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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유물론의 기본 태도: {월간 좌파}에 실린 김태호 선생의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 ‘서문’ 번역과 해설에 대하여

{월간 좌파}라는 잡지가 창간됐다. 일정한 준비기간을 거쳐, 5월호를 창간호로 냈다. (홍페이지 링크) 앞으로 크게 번성하길 바란다.

친구가 소개해줘 조금 봤는데, 내용이 매우 알차다. 앞으로 기대해도 좋을 것 같다. 특히 나는 ‘탐구’ 섹션에 있는 ‘{자본} 읽기’에 주의가 쏠릴 수밖에. 박종철출판사의 김태호 대표께서 야심찬 연재를 기획하고 계신 것같다. 이번 창간호에선 그 ‘서장’격으로 마르크스가 1859년에 쓴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의 ‘서문’이 다뤄지고 있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김태호 선생께서 ‘서문’의 전문을 새로 번역해서 내놓으셨다는 점이다. 한 문단씩 번역문을 제시해놓고, 그에 대해 설명을 다는 식이다. 새로운 번역문은 무엇보다 쉽게 읽힌다. {맑스 엥겔스 저작선집}(제2권)에 실린 기존의 번역이 다소 딱딱했던 것과 비교된다.

그런데 내가보기에 크게 두 군데 오류가 있는 것 같다. 하나는 번역에, 또 하나는 해설에. 지금부터 그것을 지적해보겠다. 아무도 말을 거들지 않으면 연재하는 사람도 힘이 빠질밖에. 힘 내시고, 앞으로 좋은 연재 부탁드린다는 뜻에서 조금 거들겠다. 아래 보듯이, 번역 오류는 매우 심각하지만, 해설의 오류는 단순한 ‘부실’이라고만 봐도 괜찮을 듯 싶다.

 

1. ‘서문’의 네 번째 문단 중에 나오는 다음 구절을 보자(148쪽).

“어떤 개인이 어떠한지를 그 개인이 자부하는 것에 따라 판단하지 않듯이, 그러한 전복의 시기는 그 시기의 의식으로 판단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물질적 생활의 모순에서 나오는 의식, 즉 사회적 생산력과 생산관계 사이의 현존하는 갈등에서 나오는 의식으로 설명해야 한다.”

위 문장은 애초 번역문인 {저작선집}에는 다음과 같이 번역돼 있다(제2권: 478쪽).

“한 개인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그 개인이 자신을 무엇이라고 여기는가에 따라 판단하지 않듯이, 그러한 변혁의 시기가 그 시기의 의식으로부터 판단될 수는 없으며, 오히려 이러한 의식을 물질적 생활의 모순들로부터, 사회적 생산력들과 생산 관계들 사이의 현존하는 충돌로부터 설명해야만 한다.”

위 문장은 역사유물론의 기본원칙을 담고 있는데, 보다시피 위 두 번역은 (사소한 표현의 차이를 논외로 하더라도) 크게 다르다. 새로운 번역자인 김태호 선생께서 기존의 번역문을 모르는 것도 아닌 이상, 그러한 차이는 의도된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즉 옮긴이(김태호)는 거의 명백하게 기존의 번역이 틀렸다고 생각해 번역을 수정한 것이리라.

그러나 내가 보기엔 위 문장에 있어서만큼은 기존의 번역이 옳다. 무엇을 덧붙이겠는가? 원문확인의 구구한 과정은 생략하고… 또한 이는 원문해석의 문제는 아니다. 내용의 이해, 즉 역사유물론의 해석, 다시 말해 마르크스의 기본생각의 이해 문제인 것이다.

자… 김태호 선생의 새로운 번역을 보면, ‘그 시기의 의식’과 ‘물질적 생활의 모순에서 나오는 의식’이 대비된다. 그는 이 둘이 다르다고 생각하며, 그렇기 때문에 ‘전복의 시기’는 전자가 아니라 후자에 의해서 설명되어야 한다고 본다. 아니, 마르크스가 그렇게 본다고 번역했다.

하지만 ‘그 시기의 의식’과 ‘물질적 생활의 모순에서 나오는 의식’은 다른 것이 아니다. 둘은 같은 것이다. 이것을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의식들은 언제나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물질적 생활의 모순에서’ 나온다. 사실은 이런 점을 인정하는 것이 바로 (위 인용문장이 속한 단락에서 소개되고 있는) 역사유물론적 태도이며, 이런 태도에 따른다면 ‘의식’을 설명함에 있어 그것이 도대체 어떻게 해서 ‘물질적 생활의 모순’의 필연적인 표현형태인지를 밝히는 것이 핵심적인 관심사가 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이러한 연관을 밝히는 가장 중요한 도구가 정치경제학임은 말할 것도 없고.

이제 이상의 내용을 염두에 두면서 위의 두 번역문을 비교해보자. 이제 독자분들도 {저작선집}의 원래 번역문이 더 정확함을 어렵지 않게 감지하실 수 있으리라 믿는다. :)

혹시 아직 아리까리하신 분들을 위해 예제 하나. 자, 여기, 우리 시대에 관한 어떤 ‘의식’이 있다. 이를테면 ‘신자유주의는 끝났다’라는 의식이 있다고 치자. 명백히 이것은 유일하다고는 볼 수 없어도 오늘 우리 시대를 묘사하는 하나의 ‘의식’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것은 ‘그 시기의 의식’이다. 그런데 이것은 ‘물질적 생활의 모순에서 나오는 의식’인가? 당연히 그러하다. 어떤 의식이 하늘에서 그냥 떨어질리가 없잖은가.

그런데 사람들은 이런 의식에 대해 뭐라 말하는가?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대중들의 신자유주의에 대한 환멸이 이제 극에 달했다. 따라서 신자유주의가 설 곳은 이제 없다.” 물론 이런 식의 동어반복(!) 끝에 다음과 같이 덧붙이곤 한다. “우리 모두 거리로 뛰쳐나가 신자유주의의 종말을 축하하자. 꼬뮨주의 만세!”

그러나 불행히도, 이런 식의 서술에서는 “여기 ‘신자유주의는 끝났다’라는 의식이 있다”라는 명제 이상을 이끌어낼 수 없다. 분명 이런 의식은 현실에 존재하는 ‘물질적 생활의 모순’으로부터 나오리라. 그러나 위 서술에는 그러한 ‘물질적 생활의 모순’의 detail에 대한 설명은 전무하며, 또한 이는 그러한 모순이 어떻게 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신자유주의는 끝났다’라는 (집단)의식을 갖게 만들었는지를 말해주지도 않는다. 이쯤 되면, ‘이러한 의식을 물질적 생활의 모순들로부터, 사회적 생산력들과 생산 관계들 사이의 현존하는 충돌로부터 설명’하는 것이야말로 핵심적인 과제임이 명백하지 않은가. 바로 이런 사항을 위 인용문장은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2. 한편 위에서 인용한 문장이 들어있는 긴 문단을 두고 김태호 선생은 다음과 같은 해설을 내놓는다(149쪽).

맑스는 신문 편집장으로서 물질적 이해관계에 대해 한마디 하는 것도 곤란이고 프랑스의 사회주의 및 공산주의에 대해 “어떤 판단도 내리지 못하겠다”더니, 그러한 “밀려들던 의문의 해결”을 위해 “헤겔의 법철학”을 검토했다고 한다. 사람들의 살림살이를 공부하거나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공부한 것이 아니라 헤겔을 공부했다는 것이다. 맑스는 헤겔을 읽으면 그런 문제들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다고 본 모양이다.

여기서는 마지막 문장이 문제다. 내가 아는 한, 적어도 {라인신문} 이후엔, 마르크스가 헤겔을 읽음으로써 ‘내게 밀려들던 의문’을 해명할 수 있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 그는 그저, 당시 자신이 속한 (헤겔주의라는) 지적 배경 속에서, 그리고 그러한 배경에 의해 부여된 자신의 지적 한계 속에서, 헤겔의 법철학 비판을 ‘내게 밀려들던 의문’의 해결을 위한 ‘절차’이자 ‘수단’으로 삼았을 뿐이다.

물론 우리가 알듯, 얼마 가지 않아서 그는 이런 식의 철학비판도—아무리 그것이 ‘비판’이라 할지라도—부족함을 깨닫게 된다. 그것이 바로 그가 ‘정치경제학 비판’으로 옮겨간 이유다. (끝)

 

 

홉스봄 평전, 이렇게나 빨리 번역되어 나오다니!!

홉스봄 대장님의 평전이 번역출간되었다. 다음 자료를 참조하시길.

출판사 책소개: {홉스봄, 역사와 정치} (링크)
옮긴이의 말: ‘홉스봄 평전, “홉스봄, 역사와 정치” 옮긴이 후기’ (링크)

그리고 위 책의 번역출간을 기념해, 옮긴이와의 대화 시간을 열게 되었다. (관련 트윗)

일시: 2012년 5월 24일 목요일 오후 7시30분~
장소: 레드북스 (전화: 070-4156-4600, 약도)

부디 많은 분들이 오셨으면 좋겠다. 참고로, 일찍 오시는 분들께는 약간의 특혜(?)가 있을지도 모름.. ㅎㅎ

그리고 이 참에… 이 블로그에도 홉스봄 대장님 관련된 잡글을 쓴 적이 있다.

최근 미디어에 비친 홉스봄 (홉스봄 on 지젝) (2011년 1월 20일)
홉스봄: 재즈평론가로서의 삶에 대해 (2010년 6월 4일)

간단히 검색을 해봤는데, 홉스봄… 요새는 마르크스보다도 인기가 없는 것 같다. 적어도 ‘학계’에서는 말이다. (당연한 건가? @.@ ㅋㅋㅋ)

 

강신준 교수의 <자본> 완역출판에 부쳐

0. 여기 두 개의 미디어 기사가 있다.

[1] 왜 오늘 다시 ‘자본’을 들춰야 할까요 (<한겨레>, 2010년 9월 3일)
[2] ‘대박’ 꿈에 취해 벼랑 끝에 선 개미들아, ‘무기’를 들자! (<프레시안>, 2010년 9월 3일)
(이하에서 이 둘은 각각 [1]과 [2]로 부른다.)

두 기사가 넷상에 뜬 것이 9월3일이니, 벌써 2주나 지났다. 기사들이 올라왔을 때는 일이 너무 많고 바빠서 읽지도 못하고 있다가 며칠 전에서야 대충 훑어볼 수 있었다.

재밌는 것은, 정작 나는 기사를 보지도 못하고 있는데, 어디선가 내 과거 글들(1 이것, 2 저것)이 강교수의 『자본』 완역과 이에 뒤따른 그의 인터뷰 기사들과 엮여 링크가 되어 많이 읽혔다는 사실이다. 나야 고맙고 영광스러운 일이지만, 동시에, 그런 글들을 과거에 쓴 이상, 이번 완역 및 인터뷰에 대해서도 간단한 소회를 밝혀야 한다는 일종의 “의무감”도 드는 게 사실이다. 그래서 이 포스트를 쓴다.

혹, 어떤 이들은, 이렇게 비공식적인 블로그에 뒷담화 식으로 까대지 말고 좀 더 공식적으로 대응해보라고 할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너무 뭐라 마시길. 안 그래도, 조만간에 그럴 기회가 있을 것이다. 그러니 이 글은, 좀 더 엄밀하게 작성될 이후 글을 위한 서곡이자 예행연습이기도 하다. :)

1. 강교수의 (심오한) 깨달음

일단 강신준 교수께 존경과 감사의 뜻을 표하고 싶다. 하지만 이 얘긴, 여기서 그만 둔다. 어차피 나의 이런 ‘뜻’에 대해선 아무도 관심이 없을 테니까.

이번 기사와 인터뷰. 한마디로 이건, 무지와 오해, 억측과 아집의 종합선물세트다. 그나마 건질 거라고는, 장장 23년에 걸친 강교수의 “『자본』 번역의 오디세이”라고 할만한 “뒷이야기”뿐이다. 그마저도, 강금실도 한물 간 이제는, 그다지 재밌지도 않다.

위 기사와 인터뷰를 찾기 위해 google로 검색을 해보니 많은 이들이 강교수의 집념과 의지, 진심어린 노력에 감동한 모양이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대목에서, “감동”은 극에 달했을 줄로 본다:

초심을 버리지 않고, 시류에 흔들리지 않고 마르크스를 연구하다 보면 언젠가는 광맥에 닿는다. 내가 그렇다. 20년 동안 동아대학교에서 마르크스를 강의하면서 <자본>을 읽었다. 또 해설서를 펴내느라 꼼꼼히 본 것도 여러 번이다. 그런데 한 15년이 지난 2004~5년에야 <자본>에 대한 깨달음이 오더라. ‘아, 이 책의 구조가 이렇구나.’ 그 때야 어렴풋이 감이 왔다. ([2]에서)

깨달음… 번역만 따져도 23년이고 그 “첫 만남”부터 치면 30년이 넘으니,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 그 “깨달음”과 “감”이라는 것이 얼마나 심오하고 또 뿌리 깊겠는가… 라고 사람들은 보통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이번 인터뷰와 기사만 보더라도, 그의 “깨달음”과 “감”이 어떤 종류의 것인지가 꽤 명확하게 드러난다. 그리고 그것은 “심오함” 등등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1]의 대부분의 내용이 [2]에 더 자세히 나오므로 이제부턴 거의 [2]의 인터뷰만을 참조해서 글을 진행하겠다.)

2. “지금” 『자본』 번역본이 나온 것의 의의

강교수는 1987년에 『자본』 번역에 처음 연루되어 무려 23년만에 그것을 완전한 모습으로 세상에 내놓았다. 이에 대한 소회가 남다를 터. 개인적 소회도 소회지만, 그는 이 번역의 의의를 어떻게 평가할지가 무엇보다 관심거리다.

그의 인터뷰와 기사의 내용을 종합해봤을 때 그가 이번 번역에 부여하고 있는 가장 큰 의의는 아마도 “원전번역”이라는 것이 아닐까 싶다. 이를 강조하기 위해 그는 『자본』과 같은 중요한 저작의 원전 번역본이 하나도 존재하지 않고 있는 대한민국의 학계, 나아가 지식계의 척박함을 비판한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강교수, 연세가 몇이신가? 56세라고 한다. 그리고 이번에 나온 『자본』의 완역에 무려 23년을 쏟으셨다고 한다. 사정이 이렇다면, 그는 이번에 자신의 『자본』 완역을 자랑하고 그에 의기양양해 하실 것이 아니라, 부끄러움을 느끼셔야 한다. 즉 지금까지 대한민국 학계를 척박하게 한 장본인 중 하나가 실은 당신이심을 왜 보지 못하시는가? 이번 번역, 어떤 면에선 23년 걸린 노작이라고 평가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중요한 책의 번역을 맡으신 분께서 무려 23년이나 그 책임을 방기하고 계셨다면 이는 상찬보다는 질타의 대상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지금”의 의미를 새삼 되새길 수 있다. 왜 “지금”인가? 인터뷰 내용으로 보건대 아마도 강교수는 “지금이야 말로 『자본』이 무엇보다 필요하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좀 더 명확한 대답을 내놓아야 한다. 그는, 우리가 다른 때도 아니고, 즉 지난 23년의 세월 중 다른 그 어느 때도 아니고 바로 “지금”, 2010년에 『자본』의 새로운 번역을 필요로 하는 까닭이 무엇인가를 명확히 밝힐 필요가 있다.

과연 그 사이에 우리는 『자본』이 특별히 필요로 했던 시기를 겪지 않았던가? 간단히 말해 이런 거다. 왜 강교수는 지난 1997년의 대란이 벌어졌을 때 『자본』을 완역해 내놓지 않았는가? 그때는 “제대로 된 『자본』 번역본”이 (아직은) 필요없었단 말씀이신가? 바로 이 질문에 답하지 못한다면, 그는 이번 번역이 “23년에 걸친 노력의 산물”이 아니라 “23년에 걸친 게으름과 책임방기의 산물”임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여기서 “게으름”이란 강교수가 지난 23년을 게으르게 사셨다는 뜻이 아니다. 나는 이런 것을 평가할 위치에 있지 않다).

이런 의미에서, “부족한 부분은 앞으로 계속해서 보완해 나가자고 다짐하면서 일단 책을 내놓았다”라는 강교수의 언급은, 저자나 역자가 흔히 하는 겸손의 발언이라기보단 그의 무책임함의 발로–그의 의도와 상관없이–라고 보는 게 더 타당하다. 1987년에 첫 번역본을 내놓았을 때나 할 법한 얘길 이렇게 지금까지 되뇌고 있으면 곤란하다.

3. “원전 번역”이라는 “신화”

강교수의 이번 번역이 갖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의의는 그것이 한글로 나온 “최초의 원전 완역본”이라는 데 있다. 그러나 “최초의 원전 완역본”이라는 것은, 상식적으로 봤을 때, “가장 정확한 번역”도, “가장 충실한 번역”도, “가장 학술적인 번역”도 아니다. 이런 상식과는 정반대로, 강교수는 이 모든 것이 일치한다고 보는 듯하다. 이를테면 김수행 교수의 기존 번역본을 비판하면서, 그것이 “영어 중역”이라는 것뿐만 아니라, 그것의 “충실성”과 “학술성”까지 걸고 넘어진다. 이를테면 그는, “충실성”과 관련, 다음과 같이 말한다:

독일어 원본과 영어판은 그 자체로 많이 다르다. 게다가 김수행 교수의 <자본>은 원전에 충실한 번역이 아니다. 예를 들자면, 독자의 이해를 넓히기 위해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원전의 화폐 단위를 전부 다 한국식으로 옮겨 놓았다. 독일 사람이 썼는데 ‘근’이 나오고, ‘필’이 나오고. ([2]에서)

이건 정말 쪼잔한 비판이다. 기본적으로 번역에 원문을 어느정도로 살릴 것인지는 늘 논란거리다. 원문을 살리는 것이 좋은 번역일 수도 있고, 우리 실정에 맞게 조정하는 게 좋은 번역일 수도 있다. 번역의 좋고 나쁨을 가르는 기준은 “원문 그대로” 했느냐와는 크게 관계가 없다.

그리고 김수행 교수가 화폐나 도량단위를 바꾼 것은, 사실은 노동자들을 포함해 일반 독자들이 읽기 쉽게 하기 위함이었다. 물론 이런 판단에 반대할 수는 있다. 그러나 적어도 그런 반대와 비판은, 기본적으로 그가 왜 그런 선택을 했는가에 대한 “이해”(understanding)의 바탕 위에서 행해져야 한다. 난 지금도, 김교수가 일반 독자들을 위해 화폐나 도량단위를 바꿨으며, 또 번역 과정에서 그를 가장 많이 애먹인 것 중 하나가 바로 그런 변환과정이었다는 이야기를 어딘가에서 처음으로 읽었을 때의 그 가슴 뭉클함을 간직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강교수는 “원전 번역”이라는 것을 “학술성”과 거의 동격으로 보고 있는 것도 같다. 그러나 전자는 후자를 구성하는 일부, 그것도 기본적이긴 하지만 그렇게 크지 않은 일부를 구성할 뿐이다. 이에 대해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할까? 하여튼 정확성, 충실성, 학술성 등을 평가하기 위해 우리는 별도의 기준들이 필요할 따름이다.

연구자로서 말하건대, 강교수의 이번 번역의 의의는 “최초의 원전 완역본”이라는 것이고, 또 그게 전부다. 정확성, 충실성, 학술성 등으로 보자면, 적어도 2년 전에 출판된 제1권만 놓고 본다면 김수행 교수의 기존 번역본(즉 영어 중역본)이 낫다는 게 내 판단이다. 물론 이는 상대적으로 그렇다는 얘기다. 둘 다 사실은 개선의 여지가 많다. 이 얘긴 더 길게 할 순 없다. 기본적으로는 내가 아직 이번에 나온 제2권과 제3권을 읽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제1권에 대한 내 개략적인 평가는 앞서 링크해둔 나의 기존 글들을 참조하면 된다.

4. MEW? MEGA?

강교수의 이번 번역이 “최초의 원전 완역본”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것도 그다지 정확한 표현은 아니다. 왜냐하면 오늘 우리에게 『자본』의 “원전”이라는 것이 매우 복합적인 의미를 가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서 그는 MEW와 MEGA를 구분하고 있는데, 여기에서부터 얘기를 시작해보자. 그는 2년전 출판된 『자본』 제1권의 옮긴이 글에서 전자를 대중용, 후자를 학술용이라고 구분한 바 있고, 이번 인터뷰를 보니 여전히 그런 구분을 대체로 유지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앞서 포스트들에 이어 거듭 말하지만, 이런 구분은 틀렸다. 굳이 “대중용”과 “학술용”을 구별하려 한다면, MEW와 MEGA 모두 “학술용”의 범주에 든다고 봐야 한다. 이때 영어로 치면 Penguin판과 같은 각종 문고판들, 그리고 이것과 같은 발췌판들 등이 “대중용”에 대응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대중용”과 “학술용” 따위의 구분은 중요한 게 아니다. 물론 강교수는 자신의 번역을 “대중용”으로 여길 수도 있고 “학술용”으로 여길 수도 있다. 그러나 그가 어느 쪽으로 방향을 잡든 상관없이, “번역 그 자체”는 매우 학술적인 행위임에 틀림없다. 따라서 어떤 번역자라도–특히나 강교수가 그렇게도 그 중요성과 학술적 의의를 강조하는 『자본』과 같은 경우라면 더더욱–번역을 할 때에는 원전의 “대중용” 버전과 “학술용” 버전 모두를 참조함이 타당하다. 이렇게 본다면, 무려 “2010년”에, 즉 MEGA 중에서도 『자본』과 관련된 부(제2부)가 거의 완성된 현재  새삼 번역본을 내면서, 스스로 대중용이라고 칭하는 MEW판만을 대본으로 했다는 사실을 아무런 거리낌없이 말할 수 있다는 것, 더군다나 그 과정에서 MEGA판에 대한 악의적인 왜곡까지도 서슴지않는다는 것은 참으로 뻔뻔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현재 우리에게 MEW와 MEGA가 모두 이용 가능하게 되었다는 사실은 매우 특수한 문제를 우리에게 제기한다. 즉 『자본』의 “원전”이라는 것의 의미가 매우 복잡해졌다는 것이다. 『자본』의 진정한 원전은 무엇일까? 제1권만을 대상으로 했을 때, 현재 “정본”으로 두루 간주되고 있는 독일어 제4판(1890년)일까? 아니면 마르크스가 직접 출판을 한 제1판(1867년) 또는 제2판(1873년)일까? “원전”이라는 문제를 잠시 접어둔다면, 혹시, 번역본이긴 하지만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각별하게 손을 봤던 프랑스어판(1872-75년)이나 영어판(1887년)도 그 나름의 “고유한 가치”가 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만약 우리가 제2권과 제3권까지도 고려에 넣는다면 문제는 더 복잡해진다. 과연 엥겔스의 손을 거쳐 현재 출판되고 있는 제2권과 제3권은 엄밀한 의미에서 “원전”이라고 할 수 있을까? 혹시 마르크스의 수고를 가다듬고 나아가 그 스스로 부족한 부분을 채워넣기도 할 때, 그는 마르크스의 취지와 의도를 어느 정도는 왜곡하지는 않았을까? 만약 그렇다면, 우리가 진정한 의미에서 “원전”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마르크스 자신이 직접 쓴 수고뿐은 아닐까?

바로 이런 모든 문제들, 질문들은 “원전”이라는 것이 지극히 불안정한 개념임을 암시한다. 사실은 바로 그렇기 때문에 MEGA라는 판본이–이미 MEW라는 전집이 있는데도–우리에게 필요했던 것이고, 또 사람들은 그것을 아직까지 만들고 있는 것이다. 만약 사정이 이렇다면, 이 모든 것들을 다 가지고 있는 우리는, 『자본』의 “새로운” 번역을 낸다고 했을 때, 어떤 태도로 거기에 임하는 것이 옳을까? 인터뷰 등에서 보이는 강신준 교수의 입장은 그런 면에서 얼마나 정당화될 수 있는가? 이런 질문들을 음미하다 보면 다음과 같은 문제에까지 생각이 미치지 않을 수 없다. 즉 과연 “그의” 번역은 그가 묘사하는 식대로 “시대”가 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아니면 그저 한 개인이 23년이라는 오랜 세월 동안 그 어깨 위에 지고 있었던 짐을 내려놓은 정도의 의미라고 보는 게 좀 더 아귀가 맞는 해석이 아닐까? 사실은 바로 그것이야말로, 우리 한국의 인문사회학계가 가진 한계요, 문제점임을 인정하는 태도가,  강교수에겐 안타까운 일이지만, 우리에겐 필요하지 않을까?

강교수의 번역이 완성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자본』의 원전 번역”이 여전히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신화”로만 남을 수밖에 없는 것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다.

5. “마르크스가 『자본』을 쓴 진짜 이유”?

강교수는 이번 인터뷰에서 “마르크스가 『자본』을 쓴 진짜 이유”를 강조하기도 했다. 보통 “진심”을 강조하는 것은, 그 “진심”이 왜곡된 채 알려져 있을 때 하는 일이다. 그렇다면 강신준 교수는 마르크스의 “진짜 이유”가 어떻게 왜곡된 채 알려져 있다고 보기에, 유독 그것을 강조하는 것일까? 다음 대목을 보자:

그렇다면, 마르크스가 <자본>을 쓴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자본주의 체제의 임금 노동자라면 누구나 자본주의 체제가 잘못돼 있다는 걸 알고 있는데, 왜 그는 번역을 해보면 3000쪽이나 되는 어렵고 방대한 책을 썼을까? 단지본주의를 비판하기 위해서 이런 책을 썼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2]에서. 나의 강조)

간단히 말하면 다음과 같은 스토리다: (1) 흔히들 마르크스가 “자본주의를 비판하기 위해” 『자본』을 썼다고 알고 있다. (2) 그러나 자본주의 “이후에 등장할 사회, 즉 자본주의 이후의 새로운 사회의 모습”을 그리는 것이야말로 『자본』에서 마르크스가 꾀했던 진정한 기획이었다. (3)  이런 『자본』의 진정한 의의를 제대로 읽어낸 사람은 대한민국에 “한 다섯 명 정도”밖에 안 된다. (4) 대한민국의 진보의 수준이 낮은 것도 그래서다. 대충 위와 같은 생각에 입각해서, 강교수는 크게 “생산”과 “소비”라는 두 가지 측면에서 “마르크스가 꿈꿨던 사회”의 개요를 묘사하기도 한다.

글쎄… 위 항목들 중 (2)~(4)에 대해서는 너무 대책없는 얘기들이라서 뭐라고 코멘트를 해야 할지 모르겠다. (1)에서 시작해보자. 기본적으로 『자본』은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게 아니다. 그것은 그 부제(“정치경제학 비판”)에서 명명백백하게 드러나듯이 자본주의에 대한 여러 부르주아적 및 사회주의적 이론들을 비판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사실 『자본』의 의의가 “자본주의 현실 비판”에 있느냐 “자본주의 이론 비판”에 있느냐는 하나의 논쟁거리이기도 했다. 그러나 좀 더 성숙된 논자라면 둘이 어느 선에서는 일치하는 것임을 알아볼 것이다(이를테면 국내에선 곽노완 교수의 글 참조. 다만 나는 그의 논지에 100% 동의하진 않는다).

그것이 “이론 비판”이든 “현실 비판”이든 간에… 강교수에겐 그것이 “단지”라는 수식어를 동반할 정도로 하찮은 것인지 몰라도, 적어도 마르크스에겐 그렇지 않았다. 사실 마르크스의 “비판” 개념이 정확하게 (“현실”이 아닌) “이론”을 겨냥하게 된 것은, 그의 지적 발달이 어느 정도 수준에 이른 다음의 일이며, 『자본』에서는 거의 일관되게 “이론 비판”으로 의식적으로 쓰이게 된다. 그리고 마르크스는 바로 그 자본주의의 이론 또는 현실을 제대로 “비판”하는 것이 보기보다 쉽지 않고 많은 지적 노력을 필요로 하는 일임을 시간이 가면 갈수록 더 절실하게 깨닫게 된다. 그것이 바로 그의 『자본』이 그토록 오랜 세월에 걸친 각고의 노력을 요구했던 까닭이다.

어쨌거나 “자본주의의 이론 비판”을 위한 책에다가 자본주의 이후의 새로운 사회의 모습들을 적극적으로 그려놓는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따라서 그런 모습들이 『자본』에 없다고 해서 우리는 놀랄 필요도 없다. 이런 의미에서, (2)번 이후의 이야기들은 말이 안 된다. 우리가 “자본주의 이후의 새로운 사회의 모습을 그리는 것”이 마르크스의 “일생일대의 기획”이었다고는 얘기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강교수에겐 불행하게도, 『자본』은 그런 기획을 직접적으로 실현시키기 위한 저작은 아니다. 따라서 (3), 즉 강교수가 말하는 바와 같은 “진정한 의의”를 제대로 읽어낸 사람들이 대한민국에 “한 다섯 명 정도”뿐이라고 해도, 그것은 결코 놀랄 일이 아니다!! 끝으로 (4): 나도 강교수와 마찬가지로 대한민국의 진보의 수준이 그다지 높다고 보진 않지만, 그 까닭이 적어도 진보에 속하는 사람들이 『자본』을 안 읽어서라고 생각지는 않는다.

생산과 소비를 중심으로 간략하게 펼쳐놓은, 강교수가 이해한 “마르크스의 새로운 사회의 상”에 대해선 별도의 언급을 생략하련다.

6. 마르크스의 “이론”에 대한 오해

이상과 같이 강신준 교수는 『자본』에서 마르크스의 “의도”에 대해서 심각한 오해를 하고 있는데, 그는 마르크스의 “이론”에 대해서도 그 이상의 오해를 하고 있다. 어떤 면에서 그것은 “오해”라기보단 “얕은 이해”라고 불러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 정도는 정말이지 내가 다 아찔하고 민망할 정도다. 예컨대 강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런데 노동자가 그런 자본가 사이의 경쟁에 참여해 돈을 벌 수 있는 확률이 얼마나 될까? 마르크스가 <자본> 3권에서 개별 자본가가 자본가 사이의 경쟁에서 이길 수 있는 확률은 지배할 수 있는 자본의 크기에 비례한다고 써놓았다. 워런 버핏이나 조지 소로스가 대자본을 이용해서 버는 돈과 이른바 ‘개미’가 버는 돈은 비교할 수가 없다. ([2]에서. 나의 강조)

위 대목은 강교수의 『자본』 이해의 실상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구절이다. 특히 밑줄친 부분을 보라.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될 뿐만 아니라, 마르크스는 제3권에서 위와 같은 진술을 한 적이 없다. 일단 위 밑줄 부분은 말이 안 된다. 강교수가 예로 드는 대로, “개미”와 “소로스”가 경쟁을 한다는 게 무슨 의미이며, 더구나 전자가 후자를 그 경쟁에서 “이긴다”는 것은 또 무슨 뜻인가? 마르크스는 『자본』 제3권에서는 물론이고 그 어디에서도 이런 말도 안 되는 방식으로 “경쟁”에 대해 논한 적이 없다. 모종의 짐작이 가는 바가 없지는 않지만, 왜 저런 말도 안 되는 내용을 무슨 대단한 것인 양 풀어놓는지 알 수가 없다. 정녕 오늘날 금융투기판에서 “개미”들의 운명을, 그것도 강교수가 하듯이 매우 비참하게 캐리커처하기 위해 우리가 “굳이” 마르크스에 기대야 하는 걸까?

이번에 제3권을 번역해서인지, 강교수는 특히 거기 등장하는 논의들에 크게 매혹된 듯 싶다. 이를테면:

<자본> 3권을 읽다보면 깜짝 놀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예를 들자면, 현대 금융의 특징을 얘기할 때 빼놓지 않고 언급되는 게 ‘레버리지(leverage, 지렛대) 효과’다. 개인이나 기업이 차입금 등 타인의 자본을 지렛대처럼 이용해 이익을 올리려다 결국은 금융 위기와 같은 일이 발생한다.

그런데 바로 이 레버리지 효과가 <자본> 3권에 등장한다. 마르크스는 이 레버리지 효과가 결국에는 공황을 낳는 중요한 원인이라고 보았다. 얼마나 놀라운가? 140년 전의 마르크스가 오늘날 금융 위기의 본질을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다. ([2]에서)

참으로 딱하다. 저렇게 따지면, 18세기 금융투기로 유명한 스코틀랜드인 John Law는 금융사기의 현대적인 첨단기법으로 무장한, 거의 뭐 “Back to the Future”라고 해도 되겠다. 혹시 어떤 독자들은, 대중적인 인터뷰니까 강교수가 좀 오바한 거 아니겠냐며 각별한 아량을 그에게 베풀려고 할지도 모르겠다. 글쎄, 과연 그럴까? 다음을 보자.

<자본>은 앞부분이 어렵다. [. . . . . .] 이렇게 1권도 앞이 아니라 뒤부터 읽다 보면 <자본>에 익숙해질 수 있다.

2권은 경제학 공부를 하지 않은 독자라면 따라가기가 쉽지 않다. 반면에 아까 언급했듯이 자본주의 이후의 새로운 사회를 고민할 때 자극이 될 만한 부분이 많은 3권은 읽어볼 만하다. 특히 공황이 일어나는 메커니즘을 설명한 부분이 중요한데, 한국 사람들은 요즘 화폐 금융 쪽에 상식이 많아서 어려움 없이 읽을 수 있을 것이다.

3권을 읽다 보면 재테크에 눈을 뜰 수도 있다. 나 같으면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 같은 책을 읽을 게 아니라 자본주의의 핵심 비밀을 파헤친 <자본>을 읽겠다. ([2]에서)

“재테크” 부분은 농담이라고 치더라도, (제2권이 어려운 반면) 제3권을 두고 “어려움 없이 읽을 수 있을 것“이라고 하다니,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하긴, 제3권에서 “레버리지” 운운이나 하며 그 이상의 얘길 하지 않으니, 그것이 쉽다고 보는 것도 무리가 아닐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강교수가 직접 밝히고 있는, 제3권이 쉽다고 하는 근거가 무엇인지도 눈여겨볼만 하다. 그는 “한국 사람들은 요즘 화폐 금융 쪽에 상식이 많아서 어려움 없이 읽을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마르크스의 『자본』(제3권)은, 바로 그와 같은 주류 경제학이 주입한 “상식”을 뒤엎고 거기 도전하는, 바로 “노동가치이론”에 근거를 둔 전혀 다른 금융이론을 펼치고 있는 저작이다.

그밖에도 강교수는, (1) 맨큐(N. Gregory Mankiw)나 스티글리츠(Joseph Stiglitz)와 같은 경제학자들이 “생산”을 경시하고 “교환(시장)”을 강조하기 때문에 공황을 제대로 볼 수 없다고 비판하면서, “마르크스가 정확히 지적했듯이 공황은 생산 영역에서 시작된다”라는 사실과 다른 단정적 언급을 내놓기도 했고, (2) “소비”와 “분배”를 혼동하기도 했다.

그리고 “<자본>을 읽을 때 같이 보면 좋을 만한 책이 또 있는가?”라는 기자의 질문에 엉뚱하게도 “폴 말러 스위지의 <자본주의 발전의 이론>”이라고 대답함으로써, “나 지난 23년 동안 『자본』과 관련된 공부 하나도 안 했어요”라는 말을 남다르게 표현하기도 했다.

7. 맺음말

대중미디어를 상대로 한 인터뷰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상에서 지적한 모든 사항들을 조금은 관대하게 대할 수도 있겠지만, 이것들은 『자본』에 대한, 그리고 나아가 마르크스의 이론 전반에 대한 강교수의 이해가 어떠한지를 보여주는 일종의 징후들로 읽을 수 있다는 게 내 판단이다. 그리고 그것들이 무엇의 징후인지는, 앞으로 좀 더 면밀하게 강교수의 번역을 검토하는 과정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날 것이다(이미 제1권에서는 그것이 어느 정도 드러났다).

바로 그랬을 때, 이 글의 1절에서 인용한 강교수의 “깨달음” 내지는 “감”이 어떤 것인지도 이 엉성한 포스트에서 나타난 것보다 훨씬 더 명확하게 나타날 것이고, 더불어 이런 사항들에 대한 판단들이 서로 인정하고 토론해야 할 “견해”의 문제라기보다는 그 옳고 그름이 꽤 명백히 갈리는 원문에 대한 “이해”의 문제임도 밝혀질 것이다. 그리고 그런 과정에서, 『자본』을 둘러싼 논의도 한걸음 더 진전할 수 있으리라고 나는 믿는다.

자본론 vs 자본

다음은 2008년 12월, 국내에 시판중인 《Das Kapital》의 두 가지 버전, 즉 김수행 번역의 《자본론》과 강신준 번역의 《자본》의 일부분을 재미 삼아 대조해본 뒤에 쓴 글이다. 최근 방명록에서 ‘너구리’님의 부탁도 있고 해서 약간 수정/가필해 다시 올린다.




1. 일단 먼저 말해둘 것은, 적어도 《자본(론)》에는 ‘독일어의 심오함’ 따위는 없다는 게 내 판단이다. 독일어의 심오함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놀랍게도) 《자본(론)》을 제대로 안 읽어본 사람이거나 또는 힘들여 독일어로 읽은 데 따른 일종의 보상심리를 가진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자본(론)》에 특정 언어만이 가지고 있는 이른바 ‘심오함’이 없는 가장 기본적인 이유는 단순하게도 마르크스 자신이 그런 성격을 최대한 배제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철학자들이나 정치학자들은 반대할지도 모르지만, 《자본(론)》은 뭣보다 경제학적 저작이고 그런 의도로 저자에 의해 씌었다. 그래서 예컨대 ‘대상성’(Gegenständlichkeit)이라는 다분히 철학적인 용어조차도 《자본(론)》에서는 이를테면 《경철수고》에서 만큼 커다란 울림을 자아내지 않는다. 또는 그런 울림이 있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자본(론)》을 이해하는 데 있어 그 울림은 그다지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울림’에 지나치게 집중하게 되면, 《자본(론)》을 그릇된 방식으로 이해하기 쉽다.


2. ‘독일어의 심오함’에 대한 언급으로 글을 여는 까닭은, 실제로 그 동안 김수행판이 그런 심오함을 살리지 못하기 때문에 나쁜 번역이라는 식의 주장이 매우 널리 퍼져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런 판단에 반대하며, 거기엔 어떠한 근거도 없다고 생각한다.

김수행판이 갖는 기본적인 한계는, 매우 당연하게도 그것이 중복번역이라는 데 있다. 원래의 의미들이 그런 과정에서 단순화되기도 했고, 어떤 경우엔 현저하게 바뀌기도 했으며, 또 구절 자체가 빠지기도 했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그런 모든 문제들은 대체로 중복번역이라는 데서 오거나, 그저 번역이라는 것 일반이 갖는 문제점 때문이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단순히 번역자 또는 편집자(출판사)의 서투름 때문이지, 결코 ‘독일어의 심오함’을 살려내지 못한 ‘영어의 경박함’ 때문이 아니다. (따라서 앞으로 ‘독일어의 심오함’ 운운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들은 모든 각국어로 나온 책들도 독일어로 번역된 것으로 보고, 모든 외국책들의 한글번역도 그 원전의 심오한 독일어 번역판에 기반해서 할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단순화나 변형은 대체로 전체 내용을 이해하는 데 커다란 문제를 제기하지는 않는다. 사실은 바로 그것이 지금까지 김수행판이 그다지 크게 문제되지 않았던 까닭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어떤 면에서 보면 영어판을 참조한 것, 나아가 독일보다는 영국에 더 익숙한 사람(김수행)이 번역한 것이 여러모로 장점이기도 했다. 이를 두고 김수행은 자신이 번역한 《자본론》 제1권의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기도 했다.

《자본론》의 이론적 토대는 주로 영국의 고전파 경제학에 대한 비판이며 그것의 현실적 예증은 주로 영국사회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영역판이 번역에 훨씬 유리하다고 생각했으며, 번역자 자신이 영국에서 10년 이상 살면서 연구했다는 사실도 번역에 큰 도움을 주었다.

글쎄. “영역판이 번역에 훨씬 유리하다”고까지 하는 데는 쉽게 동의할 수 없지만, 그 앞부분은 타당한 평가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럼에도, 《자본(론)》은 독일어로 씌었다. 따라서 그 언어를 기반으로 번역하는 것이 당연한 이치다. ‘유/불리’를 따질 문제가 아닌 것이다.


3. 이렇게 본다면, 독일어를 기반으로 하되, 영국의 역사와 사회, 그리고 영국을 중심으로 하는 고전파 정치경제학에 대한 이해도가 높은 사람이 번역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것인가? ‘이상’을 따지자면 나는 그런 개인 또는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는 집단이 번역하는 것이 가장 좋다고 본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현실이 얼마나 거기 따라줄지는 의문이다. 이렇게 보면, 아예 몇몇 전문가들의 자문 아래 능력 있는 전문번역가가 나서는 것도 생각해봄 직하다.

이 얘긴 그러니까, 나는 이번에 《자본》과 《자본론》을 함께 보면서, 두 교수들의 학자로서의 자질보다는 번역가로서의 자질에 새삼 의심을 품게 되었다는 뜻이다. 즉 두 번역에서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것은 많은 경우 그들의 번역가로서의 자질 부족에서 비롯됨을 발견했다. 뿐만 아니라 이런 문제는 번역가 개인의 문제이기만 한 게 아니라 그 편집을 책임지는 출판사의 책임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김수행 번역판의 경우엔 언어구사가 자연스럽지 못한 대목이 많다. 내가 보기엔 이는 거의 전적으로 출판사의 문제다. 왜 자연스럽게 다듬지 않는가? 내가 알기론 비봉출판사는 거의 사장 한 사람에 의해 운영되는 회사로, 《자본론》에 대해서도 매우 소극적인 의미의 편집 이외에는 관여하지 않았다. 이는 결코 ‘번역자를 존중’하는 게 아니다. 맞춤법이나 띄어쓰기에조차 오류가 많다면, 그게 과연 누구의 잘못이겠는가? 반면 강신준판의 경우엔 자연스런 언어구사가 읽는이를 편하게 해준다. 정확한 사정은 모르지만, 이건 아무래도 출판사에서 나름의 방침을 가지고 정성껏 손을 봤기 때문이리라. (조교 시켜서는 이렇게 나오기 어렵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강신준-도서출판 길’이 환상적인 팀이었다는 건 절대 아니다. 실은 그 반대다. 나는 기본적으로 번역서의 질을 볼 때, 그 옮긴이가 인명, 지명, 책제목 등을 어떻게 처리했는가를 본다. 아마 많은 이들이 그러리라 짐작한다. 그런 기본적인 사항을 제대로 번역했다는 것은 적어도 번역이 상당한 성실성을 가지고 진행되었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자본(론)》의 경우 이런 것이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예컨대 인명의 경우, 인용되는 저자들이 영국인, 프랑스인, 독일인, 이탈리아인 등으로 매우 다양하기 때문이다. 같은 Michael도 경우에 따라 ‘마이클’이라 하거나 ‘미하엘’로 해야 한다. 바로 이런 점에서 강교수의 번역은 크게 만족스럽지는 않다. 생각해보면 이는 영어 이외의 언어로 된 책의 번역서에서 발견되는 공통된 문제이기도 하다. 그런 책들을 보면, 영어권 사람의 이름조차도 독일어식/프랑스어식 등으로 표기하는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이 무지 때문인지, 아니면 알량한 자존심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다.

인명표기와 관련, 강신준판 《자본》은 강신준 교수의 독일어 구사능력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니냐는 의심까지도 불러 일으킨다. 무슨 말인가? 이를테면 이런 거다. 영어에서는 사람이름이 소유격으로 쓰일 때 Michael’s와 같은 식으로 ‘어포스트로피 s’가 붙지만, 독일어에서는 다짜고짜 ‘s’만 붙고는 한다. 그런데 강교수는 설마 이것을 모르지는 않을 텐데도, 그런 이름들을 s와 구분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예컨대 《꿀벌의 우화》로 유명한 맨더빌을 ‘Mandevilles’로 표기하는 식이다. (설마 이것이 강교수의 문제일까! 출판사 잘못이 크리라 본다. 하지만 욕은 옮긴이가 주로 먹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밖에도 강교수의 번역엔 저서 등을 표기하는 방식, 옮긴이 주를 다는 맥락 등등에 있어서도 적지 않은 문제들을 품고 있다. 예컨대 〈제2판 후기〉 부분인 56-7쪽을 보자. 56쪽의 각주(4번)에 《Saturday Review》라는 저널이 인용된다. 강교수는 이를 《새터데이 리뷰》라고 해놓고, 아주 친절하게도 “’토요평론’이라는 뜻”이라는 옮긴이 주를 달아놓음으로써 지나친 친절을 과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친절함이 무색하게도 이후 이런 식의 옮긴이 주는 내가 본 범위에서는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심지어 그는 바로 다음 페이지에서는 《Journal du économistes》라는 저널을 《이코노미스트》라고 옮기고 있다. 여기엔 예의 그 ‘친절한’ 옮긴이 주도 안 달렸을 뿐만 아니라, 잘 모르는 사람이 보면 영국의 경제지 《이코노미스트》랑 혼동하기 딱 좋게 번역된 것이다. 실제로 마르크스는 바로 이 《이코노미스트》를 매우 많이 인용한다. 따라서 내가 보기엔 《경제학자 저널》이라고 했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공교롭게도 지금 보고 있는 56-7쪽엔 완전한 오역도 있다. 56쪽에 지베르(Sieber)의 저작이 인용되는데, 그 제목이 잘못 옮겨진 것이다. 《리카도의 가치 및 화폐 이론》으로 되어 있는데, 여기서 ‘화폐’는 ‘자본’이 되어야 옳다.


4. 이상의 언급들이 지나치게 사소한 것처럼 보이는가? 하지만 나는 지금 번역의 ‘기본’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며, 그런 측면에서 위와 같은 문제들은 결코 사소한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내가 괜한 트집을 잡는다고 생각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들에게는 두 가지 예를 보여주면 충분할 것 같다.

(1) 역시 위와 같은 〈제2판 후기〉의 한 대목이다. 54쪽 윗단락 마지막 부분:

… [계급투쟁이 격화됨에 따라] 사심없는 연구 대신 돈벌이를 위한 논쟁이 자리를 잡았고, 편견없는 연구 대신 비양심적이고 불순한 의도를 가진 변론들이 자리를 차지하였다. 그러나 공장주 코브던(Cobden)과 브라이트(Bright)가 선봉에 섰던 곡물법 반대동맹이 날림으로 만들어 시중에 배포한 조잡한 소책자까지만 해도 토지소유귀족들에 대한 그들의 반론 속에는 비록 전혀 과학적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적어도 역사적인 흥미 정도는 불러일으키는 구석이 아직 남아 있었다. 그러나 로버트 필 이후의 자유무역입법은 이런 마지막 양념조차도 속류경제학에서 완전히 지워버리고 있다.

별 생각 없이 읽으면 위 내용은 아무 문제가 없는 것 같다. 그러나 마지막 문장의 “양념”이라는 단어를 보라. 문맥을 고려했을 때, 과연 그것이 적절한 어휘인가? 위 대목은 그나마 과거엔 경제학이 나름 괜찮았고 비판적인 측면이 조금은 있었는데 계급투쟁이 격화됨에 따라 점점 더 부르주아지들의 이익에 봉사하는 도구로 전락했다는 내용을 품고 있으며, “양념”이란 바로 그 종전까지만 해도 얼마간 남아있었던 바로 그 비판적 요소를 일컫는다. 그러나 “양념”이 뭔가? 그것은 오히려 전체 음식의 맛을 돋워주는 역할을 하지 않는가? 따라서 여기서 “마지막 양념”이란 표현은 어울리지 않는다. “양념”에 해당하는 독일어는 Stachel인데, 여기엔 “양념” 말고도 “일침(=sting)”이란 뜻도 있다. 이 대목에서는 후자로 번역해야 하는 것이다. (실은 바로 이 “일침”에 해당하는 것들, 즉 경제학의 역사 속에서 “적어도 역사적인 흥미 정도는 불러일으키는 구석”들을 재구성해서, 마르크스는 《잉여가치학설사》를 내놓으려고 했다.)

(2) 마음을 조금 관대하게 먹는다면, “일침”을 “양념”으로 쓴대도 큰 문제가 없다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럴까? 엥겔스가 쓴 〈제3판에 부쳐〉의 한 구절을 보자. 69쪽 마지막 부분:

… [마르크스가 인용하는 방식의 특징과 그렇게 하는 까닭을 설명한 뒤] 그래서 독자들은 이제 제2판의 후기에서 볼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왜 마르크스가 거의 전적으로 독일의 경제학자들만 인용하고 있는지 그 이유를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역시 별 생각 없이 읽으면 위 구절도 그럴싸해 보인다. 하지만 나는 저 대목에서 깜짝 놀랐는데, ‘과연 강신준 교수는 《자본(론)》을 읽어나 보았는가!?’하는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가 “독일의 경제학자들만”, 그것도 “거의 전적으로” 인용하고 있다고?!!! 더 길게 말할 필요 없다. 위 대목은 다음과 같이 바뀌어야 한다: “…왜 마르크스가 예외적으로만 독일의 경제학자들을 인용하고 있는지…” 어쩌다 이런 오역이 나왔을까? 그저 한숨이 나올 따름이다.

이상과 같은 어처구니없는 오류들이 강교수 번역의 신뢰도를 매우 심각하게 떨어뜨릴 뿐만 아니라, 맨 처음 트랙백해 둔 글에서 밝혔듯이 〈해제〉와 〈옮긴이의 말〉에 나오는 그의 자신만만한 표현들을 공허하게 만드는 것이다. 특히 마지막 두 개의 예는, 강교수의 독일어실력이나 번역가로서의 자질, 또는 출판사의 편집솜씨 등이 아니라, 강교수의 텍스트 이해 자체를, 나아가 그의 경제학자로서의 자질 자체를 의심케 하는 데 충분하리라 본다.

(나중에 발견한 것인데, 강교수의 내용이해가 완전히 실패했음을 보여주는 가장 명백한 예가 바로 제1장 제2절에 있다. 관심 있으신 분들은 거기서 헤겔을 언급하는 대목에서 강교수가 붙여놓은 옮긴이 주를 찾아보시기 바란다.)


5. 내가 지나치게 강교수판에 회의적인 것으로 보일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그것은 당연한 것이며, 그렇다고 해서 내가 김수행판에 특별한 애착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다. 김수행판에 대해 말하자면, 강교수판의 등장으로 중복번역이라는 그 기본적인 한계가 이제는 더 이상 지탱되기 어려울 정도로 되었지 않느냐는 것이 내 판단이다. 그러나 그런 한계가 곧 강신준판으로 사람들이 몰릴 것임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왜? 위에서 몇 가지 예를 들면서 얘기했듯, 강신준판이 ‘원어번역’이라는 이점을 그다지 잘 살려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거기에 덧붙여 두 번역자가 드러낸 학문적 자질 부분에서도, 강교수 쪽이 몇 수 아래인 것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김교수의 번역엔 적어도 위 (2)와 같은 오역, 핵심적인 내용 이해를 해치는 심각한 오역은 거의 없다. 물론 이는 오랜 세월에 걸쳐 번역자 자신은 물론 여러 후학들에 의한 교정 덕분이기도 하다).

따라서 결국 장기적으로는, 둘의 공동작업, 또는 제3자에 의한 둘의 ‘비판적 지양’을 통해 사태가 해결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그러나 그 기간이 지체되는 데 따르는 피해는 독자들과 후학들이 고스란히 떠안을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현재 사태에 대해 좀 더 정확하게 얘기하면, 강신준판의 등장으로 김수행판의 한계는 전보다 훨씬 더 크게 느껴지겠지만 앞으로 한동안 사람들은 그 한계에 맞춰 자신의 인내심을 더 키워내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인 셈이다.


6. 그렇다면 최종적인 질문. 과연 어떤 것을 볼 것인가? 당연한 얘기지만, 독자 각자가 처한 입장에 따라 다를 것이다. 내가 보기엔, 기존에 김수행 번역판을 통해 《자본(론)》을 봤던 사람은 굳이 강신준판을 살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아무래도 ‘익숙함’이라는 미덕을 대체할 만한 확실한 그 무엇을 제공해주기에 강교수판은 좀 부족하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이제 막 마르크스의 이 걸작에 입문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강신준 교수의 번역이 ‘표현’ 등의 면에서 좀 더 친근하게 다가올 수 있을 것 같다.

그렇다면 《자본(론)》에 좀 깊이 있게 접근하고자 하는 사람은? 에, 결국 둘 다 봐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엔, 강교수 번역판을 ‘기본’으로 삼는 것도 (기존 김수행 판의 ‘익숙함’의 미덕을 버리더라도) 나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왜냐하면 그럴 경우 ‘영어판’을 좀 더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국내의 대부분의 독자들이 독일어보다는 영어에 훨씬 더 익숙하다는 (심지어 독일어를 할 줄 아는 사람조차도) 사실을 고려하면 매우 큰 장점이다. 무슨 말이냐 하면, 김수행판은 원래 영어판을 대본으로 삼았으므로, 읽다가 원문을 대조하려면 부득이 독일어 원전을 봐야만 했다. 독일어 못해서 한글로 보는 건데, 내용의 정확한 이해를 위해 독일어를 참조한다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닌 것. 그러나 강신준판을 보게 되면, 굳이 독일어 원전을 보지 않고 영어판만 봐도 cross-checking이 가능하게 된단 말씀이다. 물론 이것은 강교수의 위에서 언급된 것과 같은 치명적인 오역을 가려낼 수 있는 사람한테 해당되는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