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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 강신준과 프루동의 긍정의 변증법 – 번외편

[경향신문 연재 ‘오늘 자본을 읽다’에 대한 김성구 교수의 비판에 대한 답글]에서 강신준은 다음과 같이 쓴다.

현존하는 것들에 대한 “긍정적인 이해”를 토대로 그것을 넘어서는 “부정”을 모색하는 것, 그것이 바로 변혁의 과제로 내가 얘기했던 성숙의 의미인 것이다 … 그래서 그것은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것이긴 하지만 그것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 “위”에 건설된다는 것을 강조한 의미인 것이다.

그는 자본론 1권 2판 후기의 다음 구절이 그의 주장을 뒷받침한다고 생각한다.

변증법은 현존하는 것들에 대한 긍정적인 이해 속에 그것의 부정과 그것의 필연적인 몰락에 대한 이해 … – 강신준 역 [자본] 1권, p. 61.

마르크스에게 있어 변증법은 현존 – 자본주의 – 의 부정에만 국한되지 않으며, “현존하는 것들에 대한 긍정적인 이해”가 부정의 전제조건이라는 것이다. 자본주의 체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우선 자본주의의 긍정적 측면을 인정하고 자본주의를 충분히 성숙시켜야 한다는 것인데, 성숙한 자본주의의 기준이 무엇인지 애매할 뿐더러 마르크스가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참으로 믿기가 어렵다. 그래서 자본론 1권 2판 후기의 관련 구절을 꼼꼼히 살펴보는 것이 필요할 것 같다.

독일에서는 이 신비화된 형태의 변증법이 유행했는데 이는 그것이 현존하는 것들을 이상적인 것처럼 보이게 만들기 때문이었다. 합리적인 형태의 변증법은 부르주아들과 그들의 교의를 대변하는 자들에게 분노와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왜냐하면 그 변증법은 현존하는 것들에 대한 긍정적인 이해 속에 그것의 부정과 그것의 필연적인 몰락에 대한 이해를 함께 간직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생성하는 모든 형태를 운동의 흐름으로 파악하며, 따라서 언제나 그것들을 일시적인 것으로 파악하기 때문이다 – 강신준 역 [자본] 1권, p. 61.

우선 “신비화된 형태의 변증법”은 헤겔 우파의 변증법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프로이센 제국을 역사의 변증법적 발전의 최종단계로 보았다. 이렇게 변증법이 현존하는 것을 긍정하고 이상화하는 이론이라면 그것을 마다할 이유가 없다. “합리적인 형태의 변증법”은 마르크스의 변증법이다. “신비화된 외피 속에 감추어진 합리적 핵심”이며, “현존하는 것들에 대한 긍정적인 이해 속에 그것의 부정과 그것의 필연적인 몰락에 대한 이해를 함께 간직하고 있”는 변증법이다. 마르크스는 긍정이 부정을 “간직”하고 있다고 했다. 강신준에게서처럼 긍정이 부정의 “모색”을 위한 “토대”인 것은 아니다 (번역에 대해 지적하자면, “그것의 부정과 그것의 필연적인 몰락” 대신 “그것의 부정, 즉 그것의 필연적인 몰락”이 옳다. “부정”과 “몰락”이 동격이다. 비봉판에는 “그것의 부정[즉, 그것의 불가피한 파멸]”으로 올바르게 번역되어 있다).

대상의 “긍정적인 이해 속에 그것의 부정 … 에 대한 이해”가 포함 혹은 간직되어 있다는 것은 대체 무슨 말인가. 대상에 대한 긍정적인 이해와 부정적인 이해가 병존할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예를 들어 마르크스라는 대상에 대해 위대한 학문적 업적을 남겼다는 긍정적 이해 외에도 자본론 출판 데드라인을 제대로 지키지 않았다는 (공언한 것보다 10년이 훨씬 지난 후에 출판된다) 부정적 이해가 가능하다. 여기서 긍정은 좋은 것, 부정은 나쁜 것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긍정과 부정 사이에는 별다른 필연적인 관계가 없다 (마르크스는 데드라인을 지키면서도 위대한 학문적 업적을 남길 수 있었을 것이다).

반대로 긍정이 부정을 포함하고 있어 긍정과 부정이 상호 연관되어 있을때, 긍정과 부정은 좋고 나쁨이 아니라 정립과 반정립, 실현과 해소의 대립쌍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헤겔은 대논리학 서론(임석진 번역, 벽호)에서 변증법에 대해서 이렇게 쓴다.

의식의 제형태가 각기 저마다의 실현을 이룩하면서도 또 어느덧 자기를 해소시키는 가운데 결국 여기서 얻어지는 그의 결과란 다만 자기자신의 부정일 뿐이니 – 이럼으로써 좀더 고도의 형태로 이행하게 되는 셈이다. 학적인 진전을 이룩하는 데 있어서 가장 긴요한 유일한 길은 다음과 같은 논리적 명제를 인식하는 데 있으니, 그것은 즉 부정적인 것은 또한 그에 못지 않게 긍정적이며 자기 모순적인 것은 결코 영이나 추상적인 무로 해소돼 버리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그의 특수적인 내용의 부정 속으로 해소됨으로써 또 달리 말하면 결국 그와같은 부정은 전면적, 전칭(全稱)적인 부정이 아니라 그 자체가 역시 해소되게 마련인 특정한 사상(事象; Sache)의 부정이며 따라서 특정한, 규정적 부정이라는 것이다. (43, 강조 추가)

반대물을 통일성 속에서, 혹은 긍정적인 것을 부정적인 것 속에서 파악… (47)

변증법에서 대상은 자신을 실현하는 것을 통해 자신을 해소하며 이를 통해 좀더 고도의 형태로 이행한다. 실현에 대한 이해(긍정적인 이해)가 바로 해소(와 이행)에 대한 이해(부정적인 이해)에 해당하므로 “부정적인 것은 또한 그에 못지 않게 긍정적”이며, 변증법은 “긍정적인 것을 부정적인 것 속에서” 파악한다. 그래서 마르크스의 변증법에서 자본주의의 자기실현은 곧 자본주의의 자기해소이다. “부르주아지는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의 매장인을 만들어 낸다” (공산주의당 선언, 맑스 엥겔스 저작선집 1, p. 412, 박종철 출판사). 대조적으로 강신준의 변증법에서는 대상에 대한 긍정적인 이해가 우선하고 그것을 “토대”로 부정을 “모색”해야 한다. 긍정(실현)이 부정(해소)과 하나의 총체를 이루는 대신 긍정이 부정의 전제조건으로 기능한다.

강신준에 따르면, 자본주의의 긍정적 이해의 핵심은 자본주의에서 생산력이 고도로 발전한다는 점을 파악하는 것에 있다 (이것은 자본주의의 역사적 사명이다). 그런데 유기체로서의 자본주의는 쇠퇴의 길에 접어들게 마련이므로, 자본주의의 이 긍정적이고 좋은 측면은 한계에 부딪히고 만다. 바로 이때 자본주의의 부정을 통해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고, 착취라는 자본주의의 나쁜 측면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의 타파가 아니라 성숙의 결과인데,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의 좋은 측면에 기반하여 나쁜 측면을 지양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에서 고도로 발달한 생산력이 사회주의의 자양분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과제는 우선은 자본주의에 대한 긍정적 이해에 기반하여 그 성숙을 촉진하는 것이 된다. 죄가 많은 곳에 은혜도 풍요롭게 내린다는 식이다. 죄는 죄로서 나쁘지만, 은혜의 전제조건이 된다는 긍정적 측면을 가지고 있이므로, 은혜를 풍성히 받기 위해 죄를 짓는 것에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절대로 그럴 수 없다고, 이미 죄의 권세에서 벗어난 이상 어떻게 그대로 죄를 지으며 살 수 있느냐고 강변한다. 마르크스의 변증법은 자본주의의 운동법칙(긍정)이 바로 그 패망의 법칙(부정)임을 가르쳐준다. 자본주의의 성숙이 곧 그 패망이므로 우리는 자본주의를 더욱 더 발전시키는데 주력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자본주의의 패악을 충분히 경험했고 그것이 일시적인 체제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은 이상, 그것을 가능한 빠른 시일 내에 타파하여 이 고통스러운 변증법을 마침내 완성할 것인가.

강신준의 변증법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그것은 뿌리 깊다. 그것은 좋은 측면은 유지하고 나쁜 측면은 제거해야 한다는 프루동의 변증법이다. 마르크스는 프루동의 변증법을 비판하기 위해 [철학의 빈곤]을 썼다. 하지만 이러한 치열한 학문적 비판에도 불구하고 프루동은 건재했다. 마르크스가 ‘나는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다’라고 했을 때 그는 마르크스주의자를 자칭하는 둘째 사위 라파르그를 염두에 두고 있었는데, 프루동이 라파르그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가족관계의 친밀함도, [철학의 빈곤]도 마르크스의 변증법을 방어하는데 충분치 않았던 것이다. 강신준의 [오늘 ‘자본’을 읽다]를 단순히 자본론과 마르크스의 변증법에 대한 잘못된 해석으로 치부하고 넘어갈 수 없는 까닭이다.

마르크스는 [철학의 빈곤]에서 이렇게 쓴다 (강민철, 김진영 옮김, 아침새책 117-8,  131, 강조는 원문; 맑스 엥겔스 선집 1권에도 수록)


이제 프루동이 헤겔의 변증법을 정치경제학에 응용하면서 어떠한 수정을 가했는가를 살펴보도록 하자.

프루동에게 있어서 모든 경제적 범주들은 좋은 측면과 나쁜 측면이라는 양 측면을 동시에 갖는다. 그는 소부르조아가 위인을 바라보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경제적 범주를 관찰한다: 나폴레옹은 위인이었다, 그는 훌륭한 일을 많이 했고 동시에 많은 악을 범했다.

프루동이 보기에는 좋은 측면나쁜 측면, 장점과 단점이 서로 합쳐져서 모든 경제적 범주의 모순을 형성한다.

문제의 해결은 좋은 측면을 유지시키고 악을 제거하는 것이다.

노예제는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경제적 범주이다. 따라서 그 역시 두 개의 측면을 갖는다. 노예제의 나쁜 측면은 젖혀두고 좋은 측면에 관해 이야기해보자. 두말할 필요조차 없지만 우리는 수리남, 브라질, 북미의 남부지역에 있는 직접적 노예제만을 다루고 있는 것이다.

직접적 노예제는 기계, 신용만큼이나 부르조아 산업의 중추이다. 노예제가 없다면 면화를 구할 수 없고, 면화가 없다면 근대 공업이 있을 수 없다. 식민지에 가치를 부여해준 것이 바로 이 노예제이다. 세계무역을 창출해냈던 것은 식민지이며, 대규모 공업의 전제조건이 세계무역이다. 그러하기에 노예제는 가장 중요한 경제범주인 것이다.

노예제가 없다면, 가장 발전된 나라인 북미는 아마도 가부장적 나라로 바뀌었을런지도 모른다. 세계 지도에서 북미를 지워보라. 그러면 남는 것은 근대 문명과 교역의 몰락이라는 무질서뿐일 것이다. 노예제를 사라지게 해보라. 그러면 북미를 세계지도에서 지울 수 있으리라.

노예제는 경제범주인 까닭에 모든 나라에서 항상 존재해왔다. 근대 국가는 자신의 나라 내부에서만큼은 노예제를 위장시켜야만 하지만, 신세계에 대해서는 노예제를 노골적으로 강요해왔다.

노예제를 수호하기 위해 프루동은 무엇을 할 것인가? 문제를 다음과 같이 설정할 것이다: 이 경제범주의 좋은 측면을 유지하고 나쁜 측면을 제거하라.

헤겔에게는 정식화할 문제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변증법만이 있을 뿐이다. 프루동은 헤겔의 변증법은 전혀 갖지 못한 채 그 언어만을 도용할 뿐이다. 그에게 있어 변증법적 방법은 좋은 측면과 나쁜 측면에 대한 독단적인 구별에 있다.

잠깐 프루동을 범주로서 예를 들어보자. 그의 좋은 측면과 나쁜 측면, 장점과 단점을 검토해보자.

프루동은 인류 선을 해결해야 할 문제를 설정했다는 점에서 헤겔에 비해 장점을 가지고 있다면, 변증법적 출산의 진통에 의해 새로운 범주를 만들어내는 문제에 있어서는 무기력하다는 결점을 지니고 있다. 변증법적 운동을 완성하는 것은 두 대립된 측면의 공존, 양자의 투쟁, 새로운 범주에로의 이행이다. 나쁜 측면을 제거한다는 그 문제 설정은 변증법적 운동에는 부족하다. 본래의 모순적 성질에 의해 자신을 정립시키고 대립시켰던 것은 범주가 아니다. 범주의 두 가지 측면 사이에서 흥분하고 당황하고 안달이 났던 것은 바로 프루동이다.

정상적 방법으로는 탈출하기 어려운 막다른 골목에 이르러서 프루동은 높이 뛰기를 하고는 일약 새로운 범주로 옮겨간다. 그리하여 이성 속에서의 연속적 계열이, 그가 보기에도 놀랍게,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그는 바로 곁에 있는 손쉬운 것을 손에 넣어 첫번째 범주로 삼고는, 자의적 방법에 의해, 정화되어야 할 범주의 결점을 치유할 수 있는 성질이 거기에 있다고 추정했다. 따라서 우리가 프루동을 믿는다면, 조세는 독점의 결점을 치유하고, 교역의 균형은 조세의 결점을 치유하고 대토지 소유는 신용의 결점을 치유해야 한다. 

프루동에 따르면 분업은 일련의 경제적 발전을 전개시킨다.

분업의 좋은 측면 – “본질적인 면에서 고려한다면, 분업은 조건과 지성의 평등이 실현되는 방식이다.”

분업의 나쁜 측면 – “분업은 우리에게는 빈곤의 원천이 되어왔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자신에 고유하고 자신의 생산성의 주요한 조건인 법칙에 따라 스스로를 분할시킴으로써, 노동은 결국에 가서는 스스로의 목적을 부정하고 스스로를 파괴시킨다.”

해결되어야할 문제 – “분업의 결점을 일소하면서도 동시에 그것의 유용한 효과를 보존하는 새로운 합성체”를 발견하는 일.

(134) 변증법적 유물론, 유물론적 변증법

다윈은 자연의 기술사, 즉 동식물의 기관들 – 동식물의 생활의 영위를 위한 생산도구들이다 – 의 형성(Bildung)에 관심을 기울였다. 사회 속 인간들(Gesellschaftsmenschen)의 생산적 기관들의 형성사, 모든 특수한 사회조직체(Gesellschaftsorganisation)의 물적토대의 형성사에도 동일한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것 아닌가? 그리고 이것이 더 용이하게 수행될 수 있지 않을까? 비코(Vico)의 말대로 인간의 역사는 자연사와는 다르기 때문이다 – 인간의 역사는 우리가 만들어낸 것인 반면 후자는 그렇지 않다. 기술(Technologie)은 자연에 대한 인간의 능동적 행동(Verhalten), 즉 인간 생활의 직접적 생산과정을,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사회적 생활조건(Lebensverhältnisse)과 그로부터 생겨나는 정신적 표상들(Vorstellungen)을 밝혀준다. 심지어 어떤 종교사도 이러한 물적토대를 추상하는한 몰비판적이다. 사실 분석을 통해 종교적 환영들(Nebelbildungen)의 현세적 핵심을 찾아내는 것이 거꾸로 현실의 생활조건들로부터 그것들의 신성화된(verhimmelten) 형태를 전개하는 것보다 훨씬 쉽다. 후자가 유일하게 유물론적인 따라서 학적인 방법이다. 역사적 과정을 배제하는 추상적인 자연과학의 유물론의 약점은 이들의 대변자들이 자신들의 전문분야를 벗어나자마자 사용하는 추상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개념들(Vorstellungen)로부터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 자본론 1권 15장; MEW 23, 392

참고: 기존의 번역에 문제가 있는 것 같아 새롭게 번역했다 (아래 비봉판, 길판, 펭귄판, MIA판 번역 참조)

1. 기술을 – 그리고 기술의 구현체인 도구와 기계를 – 기관에 비유한 것이 인상적이다. 특수한 동식물의 종별성이 기관구조의 종별성에 있다면 어떤 사회조직체의 종별성을 기술과 도구의 종별성에서 찾아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철학의 빈곤]에서 “손절구는 봉건영주가 있는 사회를 산출하고, 증기 제분기는 산업 자본가가 있는 사회를 산출할 것이다”(마르크스-엥겔스 저작선집 1권, 273)라고 썼다. 하지만 자립적으로 발전하는 생산기술 혹은 생산력이 생산관계, 생산양식을 변화시킨다는 식의 해석은 곤란하다. 생산력의 발전 역시 사회적 산물이기 때문이다.

2. “사회 속 인간들의 생산적 기관들의 형성사”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생산적 기관들의 형성사가 생산양식과 사회적 관계들의 형성사의 중요한 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사회적 관계들은 생산력들과 밀접하게 연관 되어 있다. 새로운 생산력을 획득함으로써 인간들은 그들의 생산 양식을 변화시키며, 그들의 생산 양식, 생계를 유지하는 방식을 변화시킴으로써 인간들은 그들의 모든 사회적 관계들을 변화시킨다” (철학의 빈곤, 앞의 책, 273)

3. 비봉판에는 “기술학”, 길판에는 “공학”으로 번역되어 있는 Die Technologie는 그냥 기술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맞다.

4. (어떤 특정한) 기술은 다음과 같은 것들을 드러낸다:

  • [자연에 대한 인간의 능동적 행동(Verhalten) = 인간 생활의 직접적 생산과정] – 사용가치의 관점에서의 기술
  • [인간의 사회적 생활조건(Lebensverhältnisse)] – (자본주의의 관점에서 보자면) 가치의 관점에서의 기술
    • Lebensverhältnisse는 보통 생활수준으로 번역하지만 여기서는 생활조건으로 번역했다. 이 단어가 단순히 물질적/문화적 생활수준을 넘어 사회적 삶의 조건을 규정하는 사회적 관계를 내포하고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비봉판과 길판에는 모두 “생활 … 관계들”로 되어 있는데 – 아마도 Verhältnisse를 보통 관계로 번역하기 때문일 것이다 –  생산력의 의미가 배제되어 있다는 아쉬움이 있다.
    • 생산기술은 협업의 방식을 규정하고, 역으로 (생산관계에 의해 규정되는) 지배적인 협업의 방식을 반영한다. 기계는 생산성을 높일 뿐만 아니라 노동자를 생산의 보조자로 전락시키는데, 이것은 노동자들의 비숙련화를 전제로 한다.
  • 인간의 사회적 생산조건으로부터 생겨나는 정신적 표상들(Vorstellungen) – 다시 한번 [철학의 빈곤]에서 인용
    • “자신들의 물질적 생산성에 조응하여 사회적 관계들을 확립하는 바로 그 인간들이 또한 그들의 사회적 관계들에 조응하여 원리들, 이념들, 범주들을 만들어 낸다.
      따라서 이 이념들, 이 범주들은 그것들이 표현하는 관계들과 마찬가지로 영원하지 않다. 그것들은 역사적이고 과도적인 산물들이다.
      생산력들 속에는 끊임없는 성장의 운동이, 생산 관계들 속에는 끊임없는 파괴의 운동이, 이념들 속에는 끊임없는 형성의 운동이 존재한다 ; 변하지 않는 것은 오직 운동의 추상뿐이다 – 불사의 사.” (철학의 빈곤, 앞의 책, 273, 강조는 원문)

5. 행동(Verhalten)이라는 표현은 비슷한 맥락에서 [독일 이데올로기]에서도 사용된다 – “인간들의 표상함, 사유함, 정신적 교류는 여기에서 또한 그들의 물질적 행위(Verhalten)의 직접적 유출로서 나타난다” (독일 이데올로기, 앞의 책, 201)

6. 환영들로 번역한 Nebelbildungen을 문자 그대로 번역하면 안개의 형성이다. 영어로는 보통 Phantom이라고 번역한다. 자본론 1권 1장 4절의 상품물신주의에 관한 절에서 마르크스는 비슷한 의미를 갖는 두 개의 단어를 사용한다. 하나는 phantasmagorische (환영과 같은, 환상과 같은)이고, 다른 하나는 Nebelregion (안개영역 – 비봉판에는 “몽롱한 … 세계”, 길판에는 “신비경”으로 번역되어 있다)이다.

노동생산물의 상품형태와 가치관계는 … 인간의 눈에는 물건들 사이의 관계라는 환상적인(phantasmagorische) 형태로 나타나지만 그것은 사실상 인간들 사이의 특정한 사회적 관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 비슷한 예를 찾아보기 위해 우리는 몽롱한 종교세계(Nebelregion der religiösen Welt)로 들어가 보지 않으면 안된다 – 자본론 1권 1장, 93

마르크스는 독일 이데올로기에서도 Nebelbildungen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인간들의 뇌 속의 환영들(Nebelbildungen) 또한 인간들의 물질적인, 경험적으로 확인 가능한, 그리고 물질적 전제들에 연결된 생활 과정의 필연적 승화물이다. – 독일 이데올로기, 마르크스-엥겔스 저작선집 1권, 202

[철학의 빈곤]과 [독일 이데올로기]의 이 부분들만 놓고보면 유물론에 대한 마르크스의 생각은 1846년 이래 크게 변하지 않은 것 같다. 독일 이데올로기에는 “유일하게 유물론적인 … 방법”에 대한 다음과 같은 언급도 있다.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는 독일 철학과는 정반대로 여기에서 우리는 땅에서 하늘로 올라간다. – 독일 이데올로기, 같은책, 202-3

7. 과학적 방법 대신 학적 방법이라는 표현이 낫다. 학회의 주제를 정하고 제출된 논문을 심사하는 Scientific Committee를 과학적 위원회로 번역할 수 없는 것 아닌가.

8. 추상적인 자연과학의 유물론이라 함은 곧 기계적 유물론을 가리키는 것 같다. 이 유물론은 역사적 과정을 배제한다는 점에서 추상적이다. 마르크스의 유물론은 대상의 고정성을 부정하는 유물론이다. 그것은 현실이 끊임없는 변화 속에 놓여 있다고 간주한다는 점에서 변증법적이다. 그러므로 마르크스의 유물론은 변증법적 유물론이다. 그리고 그의 변증법은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땅에서 출발해 하늘로 올라간다는 점에서 유물론적 변증법이다.

이 고찰 방식은 현실적 전제들에서 출발하여, 그 현실적 전제들에서 한시도 눈을 떼지 않는다. 이 고찰 방식의 전제들이란 어떤 환상적 (phantastisch) 격리와 고정 속에 있는 인간들이 아니라, 특정한 조건들 아래의 현실적인, 경험적으로 일목요연한 발전 과정 속에 있는 인간이다. 이러한 활동적 생활 과정이 표현되자마자 역사는, 경험론자들 – 그들 자신 아직 추상적인 – 의 경우처럼 죽은 사실들의 집적이기를 멈추고, 혹은 관념론자들의 경우처럼 상상된 주체들의 상상된 행동이기를 멈춘다. – 독일 이데올로기, 같은책, 202

독일어 원문

Darwin hat das Interesse auf die Geschichte der natürlichen Technologie gelenkt, d.h. auf die Bildung der Pflanzen- und Tierorgane als Produktionsinstrumente für das Leben der Pflanzen und Tiere. Verdient die Bildungsgeschichte der produktiven Organe des Gesellschaftsmenschen, der materiellen Basis jeder besondren Gesellschaftsorganisation, nicht gleiche Aufmerksamkeit? Und wäre sie nicht leichter zu liefern, da, wie Vico sagt, die Menschengeschichte sich dadurch von der Naturgeschichte unterscheidet, daß wir die eine gemacht und die andre nicht gemacht haben? Die Technologie enthüllt das aktive Verhalten des Menschen zur Natur, den unmittelbaren Produktionsprozeß seines Lebens, damit auch seiner gesellschaftlichen Lebensverhältnisse und der ihnen entquellenden geistigen Vorstellungen. Selbst alle Religionsgeschichte, die von dieser materiellen Basis abstrahiert, ist – unkritisch. Es ist in der Tat viel leichter, durch Analyse den irdischen Kern der religiösen Nebelbildungen zu finden, als umgekehrt, aus den jedesmaligen wirklichen Lebensverhältnissen ihre verhimmelten Formen zu entwickeln. Die letztre ist die einzig materialistische und daher wissenschaftliche Methode. Die Mängel des abstrakt naturwissenschaftlichen Materialismus, der den geschichtlichen Prozeß ausschließt, ersieht man schon aus den abstrakten und ideologischen Vorstellungen seiner Wortführer, sobald sie sich über ihre Spezialität hinauswagen. – MEW 23, 392

비봉판

다윈(Darwin)은 자연의 기술사 [즉, 생명의 유지를 위해 생산도구의 역할을 하는 동식물의 기관들의 형성]에 관심을 돌리고 있었다. 인간사회의 생산적 기관의 형성사[즉, 모든 사회조직의 물질적 기초가 되고 있는 기관의 형성사]에도 그와 동일한 주의를 돌릴 만한 가치가 있지 않은가? 그리고 그것은 더 용이하게 저술할 수 있지 않겠는가? 왜냐하면, 비코(Vico)가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인간의 역사는 우리가 만들었지만 자연의 역사는 그렇지 않다는 점에서 양자는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기술학은 인간이 자연을 다루는 방식, 인간이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는 생산과정을 밝혀 주는 동시에, 인간생활의 사회적 관계들과 이로부터 발생하는 정신적 관념들의 형성과정을 밝혀 준다. 이 물질적 기초를 사상하고 있는 모든 종교사는 무비판적이다. 안개처럼 몽롱한 종교적 환상의 현세적 핵심을 분석에 의해 발견하는 것은, 현실의 생활관계들로부터 그것들의 천국형태를 전개하는 것보다는 훨씬 더 쉬운 일이다. 후자의 방법이 유일하게 유물론적인, 따라서 유일하게 과학적인 방법이다. 자연과학의 추상적 유물론(즉, 역사와 역사적 과정을 배제하는 유물론)의 결함은, 그 대변자들이 일단 자기의 전문영역 밖으로 나왔을 때에 발표하는 추상적이며 관념론적인 견해에서 곧 드러난다. – 501

길판

다윈은 자연의 기술사, 즉 동식물이 자신들의 생활을 영위하기 위한 생산용구로서 자신들의 갖가지 기관을 어떻게 형성해왔는가에 관심을 기울였다. 사회적 인간의 갖가지 생산기관의 형성사나 각 개별 사회조직의 물적 토대에 의한 형성사도 마찬가지로 관심을 기울일 만한 분야 아닐까? 그리고 사실 이 분야가 더 쉬운 분야가 아닐까? 왜냐하면 비코(Vico)의 말대로 인간의 역사와 구별되는 까닭은, 전자는 우리가 만든 것이지만 후자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공학은 자연에 대한 인간의 능동적인 태도, 즉 인간생활 [따라서 인간생활의 온갖 사회적 관계와 거기에서 생겨나는 정신적 표상들]의 직접적인 생산과정을 밝혀주고 있다. 이 물적 토대를 무시한다면, 어떤 종교사도 몰비판적인 것이다. 분석을 통해 종교적 환상의 현세적인 본질을 찾아내는 것은, 거꾸로 그때그때 현실의 온갖 생활관계들에서 그것의 종교적인 형태를 설명해내는 것보다 훨씬 쉬운 일이다. 후자가 곧 유물론적인[따라서 과학적인] 방법이다. 역사적 과정을 배제하는 추상적, 자연과학적 유물론의 결함은 그 대변인들이 자신들의 전문영역을 벗어나자마자 보여주는 추상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견해에 의해 분명히 드러난다. – 508

펭귄판

Darwin has directed attention to the history of natural tech­nology, i.e. the formation of the organs of plants and animals, which serves as the instruments of production for sustaining their life. Does not the history of the productive organs of man in society; of organs that are the material basis of every particular organization of society, deserve equal attention? And would not such a history be easier to compile, since, as Vico says; human history differs from natural history in that we have made the former, but not the latter? Technology reveals the active relation of man to nature, the direct process of the production of his life, and thereby it also lays bare the process of the production of the social relations of his life, and of the mental conceptions that flow from those relations. Even a history of religion that is written in abstraction from this material basis is uncritical. It is, in reality, much easier to discover by analysis the earthly kernel of the misty creations of religion than to do the opposite, i.e. to develop from the actual, given relations of life the forms in which these have been apotheosized. The latter method is the only materialist, and therefore the only scientific one. The weaknesses of the abstract materialism of natural science, a materialism which excludes the historical process, are immediately evident from the abstract and ideological conceptions expressed by its spokesmen whenever they venture beyond the bounds of their own speciality. – 493-4

MIA판

Darwin has interested us in the history of Nature’s Technology, i.e., in the formation of the organs of plants and animals, which organs serve as instruments of production for sustaining life. Does not the history of the productive organs of man, of organs that are the material basis of all social organisation, deserve equal attention? And would not such a history be easier to compile, since, as Vico says, human history differs from natural history in this, that we have made the former, but not the latter? Technology discloses man’s mode of dealing with Nature, the process of production by which he sustains his life, and thereby also lays bare the mode of formation of his social relations, and of the mental conceptions that flow from them. Every history of religion, even, that fails to take account of this material basis, is uncritical. It is, in reality, much easier to discover by analysis the earthly core of the misty creations of religion, than, conversely, it is, to develop from the actual relations of life the corresponding celestialised forms of those relations. The latter method is the only materialistic, and therefore the only scientific one. The weak points in the abstract materialism of natural science, a materialism that excludes history and its process, are at once evident from the abstract and ideological conceptions of its spokesmen, whenever they venture beyond the bounds of their own speciality.

 

[자캠 강좌] 정치경제학의 방법론

이번에 자유인문캠프에서 2개의 강의를 한다. 하나는 나 혼자 하는 거고(자본론 읽기. 기본적으로 지난 겨울에 했던 것과 거의 같지만, 좀 더 시간안배 등에 힘써서 3장까지 끝낼 거다!!), 다른 하나는 다른 선생님들이랑 팀으로 한다(마르크스 정치경제학의 주제들). 그런데 두 번째 강의는, 수강생이 별로 없어서 사라질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사라지지 않을지도 모르므로(아직 결정되지 않은듯), 강의시작이 3일 앞으로 다가온만큼, 일단 간단한 강의계획을 올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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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제가 이번에 다루고자 하는 것은 마르크스가 자본주의 경제를 다루는 기본적인 방법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당연히 이는 대상을 “설명”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것을 통해) 흔히 범해지고 있는 잘못된 이해를 “비판”하고 “교정”하는 것까지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두 번의 강의에서 다루기엔 다소 무리가 있을 수도 있겠는데요, 아쉬운 대로 다음과 같이 구성을 해봤습니다.

1. 첫 번째 강의(7월 25일 수요일 오후 7~10시)

흔히 마르크스의 “방법”이라고 하면, 그의 “변증법적 서술 방법”을 가리킵니다. 이번 강의에서는 이와 같은 일반적인 인식이 과연 올바른가를 살펴볼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과연 변증법이란 마르크스에게 무엇이었는가?”라는 질문을 제기해볼 것입니다.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저는, 초기에서부터 자본론 또는 그 이후의 저작들 속에서 “변증법” 및 “방법”이라는 것을 마르크스가 어떻게 대해왔는지를 추적해볼 것입니다.

2. 두 번째 강의(7월 27일 금요일 오후 7~10시)

이번 강의는 앞서 강의와는 어느 정도 별개로 꾸며질 것인 한편, 자본론과 좀 더 직접적으로 연관되는 주제를 다룰 것입니다. 다름 아닌 자본론이 탐구대상으로 삼는 근대 자본주의 경제의 특징을 묘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경제에서, 우리가 “가치”라고 부르는 것이 형성될 수 있는 역사적 조건들에 대해 살펴볼 것입니다. 그러니까, 말을 좀 멋지게(?) 만들면, “왜 마르크스는 이 대상을 다루기 위해, 앞서 강의에서 살펴봤던 것과 같은 방법을 필요로 했는가”를 보는 것입니다. 이 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하고 나면, “투하노동 vs 가치형태”와 같은 전통적인 주제는 물론, “물질노동 vs 비물질/인지노동”과 같은 보다 최근의 주제에 대해서도 일정한 견해를 가지실 수 있으리라 봅니다.

저의 강의에 이어, 류동민 선생님께서 가치이론에서 가장 논쟁적인 주제인 전형문제를 다뤄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엔 유철규 선생님의 금융에 대한 강의가 있습니다. 두 분 모두 각각의 분야에서 최고의 전문가로서, 특히 각 주제들을 현대적인 맥락에 맞게 풀어내어 주실 거라 기대됩니다. 여러분들의 많은 호응 바랍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