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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창극의 바벨탑

세월호 사건의 충격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야당에 내정을 넘기고 개헌을 제안하는 수준의 광범위한 정치개혁이 필요할 것이다. 나라 전체가 3년상을 치를 판인데 제살 깎는 희생 없이 대통령이 남은 임기 동안 무엇을 이룰 수 있겠는가. 충청도가 돌아섰으며 야당의 동의 없는 입법은 불가능하다. 국가개조는 말할 것도 없고 창조경제나 규제철폐도 물건너 갔다. 대통령 자리를 고수해야 한다면 그것은 헌정의 연속성 정도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문창극씨가 총리가 되느냐 마느냐는 애초에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며, 후보지명 철회를 전제로 충분히 해명을 하고 물러나는 방식으로 이 해프닝을 마무리하는 것이 좋았을 것이다. 그런데 문창극은 정면돌파를 선택해 도리어 일을 크게 벌이고 있다.

사람들이 강연 동영상 전체를 보고 나면 인사청문회를 무사히 넘기고 국회에서 과반의 지지를 확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는 자신의 신을 강연에 이용해 먹는 것에 그치지 않고 오히려 한줌에 불과한 명예를 지키기 위해 그를 욕보이기로 결정했다. 강연은 교인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며 그 내용은 기독교적인 역사관에 충실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이로써 질서 있는 퇴각의 기회는 사라졌고, 덤터기는 모두 신이 뒤집어쓰게 됐다.

문창극은 기독교인이라기 보다는 자신이 역사의 완성을 대면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속류헤겔주의자에 가깝다. 그는 이전의 모든 시대는 예비단계에 불과하며, 고난의 행군은 빛나는 영광을 위한 필연적 계기라고 생각한다. 헤겔에 있어 역사가 이성의 자기실현이라면, 문창극에게는 기독교-한미일삼각동맹-반공-자본주의가 민족사의 동력이다. 기독교를 통한 민족대각성을 위해 이조시대의 당쟁과 가난이 필요했으며, 자본주의의 싹을 심기 위해 일본을 이용해 식민지가 되었고, 반공을 위해 남북분단을 감수했으며, 한미일 삼각동맹을 위해 6.25 전쟁을 결행했다는 식이다. 이 역사의 동력은 (헤겔에게서처럼) 마침내 자신을 실현해내는 이념이며, 존재했던 모든 것이 이 빛 가운데서만 자신의 올바른 자리를 찾는 그러한 이념이다. 그러므로, 편안한 중립과 실용의 언어 뒤에 숨어 이념의 경직성을 비판하는 칼럼을 쓸 때 문창극은 실은 자신의 확고부동한 이념을 배반했던 것이다. 이런 그를 위해 신은 다음과 같은 말씀을 남기셨다.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그 때 네 눈이 잘 보여서, 남의 눈에서 티를 빼 줄 수 있을 것이다. (마태 7:5)

여기에 그치지 않고 문창극은 그의 이념이 곧 신의 뜻이라고 주장한다.

하여튼 크리스찬이 먼저 정신차리는 게 중요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뜻을 알 수가 있어요. (문창극, 과거 교회 강연)

신은 (그것조차 자신의 계획 속에 포함되어 있는) 간난의 세월을 극복하고 마침내 기독교-한미일삼각동맹-반공-자본주의를 완전히 실현해 내고야 말 것이다. 이것은 대한민국에서는 이미 실현되었으며, 공산주의 철폐의 중심국가로 쓰임을 받을 대한민국을 통해 세계적 차원에서 실현될 날도 멀지 않았다 (이것을 그의 ‘이미’와 ‘아직’의 변증법이라고 할 수 있을까). 먼저 정신을 차려 깨달아 알고 있는 문창극은 무지몽매한 동료 기독교인들이 어서 신의 뜻을 깨우치고 기도에 힘써야 한다고 독려한다. 그러면 순리대로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질 것이다.

그래서 문창극은 속류라이프니츠주의자이기도 하다. 분단이나 6.25 같은 엄청난 고통조차 신의 뜻을 담지하고 있으니 이를 비난하고 멀리할 것이 아니라 그 긍정적 측면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는 이미 신의 은총으로, 만사가 최선의 상태에 있는 최선의 세계에 살고 있다. 무언가 부족해 보인다면 그것은 허상이다. 결핍과 고난조차 신의 뜻이기 때문이다. 인샬라! 그런데 그는 왜 북한을 긍정하지는 못할까?

대단히 위험한 신앙관이다. 이런 관점에서는 예수를 배반한 가롯유다는 희생번트를 댄 것에 불과하며, 십자가에서 나를 왜 버렸느냐며 절규하는 예수는 제대로 쇼를 한 셈이다. ‘신의 손’의 도움을 받았다고 고백한 마라도나는 진정한 신앙인일 것이며, 핵은 고난의 행군이라는 시련을 묵묵히 견뎌낸 북한에 주신 신의 축복이 되고 만다. 인간의 자유의지와 신의 뜻 사이의 긴장에 대한 진지한 고민의 흔적을 문창극에게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의 지혜보다 더 지혜롭”(고전 1:25)다고 했다. 유한자인 인간이 무한자인 신의 뜻을 가늠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신의 뜻을 내 머리로 이해하고 내 손에 쥐는 것은 불가능하다. 신의 뜻은 ‘진정성’과는 달라서 아무나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를 수 있는 그런 종류의 말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뿌리 깊은 약함과 악함을 자각한 사람이 대진리 앞에서 부들부들 떨며 두려운 마음으로 뱉어내는 그런 말이다. 그것은 숨이 끊어지기 전 자신의 전생애 속의 모든 굴곡과 희로애락을 회고하면서, 삶을 이끌어 온 것이 자기자신이 아니었음을 꿰뚫어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운명이다’라고 통째로 긍정할 수 있는 사람의 언어다. ‘신의 뜻’은 삶의 지침도 아니며 윤리적 덕목도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이익을 구하는 대신 세상을 위해 세상 속으로 뛰어들어간 사람에게, 그의 고통과 패배와 절망과 실패와 두려움과 고뇌 속에 한줄기 빛처럼 스며드는 위로의 능력이다 –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할 것이다”(마태 28:20).

그러므로 신앙인이라면 신의 뜻을 고백의 방편으로서만 겸손히 ‘사용’해야 한다. 생의 모든 잘못과 실패와 패배의 책임은 자신에게 돌리되, 그러한 잘못과 실패와 패배 속에서도 끊이지 않고 그를 지탱하고 진리의 길로 인도하고 있던 거룩한 존재를 인정하고 그에게 모든 영광을 돌리는 것, 바로 이러한 회고적 태도가 ‘신의 뜻’을 이해하고 따르는 가장 건강한 방법일 것이다.

반대로 신의 뜻이 사전적인 판단의 근거와 정당화의 수단으로 전락할 때 그것은 테러리스트의 무기가 된다. 신의 뜻을 독점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은 우매한 대중을 계몽하려하고, 신의 이름으로 폭력을 정당화하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들이 신의 뜻이라고 부르는 것은 모두 자신들의 뜻이며, 인간의 생각을 신의 생각으로 꾸며놓은 것에 불과하다. 포이에르바흐가 주장한대로 그들은 신을 창조하여 인간의 속성을 그에게 넘겨주는 방식으로 자신들을 소외시켰다. 여기에는 올바른 신앙인은 우선 참 인간이어야 한다는 생각 같은 것은 없다.

신의 뜻 운운하며 과거를 뒤집어 놓는 장난을 해서는 안된다. 식민지 지배가 없었으면 근대화도 없었고, 이승만과 박정희가 없었으면 민주화도 없었다고 생각하는가? 시간적 선후관계와 논리적 선후관계를 혼동하지 말라.  3.1 운동과 독립운동의 정통성이 식민지 지배에 대한 어느 정도의 긍정적 평가를 가능하게 한 것이며, 민주화가 되었으므로 이승만과 박정희와 전두환에 대해서 여유를 가질 수 있게 된 것이다.  5월 광주가 없었으면 박정희 기념사업 같은 것도 없었다. 6월 항쟁이 없었다면 전두환이 멀쩡히 살아 있을 수 있었을까. 김대중이 대통령이 되었기 때문에 박근혜에게 정치의 길이 열린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말해야 한다. 식민지 지배에도 불구하고 근대화가 된 것이며, 이승만과 박정희의 독재에도 불구하고 민주화가 이루어진 것이다. 이것을 인정한 다음에야 그들의 공에 대해서 논할 수 있다.

중앙일보의 문창극 칼럼을 훑어보며 나는 이 사람이 바벨탑을 쌓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들은 또 말하였다. “자, 도시를 세우고, 그 안에 탑을 쌓고서, 탑 꼭대기가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의 이름을 날리고, 온 땅위에 흩어지지 않게 하자.” (창세기 11:4)

그는 10년 동안 칼럼을 쌓고 쌓아 마침내 ‘역사의 신’의 경지에 이르렀다. 그리고 때가 왔다. “주께서 사람들이 짓고 있는 도시와 탑을 보려고 내려오셨다”(창세기 11:5). 개독의 바벨탑이 여기저기서 무너지려 하고 있다.

과연 그런 것인지 두려워하며 신의 뜻을 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