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g Archives: 복지

세제개편안 논란에 대하여 (3/끝) 무엇을 할 것인가

4. 세금과 임금: 현실에서는 모든 세금을 자본이 부담하진 않는다

앞에서 모든 세금은 원칙상, 그리고 이론적으로 자본으로부터 나온다고 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다.

모든 세금이 자본으로부터 나온다는 명제의 근저엔 임금에 대한 더욱 근본적인 논의가 전제되어 있다. 바로, ‘임금=노동력의 재생산비용=노동자의 생존비용’ 등식이 그것이다.

일단, 자본으로부터 직접 징수되는 법인세가 자본에서 나온다는 것은 쉽다. 문제는 노동자 각자의 임금으로부터 공제되는 소득세인데, 정의상 임금은 노동자의 사회적 생존비용이므로, 여기에서 한푼이라도 세금으로 나간다면 노동자의 재생산에 차질이 생길 것이고, 이는 결국 자본이 (임금인상이라는 형태로) 보충해줄 수밖에 없다.

그러나 바로 그 노동자의 재생산비용, 또는 ‘사회적 생존비용’이라는 것이 가변적이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일정한 사회적 평균값일 수밖에 없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그러한 평균은 변화하지 않을 수 없고, 나라마다, 그리고 한 나라 안에서도 지역이나 계층마다 다를 수 있다. 결국 ‘임금=재생산비용’이라는 명제는, 이런 모든 차이들을 사상한 매우 추상적인 규정인 셈이다. 마르크스는 임금을 결정하는 이런 모든 요소들을 ‘임금의 역사적, 도덕적 요소’라고 불렀다.

뿐만 아니라, 임금은 적어도 일시적으로 그러한 평균값을 상회하거나 하회할 수도 있다. 갑작스럽게 물가가 올랐을 때, 임금은 명목크기가 유지된다 해도 실질적으로는 하락한 것이며, 이는 곧 노동자들의 생활수준 저하로 나타난다. 즉 정상적인 재생산이 안 되는 것이다. 가장 추상적인 이론의 차원에서 봤을 때, 이러한 상황은 곧 임금인상을 통한 노동자의 투쟁을 통해 해소될 것이기에 그저 일시적인 교란상황에 그친다. 그러나 문제는, 실제 현실에선 노동-자본 간의 계급관계에 따라 그러한 임금인상이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 그리하여 만약 저하된 실질임금 수준이 장기화되면, 그것이 새로운 사회적 평균으로 자리잡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세금의 경우도 다르지 않다. 원칙상으로는, 노동자로부터 걷어가는 소득세가 많아지면, 그 차액만큼을 노동자가 자본가로부터 임금인상을 통해 받아낼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못할 경우엔 정상적인 노동력 재생산에 차질이 생기며, 나아가 그러한 비정상적인 상황이 새로운 ‘정상’으로 자리잡을 수도 있다. 이럴 경우, 세금은 자본가가 낸 것이 아니고, 노동자의 생활수준 저하를 통해 지불된 게 된다. 바로 이러한 까닭에 나는 앞서 소개한 ‘경제위기와 복지국가’라는 글에서 현대적 조세제도“치열한 계급투쟁의 결과 얻어낸 임금인상이라는 ‘전리품’을 자본가계급이 은밀하게 회수해가는 교묘한 방식”이라고 부른 것이다.

5. 세금, 복지, 임금: 증세의 조건?

간단히 정리해보자. 한편으로 세금은 (자본이 직접 지불하지 않더라도) 궁극적으로는 자본으로부터 나온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세금은 (특히 자본이 직접 지불하지 않는 경우에) 노동자 서민대중의 삶의 질 저하를 대가로 하기도 한다.

이것은 하나의 모순인데, 이러한 모순이 집약되어 나타나는 것이 바로 ‘임금’이라는 범주다. 증세 자체는 중요한 게 아니고, 증세의 결과 줄어든 소득을 노동자들이 임금인상을 통해 보상받아낼 수 있는지 여부가 핵심이란 얘기다. 그리하여 현재의 논쟁이나 투쟁도 바로 여기로 집중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 현재 정부의 세제개편안이 포함하고 있는 ‘보편증세’의 문제는, 현재 논쟁의 양 당사자들이 주장하는 대로 저소득 노동자를 털 것이냐 고소득 노동자를 털 것이냐의 문제가 아니라, 증세를 임금인상으로 성공적으로 연결시켜 내느냐 여부의 문제다. 좀 더 평이하게 말하면, 증세의 결과 노동자 서민대중의 삶의 질이 저하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어쩌면 누군가는 이렇게 물을지도 모른다. 지금은 세금을 걷어서 전투기 사자는 것도 아니고 복지를 하자는 것이니, 어차피 노동자가 세금을 내더라도 더욱 큰 복지로 돌려받을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러니 여기에서 임금인상은 별개의 문제 아닌가? 한편으론 맞는 말이다. 이를테면, 정부가 노동자/대중으로부터 세금으로 거둬들인 재원으로 복지정책을 시행하고, 그러한 복지정책이 노동자의 재생산비용을 낮춰 세금인상분을 정확히 상쇄하고도 남는다면, 이러한 증세를 통해 노동자들의 삶이 더 나아질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은 바로 이것이 ‘내가 만드는 복지국가’류의 프로젝트들의 근간을 (명시적으로든 암묵적으로든) 이루는 아이디어가 아닌가 한다.

하지만 이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소리다. 첫째, 현재로서는 노동자와 서민대중으로부터 거둬들인 추가세수가 그들을 위한 복지에 쓰일지, 아니면 자본이 내지 않은 세금을 보충하고 나아가 자본을 위해 쓰일지, 심지어 전투기 구입하는 데 쓰일지조차 확실치 않다. 올초부터 정부에서는 ‘세수부족’을 입버릇처럼 말하곤 하는데, 지금 논의되는 증세규모는 적극적인 복지는커녕 세수부족을 메우는 데도 모자란 수준이다.

둘째, 추가세수가 복지에 쓰이더라도 문제다. 왜냐하면 현재 우리나라의 노동자와 서민대중에게 필요한 것은 현재 삶의 수준의 유지가 아니라 그 대폭적인 상승이기 때문이다. 사실 이것은 자본주의 하에서 모든 계급투쟁이 지향해야 할 바다. 왜냐하면 여기에서 모든 경제적 가치는 노동자와 서민대중이 만들어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많은 세금을 내고, 아무리 많은 복지를 해도, 일하지 않는 자본가가 단 한푼이라도 챙겨간다면 착취는 철폐된 것이 아니고, 따라서 노동자계급은 승리한 것이 아니다.

6. 다시 복지로: ‘어떤’ 복지냐의 문제

여기서 잠시 현재 한국사회에서 복지가 이슈로 떠오르는 배경이 무엇인지를 떠올려보자. 왜 보수정권조차도 복지를 하려고 하는가? 바로 대중의 활력이 극도로 저하돼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신자유주의 때문인지, 경제위기 때문인지는 여기서 따지지 말자. 여하튼 그러한 대중의 활력 저하가 단순히 (일부) 노동자들의 삶을 피폐하게 만드는 것을 넘어 경제의, 그리하여 자본의 원활한 재생산을 방해하고 있고, 이를 보기좋게(?) 해소할 수 있는 가장 유력한 대안이 바로 현재 한국에서 제기되고 있는 복지인 것이다.

현재 우리 사회에서 복지란 자본(주의) 재생산의 위기를 타개해주는 수단으로 제시되는 것이다. 이를테면 비정규직 문제를 보라. 너무 심각하다. 사회의 응집력과 재생산을 크게 방해할 정도다. 어떻게 해결할까? 정규직화? 임금인상? 그렇게 되면 얼마나 좋겠나. 이러한 명확한 해결책을 취하지 않고도 비정규직 문제의 폐해를 피하기 위해 그들은 ‘복지’를 선택한 것이라고 보면 된다. 즉 그들은 비정규직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관리를 위해 복지확대를 추구한다.

이 대목에서 ‘어떤 복지냐’가 중요한 질문으로 떠오른다. ‘체제의 유지와 관리’ 차원에서, 즉 대중의 삶의 수준을 현재의 상태에서 안정적으로 관리하고자 복지를 추구하는 저들과 달리, 노동자계급과 서민대중의 이익을 옹호하는 우리는 어떤 복지를 원하는가? 적어도 현재의 한국사회에서 진보진영의 복지에 대한 태도는, 그것을 바닥에 처박힌 대중의 삶의 질을 높이고 극단으로 치달은 경제적/사회적 불평등을 축소하는 계기로 만드는 것이어야 한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이러한 복지에 대한 인식, 그리고 그를 향한 투쟁은 복지(국가)와 세금이란 것이 그 자체로 계급투쟁의 표현임을 명확히 하는 데서 출발한다. 자본가에 대한 투쟁은 임금을 가지고 하는 것이 보통이다. 어쩌면 그러한 투쟁을 통해 충분한 임금을 확보해낸다면 복지도 필요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오늘 한국의 현실에서 이는 불가능에 가깝다. 최근 최저임금 결정에서 극명히 드러났듯이, 현재 한국사회에서 자본과 노동 간의 힘관계는 현저한 임금인상을 낳을 수 있을 정도가 아니다. 노동은 더없이 취약할 뿐만 아니라 사회의 다양한 주체들로부터 점점 더 고립되고 있다.

바로 이런 현실에서 복지의 확대는 자본가에 대항한 노동자계급의 주요한 투쟁을 되살릴 수 있는 좋은 계기다. 임금 올려달라고 회사를 상대로 투쟁하는 것보다 더 많은 복지를 달라고 국가를 상대로 요구하는 것이 훨씬 더 많은 정당성을 갖는 게 요즘 한국의 현실이다. 이것이 바람직한 현상은 아닐지라도, 노동자와 서민대중의 이익을 옹호하는 좌파는 그러한 복지에의 열망을 대중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한 계기로, 나아가 계급투쟁의 정당성을 새롭게 정의하는 적극적인 계기로 끌어올릴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어떠한 일이 있어도 이제껏 논의되고 있던 복지가 후퇴되는 일은 막아야 하며, 나아가 더 많은 복지를 요구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만약 증세가 필요하다면, 이에 대해서도 적극적인 태도가 필요하다. 중요한 것은 노동자와 서민대중이 제 살을 깎아 복지비용을 대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것이 종국에 그들의 삶을 ‘조금’ 낫게 해준다 해도 말이다. 따라서 증세의 최우선순위에는 자본가, 그리고 그간 제대로 세금을 내지도 않았던 대자산가에 대한 법인세나 재산세, 자본이득세가 올라야 할 것이다.

또한 전술적인 이유에서든, 아니면 위와 같은 증세로는 충분한 복지재원이 마련되지 않아서든, 만약 노동자와 서민대중에 대한 보편증세(소득세/소비세 인상, 그리고 사실상의 보편증세인 사회보험료 인상 등)가 필요하다면, 이것을 받아들일 수도 있어야 한다. 단, 이럴 경우, 엄청난 대중의 저항이 있을 것인데, 좌파들은 그러한 저항이 복지에 대한 저항이 되지 않으면서 자본가와 대자산가 집단을 향하도록, 그리하여 궁극적으로 임금인상에의 대중적 요구로 전환될 수 있도록 유도할 수 있어야 한다. 요컨대, 좌파들은 현재 일어나고 있는 ‘복지’ 국면, ‘증세’ 국면을, 현재의 미약한 계급역관계를 뒤집는 기회로 사용해야 한다.

(※ 사족: 복지비용을 실질적으로 자본가가 부담케 하는 데 있어 핵심이 보편증세와 더불어 임금인상을 관철시키는 것이다. 많은 부동산을 소유한 대자산가들과 관련해서도 마찬가지다. 단순히 그들에게 엄격하게 과세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러한 과세의 결과가 이를테면 세입자에게 전가되지 않도록 전월세상한제 등이 보조적으로 필요하다.)

(끝)

세제개편안 논란에 대하여 (2) 세금의 본질과 계급투쟁

2. 복지재원? 모름지기 모든 세금은 자본으로부터 나온다

어쨌든 복지를 위한 재원이 쟁점으로 되고 있으니, 그에 대해 한번 생각해보자. 결론부터 말하면, 모든 복지재원은, 나아가 모든 세금은 자본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이다. 이것을 깨닫는 것이 가장 중요한 포인트다.

당연히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게 뭔 소리냐, 하실 것. 아니, 내가 열심히 일해서 받은 피같은 임금에서 세금이 나가는데 그게 무슨 개소리냐고! (-_-) 근데 그렇지가 않다.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정치경제학의 대답}이라는 책에 실린 나의 글 ‘경제위기와 복지국가’를 보시면 된다(링크). 책을 구하기가 번거로우신 분은, 이 블로그에 있는 ‘공공요금의 정치경제학’ 씨리즈를 보셔도 되겠고(링크1, 2, 3), 원하시면 앞의 글을 파일로 보내드릴 수도 있다(저 EM의 이메일주소는 우측상단에 있슴다). 핵심을 요약하면 이렇다. ▲자본주의 경제에서 임금이란 본질적으로 노동력의 재생산비용이다(물론 이것은, ‘이론적으로’, ‘평균적으로’ 그렇다는 얘기. 현실에선 당연히 개인적인 차이와 다양한 교란요인이 있다). ▲임금이 그러한 재생산비용에 못 미치면 노동자의 정상적인 재생산은 위협받기 때문에, 원리상 노동자의 임금에서는 세금이든 뭐든 자신의 (사회적) 생존과 관계없는 비용이 지출될 수는 없다. ▲그런데도 현실에서 노동자들은 세금을 내는데, 이는 곧 자신의 생존비용 이상으로 사전적으로 임금상승이 있었음을 의미할 따름이다. ▲따라서 모든 세금은 궁극적으로는 자본에서 나올 수밖에 없다. (다시 말씀이지만, 이러한 사항을 지금 이 글에서 상술할 수는 없다. 더 자세한 논의가 궁금하신 분은 위에서 언급된 글들을 보세요^^)

모든 세금은, 따라서 현재 논란이 되고 있는 추가적인 복지재원도 결국은 자본으로부터 나올 수밖에 없다는 것. 바로 그것이 핵심이다. 이를테면 이번 세제개편안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소득세의 (사실상의) 증세도, 겉보기엔 노동자의 주머니를 터는 것이지만 본질적으로 그러한 재원은 자본가의 금고에서 나오는 것이란 얘기.

말할 것도 없이, 이 경우 증세가 궁극적으로 임금상승으로 이어진다는 가정이 있어야만 한다. 이론적으로는 당연히 그래야 한다. 왜냐하면 기존에 노동자의 세후 임금이 그의 재생산비용(즉 생존비용)이라면, 소득세 증세 이후의 임금은 그러한 재생산비용에 못미칠 것이므로 원활한 재생산을 위해서는 임금인상이 필수적인 것이다. (하지만 이 경우 임금인상분과 소득세 인상분이 일치할 필요는 없다. 소득세 증세의 일부는 노동자에게 혜택으로 돌아올 것이므로, 임금인상은 소득세 인상분보다 작을 것이다.) 이 얘긴 잠시 뒤에 더 하자.

3. 자본으로부터 어떻게 재원을 빼낼 것인가?

이렇게 보면, (‘어떤 복지인가’의 문제는 차치하고) 복지를 위한 재원마련의 방법론은 결국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자본으로부터 복지재원을 빼낼 것인가’의 문제로 귀결된다.

이를테면 법인세를 더 걷는 것은 자본으로부터 직접 수금을 하는 것이겠고, 소득세를 올리는 것은 간접적인 방식이다. 부가세도 마찬가지. 흔히 사람들은 자본이 법인세 인상에는 반대하지만 소득세 인상에는 찬성할 것이라고 짐작할텐데, 전혀 그렇지 않다. 정도야 덜하겠지만 자본은 소득세나 부가세 인상에도 반대한다. 그것은 곧 임금인상으로 자신에게 돌아올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일반적으로 복지나 사회기반시설이 잘 갖춰지면 자본에도 이롭다. 먼저 자본 자신이 여러모로 이득을 보고, 노동력 재생산을 위한 직접적 비용도 줄어들 것. 따라서 자본은 국가지출의 증가에 대해, 이 모든 사항들을 고려해 입장결정을 할 것이다.)

대체로 자본으로부터의 직접적 세금징수인 법인세 인상은 자본이 가진 현실적인 힘을 고려하면 매우 어렵고, 소득세 인상은 자본의 저항은 상대적으로 덜 받지만 정치적 부담이 상당하다. 등등.

그렇다면 이번 세제개편안에 대해 자본이 격렬히 반응하지 않는 까닭은? 정답은,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대중이 알아서 반대하고 있으니 말이다. 사실 이것이, 모든 세금을 자본이 직접 내지 않고 노동자/대중을 통해 간접적으로도 냈을 때 거둘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정치적 효과다. 어떤 의미에서 국가의 지출을 늘리고 복지를 늘리는 것은 계급투쟁의 성과이고, 따라서 노동-자본 간의 투쟁의 표현인데, 노동자 대중을 통해 간접적으로 조세를 납부함으로써 자본은 그러한 계급투쟁을 노동자들 내부의 갈등, 또는 실체도 모호한 ‘국민적 갈등’으로 치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늘날 세금의 문제를 둘러싼 논란에서 노동자 계급을 옹호하는 이들은 기본적으로 거기에 깃든 계급투쟁적인 측면을 복원하는 데서 출발해야 할 것이다. 부연하자면, 바로 이 지점에, 일종의 사회변혁론으로서의 ‘시민증세론’의 가장 핵심적인 허점이 있다. 본질에 있는 계급투쟁을 보지 못하고, 지극히 피상적으로, 즉 복지를 ‘시민적 합의’의 문제로 제시한다는 것이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한가.

(계속)

세제개편안 논란에 대하여 (1) 문제는 복지다

이제는 지겨울 만도 한 세제개편안. 꽤 뜨거운 논쟁이 진행됐는데, 모름지기 이런 데는 뒷북을 쳐야 제맛. 모른척 지나가기 아쉬우니 몇 마디 거들자.

1. 문제는 복지다

이번 논란에서 재밌는 것은, 박근혜나 새누리당은 쏙 빠져있고 민주당과 기타 시민사회진영이 서로 싸운다는 점. 한쪽에선 중간소득계층의 세부담을 높이는 이번 세제개편안을 ‘세금폭탄’이라고 규정하고, 다른 한쪽에선 그 정도의 세부담은 복지국가를 위해 필수적이라면서 ‘시민증세’를 옹호한다. 특히 후자를 주장하는 이른바 ‘진보진영’의 꽤많은 인사들은 이번 세법개정안의 ‘방향’은 옳다면서 그에 대한 지지를 밝히는 ‘신앙고백’을 마다하지 않고 있다. 참으로 기가막힐 노릇.

사실 위와 같은 논쟁은 매우 저열한 것이다. 어차피 복지를 위해 증세가 필요하다는 데는, 그러한 복지체제를 바라건 바라지 않건 누구나 동의할 것. 그래서 보수층에서는 증세에 대한 혐오를 조장해 복지국가 실현을 방해하는 것이고, 진보진영에서는 증세란 복지를 위해 필요한 것이라고 설득한다. 그래서 핵심적인 문제는 ‘복지국가를 만들 것이냐, 말 것이냐’, 그리고 만든다면 ‘어떤 복지를 만들 것이냐’인 것이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나는, 이번 세제개편으로 이뤄질 증세는 매우 미미한데, 사실은 그런 점을 들어서 박근혜 정부의 복지에 대한 비전의 부재를 공략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본다. 스스로 지갑을 열어 ‘옛다, 돈!’ 이러지 말고, 복지 요구나 제대로 하란 말이다…)

그런데 현재 논쟁을 벌이는 양측 사이에서 위와 같은 측면은 전혀 부각되지 않고 있다. 그것은 그저 복지를 위한 재원마련을 ‘선 부자증세, 후 시민증세’로 할 것이냐, 아니면 ‘선 시민증세, 후 부자증세’로 할 것이냐의 문제로 귀결될 뿐인데, 솔직히 그것이 그렇게 중요한가? 복지에 대한 구체적인 비전 없이, 또는 자신이 가진 그러한 비전의 차별점을 부각시키지 않은 채로 증세의 방법론만 물고 늘어지는 것은, 오히려 증세에 대한 일반적인 거부감만 키워 우리를 복지(국가)로부터 더욱 멀리 떨어지게 할 뿐이다. 어쩌면 그것이 청와대와 새누리당이 (처음부터 의도한 것은 아닐지라도) 바라는 것일지 모른다.

(계속)

지하경제 양성화, 두 번째 이야기: ‘국민행복’에 반하는 지하경제양성화

◯ 주지하다시피 현재 ‘지하경제양성화’는 복지재원 확보라는 목적 아래 추구되고 있다. 그런데 사태를 좀 더 깊이 들여다보면 이것은 ‘국민 행복’, 다시 말해 ‘개인의 행복 추구’라는 박근혜 당선자 측의 핵심 모토에 정면 배치됨을 발견할 수 있다(박근혜 등에게 있어 ‘국민 행복’의 의미에 대해서는, 앞서 작성된 “‘근혜노믹스’의 밑그림” 씨리즈 참조).

부분적으로는 앞서 heesang님의 덧글에서도 지적된 대로(링크), 지하경제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그 ‘존재이유’가 있다. 즉 어떠한 거래행위라도, 그것이 양성적으로 이뤄지든 음성적으로 이뤄지든 상관없이, 그것이 실제로 행해지는 이상 그 당사자들에게 일정한 ‘편익'(benefit)을 제공한다는 얘기다. 주류경제학의 용어를 빌면, 지하경제는 파레토개선 효과가 있고, 그런 한에서 지하경제의 존재는 좋은 것이다.

흔히 지하경제라는 말에는 뭔가 부정적인 이미지가 있는데, 위와 같은 사정을 염두에 두면 꼭 그렇게 볼 것만은 아니다. 그래서 서양에서는 ‘지하경제'(underground economy 또는 shadow economy) 대신 ‘인지되지 않은 경제'(unrecognised economy)라는 용어를 쓰기도 한다. 아래서 보겠지만, 여기엔 온갖 좋은 것들도 많이 들어갈 수 있다. 동네 눈길 치우기, 대학생 과외, ‘아.나.바.다’ 등등.

그런데 만약 지하경제가 위와 같은 것이라면, 그것을 굳이 ‘양성화’할 필요가 있을까? 중요한 것은 어떤 거래가 양성적이냐 음성적이냐가 아니라 그것이 실제로 행해지고 있다는 것이고, 나아가 그러한 거래로부터 거래 당사자가 (적어도 그러한 거래가 없을 때에 비해) 이익을 보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지하경제를 좀 더 공식화해서 더 효율적으로 만들자는 얘기는 할 수 있어도, ‘양성화’하자는 것은 좀 이치에 안 맞는다. 거꾸로 말하면, 이미 음성적으로 매우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는 어떤 거래를 ‘양성화’한다는 것은, 거래 당사자들에게 이익을 준다는 것이 아닌, 다른 어떤 목적이 있다고 봐야 한다. 물론 우리는 그 ‘목적’이 뭔지를 안다. 바로 ‘세원 확보’다. 그런데 문제는 그러한 과정(양성화)에서 동시에 ‘개인 행복’이 줄어든다는 것이고, 바로 그러한 한에서 ‘지하경제양성화’는 ‘국민 행복’이라는 박 당선자의 핵심 기조에 반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 몇 가지 사례를 들어서 따져보면 이해하기가 쉽다. 먼저 지하경제양성화의 첫 번째 타겟으로 나온 ‘가짜석유’ 문제에 대해 생각해보자. 가짜석유가 유통되는 것이 왜 나쁜가? 각종 부수적인 부작용들이 있긴 하지만, 결국 가짜석유라는 것도 그 판매자와 구매자 모두에게 상당한 편익을 제공하는 상품 아닌가? 정부의 입장에서야 물론 가짜석유에 대해서는 세금을 매길 수 없다는, 그야말로 매우 중요한 단점이 있지만, 개인 입장에서야 대체 뭐가 문제란 말인가? 만약 가짜석유 시장과 진짜석유 시장이 정확히 나뉘어있고 또 각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권이 보장된다면, 개인은 자신이 선호하는 쪽에서 소비를 하면 그만이다. 가짜석유 사용에서 야기될 수 있는 부작용들을 감수하고 값싼 비용으로 석유를 이용하고자 한다면 전자를 택할 것이고 이 부작용이 두렵다면 후자를 택할 것이다.

사정이 이런데도 정부가 나서서 ‘지하경제양성화’를 명목으로 그들이 ‘가짜석유’라고 규정한 재화를 시장에서 근절한다면, 이는 결과적으로 ‘진짜석유’에 비해 ‘가짜석유’를 선호하는 소비자들의 선택을 제한하는 것이며, 이때 그들의 편익, 즉 ‘행복’은 줄어든다. 요컨대 이러한 개개인들의 선택권이 보장될 때 ‘국민 행복’은 극대화될 것이며, 사실 바로 그것이 주류경제학의 가르침이다.

두 번째로, 성형외과에서 쌍꺼풀 수술을 하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최근 의사나 변호사를 포함한 고소득 전문직/자영업자이 언론의 집중포화를 맞고 있고, 이때 그들이 저지른 주요한 ‘죄목’은 바로 ‘소득신고 누락에 이은 탈세’다. 박근혜의 인수위원회의 생각은 바로 그러한 누락된 소득을 잡아내(=지하경제를 양성화해) 세수를 늘리자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그게 끝일까? 꼭 쌍꺼풀 수술을 해보지 않으신 분들도, 병원에 가면 소비자에게 ‘현금으로 하겠느냐 카드로 하겠느냐’라는 선택지가 주어진다는 것쯤은 아실 것. 당연히 현금으로 할 때가 싼데, 흔히 사람들은 그 까닭이 자신이 현금으로 지불하면 카드수수료를 아낄 수 있기 때문에 더 싼 것이라고 알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카드수수료보다 더 중요한 게 바로 세금이다. 즉 위 선택지의 의미는 ‘현금으로 지불해서 나의 탈세를 도와주면 그 대가로 나는 너에게 쌍꺼풀 수술 비용을 깎아주겠다’라는 것에 다름 아니다. 따라서 의사 입장에서는 대체로 현금 거래를 선호할 것인데, 그렇다면 소비자도 그러한가? 꼭 그렇지는 않다. 일반적으로는 현금거래가 선호되겠지만, 당장 현금조달이 어려운 소비자로서는 카드로 지불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지하경제의 양성화란 바로 이러한 선택지가 소비자에게 주어지지 않음을 의미한다. 이제 모든 소비자가 자신의 선호와 관계없이 카드지불가격을 치러야 한다. 소비자의 행복? 애초부터 카드로 지불하고자 했던 사람은 상관없겠지만, 현금지불을 선호했던 소비자의 행복은 줄어든다.

하지만 문제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상과 같은 ‘양성화’의 결과 성형외과 의사 입장에서는 실질적으로 수입이 줄어들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어떤 일이 벌어질까? 당연히 가격이 오른다. 어차피 그들은 일정한 ‘독점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가격 결정권도 가지고 있다. 가격이 오르면 소비자의 행복은 더 줄어든다.

마지막으로, 지하경제양성화는 어쩌면 저들도 의도치 않았던 결과까지 낳을 수 있고, 그 과정에서 ‘국민 행복’은 더욱 훼손될 수 있다. 이상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흔히 지하경제에는 마약이나 가짜석유 거래의 경우와 같은 ‘범죄’로 분류되는 거래행위들과 성형외과 의사나 동네 분식집 아줌마 등이 일상적으로 행하는 ‘탈세’ 등이 포함된다. 그런데 지하경제에는 이를테면 인터넷 중고장터에서 이뤄지는 거래도 경우에 따라서는 포함될 수 있다. 지하경제를 ‘양성화해야 한다’라고 하는데, 대체 인터넷 중고장터를 양성화한다는 게 무슨 뜻인가? 아니, 왜 그것을 ‘양성화’해야 하는가??? 하여간에… 바로 이런 사정 때문에 ‘지하경제’의 정의(definition)가 명확하지 않은 것인데, 바꿔 말하면 ‘지하경제’에 대하여 제기하는 문제(여기에서는 ‘세수확보’)가 무엇이냐에 따라 그 범위를 상이하게 설정할 수 있다는 거다.

설명을 쉽게 하기 위해 또 예를 들어보자. 중고차 거래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등록된 업체를 이용할 수도 있고 직거래를 할 수도 있다. 중고차를 팔고자 하는 A가 중고차 매매업자에게 자신의 차를 200만원에 팔 수 있다고 하자. 이때 매매업자는 같은 차를 B에게 300만원에 판다. 이때 그는 100만원의 사업소득을 남기고 이 중에서 일정액을 세금으로 낸다. 반면 직거래의 경우 A는 자신의 차를 예컨대 250만원에 B에게 팔 수 있을 텐데, 이때 둘은 업자를 거칠 때에 비해 각각 50만원씩의 이익을 더 본 셈이고, 정부는 어떠한 세수도 올릴 수 없다.

후자와 같은 물물교환 시장이 대한민국의 한켠에서 매우 발달되어 있다. 네이버 ‘중고나라’ 카페에 가 보시라. 사람들은 이 시장에 참여해 각자 원하는 가격에 물건을 주고받음으로써 결과적으로 자신들의 편익 즉 ‘행복’을 극대화하고자 한다. 위의 예에선 250만원이 그러한 가격이다.

그런데 이때 ‘국민 행복’의 극대화를 위해 과감한 복지정책을 펼치고자 하는 ‘자애로운’ 정부가 들어섰다고 해보자. 문제는 돈이 없다는 것인데, 그러나 역시 ‘국민 행복’을 위해 이 정부는 ‘증세’는 절대 불가하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다. 결국 이 훌륭한 정부가 고안해낸 방법은 ‘지하경제양성화’다. 즉 공식적으로 인지되지 않은 경제활동영역을 ‘공식화’함으로써 그로부터 세금을 받아내겠다는 것이다. 이런 기조 아래 이 정부는 불법적으로 발달해 있는 가짜석유시장도 없애고, 의사나 변호사는 물론 동네 분식집 등에서 성행하고 있는 현금거래를 근절했다. 하지만 그랬는데도 돈이 모자란다. 어떻게 할까? 이제 저 물물교환 시장에서 이뤄지는 거래에 눈을 돌린다. 저것도 경제행위가 아닌가? 그들에게 세금을 물려야 한다. 어떻게? 이를테면, 중고거래업을 활성화함으로써! 뭐, 요샌 협동조합이 붐이니까, 중고물품거래 협동조합을 활성화해도 되겠다. 이제 판매자는 자신의 물건에 대해 종전보다 낮은 가격만을 받을 수 있고, 구매자는 종전보다 높은 가격을 치러야 한다. 이 두 가격의 차액은 중고거래업자의 이윤과 정부의 세금으로 나뉠 것이다. 복지재원은 늘었지만, 어째… 사람들이 더 행복해진 것 같지는 않다. (-_-)

 

◯ 이상에서 보듯, 지하경제양성화는 이미 그 지하경제에 참여하고 있던 이들의 ‘행복’을 침해하는 경향이 있고, 만약 지하경제양성화를 통해 일말의 ‘세수증대’를 꾀할 수 있다면 이는 그렇게 줄어든 ‘국민 행복’이 화폐화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결국 지하경제양성화로 조성한 재원으로 행해지는 복지란, 한쪽 주머니에서 빼앗은 돈으로 다른 쪽 주머니를 채워주는 것에 다름 아니다. 물론 이때 정확히 같은 금액이 빠졌다가 되들어오는 것이라면 그나마 낫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러는 과정에서 일정한 ‘비용’이라는 게 발생하지 않을 수 없고(다양한 행정비용, 횡령, 뇌물 등), 그 비용만큼 줄어든 금액만이 다른 쪽 주머니로 돌아올 것이다. 그러니 이것은 복지도 뭣도 아니다!

나는 앞서 글에서 지하경제양성화란 ‘재벌증세 없는 보편증세’라고 했는데, 이상의 사정을 고려하면 더더욱 그렇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앞에서 ‘재벌증세 없는 보편증세’라고 한 것은, 지하경제양성화가 결과적으로는 (1) 재벌을 제외한 부자들(의사, 변호사, 대형식당주인 등)의 주머니를 턺으로써, 나아가 (2) ‘부자’도 아닌 ‘그냥’ 자영업자의 쌈지돈을 갉아먹음으로써만 ‘세수 확보’를 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금 보듯이, 지하경제양성화란 (다양한 유형의 재화/서비스 공급자뿐 아니라) 불특정 다수의 선량한 일반 소비자들의 주머니까지 털어가는 것이 아닐 수 없다. 여기엔 가짜석유를 소비하는 준범죄자만 포함된 게 아니라, 쌍꺼풀이 없으면 취업이 불가능해 어쩔 수 없이 성형외과의 문을 두드리는 대기씨와 조금이라도 아껴서 살림살이 꾸려가려는 영순씨 같은 보통의 우리 이웃들도 포함된다.

다시, 해답은 재벌과 부자에 대한 대대적인 증세뿐이다. 그것에 의거하지 않은 복지는 복지가 아니다. (끝)

[사족 1] 이상의 내용은 매우 rough하게 작성된 것이다. 즉 논란점이 없는 건 아니다. 예컨대 중고시장에서 직거래를 하는 것보다 중고거래업자가 존재하는 것이 사회적으로 더 나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이른바 ‘거래비용'(transaction cost)가 낮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이런 얘길 길게 할 수는 없고, 다만 내가 이런 사항들을 고려하지 않은 것은 아니란 뜻에서 남겨둔다ㅋ

[사족 2] 이미 눈치채신 분들도 계시겠지만, 이상의 내용은 ‘주류경제학’의 논리에 크게 기댄 것이다. 따라서 나의 ‘진심’이랑은 약간 거리가 있지만, 주류경제학을 금과옥조로 떠받들고 계시는 분들이 ‘지하경제양성화’를 무분별하게 부르짖는 것은 문제가 아니냐는 생각에 한번 써봤다. ㅎㅎ

‘근혜노믹스’의 밑그림 (3) ‘국민 행복’의 현실적 의의

5. 물론 박근혜 당선자 등이 단순히 자신들의 ‘이론적 입장’ 또는 ‘지적 한계’ 안에 갇혔기 때문에 자기들도 어쩔 수 없이 ‘국민 행복’을 들고 나오는 것은 아니다. 어쩔 수 없음으로만 친다면야, 그러한 한계보다는 현실의 강제가 더 중요한 요소다. 어쨌든 ‘국민 행복’이 처음엔 그러한 한계의 산물이었는지 몰라도 일정한 임계점을 지나면 그것은 계산된 ‘의도’에 의해 조장되고 조정된다. 즉 그것은 이른바 ‘이데올로기화’하는 것이다. 이것은 이전의 위기극복 시도들, 즉 케인스주의나 신자유주의도 겪었던 과정이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국민 행복’의 의미가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살펴보면, 그러한 조장과 조정의 증거를 어렵지 않게 잡아낼 수 있다.

이와 관련, 우리는 국내의 대표적인 보수 일간지를 통해 유포되어 한동안 인기를 끌었던 ‘자본주의 4.0’이라는 담론을 한번 떠올려봐도 좋겠다. 요새는 (특히 미디어계 안에서는) 시간이 너무 빨리 흘러, 이미 ‘자본주의 4.0’에 대해 잊어버린 분들도 많으시리라. 이분들을 위해 잠시 ‘자본주의 4.0’에 대한 기억을 되짚어보자.

‘자본주의 4.0’이란 말 그대로 ‘4세대 자본주의’를 말한다. 19세기에 걸쳐 유럽을 중심으로 발달하고 산업혁명이라는 용어와 이미지로 기억되는 ‘자유방임 자본주의’가 제1세대라면, 케인스주의적 정책 패러다임에 입각해 정부가 적극적인 역할로써 번영을 주도하던 ‘수정 자본주의’가 제2세대다. 그렇다면 제3세대 자본주의, 즉 ‘자본주의 3.0’은 그 이후에 출현했던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될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이는 기존의 케인스주의적 모형이 봉착한 한계를 ‘금융화’와 ‘작은정부’론으로 극복하고자 했지만, 오늘날 우리가 목격하고 있듯 그것은 한때 바로 그러한 자신의 ‘성공’을 낳았던 특징들 때문에 돌이킬 수 없는 위기를 겪고 있는 중이다.

결국 ‘자본주의 4.0’이란 바로 위와 같은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를 극복하자는 취지에서 제안된—박근혜의 ‘국민 행복’과 마찬가지로—것이다. 신자유주의에 그 어떤 장점이 있다손 치더라도 그것이 몇 가지 심각한 결과들, 예를 들어 소득과 부의 양극화, 일자리의 비정규직화/불안정화, 엄청난 규모의 금융시스템적 취약성, 모든 경제주체들(가계, 기업, 정부)에 있어 부채의 급증 등을 낳았다는 데는 정치적 입장을 막론하고 이견의 여지가 없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문제들을 극복하기 위해 제안된 ‘자본주의 4.0’은 마치 어머니의 손길 같이 따뜻한 자본주의여야 할 것이다. 제안된 시기나 표현은 조금씩 다르지만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나 ‘박애자본주의’, ‘사회책임경영’ 등도 비슷한 취지를 담고 있다.

‘어머니의 손길과 같은 따뜻한 자본주의’—바로 박근혜 당선자와 ‘자본주의 4.0’이 연결되는 지점이다. 물론 그는 한 번도 (적어도 알려진 한에서는) ‘어머니’였던 적은 없었으며 그런 이미지는 순전히 자신의 어머니의 모습을 그가 가상적으로 복제함으로써만 그에게 덧씌워질 수 있었다. 하여튼 보수주의자 박근혜 및 그 측근들이 소득 재분배와 복지를 입에 올리고 심지어 상행위의 자유를 일정 정도 제한할 수 있다는 식의 태도를 취하는 것, 다시 말해 신자유주의의 폐해를 인정하고 그것을 제한할 수도 있다는 태도를 보인 것은 언뜻 봐서는 매우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6. 요컨대 ‘어머니의 손길과 같은 따뜻함’을 복지와 경제민주화로 구체화시켜 궁극적으로 ‘국민 행복’을 이뤄내겠다는 것이 후보시절 박근혜 캠프가 내세웠던 바였다.

그러나 한번 잘 생각해보자. 과연 복지(여기서는 전면적인 복지, 즉 ‘복지국가’)나 경제민주화가 ‘국민 행복’이라는 틀로 포괄이 가능한 것인가? 앞에서 언급했던 이론적 틀에 입각해 말하면, ‘국민 행복’이란 철저한 ‘개체주의’에 입각해 있는 반면 복지국가나 경제민주화는 누가 뭐래도 하나의 국민경제의 재생산구조의 문제다. 즉 그것은 ‘사회’에 대한 문제이고 ‘구조’에 대한 문제이다. 곧 보수적인 지배계급들이 볼 수 없는 차원, 또는 애써 건들지 않으려는 차원의 문제란 얘기다. 이렇게 보면, ‘경제민주화론자’로 알려진 김종인이 왜 박근혜 캠프 안에서 다른 시장주의자들과 그토록 반목했는지, 왜 김종인이 ‘박근혜 캠프 안에서 경제민주화를 이해하는 자가 하나도 없다’라고 틈만 나면 성토했는지가 감이 잡힐 것이다. 하지만 그가 겪었던 문제의 시발점은, 경제의 구조 전반을 개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경제민주화론자가 ‘국민행복추진위원회’라는 기이한 모임의 대표 자리를 받아들였다는 데 있다. 누구를 탓하고 누구를 원망하겠는가?

‘국민 행복’은 일반적 의미에서의 복지나 경제민주화와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얘기다. 먼저, 박근혜가 ‘국민 행복’을 내세우는 한 그는 경제민주화를 이룰 수 없다. 후보마다 의견이 조금씩 다르기는 했지만, 지난 대선 과정에서 경제민주화의 핵심으로 공통적으로 강조되었던 두 가지가 바로 대기업 내부의 지배구조 문제와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의 관계 문제였다. 물론 선거에서 주축을 이뤘던 박근혜-문제인 구도에서 벗어나는 후보들, 특히 김소연, 김순자 등은 진정한 경제민주화란 재벌개혁으로 축소될 수 없음을 역설했지만, 적어도 경제민주화를 재벌개혁 수준에서만 파악하더라도 거기엔 ‘구조’에 대한 문제의식이 살아있다고 봐줄만했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요즘, 즉 박근혜 후보가 당선된 뒤에, 정권인수위원회 차원에서 경제민주화라는 단어가 거의 발언되지 않고 있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재벌개혁은 몇몇 만만한 기업총수를 겁주는 선에서 봉합되고 있는 듯하고(지금까지 희생양으로 선택된 것은 한화 김승연과 SK 최태원. 그마저도 김승연은 이제 풀려난 거나 마찬가지다), 대기업-중소기업 간의 구조 문제는 중소기업에 대한 자금지원 원활화의 차원으로 축소되고 있는 듯하다. 어차피 있으나마나한 전경련을 해체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면서 중소기업협회를 방문해 고개를 조아리는 당선자의 제스처. 이 모든 것이 겨냥하는 것은 ‘경제민주화’가 아니라 ‘국민 행복’, 즉 이 맥락에서는 ‘중소기업주의 행복’이 아닌가.

(그렇다고 해서 이 과정이 대기업에게 불행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 대목이 매우 중요한데, 왜냐하면 만약 문재인이 당선되어서 현재 박근혜가 하고 있는 것과 똑같은 일을 벌이고 있었더라면, 그는 분명 재벌로부터 엄청난 저항을 받아야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문재인이 전경련 해체해야 한다고 했었더라면, ‘이것은 재벌에 대한 선전포고다’라는 선언이 벌써 나왔을 것이다. 물론 전경련 해체가 재벌에게 주는 피해는 거의 없다. 어차피 거기 회장, 아무도 안 하려고 한다. 개인적으로 나는 전경련 같은 친목단체에 국가가 나서서 해체해라 마라 하는 것 자체가 웃긴다고 생각한다.)

 

7. 복지는 또 어떤가? 주지하다시피 박근혜 복지의 특징은 선별적이라는 데 있다. 왜 그들은 보편복지 대신 선별복지를 주장하는가?

흔히 선별복지를 주장하는 쪽에서는 비용문제를 거론한다. 즉 보편복지에는 돈이 많이 들고, 아직 우리나라는 그것을 시행할 여력이 없다는 거다. 반대로 보편복지를 주장하는 쪽에서는 (지난번 ‘무상급식’ 논란에서도 나타났듯이) ‘낙인이론’이 거론되곤 한다. 그러나 내가보기엔 둘 다 틀렸다. 낙인은 보편복지를 해도 찍히고, 비용으로 치면 (규모의 경제 등을 무시하고 기회비용을 고려하면) 효과가 같으면 비용도 같다. 예컨대 경제수준에 따른 등록금 차등화와 부자증세를 통한 반값등록금제는 결국 같은 것이 아닌가.

(등록금 차등화의 경우, 오히려 순기능도 있다고 본다. 가장 중요한 것이, 이 제도를 제대로 시행하기 위해서는 가계소득 및 자산/부채조사가 철저히 이뤄져야 한다는 것인데, 만약 그런 조사가 제대로 이뤄지기만 한다면 여러가지 쓸모가 있을 것이다. 금융실명제를 크게 능가하는 것이 될수도 있다. 특히 그런 조사는, 지하경제양성화라는 박근혜 측의 기조와도 맞기 때문에 야당이나 시민사회 쪽에서는 강력하게 ‘철저 조사’를 압박할 수 있을 것이다.)

선별복지와 보편복지의 가장 핵심적인 차이는, 이미 지금까지 논의의 진행을 통해 상당히 명확해졌듯이, 전자는 ‘개인’에 초점을 둔 시스템인 반면 후자는 ‘사회’에 대한 문제제기에 입각한 시스템이라는 데 있다. 후자는 이 사회엔 소득과 부의 양극화, 그리고 각종 사회적 병리현상들이 만연해 있으며 그런 문제들은 사회의 전체 메커니즘에 의해 재생산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이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경제/사회시스템 전반에 걸친 리디자인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입각해 있다. 반대로 ‘선별적 복지’는 위와 같은 병리현상들은 몇몇 개인들이 (부모로부터든, 공동체로부터든) 적절한 보살핌을 받지 못해 겪는 불행이라는 생각 위에 서 있다. 이들 몇몇 불행한 이들(레 미제라블!)과는 달리 다른 모든 이들은 나름대로 행복하게 잘 살고 있으며, 법률이 정하는 범죄를 그들이 저지른 것이 아니라면 그들은 그들의 이웃이 겪는 불행에 책임을 질 필요는 없다. 따라서 국가가 나서서 불행한 이들을 도와야 하며, 흔히 ‘복지’라고 하는 게 바로 그 수단이다. 요컨대 이 사회에 살고 있는 불행한 이들에게 선별적으로 복지를 제공함으로써 그들에게 ‘행복’이 뭔지를 알게 해 주자. 이것이 바로 박근혜식 복지다.

그런데 이런 식의 복지는 사실 그다지 새로울 게 없다. 왜냐하면, 만약 복지가 그런 것이라면 이미 우리나라도 복지국가라고 보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어리석은 국민을 돌봐주는 국가, 그리고 그 국가의 수반, 국민의 아버지! 박정희! 그의 딸, 박근혜! 권위주의!! 복지 얘기가 많아지니까 ‘복지 경험’이라는 용어도 생겼는데, 그런 측면에서 생각해보면: 보편복지 하에서 복지경험은 사회적 연대의식에 기반해 있고 또 그것을 증진시킬 것이지만, 선별복지 하에서 복지 경험은 ‘국가에 대한 고마움’만을 낳을 것이다. 각하 만세! 박근혜의 복지, 박근혜의 ‘국민 행복’은 그래서 경제민주주의하고는, 나아가 민주주의 일반과는, 그래서 우리 중 몇몇이 건설하고자 하는 ‘복지국가’하고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계속)

‘근혜노믹스’의 밑그림 (2) ‘국민 행복’의 이론적 의의

3. 근혜노믹스의 핵심을 ‘국민 행복’으로 정의한다는 것은, 단순히 수사적이거나 향후 상황전개에 대한 정치적 책임을 피할 구실을 마련한다는 의미만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여기엔 매우 뿌리깊은 보수파의 ‘입장’이 깃들어있다고 보는 것이 옳다.

그 입장은 경제학에 고질적인 ‘개체주의'(individualism)와 관계가 깊다. 주지하다시피 스미스에 의해 집대성되었고 리카도에 의해 (부르주아적으로) 완성된 고전정치경제학에서 주인공은 ‘개인’이다. 흔히 이 대목에 이르면,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개인’과 ‘사회’를 대립시켜, 전자를 강조하면 속류/(신)고전파, 후자를 강조하면 과학/마르크스파라고 여기고자 하는 유혹에 빠지곤 하는데, 엄밀히 말하면 꼭 그렇진 않다. 마르크스가 비록 ‘사회’를 강조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그가 ‘개인’을 중심으로 한 논의를 싸잡아 부정한 것은 아니다. 다만 그는 그러한 논의들이 개인을 ‘사회의 산물로서’ 다루지 않고 ‘사회로부터 동떨어진 개인’으로 취급하는 것을 비판했을 뿐이다. 실제로 마르크스 자신 또한 {자본론} 등에 ‘대표적 개인'(representative individual)을 등장시키곤 하는데, 사실 이것은 그가 강조하는 ‘추상화’의 중요한 기법이다(물론 마르크스의 ‘대표적 개인’은 부르주아 사회과학의 ‘대표적 개인’이랑은 크게 다르다. 후자는 일반적으로 이성적 능력만을 갖는 텅빈 개인이지만, 전자는 만약 그것이 텅비어있다면 이는 오직 단계적인 추상과정의 필요에 의해서만 그런 것이며 이후 서술과정을 통해 채워넣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마르크스가 보기에 스미스나 리카도를 포함하는 18-19세기 유럽 선진국들의 사회사상가들, 정치경제학자들은 ‘개인’을 다루면서도 위에서와 같은 구별을 명확히 인식하지 못했다. 이는 나중에 정치경제학이 속류화하는 빌미가 되기도 한다. 즉 마르크스에 따르면 고전파경제학에서는 ‘사회의 산물로서의 개인’이라는 관점과 ‘동떨어진 개인’이라는 관점이 혼재되어 있었던 데 반해 속류경제학에서 개인은 오로지 후자의 측면에서만 고찰된다. 말하자면, 마르크스에게 고전정치경제학은 딱 그 만큼 과학적이었던 것이고, 속류정치경제학은 딱 그런 의미에서 일말의 과학성도 담보하지 못한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이 문제는 이미 이 블로그에서 다룬 적이 있다(링크). 링크된 글에서 말하는 ‘사회’ 관점이 비록 마르크스에 의해 꿋꿋하게 견지되었던 반면 리카도에서 밀(J. S. Mill)을 포함한 경제학의 ‘주류적’ 전통에서는 점점 희미해져 갔다. 그러나 ‘사회’ 관점이 단순한 ‘시점’의 문제가 아니라 현대세계 특유의 물적 현실을 포착하는 것인 한, 속류경제학이 보지 못한다고 해서 그것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주류적 전통 내에서도 ‘사회’ 관점은 어떤 식으로든 ‘재발견’될 수밖에 없었는데, 바로 1930년대부터 본격화한 이른바 ‘케인스주의 경제학’의 출현이 그 결과물이었다. 물론 사태가 이렇게 된 것은 당시의 경제위기 속에서 ‘구조’에 대한 문제의식을 떨쳐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불행히도, 그렇다고 해서 경제학이 그 특유의 속류성을 버린 것은 결코 아니었지만 말이다.

결국 앞서 박근혜를 포함한 보수파의 뿌리깊은 ‘입장’이라고 부른 것은 바로 위와 같은 속류성, 곧 ‘사회’ 내지는 ‘구조’를 이론적으로 무시하는 태도에 다름 아니다. 말할 것도 없이 그러한 태도는 단순히 ‘이론’의 영역에만 머무는 게 아니고, 박근혜의 각종 정책들로 구체화되어 현실적이고 실천적인 차원에서까지 재현된다. 바로 ‘국민 행복’이라는 캐치프레이즈 아래서 말이다.

 

4. 위와 같이 보면, 박근혜가 ‘국민 행복’을 들고 나왔다는 것은 결코 놀랄 일이 아니며, 또 그와 유사한 선례가 없는 것도 아니다. 아마 가장 비근한 예가 이명박의 ‘공정사회’론이고, 비슷한 시기에 영국의 보수정권에서 주창된 ‘빅 소사이어티’가 아닐까 한다(다음 글 참조: 링크). 물론 이러한 입장의 직접적 원류는 오늘날 ‘신자유주의’라고 불리게 된 정책 패러다임을 가지고 기존의 ‘케인스주의’의 위기를 (나름대로) 극복하려고 했던 쌔처(Margaret Thatcher) 등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 신자유주의가 오늘날 위기를 맞았고, 우리는 그 대안으로 박근혜 버전의 ‘국민 행복’을 눈앞에 두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매우 자연스럽게 이런 의문이 제기된다: ‘박근혜 등의 “국민 행복”이 쌔처의 “사회따위는 없다”(There is no such thing as society)와 판박이라면, 그들은 신자유주의를 가지고 신자유주의를 극복하려 한다는 것인가?’ 겉으로 보기엔 모순 그 자체인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매우 단호하게도 ‘그렇다’이다. 무슨 얘기냐면, 오늘날 세계를 지배하는 세력들은 그들이 갇혀 있는 지적 한계 안에서만 자신들의 문제를 인식하고 또 그 해결을 구한다는 점이다.

(계속)

‘근혜노믹스’의 밑그림 (1) 왜 ‘국민 행복’인가?

0. 기가 막히게도, 박근혜가 제18대 대한민국의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많은 이들이 허탈했을 테지만, 괜히 유치하게 ‘멘붕-힐링 놀이’따위에 시간을 더이상 허비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저들은 이미 ‘박근혜 시대’를 어떻게 만들어갈 것인지에 대한, 꽤 치밀하게 준비된 비전들을 속속 내놓고 있기 때문이다.

자, ‘박근혜 시대’, 어떤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올까? 나는 뭐 경제학을 하는 입장이니까, 다른 것은 모르겠고, 그냥 경제(학)적인 측면에서 생각을 조금 풀어보겠다.

박근혜 시대 경제정책을 특징짓는 키워드 하나만 꼽아보라면 나는 ‘국민 행복’을 택하겠다. 나는 이 표현 속에 ‘근혜노믹스’의 모든 것이 함축되어 있다고 감히 단언한다.

 

1. 내가 감지하고 있는 한 시초(beginning)는 아마도 ‘국민행복추진위원회’였던 것 같다. ‘도대체 이 뚱딴지 같은 이름은 뭔가?’ 박근혜 당선자가 김종인이라는 사람을 데려와서 ‘국민행복추진위원장’이라는 야릇한 직함을 맡겼을 때, 내가 했던 생각이다. ‘이런 ㅆㅂ, 사람들이 죽겠다고 아우성인데, 어디서 행복타령이냐?’ 이런 생각도 했다.

아닌 게 아니라 ‘행복’을 전문적으로 연구한다는 어떤 학자는 “박근혜의 행복 추진은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다”고 혹평을 하기도 했고(링크), 선거가 끝난 뒤 (특히 노동자들이 잇따라 자살하자) 많은 매체에서는 박근혜의 행복은 곧 국민의 불행이라는 성토가 난무했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듯이, 그 ‘행복타령’이 먹혀들었고, 박근혜는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가 말하는 ‘국민 행복’의 실체가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2. 박근혜가 말하는 국민행복이란 무엇인가? 무릇 경제학에서는, 국민소득과 같은 ‘경제적 지표’로는 삶의 전반적인 질을 나타낼 수 없다는 깨달음에 도달했을 때 비로소 ‘행복’에 주의를 돌린다. 인간이란 행복을 추구하는 존재인데, 돈을 좀 벌어보니 꼭 돈이 많다고 해서 행복한 게 아니더라는… 뭐 그런 스토리다.

그러니까 물질적 풍요는 일정 정도 누리고 있지만 오히려 사람들은 육신의 배고픔과는 다른 그 어떤 빈곤에 시달리고 있을 때, 즉 버젓한 직업과 단란한 가정이 있지만 여전히 자신의 삶의 주인이 되지 못하고 있을 때, 자살자가 넘쳐나고 온갖 반사회적 범죄가 여전히 횡행할 때…! 비로소 ‘행복’이라는 것이 경제학적으로 유의미하게 다가오는 법이다. 앞에서 내가 어리둥절했다고 말한 것도 그래서다. 지금은 ‘행복’을 추구할 때가 아니라 최소한의 ‘생존’을 확보해야 할 때이니까. 아니, 집값 떨어져서 몰락한 가장에게 빚을 탕감해주면서 ‘행복 자금’이라고 하는 건 좀 웃기지 않은가.

더구나 박근혜 아닌가? 그는 ‘성장주의자’ 박정희의 딸이다. 그리고 그의 주변은 ‘여전히 우리는 분배보다는 성장에 목마르다’라는 고백을 서슴지않는 자들로 넘쳐난다(링크). 이런 자들이 왜 ‘행복’을 입에 담는가? 오히려 그들은, ‘행복이니 복지니 분배니 하는 것들, 그저 복에 겨워서 내뱉는 소리다. 그리스 안 보이나? 우리는 더 성장해야 한다,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라고 해야하지 않느냐는 거다.

하지만 굳이 이해를 하자면 못할 것도 없다. 아마도 가장 손쉬운 방법은 ‘수사적 차원’에서 이해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간단히 말해, 박근혜와 그 측근들은, 사람들이 흔히 ‘복지’라고 말하는 것을 그냥 ‘국민 행복’이라고 표현하는 것뿐이라는 거다. ‘복지’라는 표현이 흔히 ‘좌파적’ 색채로 덧칠되어 있으니, 그들이 이런 표현에 일정 정도 불편함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이해할 만하다. 실제로 요즘 돌아가는 꼴을 보면, ‘복지’가 있어야 할 곳에 ‘국민 행복’만이 난무한다.

그러나 전체적인 경제정책의 기조로서 ‘국민 행복’이 ‘복지’를 (완전히는 아니지만) 대체하는 것은 단순히 보수파—특히 한국의—가 갖는 ‘복지 알러지’ 때문만은 아니다. ‘복지’ 대신 ‘국민 행복’을 썼을 때 얻을 수 있는 매우 훌륭한 이점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후자가 전자에 비해 그 실체가 애매모호하고 측정도 어렵다는 점에서 행여 나중에 ‘실패’하더라도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기가 훨씬 쉽다는 게 아닐까 한다. 이렇게 보면, 박근혜 캠프는 (애초 의도와 상관없이) 매우 훌륭한 캐치프레이즈를 만든 것이고, 나아가 박근혜 아닌 문재인이라 해도 가능만 하다면야 ‘국민 행복’을 선호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계속)

이른바 ‘시민 증세운동’ 비판

며칠 전 경향신문에서 오건호 박사의 글을 따로 뽑아놓았다가 조금 전에 읽었다. 여기서 그는 ‘시민’이 주체가 된 ‘복지국가 운동’을 제안하고 있는데, 꼭 이 글 때문만이 아니라 최근 이와 비슷한 움직임이 곳곳에서 감지되기 때문에 약간의 코멘트를 남겨둔다.

내가 이 글에서 특히 문제삼는 부분은 다음 대목이다. (하지만 글 전체로 보면, 부분부분 수긍 가는 것도 많다.)

복지 확충을 위한 시민 증세운동을 펴자. 시민들은 세금에 대해 두 가지 복합 감정을 지니고 있다. 세금 쓰임새에 대한 불신에 따른 조세 저항과 복지 확충을 위한 증세 불가피성이다. 지금까지 저항만이 강조돼 왔고, 증세는 다음 일로 간주돼 왔다. 당연히 재정지출, 과세형평성 개혁에 박차를 가해야겠지만 이제는 복지국가를 향한 증세도 본격적으로 이야기해야 한다.

언뜻 보면 맞는 얘기 같다. 그런데 여기엔 다음과 같은 문제가 있다.

1. 그가 말하는 ‘시민’이 누구인지가 불분명하다. 예컨대 그가 말하는 시민에는 삶의 재생산이 불가능할 정도의 저임금에 시달리는 다양한 형태의 비정규직 노동자도 포함되는가? 그렇다면 그는, 이러한 노동자들에게도 “스스로 일어나 자발적으로 세금을 더 내라! 그리고 주인이 돼라!”라고 말하는 건가?

오건호 선생이 내가 잘 모르는 동안 정신이 어떻게 된 게 아닌 이상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시민이 아니라고 할 분은 아니라고 본다. 하지만 십분 양보해서 말하더라도, 다양한 비정규직 노동자들 중에서도 특히 최저임금에도 못 미치는 임금을 받는 노동자들에겐 세금으로 낼 돈이 없는 게 당연하다. 대체 무슨 수로 이들에게 “스스로 세금을 내서 복지를 누리자!”라고 설득할 것인가? 그들은 세금을 내야 하는 게 아니라, 아무 것도 내지 말고 그냥 더 받아야 한다.

이와 같이 ‘시민 증세운동’은 현실적으로 성립 자체가 안 되는 기획이거나, 설령 그것이 성공한다 하더라도 필연적으로 그것은 비정규직 노동자 등을 사회적으로 배제하는 기획일 뿐이다. 하지만 ‘비정규직 노동자’를 주체로 세울 수 없다면, ‘시민이 주체가 되자’라는 구호가 대체 무슨 소용인가??

2. 지금은 ‘시민이 세금을 내라’가 아니라 ‘재벌과 부자가 세금을 내라’가 답이다. 그런데 문제는 박근혜가 당선된 뒤 부자와 재벌 쪽에서 일정한 ‘협조 기류’도 감지된다는 것. 즉 부자와 재벌 쪽에서 일정한 ‘양보’를 하겠다고 나설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아마도 오건호 선생은 위와 같은 기류를 눈치챘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만약 부자와 재벌이 정말로 약간의 ‘양보’를 해서 복지가 실현되었을 때, ‘복지’라는 의제에 대한 ‘이니셔티브’를 박근혜 쪽에 빼앗길 것을 걱정해, ‘시민 증세운동’으로 대응하려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1과 같은 이유로 설령 성공하더라도 재앙적인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길이 아니면 가지 않는 것이 옳다.

이렇게 ‘시민 증세운동’이란 어떻게 봐도 말이 안 된다. 파탄난 삶을 회복하기 위한 복지를 시행하고, 나아가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할지 모를 정도로 망가진 경제를 되살리기 위해 비용을 대야 할 것은 부자와 재벌이지, 결코 ‘시민’이 아니다.

“무상급식”은 (가난한) 애들 밥주는 문제만은 아니다

어제 “무상급식” 투표가 있었다. 누구 말대로, 투표 안하고서 이렇게 홀가분한 건 처음인 것 같다. 투표의 결과, 초등학교에선 이번 2학기부터 “무상급식”이 시행된다고 한다.

1.

개인적인 경험으로 미뤄 생각해보면 참으로 잘된 일이다. 다른건 관두고… 어린시절, 학교에서 도시락 먹던 것만 생각해봐도 그렇다. 난 그다지 풍족하지 못했던 처지라, 도시락을 못 싸가지고 다닌 적도 (자주는 아니어도) 있었고 도시락이 있어도 반찬이 거의 매일 형편없었다. 그러니 점심시간이 내겐 두 번째로 고통스러운 시간이었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첫 번째로 고통스러운 시간은 음악시간. 악기를 다뤄야 하는데, 못하면 얻어맞았으니까.. 그것땜에 학교에 가기 싫어 꾀병을 부린적도 몇 번 있다.) 분위기상 혼자 먹을 수는 없고 누군가와 함께 먹어야 하는데, 반찬을 꺼내는 것 자체가 친구들에게 죄를 짓는 느낌이 들기도 했고 또 어떤 (잘사는) 친구들과는 꿈에도 밥을 같이 먹을 엄두를 못냈다. 지금이야 그냥 가볍게 웃으며 회상할 수 있지만, 그땐 좀 서러웠던 것 같다.

2.

어쨌든 주민투표도 무산됐으니, 이제는 무상급식 문제를 좀 더 냉정하게 바라볼 필요가 있다.

내가 이번 무상급식 논쟁에서 가장 못마땅한 것은 찬성파나 반대파나 이 문제를 “애들 밥 먹이는 문제”로 본다는 점이다. 오세훈 파는 그렇다 쳐도 그 반대쪽에 서 있는 이른바 “진보파”도 문제인데, 이들이 오세훈 등의 보수파를 비난할 때 “애들 밥주는 것 가지고 째째하게 군다”는 식의 논리를 사용하곤 했는데, 이건 그야말로 “복지 포퓰리즘”이라는 비아냥이 딱 어울릴 정도로 엉터리다.

실제로 이번 투표의 선택지도 {모두에게 급식을 무상으로 제공할 것인가}, 아니면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에게만 선별적/단계적으로 제공할 것인가}였지 않은가. 후자를 지지하는 오세훈 등은 재원부족, 그리고 재정 집행의 효율성 등의 문제를 제기하는 반면, 전자를 지지하는 진보진영에서는 전면 무상급식만이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을 “제대로” 위하는 길이라고 맞받아치고 있다. 즉 무상급식의 시행의 포커스가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에게 어떻게 하면 밥을 잘 먹일 것인가)”에 맞춰져 있다는 거다. 내가 보기에 이건 코미디다.

적어도 현재 우리사회에서 고민되고 있는 무상급식은, 말하자면 집에 놀러온 우리애 친구에게 밥을 공짜로 퍼주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다. 그리고 앞서 소개한 나와 비슷한 경험을 하고 있는 아이들에게 베푸는 시혜도 아니다. 만약 “형편이 어려운 소수의 아이들”을 위하는 것이 무상급식의 진정한 목적이라면, 그러한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다른 방법도 많다. “낙인”이 문제라면, 그것을 방지하는 길도 많다. 따라서 만약 무상급식이 고작 그런 용도에만 그쳤다면, 오세훈 쪽의 주장에도 일리가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으며, 내가 보기엔 이번 투표에서 오세훈이 저렇게 허망하게 무너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즉 무상급식은 “애들 밥주는 문제”를 넘어서는 그 무엇인데, 냉정하게 말하면 그것은 “애들”의 문제라기보단 “어른”의 문제이며, 특히 “형편이 어려운 어른”보다는 “대충 그럭저럭 살만한 보통 어른”에게 가장 첨예하게 제기되는 문제다. 이런 상황에선 결국,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을 돕는다”라는 대의(cause)란 그런 “보통 어른들”(다른 말로 하면 여론 주도층)이 자신들의 이해관계가 얽힌 또다른 대의를 관철시키는 일종의 구실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그 “보통 어른들”이 무상급식을 옹호하는, 옹호할 수밖에 없는 까닭, 대의란 무엇인가. 간단히 말하면, 무상급식을 통해 애들 도시락 걱정이 사라질 것이라는 점이다. 물론 여기서 “도시락 걱정”이란 단순히 “돈”의 문제는 아니다. 애들 도시락 싸줄 돈이 있다고 해서, 이를테면 반찬거리를 결정하고 조리하는 문제까지 저절로 해결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대개 젊은 부부일 가능성이 높은 이런 “보통 어른들”은, 대체로 저마다 자기들 일(꼭 “직업”과 관련된 것은 아니더라도)로 바쁠 것이며 자기 아이들을 소중히 여기긴 하겠지만 아이들 때문에 자기 삶의 구석구석까지 방해받는 것을—결국 그렇게 되더라도—기꺼워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무상급식을 가장 필요로하는 것은 바로 이런 어른들인 것이다. (덧붙임: 아래 덧글 참조.)

3.

하지만 이렇게 “개인적” 차원에서 사태를 바라보는 것은 기껏해야 “절반”의 진실만을 전달해줄 뿐이다. 마르크스의 말대로, 이와 같은 사회적 이슈들은 다름아닌 사회적 차원에서 바라봐야 하며, 혹시 개인을 고려하더라도 이때의 개인은 일정한 사회적 성격들의 화신으로서만 간주되어야 한다.

이런 식으로 사고를 확장해 나갈 때, “무상급식”이라는 용어가 정확한 게 아니라는 사실이 극적으로 드러난다. 실제로 요새 어떤 이들은 “무상급식”이 아니라 “의무급식”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내가 보기엔 타당한 지적이다(“무상의무급식”이 더 타당한 것도 같은데, 이런 문제는 접어두자). “무상” 대신 “의무”를 선호하는 까닭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겠지만, 내 경우엔 후자가 사태를 훨씬 더 정확하게 묘사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무상급식”이 실질적으로는 “무상”이 아니기도 하지만, “의무”라고 표기했을 때 그것이 갖는 사회경제적 의미가 더 잘 드러난다는 얘기다.

바로 이 대목에서 “급식”을 “의무교육”의 일환으로 봐야하므로 “의무급식”이 정확한 표현이라는 주장을 떠올릴 수 있다. 요새 한창 주가를 높이고 있는 문재인 이사장도 그렇게 말했다고 한다(링크). 멋진 “레토릭”이긴 한데, 이것은 그저 “레토릭”일 뿐 그 이상의 의미를 갖는 것으로 받아들이긴 어렵다. 이를테면, 이런 명제는 “의무교육”을 절대화한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과연 의무교육은 절대선인가?

당연히 아니다. 적어도 현실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사람이라면 현대사회에서 행해지는 의무교육을 무조건, 아무런 유보조항 없이 옹호해서는 안 된다. 오늘날과 같은 보편적인 의무교육의 발달이—그 “실제” 역사적 기원에 대해선 여러 얘기를 할 수 있겠지만—자본주의 발달과 궤를 함께한다는 것은 이미 적지 않은 연구를 통해 밝혀진 바다. 무슨 얘기냐면, 교육이든 급식이든… 그것을 국가, 그것도 “자본주의적 국가”가 나서서 “책임”을 진다는 것은, 예컨대 단순한 “시혜” 이상의 그 무엇이라는 거다. 이 말을 조금 다르게 하면, (무상)(의무)교육이나 (무상)(의무)급식이라는 문제를 (가난한 이들을 위한?) (국가의) 시혜로만 보는 것—현재 무상급식을 둘러싼 논의에서 좌우를 막론하고 이런 시각이 지배적인 것 같다—은 오늘날의 국가를 전근대적 국가(신이나 마찬가지인 왕과 그 신하들이 불쌍한 백성에게 자비를 베푼다는 식)로 바라보는, 커다란 시대착오에 기반을 둔 견해라는 얘기다.

물론 국가, 정확히 말해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무상급식의 실시를 고민하는 국가는 바로 자본주의적 국가다. 이러한 국가가, 의무교육으로 지정되어 있어 국민의 절대다수가 가야만 하는 학교에서 그들이 “먹는 문제”를 완전히 책임진다는 것을, 자본주의 체제의 재생산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며, 따라서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사태의 핵심을 놓칠 수밖에 없다. 사실 이런 얘기는 비단 의무교육이나 무상급식(또는 의무급식)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며, 오늘날 커다란 화두가 되고 있는 “(보편적) 의료”, 나아가 “(보편적) 복지” 일반에도 해당된다. 그러니까 우리는 “복지”라는 것이 자본주의 현실에서 가질 수밖에 없는 두 가지 모순되는 측면들을 두루 봐야한다는 거다.

4.

그렇다면 급식의 전면화, 나아가 의무화 내지는 무상화가 갖는 사회경제적 의미, 즉 단적으로 말해 자본주의 체제의 재생산과 관련된 의미는 무엇인가? 얘기가 이정도 나왔으니, 이 글을 읽는 이라면 누구라도 곧장 두세가지 정도는 열거할 수 있으리라 본다: 아이들의 학교교육을 통한 (자본주의적) 사회화의 범위 확장, 양육부담으로부터 일부 해방시킴으로써 주어진 사회에서 가장 활동적인 계급인 부모들을 자본의 메커니즘에 좀 더 충실하게 함, 일반 국민의 일상생활/복지에서 국가의 담당영역을 넓힘으로써 국가의 계급성 희석, 등등.

사태를 이렇게 보게 되면, 지금까지 많은 논란이 무상(의무)급식의 “비용”을 둘러싸고 벌어지고 있다는 것도 코미디임이 드러난다. 이 문제는, 현재 논의되는 무상급식으로부터 혜택을 가장 크게 입을 주체들이 누구인지, 그리고 그 혜택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보면 저절로 답이 나온다. 내가 보기에 가장 큰 수혜자는 가난한 집 자식들이 아니라 (가난한 + 그만그만한) 어른들과 그들을 고용하고 있는 자본이다. 다시 말해 이번 무상급식은 돈 있는 사람들의 세금으로 가난한 사람들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애들 보는 것이 성가시거나(이는 개인의 무책임의 문제가 아니라 현대자본주의에서 개인의 발달상의 한 단면이다) 어려운 사람들이 이제까지 자신들이 어렵게 감당해야 했던 책임을 국가에 떠넘기고 그 대가로 일정한 금액을 세금의 형태로 지불하는 것이다. 물론 (역시 주요 수혜자인) 자본도 그런 비용의 상당부분을 지불해야 할 것이다(따라서 혹시 자본이 이번 문제를 철저히 개별 경제주체들의 것으로 돌리면서 자신들은 그냥 무임승차 하려고 하지는 않는지 엄중히 감시할 필요도 있다—아니, 이미 자본은 이 비용을 부담하지 않으려고 꼼수를 부리고 있다).

가난한 집 자식들로 말하자면, 무상급식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형편은 그다지 나아지진 않으리라는 게 내 솔직한 예상이다. 오히려 무상급식은 그들을 좀 더 이 사회에 순응적인 인간으로, 안전하게 관리/양육시키는 중요한 기제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이는 물론 복지 일반에 대해서도 대체로 타당한 진술일 것이다(물론 그렇다고 복지를 하면 안 된다는 게 아니다. 슬프지만, 이런 이중성이 있다는 얘기다).

다시 “비용” 얘기로 돌아가자. 무상급식의 수혜자가 바로 위와 같기 때문에, 그들은 결국 무상급식에 따르는 비용을 (일정한 한도 안에서는) 부담하기로 동의할 것이다. 다만 지금 문제는, 이와 같은 사태의 “실질적인 면모”가 언제쯤 제대로 수면 위로 떠오를 것이냐다.

5.

지금까지 쓴 얘기는 상당히 일반적인 수준에서 풀어놓은 것이다. 여기에다가 현재 한국사회의 특수한 사정들을 덧붙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런 일은 지금 나로서는 벅찬 일이다. 어쨌거나, 무상급식 문제를 “(가난한) 애들 밥주는 문제”로만 봐서는 논의를 의미있게 진전시키긴 어려워 보인다.

 

개인/가계부채와 정부부채

가계/개인부채와 정부부채가 동시에 급속도로 늘어나고 있다는 기사가 나오고 있다. [링크] 가계/개인이든 정부든 부채 문제야 어제오늘 얘기가 아니지만, 이 둘이 함께 엮여서 제시되고 있다는 게 재밌다. (참고로, 새사연에서 최근에 가계부채 문제를 다루기도 했다. [링크])

어쨌든 간에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일이고, 그런 점에서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준다는 점에서 적절한 기사라고 본다. 그러나 문제는, “개인부채와 정부부채가 함께 급속도로 증가하고 있다”라는 문구가 미묘한 환상을 심어줄 수 있다는 것.

이와 관련해서 토요일자 <가디언>에 난 한 기사를 참조할 만하다. [링크] 우리나라와는 달리 현재 영국에서는 정부부채 문제가 큰 이슈로 제기되고 있고(이는 우리나라에서 정부부채 문제가 심각하지 않다는 뜻은 절대!! 아니다. 오히려 이 문제가 좀 더 심각하고 강력하게 제기될 필요가 있음을 시사할 뿐이다), 집권중인 보수당은 정부지출을 줄이는 데 혈안이 되어 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과정에서 가계부채가 증가하고 있다는 것인데… 한마디로 말하면, 억지로 줄인 정부지출이 고스란히 가계의 부담으로 전가되고 있다는 얘기다.

이쯤해서 다시 우리나라 얘기로 돌아가면… 맨앞에서 링크한 기사의 말미에 재정부 관계자가 현상황에 대해 우려를 표했다는 언급이 있다. 이와 같은 ‘행정가’의 진심어린 우려가, 앞으로 ‘정치꾼’들의 간교함을 거치면서 어떻게 치장될 것인지 궁금하다.

덧붙이면… 요새 복지(국가) 얘기가 진보나 보수를 막론하고 여기저기서 터져나오고 있는데, 그렇다 보니 ‘진짜 복지’가 뭐냐는 논란도 생기는 것 같다. 그런데 이렇게 부채 문제가 계속해서 심각하게 제기되면, 더구나 ‘가계/개인부채’도 아닌 ‘정부부채’ 문제가 전에없이 심각하게 제기되면, 보수 입장에서는 별로 표도 안 나는 ‘복지’ 카드를 버리고 다시금 그들의 전가의 보도, ‘긴축’ 카드를 빼들 가능성이 크지 않을까 싶다. 레임덕도 있고 하니까 현정부를 어느 정도 까는 것도 용인이 될 것이고(어쩌면, 현정부 쪽에서 ‘긴축’ 카드로 선수를 칠 수도 있겠는데… 최근 신공항 공약 뒤집은 것이 그 신호탄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이미 그간 벌여놓은 것들이 있어서 그렇게 하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실제로 돌이켜보면, MB도 ‘주식회사 대한민국의 CEO’를 자처하며 ‘방만한 정부재정 운영’ 문제를 집중 공략하지 않았던가.

물론, 만약 이 ‘긴축’이 실제로 행해진다면, 이는 위 <가디언>이 지적하는 것과 같은 형태를 띨 것이 불보듯 뻔하다. “개인부채와 정부부채가 함께 급속도로 증가하고 있다”라는 문구는 바로 이런 점을 미묘하게 감추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