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g Archives: 사회자본

‘근혜노믹스’의 밑그림 (5) 우리가 어부지리로(?) 배운 값진 것

12. 지금까지 ‘근혜노믹스’의 특징을 ‘국민 행복’론에 기초를 둔 ‘개체’에의 강조라는 측면에서 생각해봤다. 씨리즈의 마지막인 이번엔, 바로 그러한 특성이 사실은 ‘근혜노믹스’뿐만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사상지도에서는 ‘좌파’라고 흔히 불리는) 범중도파가 가진 ‘노믹스(들)’의 일반적 특징임을 보이겠다. 바로 이 점을 드러냈다는 것이, 박근혜의 당선과 집권이 범중도파를 포함한 (한국적) ‘범좌파’ 진영에 주는 가장 값진 교훈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렇다면 범중도파의 ‘노믹스(들)’이란 무엇인가? 나는 이를, 때로는 ‘사회자본'(social capital)으로, 때로는 ‘사회적 경제’나 ‘협동조합’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그 어떤 것이라고 본다. 이는 이미 이명박 정부시절부터 참여연대 등 시민사회운동 진영과 <한겨레> 등의 언론에 의해 적극적으로 옹호되었고, 신자유주의에 대한 대안으로서 선전되었다. 즉 보수파들에게 ‘자본주의 4.0’과 ‘국민 행복’론이 있었다면 진보파들에겐 사회자본과 협동조합이 있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신자유주의의 폐해를 치유하고 새로운 ‘상생’의 경제질서를 구축한다고 흔히 광고되곤 하는 사회자본과 협동조합도 현재 한국경제와 세계경제가 직면하고 있는 구조적 위기의 심연을 가늠하기엔 턱없이 부족하며, 이런 한계는 좀 더 근본적으로 보면 사회자본론이나 협동조합론 또한 방법론적으로 ‘개체’에 초점을 두고 있는 틀이라는 데서 기인한다.

 

13. ‘사회자본’ 개념이 신자유주의 시기에 그 위상이 추락한 ‘사회적인 것’을 복원하기보다는 주류 경제학이 자신의 방법론(개체주의individualism)을 여타 사회과학, 나아가 현실 사회의 모든 영역으로 확장하는 원대한 기획을 내포한다는 얘기는 이미 나도 이 블로그에서 몇 차례 풀어낸 바 있다(예컨대 링크).

또한 협동조합에 대해서는 최근 당인리대안정책발전소(링크)의 한형식 부소장께서 좋은 논점을 제시해, 그간의 내 ‘심증’을 확증해주기도 했다. 먼저 그는 협동조합을 고정된 그 무엇으로 보는 말하자면 ‘협동조합 물신주의’를 거부하면서 ‘오늘 우리에게 협동조합은 무엇이고, 또 어떤 이유와 목적을 가지고 옹호되는가’라는 핵심적인 질문을 제기한다(링크). 그에 따르면 오늘날 협동조합은 크게 두 가지 두드러진 특징을 갖는다. 첫째로, 그것은 한때 마르크스조차도 (제한적으로) 옹호했던 긍정성을 잃고 “신자유주의적 금융화라는 주어진 조건에 순응”하는 방향으로 발달하고 있다. 이는 “기존 협동조합의 실패 원인이 이윤을 사적으로 전유하지 못하게 하는 협동조합의 방식 때문”이라는 지극히 제한된 반성에 따른 방향설정이다.

현재 옹호되고 있는 협동조합이 위와 같은 성격을 갖는다는 것은 그간 막연하게 협동조합을 긍정적으로 바라보았던 이들에게 충격으로 다가갈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현재 우리의 논의에서는 다음과 같은 두 번째 특징이 더 유의미하게 와닿는다. 즉 협동조합은 “국가와 시장의 실패를 보완하기 위해, 사회적 서비스를 국가와 시장 사이에 있는 시민사회가 제공하는 수단” 구실을 한다는 것이다. 이는 “신자유주의가 전면화한 상황에 대응—‘순응’이라고 읽어야 한다/EM—하는 협동조합의 새로운 형태”로서, 한편으로 그것이 시장의 실패에서 기인하는 한 그것은 시장을 보완할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 그것이 정부(여기에서는 서유럽 복지국가)의 실패에서 기인하는 한 그것은 사회복지를 대체(‘정부의 외주화’/한형식)할 것이다. 물론 애초부터 정부도 시장도 제 기능을 못하는 곳(예컨대 제3세계)에서는 협동조합과 같은 공동체적 형태가 정부와 시장을 동시에 대신할텐데(비근한 예로, 대안화폐가 도시보다는 시골에서 더 성공적이라는 실증적 결과들을 들 수 있다), 이 경우엔 체제가 발달함에 따라 거꾸로 협동조합 등은 약육강식의 시장이나 권위주의적 정부로 대체될 것이다.

요컨대 어떤 경우에도 협동조합은 기존의 체제를 전복하거나 대체하는 새로운 질서를 제공하기는커녕 그것을 둘러싼 ‘구조’에 의해 규정될 뿐만 아니라 기껏해야 그 ‘구조’의 빈틈을 메워주는 ‘보완물’에 지나지 않는다. 이로부터 우리가, 협동조합은 ‘사회’ 내지 ‘구조’에 대한 시각이 결여되어 있다는, 그리하여 그것이 어떻게 ‘공동체’를 강조한다고 해도 방법론적으로는 ‘개체’의 관점에 입각해 있을 뿐이라는 결론에 이른다고 해도 결코 그것이 무리는 아닐 것이다.

 

14. 자, 이제 그럼 협동조합은 어디로 갈 것인가? 그리고 그 이론적 배경이 되는 ‘사회자본’론은, ‘사회적 경제’론은 또 어떻게 될 것인가? 그것을 주도적으로 옹호했던 세력들이 선거에서 패퇴했으므로, 이런 담론들과 시도들도 사라지겠는가?

일단 대통령선거 직후엔 그래 보였던 것도 부분적으로 사실이다. 하지만 이내 전열은 정비되었고, 장수들은 저마다 살 길을 찾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가장 열렬한 옹호자였던 <한겨레>도 대선 직후엔 협동조합 기사를 전국기사로는 거의 내보내지 않다가 새해 들어 협동조합을 ‘멘붕 탈출을 위한 첫 걸음’으로 내세우고 있는 형국이다(링크1링크2). <경향신문>은 아예 ‘신년기획’으로 사회적 경제를 다뤘다(링크). 이 기획은 총 4차례에 걸쳐 다뤄졌는데, 그 중 압권은 기획의 최종편을 장식한 박원순과 정태인의 대담에서 “신뢰·네트워크 같은 사회적 자본 축적되면 거래비용이 준다”라는 정태인의 주장이다(링크). 이는, 내가 앞서 Ben Fine을 인용해 했던 치명적인 비판에 대해 그가 전혀 무지함을 보여주는 명백한 사례다.

그러니까 정태인과 같은 이들은 사회적 경제와 협동조합을 포기할 생각이 없다는 것인데(물론 포기할 필요도 없다), 그렇다면 사회적 경제와 협동조합은 앞으로 어떻게 존재할 것인가? 위 대담에서 정태인은 “박근혜 당선인은 사회적 경제라는 용어를 써본적이 없습니다”라고 함으로써 박 당선인의 인식이 낮음을 조롱한 뒤 현직 서울시장인 박원순에게 한 수 가르침을 베풀어주라고 점잖게 훈수를 두고 있다. 이러한 훈수가 역겹다 못해 안쓰러워 보이는 까닭은, 다름아닌 사회적 경제 및 협동조합이 향후 박근혜 행정부에 의해 적극적으로 채용될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국민 행복’의 수단으로서, 그리고 불충분할 수밖에 없는 ‘복지제도’의 그럴싸한 보완물로서!

(덧붙이자면, 여기서 ‘보완물’의 의미를 보다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보통 서유럽/북유럽과 같이 이미 복지제도가 잘 갖춰져있는 곳에서는 협동조합은 기존의 복지제도가 미처 침투하지 못하는 사각지대를 메워주는 역할을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와 같이 복지가 매우 미미한 곳, 그래서 복지제도가 앞으로 발달해야 하는 곳에서는 협동조합은 오히려 복지제도의 발달을 저지할 수 있고 또한 복지제도 발달의 미미함에 대한 변명꺼리를 제공해줄 수도 있다. 전자와 후자에서 ‘보완물’의 의미가 크게 다름을 주목.)

이 대목에서 내가 정말로 궁금한 것은, 이렇게 사회적 경제와 협동조합이 박근혜 정부와 ‘안락한 동거’를 할 때, 이제껏 마치 그것이 세상을 일거에 바꿔낼 것이라는 듯이 그것을 옹호했던 자들이 어떤 자세를 취할 것인가이다. 당연히 둘 중 하나일 것. 투항하거나 투항하지 않거나.

현재로서는 ‘투항’이라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형태를 띨 것인지조차 분명치는 않지만, 내가 보기엔 어떤 의미에선 투항하지 않는 이들이 장기적으로는 진짜 문제다. 왜냐하면 그들의 ‘비투항’은 박근혜 정부에 대한 적극적인 저항의 진지를 구축하기보다는 기껏해야 박근혜 일당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 ‘그들만의 해방구’를  쌓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지는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야말로 사회자본/사회적 경제/협동조합론과 ‘국민 행복’론이 상통한다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그간 전자를 열성적으로 옹호하고 선전했던 이들의 뼈저린 반성이 필요한 것도 바로 그러한 의미에서다.

(일단, 끝)

[201010] ‘경제학 제국주의의 첨병, 사회자본론’

한 대학 매체에 글을 하나 썼다. 원래 청탁받은 제목은 ‘경제학 제국주의의 첨병, 사회자본론’이었는데, 인터넷으로 확인해보니 ‘사회적이지도 경제적이지도 않은 사회자본론’이라는 제목이 더 큰 활자체로 덧붙어 있다. 나쁘지 않다.

원래 저쪽에 보낸 파일엔 각 내용단락 앞에 로마자 대문자로 수자를 붙여두었는데, 인터넷에 올라온 글을 보니 그게 빠져 있다. 어떻게 인쇄되어 나갔는지는 모르겠다. 하여간 인터넷에 있는 것은 조금 산만한 느낌이다. 물론 그건 애초에 내 잘못이기도 하다.

이 글은 <중대신문>에서 기획한, ‘사회적인 것’이 현재 사회과학에서 다뤄지고 있는 현황과 그에 대한 비판에 대한 시리즈물 중 하나다. 여튼 사회학자도 아닌 내게 좋은 기회를 허락해 줘서 고맙다.

(참고로, 글 맨마지막에, 내가 이 블로그를 통해 수차례 소개하기도 했던 IIPPE에 대해 쓰고 싶었지만, 그냥 슬며시 암시를 주는 것에 그쳤다. 소심했나…)

*                         *                         *

I. 최근 영국에서는 보수당 출신의 데이빗 카메론 총리의 주도로 ‘big society’라는 것이―우리로 치면 ‘공정사회’와 같이―커다란 화두로 등장하고 있다. 이는 카메론의 같은 당 대선배 마가렛 대처 전총리의 저 유명한 선언, 즉 “사회 따위는 없다”라는 선언과 재밌는 대비를 이룬다. 후자가 줄잡아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사회’의 ‘과잉’에 대한 반작용이었다고 한다면, 카메론의 최근 기획은 대처의 선언 이후 땅에 떨어졌던 ‘사회’의 권위를 적정 수준에서 바로 세워줄 것으로 기대할 수 있을까?

그런데 우리는 위와 유사한 사태 전개를 지성의 영역에서도 볼 수 있다. 대처의 선언과 궤를 같이 해서 사회의 불가능성을 핵심 테제 중 하나로 삼는 포트스모던적 경향이 지성계를 휩쓸고 지나간 뒤, 오늘날 우리는 다시금 ‘사회’의 과잉을 보고 있는 것이다. 바로 ‘사회자본’이라는 개념을 통해서.

그러나 실제 내용을 들여다보면 카메론의 ‘big society’라는 것이 결국은 개인들의 자조(自助)와 이웃 간의 친목 강화 등을 강조하는, 낡은 대처리즘에 새 옷을 입힌 것에 지나지 않다는 게 드러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회자본’이라는 개념도 그간 특히 여러 사회과학의 분과들이 경제학화(化)하는 과정에서 실추되었던 ‘사회적인 것’의 의의와 권위를 회복시키기보다는 바로 그 경제학화의 새로운 방식으로 채용되고 있을 따름이다. 요컨대, 경제학이 그 특유의 방법론을 가지고 여타 사회과학 분과들의 영역을 침범하고 나아가 이를 자신의 발아래 복속시켜 나가는 현상을 ‘경제학 제국주의'(economics imperialism)라고 부른다면, 특히 최근 20-30년 사이에 그 제국주의의 전위대 노릇을 하고 있는 게 사회자본 개념이라는 얘기다.

II. 최근 사회과학은 그 분야를 막론하고 다양하게 정의되는 사회자본‘들’의 각축장으로 변모하고 있다. 다양한 정의들에서 공통으로 강조되는 것은 바로 ‘인간관계’ 자체다. 즉 “중요한 것은 당신이 무엇을 아느냐가 아니라 누구를 아느냐다.” 더 많은 양질의 인간관계를 맺을수록 당신의 삶은 개선될 것이며, 따라서 이를테면 미국의 백인이 고도비만에 시달리는 것도 수많은 아프리카 흑인이 굶주림에 죽어가는 것도 모두 사회자본이 부족한 때문이다!

바로 이렇게 사회자본 개념의 문제는 그것이 마치 모든 사회적 이슈들의 해결책인 듯이 제시되고 있으면서도 내용상으로는 충분히 ‘사회적’이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자본’도 아니라는 데 있다. 즉 이 개념은 여타 사회과학들의 경제학화를 표상하지만 충분히 ‘경제(학)적’이지도 않고, 다양한 사회과학 분야들에 걸쳐있지만 충분히 ‘사회(학)적’이지도 않다. 뿐만 아니라, 사회자본 개념은 특히 연구자들에게 묘한 안락함을 주곤 한다. 이것이 바로, 사회자본 개념이 지금처럼 많이 쓰이기 전부터 꾸준히 그것을 비판해온 벤 파인(Ben Fine)이 자신의 최근 저작, <사회자본의 이론들>(Theories of Social Capital: Researchers Behaving Badly, 2010)의 부제목을 ‘불량하게 행동하는 연구자들’이라고 지은 까닭이다. 이제 그들은 역사, 계급, 전통, 관습, 사회구조, 그리고 경제적 토대(!)를 참조하지 않고도, 단지 ‘사회자본과 xx’라는 식으로 얼마든지 손쉽게 새로운 연구분야를 개척해나갈 수 있게 되었다. [벤 파인의 이 책은 내년 중에 나의 번역으로 국내에 나올 예정이다. 기대하시라! ;;;]

결국 만약 우리가 ‘사회적인 것’으로써 단순한 ‘인간관계’보다는 역사, 계급, 구조, 경제적 토대 등을 의미한다면, 사회자본 개념이 사회과학들에서 두루 융성하고 있다는 것은 사회과학이 타락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한 징후로 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III. 사회자본은 비록 전통적으로 경제(학)적 의미의 자본이 쓰이기에 적합하지 않은 사항들을 묘사하기 위해 도입되었지만, 여전히 그것은 소비되고 축적될 수 있다는 점에서 ‘자본’이다. 따라서 그것은 태생적으로 사회과학들의 경제학화에 봉사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 가능성이 현실성으로 실현된 것은, 현대적 사회자본 논의의 원조로 꼽히는 부르디외(Pierre Bourdieu)보다는 코울만(James Coleman)이나 퍼트남(Robert Putnam) 등을 거치면서였다. 특히 코울만은 원래 경제학에서 발달된 ‘합리적 선택’ 이론을 사회학에 적용시키는 데 열정적이었던 사회학자, 말하자면 경제학 제국주의의 영역에서 ‘일제의 조선인 앞잡이’에 해당하는 인물인 것이다.

원래 경제학 제국주의란 사회과학의 분과체계가 형성되는 과정(1930년대 초)에서부터 이미 제기되었던 문제였다. 현실의 제국주의와 마찬가지로 여기에도 그 열렬한 옹호자가 있었는가하면 단호한 반대자도 있었다. 그 옹호논리라는 것도, 경제학 제국주의가 ‘계몽적이고 민주적으로’ 이뤄지기만 한다면 이는 억제되기보다는 장려되어야 한다는, 현실의 제국주의의 그것과 꼭 닮아있었다. 그 반대편에는 이를테면 파슨스(Talcott Parsons) 같은 인물이 있는데, 1930년대 경제학에 대해 사회학의 고유의 영역을 확립하려던 그의 노력을 최근 저프 호지슨(Jeoff Hodgson)은 <어쩌다 경제학은 역사를 잊어버렸는가>(How Economics Forgot History: The Problem of Historical Specificity in Social Science, 2001)에서 ‘경제학 제국주의에 맞선 해방투쟁’이라고 묘사하기도 했다.

그러나 경제학 제국주의가 진정으로 융성하기 시작한 것은 1950년대 이후 개리 베커(Gary Becker)를 통해서였다. 기본적으로 그는 사회의 모든 문제들을 개인의 합리적 선택에 관한 것으로, 즉 합리적 개인의 효용극대화라는 문제로 변환시켜 경제학에서 적용된 수리적 방법에 따라 그것에 접근한다는 전략을 취했다. 최근 공전의 히트를 친 <괴짜경제학> 저자들의 “그 어떤 주제도 경제학의 범위 너머에 위치할 필요가 없다”라는 선언도 이런 태도와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괴짜경제학>의 무분별한 유행은 경계심을 가지고 봐야 할 필요가 있다. 특히 이 책이 심지어 진보적인 성향의 사람들 사이에서도 꽤 인기를 모으고 있다는 점은 크게 걱정스럽다. 언젠가 본격적인 비판을 내놓아야 하는데…]

이와 같은 베커의 경제학 제국주의는 우리가 흔히 ‘신자유주의’라고 부르는 것과 더없이 잘 어울린다. 우리도 지난 1997-98년에 겪었듯이, 신자유주의란 세계 모든 나라에 시장만능주의적인 단일 모델에 입각한 경제 및 사회 전반에 걸친 재구조화 프로젝트였음을 떠올려보라.

IV. 그렇다면 경제학 제국주의 또는 신자유주의가 어떻게 사회자본과 연결되는가? 이는 1990년대 중반 이후 이른바 ‘시장의 실패’ 사례가 빈번해짐에 따라 경제학 제국주의가 자체변모를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처한 것과 관계가 깊다. 요컨대, 경제학 제국주의가 지금까지는 경제학의 방법으로 여타 사회과학들을 무지막지하게 식민화해왔다면, 이제 그것은 자신의 한계(‘시장 실패’)를 인정하고 그런 한계가 드러나는 곳, 말하자면 시장이나 가격이 아니라 역사, 전통, 관습, 계급, 경제적 토대 등의 고찰이 필연적으로 요구되는 지점들을 ‘사회자본’이라는 ‘전가의 보도’로 채워버렸다는 것이다.

V. 기실 경제학은 그 자신의 편협한 방법론과 시야로 사회과학 전체에 걸친 하나의 제국을 형성한다는 야심을 가지고 있다. 사회자본 개념은 최근 그런 야심이 드러나는 가장 중요한 통로 중 하나다.

만약 경제학 제국주의와 사회자본이 사회과학 전체를 타락시키고 있다면 이에 대한 저항도 필연적으로 생겨나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 저항이란, 현실의 제국주의에 대한 투쟁이 그렇듯 단순히 민족주의에 그쳐서는 성공할 수 없을 것이다. 즉 그것은 단 하나의 분과학문에만 머물러서는 안 되며, 만약 이 저항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이 ‘사회적인 것’의 복원이라면 더욱 그렇다. 다양한 사회과학 분과들을 아우를 수 있는 지적 기획이 필요한 시점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