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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 보이지 않는 손의 간계

개별 자본가가 노동생산성을 증가시켜 예컨대 속옷의 가치를 저하시킬 때, 그는 결코 노동력의 가치를 저하시켜 그만큼 필요노동시간을 단축시키려는 목적을 반드시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가 결국 이 결과에 기여하는 한, 그는 일반적 잉여가치율의 제고에 기여하게 된다. 자본의 일반적이고 필연적인 경향들은 그것들의 현상형태와는 구별되어야 한다. – 자본론 1권 12장, 428

1. 자본, 자본가를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손

마르크스에게 있어 자본주의경제의 내적 법칙, 본질적 법칙은 언제나 경향이다. 법칙이 직접적이고 무매개적으로, 아무런 방해 없이, 그리고 너무나 명명백백하게 자신을 관철하는 일이란 없다. 법칙은 겉보기에는 그 법칙과 무관하고 심지어 모순되어 보이는 현상들 속에서 그리고 그 현상들을 통해서만 관철된다. 왜? 현실이 표리부동한 방식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자본은 본질이고, 자본가는 자본의 인간형태다. 상대적인 자율성을 갖긴 하지만, 자본가는 뼛속 깊숙히 자본이다. 만유인력은 우주 만물의 운동을 통제하지만, 만유인력의 존재는 명백히 드러나지 않는다. 운동의 특수한 형태(예: 행성의 운동)는 만유인력의 통제력과 모순되어 보이기도 한다. 자본의 자본가에 대한 통제 역시 비슷한 방식으로 작동한다. 자본가는 자기이익을 따라 아니면 어떤 고상한 이론에 따라 행동한다고 생각하지만, 결국은 자본의 사명에 복무하고 있다. 자본은 자본가를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손이다, 혹은 자본은 자본가를 경향적으로 통제한다.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사람은 애덤 스미스지만, 그는 국부론에서 이 용어를 단 한번만 그것도 해외산업에 대비한 국내산업의 증진과 관련된 맥락에서 사용할 뿐이다.

각 개인은 그가 지휘할 수 있는 자본을 가장 유리한 방법으로 사용하려고 힘쓴다. 그의 관심사는 사실 자기 자신의 이익이지 사회의 이익은 아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자연스럽게 또는 오히려 필연적으로 그로 하여금 [사회에 가장 유익한] 투자를 선호하게 한다 … 해외산업보다 국내산업의 지원을 선호함으로써 그는 오직 자신의 안전을 의도한 것이고, 노동생산물이 최대의 가치를 갖도록 그 노동[heesang: ‘국내산업’의 오역으로 보인다]을 지도함으로써 그는 오직 자신의 이득을 의도한 것이다. 그는 이렇게 함으로써 [다른 많은 경우와 같이]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려 그가 전혀 의도하지 않은 목적을 증진시키게 된다. 그가 의도하지 않았다고 하여 반드시 [의도했을 경우에 비해] 사회에 보다 적게 기여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자기 자신의 이익을 추구함으로써 종종 그 자신이 진실로 사회의 이익을 증진시키려고 의도하는 경우보다 더욱 효과적으로 그것을 증진시킨다. – 국부론 (상), 434, 김수행 번역 (동아출판사).

다음과 같은 구절도 있다. 아마도 국부론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구절일 것이다.

우리가 식사할 수 있는 것은 정육점주인, 양조장주인, 빵집주인의 자비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이익에 대한 그들의 관심 때문이다. 우리는 그들의 인간성에 호소하지 않고 그들의 이기심에 호소하며, 그들에게 우리 자신의 필요를 이야기하지 않고 그들의 이익을 이야기한다. – 국부론 (상), 22.

주류경제학에서는 소비자가 효용을 극대화하고 기업이 이윤을 극대화할 때 경제가 균형상태에 도달하고 사회의 후생이 극대화된다고 주장한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주류경제학은 한계효용체감, 수확체감, 완전경쟁과 같은 지극히 이상적인 가정을 도입하는데 이 과정에서 사회과학으로서의 경제학은 일단의 연립방정식으로 전락하고 만다. 주류경제학자들은 스미스가 국부론에서 단 한번만 사용한 ‘보이지 않는 손’을 되뇌이면서 정치경제학자 스미스를 신고전파 경제학자로 탈바꿈시키는데, 스미스가 ‘균형’개념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것은 스미스에 대한 엄청난 왜곡이다 (‘균형’ 역시 국부론에 단 한번 등장하며, 신고전파 식의 균형 개념과는 전혀 다른 맥락에서 사용된다).

마르크스는 ‘보이지 않는 손’ 개념을 스미스나 주류경제학자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이해한다. 그는 개인의 사적 이익의 추구가 그 이면의 어떠한 본질적인 목적이나 법칙을 실현하는 도구라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개인적 이익 – 이것은 겉보기에는 순수히 개인적이고 사적으로 보인다 – 그 자체가 이미 사회에 의해 규정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개인들의 사적 이익의 추구가 (보이지 않는 손의 작동을 통해) 사회의 일반적 이익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재생산이라는 하나의 법칙으로서의 필요(즉 사회의 본질로서의 보이지 않는 손)가 개인들로 하여금 사적 이익을 추구하게 유도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보이지 않는 손은 존재한다. 다만 그것은 개인들의 이익 추구를 적절히 조정해서 사회의 일반이익을 확대하는 손이 아니라, 개인들로 하여금 사적 이익을 극대화하도록 내모는 손이다. 사회가 개인을 규정하며, 본질이 형태를 규정한다.

이렇게 마르크스는 자신의 세련된 방법론을 이용해서 ‘보이지 않는 손’을 깎고 다듬은 후, 단단한 반석 위에 지은 그의 이론의 집을 위한 장식물로 사용한다. 그는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에서 다음과 같이 쓴다.

경제학자들은 이를 [heesang: 생산자들 사이의 전면적 상호의존이  교환가치로 표현되는 것]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누구나 자신의 사적 이익을, 그것도 오직 사적 이익만을 추구한다. 그럼으로써 원하지도 않고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모든 사람의 사적 이익, 일반 이익에 기여한다. 각자가 자신의 사적 이익을 추구함으로써, 사적 이익의 총체, 즉 일반 이익이 달성된다는 것이 이러한 표현의 핵심인 것은 아니다. 이 추상적인 구절로부터 각자가 서로 타인의 이익 관철을 방해하고,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으로부터 일반적 긍정 대신에 일반적 부정이 귀결된다는 결론이 나올 수도 있다. 오히려 핵심은 사적 이익 자체가 이미 사회적으로 규정된 이익이며, 사회에 의해 정립된 조건들 안에서 사회에 의해 주어진 수단으로만 달성될 수 있다는 것, 말하자면 사적 이익 자체가 이러한 조건들과 수단들의 재생산에 묶여 있다는 것이다. 사적 이익은 사인들의 이익이다. 그러나 그 내용은 사적 이익의 실현 형태 및 실현 수단과 마찬가지로 모든 개인들로부터 독립적인 사회적 조건들에 의해 주어진다 – 정치경제학 비판요강 1, 137, 김호균 번역 (백의) – 번역 수정, 강조추가.

벤담은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 개념을 극단적으로 밀고 나간다. 스미스가 개인의 이익 추구가 공공선에 기여한다는 점에서 사익 추구 행위에 대한 윤리적 잣대의 적용에 의문을 제기하는데 그쳤다면, 벤담은 도리어 사익의 추구야말로 윤리적 행위라는 주장에까지 나아간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모토로 삼는 벤담에게 있어 사회적 이익을 확대시키는 모든 행위는 그 행위에 대한 개인의 윤리적 판단이 어떻든, 사회적 의미에서 윤리적인 행위이기 때문이다. 마침내 개인의 사적 추구는 상품생산사회에서 가장 고귀한 행위로 탈바꿈하며, 여기서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는 한 정점에 이른다. 마르크스가 자유, 평등, 소유에 더해 벤담을 상품교환분야, 즉 상품경제의 현상의 영역의 핵심적 원리로 지목하는 까닭이다.

벤담! 왜냐하면 각자는 자기 자신의 이익에만 관심을 기울이기 때문이다. 그들을 결합시켜 서로 관계를 맺게 하는 유일한 힘은 각자의 이기주의, 이득, 사적 이익 뿐이다. 각자는 오직 자기 자신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타인에 대해서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바로 그렇게 하기 때문에 그들은 모두 [사물의 예정조화]에 따라 또는 전지전능한 신의 섭리에 따라] 그들 상호간의 이익, 공익, 전체의 이익이 되는 일을 수행하는 것이다. – 자본론 1권, 6장, 230-231

2. 자본가, 세계사적 개인

그건 그렇고 이러한 셋팅은 자본가에게 얼마나 유리한가? 개별 자본가는 사회적 총자본의 이익 같은 것을 고민할 필요가 없다. 그는 그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치열하게 노력하면 된다. 그가 생산성을 높여 경쟁자들보다 더 많은 잉여가치를 실현하려고 할 때, 그는 노동력 가치를 저하시켜 상대적 잉여가치를 생산하려하는 자본 일반의 노력에 봉사한다. 아니, 사실은 상대적 잉여가치의 생산을 추동하는 자본주의의 경향적 법칙, 자본주의경제의 보이지 않는 손이 자본가를 치열한 경쟁의 길로 내몬다. 노동자 사이의 경쟁이 – 그것이 어떤 형태이건  – 보통 노동자 계급의 지위 하락으로 이어지는 것과는 천양지차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손이 꼭 자본가에게 도움이 되는 것만은 아니다.

자본에게 있어 (그 본질적 속성에 해당하는) 상대적 잉여가치의 생산은 잉여노동의 비중을 확대한다는 긍정적 측면 이외에도 이윤율을 저하시키고, 생산에서 노동의 비중을 축소시킨다는 부정적인 측면을 갖고 있다 (물론 이것도 ‘경향’이다). 착취의 심화가 역설적으로 착취의 존립기반을 위협하는 셈이다. 인간이 자신에 충실하여 열정적으로 살아가며 생을 만끽하는 바로 그 순간에도 사실 죽어가고 있는 것처럼 자본도 그렇다.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다”.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고야 만다.

그렇다면, 자본가는 보이지 않는 손의 통제 하에 자본의 내적 법칙을 현실화하는 동시에 자본주의 이후의 새로운 사회의 초석을 놓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로버트 터커 (Robert Tucker)는 “헤겔과 마르크스에 있어 이성의 간계 (The Cunning of Reason in Hegel and Marx)”라는 논문에서 자본가가 헤겔이 말한 “세계사적 개인 (world-historical individuals; welt-geschichtliche Individuen)”에 해당한다고 주장한다 – 매우 좋은 논문이다. 이메일 주시면 보내드린다.

세계사적 개인에 대한 설명은 헤겔의 역사철학강의에 대한 아래의 위키피디아 기사가 좋다.

“세계사적 개인은 이렇게 저렇게 고민하지 않는다. 아무것도 고려하지 않고 그 목적을 향하여 한길로 돌진한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과 관계없는 일에 대해서는 위대한, 때에 따라서는 신성한 것마저도 경솔하게 다루는 경우도 있다. 이런 태도는 물론 도덕적 비난을 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이와 같은 위인이, 자신이 가는 길 앞에 놓인 많은 죄 없는 꽃을 짓밟고, 많은 것을 밟아 뭉개는 것도 하는 수 없는 일이다.” (헤겔 역사철학강의) 즉 헤겔의 개념에서 세계사적 개인은, 세계사적 일반 이념의 실현을 위해 다른 사소한 것들을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는 인물이다. 이와 같은 인간의 행위에서 그가 정념에 사로잡혀 행동하였거나 개인적 명예욕, 정복욕 등에 따라 행위하였다고 비난받는 것은 이러한 일반 이념의 관점에서 볼 때는 사소한 일이다. 또한, 이러한 세계사적 개인들이 활동하는 세계사의 전환기에서 역사는 행복을 생산하지 않는다는 것은 헤겔에게 있어서 명백하다: “세계사에 있어서 행복한 시대란 내실이 없는 시대, 대립 없는 균형의 시대인 것이다. … 절대적 목적 같은 것이 문제인 경우에는 이와 같은 … 것이 이성적인 세계질서의 한 계기가 되어서는 안 된다. … 역사는 행복이 자라는 토양이 아니다. 역사 속에서 행복의 시기는 역사의 빈 페이지이다” 세계사적 개인의 예로, 헤겔은 율리우스 카이사르나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같은 예를 든다 – 위키피디아

역사를 세계 속에서의 이성의 자기 실현의 과정으로 보는 헤겔에 있어, 본질적인 것은 이성 그 자체이며, 세계사적 개인은 이성의 한 존재양식에 불과하다. 세계사적 개인은 자신이 이성의 자기실현의 도구로 활용되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한다. 다만 그의 제한을 모르는 성공욕과 정복욕은 그를 끊임없이 채찍질하여 앞만 보고 달려가게 만든다. 과로와 긴장상태는 그를 갉아먹는다. 세계사적 개인이 엄청난 성취 이후에 금새 죽거나 몰락하는 이유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요절했고, 카이사르는 암살당했으며, 나폴레옹은 섬으로 유배됐다! 본질로서의 이성은 세계사적 개인을 통해 스스로를 역사 속에서 실현하지만, 세계사적 개인은 이성의 도구로서의 역할을 완료한 이후에는 토사구팽되고 마는 것이다. 이렇게 특수한 개인의 열정적인 삶과 희생을 통해 배후에서 은밀하게 스스로를 실현하는 이성의 힘, 헤겔은 이것을 바로 이성의 간계(the cunning  of reason; die List der Vernunft) 혹은 이성의 간지라고 불렀다.

헤겔은 세계사적 개인의 행위는 이성의 실현이라는 고귀하고 보편적인 이익에 봉사하므로, 그가 잔악한 폭력을 사용하는 독재자이건, 혹은 협잡과 사기에 능한 정치인이건 그건 전혀 중요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개인의 행위가 동시에 세계사적 행위에 해당할 때, 일반적인 윤리를 적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 마치 스미스에게 있어 개인의 경제적 행위가 윤리의 영역과는 다른 지평에 존재하는 것처럼 세계사적 개인은 도덕적 치외법권에서 산다. 그러므로, 이순신이나 세종대왕 같은 훌륭하고 위대한 인물들은 세계사적 개인이 아니다. 왜선 133척에 맞선 12척의 일자진으로 나라를 구해낸 장군의 공, 어린 백성을 어여삐 여겨 새 글자를 창제한 임금의 치적이 구시대를 새시대로 이끌어 나가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들이 역경을 이겨낸 영웅적 인물들인 것은 사실이지만, 안타깝게도(?) 그들은 역경을 이겨내기 위해 마수를 쓰지는 않았다. 비윤리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위대한 성취를 한 사람들 – 이 사람들은 위인이지 세계사적 개인이 아니다. 세계사적 개인에게는 일종의 교활함과 뻔뻔함이, 목표의 달성에 장애가 되는 모든 것을 쳐없앨 수 있는 결기와 잔인함이 필요하다. 현대사에서 세계사적 개인에 가장 가까운 사람으로는 미국의 닉슨과 중국의 마오쩌둥 그리고 한국의 박정희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여담이지만 조갑제 등이 박정희를 초인으로 칭송하는 것은 이해하기 힘들다. 그것은 정치적 전략으로 옳지 않다. 니체의 초인은 강자, 지배의 도덕을 대변하기 때문이다. 니체의 실제 생각이 어땠건, 비판받기 딱 좋은 생각이다. 나라면 ‘세계사적 개인’을 밀었다. 카이사르, 나폴레옹 등을 덧붙여서).

(독일 이데올로기의) 마르크스는 세계사를 헤겔과는 다른 방식으로 이해한다. 우선 그는 역사와 세계사를 구분하여, 세계사는 서로 다른 국가, 국민들 사이의 협업을 필요로 한다고 본다. 다시 말해 세계사의 시작은 (교역을 할 수 있는 수준의) 최소한의 물적생산수준의 발전을 필요로 한다. 둘째, 마르크스에게 있어 “역사의 세계사로의 전환”은 ‘자기 의식’류의 이념의 실현이 아니라 물질적이고 경험적인 행위의 결과다. 셋째,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세계사의 최초의 자연발생적 형태이며, 공산주의 혁명을 통해 역사가 세계사로 완전히 전환된다고 보았다.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그는 이렇게 쓴다.

이제 이러한 발전 과정에서 서로서로 작용하는 개별적인 영역들이 더욱 확장되면 될수록, 또한 더욱 완성된 생산 양식, 교류, 그리고 이를 통하여 여러 국민들 사이에서 자연 성장적으로 생겨난 분업 등에 의해서 개별적 민족들의 원시적 폐쇄성이 파괴되면 될수록 그만큼 역사는 세계사로 되어가는 바, 그 결과 예컨대 인도와 중국의 무수한 노동자들이 생계를 잃게 만들고 이 제국들의 존재 형태 전체를 뒤바꾸는 기계가 영국에서 발명되었을 때 이 발명이 하나의 세계사적 사실로 되는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또한 커피와 설탕이 19세기에, 나뽈레옹의 대륙 봉쇄에 의한 이 생산물들의 부족이 독일인들로 하여금 나뽈레옹에게 대항하여 봉기하게 만들고, 그리하여 1813년의 영광스러운 해방 전쟁의 현실적 토대가 됨으로써 그 세계사적 의의를 입증하게 되는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로부터 역사의 세계사로의 이러한 전환이란 ‘자기 의식’, 세계 정신 혹은 그 외의 어떤 형이상학적인 유령의 단순히 추상적인 행위와 같은 것이 전혀 아니며, 완전히 물질적이고 경험적으로 확증 가능한 행위, 가고 서고 먹고 마시고 옷 입는 각 개인들이 그 증거를 제공하는 행위라는 결론이 나온다. – 밑줄 추가.

세계사적인 활동으로의 그들의 활동의 확장과 함께 각 개인들이 점점 더 그들에게 낯선 하나의 힘(그래서 그들이 그 힘의 압박을 소위 세계 정신 따위의 간계로 생각해 왔던 힘) 밑에, 즉 점점 대규모로 커져서 마침내 그 자신을 세계 시장으로서 증명하는 하나의 힘 밑에 노예화되어 갔다는 것은 마찬가지로 지금까지의 역사 속에서 확실히 하나의 경험적 사실이다 (중략) 이 공산주의 혁명을 통하여 전면적인 의존성, 즉 개인들의 세계사적 협업의 이 최초의 자연 성장적 형태는, 인간 상호간의 작용으로부터 창출되었지만 지금까지는 인간에게 완전히 낯선 힘으로서 외경시되어 인간을 지배해왔던 이러한 힘들에 대한 통제와 의식적 지배로 바뀌게 된다. – 독일 이데올로기, 맑스-엥겔스 저작선집 1권,  218-9, 박종철 출판사, 강조는 원문, 밑줄은 추가.

자 그렇다면, 이제 유명한 자본가 한명을 아무나 머리 속에 떠올려보자. 이 자본가는 자신이 실제로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전혀 의식하고 있지 못한 채 자신의 본질에 해당하는 자본의 법칙을 현실적으로 실현하고 있다. 자본이 부여한 사명을 성실히 수행함으로써, 이 자본가는 동시에 자본의 무덤을 열심히 파고 있다. 이 자본가와 그의 수많은 동료들을 통해 (마르크스는 싫어하겠지만 헤겔식으로 표현하자면) 역사는 마침내 세계사로 완전히 전환될 것이다.

이 자본가가 바로 세계사적 개인인 이유다. 그는 자기이익을 위해서는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노동자의 권리는 폭력적으로 제압하고, 그들의 건강을 해치는 노동조건의 개선에는 관심이 없다. 수익성이 떨어지면 노동자를 해고하고, 공장은 해외로 옮긴다. 그는 아침에 깨어나 밤에 잠들기까지 오직 이윤만을 생각하며, 이러한 자신의 노력이 사회를 위한 것이라고, 아니 사실 사회는 오직 자신의 이익을 높이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다른 이들의 비난 따위는 한 귀로 듣고 다른 귀로 흘린다. 그는 이익이라는 깃발만을 앞에 놓고 이미 얻었다고도 온전히 이루었다고도 생각하지 않고,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쉬지 않고 나아간다. 이 세계사적 개인, 세계사적 자본가를 놓고 윤리를 논할 수 없다. 그가 자본주의의 철폐라는 인류의 세계사적 전환, 그 고귀한 사명에 종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이면에서 음지에서 양지를 지향하는 자본주의 경제의 보이지 않는 손은 지금도 은밀히 작동하고 있다. 그러므로 미래는 이미 우리 곁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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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용.

마르크스는 자본론에서 약간은 다른 맥락에서 ‘이성의 간계’를 언급한다.

노동자는 여러 물질들의 기계적, 물리적, 화학적 성질들을 이용해 그 물질들을 [자기의 힘의 도구로서 자기의 목적에 따라] 다른 물질들에 작용하게 한다. (각주 2)

(각주2) “이성은 강력한 동시에 교활하다. 그것이 교활한 것은 [자기 자신은 과정에 직접 관여하지 않고 여러 객체들을 그것들의 성질에 따라 상호작용하여 지치게 만들면서 오직 자신의 목적만을 실현시킨다는] 그 매개적 활동 때문이다” (헤겔, {철학체계}. 제1부, {논리학}. 베를린, 1840년, p. 382) –  자본론 1권 6장, 237

여기서 마르크스는 노동과정 시초에 존재하며, 노동과정 중에 실현되는 목적, 지식 등을 마치 이성인 것처럼 표현하고 있다. 이 목적 혹은 지식이 노동과정 중에 활용되는 “여러 물질들의 기계적, 물리적, 화학적 성질” 등을 간교하게 활용하여, 노동과정 끝에 마침내 자기 자신을 실현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