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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 별로 안 중요한 마르크스의 인간관 – 자연 속에서 자연과 부딪히며 자연을 인간화하는 자연력으로서의 인간

사용가치 또는 재화의 생산이 자본가를 위해 자본가의 감독 하에 수행된다고 해서 그 생산의 일반적 성질이 달라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러므로 노동과정은 우선 첫째로 어떤 특정 사회형태와 관계없이 고찰되어야 한다. – 자본론 1권 7장, 235

사람은 흙에서 태어나 흙으로 돌아간다고 한다. 엄연한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공통성이 사람과 흙 각각에 과연 얼마나 중요한가? 사람과 흙은 아마도 백 수십여가지의 원소들로 환원될 수 있을 것이므로, 이들 사이의 공통성은 환상이 아니다. 하지만, 이 공통성은 사람과 흙의 본질에 대해서 무엇을 알려주는가? 그것이 하나의 추상에 불과한 이상, 공통성은 무의미하다.

사회형태와 무관한 노동과정 역시 마찬가지다. 노동과정 그 자체, 사회형태와 무관한 노동과정 그 자체가 존재한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존재하건 존재하지 않건 별반 중요하지 않다. 이러한 추상으로부터 특수한 생산양식, 사회형태로 나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마르크스가 그륀트리세에서 “생산일반”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 까닭이다.

노동은 무엇보다도 먼저 인간과 자연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하나의 과정이다. 이 과정에서 인간은자신과 자연 사이의 신진대사를 자기 자신의 행위에 의해 매개하고 규제하고 통제한다. 인간은 하나의 자연력으로서 자연의 소재를 상대한다. 인간은 자연의 소재를 자기 자신의 생활에 적합한형태로 획득하기 위해 [자기의 신체에 속하는 자연력인] 팔과 다리, 머리와 손을 운동시킨다. 그는이 운동을 통해 외부의 자연에 영향을 미치고, 그것을 변화시키며, 그렇게 함으로써 동시에 자기 자신의 자연을 변화시킨다. 그는 자기 자신의 잠재력을 개발하며, 이 힘의 작용을 자기 자신의 통제 밑에 둔다. – 235-6

1844년 경제학-철학 수고의 ‘소외’에 관한 장을 연상시키는 구절이다. 25년 여가 지난 후에도 마르크스는 젊은 시절의 생각을 간직하고 있다 – 비록 그 의의가 달라지기는 했지만.

마르크스는 노동을 통해 인간이 자연을 변화시키며, 또한 자신을 변화시킨다고 했다. 뒤에 나오지만 특히 노동수단은 인간의 “자연적 모습의 연장” (238) 이기도 하다. 그는 인간을 자연과 분리된 존재로 보지 않았다. 자연 속에서, 자연과 부딪히며, 자연을 그 자신으로 끊임없이 변형시키는 존재, 그것이 인간이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관은, 사회형태와 무관한 인간관이라는 점에서 불충분하다. 자본론 1권의 3편을 쓰고 있는 마르크스는 이러한 인간상에 별다른 관심이 없다. 이것이 이상적 인간관인 것도 아니다. 사회형태와 관계 없이 인간과 자연 사이의 관계는 언제나 이러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가 나쁜 것은 인간을 어떠한 이상적 상태로부터 소외시키기 때문이 아니다. 자본주의는 그냥 자본주의라서 나쁘다. 한 계급의 다른 계급의 지배가 지배 그 자체에 머무르지 않고, 나쁜 결과들을 만들어내기 때문에 더 나쁘다.

이론: 단순하고도 복잡한 것

이론이란 단순한 것이기도 하고 복잡한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현실과의 관계에서 보면 단순할 수밖에 없다. 이론이란 현실에 대한 이론가의 지적 개입의 산물로, 거기에선 현실에 대한 일정한 추상화와 단순화가 일어나기 마련이다. 따라서 이론의 추상성/단순성 그 자체는 문제가 아니며, 이론에 필연적으로 따라붙은 ‘원죄’와도 같은 것이다.

다른한편, 당분간 이론 그 자체의 영역이 있다고 해보자. 여기에서 이론은, 그러니까 ‘좋은’ 이론은 복잡해야만 한다. 즉 그것은 ‘진짜 현실’과 같은 복잡한 구조를, 그러나 ‘진짜 현실’과는 달리 (왜냐하면 이론은 현실 그 자체가 아니라 그 현실의 ‘지적 재구성’이므로) 체계적인 구조를 갖지 않을 수 없다. 마르크스가 {요강} 등에서 ‘현실/역사의 순서’와 ‘구조/논리의 순서’를 구별한 것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다.

이러한 복잡성을 갖지 못하는 이론은 필연적으로 ‘환원론’이 될 수밖에 없다. 즉 자신의 단순함 속으로 현실을 끌어들이려 하는 것이다. 반대로 복잡한 이론은 현실의 복잡성을 반영하면서 끊임없이 거기에 개입함으로써 끊임없이 발전한다. 그래서 단순하고 환원론적인 이론은 언제나 자신의 완결성을 주장하지만, 복잡하고 체계적인 이론은 언제나 자신의 부족함을 탓한다. 바로 이 부족함의 자기인식이야말로, 이론의 내적 발전을 추동하는 원동력이다. 마르크스가 {자본론}이라는 괴물 저작을 거의 완성해놓고도 그 출판을 미룬채, 그리고 죽음의 위협과 사투하면서까지도 자본주의의 작동과 변모에서 주의를 떼지 않은 것은 이런 의미에서다.

통상적인 부르주아 이론(경제학을 포함해)이 전자와 같은 환원론인 반면, 마르크스의 이론은 바로 이런 후자에 속하는 이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의 이론에 대해 그것이 환원론(경제로의 환원론, 생산중심주의 등)이라고 비판하는 이들은, 이론의 위와 같은 성격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79) 유통에서 생산으로

노동력의 소비과정은 동시에 상품의 생산과정이며 잉여가치의 생산과정이다. 노동력의 소비는 다른 모든 상품의 소비와 마찬가지로 시장[즉, 유통분야] 밖에서 수행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화폐소유자 및 노동력소유자와 함께 [모든 것이 표면에서 일어나고 또 누구의 눈에나 쉽게 띄는] 이 소란스러운 유통분야를 벗어나 이 두사람을 따라 ‘관계자외 출입금지’라고 입구에 쓰인 은밀한 생산의 장소로 들어가 보도록 하자. 이곳에서 우리는 자본이 어떻게 생산하고 있는가 뿐 아니라 어떻게 자본 그 자체가 생산되고 있는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윤창조의 비밀도 드디어 폭로되고 말 것이다. – 자본론 1권 6장, 230

1. 지금까지 우리는 쭉 유통영역에 머물러 있었다. 하지만, 가치가 그 운동의 주체인 MCM에 대한 고찰로부터 가치의 증식을 위해서는 유통뿐만 아니라 유통 외부의 별도의 장소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곳에서 바로 C – C – C가 일어난다. 이곳은 “소란스러운 유통분야”와는 확연히 다른 “은밀한 생산의 장소”다. 자유, 평등, 벤담, 소유 같은 소란스러움은 전혀 찾아볼수 없다.

2. 우리가 화폐소유자와 노동력소유자를 따라 유통에서 생산의 장소로 이동함에 따라 이제 분석의 대상 역시 자본주의의 유통영역에서 자본주의의 생산영역으로 이동한다. 그리고 더 이상, 상품의 교환, 유통, 본질의 현상형태 같은 것들은 마르크스의 큰 관심이 아니다. 그는 이제 자본주의경제의 생산의 법칙에 집중한다.

3. 따라서 마르크스가 분석의 용이함을 위해 도입한 여러 가지 가정들, 가령 “각종 노동력을 단순노동력으로 간주”(1장, 56), 노동생산물의 상품으로의 “전환의 정상적인 진행” (3장, 138)의 전제는 이후의 분석에서 여전히 유효하다. 하지만, 생산의 분석에 있어서는 반드시 필요한 가정이지만, 후대의 학자들이 이러한 가정들에 매몰되어 자본주의 경제의 분석에서 이러한 현실적인 측면들을 거의 완전히 무시했다는 것은 상당히 아쉽다. 유통에서 생산으로 이동하는 것은, 다시 생산에서 유통으로 이동하기 위해서이다. 이 두번째 이동에서는 분석의 용이함을 위해 도입한 가정들이 점차 완화되어야 하겠다.

4. 노동력의 소비가 “상품의 생산과정”이며, 동시에 “잉여가치의 생산과정”이라는 지적은 노동과정을 노동과정이면서 동시에 가치증식과정으로 분석하는 7장의 내용을 암시하고 있다. 여기에는 각각 “자본이 어떻게 생산하고 있는가”와 “어떻게 자본 그 자체가 생산되고 있는가”가 정확히 대응한다.

5. “모든 것이 표면에서 일어”나는 유통분야 – 다소 어색한 번역이다. 펭귄판에 그렇게 번역되어 있지만, “표면에 해당하는” 혹은 “표면에 위치하는” (auf der Oberfläche hausende)이 정확한 번역일 것 같다. 유통이 본질이 아니라 현상, 표면, 표층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물론 생산이 본질이다.

6. “관계자외 출입금지” – 독어 원문에도 영어로 “no admittance except on business”라고 되어 있다.

속류자유무역주의자들은 이 단순상품유통 또는 상품교환분야로부터 자신들의 견해나 개념을 끌어내고 [또 자본과 임금노동에 근거한 사회를 평가하는] 그들의 판단기준을 끌어내고 있으나, 이제 이 분야를 떠날 때 우리는 우리의 등장인물들의 면모에 일정한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전의 화폐소유자는 자본가로서 앞장서 걸어가고, 노동력의 소유자는 그의 노동자로서 그 뒤를 따라간다. 전자는 거만하게 미소를 띠고 사업에 착수할 열의에 차 바삐 걸아가고, 후자는 가지 자신의 가죽을 시장에서 팔아버렸으므로 이제는 무두질만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겁에 질려 주춤주춤 걸어가고 있다. – 231

1. 생산이 본질이고, 유통이 현상/표면이므로 유통에서 끌어낸 이론들은 죄다 말짱황이라는 것이다. 물론 유통의 이론은 필요하다. 하지만 이것은 본질로서의 자본주의적 생산의 현상형태로서의 유통의 이론이어야 한다. 마르크스는 생산의 분석 이후에 이를 바탕으로 유통을 이론적으로 재구성하는 방식으로 (추상에서 구체로의 상승) 유통의 이론을 만들어낸다. 여기에 대해서는 2권과 3권 참조.

2. 현상 이면의 본질은 보지 못하고, 현상에만 매몰되어 있는 이론들에 마르크스는 속류, 천박함, 상스러움(vulgar)이라는 딱지를 붙인다. 사람의 내면은 보지 않고 외모와 재산만 따지는 사람들을 보통 속물이라고 부르는 것을 생각하면 매우 적절한 이름짓기라고 하겠다. 적어도 스미스와 리카도는 그렇지 않았다. 기독교의 신 역시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는다”고 했다. 마르크스가 비판의 대왕이긴 하지만, 고전파경제학과 기독교는 그래도 속류경제학보다는 나은 취급을 받았다. 미안한 얘기지만 오늘날의 주류경제학은 속류경제학의 전통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했다.

3. 무두질에 대해서는 이미 훌륭한 글이 있다. 더 보탤 것이 없다

6장 끝. 2편 끝.

(78) 자유! 평등! 소유! 벤담!

[그 안에서 노동력의 매매가 진행되는] 유통분야 또는 상품교환분야는 사실상 천부인권 참다운 낙원이다. 여기에서 지배하고 있는 것은 오로지 자유, 평등, 소유, 벤담이다. 자유! 왜냐하면 하나의 상품[예컨대 노동력]의 구매자와 판매자는 자기들의 자유의지에 의해서만 행동하기 때문이다.그들은 법적으로 대등한 자유로운 인물로서 계약을 체결한다. 계약이라는 것은 그들의 공동의지가 하나의 공통된 법적 표현을 얻은 최종의 결과다. 평등! 왜냐하면 그들은 오직 상품소유자로서만 서로 관계하며 등가물을 등가물과 교환하기 때문이다. 소유! 왜냐하면 각자는 자기의 것만을 마음대로 처분하기 때문이다. 벤담! 왜냐하면 각자는 자기 자신의 이익에만 관심을 기울이기 때문이다. 그들을 결합시켜 서로 관계를 맺게 하는 유일한 힘은 각자의 이기주의, 이득, 사적 이익 뿐이다. 각자는 오직 자기 자신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타인에 대해서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바로 그렇게 하기 때문에 그들은 모두 [사물의 예정조화에 따라 또는 전지전능한 신의 섭리에 따라] 그들 상호간의 이익, 공익, 전체의 이익이 되는 일을 수행하는 것이다. – 자본론 1권 6장, 230

너무나 유명하고 명쾌한 구절이라 별도의 부가적인 설명이 불필요하게 느껴지지만 약간의 사족을 달아 본다.

1. 자유, 평등, 소유, 벤담 – 소위 말하는 리버럴리즘의 정수를 담고 있지 않은가! 마르크스는 자유,평등, 소유, 벤담이 부자유, 불평등, 무소유, 전면적 사회관계의 필연적으로 전도된 형태임을 폭로하고 있다.

2. 이와 동시에 마르크스는 천부인권의 개념 – 시대와 장소를 초월한 인권의 개념을 비판하고 있다. 천부인권에 해당한다고 생각되는 자유, 평등, 소유, 벤담은 자본주의적 사회적 관계 – 이것은 착취관계다 – 전도된 현상형태들이며, 따라서 역사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마르크스에게 시대를 초월한 인간상이라는 것은 없다고 보아도 좋다.

* 중요하지는 않지만 낙원의 원문은 에덴동산(Eden)이다.

3. “예정조화”는 아무래도 라이프니츠의 예정조화론을 “전지전능한 신의 섭리”는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을 지칭하는 것 같다.

여담이지만, 나에게 매우 뜻깊은 구절이다. 10여년 전 바로 이 부분을 읽고 마르크스를 공부하기로 결심했었다. 그때 7호선이 생기기전 좁아터진 2호선의 하루 두시간 출퇴근 길에서 자본론 1권을 읽었었다. 지식은 부족했지만 열정이 넘쳐 힘든 줄을 몰랐고, 먹고 살기 힘든 공부라는 것을 알았지만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아니다. 좋아서 아무 생각이 없었다.

석사, 박사과정에 진학했고, 사이비 이론이 판을 치는 세상에서 둘도 없는 훌륭한 선생님들을 만났다. 일과 학업을 병행해서 재정적인 어려움도 없었고 유학을 결심하고 사직서를 냈을 때 회사에서 유럽근무를 권했으니 나는 행운아다. 다만, 돌이켜보면 주경야독을 핑계로 공부에 집중하지 못하고 세월을 낭비한 것이 한탄스러울 뿐이다. 엉덩이에 종기가 날 정도로 맹렬히 공부했던 마르크스를 떠올릴 때마다 어리석음과 게으름을 자책하며 가슴을 친다.

세어보니 그동안 여덟 편의 논문을 발표하고 한 권의 책을 번역했다. 물론 내가 지금의 열배, 백배, 천배의 글을 쓰더라도 세상은 꿈쩍도 하지 않을 것이다. 평생 이론가의 자조와 한탄을 벗어나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나는 역사유물론의 도도한 물결에 내 몸을 맡기겠다.

학문에는 지름길이 없습니다. 오직 피로를 두려워하지 않고 학문의 가파른 오솔길을 기어 올라가는 사람만이 학문의 빛나는 정상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 프랑스어판 서문, 21

(77) 노동력인가 인적자본인가

노동력의 가치는 [다른 모든 상품의 가치와 마찬가지로] 이 특수한 상품의 생산과 재생산에 필요한 노동시간에 의해 규정된다. 노동력이 가치인 한, 노동력 그 자체는 거기에 대상화되어 있는 일정한 양의 사회적 평균노동을 표현할 뿐이다. – 6장, 223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는 스스로의 몸을 활용하여 노동력을 생산한다. 이때 그는 노동력을 생산하는 자아와 노동력으로 대상화된 자아로 분열되는데, 이러한 이중화를 통해서만 그는 비로소 인간이 된다.

이윤을 목적으로 생산된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판매를 위해서 생산된다는 점에서 노동력은 분명히 상품이다. 따라서 노동력 상품의 가치는 이 상품을 재생산하는데 필요한 사회적 필요노동시간에 의해서 결정된다. 그런데, 단일한 종류와 질의 노동력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유기체의 일반적인 천성을 변화시켜 일정한 노동부문에서 기능과 숙련을 몸에 익혀 발달한 특수한 노동력으로 되게 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훈련 또는 교육이 필요한데, 거기에는 또 얼마간의 상품들(또는 등가)이 소요된다. 이 비용은 노동력이 어느 정도로 복잡한 훈련과 교육을 받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이러한 비용은 [보통의 노동력의 경우는 매우 적지만] 노동력의 생산을 위해 지출되는 가치 속에 들어간다. – 225

수공업 시대의 장인들 – 이들의 기술은 하나의 분야에 특화되어 있다 – 과는 달리, 자본주의 시대의 노동자들은 특수한 기술이나 산업에 종속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숙련노동자’라는 표현이 보여주는 것처럼 산업 간 직종 간 이동이 완전히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애플이 아이폰, 아이패드 등의 생산을 중국의 폭스콘 아웃소싱 하는 것은 단순히 비용 때문이 아니다. 아이폰 한 대의 원가 중 조립, 테스트 등의 생산비용은 8달러에 불과하다. 이 비용이 두 배로 늘어난다고 해서 수익성에 큰 차이가 있겠는가? 공급체인의 효율성을 비롯한 여러 다른 이유가 있지만, 미국에서 더 이상 충분한 숙련공을 확보할 수 없다는 것도 주요한 이유 중 하나다. 여기에 대해서는 뉴욕타임즈의 기사 참조.

이렇게 노동력은 마르크스가 말하는 것처럼 “특수한 노동력”이 되어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특수한 교육과 훈련이 필요하다. 주류경제학에서는 어떤 특수한 교육과 훈련은 인적자본(human capital)의 축적으로 이어진다고 주장하는데, 이로써 노동자가 자본이 되어 버리는 어이 없는 사태가 일어난다. 가령, 장기간 어려운 교육을 받아야 하는 의사나 특수한 기계와 설비를 다루는 숙련공은 하루 아침에 만들어질 수 없고, 따라서 쉽게 대체할 수 없다. 이들은 또한 높은 임금을 받는다. 주류경제학에 있어 평균치를 초과하는 임금은 노동에 지불되는 임금이 아니라 인적자본에서 발생하는 이윤이다. 마르크스에게 있어서는 이 초과분은 고급 노동력에 지불되는 노동력 가치 중 “보통의 노동력”의 가치를 초과하는 부분이다.

위의 본문에서 마르크스는 이 초과분이 특수한 훈련과 교육 비용 때문이며, 이것이 노동력의 가치에 더해진다고 주장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여기서 자세하게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나는 특수한 훈련과 교육을 받은 노동자의 노동력의 가치가 높아지는 것은, 그 훈련과 교육비용이 직접 노동력의 가치에 더해지기 때문이 아니라, 그 노동력의 노동이 (단순노동이 아닌) “복잡한 노동” (1장, 56)으로 작용하게 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아마도 마르크스는 지식과 교육, 훈련이 가치생산에서수행하는 역할에 대해서 아주 깊게 고민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아니면 내가 틀렸던가.

공정한 가격, 공정한 소비: 커피값 논란(?)에 대해

요즘에 커피값 때문에 말들이 많은가보다. 뉴스를 잘 보지 않아 몰랐는데, 텔레비전에서도 보도되었나보다. 스타벅스에서 커피값을 올렸나? 잘 모르겠다. 이런 문제와 관련, 다음 기사가 무척 재밌다. 요즘 내가 얼마뒤에 발표를 해야 해서 글을 하나 쓰고 있는데, 그거랑도 관련이 되어, 짬이 별로 없지만 간단하게 한번 써본다.

기사: [왜냐면] ‘반값’ 커피 아닌 ‘제값’ 커피가 필요하다 / 박효원 아름다운가게 공정무역사업처 간사 (링크)

전반적인 문제제기—커피가 당신 손에 쥐어지기까지 고생하는 사람들 많다, 이들에게 적절한 보상을 해줘야 한다—에는 대체로 상식 선에서 동의하나 결론은 물론 추론방식이 좀 이상하다. 아니, 웃기다.

1. 글쓴이가 말하는 ‘반값 커피’를 주장하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모르겠는데, 그에 대한 대안으로 ‘제값 커피’를 주장한다는 게 좀 이상하다. 그래서 스타벅스에서 커피값을 올려야 한다는 말인가, 말아야 한다는 말인가? 처음엔 커피값 올리는 게 부당하다고 말하는 듯 하더니, 뒤에 가서는 올려야 한다니 이상하다.

2. 문제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기업의 이윤(추구행위)에 대해선 아무런 문제제기를 하지 않고 있다는 데 있다. 즉 기업의 이윤에 대해 묻지를 않으니, 결론은 ‘제값 커피’, 즉 ‘커피 가격을 올리자’, 좀 더 노골적으로는 ‘힘없는 제3세계 농부들이랑 커피숍 알바들을 위해 우리가 돈 더 내자’가 될 수밖에. 그렇다면 글쓴이는 ‘알바생 처우개선’이라는 조건만 붙는다면 스타벅스 커피값 인상에 동의한다는 얘긴가? (이쯤 되면, 다음과 같이 일갈하실 분도 계시겠다. “아름다운 가게? 마, 니네 알바생한테나 돈 제대로 줘!” 라고.)

그러니까, 이를테면, ‘기업이 폭리를 취하고 있는 현재 구조상, 농부들이랑 알바생들한테도 돈 더 주고, 동시에 소비자가격도 낮출 수 있다. 당장 시행하라’라고 왜 말 못하나? 후달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기업의 이윤(추구행위)에 대한 긍정은 다음과 같은 글쓴이의 문제제기에서 가장 뚜렷하게 드러난다.

. . . 대기업이 부당하게 너무 많은 이득을 가져간다는 사회적인 불신이 짙게 깔려 있다. 그런데 소비자들이 반값으로 커피를 마시면 그것이 해결책일까?

3. 이게 대체 무슨 심뽀일까? 말이 되게 이해를 해보면 이런 논리구조가 깔려있는 거다. (1) 기업의 이윤추구행위는 자본주의에서 정당한 거다. 그러니 큰 잘못만 없다면 그들의 행위를 인정하자. (2) 하지만 스타벅스 등은 뭔가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 커피농부들이랑 알바생들한테 ‘제값’을 지불하지 않는 것이다. (3) 따라서 이들에게 ‘제값’을 지불해야 한다. 모든 것이 ‘제값’만 지불받는다면 아무 문제 없는거다.

‘제값’이라! 대체 커피전문점 알바생의 제값은 얼마일까? (이봐요, 글쓴이. 당신의 ‘제값’은 얼마요? — 그렇다고 ‘shindan’한테 물어보진 마시고…) 자본의 ‘제값’은 이윤이고, 알바생의 ‘제값’은 임금이다. 그러니 위 저자는 자못 진지하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 셈이다: “자본가가 정당한 이윤을 챙기듯이, 알바생도 그렇게 취급받아야 한다.” 정당한 이윤과 정당한 임금! 마르크스라면, {깡디드}의 한 구절을 인용해 이렇게 비꼬았을 것이다: “가능한 최고의 세상에서는 모든 것이 최선의 상태에 있다!”

4. 글쓴이는 ‘비교우위'(comparative advantage)에 대해서도 말한다. 다음과 같이.

커피 위기가 지나간 지금도 주요 생산지인 남미와 아프리카의 많은 나라들은 저개발국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자유무역이 양국을 모두 부유하게 만든다는 ‘비교우위론’은 하루 3달러 미만으로 생활하는 세계 27억명 인구에게 말 그대로 ‘남의 나라’ 이야기다.

여기엔 비교우위론에 대한 짙은 오해가 깔려있다. 비교우위론은 무역은 거래당사국들을 ‘부유하게’ 만들어준다는 이론이 아니다. 즉 ‘부유하게’가 아니라 ‘전보다 더’ 또는 ‘거래하지 않을 때보다 더 부유하게’다. 따라서 위와 같은 글쓴이의 비판을 만약 자유무역 옹호론자들이 본다면, “그래서 커피무역을 하지 말자는 얘기냐”라고 받아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글쓴이가 비교우위론을 부정하는 것 같지는 않다. 그는 사실상 다음과 같이 넌지시 말하고 있을 따름이다: “커피농부들이 ‘제값’만 지불받는다면, 비교우위론에 입각한 ‘상호번영’이 가능하다. 따라서 우리는 그들에게 ‘제값’을 지불해야 한다. 또한 기업은 오직 자기들의 이윤추구에만 혈안이 되어있으므로—그것은 나쁠 것이 없다—우리 소비자들이 나서서 값을 더 쳐주자!”

5. 하지만 문제는 비교우위가 존재하느냐 여부가 아니다. 이 문제는 좀 복잡한데… 그냥 지금은 간단하게만 언급한다. 많은 이들에게 놀라운 얘길지 모르겠는데, 마르크스는 오히려 비교우위, 좀 더 일반적으로는 ‘무역의 이득'(gains from trade)을 인정하는 입장이다(사실 뭐, ‘입장’이랄 것까지도 없다). 다만 그는, 그것은 오직 사용가치적 측면에서의 이득일뿐이고 가치의 측면에서 보면 모든 교환은 그저 등가물끼리의 교환일 뿐이라고 말한다.

오히려 여기서 문제는, 자본주의적 국제무역, 좀 더 일반적으로는 자본의 범지구적 운동이 지구상의 특정 지역들을 ‘커피재배지’로 영구적으로 고착화시킨다는 데 있다. 그는 이미 젊은 시절에 {자유무역에 관한 연설}(1848년)에서, 서인도 지역을 전세계를 위한 커피와 설탕농장으로 만들어놓은 자본주의의 만행을 고발한 바 있다.

여러분들은 커피와 설탕이 서인도제도의 자연스런 운명이라고 알고 계실 것입니다. 두 세기 전만 해도, 당시까지만 해도 상업에 대해선 신경쓸 필요도 없었던 자연은, 사탕수수도 커피나무도 그곳에 심지 않았습니다.

이제 커피의 원산지가 아프리카/중동이라는 게 많이 알려져 있지만, 사람들은 그랬던 커피가 왜 지금은 브라질과 같은 중남미에서 집중재배되고 있는지는 여전히 묻지 않는다. 그러니까 커피(값)의 문제엔, 글로벌 자본주의의 역사와 구조 그 자체가 깃들어있다는 말이다. 여기에 대해 문제제기하지 않으면, 문제는 결코 제기된 게 아니다.

6. 간단히 요약하자. “커피값 논란의 원인은 자본주의라고, 구조라고, 착취라고, 왜 말 못해!” 이와 관련해 문득 다음 글이 생각나 걸어둔다.

“소비”의 문제가 아니다: “이미트 피자” 논란에 부쳐 (2010년 10월 1일)

(끝)

(76) 역사적 흔적을 찾아서

한 가지만은 분명하다. 즉, 자연이 한편으로 화폐소유자 또는 상품소유자를 낳고, 다른 한편으로 자기의 노동력만 소유하고 있는 사람을 낳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관계는 자연사적 관계도 아니며 또한 역사상의 모든 시대에 공통된 사회적 관계도 아니다. 그것은 분명히 과거의 역사적 발전의 결과이며, 수많은 경제적 변혁의 산물이며, 과거의 수많은 사회적 생산구성체의 몰락의 산물이다. – 자본론 1권 6장, 221

1. 여기서 마르크스는 정말 마르크스스러운 주장을 펼친다. 노동력의 상품화, 이중적 의미에서의 노동자의 자유, 이것은 역사적 산물이며 – 자연의 역사가 아니라 인간의 역사 – 또한 특정한 역사적 시기에만 유효하다는 것이다.

2. “자연사적”이라는 표현을 보니 다음과 같은 마르크스의 언급이 떠오른다.

1) “경제적 사회구성의 발전자연사적 과정으로 보는 나의 입장에서는” (1판 서문, 6)

2) “다윈은 자연의 기술사 [즉, 생명의 유지를 위해 생산도구의 역할을 하는 동식물의 기관들의 형성]에 관심을 돌리고 있었다. 인간사회의 생산적 기관의 형성사[즉, 모든 사회 조직의 물질적 기초가 되고 있는 기관의 형성사]에도 그와 동일한 주의를 돌릴 만한 가치가 있지 않은가? 그리고 그것은 더 용이하게 저술할 수 있지 않겠는가? 왜냐하면, 비코(Vico)가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인간의 역사는 우리가 만들었지만 자연의 역사는 그렇지 않다는 점에서 양자는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15장, 501) – 강조는 모두 추가된 것.

6장의 인용문에서 마르크스는 자연의 역사와 인간의 역사를 구분한다 (“이러한 관계는 자연사적 관계도 아니며”). 1판 서문의 인용문에서는 자연의 역사와 인간의 역사 사이에 구분이 없다. 15장의 인용문에서 그는 다시 비코를 인용하며 이 둘을 명확히 구분한다. 마르크스의 모순인가? 마르크스에게서 자연사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 공부가 더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지만, 일단 지금의 생각은 이렇다.

참조: (28) 종교에서 사회적 관계로, 물질적 토대로, 또 자연발생적 산물로

1판 서문에서 마르크스가 자연사를 언급하는 것은 사회의 발전을 개개인의 의지와 행동의 결과로 환원할 수 없음을 주장하기 위해서다. 인간의 역사를 마치 자연의 역사인 것처럼 다루어 개개인의 의지와 행위를 분석하는 것을 피하겠다는 것이다 – 이러한 시각에서 역사에 대한 인간의 책임은 없다.

인간의 역사와 자연의 역사를 동일시하겠다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역사를 만들어가는 것은 당연히 인간이기 때문이다 – 이러한 관점에서는 인간은 역사에 대해 책임을 진다. 마르크스가 이 모순을 우회하는 방식은, 인간의 역사를 분석함에 있어 (역사적으로) 특수한 사회구성체의 탄생, 발전, 몰락을 그 주요 대상으로 삼는 것이다. 역사에 대해서 책임을 지는 인간은 무규정적인 인간, 순수한 인간 그 자체가 아니라 특정한 역사와 사회에서 살아가는 인간이다.

우리가 앞에서 고찰한 경제적 범주들도 역시 자기들의 역사적 흔적을 가지고 있다. 생산물이 상품으로 되려면 일정한 역사적 조건이 필요하다. 생산물이 상품으로 되기 위해서는 그것이 생산자 자신을 위한 직접적 생활수단으로 생산되어서는 안 된다. 만약 우리가 더 나아가 어떤 사정 하에서 모든 생산물 또는 적어도 대다수의 생산물이 상품이라는 형태를 취하게 되는가를 탐구해 본다면, 그것은 오직 하나의 아주 독특한 생산양식, 즉 자본주의적 생산양식 아래에서만 일어나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탐구는 상품분석의 범위를 훨씬 벗어난다. – 221-2

1. 1장에서 우리는 사회적 관계인 본질이 상품들 사이의 관계인 현상으로 필연적으로 그리고 은폐/전도되어 나타난다는 점을 보았다. 상품들 사이의 관계, 이것이 바로 경제적 관계다. 경제적 관계의 범주 (혹은 개념)을 마르크스는 “경제적 범주”라고 부르고 있다. 경제적 범주의 대표적인 예로 가격을 들 수 있다. 그런데 사회적 관계가 역사적이라면, 다시 말해 특수한 시기와 장소에서만 존재하고 성립하는 관계라면, 사회적 관계의 현상형태인 경제적 관계 역시 역사적 제약 하에 있음에 틀림 없다. 본질에 가해진 제약을 현상이 타파할 가능성은 없으니까.

2. 문제는 이 사실이 경제적 관계에서는 감추어져 있다는 점에 있다. 경제적 관계, 경제적 범주는 이면의 사회적 관계를 은폐할 뿐더러 이 사회적 관계의 역사성마저 은폐한다. 그래서 역사적 흔적을 지워버린 경제적 범주와 경제적 관계를 다루는 주류경제학은 천지창조부터 세계의 종말까지를 그 대상으로 한다. 참으로 대범하다. 마르크스의 꿈은 소박하다. 그는 오직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만, 특수한 역사적 시기에만 관심이 있다.

3. 여기서 마르크스는 “대다수의 생산물이 상품이라는 형태를 취”하는 것은 “아주 독특한 생산양식, 즉 자본주의적 생산양식 아래에서만 일어”난다고 명확히 언급한다. 마르크스가 그의 자본론을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지배하는 …” 으로 시작하는 이유다. 물론 1장에서 3장까지 마르크스는 자본이라는 용어를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가 4장 이전에는 자본주의와 무관한 상품생산일반을 분석한 것이라는 오해가 생겨났다. 예전에도 언급했지만, 이렇게 주장하는 학자들, 상당히 많다.

4. 그런데 본문의 내용을 감안한다면, 자본은 일반적 상품생산, 따라서 가치와 화폐의 존재조건이다. 띵! 가치가 애벌레고 화폐가 번데기였으며, 자본이 나비 아니었던가? 비유로 표현하면 이렇다. 나비가 낳은 알에서 깨어난 애벌레만 나비로 자라날 수 있다.

자본의 역사적 존재조건은 결코 상품유통과 화폐유통에 의해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자본은 오직 생산수단과 생활수단의 소유자가 시장에서 [자기 노동력의 판매자로서의] 자유로운 노동자를 발견하는 경우에만 발생한다. 그리고 이 하나의 역사적 전제조건만으로도 하나의 세계사를 형성하게 된다. 그러므로 자본은 처음부터 사회적 생산과정의 하나의 새로운 시대를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각주 4)

(각주 4) 자본주의 시대를 특징지는 것은 노동력이 [노동자 자신의 눈에도]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상품이라는 형태를 취하며, 따라서 자기의 노동이 임금노동의 형태를 취한다는 점에 있다. 다른 한편으로, 이 순간부터 비로소 노동생산물의 상품형태가 일반화된다.
– 222-3

“자본은 오직 생산수단과 생활수단의 소유자가 시장에서 자유로운 노동자를 발견하는 경우에만 발생한다” – (그 과정이 어떠하건) 역사가 자유로운 노동자를 쏟아낸 다음에야 자본주의가 시작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자본의 성립이 일반적 상품생산의 전제조건이기 때문에 노동력의 상품화가 일반적 상품생산의 전제조건이 된다.

 

(75) 나는 자유인이다. 이중적으로.

그러므로 화폐가 자본으로 전환되기 위해서는 화폐소유자는 상품시장에서 자유로운 노동자를 발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여기에서 자유롭다는 것은 이중의 의미를 가진다. 즉, 노동자는 자유인 으로서(als freie Person; as a free individual) 자기의 노동력을 자신의 상품으로 처분할 수 있다는 의미와, 다른 한편으로는 그는 노동력 이외에는 상품으로 판매할 다른 어떤 것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으며, 자기의 노동력의 실현에 필요한 일체의 물건을 가지고 있지 않다(frei von; free of)는 의미다. – 자본론 1권 6장, 221

1. 노동자가 생산수단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 생산수단으로부터 자유롭다는 것이 본질이고, 자기의 노동력을 상품으로 처분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지고 있는 것이 현상이다.

2. 본질은 현상 안에서, 현상을 통해서만 (in and through) 존재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이 현상은 본질의 필연적 현상형태이며, 동시에 현상은 본질을 은폐한다. 본질을 은폐한 현상에 감탄하여 본질의 존재를 잊거나, 혹은 본질이 현상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라고 보는 것이 물신주의다.

3. 특히 마르크스에게 있어 본질은 언제나 사회적 관계다. 상품들 사이의 관계가 인간들 사이의 관계를 확립시킨다고 보는 것, 그러니까 물건들 사이의 관계를 통해 사회적 관계가 이루어진다고보는 것이 바로 상품물신주의다. 화폐를 상품생산에 기초한 사회적 관계의 산물로 보지 못하고, 그것을 부 그 자체로 보는 것, 화폐와 상품유통을 통해 사회적 관계가 확립된다고 보는 것이 화폐물신주의다.

3. 따라서 자신의 노동력을 처분할 수 있는 자유 근저에 존재하는 (본질로서의) 생산수단으로부터의 자유(이것은 물론 사회적 관계다)를 보지 못하면 자유물신주의로 귀결하고 만다. 오늘날의 주류경제학이 그렇다. 주류경제학은 실업을 시점간 효용극대화를 위해 개인이 선택한 자발적 실업으로 설명한다. 자유에서 출발하는 주류경제학이 실업을 강요된 결과로 설명할 방법도 까닭도 없다. 동시에 자발적 실업 (혹은 취업)이 저축(이것은 생산수단의 원천이다)을 결정한다. 고로, 주류경제학=자유물신주의.

4. 자본주의에서 물신주의는 피할 수 없다. 현상이 본질의 필연적 현상형태이면서 동시에 필연적으로 본질을 은폐, 전도하기 때문이다 (음. 물론, 현상의 약간의 상대적 자율성, 인정한다 – 여기에 네오의 싹이 있다). 이 필연적 이중성이야말로 마르크스의 가장 큰 공헌 중 하나임에 틀림 없다. 그래서 요약하면,

나는 자유인이다. 이중적으로다가.

(74) 인간존재의 이중적 분열 – 노동력 상품과 노동력 상품의 소유자

그리하여 이 가치변화는 오직 그 상품[M-C에 의해 구매되는 상품]의 현실적인 사용가치로부터, 다시 말해 그 상품의 소비로부터 발생할 수 있다. 그런데 한 상품의 소비로부터 가치를 끌어내기 위해서는, 우리의 화폐 소유자는 유통분야의 내부, 즉 시장에서 그것의 사용가치가 가치의 원천으로 되는 독특한 속성을 가진 상품[즉, 그것의 현실적 소비 그 자체가 노동의 대상화, 따라서 가치의 창조로 되는 그러한 상품]을 발견해야만 한다. 사실상 화폐소유자는 시장에서 이와 같은 특수한 상품을 발견하는데, 그것은 노동능력, 즉 노동력이다. – 자본론 1권 6장, 218-9

1. M1-C-M2에서 M1-C 혹은 C-M2로부터 가치변화가 발생할 수 없다. 등가교환의 법칙을 가정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치증식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C가 변하는 수밖에 없다. 어떻게 보면 간단한 대답이다. 특히 마르크스가 5장에서 내내 뜸을 들여왔음을 감안한다면… 도식화해서 표현하면, 아래와 같다.

M1 – C (등가교환)
      C (가치증식)
    C – M2 (등가교환)

2. 그러니까 가치변화는 M1, M2와는 무관하게, 즉 교환과는 무관하게 C에서 일어나야 한다. 어떻게? 이 상품을 그 소유자가 열심히 쳐다보고 있는다고해서 가치가 증식될 리가 없다. 신주단지 모시듯 특별대우 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다. 상품에 변화를 가하는 수밖에 없다. ‘사용’ 혹은 ‘소비’해야 하는 것이다.

3 “가치변화는 오직 그 상품의 현실적인 사용가치로부터 … 발생할 수 있다” – 현실적인 사용가치가 무슨 뜻일까? 원문을 보니 이것은 Gebrauchswert als solchem을 번역한 것이다. als solchem은 보통 영어로 as such로 번역된다 – 우리 말로는 그 자체. 그러니까 “현실적인 사용가치”는 사용가치 그 자체를 의미한다. 가치변화는 그 상품의 사용가치 그 자체에서 발생한다는 것이다. 1장에는 이런 표현이 있다. “사용가치는 오직 사용 또는 소비에서만 실현된다” (44-45). 결국 가치변화가 사용가치 그 자체에서 발생한다는 것은 가치변화가 그 상품의 소비로부터 발생한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어찌되었건 결론은 이렇다. 가치증식은 유통의 외부에서 일어난다.

4. “우리의 화폐소유자는 유통분야의 내부, 즉 시장에서 그것의 사용가치가 가치의 원천으로 되는 독특한 속성을 가진 상품을 발견해야 한다”. 결국 M-C-M을 해야 한다는 얘기다 – 가치증식은 유통의 내부에서 일어나야 한다.

5. 그냥 노동자가 시장에 나가지 않고 C – C – C 하면 되는 것 아닌가? 그럼 유통영역과 무관하게 가치증식이 될텐데…. 안타깝게도 그렇지 못할 사정이 있다. 여기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룬다.

6. 그 상품이 바로 노동력이다. 이제 인간은 이중화된다. 그는 자신을 노동력이라는 상품과 이 노동력이라는 상품의 소유자로 양분한다. 존재의 분열이 일어난다.

(73) 로도스 섬에서의 마르크스의 점프

화폐의 자본으로의 전환은 마땅히 상품교환을 규정하는 법칙의 토대 위에서 전개되어야 할 것이며, 따라서 등가물끼리의 교환이 당연히 출발점으로 되어야 할 것이다. [아직까지는 애벌레 형태의 자본가에 불과한] 화폐소유자는 상품을 그 가치대로 구매해 그 가치대로 판매해야 하는데, 그러면서도 과정의 끝에 가서는 자기가 처음 유통에 투입한 것보다 더 많은 가치를 유통으로부터 끌어내지 않으면 안 된다. 그의 나비로의 성장[즉, 완전한 자본가로의 발전]은 반드시 유통영역에서 일어나야 하며, 또 그러면서도 유통영역에서 일어나서는 안 된다. 이것이 바로 문제의 조건이다. 여기가 로두스 섬이다. 자, 여기서 뛰어보라! – 5장, 216-7

애벌레와 번데기와 나비 얘기도 재밌지만, 이건 언젠가 쓰려고 하는 가치애벌레와 화폐번데기와 자본나비에 대한 동화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과연 할 수 있을까 –; 오늘의 주제는 로도스 섬.

일단 이솝 우화에 나오는 로도스 섬 이야기에서 시작하자. 내용은 간단하다 – 어떤 뻥쟁이가 있었는데, 자기가 로도스 섬에 갔을 때 아무도 따라할 수 없는 엄청나게 훌륭한 점프를 했고 이게 진짜라고 확인해줄 증인도 있다고 떠벌리고 다녔다. 가만히 듣고 있던 누군가가 이렇게 말한다, “좋다. 여기가 로도스 섬이다. 자, 여기서 뛰어 보라!”.

결국 말로 떠벌리는 것은 아무 소용 없고 행동으로 보여주어야 한다는 얘기다. 관념적인, 이상적인 논의는 부질 없고, 구체적 현실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왜 여기서 별안간 로도스 섬을 꺼낸 것일까? 내가 보기에는, 결국 자본에 관한 어떤 이론도 ‘유통 내부에서 동시에 유통 외부에서‘라는 모순에 대한 설명을 회피할 수 없다는 얘기를 하는 것 같다. 자본에 관한 이런저런 피상적이고 그럴 듯한 설명을 할 수 있겠지만, 자본에 관한 진지한 이론이라면 이 모순에 대한 명확한 답을 내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 당신의 이론이 자본에 관한 이론이란 말이지? 여기가 로도스 섬이다. 자 여기서 뛰어 보라!’ 답을 내놓지 못하면 허풍쟁이 이론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펭귄판을 보니 헤겔의 법철학 서문에 같은 내용이 있다고 한다. 그 부분은 이렇다.

철학적 저작으로서의 이 글은 추호도 국가가 어떻게 있어야만 하는가에 대한 구상을 내놓으려고 해서는 안 된다. 이 책이 담고 있는 교훈은 결코 국가가 어떻게 있어야만 하는가를 가르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국가라는 인륜적인 우주가 어떻게 인식되어야만 하는지를 가르치는 데에있다.

여기가 로도스다. 여기서 뛰어라.
Hic Rhodus, hic saltus.

존재하는 것을 개념에 따라 파악하는 것이 철학의 과제이다. 왜냐하면 존재하는 것이 곧 이성이기 때문이다. 개인에 관해서 이야기한다면 모든 개인은 더 말할 것도 없이 자기 시대의 아들 (ein Sohn seiner Zeit)이다. 철학도 마찬가지여서, 자신의 시대를 사상으로 포착한 것이 철학이다 (soist auch die Philosophie ihre Zeit in Gedanken erfasst). 어떤 철학이 그가 처해 있는 현실의 세계를 뛰어넘는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한 개인의 그의 시대를, 즉 로도스 섬을 뛰어넘어 밖으로 나간다는 망상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어리석은 생각이다. 그 개인의 이론이 실제로 자신의 시대를 뛰어넘어 마땅히 있어야만 할 세계를 건립한다면 그 있어야만 할 세계는 물론 존재하겠지만, 그것은 그의 생각 속에만 있을 뿐이다 – 즉 그것은 무엇이라도 임의로 상상해낼 수 있는 취약한 지반 위에 존재할 뿐이다. (강조 추가) – 법철학 (임석진 옮김), 50-51

위에 강조한 부분에서 명확히 드러나지만, 로도스 섬은 바로 이론가가 발을 딛고 서 있는 현실을 의미한다. 마이클 조단을 뛰어 넘는 엄청난 점프를 상상하며 허풍을 떠는 것은 좋다. 상상의 영역은 아무래도 좋다. 그러나 훌륭한 이론가의 관심은 언제나 현실에 있다. 그러니 바로 이곳에서의, 로도스 섬에서의 뜀박질을 보여주어야 한다. 이론가는 무중력 상태에서의 뜀박질에는 관심이 없다. 그래서 법철학에서 헤겔은 “국가가 어떻게 있어야만 하는가” 즉 당위가 아니라, “국가라는 인륜적인 우주가 어떻게 인식되어야만 하는지” 즉 현실의 사태를 기술하고자 한다.

헤겔은 한발 더 나아가서 이렇게 쓴다.

앞에 인용된 어투를 조금 바꾸어보면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여기에 장미가 있다. 여기서 춤추어라 (역주) – 법철학, 51

역주는 다음과 같다. “여기서 헤겔은 그리스의 ‘로도스’ (섬 이름)를 ‘로돈’ (장미꽃)으로, 라틴어의 ‘saltus’ (뛰어라)를 ‘salta’ (춤추어라)로 약간 변형해서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장미를 기쁨의 상징으로 본 헤겔은 다름 아닌 현실 속에서 이념을 인식해야만 할 철학이 임무를 다했을 때의 그 기쁨을 이렇게 춤으로 표현하고 있다”

헤겔은 언어의 마술사.

Hic Rhodus, hic saltus (여기가 로도스 섬이다. 여기서 뛰어 보라!)
Hic Rhodon, hic salta (여기에 장미가 있다. 여기서 춤추어라!)

이어서 헤겔은 이렇게 쓴다.

자각적 정신으로서의 이성 (Vernunft als selbstbewusstem Geiste)과 눈앞의 현실로 존재하는 이성(Vernunft als vorhandener Wirklichkeit) 사이에 있는 것, 즉 한쪽의 이성을 다른 쪽과 구별하여 후자 속에서 만족을 취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아직 현실의 이성을 개념으로까지 해방하지 않은 채 추상체에 머물러 있는 족쇄다. 이성을 현재라는 십자가 위에 드리워진 장미로 인식하여 현재를 기쁨으로 맞이한다는 이성적 통찰이야말로 철학이 우리에게 안겨주는 현실과의 화해 (die Versöhnung mit der Wirklichkeit)의 길이다. (강조 추가) – 법철학, 51-52

현재라는 십자가 위에 드리워지는 장미라는 표현이 마음에 든다. 십자가와 같은 현재를 기쁨 으로 맞이할 것, 사뭇 기독교적이다. 하기야 현실 속에서의 기쁨이 아닐 바에야 기쁨이 무슨 소용인가.

그런데 MIA의 설명을 보니 마르크스가 로도스 섬을 처음 언급한 것은 [루이 보나빠르뜨의 브뤼메르 18일]이라고 한다.

프롤레타리아 혁명들, 즉 19세기의 혁명들은 항상 자기 자신을 비판하고, 진행 도중에 끊임없이 걸음을 멈추며, 완수된 것처럼 보이는 것으로 되돌아와서 다시 새로이 시작하는바, 자신이 처음에 시도한 것들의 불완전함, 허약함, 빈약함을 가차없이 철저하게 비웃는다. 또한 이 혁명들이 자신들의 적을 땅에다 메다꽂는 것은 다만, 그 적이 땅에서 새로운 힘을 흡수하여 더욱 거대해져서 자신들에게 대항하도록 만들기 위해서인 듯하다. 이 혁명들은 언제나, 자신들의 목적들이 너무나거대하다는 것에 놀라 거듭 뒤로 물러난다. 그러다가 마침내 어떠한 반전도 있을 수 없는 상황이 창출되어 관계들 자체가 다음과 같이 외치게 되면 이러한 물러섬은 끝나게 된다.

여기가 로두스다. 여기서 뛰어라
여기 장미가 있다. 여기서 춤 춰라!

(강조 추가)
– 칼맑스 프리드리히엥겔스 저작선집 2, 291

여기에서도 방점은 현실에 놓여 있다. 혁명이 어떠한 가능성, 이상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 조건에 부합하고, 현실적 조건으로부터 발생하는 상황이 온다는 것이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마르크스는 원문에 이렇게 썼다.

Hic Rhodus, hic salta! -> saltus (뛰어라)가 아니라, salta (춤 춰라)
Hier ist die Rose, hier tanze! – 그리고 여기에서는 로도스 대신에 장미.

직역하면, 여기가 로도스 섬이다. 여기서 춤 춰라. 여기 장미가 있다. 여기서 춤추어라!

재미있게도 자본론의 5장을 마무리하는 “여기가 로도스 섬이다. 자, 여기서 뛰어보라!”에서도 그는 saltus 대신에 salta를 쓴다. 직역하면, “여기가 로도스 섬이다. 자 여기서 춤추어라”가 맞다. 이것이 마르크스의 실수인지 아니면 의도된 짬뽕 (이솝우화 + 헤겔) 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위험을 무릅쓰고 상상을 덧붙여 적극적으로 해석해 보자면 이렇다.

마르크스: 애벌레, 번데기, 나비 어쩌구 저쩌구 어쩌구 저쩌구, 결국 유통영역에서 일어나야 하며, 또 그러면서도 유통영역에서 일어나서는 안 된다! 나는 이 문제를 이미 해결했지. 누구도 나를 따라올 수 없을 걸. 증명해줄 사람들도 있어.
지나가는 행인: 여기가 로도스 섬이다. 자 여기서 뛰어 보라
(마르크스의 우아하고 세련된 점프)
지나가는 행인: 좋은 점프다. 현실이라는 십자가에 드리워진 장미라고 할만하군.
지나가는 행인: 자, 여기 장미가 있다. 여기서 춤 추어라!

요약하면: 여기가 로도스 섬이다. 여기서 춤 추어라!

마르크스는 정말 자신만만했던 것이다.

5장 끝. 이제부터는 마르크스의 점프를 상세히 분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