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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정부의 2014년도 경제정책 방향 – “고용”과 관련하여

박근혜 정부의 내년도 경제정책 방향이 발표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기획재정부 홈페이지(링크), 설명기사는 연합뉴스(링크) 참조.

다른건 다 관두고… 내가 보기에 가장 중요한 “고용” 문제에 대해 간략하게 코멘트하겠다. 보다시피 정부는 내년도에 취업자 수가 “경기회복, 일자리 창출 노력 등으로 연간 45만명 증가”할 것이며, 이에 따라 고용률도 올해(64.4%)보다 0.8%p 개선된 65.2%에 달할 것으로 예상한다.

두 가지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첫째, 고용 개선세가 기대에 못 미친다. 정부는 올해 6월초 {고용률 70% 로드맵}을 발표하면서 2017년까지 고용률을 70%까지 끌어올리겠다고 공언한 바 있다. 이는 박근혜 정부가 경제분야에서 내세운 유일한 “구체적 수치”로서 그 의미가 크다. 하지만 이것은 이명박의 “747정책”만큼이나 매우 비현실적인 목표인데, 어쨌든 이 계획에 따라 정부는 향후 5년간(2013~17년) 취업자수를 238.1만명, 즉 연평균 47.6만명을 늘리겠다고 공언해둔 상태다.

일단 그냥 보더라도 내년도 목표 취업자수 증가분은 위 연평균 수치에 못 미친다. 더구나 올해 취업자수 증가가 38만명 선에 그칠 것으로 예상돼, 이것과 정부의 내년도 취업자수 증가 예상치를 고려하면(38만+45만=83만), 2015~17년 사이엔 155.1만명(=238.1 – 83만)의 취업자가 증가해야 한다. 즉 연평균으로 치면 52만명의 취업자가 매년 증가해야 하는 것이다. 이 수치가 얼마나 비현실적인 것인지는 다음 그림만 봐도 쉽게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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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시피, 지난 10년 사이에 연평균 취업자수 증가의 최대치가 2012년의 43.7만명이고, 같은 기간의 수치를 단순평균하면 29.2만명이다. 그런데 정부는 2015년부터 3년간 매년 52만명을 위한 일자리를 더 만들어야 한다는 얘기. 지난 10년 평균의 2배에 육박하는 수치인데, 이것이 요즘같은 불황기에 실제로 가능할지는 각자 생각해보시길.

둘째, 그나마 위와 같은 고용 증가세는 상당 정도 시간제/비정규직의 증가에 기인한 것임을, 심지어 정부의 통계자료조차도 명확히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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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그림은 1997년의 취업자 수를 100으로 하여 각 취업시간대별 취업자수의 추이를 나타낸 것이다. 매우 명확하게 보이듯이, 전체 취업자수와 (대다수의 “정규직”이 속해있을) 주당 36시간 이상 취업자가 매우 완만하게 증가하고 있는 데 반해, 36시간 미만, 특히 18시간 미만 취업자의 증가가 매우 가파르게 이뤄지고 있다. 물론 이들은 대체로 시간제/비정규직일 것이다. (하지만 취업시간만을 보고 시간제/비정규직 여부를 판정하는 것은 정확성이 떨어진다. 참조: 한국비정규노동센터 통계(링크).)

이런 반론이 가능하다. 즉 비정규 시간제 일자리가 빠르게 늘고 있기는 하지만 전체 일자리에서 비중은 미미하다고 말이다. 실제로 위 그림에서 보듯, 36시간 이상 취업자 증가속도에 비해 1~35시간 취업자 증가속도가 훨씬 빠른데도 전체 증가속도는 전자와 거의 일치한다. 그러나 다음 그림에서 보듯, 위와 같은 급속한 증가 덕분에 시간제 일자리가 전체 일자리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급속히 커지고 있다. 이런 추세는 현 정부의 “양질의 시간제 일자리” 육성을 중심으로 한 고용률 제고정책과 맞물리면 더욱 노골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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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그림은 작년말까지의 통계를 바탕으로 작성된 것이다. 올해는 어떨까? 정부는 최근 지난 11월 고용통계를 발표하면서 전년 같은달에 비해 취업자가 60만 가까이 늘었다며 호들갑을 떨었다(링크). 그러나 실제 내용을 보면 그다지 기뻐할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전체 취업자 증가분의 40%가 36시간 미만의 단시간 취업자로 채워졌고, 특히 18시간 미만 취업자수의 증가율(16.1%)이 전체 취업자 증가율(2.4%)을 크게 상회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상으로부터 우리는, 현재 3%라는 “비현실적인” 실업률 수치에 가려진 우리나라 고용구조가 얼마나 취약한지, 그리고 이에 대한 정부의 인식이 얼마나 안일한지를 쉽게 엿볼 수 있다. 사실 이와 관련해서는 풀어낼 얘기가 너무나 많다. 고용증가가 주로 50대 이상의 고령층에 의해 견인되고 있다는 점, 현재 고용동향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는 청년고용이라는 점, 또한 그런데도 정부는 이러한 문제들에 대하여 이렇다할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는 점 등등. 나아가 이와 같은 취약한 고용사정은 임금 등 근로소득이 가계소득의 주된 원천임을 고려하면, [가계소득 증가둔화] → [소비둔화] → [생산활동 위축] 등으로 이어져 고용사정의 가일층 악화와 경제성장 둔화를 낳는 주요인이 된다(이러한 악순환의 한 고리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지만).

앞의 논의에 한정해서 덧붙이면, 앞으로 우리는 “고용률 70%”를 달성하기 위해, 또는 그것을 달성하지 못하는 것을 숨기거나 변명하기 위해 정부가 어떤 꼼수와 거짓말을 늘어놓는지를 잘 관찰할 필요가 있다. 예컨대 정부는 {고용률 70% 로드맵}에서 2017년까지 500개의 새로운 직업을 발굴해내겠다고 공언한 바 있다. 여기서 예로 열거되는 것들이 사립탐정, 타투이스트, 마사지 치료사 등인데, 이미 적지 않은 수의 사람들이 이러한 업종에 종사중이고 이들도 엄연히 고용통계에서는 취업자로 잡히기 때문에, 이들을 “공식적인 직업”으로 인정한다고 해서 고용률이 늘어나지는 않는다. 그러니까 정부는 이런 말도 안 되는 얘기를 늘어놓고 있는 것이다.

한편 언제나 그렇듯, 이러한 사태전개로부터 자본은 이중적인 이해관계를 갖는다. 첫째, “노동”의 힘이 현저히 약화된 고용시장에서 자본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를 수 있어, 무엇보다 임금이나 노동조건의 결정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다. 더구나 이전까지 범죄시되었던 시간제/비정규직을 이제는 정부의 정책적 뒷받침 아래 마음껏 추구할 수 있다. 그러나 반대로, 이러한 사정의 결과로 실질임금이 줄고 가계와 개인의 소비여력이 지나치게 떨어지는 것을 자본은 원치 않을 것이다.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현 정권이 추구하는 “(양질의) 시간제 일자리” 증식정책은 자본의 입맛에 정확히 부합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를 통해 자본은 별다른 부수적인 부담 없이(∵선별적 복지정책) 자신이 원하는 만큼(∵시간제 일자리) 노동력을 가동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생산 및 분배 영역), 정부가 고용률을 핵심 변수로 해서 사회 전체의 총수요를 관리해줄 것이기 때문이다(소비 영역).

에고… 모처럼 그림까지 그리는 정성을 쏟았으나, 별 내용은 없는 것 같다. ㅎㅎ 어쨌든 현 정부의 고용정책과 관련해서는 이상의 사항들을 중심으로 시각을 넓히거나 심화시키면 좋을 것 같다. (끝)

‘중산층 70% 복원’의 정치경제학 : 왜 그것은 박근혜정부의 국정과제에서 빠지게 되었는가

주지하다시피 ‘중산층을 70%로 만들겠다’라는 것은 대선 후보시절 박근혜 대통령의 대표적인 공약 중 하나였다. 그는 당선인 시절만 해도 이를 ‘새 정부의 핵심 국정지표’로 내세웠다(링크).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중산층 70% 복원’은 2월말에 인수위 보고서에도, 5월 말 발표된 {박근혜정부 국정과제}에서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렇다면 박근혜 정부는 ‘중산층 70% 복원’을 포기한 것인가? 이 문제의 해명은, 특히나 최근 사태진행추이에 비춰보면, 박근혜 정부의 향후 (경제)정책방향, 나아가 이 정권의 본질에 대하여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중산층 정의를 둘러싼 저간의 논란

사실 ‘중산층 70% 복원’ 공약은 그것이 처음 나온뒤부터 야권과 진보진영으로부터 거센 비판을 받았다. ‘중산층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부터가 문제였다.

박근혜 쪽에서는 중산층을 ‘중위소득의 50~150%’로 정의했는데, 이에 따르면 4인가족이 월소득 180만원만 돼도 중산층으로 간주된다. 물론 이는 누가 봐도 터무니없이 낮은 기준이다. 박근혜와 그 무리들은 ‘국제기준’이라는 이유로 이 정의를 옹호했지만, 정작 그 어떠한 국제기구(IMF, World Bank, OECD 등)에서도 이를 중산층에 대한 정의로 쓰지 않으며, 이를 꾸준히 수집해 발표하는 국제기구도 내가 아는 한 없다. 다만 몇몇 연구들에서 중산층을 정의하는 가능한 ‘하나의’ 기준으로 매우 드물게 쓰일 따름이다.

더욱이 어떤 사람이 중산층인지 여부를 결정하는 데는 그러한 ‘소득수준’뿐 아니라 자산이나 교육수준과 같은 다양한 사회적 지표들이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예컨대 가난한 집 출신의 갑돌이가 대기업에 정규직으로 취직했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중산층’이 되는 것은 아니란 얘기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보면, 중산층을 판가름하는 ‘객관적인 지표’가 과연 있을 수 있겠느냐는 회의까지도 가능하다. 누군가가 중산층에 속하는가 여부는 결국엔 그가 스스로, 즉 ‘주관적으로’ 자신이 중산층임을 인정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따르면, 중산층을 늘리려면 스스로 중산층이라고 여기는 사람이 늘어나도록 공정하고 풍요로운 사회를 이뤄야만 한다.

그렇다면 후보시절의 ‘중산층 70% 복원’ 공약이 정권출범 이후의 ‘국정과제’에 포함되지 않은 것은 위와 같은 비판에 정부가 굴복한 결과라고 볼 수 있을까? 아니, 전혀 그렇게 보이진 않는다. 왜냐하면 박근혜는 지난 8월 29일에 있었던 제2차 국민경제자문회의(링크)에서도 창조경제 구현과 중산층 복원을 현정부 경제정책의 핵심으로 꼽으면서, 고용률 제고가 이를 위한 가장 중요한 수단임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도식화하자면, “창조경제 구현 → 고용률 70% 달성 → 중산층 70% 복원”이다(링크). 황우여 새누리당 대표도 최근 중산층 복원을 언급한 바 있다(링크).

이쯤 되니 머리가 더 복잡해진다. 중산층을 복원하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과제라면, 왜 박근혜 정부는 이를 국정과제에 넣지 않았을까?

왜 ‘중산층 70% 복원’은 국정과제에서 빠졌는가

먼저 ‘중산층 70% 복원’을 국정과제에 넣지 않은 것이 일정한 ‘포기’를 내포하는 것은 맞다. 다만 여기선 포기의 대상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은 ‘중산층’이 아니라 ‘70%’라는 숫자다. 다시 말해, 국정과제에 포함되지 않음으로써 ‘중산층 70% 복원’ 정책은 이제 ‘중산층을 두텁게 하겠다’라는 지극히 일반적인 당위명제로 추상화되었다는 얘기다. 그런데 ‘중산층을 두텁게 하겠다’라는 것은 모든 정부가 표방할만한 일반적인 정책목표이기 때문에, 그것을 굳이 ‘국정과제’에까지 올릴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렇게 ‘70’이라는 숫자가 구속력을 잃을 때, 중산층의 정의를 둘러싼 논란도 무의미해진다. 이제 정부는 중산층에 대한 특정한 정의를 고수하는 대신에 그것이 다양하게 정의될 수 있음을 인정할 수 있고, 그러한 기반 위에서 “우리는 이렇게 다양하게 정의될 수 있는 중산층을 두텁게 하는 데 모든 정책역량을 쏟겠다”라고 말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저들은 ‘중산층 70%’라는 표현을 쓴다. 그러나 국정과제에 등재되지 않은 이상 그것은 그저 수사적인 의미 이상을 갖기 어렵다. 그러니까 달성하면 좋지만 못해도 크게 상관없는, 그런 것이 된다. 나중에 정권말이 되었을 때 누군가가 저들더러 “너희들이 약속한 중산층 70%는 어떻게 된 거냐!?”라고 따져 물어도, 저들은 “노력했지만 유감스럽게 됐다. 하지만 우린 그런 약속 한적없다”라고 답할 수 있게 되었다.

‘중산층 70%’라는 수치의 허상

그런데 이상의 논의가 ‘중산층 70% 복원’이 국정과제에서 배제된 하나의 근거는 될 수 있지만, 그것만으로 모든 것이 설명되지는 않는 것 같다. 어떻게 봐도 ‘중산층 70% 복원’은 꽤 명확하고도 매력있는 구호이므로, 그것을 단순히 ‘중산층 정의’를 둘러싼 논란 때문에 포기한다는 것은 쉽게 납득되진 않는다. 혹시 거기엔 더 근본적인, 또는 더 치명적인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 내가 보기엔 그런 이유가 있다. 그것은 바로, ‘중산층 70% 복원’이라는 구호가 ‘고용률 70% 달성’이라는 목표와 상충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니, 적어도 현재 정부의 정책방향에서는 상충된다. 그리고 이러한 상충의 발생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정부의 중산층 정의 그 자체에서 기인한다. 이를 좀 더 들여다보자.

애초 박근혜 캠프에서는 대선공약에서 중산층을 ‘중위소득의 50~150%’로 정의했다. 앞서 이러한 정의에 대한 일반적인 비판들을 살펴봤는데, 그러한 비판들의 근간엔 공히 이러한 정의에 따르게 되면 중산층이 지나치게 많게 잡힌다는 ‘경험적인 직관’이 있었던 게 아닌가 한다. 즉 위 정의에 따르면, 2012년 현재 우리나라 중산층 규모는 세부적인 기준을 어떻게 잡느냐에 따라 60.3%(전가구, 시장소득 기준)에서 69.1%(도시 2인이상 가구, 가처분소득 기준)로 집계된다. 멀리 보면 1997년 외환금융위기에서부터 이후 벤처거품붕괴, 카드대란, 2007/08년 금융위기 등을 거치면서 한국경제의 활력은 완전히 소진되었고, 그 과정에서 신자유주의는 한국의 경제/사회를 양극화의 극단으로 몰고갔음은 주지의 사실. 그랬는데도 2012년 말, 즉 신자유주의가 극단에 치달았다는 이명박 정권 마지막 해에 우리나라 인구의 60% 이상이 중산층이라니! 누구도 이를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을까? (여기서 통계 자체가 잘못되었을 가능성은 배제하고 논의를 전개하자.) 그 까닭은, ‘중위소득 50~150%’는 ‘상대적인’ 정의이기 때문이다. 자, 이렇게 한번 질문을 던져보자. “신자유주의 양극화의 결과 중산층 비중은 늘었을까, 줄었을까?” 우리의 일반적인 감각은 이에 대해 ‘줄었다’라는 답변을 주저없이 내놓을 것이다. 신자유주의로 인해 덕을 본 사람도 없진 않지만 국민 대다수의 삶의 수준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양극화다). 그런데 조금만 생각해봐도, 이러한 답변에는 ‘중산층’에 대한 ‘절대적’ 기준, 즉 “이 정도는 돼야 중산층이지” 하는 기준이 전제되어 있음을 우리는 이해할 수 있다. 즉 신자유주의 양극화 진행에 따라, 그 (절대적) 기준에 못 미치는 사람들이 많아졌으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중산층을 박근혜 등이 그러듯 ‘중위소득의 50~150%’라는 식으로 정의하면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올 수도 있다. 즉 신자유주의 양극화로 인해 사람들의 소득이 하향평준화될 경우 중산층의 비중은 오히려 증가할 수도 있는 것이다. 바로 ‘중위’라는 개념 때문이다. 어떤 집단의 ‘중위소득(median income)’이란 그 집단에 속하는 사람들을 소득의 크기 순으로 늘어놓았을 때 정가운데 위치한 사람의 소득을 말한다. 즉 100명이 있다면 50번째로 가난한(=부유한) 사람의 소득이 이 집단의 중위소득이 된다. 이때, 소득이 적은 사람 49명이 모두 빈털털이가 되고 그들의 소득을 가장 부유한 10명이 나눠갖는다고 해도 50번째 사람의 소득만 불변이라면 이 집단의 중위소득은 유지된다. 또한 90명의 사람들의 소득이 모두 상위 10명에게 몰리는 식으로 양극화가 이뤄진다면, (이때 중위소득은 0이고 90명의 소득이 모두 0이므로) ‘중위소득의 50~150%’라는 정의에 입각한 이 집단의 중산층 비중은 무려 90%가 된다!

‘중산층 70%’와 ‘고용률 70%’의 관계 — ‘중산층 70% 복원’이 국정과제에서 빠진 진짜(?) 이유

자 그렇다면, 이상과 같은 성격을 갖는 ‘중산층 = 중위소득의 50~150%’라는 정의(definition)가 고용률 제고정책과 어떤 관련이 있는가?

보통 고용률 상승은 취업인구의 증가를 의미하고, 취업인구 증가는 가계소득 증가를 의미하므로, 만약 우리가 ‘절대적인’ 중산층 기준을 가지고 있다면, 이러한 가계소득 증가는 곧장 중산층 증대로 이어질 것이다(사실 지금까지 그냥 ‘소득’이라고 했던 것은 모두 ‘가계소득’을 의미한다. ‘중산층’이란 보통 개인이 아닌 가계/가구 단위에 붙이는 규정이기 때문이다). 즉 우리나라 사람들이 흔히 “연소득 5천만원은 돼야 중산층”이라고 생각한다면, 취업인구 증가에 따른 고용률 상승은 그러한 기준에 맞는 가구수를 늘릴 것이란 뜻이다.

‘중산층 = 중위소득의 50~150%’와 같은 (상대적인) 기준을 가지고 있을 땐 얘기가 달라진다. 즉 추가적인 취업(=추가적인 소득상승)이 어떤 가계에서 발생했느냐에 따라, 위 정의에 입각한 중산층 비중은 증가할 수도 있도 감소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1) 추가적인 취업이 중위소득 50%에 못 미치는 가구에서 발생한다면, 그리고 그 결과 해당 가구의 가구소득이 중위소득 50%를 넘어선다면, 이 집단의 중산층 비중은 증가한다. 그러나 (2) 추가적인 취업이 가구소득이 중위소득 150%에 미치지는 못하면서도 그에 근접한 가구에서 발생한다면, 그리하여 이 가구가 ‘중위소득의 50~150%’ 범위를 벗어난다면 중산층 비중은 감소할 것이다. 끝으로, (3) 추가적인 취업이 중위소득 언저리에 위치한 가구들에서 발생하는 경우에는, 결과적으로 중위소득 자체가 높아져 일부 가구가 저절로 중위소득 50% 미만으로 전락할 수도 있다. 물론 이때는, 중위소득 150% 선도 상승하게 돼 원래는 고소득층에 속했던 이들이 새로 중산층으로 들어올 수도 있어, 최종적으로는 ‘중산층 = 중위소득의 50~150%’의 비중이 늘지 줄지 알 수는 없다. 이상을 그림으로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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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그림에서 보듯, 고용률 상승이 어느 소득분위에서 주로 발생하느냐에 따라서 ‘중산층 = 중위소득의 50~150%’은 늘어날 수도 있지만 반대로 줄어들 수도 있다. 일반화시켜서 말하면, 고용률 상승이 소득분배를 더 불평등하게 만들 수도 있다는 얘기다. (물론 고용이 모든 소득계층에서 골고루 증가할 수도 있다. 그러나 현재의 논의에서는 이런 경우는 배제한다. 그 이유에 대해선 이하의 논의를 보라.)

저소득계층의 고용상태가 개선되고 그것이 그들 가계의 소득을 증대시켜야만 고용률 증가가 ‘중산층 복원’으로 이어질 수 있다. 만약 고용률 제고가 중간계층 언저리부터 그 이상에서 벌어진다면, 이를 통해 소득분배가 개선될 것인지는 장담할 수 없다. 혹여 이를 통해 ‘중산층 = 중위소득의 50~150%’의 비중이 증가한다 해도, 그것은 저소득층의 소득증가를 통한 것이 아니라 기존에 고소득층에 속하던 이들이 중위소득 150% 이하로 떨여진 결과일 뿐이므로, 이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따라서 만약 정부가 고용률 제고를 통해 중산층 복원을 꾀한다면, 정부의 고용정책은 반드시 저소득층에 초점이 맞춰져야만 하는 것이다.

바로 이렇게, 고용률 제고 정책이 중산층 비중을 오히려 줄어들게 만들 수 있다는 가능성 때문에, 이 둘을 함께 가져가기가 어렵다. 이러한 까닭에 결국 ‘중산층 70% 복원’이라는 매우 ‘섹시한’ 정책목표가 국정과제에서 누락된 것이 아닐까 나는 생각한다.

정부의 ‘양질의 시간선택제 일자리’ 정책 — 현 정권의 본질(!)

이제 현 정부의 고용정책, 또는 고용률 제고정책이 어떠한가를 보자. 이와 관련된 정부시책의 핵심은 바로 ‘양질의 시간선택제 일자리’를 늘리는 데 있다. 지난 달 말에는 공공기관 채용정보박람회를 열면서 이러한 유형의 일자리를 만드는 데 공공기관을 앞장세울 것임을 천명했고(링크), 삼성 등 대기업들도 잇따라 ‘시간선택제’ 채용계획을 내놓음으로써 정부 정책에 화답하는 모양을 연출했다(링크).

이상의 논의에 비춰볼 때,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 보아야 할 것은 과연 어떤 이들이 바로 그 ‘양질의 시간선택제 일자리’를 채워갈 것인가 하는 것이다. 이와 관련, 정부가 시종일관 강조하는 것이 ‘고학력 경력단절 여성’이다. 즉 출산과 보육, 또는 나이든 부모봉양 등의 이유로 본인의사와 상관없이 회사를 그만둔, 최소한 대학교를 졸업한 고급여성인력을 일터로 다시 불러들인다는 얘기다. 정부가 출산과 보육, 노인생활과 관련된 복지체제를 대폭확대 내지는 정비하겠다고 나서는 것도, 결국은 이를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다.

이는 그 자체로만 보면 당연히 권장할만한 일이다. 사실 그것은 기업도 원하는 일이다. 이제 대학을 막 졸업한 애송이보다야 자기 회사에서 10년쯤 잔뼈가 굵은 워킹맘이 능력만 놓고 본다면 백번 나을 것이기 때문이다. (말할 것도 없이, 시간선택제 일자리 자체에 대해서도 비판할 부분이 많다. 하지만 이 글에서는 생략하기로 한다.)

이렇게 고학력 경력단절 여성들이 ‘시간선택제’로 채용되면 고용률이 자연스럽게 높아질 것이다. 그렇다면 ‘중산층 = 중위소득의 50~150%’ 비중도 늘어날까? 이는 바로 그 ‘고학력 경력단절 여성들’이 어느 소득분위에 대체로 속해있을까를 생각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당연히 예외야 상당정도 존재하겠지만, 이들의 대다수는 ‘고학력 남성’과 결혼해 가정을 이루고 있을 것이고, 그들이 이루는 가계의 소득도 중위소득 이상일 확률이 높다. 그리하여, 현재와 같이 정부가 ‘고학력 경력단절 여성들’에 초점 맞춰진 ‘양질의 시간선택제 일자리’를 통해 고용률을 높이려고 하는 한, 향후 소득분배 상태는 개선되기보다는 악화되기가 쉬운 것이다!

거듭 말하지만, 모든 고용률 제고책이 소득분배를 악화시키는 것은 아니다. 고용정책의 주파수가 저소득층에 맞춰진다면 고용률 제고가 소득분배 개선으로 자연스레 연결될 것이다. 이때 가장 중요한 것이 기존의 비정규직의 처우를 개선하고(각종 사회보험 배제, 노동과정에서의 차별 등), 비인간적인 현재의 최저임금을 대폭적으로 인상하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저소득/빈곤층의 근로의욕을 고취시키는 한편 기존에 고용되어 있던 이들의 처우를 개선한다면, 사회는 지금보다 훨씬 더 활기를 띨 것이고 경제의 건전한 선순환이 복원될 조건도 마련될 것이며, 중산층 규모도—그것을 어떻게 정의하든—늘어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정부가 이러한 사실을 모르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정부가 비정규직 처우개선이나 최저임금의 대폭적 상승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이 오로지 고용률 수치를 올리는 데만 급급해 야비하게 고학력 경력단절 여성에만 집착하는 것은, 오늘 대한민국 정부의 성격이 어떠한가를 소리없이 웅변해준다. 즉 ‘중산층 70% 복원’이라는 모토에서 언뜻 엿보였던 현 정부의 진보적인(!) 면모는, 그것이 국정과제에서 빠짐으로써, 그리고 사회적으로 상층에 속한다고 해야 할 이들을 중심으로 고용정책을 펴나감으로써, 완전히 탈색되었다. 다시 말해 이번 정부도, 선택된 소수만 키우고 그 외의 사람들은 그들로부터 떨어지는 떡고물을 주워먹게 하는, 이른바 ‘적하효과(trickle-down effect)’에 입각했던 이전의 신자유주의 정부와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다.

현재의 박근혜 정부는 중산층—그것을 뭐라 정의하든—을 두텁게 하는 데 실질적으로 아무런 관심이 없다. 혹여 그들이 ‘중산층 = 중위소득의 50~150%’을 증대시킨다면, 그것은 저소득층을 끌어올림으로써가 아니라 150% 이상에 위치하던 이들을 끌어내림으로써일 것이다. 다름아닌 ‘양질의 시간선택제 일자리’를 통해서 말이다. 그러니까 이때 ‘양질의 시간선택제 일자리’는 고학력 경력단절 여성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대부분의 정규직 노동자를 타겟으로 할 것이다. 그리하여 결과적으로 그것은, 기존 비정규직의 질적 제고가 아니라 기존 정규직의 질적 하락을 야기할 것으로 예상된다. 사실은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양질의 시간선택제 일자리’에 환호할 수 없는 주된 이유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