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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 지식, 판단력, 의지의 상실과 지식의 저질화의 시대

야만인이 모든 전쟁기술을 개인의 책략을 발휘한 것과 마찬가지로, 비록 작은 규모에서이기는 하나 독립적인 농민 또는 수공업자도 지식과 판단력과 의지를 발휘했다. – 자본론 1권 14장, 487; MEW 23; 382

지식, 판단력 (또는 이해력 혹은 통찰력), 의지라는 세 단어에 주목하자. 노동에는 이 세 가지가 반드시 필요하다. 자신의 것이건, 혹은 타인의 것이건.

그러나 매뉴팩쳐에서는 그러한 능력은 다만 작업장 전체를 위해서만 요구될 뿐이다. 생산상의 정신적(geistig) 능력이 한 방면에서는 확대되면서 다른 여러 방면에서는 완전히 소멸된다. 부분노동자들이 잃어버리는 것은 [그들과 대립하고 있는] 자본에 집적된다. 부분노동자들이 물질적 생산과정의 정신적 능력을 타인의 소유물로 또 자기를 지배하는 힘으로 상대하게 되는 것은 매뉴팩쳐적 분업의 결과다 – 487-8; 382

1. 물질적 생산과정의 정신적 능력 (die geistigen Potenzen des materiellen Produktionsprozesses) – 물질적 생산과정에는 물리적 능력뿐만 아니라 정신적 능력도 필요하다.

2. 자본주의의 논리적, 역사적 발전과정은 지식, 판단력, 의지 – 물질적 생산과정의 정신적 능력 – 을 개별노동자들로부터 자본으로 이전시키는 과정이기도 했다.

이 분리과정은, 개개의 노동자에 대해 자본가가 집단적 노동유기체의 통일성과 의지를 대표하게 되는 단순협업에서 시작된다. – 488; 382

1. 단순협업의 경우에는 ‘의지’ 정도만 자본가의 몫이다. 매뉴팩쳐에서는 ‘의지’에 더해 ‘지식’과 ‘판단력’마저 자본에 이전된다. 물론 부분노동자의 작업을 위한 ‘의지’, ‘지식’, ‘판단력’은 노동자에게 남지만.

2. 집단적 노동유기체 대신 사회적 노동유기체라고 번역해야 한다. 물론 의미상 차이는 없다. 자세한 내용은 (111) 집단적 노동, 사회적 노동, 결합노동, 공동노동, 공동체적 노동 참조.

그리고 이 분리과정은 노동자를 부분노동자로 전락시켜 불구자로 만드는 매뉴팩쳐에서 더욱 발전한다. 끝으로, 이 분리과정은 [과학을 노동과는 별개인 생산잠재력으로 만들고, 과학을 자본에 봉사하게 만드는] 대공업에서 완성된다.

1. 단순협업에서 의지를, 매뉴팩쳐에서 지식과 판단력을 자본으로 이전시켰다면, 대공업에서는 자본에 이전된 지식이 과학적 지식으로 된다. 매뉴팩쳐에서는 과학이 그래도 자본의 통제 바깥에 있었다면, 대공업에서 과학은 자본에 복속된다.

2. ‘별개인’으로 번역된 selbständige는 ‘독자적인’ 혹은 ‘자립적인’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기계제 대공업에서의 과학의 독자성을 더 강조하는 것이 더 좋겠다.

그렇다면 오늘날에는? 단순협업 -> 매뉴팩쳐 -> 기계제 대공업 이후의 새로운 단계를 상정할 수 있을까? 인지자본주의론자들은 우리는 이미 새로운 단계에 진입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특징적으로 이 단계에서 노동자들은 (과학적) 지식, 판단력, 의지를 다시 자본으로 빼앗아오고 있다고 한다. 인지자본주의론자들은 기계제 대공업의 시기까지 자본이 이윤을 획득할 수 있었던 이유를 (생산수단을 독점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지식, 판단력, 의지를 통제했었기 때문이라고 잘못 이해한다. 그래서 이들이 다시 노동의 손으로 되돌아오고 있는 자본주의의 새로운 단계에서는 자본에게 돌아갈 이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잘못된 주장을 한다. 이제 자본가에 남은 카드는 지적재산권뿐. 자본가는 이윤 대신 지대를 수취하는 지주로 변신하는 중이다. 더 할말 없다. 콩 심은데 콩나고 팥 심은데 팥 나는 법. 논증은 올바른 대전제에서 출발해야 할뿐.

이유는 다르지만 나도 우리가 새로운 단계에 진입했다고 생각한다. 이 새로운 단계의 특징은 (과학적) 지식의 자립화를 넘어선 지식의 상품화다. 지식은 상품이 아니므로 결코 상품이 될 수 없지만, 상품을 닮아갈 순 있다. 팔기 위해 지식을 생산하고, 표준화된 방식으로 지식을 생산하고, 자본의 통제 하에 지식을 생산할 때, 지식은 상품화된다. 지식은 본질적으로 상품과 다르므로 지식의 상품화는 지식의 저질화다. 사람이 개를 닮아가면 사람이 저질화되고, 개가 사람을 닮아가면 개가 저질화되는 것처럼.

관심있는 분은 주류경제학과 신자유주의 비판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필립 미로스키(Philip Mirowski)의 [과학마트 – 미국 과학 민영화하기(Science-Mart – Privatizing American Science)]를 참조. 미로스키에 따르면 지식경제니 창조경제니 하는 중립적인 척하는 용어들 모두 신자유주의의 소산이다. 이 책에 대한 괜찮은 리뷰 아티클은 여기 참조.

(130) 전제와 아나키의 (외적) 이중성

우리는 앞에서 작업장 안의 분업과 사회 안의 분업이 서로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살펴본 바 있다.

상품생산과 상품유통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일반적 전제이므로, 매뉴팩쳐 안의 분업은 사회 안의 분업이 이미 일정한 정도로 발전하고 있을 것을 필요로 한다. 또한 거꾸로 매뉴팩쳐 안의 분업은 사회적 분업에 반작용해서 그것을 발전시키며 증가시킨다. – 자본론 1권 14장, 477; MEW 23; 374. (128) 보편적 분업, 특수한 분업, 개별적 분업 참조.

마르크스는 작업장 안의 분업과 사회 안의 분업을 서로 대조하여 분석한 후, 상호연관의 수준을 넘어 이들을 아예 자본주의적 생산이라는 총체 의 두 계기로 파악한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사회적 분업에서의 무정부상태[heesang – 아나키]와 매뉴팩쳐적 분업에서의 독재[heesang – 전제]가 서로 다른 것의 조건으로 되고 있[다]. – 482; 377

1.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지배하는 사회에서는’의 원문에는 ‘지배하는’이 없다. 직역하면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사회에서는 (in der Gesellschaft der kapitalistischen Produktionsweise)’이지만 좀 어색하긴하다. 길판에서는 ‘자본주의적 생산이 이루어지고 있는 사회’라고 풀어서 써 놓았다.

2. Anarchismus혹은 anarchism을 무정부주의로 번역하는 것에는 다소 문제가 있다고 알려져 있다. 우선은 무정부상태라고 하면 누구나 혼란을 떠올리게 마련이지만, 아나키스트들이 사회적 질서의 필요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가령 아나키스트 공산주의자들은 필요에 따른 분배를 주장하는데, 이것 자체가 이미 하나의 사회적 질서다. 여기에 더해 아나키스트들은 국가권력의 철폐라는 부정성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연합, 상호부조를 강조한다. 그래서 아나키스트들은 자유연합주의나 그냥 아나키즘을 선호한다고. 나도 무정부상태 혹은 길판의 무정부성 대신 ‘아나키’를 쓰기로 한다. 그런데 사실 이 아나키는 상호부조와 호혜의 아나키가 아니라 살벌한 경쟁과 이윤추구로 대표되는 아나키다. 그래도 등가교환이라는 질서에 따른 아나키므로 무정부상태는 아님. 여담이지만 얼마전에 자서전 읽었는데 크로포트킨 정말 매력적이다.

3. ‘독재’가 아니라 ‘전제’인 이유는 (117) 자본가의 전제적 지휘 참조. 지휘 기능은 협업 일반의 산물이지만, 자본주의적 생산에서는 지휘가 협업에 반작용하여 가능한 많은 잉여가치를 쥐어짜내는 역할을 한다. 지휘 그 자체는 전제적일 필요가 없지만, 자본주의적 지휘는 전제적이어야 하는 이유다.

4. ‘서로 다른 것의 전제가 되고 있다’의 원문은 ‘einander … bedingen’. 길판에는 ‘서로를 제약하고 있다’라고 되어 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자본주의의 아나키는 경쟁의 아나키다. 살아남기 위해, 더 많은 이윤을 얻기 위해, 생산단가를 끊임없이 낮추어야한다. 심하게 얘기하면 ‘너 죽고 나 살자’의 아나키. 생산단가를 낮추려면 노동일을 늘리거나 (절대적 잉여가치), 노동생산성을 높이거나 (상대적 잉여가치), 노동강도를 높여야 한다 (절대적 잉여가치). 자본가가 노동과정을 완전히 장악하고 그의 뜻대로 생산유기체를 작동시킬 수 있을때만 가능한 방식들이다. 결국 전제적 통제 없이 아나키는 불가능하며, 아나키가 없다면 굳이 전제적 통제가 필요하지 않다.

5. 다시 한번 이중성이다.

[가치 vs. 사용가치]. [추상노동 vs. 구체노동]. [상품관계 vs. 화폐]. [노동력 vs. 인간]. [가치증식과정 vs. 노동과정]. [자본 vs. 기계]. [생산수단으로부터의 자유 vs. 정치적 속박으로부터의 자유]. [자본가의 전제적 지휘 vs. 협업에 필요한 지휘]. [역사적으로 특수한 사회적 관계 vs. 초역사적이고 영속적인 존재]. 그리고 [작업장에서의 전제적 통제 vs. 아나키]

전자가 본질이고, 후자가 존재양식이다. 전자는 후자를 통해 후자 속에만 존재하지만, 후자는 전자를 은폐한다. 전자는 보통 관계고, 후자는 보통 존재다. 전자를 잊고 후자에 집중하면 물신주의로 빠지게 된다.

이중성은 동일한 존재의 이중성으로 나타나는 경우도 있지만, 아예 별도의 존재로 쪼개지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상품이 가치이면서 사용가치라는 내적 모순은, 상품과 화폐의 외적 대립으로 지양된다. 마르크스가 말한대로, “모순들을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이 모순들이 운동할 수 있는 형태를 제공”(133)하는 경우다. 전제적 통제와 아나키 사이의 외적 대립도 비슷한 경우다. 자본주의적 생산은 불평등한 계급관계에 입각한 생산이며 동시에 평등한 상품관계에 입각한 생산, 곧 계급관계의 상품형태에 입각한 생산이다. 불평등하면서 평등한, 불평등이 평등의 옷을 입고 나타나는 모순적인 생산방식이다. 이 내적 모순은 전제적 통제(=불평등한 계급관계)와 아나키(평등한 상품형태)의 외적대립으로 표현된다. 여기서 모순은 운동할 수 있는 새로운 형태를 얻었다.

자본주의의 산물로서의 작업장 안의 분업, 전제적으로 통제되는 이 분업에는 자본주의의 도장이 찍혀 있다:

전체사회 안의 분업은, 상품교환에 의해 매개되든 아니든, 매우 다양한 경제적 사회구성체에 존재할 수 있지만, 매뉴팩쳐에서 수행되고 있는 바와 같은 작업장 안의 분업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전혀 독특한 창조물이다. – 485; 380

이후 마르크스는 매뉴팩쳐의 자본주의적 성격을 다룬다.

(128) 보편적 분업, 특수한 분업, 개별적 분업

만약 우리가 노동 그 자체만을 염두에 둔다면, 농업, 공업 등과 같은 주요부문들[heesang – 속(屬; Gattung; genus)]로의 생산의 분할을 일반적[heesang – 보편적] 분업, 그리고 이들 생산부문[heesang – 속]의 종(種; Art; species)이나 아종(亞種; Unterart; sub-species)으로의 분할을 특수한 분업, 그리고 하나의 작업장 안의 분업을 개별적 분업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 자본론 1권 14장, 475: MEW 23, 371

1. 일단 종 < 속 < 과 < 문 < 강 < 문 < 계에 대응하는 영어 표현은 species < genus < family < order < class < phylum < kingdom, 독어 표현은 Art < Gattung < Familie < Ordnung < Klasse < Reich. 중요한 사항은 아니지만, 이에 맞추어 번역을 하는 것이 올바르다.

2. 보통 철학에서 보편-특수-개별의 틀을 사용하니까 일반적 분업보다는 보편적 분업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나을 것 같다. 길판에도 일반적 분업으로 되어 있음.

3. 그런데 마르크스는 굳이 왜 보편적 분업, 특수한 분업, 개별적 분업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을까? 보편-특수-개별은 철학에서 두 가지 다른 방식으로 사용되는 것 같다. 하나는 개념들을 계층화해서 삼단논법에 활용하는 방식이다. 가령 부천시, 경기도, 대한민국이 각각 개별, 특수, 보편에 대응하는 경우다. 부천시는 경기도의 일부이다, 경기도는 대한민국의 일부이다, 고로 부천시는 대한민국의 일부이다는 삼단논법의 논증이 가능하다. 개별이 특수의 일부이고, 특수가 보편의 일부이므로 개별이 보편의 일부라는 것.

4. 다른 하나는 헤겔의 용법이다. 헤겔은 보편-특수-개별의 삼단논법을 논리학의 후반부에서 다루는데 여기서는 삼라만상의 내적연관, 일종의 세계일화(世界一花)가 전제되어 있다. 베이징에서의 나비의 날개짓이 태평양에 폭풍을 일으키고, 이때 먹구름 속에서 우는 천둥이 봄부터 울던 소쩍새와 더불어 한송이 국화꽃을 피워낸다는 식이다. 이러한 개별적 대상, 사건, 개념들 사이의 연관은 특징적으로 특수와 보편을 매개로 하여 이루어진다. 하나하나의 개별자는 (특수자를 매개로 한) 보편자의 인스턴스이며 – 다시 말해 근원이 같으므로 개별자간 상호연관이 가능하다 – 보편자는 (플라톤의 이데아에서처럼) 개별자, 특수자와 별도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특수자와 개별자 내부에 그리고 이들을 통해서만 존재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보편-특수-개별 사이의 이러한 물고 물리는 연관관계 때문에 헤겔은 개별 < 특수 < 보편의 단방향 삼단논법 외에도 특수 < 개별 < 보편, 개별 < 보편 < 특수 등의 다양한 방식의 삼단논법을 다루었다. 셋 중 하나만 빠져도 모든게 무너져 내리고 만다.

5. 부천시의 경우는 다르다. 부천과 경기도 그리고 경기도와 대한민국 사이의 관계는 순전히 외적 관계이다. 부천을 없앤다고 대한민국의 존립에 문제가 될 이유는 없으며, 부천을 인천광역시에 편입시키면 안될 아무런 이유가 없다.

6. 분업의 경우는 어떨까. 시계테엽생산노동, 시계생산노동, 제조업 노동을 개별, 특수, 보편의 틀을 통해 살펴보자. 1) 제조업 노동은 시계테엽생산노동과 같은 다종다양의 구체적 유용노동을 통해서만 존재한다. 2) 시계생산노동, 마차생산노동과 같은 사회 내의 제품별/산업별 분업은 경제 내의 제품간 산업간 연관관계를 반영한다. 3) 시계테엽생산노동은 조밀하게 짜여진 사회적 분업의 체계 속에서 예를 들어 마차바퀴생산노동과도 연관되어 있다 (생산된 시계를 마차로 배송하는 경우를 상정해보라).

심지어 작업장 내 분업은 사회 안의 분업에 의해 규정될 뿐 아니라 거꾸로 사회 안의 분업에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특수가 개별을 포함한다는 계층적 이해를 버려야 하는 까닭이다. 마르크스는 이렇게 쓴다.

상품생산과 상품유통은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일반적 전제이므로, 매뉴팩쳐 안의 분업은 사회 안의 분업이 이미 일정한 정도로 발전학 있을 것을 필요로 한다. 또한 거꾸로 매뉴팩쳐 안의 분업은 사회적 분업에 반작용해서 그것을 발전시키며 증가시킨다. 노동도구의 분화에 따라 이 도구를 생산하는 산업들도 더욱 더 분화된다 – 477

(127) 미숙련공은 숙련공의 미래. 비정규직은?

매뉴팩쳐는 [그것이 장악하는 모든 업종 [heesang – 수공업] 에서] 이른바 미숙련노동자라는 하나의 부류[수공업은 그 성질상 이러한 부류를 엄격히 배제한다]를 만들어낸다 – 자본론 1권 14장, 473-4; MEW 23, 371

등급제의 등급과 나란히 숙련공과 미숙련공이라는 단순한 구분이 나타난다 – 474; 371

자본의 본질은 사회적 관계이며, 이 사회적 관계는 상품관계이고 착취관계이다. 그런데 이것만으로는 다소 밍숭맹숭하다. 자본은 사회적 관계 (혹은 구조)임과 동시에 사회적 과정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사회적 관계로서의 자본의 본질이 잉여가치의 생산에 있다면, 사회적 과정으로서의 자본은 잉여가치 생산규모의 절대적, 상대적 증대 과정이다. 관계와 과정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관계는 과정을 규정하며, 과정은 관계를 (재)생산하고 강화한다. 달리 표현하면, 관계는 과정의 전제이며 결과이다.

과정으로서의 자본의 논리를 생산성 증대와 잉여가치 생산규모의 확장이라는 추상적 결과로 파악하는데 그쳐서는 안된다. 새로운 기술의 도입은 경쟁우위 확보와 상대적 잉여가치 생산이라는 경제적 필요 이외에도 노동에 대한 자본의 통제를 강화하기 위한 일종의 계급투쟁적 필요에 근거한다. 동시에 새로운 기술, 새로운 생산방식은  언제나 특수한 조건 (예: 기술적 조건과 계급역관계)에서 제기되는 특수한 문제에 대한 특수한 해법이며, 이전에 살펴본 것처럼 양적 변화 뿐만 아니라 질적 변화를 요구하기도 한다.

매뉴팩쳐시대 (“대략 16세기 중엽에서 18세기의 마지막 1/3”, 455)에 존재한 매뉴팩쳐라는 역사적으로 특수한 자본주의적 생산형태 역시 생산성 제고와 노동통제 강화를 목표로 한 특수한 해법이었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1절 “매뉴팩쳐의 두 가지 기원”에서는 매뉴팩쳐가 어떤 특수한 조건 – (일정 수준의 사회내 분업을 전제하는 단순협업에 기반한) 자본주의적 수공업 – 에서 발생했는지를 다루고, 2절 “부분노동자와 그의 도구”에서는 매뉴팩쳐에서 생산성 증대와 통제의 강화가 어떤 방식 – 노동자의 부분화와 일면화  – 으로 이루어지는지를 해명한다.

특수한 구조로서의 매뉴팩쳐는 매뉴팩쳐에 고유한 구조적 효과 – 대표적으로 노동력 등급제와 숙련공과 미숙련공 사이의 구분 – 를 생산하며, 이 구조를 (재)생산하는 생산성 증대의 과정은 어느 시점에는 특수한 해법을 요구하는 특수한 문제에 봉착한다. 추후에 다루겠지만, 이 특수한 문제는 매뉴팩쳐에 의한 기계의 생산(513), 숙련공에 의한 기계의 생산이라는 모순이며, 이에 대한 해법은 기계에 의한 기계의 생산, 미숙련공에 의한 기계의 생산, 즉 숙련공과 미숙련공 사이의 구분을 철폐하고 숙련공을 미숙련공화하는 것이다. 달리 표현하면, 매뉴팩쳐는 숙련공과 미숙련공 사이의 구분을 만들어내지만, 종국에는 숙련공을 미숙련공화하는 물적 토대를 제공한다.

숙련공과 미숙련공 사이의 구분과 라임이 잘 맞는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의 구분은 어떻게 볼 수 있을까? 전자가 분업에 기반한 생산이라는 특수한 생산형태의 한 필연적 결과인 것처럼 후자를 “생산과정의 지적 요소들을 육체적 노동으로부터 분리”(568)시키는 기계제 대공업의 필연적 결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상대적으로 대체가 용이한 작업에 비정규직 노동자가 많이 고용된다는 점을 감안하면그런 측면이 분명히 있지만, 동일노동을 정규직 노동자가 수행하기도 하고 비정규직 노동자가 수행한다는 것 역시 사실이다. 게다가 오늘날의 노동시장은 이러한 단순한 이분법적 분할보다 훨씬 복잡한 방식으로 분절되어 있다. 예를 들어 정년과 풍성한 연금이 보장되는 교원/공무원과 항상적인 고용불안과 노후걱정에 시달리는 대기업/중소기업 정규직 노동자 사이에는 (정규직, 비정규직 사이의 구분과는 다른) 분명한 위계가 존재한다.

자본론 1장 14장까지 마르크스는 (자본에 고용되어 가치를 생산하는) 생산적 노동에만 관심을 두고 있다. 물론 13장에서 협업에 필요한 감독, 지휘, 통제 기능을 다루기는 하지만, 분석의 촛점은 노동의 분화보다는 이들의 기능적 필요성을 짚고 넘어가는 것에 맞추어져 있다. 마르크스는 아직 상품의 판매, 가치의 실현, 대부와 투자업에 종사하는 비생산적 노동에는 관심이 없으며, 아예 자본에 고용되지 않는 공무원, 교사, 종교인, 그리고 자영업자와 전업주부 등은 완전히 논외로 하고 있다. 따라서 숙련공과 미숙련공 사이의 구분과 관련된 마르크스의 분석을 업종과 분야를 막론하고 전방위적으로 존재하는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의 구분에 곧바로 적용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다만, 다음의 몇 가지 측면을 지적하고 싶다.

첫째, 미숙련공의 탄생이 특수한 조건에서 발생하는 특수한 문제에 대한 특수한 해법인 것처럼 비정규직의 탄생을 일종의 특수한 해법으로 다룰 수 있다. 그리고 미숙련공의 탄생이 기술적 해법의 필연적 결과에 해당한다면, 비정규적은 제도적으로 만들어진 위계의 산물이라는 차이점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둘째, 미숙련공과 숙련공의 구분이 기계제 대공업에 의해 철폐된 것처럼 정규직의 비정규직화의 흐름도 분명히 존재한다. 정규직의 당일 해고가 가능한 미국의 경우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에 어떤 유의미한 차이가 있는지 잘 모르겠다. 교사나 공무원 역시 정년을 보장받지 못한다 (우리나라에서는 미셸 리가 나올 수 없음). 유럽에서도 보통 1-3개월의 노티스 기간이 주어지기는 하지만, 정규직 해고가 자유롭다. 이에 비하면 우리나라에서 정규직이나 교사, 공무원 등의 특수직종 종사자가 누리는 일종의 특권은 더 이상 지탱될 수 없는 수준에 이른 것 같다.

셋째, 비정규직 생산직 (혹은 판매직) 노동이야말로 마르크스의 생산적 노동 개념에 가장 부합하는 노동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교사나 공무원이 스스로를 노동자로 인식하고 (어쨌든 사용가치를 생산하는 구체적 유용노동을 수행한다. 물론 세상 모든 사람이 그렇지만) 가장 낮은 등급의 노동자들과 연대하는 것은 좋다. 하지만 노동 일반은 자기 실현의 도구이고 신성하다 할 수 있으나, 자본주의적 노동은 자기를 실현하기는 커녕 파괴하고, 신성하기는 커녕 속세의 모든 번뇌와 고통의 원천이다. 물론 노동자들은 이 비루함 속에서도 변화의 담지자가 되지만…  노동이라는 깃발 아래 모이는 까닭이 자본주의적 노동의 철폐에 함께하기 위한 것이라면 좋다. 하지만, 자본주의에서의 인간의 모든 활동을 노동이라는 바케쓰 안에 우겨넣는 것은 옳지 않다.

넷째,  노파심에서. 자본-노동관계가 자본주의 사회의 본질적 사회적 관계에 해당하기 때문에 (가치를 생산하지 않는다는 측면에서) 비생산적인 다종다양한 노동들 역시 각각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자본-노동관계의 자장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렇지 않다면 군사부 삼위일체의 한 축인 선생님들이 대체 왜 ‘월급’이란 걸 받겠어? 전업주부와 교사, 그리고 공무원에 대한 분석이 노동력 재생산이나 자본주의에서의 국가의 기능을 다루지 않는다면 얼마나 허망할까  (여기에 대한 상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벤 파인의 노동시장이론: 건설적 재평가 (Labour Market Theory: A Constructive Assessment) 참조. 특히 7장 마르크스주의적 대안이 유용함. 메일 주세요).

(126) 노동력등급제

집단적 노동자(Gesamtarbeiter)가 수행하는 각종 기능에는 단순한(einfach) 것과 복잡한(zusammengesetzt) 것, 저급의(niedrig) 것과 고급의(höher) 것이 있기 때문에, 그 구성원(Organe)인 개별노동력은 상이한 정도의 훈련을 필요로 하며 따라서 각각 다른 가치를 가지고 있음에 틀림없다 – 자본론 1권 14장, 473; MEW 23, 370

1. 복잡노동, 단순노동, 노동력의 가치 문제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

2. 집단적 노동, 총노동, 결합 노동 등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

3. 일관성의 측면에서 구성원(Organe)보다는 기관이라는 번역어를 사용해야 한다.

그러므로 매뉴팩쳐는 노동력의 등급제를 발전시키며, 이것에 임금의 등급이 대응하게 된다.

매뉴팩쳐의 시대에는 복잡노동이라는 카테고리가 그렇게 예외적이지 않았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그런데 실상은 오늘날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는 않다. 기계화는 복잡노동에서 복잡한 요소를 제거해서 복잡노동을 단순노동으로 만들어내는 것이 목표인데, 만사가 단방향으로만 작동하는 것은 아니니까. 기계화를 통해 예전에는 없던 새로운 종류의 노동이 만들어지고, 이런 새로운 노동들이 복잡노동인 경우가 있다 (항공정비?).

그래서 노동력 등급제는 과거에도 존재했고 지금도 존재하고 앞으로도 존재할 것이다.

(125) 협업이라는 기반을 더 단단히 하는 매뉴팩쳐

작업장 전체를 보면, 원료는 생산의 모든 단계에 동시적으로 존재한다. [많은 부분노동자들의 결합으로 구성되고 있는] 집단적 노동자는 어떤 한 종류의 도구로 무장한 하나의 손으로 철사를 뽑고, 동시에 다른 종류의 도구로 무장한 다른 손으로 이 철사를 곧게 펴고, 또 다른 손으로 그것을 끊으며, 또 다른 손으로 그 끝을 뾰족하게 하는 등의 일을 한다. 이전에는 시간 상 차례차례로 수행한 서로 다른 부분과정들이 이제는 공간상 병행해서 동시에 수행된다. 그러므로 동일한 기간에 더 많은 완성품이 생산된다 – 자본론 1권 14장, 466; MEW 23, 364

훌륭한 비유다.

이 동시성이 총과정의 일반적 협업형태로부터 생긴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매뉴팩쳐는 협업의 기존의 조건들을 이용할 뿐 아니라 어느 정도까지는 수공업적 노동을 다시 세분화함으로써 협업의 조건들을 창조해 내기도 한다 – 467; 364

1. 동시성이 가져다 주는 이득은 협업 일반의 속성이므로, 협업의 한 형태로서의 매뉴팩쳐에도 역시 동시성이 가져다 주는 이득이 존재한다. 여기에 더해 매뉴팩쳐는 협업을 심화한다. 협업의 한 특수한 형태로서, 매뉴팩쳐는 분할과 전문화를 통해 협업이 필요한 환경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매뉴팩쳐는 협업의 안정적인 형태다. 달리 표현하면 협업은 매뉴팩쳐의 기반이고, 매뉴팩쳐는 협업을 심화한다. 아이폰은 앱스토어의 기반이고, 앱스토어의 수많은 앱은 아이폰 판매를 촉진한다. 이 물고 물리는 관계는 아이폰과 앱스토어가, 협업 일반과 매뉴팩쳐가, 각각 홀로 서기에는 뭔가 아쉬운, 별도로 분석할 수 있겠지만 거기에 그치면 뭔가 찝찝한, 총체의 계기들임을 의미한다.

2. 지극히 마르크스스러운 서술이다. 가치는 화폐를 낳고 화폐는 가치생산을 심화한다. 상품생산은 자본을 낳고, 자본은 상품생산을 심화한다. 세계시장은 자본주의를 낳고, 자본주의는 세계시장을 심화한다, 등등등. 조건이면서 결과!

3. “협업의 기존의 조건들을 이용할”의 원문은 “die Manufaktur findet nicht nur die Bedingungen der Kooperation vor”이다. “기존의”는 빠져야 한다. vorfinden은 이용하다가 아니라 (곁에서 쉽게) 발견한다는 뜻이다. 의역을 한다면 ‘이어 받는다’ 정도가 낫지 않을까 싶다.

4. “어느 정도까지”에 연결되는 것은 세분화가 아니라 창조다.

그래서 다시 번역해보면:

매뉴팩쳐는 협업의 조건들을 이어 받을뿐만 아니라 수공업적 노동을 다시 세분화함으로써 어느 정도까지는 협업의 조건들을 창조해 내기도 한다.

(124) 부분노동자(Teilarbeiter), 분업(Teilung der Arbeit), 부분기능(Teilfunktion)

매뉴팩쳐는 … 인간을 그 기관으로 하는 생산 메커니즘이다 – 자본론 1권 14장, 458; MEW 23, 358

독립수공업자가 하나의 완전한 인간이라면, 매뉴팩쳐에서 인간은 인간의 기관과 같은 역할을 한다는 것 – 팔, 다리, 간, 위장, 눈 등등.

대신 기관으로서 인간은 나름의 독립성을 유지한다. 기계제 대공업에서는 이런 종류의 독립성을 찾아볼 수 없다.

수공업자의 숙련이 여전히 생산과정의 토대로 되어 있기 때문에, 각 노동자는 오로지 하나의 부분 기능(Teilfunktion)만을 수행하게 되고, 그의 노동력은 이 부분 기능(Teilfunktion)의 평생의 기관으로 전환되는 것이다 – 458-9

Teil-(부분)이라는 접두어는 앞으로 계속 나오므로 주목하도록 하자. 가령 분업은 Teilung der Arbeit, 부분노동자는 Teilarbeiter다. 펭귄판에 보니 부분 기능은 partial function, 분업은 the division of labour, 부분노동자는 specialised worker로 번역되어 있다.

매뉴팩쳐의 살아 있는 메커니즘을 형성하고 있는 집단적 노동자는 순전히 이와 같이 일면적으로 전문화된 부분노동자들(Teilarbeitern)로 구성되어 있다 – 459; 359

집단적 노동자는 부분노동자들을 팔, 다리, 간, 쓸개, 위장 등등의 기관으로 사용하는 하나의 커다란 인간이나 마찬가지다. 그림으로 그려놓으면 재미있겠다.

매뉴팩쳐는 [이미 사회에 존재하던] 직업의 자연발생적 분화를 작업장 안에서 재생산하고 또 그것을 체계적으로 끝까지 추진함으로써 부분노동자들의 숙련(Virtuosität)을 생산해 낸다 – 460; 359

그러므로 매뉴팩쳐에서는 숙련노동자와 비숙련노동자, 복잡한 노동과 단순한 노동의 구분이 철저하게 유지된다.

(122) 매뉴팩쳐와 마누팍투어

분업에 의거한 협업은 매뉴팩쳐(Manufaktur; manufacture)에서 그 전형적인 형태를 취한다 – 자본론 1권 14장, 455; MEW 23, 356

국민계정에서 흔히 2차 산업으로 분류되는 제조업을 영어로 표현하면 manufacturing industry 혹은 manufacturing sector다. 농업, 어업, 광업 등을 제외하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제품을 만드는 산업들이 여기에 포함된다. 반도체 산업과 같은 첨단산업도, 마르크스의 시대에 번창한 방적, 방직업도 모두 제조업에 해당한다.

마르크스가 자본론에서 분석하는 매뉴팩쳐는 제조업 일반이 아니라, 특수한 생산방식을 가리키고, 그 반댓말은 (15장에서 분석하는) 머쉬노팩쳐(machino-facture)다. 기계를 동원한 제조가 아니라 사람의 손과 도구를 이용한 제조라는 것이다.

영어 표현 manufacture의 의미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제조 일반으로 확대된 반면, 독일어 표현 Manufaktur에는 원래의 뜻이 그대로 남아 있다. 네이버 독일어 사전에 따르면 Manufaktur의 뜻은 “1. 매뉴팩처(가내 공업과 공장제(制) 공업의 중간 형태), 공장제 수공업;수공(手工), 수공예(藝);제조, 제작”, “2. [옛] 수공업 제품, 수제품”이다.

Manufaktur의 위키피디아 엔트리에 따르면, 기계가 아니라 손으로 생산한다는 측면에서 요새는 고품질의 사치품, 우리 식으로는 명품을 뜻하게 되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