 기여하고 있을 것이다. 따라서 문제는 자본으로 하여금 이를 ‘인정’하고 그들의 삶의 재생산을 위한 재원을 내놓도록 하는 것인데, 이를 어떻게 강제할 수 있겠는가? 노동자들의 단결된 힘 외에 그런 수단이 있는가? 단순히 말하면, [임금인상→잉여소득의 소비처 필요→평론 소비→평론가 고용시장 발달→평론가 임금지급 정례화]같은 식이다. 이렇게 평론은 사회적으로 유용한 직종이 되며, 만약 이랬는데도 제대로 먹고살기 어려운 평론가가 있다면 그들에게 기본소득(이 됐든 실업수당이 됐든)을 주면 된다. [이번 {한겨레21} 기사에서도 나타나듯, 기본소득론자들과 (보편적)복지론자들은 서로 싸운다. 그런데 위와 같이 기본소득의 ‘잔여적’인 성격이 명확해지면 둘의 차이는 그야말로 별 게 아닌 것으로 드러날 것이다.]

그런데 재밌는 점은, 기본소득도 위의 임금인상과 비슷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요컨대 위 연쇄의 ‘임금인상’ 자리에 ‘기본소득 지급’만 넣으면 된다. 이것은 물론 기본소득에 대한 색다른 해석이다. 왜냐하면 기본소득론자들은 평론가들에게 지급되는 기본소득만을 언급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와 같이, 즉 평론이 임노동의 영역에 매우 불완전하게 편입되고 있는 한국에서와 같은 미발달한 자본주의 하에서 기본소득은 자본주의(적 사회관계)를 가일층적으로 발전시키는 역할도 한다. 이를테면 이번 {한겨레21} 특집에서도, 기본소득이 ‘배짱이’만 늘릴 거라는 추측을 반박하면서 다음과 같은 사례를 언급한다.

실제로도 배짱이는 늘지 않았다. 2008~2009년 아프리카 나미비아의 한 가난한 마을에서 주민 930명에게 월 100나미비아달러(약 1만5천원)를 아무 조건 없이 지급했더니, 실업률이 1년 새 15%포인트 떨어졌다. (44쪽)

무엇보다 장소가 미국이나 영국이 아니라 후발국인 나미비아라는 것이 중요하다. 위 사례는 ‘기본소득이 배짱이를 늘리지 않았음’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그런데 나는 이것이 왜 기본소득론자 입장에서 ‘장점’이어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그들은 기본소득을 ‘대안’으로 삼고있는데, 그렇다면 기본소득이 자본주의가 인정하지 않는 ‘배짱이’를 증식시켜야 하는 것이 아닌가?], ‘기본소득은 자본주의적 관계의 진전을 촉진함’을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이렇게 보면, 좀 더 일반적으로, 기본소득이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대안이라는 의의도 크게 퇴색되지 않을 수 없다.

핵심은 ‘권리’다. 부양의무자, 자산 등을 심사할 필요 없이 무조건적으로 지급하는 방식은, 선별적 복지에서 전면적인 보편복지로의 패러다임 전환을 뜻한다. 또 기본소득은 노동과 소득을 분리시킨다. 소득은 더 이상 노동의 대가가 아니게 된다. (44쪽)

여기서 보듯, 기본소득의 ‘대안적 성격’은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음미되고 있다. 노동-소득연계의 분리 문제는 위에서 다뤘으니 생략하고[앞서 평론가의 예에서 보듯, 기본소득론이 노동-소득 연계를 초월한다는 그 옹호자들의 주장은 별 근거없는 것이다], ‘무조건성’에 대해 마저 보자. 이것은 의외로 기본소득론자들이 기본소득의 우월함을 주장하기 위해 즐겨쓰는 근거인데, 내가 보기엔 정말 너무도 터무니없는 주장이다. 왜냐하면 기본소득 지급단계에서 ‘무심사’, ‘무조건성’은 그 이전단계에서 부양의무자 존재여부, 자산정도, 소득수준 등에 대한 면밀한 정보의 수집과 심사를 반드시 전제하기 때문이다. 앞서 말했듯이, ‘이건희에게도 기본소득을’, ‘이건희 손자에게도 무상급식을’이라는 슬로건은 오로지 ‘이건희에게서 1조 원의 세금을’ 위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이게 뭔 소리냐고? 좀 더 현실적으로 말하면 이렇다: ‘연봉1억원 의사와 연봉5백만원 활동가에게 동등한 기본소득을’은, ‘전자에게 세금 5천만원, 후자에겐 세금 0원을’ 위에서만 가능하단 말씀이다. 이런 상황에서 ‘보편성’이라는 것이 왜 그렇게 내세울 만한 장점이 되는지 잘 모르겠다. 세상사가 그리 간단친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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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해보자. 기본소득론의 매력은 그것이 현재 한국 자본주의가 직면하고 있는 다양한 문제들을 그야말로 ‘한 큐에’ 해결해주는 것처럼 보인다는 데서 나오는 것 같다. 그런 점에서 나는, 기본소득론이 현재와 같이 좌파운동진영이 파편화된 상황에서는 다양한 세력들을 모아내고 좀 더 활발한 논의의 장을 여는 데 적지 않게 기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이 가진 치명적인 약점도 바로 그러한 ‘보편성’에서 나온다. 우리가 정말로 현재의 위기를 타개하고자 한다면, 기본소득론이란 비현실적이거나 퇴행적인 것임을 인정해야만 한다. 그보다 우리에겐 현대 자본주의의 작동원리에 좀 더 깊이 천착하는 대안이 필요하다. 현재 그러한 대안은 그 무엇보다 노동–자본 간의 계급모순에 대한 심각한 인식에 기반을 둔 것이어야만 한다. 간단히 말해 그것은 가장 직접적으로는 ‘임금인상’을 가져올 계급투쟁의 전면화와 첨예화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