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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금의 이해 – 어느 반면교사에 대하여

1.
누군가 말했듯 신문은 가장 좋은 선생님이다. 꼭 긍정적인 의미에서만은 아니다. 즉 신문은 “교사”이기도 하지만 “반면교사”이기도 하다. 오늘 후자에 속하는 매우 좋은(?) 글을 하나 발견했다. 바로 {매일경제}에 실린 “국민에 부담 주는 대기업 법인세 인상”이라는 기고문이다(링크). 글쓴이는 현 모라는, 매우 위엄이 철철 넘치는 분이다(이렇게 말이다: 링크).

여기서 현모는 대기업에 세금을 더 물리겠다는 발상이 대기업과 재벌에 대한 근거없는 반감에서 나온 것이라면서, 그런 식의 대기업 과세는 대기업에 고용된 노동자와 협력 중소기업 등을 포함한 모든 국민에게 피해를 줄 뿐이라고 일갈한다.

대기업 법인세를 인상하면, 재벌총수와 그 가족들에게 세금폭탄을 안길 수 있다고 보는 모양이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법인세에 대해 미신에서 비롯된 것이다.
법인은 생명체가 아니므로, 세금 부담의 주체가 될 수 없다. 결국 사람이 내게 된다. 대기업의 주인은 재벌가족들이 아니고, 주주다. 한국의 대표적 기업인 삼성그룹의 가족지분도 2% 이내이다. 법인세가 인상되면 주주인 재벌가족들에게도 부담이 돌아가겠지만, 일반 주주들도 당연히 부담을 지게 된다. 이뿐만 아니라 법인세의 일부는 종업원, 자본가는 물론 소비자들에게까지 전가된다.
결과적으로 법인세 인상에 따른 부담은 재벌총수와 그 가족들에게 가는 것이 아니라 국민 전체에게 간다.

매우 재미있는 대목이다. 옳은 부분도 있고, 잘못된 부분도 있다. 먼저 우리나라 재벌기업의 실제 주인이 주주라고 한 것은 잘못이다. 물론 법적으로야 그럴 수 있지만, 사실상 그것은 그 설립자 및 그 후손의 사유물로 존재하는 게 현실이다—그렇다고 이것이, 그들이 기업을 자기들 멋대로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닐지라도 말이다.

다른 한편, 위 대목은 세금을 둘러싼 “진실”을 폭로하고 있다는 점에서—그러나 “은연중에” 그러는 것이긴 하지만—높이 살만 하다. 그 “진실”이란 바로, 세금의 형식적 담세자가 누구냐와 관계없이 그것은 결국 일정 기간동안 생산된 부가가치로부터 지불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또한 바로 그 부가가치는 오늘날과 같은 자본주의 경제에선 결국 기업에 의해 생산될 것이므로, 기업이 거둔 잉여가치로부터의 공제분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이에 대해서는 나의 과거 포스팅 “세제개편안 논란에 대하여” 씨리즈를 참조하시길 바란다(링크1, 링크2, 링크3).

2.
암튼 이런 생각에 입각하면, 소득세나 법인세, 나아가 소비세 등은 모두 형태상의 차이만 가질 뿐이다. 이들이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말하는 사람들, 그리하여 예컨대 “법인세는 올려야 하지만 소득세는 절대 못 올린다”라거나 “소득세나 법인세는 올리기 어려우니 소비세를 올리자”라는 등의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보통 개별 경제주체들이 거두는 “수입”이라는 것을 물신화(fetishise)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경제 전체의 순환이라는 차원에서 보면 그러한 수입이란 개별 경제주체들에게 잠시동안 맡겨질뿐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은 일정한 기간동안 자신에게 맡겨진 수입들을 소비함으로써 자본순환의 한 주기(cycle)를 마무리지어야 하기 때문이다(여기에서 저축 따위는 없다고 가정하자).

그런데 기이하게도 현모는 위 글에서 “법인세란 결국은 온국민이 내는 것이다”라고 (어떤 의미에선 매우 올바르게) 갈파하면서도, “법인세 인상은 기업경쟁력을 악화시킨다”라는 구태의연한 논리를 펴고 있다. 후자의 논리가 말이 되려면 법인세를 기업이 내야 하는 것 아닌가? 즉 법인세를 기업이 내는 것도 아닌데, 왜 법인세를 올린다고 기업 경쟁력이 악화될까? 나는 잘 모르겠다.

3.
앞에서 법인세니, 소득세니, 소비세니 하는 것들은 사실은 형태상의 차이만 있을 뿐이며, 본질적으로 한해동안 생산된 부가가치로부터 공제된다는 점에선 똑같다고 했다. 또한 글을 쓴 현모의 말마따나 만약 법인세 인상이 기업경쟁력을 악화시킨다면, 소득세나 소비세도 마찬가지다. 왜냐하면 이들이 오르면 노동자들은 기존의 생활수준을 유지하기 위해선 기업에 대해 임금인상을 요구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기업의 경쟁력”이라는 측면에서 봤을 때 한 나라의 세금 수준이 높은지 낮은지는, 개별 세목—그것이 기업이 직접 부담하는 “법인세”라 할지라도—의 세율로는 알 수 없고, 전체 부가가치, 즉 국민총생산(GDP) 대비 총세수의 비율이 얼마나 되는지를 봐야만 알 수 있는 것이다. 이를 나타내는 개념이 바로 “조세부담률”이다. 그리고 여기에 세금이나 마찬가지인 사회보장기여금을 함께 고려한 것이 “국민부담률”이다. 우리나라 조세부담률과 국민부담률은 OECD에서 거의 꼴찌 수준이다.

우리나라 조세부담률은 ’09년 기준으로 19.7%이고, 국민부담률은 25.5%로서 OECD 회원국 34개국의 평균 조세부담률(24.6%) 및 국민부담률(33.8%)에 비해 낮은 수준(조세부담률 26위, 국민부담률 30위) (출처: e-나라지표)

요컨대 우리나라의 세율은 높다기보다는 매우 낮은 편이며, 따지고보면 임금도 그러하다. 결국 우리나라의 기업들은 “생산성”을 두고 세계시장에서 처절한 경쟁전을 치르고 있다기보다는 낮은 세율과 임금 덕분에 엄청난 이윤을 거저 먹고 있는 셈이다—뭐, 약간 과장해서 말하자면 그렇단 얘기며, 업종에 따라, 그리고 기업규모에 따라 사정이 다르겠다. 여기에 덧붙여 재벌/대기업은 하청 중소/자영업자들을 수탈하기까지 한다.

4.
다시 세금 얘기로 돌아와서… 세금을 위와 같이 이해하면, 법인세니, 소득세니, 소비세니 하는 것들은, 적정한 조세부담률 또는 국민부담률 수준을 달성하는 세수를 거둬들이는 상이한 방식들에 다름 아니다. 여기서 “적정 수준”이란, 일반적으로 일정 시기 해당 국민경제의 발전수준을 나타낼 일정한 국민총생산(GDP) 수준에 조응하여 당시 사회경제적으로 요구되는 국가활동의 크기를 측정한다고 보면 되겠다. 그러한 “적정 수준”에 대비해 현재 세수가 적다고 판단되면 세금을 더 거둬들여야 할 것인데, 어떠한 세목을 올릴 것인가의 문제는 바로 이러한 차원에서 제기되어야 할 사항이다.

물론 이러한 결정에는 해당 시기 사회경제적 제반 역관계가 종합적으로 고려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나는 앞서 링크한 나의 과거 글에서 법인세율 인상의 필요성을 제기했는데, 이는 현모가 넘겨짚듯 단순히 재벌이 미워서가 아니다. 이를테면 소득세를 올려도 이론상 효과는 같다. 그러나 현재 한국사회에서 노동자 세력은 매우 약화돼 있어서, 소득세가 인상되었을 때 기존 생활수준의 유지를 위해 임금인상을 실질적으로 쟁취해낼 수가 없는 정도다. 이런 경우엔 법인세 인상이 더 효과적이며, 이를 통해 기존의 왜곡된 노-자관계도 일정 정도 바로잡는 부수적인 효과도 거둘 수 있다. 등등. (끝)

 

공공요금의 정치경제학 (3/끝) 공공요금에서 나타나는 ‘공공성’이란 무엇인가?

이제까지 썼던 내용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겠다.

  1. 어차피 공공요금의 등락—생필품의 가격 일반의 경우와 마찬가지로—은 임금에 100% 반영될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오르든 내리든 노동자의 삶에는 변화가 없다(링크).
  2. ‘가치’와 ‘가격’을 개념적으로 구분해서 보면, 공공재화/서비스의 ‘가치’는 여타의 상품들과 다름없이 결정되지만 그 ‘가격’은 이윤을 포함하지 않는 수준에서(=원가 수준에서) 결정될 수 있다(링크).

이제까지의 내용은 어쩌면 별로 새로울 것도 없고, 적어도 ‘이론적인’ 수준에서는 별다른 이의도 없으리라 본다. 그렇다면 이제 위 내용을 가지고 무엇을 할까? 조금 더 진행해보겠다.

5. 낮은 공공요금이 ‘공공성’인가?

위에서 요약한 내용에서 시작해보자. 두 번째 글에서 나는 공공요금의 가격은 그 가치에 비해 낮게 설정된다고 했다. 돌이켜보면, 이 경우에 가치와 가격을 구분하는 일은 별로 없는 것 같다. 대체로 사람들은 ‘공공요금은 원가 수준에서 책정된다’라는 정도로만 말할 뿐이다(거듭 밝히지만, 여기서 ‘원가’는 추상적으로 쓴 말이며, 실제로는 공공요금은 원가뿐 아니라 일정한 이윤—인구증가, 시설개선필요 등에 대응해 필요한 일정한 축적을 위한—을 포함한다).

내 개인적 경험과 짧은 독서 등을 바탕으로 요약하면 대충 이런 논리다:

  • 공공요금은 이윤 없이 원가 수준에서 책정되며, 그리하여 공공재화/서비스는 싼값에 대중들에게 공급될 수 있다. —> 이것이 ‘공공부문’이 담보하는 ‘공공성’이다.
  • 위와 같은 이유로 공공부문의 민영화는 절대 안 된다. —> 민영화가 이뤄지면, 기존의 공공재화/서비스의 가격은 폭등할 것이다.

일단 이제까지의 논의로부터, 공공부문이 민영화되어 기존의 공공재화/서비스가 민간 자본에 의해 공급되면 가격이 급등할 것임은 쉽게 도출된다. 이제 가격이 ‘이윤’을 포함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공재화/서비스가 싼값에 공급되는 것이 ‘공공성’이라고 하는 것은 어떻게 봐도 말이 안 된다. 조금 심각하게 말하면, 그러한 논리는 ‘임금’에 대한 일종의 물신주의(fetishism)에 근거해 있다. 임금이란 고정된 크기가 아니며, 사회적 배경, 노동자와 자본가 간의 사회적 세력관계에 따라 얼마든지 변화할 수 있는 양이다. 그저 개별 노동자/자본가 차원에서나 고정된 것처럼 보일 따름이다. 임금을 고정된 크기로, 그리고 ‘분배’ 범주인 임금을 ‘생산’과 같은 경제의 여타 영역과는 무관한 크기로, 그리하여 노동자의 ‘자산’으로 다루는 것은 커다란 잘못이다. 이런 태도에 입각해, 많은 이들은 저가격이 노동자에게 이롭다는 주장을 펼치곤 한다.

하지만 그와 반대로, 이제까지 우리가 논한대로, 공공재화/서비스의 가격이 낮아지면 임금도 낮아진다. 거꾸로 그 가격이 오르면 결국 임금도 오르지 않을 수 없다(즉 가격수준은 기본적으로 노동자의 삶의 수준과 무관한 것이다). 물론 공공요금 인상을 부분적으로만 보전할 정도로만 임금이 오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또한 해당 시기의 노자관계를 반영하는 것으로, 그런 상황이 지속될 경우 우리는 이를 ‘노동력 가치’ 자체의 저하 증거로 간주하지 않을 수 없다.

6. 공공부문에서 생산되는 ‘사회적 잉여’의 행방.

낮은 공공요금이 노동자에게 이로운 게 아니라면, 그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단 말인가? 당연히 그렇지 않다. 앞서 다른 글에서 ‘저물가’ 일반과 관련해 지적했듯이(‘저물가’는 노동자/서민에게 이로운가), 낮은 공공요금은 다름아닌 자본가에게 이롭다. 그런데 공공재화/서비스의 경우엔 일반 상품과는 다른 방식으로, 어쩌면 더욱 심각한 방식으로 자본가에게 이롭다. 그것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게 중요하다.

왜 ‘더욱 심각한’ 방식인가? 보통의 경우 저물가, 정확히는 생활필수품목의 저물가는 그런 품목들을 생산하는 부문을 일정하게 희생시켜 여타 자본가들을 이롭게 한다. 물론 이는 생활필수품목을 생산하는 부문 자본가들의 저항을 일정하게 불러올 텐데, 이를 잠재우기 위해 국가는 그들에게 일정한 ‘보조금’을 제공하기도 한다. 사실은 바로 이러한 사정 때문에, 정부의 ‘저물가 정책’은 대체로 비자본부문(농업)이나 해외부문, 상대적으로 다루기 쉬운 영세부문에 집중되는 경향이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보통의 저물가의 효과가 ‘경제 내부의’ 일정한 역학관계 속에서 (+)와 (–)가 교차하면서 관철되는 반면, 공공재화/서비스의 경우엔 그것의 생산과정에서 발생했지만 그 가격에는 산입되지 않은 ‘사회적 잉여’가 자본가계급 전체에게 분산되는 방식으로 실현된다. 즉 전자가 일정하게 자본 내부의 갈등(즉 필수품 생산자본 v. 그 외 부문의 자본)을 수반하는 반면 후자에서 자본은 전적으로 단일한 이해관계(즉 ‘무조건’ 낮은 공공요금!)를 갖는 것이다.

여기서 잠깐. 윗단락에서 말한 ‘사회적 잉여’가 뭐였던가. 그것은 공공부문에서 분명히 생산되었는데, 그 까닭은 공공부문도 타 생산부문들과 마찬가지로 자본주의적 방식으로 생산이 이뤄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가격의 책정에 있어서는 고려되지 않았는데, 왜냐하면 공공재화/서비스의 생산자는 이윤획득을 목적으로 하는 자본이 아니라 대중(?)의 필요에 의해 추동되는 국가이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공공부문에서는 타 자본부문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저가격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며, 바로 이것이 흔히 사람들이 공공부문의 ‘공공성’이라고 부르는 것의 실체였다.

그러나 지금 내가 주장하는 바는, 바로 그러한 저가격을 통해서 실제로 이뤄지는 일이란, 공공부문에서 생산되었지만 그 생산물의 가격에는 산입되지 않았던 ‘사회적 잉여’가 노동자/서민대중이 아닌 바로 자본가의 주머니를 불리는 데 이용된다는 것이다. 즉 ‘낮은 공공요금’이란 그러한 일이 벌어지는 핵심 고리인 셈이고, 여기에 있어서 모든 자본은 동일한 이해관계를 갖는다. 이쯤 되면, 흔히 ‘낮은 공공요금’을 통해 담보되는 공공성이란 결국 ‘자본의 공공성’이라고 해야 옳지 않겠는가?

7. ‘자본의 공공성’에서 ‘노동자/서민대중의 공공성’으로!

이 대목에서, 다음과 같은 문제가 자연스럽게 제기되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흔히 공공성이라고 부르는 것이 상당 정도로 ‘자본의 공공성’이라면, 과연 그것을 어떻게 ‘노동자/서민대중의 공공성’으로 돌릴 것인가 하는 문제 말이다.

이는 곧 예의 그 ‘사회적 잉여’를 어떻게 취급할 것인가의 문제로 환원된다. 이제까지의 논의를 따라오신 분들은, 공공재화/서비스의 가격을 그 ‘가치’ 수준으로 올리는 것이 하나의 방안이 됨을 쉽게 이해하실 수 있으리라 믿는다. 즉 공공부문에서 생산된 ‘사회적 잉여’를 자본에게 내어주지 말고, 이를 가격에 산입시켜 국가가 받아낸다는 것이다. 이때 공공재화/서비스의 가격은 종전의 원가수준에서 크게 오르지 않을 수 없고, 결과적으로 그 ‘가격’은 그 ‘가치’와 일치하게 될 것이며, 노동자의 임금 또한 공공요금 인상에 발맞춰 오르지 않을 수 없다(이것이 곧장 노동자의 삶의 수준 향상을 의미하지는 않음은 말할 것도 없다). 끝으로, 국가는 마치 자본이 잉여가치(=이윤)을 획득하듯이 ‘사회적 잉여’를 획득할 것이다.

물론 이런 일을 자본주의 국가가 스스로 나서서 추진할 리도 없지만, 그런 시도가 있을 때 자본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국가가 그런 일을 (어떤 경로를 통해서든) 감행하고, 나아가 자본으로부터 제기되는 엄청난 저항을 이겨낼 수 있으려면, 강력한 대중의 힘이 동원되어야 할 것이며, 또한 그러한 국가가 단순한 ‘자본주의 국가’여서는 안 될 것이다. 적어도 그것은 (사전적으로든 사후적으로든) 어떤 이행기적인 형태일 수밖에 없다. 바로 여기서 국가권력 형태의 문제가 제기된다. 또한 바로 이 지점에서 ‘자본주의 국가’와 ‘비자본주의적/이행기적/사회주의적 국가’의 중요한 차이점이 구성된다. 이상의 표현을 빌어 쓰면, 전자는 ‘자본의 공공성’을 지키고 후자는 ‘노동자/서민대중의 공공성’을 지킨다는 것.

그러나 낮은 공공요금을 통해 자본에게 흩뿌려질 ‘사회적 잉여’를 공공요금을 높임으로써 국가가 확보해낸다고 해서 저절로 ‘노동자/서민대중의 공공성’이 담보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을 그 어떤 의도치 않은 방식으로 자본에 내주지 않으면서도 노동자/서민대중을 위해, 또는 실질적인 사회주의로의 이행을 위해 쓸 수 있어야 한다. 예컨대 섣부르게 그러한 잉여로써 ‘복지’를 한다고 나섰다가는 결과적으로 자본을 위한 비용충당책으로 전락할 수 있지 않겠는가(이는 현재의 박근혜정권이 고려할 법한 사항이다). 이럴 경우엔 임금수준이 하락(복지—>임금하락)하지 못하게 만들 강력하고 실효적인 자본 압박수단이 동반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그러한 잉여의 가장 중요한 사용처는 자본의 활동영역을 장악하는 게 아닐까 싶다. 바로 주요한 기업들과 산업들을 국유화하는 것.

이렇게 보면, 공공기관(이 표현이 어색하다면 ‘공기업’ 또는 ‘국영기업’이라고 해도 좋다)이란 노동자/서민대중이 이행기적인 형태의 국가형태를 통하여 이행의 물적 근거(=‘총알’)을 만들어내는 매우 중요한 매개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통상적인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그것은 오로지 ‘자본을 위한 공공성’에 복무할 뿐이다. 낮은 공공요금이란 바로 그러한 ‘가짜 공공성’이 관철되는 핵심 통로다. 바로 이것이 자본주의 하에서 공공기관이 내포한 모순이다.

사정이 이러함에도 오늘 현실은 처참하기 짝이 없다. 진보진영의 많은 이들이 ‘낮은 공공요금’의 신화에 매몰되어 있으니 말이다. 공공기관으로 하여금 노동자와 서민대중을 위한 ‘진짜 공공성’을 담보할 수 있게 하려면 좀 더 과학적이고 깊이 있는 통찰이—가열찬 ‘실천’은 말할 것도 없고—필요하다.

(끝)

[사족 1] 끝부분에서 국유화 얘길 했는데, 그건 그저 하나의 예에 불과하고, 위 글에서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1) 내가 위에서 ‘사회적 잉여’라고 부른 것이 공공부문에서 실제로 생산된다는 점, 그리고 (2) 그것의 ‘의식적 처분’이 매우 중요하다는 점이다. 그런 문제의식 아래 ‘공공성’이라는 개념을 문제삼은 것이고. 다시 말해, ‘사회적 잉여’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처분할 것이냐의 문제—국유화, 복지 등등—는 위 글의 직접적인 관심사는 아니다.
당연히 누구든 이 대목에서 과거 소비에트 등의 경험을 떠올릴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러고는 곧장 ‘국유화’에 대한 알러지 반응을 낼 필요까지는 없다. 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지만, 역사적 경험 내지는 얄팍한 역사지식을 절대화하는 것은 더욱 어리석은 일이니까.

[사족 2] 혹시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 공공부문, 공공기관, 공공요금 등에 대해 궁금하신 분들은 ‘참세상’에 나오는 기사들이나(http://newscham.net) ‘사회공공연구소’에서 나오는 보고서 등을 참조하세요(http://ppip.or.kr/).

(119) 자본가이기 때문에 산업의 지휘관이 된다

분산된(unabhängiger; isolated) 농민이나 독립적 수공업자의 생산방식을 노예제도에 의한 농장경영과 비교할 때, 경제학자들은 노예제도의 감독노동(Arbeit der Oberaufsicht; function of direction)을 생산상의 공비(faux frais) 로 계산한다 – 자본론 1권 13장, 449; MEW 23, 351

1. ‘분산된’ 보다는 ‘고립된’이 낫다.

2. 고립된 농민이나 독립적 수공업자의 노동에는 감독이 필요 없다. 이것은 감독이 특수한 방식의 생산(특히 노동과정에 적대적 성격이 있을 때)에만 필요한 기능이며, 그 자체로는 생산에 기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정치경제학자들은 노예제에서의 감독노동을 부수적인 공비로 계산했다. 여기에는 협업 일반에서 유래하는 지휘 기능과 적대적 성격의 협업에 고유한 지휘 기능(감독, 감시) 사이의 명확한 구분이 있다.

그러나 그들이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을 고찰할 때에는 이와 반대로 집단적인 노동과정의 성질로부터 발생하는 지휘기능(die Funktion der Leitung)과, 노동과정의 자본주의적, 따라서 적대적 성격에 의해 필요하게 되는 지휘기능을 동일한 것으로 취급한다.

“집단적인 노동과정의 성질로부터 발생하는 지휘기능”이 우선이며, 노동과정이 “적대적 성격”을 가질 때, 감독, 감시와 같은 지휘기능이 추가로 필요하게 된다. 그런데, 자본주의 경제에서 자본가의 지휘는 전제적인 방식을 취하고, 이중의 지휘 기능이 보통 한 사람이나 조직에 의해 통합적으로 수행된다. 따라서 이들 사이의 분리가 흐릿해진다.

게다가 상품의 이중성, 노동의 이중성, 노동과정의 이중성을 인식하지 못하면 지휘 기능의 이중성을 제대로 파악할 수가 없다. 그래서,

산업의 지도자(Leiter; leader)이기 때문에 자본가로 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자본가이기 때문에 산업의 지도자(Befehlshaber; leader)로 된다 – 449-450; MEW 23, 351

1. Leiter는 Leitung(지휘)를 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지휘자라고 하면 오케스트라 지휘자와 헷갈린다. 두번째 산업의 지도자에서 마르크스는 Leiter 대신에 Befehlshaber를 사용하는데, 지휘관이라는 뜻이다. 나는 이 단어가 더 다음에 든다. 지도자보다는 지휘관이 더 가치중립적인 표현이기도 하고 (참고로 펭귄판에서는 모두 leader라는 번역어를 사용했다).

2. 산업의 지도자라는 번역어는 마치 특수한 산업의 리더라는 인상을 준다. 가령 무선전화기 시장의 산업의 지도자는 삼성. 여기서 ‘산업의’로 번역된 industrial은 ‘생산의’라는 의미로 파악하는 것이 맞을 것 같다.

3. 결국 ‘자본주의적 협업’에서 지배적인 것은 ‘자본주의적’이다. 어떤 사람이 협업을 지휘하는 것은 그가 자본가이기 때문이라는 실재적 환상이 생겨난다.

봉건시대에는 장군, 판사의 기능(Oberbefehl in Krieg und Gericht)이 토지소유의 속성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산업의 지도력(Oberbefehl in der Industrie)은 자본의 속성으로 된다 – 450; MEW 23, 351

1. 지휘관(Befehlshaber)과 비슷한 모양의 단어인 Oberbefehl에 주목하자. 지휘권 혹은 통수권이라는 뜻이다. 직역하면 ‘봉건시대에는 전쟁과 사법에 대한 지휘권이 토지소유의 속성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산업의 지휘권은 자본의 속성으로 된다’

2. 달리 표현하면 산업의 지휘권이 자본주의적 산업의 지휘권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자본의 속성으로 전락하고 만다. 물신주의를 연상시키는 익숙한 방식의 서술이다.

자본주의에서는,

  • 상품이 사람들 사이의 관계가 취하는 형태임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상품이 지닌 힘 때문에 사람들이 서로 관계를 맺는 것처럼 나타나고 (상품 물신주의),
  • 화폐는 상품관계의 필연적인 결과임에도 불구하고, 특수한 사물(금)의 속성으로 나타나며 (화폐 물신주의),
  • 자본은 사회적 관계임에도 불구하고, 기계와 같은 생산수단의 속성인 것처럼 나타난다 (기계 물신주의?).

어떤 힘의 연원을 따지지 않고, 그것을 특수한 사물의 영구적 속성으로 이해할 때 물신주의가 생겨난다.

마찬가지로 지휘 기능은 우선 협업에서 유래하고 이것이 역사적 특수한 생산양식인 자본주의에서 특수한 형태로 나타남에도 불구하고, 마치 지휘가 자본의 한 속성인 것처럼, 지휘가 자본에서 비롯하는 것처럼 나타난다. 그렇다면 이것을 자본 물신주의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이것은 물론 환상이지만 또한 실재적 환상이기도 하다. 산업을 지휘하기 위해서는 일단 자본가가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