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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실망시키지 않는 그 분: 채만수 (on 기본소득)


채만수 선생의 글을 좋아한다. 이것은 그의 매우 독특한 “문체” 때문만은 아니다. 내용적으로 보더라도, 구체적인 사항들에서는 동의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지만, 총론적으로는 거의 언제나 그가 옳은 입장에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물론 그의 글을 읽는 데는 바로 그 독특한 문체에서 오는 재미를 빼놓을 수 없다. 예전엔 그의 글을 읽노라면, 어설프게 마르크스를 흉내내는 것 같단 생각이 많이 들었는데, 요새는 그 경지가 단순한 “흉내”를 넘어선 것 같다. 아마도 그도 나도 그만큼 변화하고 (어떤 면에선) 성장했다는 뜻이리라.

그러나 나와는 달리 많은 사람들이 그의 문체를 불편하게 여기는 것 같다. 예의없고 과격하고 제멋대로라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나는 문체의 특징 때문에 많은 이들의 채만수 선생의 글들의 내용을 제대로 보지 않는 (또는 “못하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 있고, 또 바로 이 내용에 집중했을 때야말로 채만수 선생의 진정한 면모가 드러난다고 생각한다. 바로 이렇게 “내용”에 주목해서 그의 글을 읽다보면, 나는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오히려 그가 매우 온건하다는 인상을 받는다. 아마도 지금 이 글을 읽는 사람들, 이런 판단이 의외라고 여길 것이다. 그러나 난 진짜 그렇게 생각한다. 그러니까… 그가 주로 구사하는 특징적인 표현들을 그저 “표현”의 문제로 보고 그것이 자아내는 일종의 착각—그를 실제 이상으로 과격하게 드러내는 착각—효과를 걷어냈을 때 남는 그의 핵심적인 주장들만 놓고 보면, 나는 그가 예의 그 “예의없고 과격하고 제멋대로”인 글들에서 결국 하고 있는 것이란 매우 원론적인 원칙들을 확인하는 데 대체로 그치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바로 그런 점에서 그는 온건하고, 또 바로 그런 점에서 나는 그가 좀 더 나아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번에 《참세상》에 오른 그의 글도, 내가 읽기엔 그랬다(원래 이 글은 채소장이 몸담고 있는 곳의 기관지인 《정세와 노동》에 실린 것이다). 거기 달린 덧글들을 보니, 온통 그의 글의 내용보다는 그 독특한, 좀 더 정확히는 싸가지없고 과격하며 그저 남을 조롱하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 같은 그 문체! 바로 그 문체에 대한 비난만이 난무한다. 그러나 이 긴 글에서 결국 그가 내놓은 주장은 대체로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을 것 같다.

기본소득 주장은 분배문제만을 건드리고 있을 뿐이며, 이는 마르크스의 기본 입장에 정면으로 배치된다. 자본주의 경제에서 분배란 생산과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엮여있음을 제대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생산의 문제를 동시에 제기하지 않는 분배에의 문제제기란 (소)부르주아적 공염불에 지나지 않는다. (이건 인용이 아니라 내 요약이다.)


어떤 이들은 위와 같은 당연한 얘길 하려고 그렇게 쌍욕을 아끼지 않았느냐고 채소장을 비난하겠지만, 채소장 입장에선 위와 같은 당연한 “기본”조차 잊고 있는 그 기본소득 논자들한테야말로 어떤 욕을 퍼붓더라도 성이 차지 않을 것이다. 글에서 직접 조롱당한 사람들은 기분이 나쁘겠지만, 분명 채소장의 일갈에는 경청할 부분이 적지 않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대목이 그 중 하나다.

그런데 서유럽과 북유럽의 저 소위 사회민주의의 체제는 과연, 저들이 암묵 중에 상정하는 것처럼, 탁상의 산물로서 그것을 획득하려는 운동 속에서, 그러한 운동의 성과로서 형성되고 발전되어 온 것이던가? 결코 아니지 않은가?

저들 소위 사회민주주의 체제는 분명 그 사회의 노동자계급이 사회민주주의적 복지제도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본주의를 타도하고 사회주의를 건설하려고 혁명적으로 진출한 결과이며, 노동자들이 그렇게 혁명적으로 진출하는 조건 속에서 자본주의를 지키기 위해 독점자본가계급이 어쩔 수 없이 후퇴한 결과일 뿐이다. 1930년대 대공황과 제2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그리고 특히, 1930년대에는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전반적 위기와는 정반대로 승승장구했고, 제2차 대전기에는 나찌 독일의 침략과 파괴ㆍ살육에 대항하여 2000만 명 이상의 희생을 치르는 대전쟁을 겪으면서도 꾸준히 성장ㆍ발전하던 사회주의 쏘련을 보면서, 그 사회의 노동자계급이 혁명적으로 진출한 결과인 것이다. 바로 자본주의를 타도하고 사회주의를 건설하려는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진출, 그리고 그러한 혁명적 진출을 자극한 사회주의 쏘련의 존재와 그 발전이야말로 저들 소위 사회민주주의 체제가 형성되게 된 원인이자 배경이었던 것이다.


끝으로 채소장의 문체에 대해 조금 덧붙이자면… 한번 슥 보면 눈치챌 수 있듯이 그의 문체는 마르크스의 그것으로부터 많은 영감을 얻어 만들어진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재밌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마르크스의 그 문체로부터는 통쾌함을 느끼고 그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지만 채소장의 그것으로부터는 불쾌함만을 느낀다는 점이다. 이에 대해 나는, 그들이 좀 더 넓은 마음을 가졌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어차피 채소장이 자신을 욕하는 것도 아니잖은가?

말하자면 채소장은 (그에겐 조금 실례가 되는 표현인지도 모르지만) “너훈아” 같은 사람이다. 보통은 “너훈아”한테, “나훈아”를 따라한다는 이유로 뭐라 하지는 않지 않은가? “너훈아”를 보고 쉽게 볼 수 없는 “나훈아”를 떠올리며 흐뭇해하듯, 우리는 채만수를 보며 마르크스와 그의 조롱대상들을 함께 떠올리며 킥킥대면 된다. 그러나 조금 더 안목이 있는 사람이라면, “나훈아”를 따라하면서도 여전히 “너훈아”도 자기만의 색깔을 가지고 있을 것임을 눈치채고 또 그것을 그 자체로 음미할 줄 알 것이듯이, 채만수에게서도 그 “마르크스적 조롱체”의 뒤에 깃들어 있는 핵심을 읽어내고 또 그것을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공정하고 비판적으로 판단하는 것은 다름아닌 독자들의 지혜의 깊이에 달려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