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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 노동생산성 특집3: 서비스 산업과 노동생산성

‘생산성’은 물론 언제나 구체적 유용노동의 생산성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어떤 특수한 생산활동이 주어진 시간에 주어진 목표를 얼마나 잘 달성하는가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용노동은 그 생산성의 상승 또는 저하에 비례해서 생산물을 많거나 적게 생산한다. 이와는 반대로, 생산성의 변동은 [가치로 표현되는] 노동 그것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생산성은 구체적 유용형태의 노동의 속성이므로, 노동의 구체적 유용형태가 무시되어 버린다면 생산성은 [가치로 표현되는] 노동과 아무런 관련도 없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 자본론 1권 1장, 58, 강조 추가

1. 신고전파 경제학의 노동생산성

노동생산성은 “구체적 유용형태의 노동의 속성”이므로 사용가치와 관련된 개념이다. 예를 들어, 요리사의 노동생산성은 ‘시간 당 짜장면 10인분 요리’, 의사의 노동생산성은 ‘시간 당 5명의 환자 진료’ 등과 같은 방식으로 표현될 수 있다. 하지만 요리사의 노동생산성과 의사의 노동생산성을  직접 비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요리와 진료는 질적으로 다른 행위이기 때문이다.

신고전파 경제학의 경우에는 사용가치의 이질성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신고전파 경제학은 재화/서비스는 소비자에게 효용을 가져다주며, 이 효용은 재화/서비스의 종류와 무관하게 단일한 종류의 효용이라고 간주한다. 서로 다른 재화/서비스 사이의 객관적인 질적 차이는 인간의 뇌 속에서 (심리적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만다. 그래서 신고전파 경제학은 이질적인 상품들을 동질의 상품으로 취급하는 것에, 그리고 이질적인 노동들의 생산성을 직접적으로 비교하는 것에 대해 아무런 거리낌을 갖고 있지 않다. 신고전파 경제학의 경제성장모형에 단지 하나의 부문/아웃풋만이 존재하는 것도 같은 이유 때문이다.

그래서 신고전파 경제학의 노동생산성은 ‘시간 당 짜장면 10인 분 요리’와 ‘시간 당 5명의 환자 진료’ 라는 구체노동의 속성을 버리고, 동질의 효용이라는 매개를 거쳐 ‘시간 당 XXXXX원’, 즉 가격의 생산성으로 탈바꿈한다. 다시 말해 신고전파 경제학의 노동생산성은 노동시간 당 매출액(좀더 정확하게는 시간 당 부가가치) 그 자체다. 또한 노동생산성은 더 이상 생산의 기술적 효율성에 국한되지 않고 생산과 판매를 포괄하는 총체적 경제행위의 효율성을 보여주는 개념으로 진일보(?)한다. 마르크스의 노동가치론에서는 생산의 효율을 높여 더 많은 상품을 생산하면 노동생산성은 상승한다. 이 상품들이 팔리건 말건. 하지만 신고전파 경제학에서는 판매에 실패해 매출에 포함되지 않는 상품은 노동생산성의 계산에서 배제된다. 판매되지 않은 상품은 생산되지 않은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불황이나 경기침체 시기에 (노동가치론의) 노동생산성이 상승하더라도 (신고전파 경제학의) 노동생산성이 하락하기도 하는 이유다.

게다가 (신고전파 경제학의) 노동생산성은 사전적으로 결정되어 산출량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산출량이 결정된 후에 사후적으로 계산되는 수치다. 가령 한국경제의 노동생산성은 [실질GDP / 총취업자수] 혹은 [실질GDP / 총노동시간]을 지수화하여 표시한 것에 불과하다. GDP와 노동시간이 결정되면 자동으로 노동생산성이 결정된다. 달리 표현하면 노동생산성은 독립변수가 아니라 오히려 종속변수다. 그러니 노동생산성을 높여야 저성장을 탈피할 수 있다는 논지는 동어반복에 불과하다. 타율을 높이기 위해서는 안타를 많이 쳐야한다는 주장과 매한가지다.

2. 서비스업의 노동생산성

연합뉴스의 기사에 따르면, 한국은행 김중수 총재는 기자간담회에서 서비스업의 노동생산성을 높이는 것이 한국경제의 성장에 중요하다는 언급을 했다.

김중수 한국은행 총재가 12일 우리나라 경제의 잠재성장률이 3.8% 정도라고 밝혔다 … 김 총재는 잠재성장률과 관련, 서비스업의 생산성을 높이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제조업은 성장을 많이 하고 (성장)기여도도 높다. 서비스업의 노동생산성은 제조업의 반 이하”라면서 교육과 훈련을 통한 서비스업 생산성을 높일 것을 주문했다.

비판할 거리가 많은 언급이다. 첫째, 이 글의 주제와는 다소 어긋나지만, “금융안정에 유의”하면서 “물가안정을 도모”해야 하는 법적 책임을 갖는 국가기관의 수장이 산업정책에 대한 지침을 제시하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한국은행법은 미국의 Federal Reserve Act와는 달리 고용이나 성장과 관련된 조항이 없다). 최근의 가계부채와 부동산 시장의 흐름을 살펴보건데 지금은 금융안정에 엄청나게 유의해야 할 시기다.  둘째, 교육이나 훈련을 통해 생산성이 높아진다는 주장은 거의 완전히 잘못된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특집1 참조. 셋째, 앞서도 언급했지만 “잠재성장률과 관련, 서비스업의 생산성을 높이는 게 중요하다”는 주장은, 잠재성장률을 높이기 위해서는 (서비스업의) 잠재성장률을 높이는 것이 중요하다는 동어반복에 불과하다.

마지막으로 서비스업의 노동생산성이 제조업의 절반 이하이고 성장에 대한 기여도 낮다는는 주장 혹은 비난에 대해서 살펴보자. 이 주장은 통계치만을 놓고 보자면 분명한 사실이다.

[이 글의 모든 표의 출처: 생산성 국제비교 2011, 한국생산성본부]

이 표는 각국의 제조업 노동생산성 대비 서비스 산업군 별 노동생산성을 지수화하여 표시한 것이다 (2001 – 2009년 평균 – 모두 신고전파 경제학의 노동생산성이다). 각 산업군 별 꼴등을 빨간색으로 표시했는데, 한국은 [도소매/음식/숙박/운수], [금융/보험/부동산/사업서비스]에서는 꼴등이고, [기타서비스]에서는 간신히 꼴등을 면했으며, 서비스 업 전체를 놓고 보았을 때는 당당히(?) 꼴등이다 (물론 이것이 한국의 서비스업 노동생산성이 예를 들어 에스토니아에 비해 낮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제조업 대비 비율이 그렇다는 것).

우리나라 경제에는 왜 이러한 불균형이 존재하는 것일까? 이 문제를 상세히 논하는 것은 내 능력 밖이지만, 요식업을 중심으로 다음과 같은 가설을 제시해볼까 한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이 통계에 사용된 (신고전파 경제학) 노동생산성은 노동자 1인당 부가가치에 해당한다. 따라서 주어진 시간 동안 동일한 양의 제품을 생산하더라도 가격이 낮으면 노동생산성 역시 낮다. 우리나라의 서비스 가격은 재화의 가격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은 편이다. 통계치를 갖고 있지는 않지만 체감물가가 그렇다. 예를 들어 유럽의 물가는 전반적으로 한국에 비해 높은데 그중에서도 특히 식당음식과 교통비가 비싸다. 앉아서 먹는 식당에서는 1인당 10유로 이하의 음식을 찾아보기 어렵고, 15분 거리 택시비가 대략 20유로 정도다 (상대적으로 전자제품이나 식료품 같은 재화의 가격은 크게 비싸지 않다). 반대로 가격과 무관하게 서비스의 효율성만을 놓고 본다면 한국이 유럽에 비해 분명히 낫다. (노동가치론) 노동생산성은 한국이 유럽에 비해 분명히 더 높을 것이다. 반대로 아래 표에서 보는 것처럼 (신고전파 경제학의) 노동생산성은 (심지어 구매력 비교환율을 적용하더라도) 유럽에서 훨씬 높은데, 그것은 물가, 특히 제조업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은 서비스업의 물가 때문이 아닐까 한다.

한국의 [도소매/음식/숙박/운수] 산업의 취업자당 노동생산성은 이 표에 따르면 헝가리와 멕시코 다음으로 낮다. 노동시간당 노동생산성의 경우에는 꼴찌다.

그나마 [금융/보험/부동산/사업서비스] 부문은 나은 편이다.

그렇다면 김중수 총재의 말씀대로 서비스 산업의 (신고전파 경제학의) 노동생산성을 대폭 높이기 위해서는 물가를 높이는 정책을 도입하는 것이 가장 쉬운 방법이겠다. 물가가 높아지면 매출액과 부가가치가 높아지고 자연스럽게 노동생산성도 높아질테니까. 잘 알려져 있다시피 우리나라의 요식업, 운수업, 소매업에는 영세한 자영업자들이 많아 경쟁이 치열하고 (아마도 신고전파 경제학의 완전경쟁시장에 근접해 있을테다), 가격은 거의 한계 수준까지 떨어져 있다. 이들이 고용하는 직원들은 아마도 법률이 정하는 최저한도의 임금만을 받을 것이다. 소비자에게는 좋은 일이지만, 경쟁의 폐해가 너무 심하다. 그렇다면 자영업 중심의 서비스업에 대한 규제를 강화해서 과당경쟁이 야기하는 문제들도 해결하고 (신고전파 경제학의) 노동생산성도 높이는 건 어떨까. 신규업소 설립기준을 강화하고, 신고제를 허가제로 전환하며, 노동환경에 대한 감시를 강화하면 자연스럽게 가격이 상승하고, 덩달아 매출도 늘어나고, 노동생산성 역시 증가할 것이다.

오해하지 마시길. 진담이 조금 섞인 농담이다. 다만 서비스업의 상대적 낙후라는 진지한 문제를 야기한 역사적, 구조적 요인에 대한 언급 없이, 너무나 쉽게 노동생산성을 높이라는 허황된 처방을 제시하는 것에 어이가 없어 엉뚱한 생각이 들었을 뿐이다.

뻔한 비유를 들자면 제조업은 가난한 집의 맏아들, 자영업 중심의 서비스업은 둘째아들이라고 할 수 있다. 큰아들은 부모의 엄청난 기대와 지원 속에 공부에 열중하여 일류대학에 진학했다. 그리고 이제야 그동안 거의 방치되었던 둘째 아들에게 부모의 관심이 쏠린다. ‘네 형보기 부끄럽지도 않냐. 어떻게 너는 네 형 성적의 중간도 못가!’ 사실 둘째아들은 형님보다  더 열심히 더 오랜 시간 공부해왔다. 하지만, 기초가 약한데다 과외교습은 꿈도 꾸지 못하고 오르지 않는 성적에 절망하여 좌절과 한탄으로 하루하루를 보내다보니 성적이 제자리일 뿐이다. 심성이 착한 그는 이제와 생각하니 억울할 따름이다. 형의 대학 진학에 온 가족이 매달려 있을 때, 집안의 온갖 궂은 일을 도맡아 하면서도 형에게 도움이 되지 못하는 스스로를 자책하기까지 않았던가.

한국에서 요식업, 운수업, 소매업은 일종의 사회안전망 역할을 수행해 왔다. 한국의 실업율은 세계적으로 매우 낮은 편에 속하는데, 아마도 이런 비공식적 사회안전망 없이는 달성할 수 없었을 성과임에 분명하다. 또한 과잉공급으로 인한 치열한 경쟁은 가격의 하향안정화로 이어졌고, 따라서 경제 전체적으로 인플레이션과 임금인상의 부담 역시 어느 정도는 덜 수 있었다. 그러니 제조업과 자영업 중심의 서비스업을 동일선상에 놓고 비교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 자영업 중심 서비스업의 상대적 낙후성은 제조업의 상대적 선진성을 가능하게 한 구조적 낙후성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명백히 드러나는 것은 신고전파 경제학의 이론적 빈곤이다. 이 이론의 본질적 속성은 차이를 무시하는 파시스트적 심리학이며, 그 논리적 속성은 동어반복이고, 그 예술적 속성은 미니멀리즘이다. 결정적으로 이 이론은 그 자신의 역사를 잊은지 오래, 그 대상의 역사를 잊은지 너무도 너무도 오래.

(104) 노동생산성 특집1: 생산성 연동 임금과 신고전파 경제학의 아이러니

노동력의 가치를 저하시키기 위해서는, 노동력의 가치를 결정하는 생산물 [따라서 일상적 생활수단에 속하거나 그것을 대신할 수 있는 생산물]이 생산되는 산업부문들에서 노동생산성이 상승해야 한다. – 자본론 1권 12장, 427.

1. 사치품 생산부문의 노동생산성은 고려할 필요가 없다는 얘기다. 다이아몬드 세공노동의 생산성 상승은 – 다시 말해서 세팅된 다이아몬드 반지의 가격의 하락은 – 노동력 가치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다이아몬드 반지는 평균적 노동자의 필요생활수단에 포함되지 않기 때문이다. 음…  아니다. 우리나라 결혼 문화를 고려하면 포함될 수도 :(

어쨌든 논의의 촛점을 “노동력의 가치를 저하시키기 위해서는 … 노동생산성이 상승해야 한다”는 측면에 맞추도록 하자.

2. 노동생산성과 실질임금

(주로) 과학기술의 발전을 통해 2차 세계대전 후 자본주의 경제의 생산성이 급속도로 높아졌다는 것은 하나의 상식이다. 그렇다면 이에 발맞추어 노동력의 가치는 급속도로 저하해야 했을텐데, (물가상승을 감안한) 실질임금이 급속도로 하락했다는 얘기는 들어보지 못했다.

실제 데이터를 한번 살펴보자. 아래 그래프는 1947년부터 2012년까지의 미국의 비농업부문(non-fram business sector)의 시간 당 생산량(노동생산성)과 시간 당 실질보수(real compensation – 이하 실질임금)를 각각 1947=100으로 지수화하여 표시한 것이다. 파란선이 노동생산성, 빨간선이 실질임금이다.

아! 이럴수가. 노동생산성이 증가함에 따라 실질임금이 감소하기는 커녕 비슷한 비율로 증가한다. 게다가 1947년부터 1970년 까지 이 둘은 거의 같은 비율로 변동한 것 같다. 불행 중 다행으로 1970년 이후에는 노동생산성과 실질임금 사이에 명백한 괴리가 나타나지만, 노동생산성 증가가 실질임금의 하락을 야기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자본은 상대적 잉여가치의 생산에 단 한번도 성공한 적이 없는 것일까? 노동자들은 자본주의적 축적으로 궁핍화된 것이 아니라 부유해진 것일까? 자본론이, 그리고 마르크스가 … 설마 … 틀린 것인가?

그럴 리 없다. 이런 종류의 오해는 마르크스의 가치론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혼동, 그러니까 가치와 사용가치에 대한 혼동 때문에 기인한다. 노동자들은 가치의 측면에서는 궁핍해졌지만, 사용가치의 측면에서는 부유해졌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좀더 자세히 설명하면 이렇다.

첫째, 실질임금의 증가는 구매할 수 있는 사용가치의 증가를 의미하지만, 사용가치의 증가가 반드시 가치의 증가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가령 임금이 2011년 빵 100개에서 2012년 빵 110개로 늘어나면 (물가의 변화와 관계 없이) 실질임금은 10% 증가한 것이지만, 2011년의 빵 100개가 (1년 간의 빵노동 생산성의 변화 정도에 따라) 2012년의 빵 110개에 비해 더 많은 가치를 표현할 수도 있다. 실질임금이 증가하더라도 노동력 가치는 하락할 수 있다.

둘째, 필요생활수단 자체가 변동하면 (가령 1947년에는 자동차가 필요생활수단이 아니었지만, 1990년에는 필요생활수단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노동생산성이 상승하더라도 노동력의 가치가 하락하지 않을 수 있다. 마르크스가 “노동력의 가치를 저하시키기 위해서는 … 노동생산성이 상승해야 한다”고 얘기할 때 그는 필요생활수단이 고정되어 있음을 전제한다. 노동생산성과 임금 사이의 관계에 대한 실증연구가 아니라 자본주의적 생산이 야기하는 경향적 법칙을 밝히는데 관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셋째, 노동자들의 계급투쟁의 결과로 연간 노동시간이 점진적으로 하락해왔다. 미국의 경우 1970년부터 2010년 사이 노동자의 연간노동시간이 대략 10% 하락했다 (아쉽게도 1970년 이전의 데이터는 찾을 수 없다. 독일의 경우는 무려 30% 하락). 시간 당 실질임금은 같은 기간 40% 정도 증가했는데, 이것은 (노동시간 단축을 고려하지 않은) 총액으로서의 실질임금의 경우 이보다 낮은 30% 가량만 증가했음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시간 당 실질보수 통계는 노동자의 임금총액을 과대평가한다 (노동력 가치 역시 총액개념이다). 사족이지만, 계급투쟁은 주어진 노동력 가치 하에서 노동일의 길이를 결정한다 (여기에 대해서는 (93) 권리 대 권리와 자본론 1권 309-310 참조).

넷째, 실질보수는 노동자에게 지급되는 임금과 여러 복지혜택 이외에도 경영진에 지급되는 급여와 스톡옵션 등을 포함한다. 경영진들의 급여가 노동자들의 급여에 비해 빠른 속도로 증가했음을 고려하면, 노동자계급의 시간 당 실질임금의 증가폭은 위의 그래프보다는 완만할 것임에 틀림없다.

3. 대통령의 경제학 강의

결국 실질임금의 변화양상에 근거해서 노동력 가치를 논하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여기에대해 이렇게 장황하게 써내려나간 까닭은 (사용가치의 관점에서) 노동자들이 부유해졌으니, 노동자들이 (사실은 사용가치가 아니라 가치의 관점에서) 궁핍해진다고 주장한 마르크스의 이론이 잘못된 것이 아니냐는 인식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생산성과 임금과 노동력 가치 사이의 관계에 대한 일반적인 오해가 너무 심하기 때문이다. 가령, 우리 대통령께서는:

  • 이미 후보 시절에 자본이 아니라 “근로자[가] 노동생산성을 향상할 책임”이 있고 “노동생산성 향상을 통해 비정규직의 임금향상시켜야 한다”는 저렴한 경제이론을 주창하신 바 있다. 그분은 “미국과 일본에 비교해 한국의 노동생산성은 낮다, 기업하는 분들에게 큰 애로가 있다”고까지 지적하셨다 (기사).
  • 당선인으로 신분이 바뀐 이후에는 한발 더 나아가 “노동자들은 지금까지의 생산성이 아니라 생산성을 10~20% 올려야 한다”며 구체적인 수치를 제시하시기까지 하셨다. (기사)
  • 취임 4년 차에는 한층 원숙한 톤으로 “임금이 높으면 노동생산성도 높아야 하는데 우리는 노동생산성이 낮다”며 신고전파 경제이론을 따라가지 못하는 한국경제의 현실을 강하게 질타하셨다 (기사).

우선 노동생산성 향상의 책임이 노동자에게 있다는 주장에 대해서 살펴보자.  노동생산성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는 총요소생산성(multifactor productivity; 기술발전수준),  자본집약도(capital intensity; 노동자 1인 당 사용하는 생산수단의 양)와 노동구성(labour composition; 노동시간 당 투입된 노동의 양)이다. 여기서 노동자가 개선할 수 있는 것은 마지막 항목인 노동구성 뿐이다. 가령 노동의 숙련도와 강도가 높아지면 동일한 시간에 더 많은 노동이 지출되는 것과 동일한 효과를 가져오는데 이것을 노동구성이 증가했다고 표현한다.

미국 노동통계청의 자료에 따르면, 1987년부터 2011년 사이 미국의 민간 비농업부문 노동생산성은 2.2% 증가했다. 이중 총요소생산성 상승의 기여분과 자본집약도 상승의 기여분은 각각 0.9%이고, 나머지 0.4%만이 노동구성 증가에 기인한다. 이렇게 노동구성의 증가가 노동생산성에 미치는 영향이 상대적으로 작다는 것을 감안하면, 대통령께서는 노동자가 아니라 자본가들을 족치셔야 했다. 이런 실수는 대통령의 식견 탓만은 아니다. 우리 사회 전반에 한국 경제의 노동생산성이 선진국 경제에 비해 낮으므로, 노동자들이 더 열심히 일을 해야 한다는 혹은 나라의 문화를 바꾸어야 한다는 매우 잘못된 인식이 만연해 있다. 가령 장용성 교수가 XX일보에 기고한 [한국의 노동 생산성이 미국의 절반밖에 안 되는 이유]라는 칼럼을 보자. 그는 “한국처럼 연공서열에 의존하거나 혈연, 지연, 학연 등 능력 이외의 요인을 중요시하는 사회에서는 인적 자원의 재배치가 훨씬 더디게 되고 결국 생산성을 떨어뜨린다”는 어처구니 없는 주장을 한다. 미국 경제의 노동생산성이 높은 이유가 “인재들을 말단 자리에 계속 남겨두지 않는다 … 미국에선 일단 능력이 확인되면 빠른 시간 내에 발탁되고 승진”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아마도 그런 요인도 노동생산성에 영향을 미치기는 할 것이다. 아주 조금.

한국의 노동생산성이 낮은 가장 큰 이유는 자본가들이 연구개발 – 특히 상품화 가능한 연구개발 – 에 대한 투자에 소홀하기 때문이다. 일단 이 문제를 먼저 해결한 다음에 노동자 탓, 문화 탓을 해야 한다.

4. 신고전파 경제학의 고민 – 임금과 생산성의 괴리

다시 실질임금의 문제로 돌아가자. 대통령께서 지난 5년 간 가르쳐 주신 것처럼 신고전파 경제학은 실질임금의 상승이 노동생산성 상승과 병행하며, 노동생산성 상승을 동반하지 않는 임금 상승은 지탱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 논리를 간단히 설명하면 이렇다. 가령 현재의 한계(노동)생산성이 빵 100개라고 해보자 (신고전파 경제학은 한계생산성이 체감한다는, 그러니까 노동시간이 길어질수록 생산성이 하락한다는 전제에 기초한 이론이다). 만약 임금이 빵 95개를 살 수준에 해당한다면, 자본가는 한 시간의 노동을 더 고용할 것이다. 상품을 만들면 정해진 가격에 족족 판매되는 완전경쟁시장 유토피아에서 살아가는 자본가는 이 추가고용을 통해 빵 5개의 추가이윤을 획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자본가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한계생산성이 빵 95개까지 하락할 때까지 노동을 추가로 고용할 것이다. 바로 이 지점까지는 추가고용이 추가이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한계생산성이 빵 90개라면, 손실을 감당할 수 없는 자본가는 한계생산성이 빵 95개 수준까지 높아질 때까지 (해고를 통해) 총노동시간을 줄여나갈 것이다.

이렇게 실질임금과 노동생산성이 연동되어 있다는 신고전파 경제학의 주장은 적어도 1941년과 1970년 사이의 통계치만을 살피면 현실경제에서 명백히 입증되었다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앞서도 언급했지만, 특히 1980년 대 이후 실질임금과 노동생산성의 괴리가 점점 커져간다는데 있다. 신고전파 경제학이 잘못된 것일까. 아니면 이론에 미치지 못하는 현실이 잘못된 것일까. 이 괴리에 대해 경제학자들이 몇 가지 설명을 제시하기는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그다지 설득력이 있는 것 같지는 않고, 여기서 자세히 논할 필요도 없을 것 같다 (관심있는 분은 여기 참조).

아마도 상황이 반대였다면, 그러니까 1980년대 이전에는 임금과 생산성 사이의 괴리가 심했고, 그 이후에는 이들이 전반적으로 일치하는 모습을 보였다면 신고전파 경제학의 사정은 좀더 나았겠다. 그 이유는 이렇다. 소위 신자유주의의 기점이라고 할 수 있는 1980년부터 규제가 급격히 완화되었고, 현실 경제는 신고전파 경제학자들이 좋아하는 완전경쟁시장에 가까운 형태로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변모해갔다. 따라서 정부의 규제가 심했고, 부의 재분배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던 1980년대 이전에 비해 신자유주의의 시대에는 신고전파 경제학의 현실정합성이 훨씬 높아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임금과 생산성 사이의 괴리는 신자유주의의 시대에 점점 악화되어 갔으며, 이것은 신고전파 경제학에 대단히 당혹스러운 사태임에 틀림없다. 그래서인지 여기에 대한 치열한 논쟁이 끊이지 않고, 학자들의 연구도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것 같다.

내가 보기에는 애초에 공상적 자본주의 이론을 가지고 현실의 자본주의를 어떻게든 해명해 보려고 한 것이 문제다. 이 고상한 유토피아적 이론을 결코 폐기하지 않고서는 수십년 간 논쟁을 하고 수천편의 논문이 발표된다고 하더라도 이 문제가 해결될 리가 없다. 나는 죄없는 이론을 이리저리 뜯어 고치기 보다는 차라리 이론에 맞추어 현실을 바꾸는 것이 어떨까하는 생각을 한다.

1980년대 이전에 실질임금이 꾸준히 상승한 것은 다름아닌 노동자들의 계급투쟁 덕이라고 생각한다(이 계급투쟁에 신고전파의 임금-생산성 연동이론은 아이러니하게도 큰 도움이 됐을 것이다). 반대로  1980년대 이후에 실질임금의 상승이 정체된 것은 노동자들의 힘이 약해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고전파 경제학의 현실정합성을 높이는 가장 좋은 방법은 지금부터 노동자계급의 힘을 키워 임금을 (노동자들이 거기에 별로 기여하지 않은) 생산성 증가와 연동하여 인상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아예 임금-생산성 연동 법안을 제정하는 것도 좋은 생각이다. 아시아의 변방에서 세계의 중심으로 발돋움한 대한민국이 경제학에서도 세계중심국가로 우뚝설 좋은 기회다. 신고전파 경제학자 대통령이 퇴임하기 전에 서둘러야 한다.

하여 신고전파 경제학자들이여. 이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신고전파 경제학자 선언] 같은 것을 발표하는 것이 어떨까. 나는 마르크스주의 정치경제학자지만 보탬이 되고 싶어서 마지막 단락의 초를 아래와 같이 잡아 보았다.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하다.

신고전파 경제학자들은 자신들의 생각과 의도를 감추는 일을 부끄러워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론의 완성이 현실을 이론에 맞게 변형시키는 것을 통해서만 달성될 수 있다는 것을 공공연하게 선언한다. 현실로 하여금 이론 앞에 전율케 하라. 신고전파 경제학자들은 이러한 유토피아의 건설 속에서 명예 이외에 아무것도 잃을 것이 없다. 그들에게는 얻어야 할 세계가 있다.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 치열하게 투쟁하여 임금과 생산성 사이의 괴리를 없애다오!

(102) 노동생산성은 단순히 숫자가 아니다

이것은 [heesang – 노동생산성을 2배로 만드는 것은] … 노동수단이나 노동방법 또는 이 두 가지가 변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따라서 그의 노동의 생산조건[즉, 그의 생산방식], 따라서 또한 노동과정 그 자체에 혁명이 일어나야 한다. 여기서 노동생산성의 상승이라는 말은 노동과정에 변화가 일어나 상품의 생산에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이 단축되며, 그리하여 주어진 양의 노동이 더 많은 양의 사용가치를 생산할 수 있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 자본론 1권, 12장, 426, 강조 추가

일정한 기술 수준 하에서 노동생산성의 증가에는 양적 제한이 따르기 때문에, 노동생산성을 순수히 그 양적 측면에서만 고찰하는 것은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노동생산성은:

여러 가지 사정에 의해 결정되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노동자들의 평균적 숙련도, 과학과 그 기술적 응용의 발전 정도, 생산과정의 사회적 조직, 생산수단의 규모와 능률, 그리고 자연적 조건에 의해 결정된다 – 49-50

4편에서 마르크스는 특히 2-4번째의 요인 – 과학기술, 생산과정의 사회적 조직, 생산수단의 규모와 능률에 관심을 쏟는다. 이것들이 노동과정에 변화를 아니 혁명을 일으키는 요인들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요인들은 노동과정의 질적 변화를 통해 노동생산성의 양적 변화를 야기한다 (혹은 노동생산성의 양적 제한을 제거한다).

지금까지 노동일의 연장에 의한 잉여가치의 생산을 고찰함에 있어 우리는 생산방식이 주어져 있고 불변인 것으로 전제했다. 그러나 필요노동이 잉여노동으로 전환됨으로써 잉여가치가 생산되야 하는 경우에는, 자본이 역사적으로 전해 온 형태의 노동과정을 그대로 계승해 그 노동과정의 계속시간을 연장하는 것만으로는 결코 충분하지 않다. 노동생산성이 증가할 수 있으려면 먼저 노동과정의 기술적, 사회적 조건, 따라서 생산방식 그 자체가 변혁되어야 한다 – 426, 강조 추가

1. 따라서 자본주의적 생산에서는 노동과정이 동시에 가치증식과정으로 나타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가치증식과정으로서의 노동과정의 존재가 노동과정 그 자신을 혁명적으로 변화시킨다. 가치의 멈추지 않는 자기증식은 노동과정의 멈추지 않는 자기변혁이다.

따라서 마르크스의 이중성은 초역사적 내용이 역사적 형태를 취한다는 존재적 이중성에 그치지 않는다. 도리어 지배적인 것은 역사적 형태가 초역사적 내용에 가하는 역습으로서의 이중성이며, 이 역습이 야기하는 변증법적 운동이다.

2. 노동과정의 기술적, 사회적 조건은 무엇을 뜻하는가? 앞에서 노동생산성의 결정 요인으로 “과학과 그 기술적 응용의 발전 정도”와 “생산과정의 사회적 조직”을 언급했는데, 기술적 조건은 전자에, 사회적 조건은 후자에 대응한다. 특히 14장에서 상세히 다루겠지만, 마르크스는 분업 하에서의 노동을 (협력적 노동이라는 의미에서) 사회적 노동으로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