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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고] 자본론, 어디까지 읽었니? (자본론 제2권 읽기 개시!!)

나는 지난 1년반 동안 몇몇 사람들과 함께 매주 모여앉아 {자본론}을 읽었다. 이제 1권을 다 읽었고, 우리는 이제 2권에 들어가려 한다. 혹시 이런 일에 관심있으신 분들이 계실까 해서 여기에 광고를 한다.

자본론2권광고2

아시다시피 {자본론}은 모두 3권까지 있다.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자본주의적 생산과정’이라는 부제목이 붙은 제1권이다. 사람들이 “나는 {자본론}을 읽었다”라고 할 때, 대체로 이는 1권을 읽었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우리가 제2권을, 그리고 나아가 제3권을 읽으려고 하는 것은 왜인가? 말할 것도 없이 그것은, 1권만으로는 {자본론}의 전모를 알수없기 때문이다. {자본론}은 자본주의 경제의 가장 본질적이고 추상적인 차원에서 출발해, 우리 눈에 실감나게 다가오는 가장 구체적이고 피상적인 차원으로 나아간다. 때문에 {자본론}의 논의들을 현실에 적용하고자 할 경우, 또는 {자본론}의 시각으로 현실을 해석하려 할 경우, 1권만으로는 크게 부족하다. 언제나 우리 눈앞의 현실은 구체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누군가가 {자본론} 1권만의 지식을 가지고 현실을 해석하려 한다면, 이는 필연적으로 ‘환원론’이 될 가능성도 크다.

어쨌든 ‘고전’을 읽고, 이를 바탕으로 오늘의 우리를 반성해보는 일은 크게 권장할만한 일이다. 특히 {자본론} 1권만을 주마간산 격으로 훑고서 마음한켠에 아쉬움이 있으셨던 분들께는 좋은 기회가 아닐까 싶다. 물론 이 사회에는 그 1권마저도 제대로 영접하지 못하신 분들이 훨씬 더 많은데, 이분들도 의지만 있다면 참여를 망설이실 필요가 없다. 숙련된 조교(-_-)와 선학들(^_^)이 도움을 줄 수 있으니 말이다.

참고로 우리 모임에 대해 간단히 정리해보겠다.

애초 우리는 자유인문캠프(링크)의 2011/12년 겨울강좌에서 출발했다. 여기서 나는 ‘자본론 읽기 입문’이라는 제목으로 {자본론} 제1권 제1장과 제2장을 강독 형식으로 읽으면서 해설했다(링크). 8회에 걸친 강좌에서 아쉬움을 느낀 수강생 중 몇몇분들의 제안으로 ‘읽기’를 정례화하기로 하고(링크), 결국 2012년 3월부터 지난주까지 약 1년반에 걸쳐 우리는 거의 매주 만나 책을 읽은 결과 한글판 기준 1000쪽이 넘는 {자본론}을 읽어냈다(링크). (※참고: 관심 있으신 분들은 여기 링크들을 모두 보시는 게 좋습니다^^)

우리 모임은 다른 {자본론} 팀들과 몇 가지 점에서 다르다. 첫째, 보통은 일정한 분량을 각자 읽고 매번 정해진 사람들이 발제를 해 그에 대해 토론하는 식인데 반해, 우리는 직접 현장에서 책을 읽는다. 이는 속도도 느리고 구성원들이 다소 수동화된다는 단점이 있지만, 참여에 부담이 적을뿐만 아니라 의지를 가진 이들에겐 ‘행간을 읽어내는’ 즐거움까지 준다는 점에서 커다란 매력이 있다. 둘째, 대개 {자본론} 학습이 특정한 단체에서 제공되는 데 반해서 우리는 순수한 사적 모임에 가깝다. 이것이 특별히 자랑할만한 일은 아니지만… 뭐, 그렇다고ㅎㅎ

셋째, 우리가 책만 읽는 것은 아니다. 계절이 바뀌면 놀러 다니기도 했고 책읽기가 지겨우면 그냥 영화보고 술먹으며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것과는 별개로… 우리가 그간 2회에 걸친 ‘부정기 포럼’을 열었다는 점은 각별히 알리고 싶다. 뿐만 아니라, 최근엔 영어로 된 간단한 논문—물론 우리가 읽는 {자본론}과 관련된—을 선택해 함께 읽고 번역을 하기도 했다(번역문은 조만간 공개될 것임). 부정기포럼에 대해선 다음 포스팅을 참조하시고, 앞으로도 이는 쭈욱~~ 계속될 것이다(현재 2~3회분은 이미 기획된 상태).

  • [제1회 부정기포럼/2013.2.23] 불효자는 울지않고 자본론을 읽습니다 (링크1, 2)
  • [제2회 부정기포럼/2013.7.27] 아시아로 간 삼성, 서울로 온 장대업 (링크)

넷째, 특이한 사람들이 많다. 에… 이상에서 열거한 것 말고도 우리 모임만이 갖는 특징과 매력은 많다. 나머지는 직접 참여하면서 확인하시길. 여하튼,

{자본론} 2권을 곧 시작합니다. {자본론} 1권만 읽으신 분들, 읽고는 싶은데 아직 1권도 제대로 안 읽으신 분들, 모두 환영입니다. {자본론} 2권을 읽읍시다!!!

자본론2권광고1

* 참고로… 우리는 어떤 판본을 정해놓고 읽지는 않습니다. 아무거나 가져오셔요. 한글판뿐 아니라 영어판, 독어판, 일어판, 불어판 등등. 모두 환영입니다! (얼터너티브 호객글/링크)

** 위 글에 몇몇 링크들이 있습니다. 관심 있으신 분께선, 그 링크들을 하나씩 살펴보시면 도움이 되실 겁니다.

(136) 마르크스와 특허

와트의 위대한 천재성은 그가 1784년 4월에 얻은 특허권의 명세서에 나타나 있는데, 거기에는 그의 증기기관이 어떤 특수한 목적을 위한 발명이 아니라 대공업의 보편적 동력기로 서술되어 있다. – 자본론 1권 15장, 508, MEW 23, 398

자본론 1권에서 마르크스는 “특허”라는 단어를  세번 언급하는데, 두번은 남을 조롱하기 위해 일종의 비유로 사용하고 나머지 한번은 바로 위에 인용한 구절에서 기술의 보편성에 주목한 “와트의 위대한 천재성”의 근거를 제시하는데 활용한다. 2, 3권이나 잉여가치학설사의 경우도 별로 다르지 않다. 특허에 대한 마르크스의 분석은 전무하다고 할 수 있다.

지적재산권의 경제적, 정치적, 이론적 중요성이 점점 강조되고 있는 오늘날의 시각에 보면 이해가 되면서도 의아하고, 안타까운 측면이 많다.

1. 이해가 된다

마르크스 시대의 특허와 오늘날의 특허, 좀더 일반적으로 지적재산권을 동일선상에서 분석하기는 어렵다. 영국의 특허 통계를 살펴보면 마르크스가 자본론 1권을 출판한 1867년 특허출원건수는 3,723건이었으며, 이는 점진적으로 증가하여 마르크스가 사망한 1883년에는 대략 6,000건에 이른다. 그런데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1884년에 특허출원건수는 17,110건으로 급속도로 늘어나고 1900년대 초에는 연간 출원건수가 30,000건을 돌파한다.

양적팽창 이외에도 특허제도는 질적인 변화를 겪었다. 과거에는 특허가 주로 새로운 기술이나 발명에 부여되었지만, 우리 시대에는 새로운 생명체와 인간유전자도 특허의 범위에 포함된다. 게다가 특허 이외에도 저작권이나 디자인, 상표권 등의 적용 범위 역시 넓어졌음을 감안해야한다.

2. 그렇지만 의아하다

마르크스는 와트의 1784년 특허명세서를 자본론에 언급할만큼 기술에 커다란 관심이 있었다. 그런 그가 볼턴앤와트(Boulton and Watt)사가 특허를 통해 상당한 라이센스 수입을 올렸고, 특허권을 침해한 이들과 송사를 벌였던 일을 몰랐을리가 없다. 자본주의적 경쟁에서 혁신과 신기술개발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강조했던 마르크스가 왜 특허에 별 관심을 갖지 않았는지는 그 자체로 하나의 연구과제가 될 수 있겠다.

3. 안타깝다

주류경제학에서는 특허 등의 지적재산권을 경제성장의 한 필수적인 조건으로 본다. 지식은 그 비경합성과 비배제성 때문에 양의 외부효과를 갖는 ‘생산요소’이고 따라서 별도의 보호장치가 없다면 사회전체적으로 지식이 과소생산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내생적 성장이론의 대표적인 모형인 폴 로머의 1990년 모형 역시 지적재산권을 통한 지식의 영구적 독점을 전제한다.

특허가 일종의 인센티브로 작용하여 혁신에 긍정적인 역할을 하면서도, 기술의 사회적 전파를 방해한다는 부정적인 면도 갖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여 전자는 극대화하고 후자는 극소화하기 위한 절묘한 제도를 설계하는 것에 관심을 갖고 있는 실용적인 사람들도 많다.

좌파적인 시각을 갖고 있는 이들은 보통 특허나 지적재산권을 싫어한다. 이해도 되고 공감도 하지만, 나는 아무래도 제도의 기원과 역할과 의의를 학적으로 정리하는 것에 더 관심이 간다. 문제는 그런 일을 하는 사람들이 별로 없다는 것. 그래서 마르크스가 약간의 단초가 될만한 언급이라도 남겨주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자본론 3권의 농업지대에 대한 분석을 지적재산권 분석에 원용하는 경우가 많지만, 마르크스의 지대론은 잉여가치 중 일부가 토지의 독점으로 인해 지대로 전유된다는 단순한 이론이 아니다. 오히려 핵심적인 것은 이 지대가 표현하고 있는 자본주의 경제의 물적 현실 (예: 지주 계급의 존재로 인한 농업의 상대적으로 느린 기술발전)을 드러내는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마르크스의 지대론은 기본적으로 자본주의적 농업에 대한 이론이다.

라이센스나 로열티 같은 것들이 잉여가치 중 일부를 특허권자나 저작권자가 전유하는 것이라는 주장에 반대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론이 그 지점에서 그친다면 거기에 큰 의미가 있을까. 오늘날 지적재산권의 적용범위는 계속해서 확장되고 있고, 각국의 제도는 점점 동질화되어 가고 있다. 이제 기술개발은 경쟁우위를 확보하고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기 위한 수단이기도 하지만 기업의 시장가치를 높이고 때로는 즉각적으로 상품화되어 판매될 수 있는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기술개발과 지식의 생산만을 목적으로 창업되는 기업들도 점점 많아지고 있다. 기업간 기술의 거래규모는 경제성장률보다 빠른 속도로 증가하고 있고, 국가 간 기술거래 규모 역시 확장되고 있다. 아마도 이것은 금융화의 영향일 것이며, 금융화를 더 촉발시키고 있을 것이다. 이런 경향을 놓고 오늘날 우리는 지식경제시대 혹은 창조경제시대를 살아가고 있다는 주장도 있고, 그것은 표피의 변화를 과대평가한 것일뿐 근본적으로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라는 주장도 있다. 등등등. 이러한 현대적인 현상들을 과연 어떻게 가치론의 구체적인 적용들을 통해 해명할 것인가. 이런 것에 소용이 없다면 가치론에는 대체 또 어떤 소용이 있겠는가.

(133) 비판적인 기술사

이미 왓트(Wyatt) 이전에도 매우 불완전한 것일지언정 방적기가 – 아마도 최초로 이탈리아에서 – 사용되고 있었다. 비판적인 기술사는 18세기의 발명 중 한 개인의 업적으로 된 것은 거의 없다는 것을 증명할 것이다 – 자본론 1권 15장, 501; MEW 23, 392

안타깝게도 마르크스는 비판적인 기술사(Eine kritische Geschichte der Technologie; a critical history of technology)에 관해 상술하지 않는다. 그래서 여기에 비판적 기술사에 대한 내 해석을 간단히 정리해보려고 한다.

1. “비판”은 다음의 구절에서와 같은 용법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상품에 포함된 노동의 이러한 이중적 성질을 비판적으로 지적한 [heesnag: 입증한] 것은 내가 처음이다 – 자본 1권 1장, 96 (길판), 강조 추가

Diese zwieschlächtige Natur der in der Ware enthaltenen Arbeit ist zuerst von mir kritisch nachgewiesen worden – MEW 23, 56

마르크스가 노동의 이중성의 발견을 그의 가장 중요한 공헌으로 간주했음을 감안하면, “비판적으로”라는 표현에 상당한 무게가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EM님이 지적했듯이 비판은 부정적이라기 보다는 긍정적인 개념이다.

그렇다면 ‘비판’ 이란 무엇인가? 흔히 분석을 긍정적인 것으로, 비판을 부정적인 것으로 여기는데, 어원적으로 보든 아니면 그 개념이 실제 지성사에서 쓰인 방식으로 보든 ‘비판’이란 부정적이기보다는 긍정적인 개념이라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다. 어원적으로 ‘비판’(critique)이라는 단어는 고대 그리스어로까지 소급되는데, 이때 그것은 ‘위기’(crisis)와 같은 뿌리를 가지고 있다. 기본적으로 crisis란 일종의 의학용어라고 할 수 있는데, 환자의 병세가 하나의 국면에서 다른 하나의 국면으로 넘어가는 어떤 고비 같은 것을 뜻했다고 한다. 당연하게도, 이런 의미에서 crisis는 사태에 대한 면밀한 ‘분석’은 물론 그에 기반해서 내려질 냉철한 ‘판단’까지도 포괄하게 되는데, 이후 이런 ‘분석’이나 ‘판단’의 문제는 대체로 critique이라는 단어로 독립되었다. 나아가 critique은 코젤렉(Reinhart Koselleck)이 밝힌 바 있듯이 근대 서유럽 지성계에서 심지어 ‘이성(reason)의 사용’ 일반을 가리키는 용어로까지 발전하기에 이른다.

물론 그렇다고 ‘비판’에 부정적인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다시 이 말의 어원을 보자. 그것은 crisis와 맥을 같이 한다고 했고, 그런 의미에서 ‘비판’이란 비판 대상이 일정한 ‘위기’ 상황에 있다는 판단을, 나아가 그런 판단을 가능케 하는 그 대상에 대한 합리적인 ‘분석’을 전제한다고 했다. 예컨대 마르크스가 ‘정치경제학을 비판하겠다’라고 말했을 때, 그는 현재 정치경제학이 위기에 처했다고 판단하는 것이며, 이런 판단을 설득력 있게 내어놓으려면 정치경제학을 면밀히 파헤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후자의 작업은 필연적으로, 그 자신 하나의 정치경제학 체계를 결과로서 내놓을 텐데, 우리는 그 결과를 《Das Kapital》이라는 형태로 가지고 있다. 그렇다고 이 《Das Kapital》에 대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기존 정치경제학을 지양하기 위한 것이지 그 자체로 또 다른 정치경제학이기를 지향하지는 않는다”라고 말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반대로, 비판적이지 않은 경제학, 과학적이지 않은 경제학이 현실적으로 힘을 가지고 있는 동안에는, 이렇게 진정으로 비판적이고 과학적인 경제학을 내놓고 증진시키며 예의 그 잘못된 경제학에 그것을 대비시키는 것이야말로 진정으로 ‘비판적’인—‘부정적’ 의미에서의—기획이 될 수 있는 것이다 – What’s in a name? 자본론 vs 자본: ‘비판’의 의미에 대하여, 강조는 원문

기존의 기술사가 “위기에 처했다고 판단하는 것”에서 출발하고, 이를 “면밀히 파헤치”는 것을 통해 “필연적으로” 새로운 기술사 체계 – 비판적인 기술사 – 를 “결과로서 내놓”을 수 있겠다.

2. 그런 측면에서 “18세기의 발명 중 한 개인의 업적으로 된 것은 거의 없다는 것을 증명할 것이다”라는 언급에는 이미 비판적인 기술사의 싹이 담겨 있다. 이것은 우선 발명을 개인의 (천재성의) 산물로 이해한 당대의 보편적 이해에 대한 부정적 비판이지만, 동시에 과학기술의 사회적 성격 – 과학기술은 사회적 산물이며 동시에 사회의 규정적 요소이다 – 에 대한 마르크스의 인식을 보여준다.

3. 당연하게도,

현재까지는 그와 같은 저술은 아직 없다.

마르크스 당대에도 없었으며 현재에도 (별로) 없는 것 같다. 마르크스주의적 STS (science, technology and society) 이론은 노동과정론과 인지자본주의론 정도를 들 수 있는데, 전자는 만족스럽지 못하고 후자는 잘못된 이론이라고 생각한다.

여담이지만 석사 혹은 박사과정을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Sussex 대학의 Science and Technology Policy Research (SPRU)을 택할 것 같다. 유명한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인 알란 프리만(Alan Freeman)의 더 유명한 아버지인 크리스 프리만(Chris Freeman)이 맹활약한 곳이다. 여기서 “마르크스의 비판적 기술학”이라는 주제로 논문을 쓴다면 꽤 근사하지 않을까. 혹시 마르크스 정치경제학에 대한 전문적 연구에 관심 있는 분이 있다면 이런 루트를 추천드리고 싶다.

마르크스 정치경제학 연구에서 전형 논쟁, 오키시오 정리와 같은 기술적인 주제들이 과대평가되는 것을 나는 항상 안타깝게 생각했다. 나름 의미 있는 주제들이라는 것을 부인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비판적 자본주의 이론이라는 관점에서 생각해보자. 전형과 오키시오 정리 에 대한 연구가 기여할 수 있는 바는 많지 않다. 긴요한 것은 마르크스 가치론의 정합성에 대한 증명이 아니라, 비판적 이론의 영역을 확장하는 것이다. 비판적 기술학, 비판적 교육학, 비판적 예술학, 비판적 정치학 등등등등.

아.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다.

역사유물론의 기본 태도: {월간 좌파}에 실린 김태호 선생의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 ‘서문’ 번역과 해설에 대하여

{월간 좌파}라는 잡지가 창간됐다. 일정한 준비기간을 거쳐, 5월호를 창간호로 냈다. (홍페이지 링크) 앞으로 크게 번성하길 바란다.

친구가 소개해줘 조금 봤는데, 내용이 매우 알차다. 앞으로 기대해도 좋을 것 같다. 특히 나는 ‘탐구’ 섹션에 있는 ‘{자본} 읽기’에 주의가 쏠릴 수밖에. 박종철출판사의 김태호 대표께서 야심찬 연재를 기획하고 계신 것같다. 이번 창간호에선 그 ‘서장’격으로 마르크스가 1859년에 쓴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의 ‘서문’이 다뤄지고 있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김태호 선생께서 ‘서문’의 전문을 새로 번역해서 내놓으셨다는 점이다. 한 문단씩 번역문을 제시해놓고, 그에 대해 설명을 다는 식이다. 새로운 번역문은 무엇보다 쉽게 읽힌다. {맑스 엥겔스 저작선집}(제2권)에 실린 기존의 번역이 다소 딱딱했던 것과 비교된다.

그런데 내가보기에 크게 두 군데 오류가 있는 것 같다. 하나는 번역에, 또 하나는 해설에. 지금부터 그것을 지적해보겠다. 아무도 말을 거들지 않으면 연재하는 사람도 힘이 빠질밖에. 힘 내시고, 앞으로 좋은 연재 부탁드린다는 뜻에서 조금 거들겠다. 아래 보듯이, 번역 오류는 매우 심각하지만, 해설의 오류는 단순한 ‘부실’이라고만 봐도 괜찮을 듯 싶다.

 

1. ‘서문’의 네 번째 문단 중에 나오는 다음 구절을 보자(148쪽).

“어떤 개인이 어떠한지를 그 개인이 자부하는 것에 따라 판단하지 않듯이, 그러한 전복의 시기는 그 시기의 의식으로 판단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물질적 생활의 모순에서 나오는 의식, 즉 사회적 생산력과 생산관계 사이의 현존하는 갈등에서 나오는 의식으로 설명해야 한다.”

위 문장은 애초 번역문인 {저작선집}에는 다음과 같이 번역돼 있다(제2권: 478쪽).

“한 개인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그 개인이 자신을 무엇이라고 여기는가에 따라 판단하지 않듯이, 그러한 변혁의 시기가 그 시기의 의식으로부터 판단될 수는 없으며, 오히려 이러한 의식을 물질적 생활의 모순들로부터, 사회적 생산력들과 생산 관계들 사이의 현존하는 충돌로부터 설명해야만 한다.”

위 문장은 역사유물론의 기본원칙을 담고 있는데, 보다시피 위 두 번역은 (사소한 표현의 차이를 논외로 하더라도) 크게 다르다. 새로운 번역자인 김태호 선생께서 기존의 번역문을 모르는 것도 아닌 이상, 그러한 차이는 의도된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즉 옮긴이(김태호)는 거의 명백하게 기존의 번역이 틀렸다고 생각해 번역을 수정한 것이리라.

그러나 내가 보기엔 위 문장에 있어서만큼은 기존의 번역이 옳다. 무엇을 덧붙이겠는가? 원문확인의 구구한 과정은 생략하고… 또한 이는 원문해석의 문제는 아니다. 내용의 이해, 즉 역사유물론의 해석, 다시 말해 마르크스의 기본생각의 이해 문제인 것이다.

자… 김태호 선생의 새로운 번역을 보면, ‘그 시기의 의식’과 ‘물질적 생활의 모순에서 나오는 의식’이 대비된다. 그는 이 둘이 다르다고 생각하며, 그렇기 때문에 ‘전복의 시기’는 전자가 아니라 후자에 의해서 설명되어야 한다고 본다. 아니, 마르크스가 그렇게 본다고 번역했다.

하지만 ‘그 시기의 의식’과 ‘물질적 생활의 모순에서 나오는 의식’은 다른 것이 아니다. 둘은 같은 것이다. 이것을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의식들은 언제나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물질적 생활의 모순에서’ 나온다. 사실은 이런 점을 인정하는 것이 바로 (위 인용문장이 속한 단락에서 소개되고 있는) 역사유물론적 태도이며, 이런 태도에 따른다면 ‘의식’을 설명함에 있어 그것이 도대체 어떻게 해서 ‘물질적 생활의 모순’의 필연적인 표현형태인지를 밝히는 것이 핵심적인 관심사가 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이러한 연관을 밝히는 가장 중요한 도구가 정치경제학임은 말할 것도 없고.

이제 이상의 내용을 염두에 두면서 위의 두 번역문을 비교해보자. 이제 독자분들도 {저작선집}의 원래 번역문이 더 정확함을 어렵지 않게 감지하실 수 있으리라 믿는다. :)

혹시 아직 아리까리하신 분들을 위해 예제 하나. 자, 여기, 우리 시대에 관한 어떤 ‘의식’이 있다. 이를테면 ‘신자유주의는 끝났다’라는 의식이 있다고 치자. 명백히 이것은 유일하다고는 볼 수 없어도 오늘 우리 시대를 묘사하는 하나의 ‘의식’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것은 ‘그 시기의 의식’이다. 그런데 이것은 ‘물질적 생활의 모순에서 나오는 의식’인가? 당연히 그러하다. 어떤 의식이 하늘에서 그냥 떨어질리가 없잖은가.

그런데 사람들은 이런 의식에 대해 뭐라 말하는가?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대중들의 신자유주의에 대한 환멸이 이제 극에 달했다. 따라서 신자유주의가 설 곳은 이제 없다.” 물론 이런 식의 동어반복(!) 끝에 다음과 같이 덧붙이곤 한다. “우리 모두 거리로 뛰쳐나가 신자유주의의 종말을 축하하자. 꼬뮨주의 만세!”

그러나 불행히도, 이런 식의 서술에서는 “여기 ‘신자유주의는 끝났다’라는 의식이 있다”라는 명제 이상을 이끌어낼 수 없다. 분명 이런 의식은 현실에 존재하는 ‘물질적 생활의 모순’으로부터 나오리라. 그러나 위 서술에는 그러한 ‘물질적 생활의 모순’의 detail에 대한 설명은 전무하며, 또한 이는 그러한 모순이 어떻게 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신자유주의는 끝났다’라는 (집단)의식을 갖게 만들었는지를 말해주지도 않는다. 이쯤 되면, ‘이러한 의식을 물질적 생활의 모순들로부터, 사회적 생산력들과 생산 관계들 사이의 현존하는 충돌로부터 설명’하는 것이야말로 핵심적인 과제임이 명백하지 않은가. 바로 이런 사항을 위 인용문장은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2. 한편 위에서 인용한 문장이 들어있는 긴 문단을 두고 김태호 선생은 다음과 같은 해설을 내놓는다(149쪽).

맑스는 신문 편집장으로서 물질적 이해관계에 대해 한마디 하는 것도 곤란이고 프랑스의 사회주의 및 공산주의에 대해 “어떤 판단도 내리지 못하겠다”더니, 그러한 “밀려들던 의문의 해결”을 위해 “헤겔의 법철학”을 검토했다고 한다. 사람들의 살림살이를 공부하거나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공부한 것이 아니라 헤겔을 공부했다는 것이다. 맑스는 헤겔을 읽으면 그런 문제들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다고 본 모양이다.

여기서는 마지막 문장이 문제다. 내가 아는 한, 적어도 {라인신문} 이후엔, 마르크스가 헤겔을 읽음으로써 ‘내게 밀려들던 의문’을 해명할 수 있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 그는 그저, 당시 자신이 속한 (헤겔주의라는) 지적 배경 속에서, 그리고 그러한 배경에 의해 부여된 자신의 지적 한계 속에서, 헤겔의 법철학 비판을 ‘내게 밀려들던 의문’의 해결을 위한 ‘절차’이자 ‘수단’으로 삼았을 뿐이다.

물론 우리가 알듯, 얼마 가지 않아서 그는 이런 식의 철학비판도—아무리 그것이 ‘비판’이라 할지라도—부족함을 깨닫게 된다. 그것이 바로 그가 ‘정치경제학 비판’으로 옮겨간 이유다. (끝)

 

 

(107) 보이지 않는 손의 간계

개별 자본가가 노동생산성을 증가시켜 예컨대 속옷의 가치를 저하시킬 때, 그는 결코 노동력의 가치를 저하시켜 그만큼 필요노동시간을 단축시키려는 목적을 반드시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가 결국 이 결과에 기여하는 한, 그는 일반적 잉여가치율의 제고에 기여하게 된다. 자본의 일반적이고 필연적인 경향들은 그것들의 현상형태와는 구별되어야 한다. – 자본론 1권 12장, 428

1. 자본, 자본가를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손

마르크스에게 있어 자본주의경제의 내적 법칙, 본질적 법칙은 언제나 경향이다. 법칙이 직접적이고 무매개적으로, 아무런 방해 없이, 그리고 너무나 명명백백하게 자신을 관철하는 일이란 없다. 법칙은 겉보기에는 그 법칙과 무관하고 심지어 모순되어 보이는 현상들 속에서 그리고 그 현상들을 통해서만 관철된다. 왜? 현실이 표리부동한 방식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자본은 본질이고, 자본가는 자본의 인간형태다. 상대적인 자율성을 갖긴 하지만, 자본가는 뼛속 깊숙히 자본이다. 만유인력은 우주 만물의 운동을 통제하지만, 만유인력의 존재는 명백히 드러나지 않는다. 운동의 특수한 형태(예: 행성의 운동)는 만유인력의 통제력과 모순되어 보이기도 한다. 자본의 자본가에 대한 통제 역시 비슷한 방식으로 작동한다. 자본가는 자기이익을 따라 아니면 어떤 고상한 이론에 따라 행동한다고 생각하지만, 결국은 자본의 사명에 복무하고 있다. 자본은 자본가를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손이다, 혹은 자본은 자본가를 경향적으로 통제한다.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사람은 애덤 스미스지만, 그는 국부론에서 이 용어를 단 한번만 그것도 해외산업에 대비한 국내산업의 증진과 관련된 맥락에서 사용할 뿐이다.

각 개인은 그가 지휘할 수 있는 자본을 가장 유리한 방법으로 사용하려고 힘쓴다. 그의 관심사는 사실 자기 자신의 이익이지 사회의 이익은 아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자연스럽게 또는 오히려 필연적으로 그로 하여금 [사회에 가장 유익한] 투자를 선호하게 한다 … 해외산업보다 국내산업의 지원을 선호함으로써 그는 오직 자신의 안전을 의도한 것이고, 노동생산물이 최대의 가치를 갖도록 그 노동[heesang: ‘국내산업’의 오역으로 보인다]을 지도함으로써 그는 오직 자신의 이득을 의도한 것이다. 그는 이렇게 함으로써 [다른 많은 경우와 같이]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려 그가 전혀 의도하지 않은 목적을 증진시키게 된다. 그가 의도하지 않았다고 하여 반드시 [의도했을 경우에 비해] 사회에 보다 적게 기여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자기 자신의 이익을 추구함으로써 종종 그 자신이 진실로 사회의 이익을 증진시키려고 의도하는 경우보다 더욱 효과적으로 그것을 증진시킨다. – 국부론 (상), 434, 김수행 번역 (동아출판사).

다음과 같은 구절도 있다. 아마도 국부론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구절일 것이다.

우리가 식사할 수 있는 것은 정육점주인, 양조장주인, 빵집주인의 자비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이익에 대한 그들의 관심 때문이다. 우리는 그들의 인간성에 호소하지 않고 그들의 이기심에 호소하며, 그들에게 우리 자신의 필요를 이야기하지 않고 그들의 이익을 이야기한다. – 국부론 (상), 22.

주류경제학에서는 소비자가 효용을 극대화하고 기업이 이윤을 극대화할 때 경제가 균형상태에 도달하고 사회의 후생이 극대화된다고 주장한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주류경제학은 한계효용체감, 수확체감, 완전경쟁과 같은 지극히 이상적인 가정을 도입하는데 이 과정에서 사회과학으로서의 경제학은 일단의 연립방정식으로 전락하고 만다. 주류경제학자들은 스미스가 국부론에서 단 한번만 사용한 ‘보이지 않는 손’을 되뇌이면서 정치경제학자 스미스를 신고전파 경제학자로 탈바꿈시키는데, 스미스가 ‘균형’개념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것은 스미스에 대한 엄청난 왜곡이다 (‘균형’ 역시 국부론에 단 한번 등장하며, 신고전파 식의 균형 개념과는 전혀 다른 맥락에서 사용된다).

마르크스는 ‘보이지 않는 손’ 개념을 스미스나 주류경제학자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이해한다. 그는 개인의 사적 이익의 추구가 그 이면의 어떠한 본질적인 목적이나 법칙을 실현하는 도구라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개인적 이익 – 이것은 겉보기에는 순수히 개인적이고 사적으로 보인다 – 그 자체가 이미 사회에 의해 규정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개인들의 사적 이익의 추구가 (보이지 않는 손의 작동을 통해) 사회의 일반적 이익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재생산이라는 하나의 법칙으로서의 필요(즉 사회의 본질로서의 보이지 않는 손)가 개인들로 하여금 사적 이익을 추구하게 유도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보이지 않는 손은 존재한다. 다만 그것은 개인들의 이익 추구를 적절히 조정해서 사회의 일반이익을 확대하는 손이 아니라, 개인들로 하여금 사적 이익을 극대화하도록 내모는 손이다. 사회가 개인을 규정하며, 본질이 형태를 규정한다.

이렇게 마르크스는 자신의 세련된 방법론을 이용해서 ‘보이지 않는 손’을 깎고 다듬은 후, 단단한 반석 위에 지은 그의 이론의 집을 위한 장식물로 사용한다. 그는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에서 다음과 같이 쓴다.

경제학자들은 이를 [heesang: 생산자들 사이의 전면적 상호의존이  교환가치로 표현되는 것]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누구나 자신의 사적 이익을, 그것도 오직 사적 이익만을 추구한다. 그럼으로써 원하지도 않고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모든 사람의 사적 이익, 일반 이익에 기여한다. 각자가 자신의 사적 이익을 추구함으로써, 사적 이익의 총체, 즉 일반 이익이 달성된다는 것이 이러한 표현의 핵심인 것은 아니다. 이 추상적인 구절로부터 각자가 서로 타인의 이익 관철을 방해하고,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으로부터 일반적 긍정 대신에 일반적 부정이 귀결된다는 결론이 나올 수도 있다. 오히려 핵심은 사적 이익 자체가 이미 사회적으로 규정된 이익이며, 사회에 의해 정립된 조건들 안에서 사회에 의해 주어진 수단으로만 달성될 수 있다는 것, 말하자면 사적 이익 자체가 이러한 조건들과 수단들의 재생산에 묶여 있다는 것이다. 사적 이익은 사인들의 이익이다. 그러나 그 내용은 사적 이익의 실현 형태 및 실현 수단과 마찬가지로 모든 개인들로부터 독립적인 사회적 조건들에 의해 주어진다 – 정치경제학 비판요강 1, 137, 김호균 번역 (백의) – 번역 수정, 강조추가.

벤담은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 개념을 극단적으로 밀고 나간다. 스미스가 개인의 이익 추구가 공공선에 기여한다는 점에서 사익 추구 행위에 대한 윤리적 잣대의 적용에 의문을 제기하는데 그쳤다면, 벤담은 도리어 사익의 추구야말로 윤리적 행위라는 주장에까지 나아간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모토로 삼는 벤담에게 있어 사회적 이익을 확대시키는 모든 행위는 그 행위에 대한 개인의 윤리적 판단이 어떻든, 사회적 의미에서 윤리적인 행위이기 때문이다. 마침내 개인의 사적 추구는 상품생산사회에서 가장 고귀한 행위로 탈바꿈하며, 여기서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는 한 정점에 이른다. 마르크스가 자유, 평등, 소유에 더해 벤담을 상품교환분야, 즉 상품경제의 현상의 영역의 핵심적 원리로 지목하는 까닭이다.

벤담! 왜냐하면 각자는 자기 자신의 이익에만 관심을 기울이기 때문이다. 그들을 결합시켜 서로 관계를 맺게 하는 유일한 힘은 각자의 이기주의, 이득, 사적 이익 뿐이다. 각자는 오직 자기 자신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타인에 대해서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바로 그렇게 하기 때문에 그들은 모두 [사물의 예정조화]에 따라 또는 전지전능한 신의 섭리에 따라] 그들 상호간의 이익, 공익, 전체의 이익이 되는 일을 수행하는 것이다. – 자본론 1권, 6장, 230-231

2. 자본가, 세계사적 개인

그건 그렇고 이러한 셋팅은 자본가에게 얼마나 유리한가? 개별 자본가는 사회적 총자본의 이익 같은 것을 고민할 필요가 없다. 그는 그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치열하게 노력하면 된다. 그가 생산성을 높여 경쟁자들보다 더 많은 잉여가치를 실현하려고 할 때, 그는 노동력 가치를 저하시켜 상대적 잉여가치를 생산하려하는 자본 일반의 노력에 봉사한다. 아니, 사실은 상대적 잉여가치의 생산을 추동하는 자본주의의 경향적 법칙, 자본주의경제의 보이지 않는 손이 자본가를 치열한 경쟁의 길로 내몬다. 노동자 사이의 경쟁이 – 그것이 어떤 형태이건  – 보통 노동자 계급의 지위 하락으로 이어지는 것과는 천양지차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손이 꼭 자본가에게 도움이 되는 것만은 아니다.

자본에게 있어 (그 본질적 속성에 해당하는) 상대적 잉여가치의 생산은 잉여노동의 비중을 확대한다는 긍정적 측면 이외에도 이윤율을 저하시키고, 생산에서 노동의 비중을 축소시킨다는 부정적인 측면을 갖고 있다 (물론 이것도 ‘경향’이다). 착취의 심화가 역설적으로 착취의 존립기반을 위협하는 셈이다. 인간이 자신에 충실하여 열정적으로 살아가며 생을 만끽하는 바로 그 순간에도 사실 죽어가고 있는 것처럼 자본도 그렇다.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다”.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고야 만다.

그렇다면, 자본가는 보이지 않는 손의 통제 하에 자본의 내적 법칙을 현실화하는 동시에 자본주의 이후의 새로운 사회의 초석을 놓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로버트 터커 (Robert Tucker)는 “헤겔과 마르크스에 있어 이성의 간계 (The Cunning of Reason in Hegel and Marx)”라는 논문에서 자본가가 헤겔이 말한 “세계사적 개인 (world-historical individuals; welt-geschichtliche Individuen)”에 해당한다고 주장한다 – 매우 좋은 논문이다. 이메일 주시면 보내드린다.

세계사적 개인에 대한 설명은 헤겔의 역사철학강의에 대한 아래의 위키피디아 기사가 좋다.

“세계사적 개인은 이렇게 저렇게 고민하지 않는다. 아무것도 고려하지 않고 그 목적을 향하여 한길로 돌진한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과 관계없는 일에 대해서는 위대한, 때에 따라서는 신성한 것마저도 경솔하게 다루는 경우도 있다. 이런 태도는 물론 도덕적 비난을 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이와 같은 위인이, 자신이 가는 길 앞에 놓인 많은 죄 없는 꽃을 짓밟고, 많은 것을 밟아 뭉개는 것도 하는 수 없는 일이다.” (헤겔 역사철학강의) 즉 헤겔의 개념에서 세계사적 개인은, 세계사적 일반 이념의 실현을 위해 다른 사소한 것들을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는 인물이다. 이와 같은 인간의 행위에서 그가 정념에 사로잡혀 행동하였거나 개인적 명예욕, 정복욕 등에 따라 행위하였다고 비난받는 것은 이러한 일반 이념의 관점에서 볼 때는 사소한 일이다. 또한, 이러한 세계사적 개인들이 활동하는 세계사의 전환기에서 역사는 행복을 생산하지 않는다는 것은 헤겔에게 있어서 명백하다: “세계사에 있어서 행복한 시대란 내실이 없는 시대, 대립 없는 균형의 시대인 것이다. … 절대적 목적 같은 것이 문제인 경우에는 이와 같은 … 것이 이성적인 세계질서의 한 계기가 되어서는 안 된다. … 역사는 행복이 자라는 토양이 아니다. 역사 속에서 행복의 시기는 역사의 빈 페이지이다” 세계사적 개인의 예로, 헤겔은 율리우스 카이사르나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같은 예를 든다 – 위키피디아

역사를 세계 속에서의 이성의 자기 실현의 과정으로 보는 헤겔에 있어, 본질적인 것은 이성 그 자체이며, 세계사적 개인은 이성의 한 존재양식에 불과하다. 세계사적 개인은 자신이 이성의 자기실현의 도구로 활용되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한다. 다만 그의 제한을 모르는 성공욕과 정복욕은 그를 끊임없이 채찍질하여 앞만 보고 달려가게 만든다. 과로와 긴장상태는 그를 갉아먹는다. 세계사적 개인이 엄청난 성취 이후에 금새 죽거나 몰락하는 이유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요절했고, 카이사르는 암살당했으며, 나폴레옹은 섬으로 유배됐다! 본질로서의 이성은 세계사적 개인을 통해 스스로를 역사 속에서 실현하지만, 세계사적 개인은 이성의 도구로서의 역할을 완료한 이후에는 토사구팽되고 마는 것이다. 이렇게 특수한 개인의 열정적인 삶과 희생을 통해 배후에서 은밀하게 스스로를 실현하는 이성의 힘, 헤겔은 이것을 바로 이성의 간계(the cunning  of reason; die List der Vernunft) 혹은 이성의 간지라고 불렀다.

헤겔은 세계사적 개인의 행위는 이성의 실현이라는 고귀하고 보편적인 이익에 봉사하므로, 그가 잔악한 폭력을 사용하는 독재자이건, 혹은 협잡과 사기에 능한 정치인이건 그건 전혀 중요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개인의 행위가 동시에 세계사적 행위에 해당할 때, 일반적인 윤리를 적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 마치 스미스에게 있어 개인의 경제적 행위가 윤리의 영역과는 다른 지평에 존재하는 것처럼 세계사적 개인은 도덕적 치외법권에서 산다. 그러므로, 이순신이나 세종대왕 같은 훌륭하고 위대한 인물들은 세계사적 개인이 아니다. 왜선 133척에 맞선 12척의 일자진으로 나라를 구해낸 장군의 공, 어린 백성을 어여삐 여겨 새 글자를 창제한 임금의 치적이 구시대를 새시대로 이끌어 나가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들이 역경을 이겨낸 영웅적 인물들인 것은 사실이지만, 안타깝게도(?) 그들은 역경을 이겨내기 위해 마수를 쓰지는 않았다. 비윤리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위대한 성취를 한 사람들 – 이 사람들은 위인이지 세계사적 개인이 아니다. 세계사적 개인에게는 일종의 교활함과 뻔뻔함이, 목표의 달성에 장애가 되는 모든 것을 쳐없앨 수 있는 결기와 잔인함이 필요하다. 현대사에서 세계사적 개인에 가장 가까운 사람으로는 미국의 닉슨과 중국의 마오쩌둥 그리고 한국의 박정희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여담이지만 조갑제 등이 박정희를 초인으로 칭송하는 것은 이해하기 힘들다. 그것은 정치적 전략으로 옳지 않다. 니체의 초인은 강자, 지배의 도덕을 대변하기 때문이다. 니체의 실제 생각이 어땠건, 비판받기 딱 좋은 생각이다. 나라면 ‘세계사적 개인’을 밀었다. 카이사르, 나폴레옹 등을 덧붙여서).

(독일 이데올로기의) 마르크스는 세계사를 헤겔과는 다른 방식으로 이해한다. 우선 그는 역사와 세계사를 구분하여, 세계사는 서로 다른 국가, 국민들 사이의 협업을 필요로 한다고 본다. 다시 말해 세계사의 시작은 (교역을 할 수 있는 수준의) 최소한의 물적생산수준의 발전을 필요로 한다. 둘째, 마르크스에게 있어 “역사의 세계사로의 전환”은 ‘자기 의식’류의 이념의 실현이 아니라 물질적이고 경험적인 행위의 결과다. 셋째,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세계사의 최초의 자연발생적 형태이며, 공산주의 혁명을 통해 역사가 세계사로 완전히 전환된다고 보았다.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그는 이렇게 쓴다.

이제 이러한 발전 과정에서 서로서로 작용하는 개별적인 영역들이 더욱 확장되면 될수록, 또한 더욱 완성된 생산 양식, 교류, 그리고 이를 통하여 여러 국민들 사이에서 자연 성장적으로 생겨난 분업 등에 의해서 개별적 민족들의 원시적 폐쇄성이 파괴되면 될수록 그만큼 역사는 세계사로 되어가는 바, 그 결과 예컨대 인도와 중국의 무수한 노동자들이 생계를 잃게 만들고 이 제국들의 존재 형태 전체를 뒤바꾸는 기계가 영국에서 발명되었을 때 이 발명이 하나의 세계사적 사실로 되는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또한 커피와 설탕이 19세기에, 나뽈레옹의 대륙 봉쇄에 의한 이 생산물들의 부족이 독일인들로 하여금 나뽈레옹에게 대항하여 봉기하게 만들고, 그리하여 1813년의 영광스러운 해방 전쟁의 현실적 토대가 됨으로써 그 세계사적 의의를 입증하게 되는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로부터 역사의 세계사로의 이러한 전환이란 ‘자기 의식’, 세계 정신 혹은 그 외의 어떤 형이상학적인 유령의 단순히 추상적인 행위와 같은 것이 전혀 아니며, 완전히 물질적이고 경험적으로 확증 가능한 행위, 가고 서고 먹고 마시고 옷 입는 각 개인들이 그 증거를 제공하는 행위라는 결론이 나온다. – 밑줄 추가.

세계사적인 활동으로의 그들의 활동의 확장과 함께 각 개인들이 점점 더 그들에게 낯선 하나의 힘(그래서 그들이 그 힘의 압박을 소위 세계 정신 따위의 간계로 생각해 왔던 힘) 밑에, 즉 점점 대규모로 커져서 마침내 그 자신을 세계 시장으로서 증명하는 하나의 힘 밑에 노예화되어 갔다는 것은 마찬가지로 지금까지의 역사 속에서 확실히 하나의 경험적 사실이다 (중략) 이 공산주의 혁명을 통하여 전면적인 의존성, 즉 개인들의 세계사적 협업의 이 최초의 자연 성장적 형태는, 인간 상호간의 작용으로부터 창출되었지만 지금까지는 인간에게 완전히 낯선 힘으로서 외경시되어 인간을 지배해왔던 이러한 힘들에 대한 통제와 의식적 지배로 바뀌게 된다. – 독일 이데올로기, 맑스-엥겔스 저작선집 1권,  218-9, 박종철 출판사, 강조는 원문, 밑줄은 추가.

자 그렇다면, 이제 유명한 자본가 한명을 아무나 머리 속에 떠올려보자. 이 자본가는 자신이 실제로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전혀 의식하고 있지 못한 채 자신의 본질에 해당하는 자본의 법칙을 현실적으로 실현하고 있다. 자본이 부여한 사명을 성실히 수행함으로써, 이 자본가는 동시에 자본의 무덤을 열심히 파고 있다. 이 자본가와 그의 수많은 동료들을 통해 (마르크스는 싫어하겠지만 헤겔식으로 표현하자면) 역사는 마침내 세계사로 완전히 전환될 것이다.

이 자본가가 바로 세계사적 개인인 이유다. 그는 자기이익을 위해서는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노동자의 권리는 폭력적으로 제압하고, 그들의 건강을 해치는 노동조건의 개선에는 관심이 없다. 수익성이 떨어지면 노동자를 해고하고, 공장은 해외로 옮긴다. 그는 아침에 깨어나 밤에 잠들기까지 오직 이윤만을 생각하며, 이러한 자신의 노력이 사회를 위한 것이라고, 아니 사실 사회는 오직 자신의 이익을 높이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다른 이들의 비난 따위는 한 귀로 듣고 다른 귀로 흘린다. 그는 이익이라는 깃발만을 앞에 놓고 이미 얻었다고도 온전히 이루었다고도 생각하지 않고,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쉬지 않고 나아간다. 이 세계사적 개인, 세계사적 자본가를 놓고 윤리를 논할 수 없다. 그가 자본주의의 철폐라는 인류의 세계사적 전환, 그 고귀한 사명에 종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이면에서 음지에서 양지를 지향하는 자본주의 경제의 보이지 않는 손은 지금도 은밀히 작동하고 있다. 그러므로 미래는 이미 우리 곁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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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용.

마르크스는 자본론에서 약간은 다른 맥락에서 ‘이성의 간계’를 언급한다.

노동자는 여러 물질들의 기계적, 물리적, 화학적 성질들을 이용해 그 물질들을 [자기의 힘의 도구로서 자기의 목적에 따라] 다른 물질들에 작용하게 한다. (각주 2)

(각주2) “이성은 강력한 동시에 교활하다. 그것이 교활한 것은 [자기 자신은 과정에 직접 관여하지 않고 여러 객체들을 그것들의 성질에 따라 상호작용하여 지치게 만들면서 오직 자신의 목적만을 실현시킨다는] 그 매개적 활동 때문이다” (헤겔, {철학체계}. 제1부, {논리학}. 베를린, 1840년, p. 382) –  자본론 1권 6장, 237

여기서 마르크스는 노동과정 시초에 존재하며, 노동과정 중에 실현되는 목적, 지식 등을 마치 이성인 것처럼 표현하고 있다. 이 목적 혹은 지식이 노동과정 중에 활용되는 “여러 물질들의 기계적, 물리적, 화학적 성질” 등을 간교하게 활용하여, 노동과정 끝에 마침내 자기 자신을 실현한다는 것이다.

(86) 복잡한 노동에 얽힌 복잡한 사정

자본가가 취득하는 노동이 사회적 평균 수준의 단순한 노동인가 아니면 더 복잡한 노동인가는 가치증식과정에서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사회적 평균노동보다 고도의, 복잡한 노동은 [단순한 미숙련 노동력보다 많은 양성비가 소요되며 그것의 생산에 더 많은 시간과 노동이 드는] 노동력의 지출이다. 이러한 노동력은 가치가 더 크기 때문에 고급 노동으로 나타나며, 따라서 동일한 시간 안에 상대적으로 더 큰 가치로 대상화된다. 그러나 방적노동과 보석세공노동 사이의 숙련 차이가 어떻든, [보석세공 노동자가 자기 자신의 노동력의 가치를 보상할 뿐인] 노동부분은 그가 잉여가치를 창조하는 추가적 노동부분과 질적으로는 조금도 구별되지 않는다 … 우리는 자본가가 고용하는 노동자는 단순한 사회적 평균노동을 수행한다는 가정에 의해 불필요한 조작을 생략하고 분석을 단순화시키는 것이다. – 자본론 1권 7장, 261-2

1. 복잡한 노동 혹은 고급 노동에 대한 마르크스의 세 번째 언급이다. 그는 1장 1절의 초반부에서 복잡한 노동의 단순 노동으로의 환원의 문제를 다루면서 “이하에서는 각종 노동력을 단순노동력으로 간주할 것인데, 이것은 오직 환산의 수고를 덜기 위해서이다”라고 언급했고, 6장에서는 교육과 훈련 비용이 노동력 가치에 더해진다고 주장하면서, “이 비용은 노동력이 어느 정도로 복잡한 훈련과 교육을 받느냐에 따라 달라진다”고 했다 (강조 추가). 마르크스에게 있어서는 단순한 사회적 평균 노동에 비해 (단위 시간 당) 더 많은 가치를 생산하는 복잡한 노동은 언제나 복잡한 노동력의 지출이며, 복잡한 노동력은 복잡한 훈련과 교육의 산물이다.

2. 그런데 사정은 이것보다는 복잡하다. 마르크스는 1장에서 한번, 7장에서 한번 이렇게 두번씩이나 노동(력)을 항상 단순 노동(력)으로 취급하겠다고 언급했는데 대체 그 이유는 무엇일까? 사실 1장이나 7장에서 제기하는 복잡한 노동(력)의 문제는 전체 논의의 맥락과는 다소 동떨어져 있고, 마르크스는 복잡한 노동(력)의 단순 노동(력)으로의 환원에 대해서 큰 관심을 두고 있지 않았던 것 같다. 가령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에서 그는 “[복잡노동의 단순노동으로의] 환원을 규율하는 법칙들은 여기에서 논하지 않겠다. 그러나 환원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분명하다”라고 쓴다.

3. 복잡한 노동(력)이 실재한다는 것을 마르크스는 전혀 의심하지 않는다. 그는 환원이 이루어지는 것이 분명하다고 주장한 까닭에 대해서 이어서 다음과 같이 쓴다. “왜냐하면 교환가치로서 복잡노동의 생산물은 단순평균노동의 생산물에 대해 일정한 비율로 등가물이고 그러므로 이 단순노동의 일정량과 등치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매일매일의 상품들 사이의 (양적) 교환관계가 복잡노동이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복잡노동이 단순노동으로 환원된다는 사실을 증명한다는 것이다. 가령 어떤 노동의 산물이 거기에 일반적으로 소요되는 노동시간의 세 배나 네 배의 교환가치를 갖는다면, 이 노동은 한 시간의 노동이 네 시간의 단순노동으로 환원되는 복잡노동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설명에는 두 가지 비판이 있을 수 있다. 첫째, 노동가치론의 위배의 문제다. 마르크스의 노동가치론의 본령은 상품의 가치와 가격이 우선적으로 상품의 생산에 필요한 노동시간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것인데, 서로 다른 노동들 사이에 그 가치생산능력에 있어 일종의 위계가 존재한다면, 노동 뿐만 아니라 이 위계를 규정하는 요소들 역시 가치결정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다. 가령 훌륭한 교육을 받은 사람의 노동의 복잡도가 일반적인 수준보다 높다면, 노동뿐만 아니라 교육 역시 가치를 생산하는 요소라고 볼 수 있는 것 아닌가? 둘째, 순환논법의 문제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가치생산능력의 위계를 결정하는 것은 노동의 복잡도인데, 노동의 복잡도 사이의 차이는 결국 상품들 사이의 교환비율을 통해서만 나타난다. 복잡한 노동이기 때문에 가치를 더 많이 생산한다는 것은 결국, 가치를 더 많이 생산하는 노동을 그냥 복잡한 노동이라고 부르자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4. 첫번째 비판, 그러니까 노동 이외에 다른 요소가 가치를 규정하게 된다는 비판은 베일리가 리카도의 가치론에 대해 제기한 비판과 유사하다. 마르크스는 ‘잉여가치학설사’에서 베일리의 리카도 비판을 다룬다. 베일리는 두 종류의 서로 다른 노동(일)이 동일한 시간 동안 서로 다른 가치를 생산한다면, 둘 중 하나를 단일한 가치의 척도로서의 노동(일)을 확정할 수 없으며 따라서 노동가치론이 성립하지 않는다고 리카도를 비판한다. 모든 노동은 그 질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시간에 동일한 가치를 생산해야 하고 오직 그 경우에만 노동가치론이 성립한다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이에 대해 리카도가 이 둘 사이의 양적 관계가 (비록 리카도가 그 관계의 내용을 해명하지는 않았지만) 주어져 있다면, 다시 말해 두 개의 서로 다른 질적 노동시간이 하나의 단일한 노동시간을 환원되는 비율이 주어져 있다면 노동시간에 의한 가치측정에는 전혀 문제가 없다고 주장한 바가 있다고 지적한다. 재미있게도 베일리 류의 노동가치론에 대한 해석, 그러니까 동일한 시간 동안의 노동은 그 질적 차이와 무관하게 양적으로 동일한 가치를 생산한다는 해석은 지금도 대단한 영향력을 갖고 있다.

마르크스의 노동가치론은 물론 오직 노동만이 가치를 생산한다는 이론이다. 하지만, 그것은 인간 안의 에너지가 노동 중에 소모되어 그것이 생산물 안에 결정화 되었다는 식의 에너지 보존법칙과 같은 이론은 아니다. 노동가치론은 오직 노동만이 가치를 생산한다는 이론이며, 동시에 기술, 숙련도, 교육수준, 토지의 비옥도 등이 노동만이 생산하는 가치의 양을 규정한다는 이론이다.

5. 두번째 비판, 즉 순환논법에 대한 비판은 결국 마르크스가 복잡한 노동(력)을 정의한 후에 그 결과(더 많은 가치생산)를 논하는 것이 아니라, 결과에서 출발해서 그 근원을 ‘복잡함’으로 규정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류의 설명은 생각하는 것보다 꽤 일반적이다. 어떠한 타자가 훌륭한 타자인가 (원인)? 타율이 높은 타자다 (결과). 어떠한 투수가 훌륭한 투수인가 (원인)? 방어율과 피안타율이 낮은 투수다 (결과). 어떤 노동이 생산성이 높은  노동인가 (원인)? 동일한 시간에 더 많은 생산물을 생산하는 노동이다 (결과).

복잡한 노동(력)과 단순한 노동(력)의 문제의 경우 복잡함의 척도는 노동 그 내부가 아니라 그 결과에 있다. 자본주의 경제에서 노동은 우선 (질적으로 단일한) 가치를 생산한다. 따라서 자본주의 경제에서는 동일한 시간에 더 많은 가치를 생산하는 노동(력)이 복잡한 노동(력)이며, 복잡한 노동(력)은 동일한 시간에 더 많은 가치를 생산하는 노동(력)이다. 의사의 노동이 용접공의 노동보다 더 복잡한 노동인 것은 의사의 노동이 용접공의 노동에 비해 본질적으로 복잡한 노동이어서가 아니라, 동일한 시간 동안 더 많은 가치를 생산하기 때문이다. 왜 더 많은 가치를 생산하는가? 마르크스가 얘기했듯이 그것은 “생산자들의 배후에서 진행되는 하나의 사회적 과정에 의해 결정”(자본론 1권, 56)된다. 다만, 그는 이 사회적 과정, 환원비율을 “규율하는 법칙을 논하지는” (비판, 15-16) 않는다.

6. 노동(력)의 복잡도의 차이는 이것이 노동(력)의 가치 혹은 임금의 차이를 규정하는 결정적인 요소라는 점에서 중요하다. 잉여가치학설사의 같은 부분에서 마르크스는 이렇게 쓴다. “[리카도]는 이 [양적 환원]관계가 어떻게 발전하며 규정되는지를 기술하지는 않았다. 이것은 임금의 정의에 속하며, 종국적으로는 노동력 가치의 차이, 다시 말해 노동력의 상이한 생산비용으로 환원될 수 있다” (강조 추가). 직종 간 임금의 격차는 상이한 직종에 필요한 상이한 노동(력)의 복잡도의 차이에 의해서 규정된다. 이것은 동어반복적이고 그다지 큰 의미가 없는 얘기일 수 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노동(력)의 복잡도의 차이가 단지 기술, 교육, 훈련의 차이뿐만 아니라 면허, 노동허가제와 같은 제도적 장치의 결과라는 측면을 고려한다면, 노동의 복잡도의 문제는 노동시장에 대한 마르크스적 연구의 기초가 되어야 한다.

7. 마르크스의 자본론의 형성 2권 (로스돌스키 지음, 정성진 옮김)에는 복잡한 노동(력)에 대한 훌륭한 글이 있다 – 31장 숙련노동의 문제. 하지만 일반적으로 복잡한 노동(력)에 대한 연구는 대단히 미진한 것 같다. 마르크스가 사용한 대부분의 개념이 그런 것처럼 복잡한 노동(력) 역시 그가 창안한 개념이 아니다. 스미스와 리카도, 그리고 본문의 주에 소개된 캐즈노브 등은 모두 ‘환원’의 문제에 관심이 많았다. 고전파 정치경제학에서 복잡한 노동(력)이 어떻게 이론화 되었으며, 마르크스의 이론은 이와는 어떻게 다르고 이것이 오늘날의 자본주의 경제에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연구한다면 매우 훌륭한 석사/박사 논문이 나올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84) 자본가의 항변과 쾌활한 웃음

상황은 이렇다.

  • 10 파운드 면사의 가격= 15원
  • 10 파운드 면사의 생산에 필요한 생산수단 (면화, 방추) = 12원
  • 10파운드 면사의 생산에 필요한 노동력 = 3원
  • 자본가에게 남는 돈 = 0원. 이윤 없음!!!

그래서 자본가는 다음과 같이 항변을 시작한다.

(항변 1): 돈 벌려고 시작한 사업이다!

속류경제학에 정통하고 있는 자본가는 아마 말할 것이다. “나는 나의 화폐를 더 많은 화폐로 만들려는 의도에서 투하했던 것이다”라고. 지옥으로 가는 길이 여러 가지 선량한 의도로 포장되어 있듯이, 그는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으면서 돈벌이를 하려고 했을 수도 있다. – 자본론 1권 7장, 253

다소 번역에 문제가 있다. 올바른 번역은 다음과 같다 – 지옥으로 가는 길은 여러 가지 선량한 의도로 포장되어 있다. 그리고 [자본가는]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으면서도 돈벌이를 할 수도 있다. 다시 말해 마르크스는 (1) 의도가 좋다고 결과도 좋아야 하는 것은 아니며, (2) 돈벌이를 하려면 꼭 생산 말고도 다른 방법이 있다라고 반박하고 있는 셈이다. 비봉판의 번역은 (1)과 (2)가 연결되어 있다는 인상을 준다는 문제를 갖고 있다.

(항변 2): 돈도 못 벌 바에라면 생산은 포기하고 구매만 하겠다!

그는 위협적으로 말한다. 두 번 다시는 이와 같이 속지 않겠다고. 앞으로는 자신이 직접 상품을 제조하지 않고 시장에서 기성품을 사겠다고 그러나 만약 그의 동료 자본가들이 모두 그렇게 한다면 그는 어느 시장에서 상품을 발견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고 화폐를 먹을 수는 없다. – 253-4

아무도 생산하지 않고 구매만 하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사회 -> 불가능하다.

(항변 3): 나의 절제를 보상해다오!

그는 호소한다. “나의 절제를 고려해 주어야 할 것이 아닌가. 나는 나의 15원을 아무렇게나 써버릴 수도 있었다. 그렇게 하지 않고 나는 그것을 생산적으로 소비해 그것을 면사를 만들어낸 것이 아닌가.” 옳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그 대가로 이제는 나쁜 양심 대신 좋은 면사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화폐퇴장자가 한 일을 되풀이하는 것은 그에게 결코 좋은 일이 되지 못한다. 그러한 금욕이 초래하는 나쁜 영향을 화폐퇴장자가 우리에게 보여준 바이다. 더구나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는 황제도 그 권력을 상실하는 법이다. 그의 금욕의 장점이 무엇이든, 생산과정에서 나온 생산물의 가치는 이 과정에 투입된 상품가치의 총액과 같을 뿐이기 때문에 그의 금욕을 특별히 보상해 줄 만한 아무것도 없다. 그러므로 그는 덕행의 보수는 덕행이라고 생각하고 자신을 위로하는 수밖에 없다. – 254

첫번째 반박은 15원을 아무렇게나 낭비하지 않은 대가로 자본가는 이제 면화와 방추 대신 면사를 갖게 되었다는 것. 두번째 반박은 생산하지 않고 꼬불쳐 놓아봐야 좋을 것 하나 없다는 것 (화폐퇴장은 아무것도 만들어내지 못하고, 항변2에 대해 지적한 것처럼 화폐를 먹을 수는 없으니까). 세번째 반박은 어차피 상품의 가치는 이 과정에 투입된 상품가치의 총액과 같으니 절제를 보상하고 싶어도 (설령 황제에게 주고 싶어도) 줄 것이 없다는 것.

(항변 4): 아, 나는 팔기 위해 생산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고 자본가는 더욱 집요하게 주장한다. “면사는 나에게는 쓸모가 없다. 나는 그것을 판매하기 위해 생산했던 것이다”라고. 그렇다면 그는 그것을 팔면 될 것이다. 또는 더욱 간단하게, 이제부터는 자기 자신에게 필요한 물건만을 생산하면 될 것이다 – 254

팔려고 만들었으면 파시오. 아니면 안 팔고 당신이 쓸 물건을 만들던가. 팔려고 만들었으니까 이윤까지 챙겨야 겠다는 것은 무슨 심보요.

(항변 5): 나는 노동자를 위해 봉사했다!

“과연 노동자는 아무것도 없는 데서 자기의 손발만으로 상품을 생산해 낼 수 있는가? 내가 노동자에게 재료를 대주었기 때문에 노동자는 그것을 가지고 그것에다가 자기의 노동을 대상화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또한 사회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와 같은 빈털털이이기 때문에 나는 나의 생산수단, 나의 면화와 나의 방추로 사회를 위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봉사를 하지 않았던가 …” 그러나 노동자도 또한 그를 위해 면화와 방추를 면사로 전환시킴으로써 답례를 하지 않았던가? 어쨌든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봉사가 아니다. 봉사라는 것은 상품에 의한 봉사건 노동에 의한 봉사건 어떤 사용가치의 유용한 효과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교환가치이다. 자본가는 노동자에게 3원의 가치를 지불했다. 노동자는 그에게 면화에 첨가된 3원의 가치로 정확한 등가를, 즉 가치에 대해 가치를 반환했다 – 254-5

물적 부의 생산은 노동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 당연한 상식. 그래서 노동도 (물적 부의) 생산에서 (방추나 면화 만큼이나)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지 않았는가? 노동자에게 생활수단을 주었다는 얘기는 맞다. 그래서 노동자도 그 생활수단의 가치만큼의 새로 생산된 가치를 반환하지 않았는가?

(항변 6) 나 자신도 (감독)노동을 했다!

우리의 친구는 이제 갑자기 [그가 고용하고 있는] 노동자처럼 겸손한 태도를 취하면서 말한다. “나 자신도 노동하지 않았는가? 방적공을 감시하는 노동을, 총감독이라는 노동을 하지 않았는가? 나의 이러한 노동도 역시 가치를 형성하지 않는가?”라고. 그가 고용하고 있는 감독과 관리인은 어이없다는 태도로 어깨를 으쓱한다.

감시, 감독 등의 노동은 여러 가지 상황에 따라 가치를 생산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리고 여기서 감독노동의 가치생산여부는 중요한 쟁점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자본가가 말은 그렇게 하지만, 사실은 이러한 노동이 자본가가 고용한 감독과 관리인에 의해 수행된다는 사실에 있다.

그러나 그러는 동안 자본가는 쾌할하게 웃으면서 본래의 표정을 되살린다. 그가 지금까지 장황하게 말한 것은 모두 우리를 속이려는 것이었다. 그 자신도 그런 말에는 조금도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따위 핑계와 속임수는 고용된 경제학 교수들에게 맡겨두고 있다. 그 자신은 실무적인 사람이므로 사업 이외의 일에 대해 말하는 것은 반드시 깊이 생각하지는 않지만, 사업에 관한 일에 대해서는 언제나 잘 알고 있다. – 256

TV토론에 기업주가 나와 토론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신문에 재벌총수나 대기업 대주주가 친기업정책을 옹호하는 칼럼을 쓴 것을 본 적이 없다. 그들은 “그런 말에는 조금도 관심을 두지 않”기 때문이다.  “그 따위 핑계와 속임수”는 그런 일을 하라고 돈을 받는 경제학 (혹은 당시에는 정치경제학) 교수들에게 맡겨두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자본가의 항변들에 대해 생각해본다. 법인세율이 높아 사업을 하기 어렵다; 국내임금수준이 높아 곧 중국에 따라잡힐 것이다; 기업이 국민을 먹여 살린다는 것을 왜 모르는가 등등. 생각해보니 이런 말, 기업주들이 직접 나서서 하는 경우 별로 없다. 대부분은 XXX 박사, 교수, 연구원 등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다. 하지만, 자본가의 격은 다르다. 세계 최고의 자본가 워렌 버핏은 (이익에 대한) 세율이 높아 투자를 주저하는 자본가를 본적이 없다고 했다. 우리의 실무적인 자본가는 “사업 이외의 일에 대해 … 깊이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는 자신을 위해 봉사하는 이들이 TV토론에 나와 이런저런 말들을 하며 사람들을 헷갈리게 해놓는 사이, 홀로 사태의 본질을 떠올리며 쾌할하고 호탕하게 웃을 뿐이다.

(83) 노동과정론

우리가 지금까지 그것의 단순하고 추상적인 요소들에 대해 설명해 온 노동과정은 사용가치를 생산하기 위한 합목적적 활동이며,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자연에 존재하는 것을 사용하는것이고, 인간과 자연 사이의 신진대사의 일반적 조건이며, 인간생활의 영원한 자연적 조건이다. 따라서 그것은 인간생활의 어떤 형태로부터도 독립하고 있으며, 오히려 인간생활의 모든 사회적 형태에 공통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노동자를 다른 노동자들과의 관계에서 설명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한편에는 인간과 그의 노동, 다른 편에는 자연과 그 소재 – 이것만으로 충분했다. – 자본론 1권 7장, 244

사회형태와 무관한 노동과정의 요소들을 반복하여 설명하고 있다.

노동과정의 일반적 성격은, 노동자가 노동과정을 자기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본가를 위해서 수행한다는 사실에 의해서는 물론 변하지 않는다. 그리고 또 장화를 만들거나 실을 뽑는 특정한 방식도 자본가가 개입했다고 해서 당장 변하는 것은 아니다. 자본가는 우선 그가 시장에서 발견하는 그대로의 노동력을 고용하지 않으면 안 되며, 따라서 [자본가가 아직 존재하지 않았던 시대에 행해졌던 종류의] 노동에 만족하지 않으면 안된다. – 245

이렇게 자본이 있는 그대로의 노동력을 고용할 때, 자본에 대한 노동의 형식적 종속 혹은 포섭이 일어난다. 자본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는다.

노동이 자본에 종속됨으로써 생기는 생산방식 그 자체의 변화는 나중에 비로소 일어날 수 있으며, 따라서 그것은 나중에 고찰할 것이다. – 245

자본은 노동과정 그 자체를 변화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다. 이에 따라 자본에 대한 노동의 실질적 종속이 일어난다. 16장에서 마르크스는 이렇게 쓴다.

상대적 잉여가치의 생산은 진정한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을 요구하게 되는데, 이 생산방식은 자본에 대한 노동의 형식적 종속 (formellen Subsumtion; formal subsumption)의 토대 위에서 그 자신의 방법, 수단, 조건을 만들어 내면서 자연발생적으로 발전한다. 이 발전의 과정에서 형식적 종속은 자본에 대한 노동의 실질적 종속 (reelle Subsumtion; real subsumption)으로 대체된다. – 16장, 685-6

노동과정의 “단순하고 추상적인 요소들” (244)에 주목할 때 노동과정은 시대와 장소를 막론하고 동일하다. 하지만, 특수한 생산양식은 특수한 노동과정을 만들어낸다. 그러므로 노동과정 일반, 생산 일반은 공허한 추상이다.

노동과정론(labour process theory)은 자본주의적 노동과정, 자본에 대한 노동의 실질적 종속의 구체적 측면을 분석한다. 노동과정론은 1974년 출판된 해리 브레이버만의 노동과 독점자본(Labor and Monopoly Capital) – 그의 유일한 저서다 – 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이후 이 책의 성과를 능가할 만한 연구는 없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시각이다. 애초에는 자본주의에서의 노동의 비숙련화(de-skilling) 경향에 주목하였지만, 최근에는 푸코의 권력관계 개념을 적극 차용하면서 노동의 자율성을 강조하는 흐름이 다수를 이루고 있다. 그러면서 안타깝게도 노동가치론의 폐기를 주장하는 학자들이 많아졌다.

아래 노동과정론에 대한 논문들 참조:

난파선에서 기어나오기 – 노동과정과 생산의 정치 (폴 톰슨)

브레이버만(H. Braverman) 이후 최근까지 노동과정이론의 전개과정에 대한 비판적 고찰 (박상언)

(82) 무엇이 아니라 어떻게, 그리고 슬픈 가치론

멸종한 동물 종족을 결정하는 데 화석유골이 중요한 것처럼, 멸망한 경제적 사회구성체를 탐구하는 데 노동수단의 유물이 중요하다. 경제적 시대를 구별하는 것은 무엇이 생산되는가가 아니고 어떻게 생산되는가이다. 노동수단은 인간의 노동력 발달의 척도일 뿐 아니라 [사람들이 그 속에서 노동하는] 사회적 관계의 지표이기도 하다. 노동수단 중 역학적인 종류의 노동수단 [그 전체를 생산의 골격, 근육계통이라고 부를 수 있다]은, 예컨대 [관, 통, 바구니, 항아리 등과 같이] 노동대상의 용기로 쓰일 뿐이고 따라서 생산의 혈관계통이라고 부를 수 있는 노동수단에 비해, 하나의 사회적 생산시대를 더 결정적으로 특징짓는다. 용기로서의 노동수단은 화학공업에서 비로소 중요한 역할을 한다. (각주 6)

(각주 6) 지금까지의 역사 기술은 [모든 사회생활의 토대이며 따라서 모든 현실적 역사의 토대인] 물질적 생산의 발달에 거의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러나 적어도 선사 시대는 이른바 역사연구가 아니라 자연과학적 연구에 입각하여 도구나 무기의 재료에 따라 석기시대, 청동기시대, 철기시대로 구분되고 있다. – 자본론 1권 7장, 238-9

1. 역사적 시대의 구분에 있어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물질적 생산의 방식이며, 물질적 생산의 방식에 그 시대에 고유한 사회적 관계가 반영되어 있다는 역사적 유물론 (historical materialism)을 깔끔히 설명해 주는 구절이다.

2. 기술의 발전이 새로운 역사를 열어간다는 식의 기술 결정론 (technological determinism)은 곤란하다. 노동수단은 사회적 관계를 규정(determine)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의 지표(Anzeiger; indicators)”일 뿐이다. 노동수단, 즉 기술은 하나의 화석과 같아서 한 시대의 영화의 흔적을 보여주기는 하지만, 그 시대의 사회적 관계가 특수한 기술로 환원될 수는 없다.

3. 1962년부터 지식경제라는 말이 떠돌기 시작한 이래 정보사회, 정보경제, 신경제 같은 엄청난 용어들이 세상에 나타났다. 대부분 정보통신 기술이 가져다준 새로운 변화를 강조하는 용어들이다. 이러한 조류에 대응하는 좌파적 이론으로는 네그리, 하트 등의 자율주의, 인지자본주의론을 들 수 있겠다. 이들은 물질적 생산이 더 이상 중요하지 않은 현대자본주의에서는 노동가치론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나는 제조업의 비중이 낮아져 경제 내에서 제조업이 주변화되고 있다는 현실분석에 동의하지도 않으며, 정보통신 기술의 가장 큰 경제적 기여는 주로 제조업에 가져다준 혁신에 있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노동가치론은 제조업에 국한된 이론이 아닐뿐더러 컨베이어 벨트를 이용한 대량생산과 같은 매우 특수한 생산방식에만 적용되는 이론은 더더욱 아니다.

4. 노동가치론은 무엇보다 상품생산 – 그 안에서 인간도 상품이 된다 – 을 매개로 한 인간과 인간 사이의 (착취)관계에 대한 이론이다. 이 이론은 생각하는 것보다 매우 매우 강력하다. 새로운 기술이 나타나 세상이 조금 달라졌다 하여 사정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노동가치론은 왜 자본주의에서 계속해서 새로운 기술이 나오고, 마치 세상이 달라진 것처럼 보일 수밖에 없는지를 설명하는 이론이다.

현실은 구체적이고 복잡다단하다. 그래서 노동가치론에 대한 초보적인 수준의 이해와 모순되어 보이는 현상들을 도처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현상들은 겉보기와는 달리 노동가치론에 대한 큰 위협이 되지 못한다. 오히려 이들이야말로 바로 노동가치론의 존재 이유라고 할 수 있다. 역설적으로, 이러한 겉보기에 위협적으로 보이는 현상들과의 대면울 통해서만 노동가치론의 유효성이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다.

노동가치론은 현실이 거꾸로 서 있다는 것을 폭로하는 이론이며, 동시에 현실이 필연적으로 거꾸로 서 있을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는 이론이다 (현실을 바로 세우려는 이론이 아니다). 본모습이 필연적으로 전도되어 나타난다는, 진정한 미가 추함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고, 타살이 자살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는, 슬픈 이론이다. 가치론은 전도된 현상의 영역과 그 본모습의 영역을 종횡무진 왔다갔다 한다. 그래서 사람을 헷갈리게 한다. 현상의 영역이 폭로된 본모습과 다르다고 해서 노동가치론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고 주장하면, 노동가치론은 쓸쓸하다. 왜냐하면 노동가치론은 현상이 그 본모습과 필연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자신이 필요하다고 호소하는 이론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치론 공부에 필요한 것은 일종의 믿음과 신뢰다. “온갖 교훈의 풍조에 흔들리거나, 이리저리 밀려다니지 말아야” 한다.

 

(81) 오로지 인간에게서만 볼 수 있는 형태의 노동

우리가 상정하는 노동은 오로지 인간에게서만 볼 수 있는 형태의 노동이다. 거미는 직포공들이 하는 일과 비슷한 일을 하며, 꿀벌의 집은 인간 건축가들을 부끄럽게 한다. 그러나 가장 서투른 건축가를 가장 훌륭한 꿀벌과 구별하는 점은, 사람은 집을 짓기 전에 미리 자기의 머리 속에 그것을 짓는다는 것이다. 노동과정의 끝에 가서는 그 시초에 이미 노동자의 머리 속에 존재하고 있던 [즉,관념적으로 이미 존재하고 있던] 결과가 나오는 것이다. 노동자는 자연물의 형태를 변화시킬 뿐 아니라 자기 자신의 목적을 자연물에 실현시킨다. – 7장, 236

내 연구주제는 자본주의에서의 기술발전과 지식의 생산에 대한 것이다. 마르크스는 상품의 생산에 대한 연구에 집중했고, (상품의 생산에 필요한) 지식의 생산에 대해서는 별다른 관심이 없었던 것 같다. 이 주제로 공부를 시작한 계기는 정보재 가치논쟁 때문이었다. 이 논쟁은 소프트웨어의 소스코드를 생산하는 노동을 어떻게 이론화해야 할 것이냐에 대한 논쟁이었는데, 이 노동이 가치를 생산하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중요한 쟁점 중 하나였다. 나는 소스코드, 더 넓게는 (한번 생산되면 영원무궁토록 재사용될 수 있는) 지식을 생산하는 노동은 가치를 직간접적으로 생산하지는 않지만, 이 지식을 이용하여 상품을 생산하는 상품생산노동을 강화된 노동으로 작용하게 하는 방식으로 가치생산에 기여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의 출발점은 지식의 생산과 상품의 생산이 분리되어 있고 그 성격이 현저히 다르다는 것이다. 물론 learning by doing이라는 개념이 포착하는 것처럼 상품의 생산이 동시에 지식의 생산으로 이어질 수 있지만, 나는 이 둘 사이의 구분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고 보았다. 그리고 마르크스가 지식에 관한 연구를 상세히 수행하지는 않았지만, 아마 내 생각에 동의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서 이 구절을 종종 애용하곤 한다. 마르크스는 “노동과정의 끝에 가서는 그 시초에 이미 노동자의 머리 속에 존재하고 있던 [즉, 관념적으로 이미 존재하고 있던] 결과“가 나온다고 언급했다. 바로 노동자의 머리 속에 존재하고 있던 것, 이것이 지식이다. 그리고 지식은 노동과정의 시초에 이미 존재한다.

물론 여기서 지식노동과 상품생산노동 사이의 구분은 사회형태와 무관한 것이다. 사회형태와 무관한 어떤 것, 마르크스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래서 마르크스 정치경제학을 공부하는 나는 자본주의에서 지식의 생산과 유통과 소비가 어떻게 이루어지며, 이것이 자본주의의 내적법칙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연구하고 있다.

그런데, 이 구절을 다른 맥락에서 살펴볼 수도 있다. 지식노동과 상품생산노동의 구분은 마르크스에 따르면 “오로지 인간에서만 볼 수 있는 형태”이다. 그리고 이 부분을 쓰기 20여년 전 그는 경제학-철학 수고에서 비슷한 주장을 펼친 바가 있다.

동물은 자신의 생활 활동과 직접적으로 하나이다. 동물은 자신의 생활 활동과 구별되지 않는다. 동물은 자신의 생활 활동인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생활 활동 자체를 자신의 의지와 의식의 대상으로 삼는다. 인간은 의식적 생활 활동을 가진다. 인간이 직접적으로 그것에 융합되는 규정성이란 없다. 의식적 생활 활동은 인간을 동물적 생활 활동으로부터 직접적으로 구별짓는다. 바로 이 때문에 인간은 하나의 유적 존재인 것이다. 혹은 인간이 바로 유적 존재이기 때문에, 그는 의식적 존재이며, 다시 말해서 그 자신의 생활이 그에게 있어 대상인 것이다. 바로 이 때문에 그의 활동은 자유로운 활동인 것이다. 소외된 노동은 이 관계를 전도시켜서 급기야 인간은 자신의 생활 활동, 자신의 본질을 단순히 자신의 생존을 위한 수단으로 만들어 버리는데, 이는 바로 인간이 의식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 1844년의 경제학 철학 초고, 78

그가 만 26세에 쓴, 이 책을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는 말자. 물론 매우 훌륭한 책이고, 마르크스의 생각이 이 책으로부터 크게 바뀐 것은 아니다.

다만, 이 구절을 그의 완성된 생각으로 볼 수는 없다. 여기서 마르크스는 인간의 의식적 생활 활동이 인간의 본질이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이러한 생각은 자본론의 마르크스에게 있어서는 폐기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의식적 생활활동이 인간을 동물로부터 구분지으며, 그를 유적 존재로 만든다. 지식을 생산하는 인간, 그 지식을 토대로 자연을 가공하는 인간, 그가 바로 동물과 구분되는 인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