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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 ‘경제학 제국주의의 첨병, 사회자본론’

한 대학 매체에 글을 하나 썼다. 원래 청탁받은 제목은 ‘경제학 제국주의의 첨병, 사회자본론’이었는데, 인터넷으로 확인해보니 ‘사회적이지도 경제적이지도 않은 사회자본론’이라는 제목이 더 큰 활자체로 덧붙어 있다. 나쁘지 않다.

원래 저쪽에 보낸 파일엔 각 내용단락 앞에 로마자 대문자로 수자를 붙여두었는데, 인터넷에 올라온 글을 보니 그게 빠져 있다. 어떻게 인쇄되어 나갔는지는 모르겠다. 하여간 인터넷에 있는 것은 조금 산만한 느낌이다. 물론 그건 애초에 내 잘못이기도 하다.

이 글은 <중대신문>에서 기획한, ‘사회적인 것’이 현재 사회과학에서 다뤄지고 있는 현황과 그에 대한 비판에 대한 시리즈물 중 하나다. 여튼 사회학자도 아닌 내게 좋은 기회를 허락해 줘서 고맙다.

(참고로, 글 맨마지막에, 내가 이 블로그를 통해 수차례 소개하기도 했던 IIPPE에 대해 쓰고 싶었지만, 그냥 슬며시 암시를 주는 것에 그쳤다. 소심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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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최근 영국에서는 보수당 출신의 데이빗 카메론 총리의 주도로 ‘big society’라는 것이―우리로 치면 ‘공정사회’와 같이―커다란 화두로 등장하고 있다. 이는 카메론의 같은 당 대선배 마가렛 대처 전총리의 저 유명한 선언, 즉 “사회 따위는 없다”라는 선언과 재밌는 대비를 이룬다. 후자가 줄잡아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사회’의 ‘과잉’에 대한 반작용이었다고 한다면, 카메론의 최근 기획은 대처의 선언 이후 땅에 떨어졌던 ‘사회’의 권위를 적정 수준에서 바로 세워줄 것으로 기대할 수 있을까?

그런데 우리는 위와 유사한 사태 전개를 지성의 영역에서도 볼 수 있다. 대처의 선언과 궤를 같이 해서 사회의 불가능성을 핵심 테제 중 하나로 삼는 포트스모던적 경향이 지성계를 휩쓸고 지나간 뒤, 오늘날 우리는 다시금 ‘사회’의 과잉을 보고 있는 것이다. 바로 ‘사회자본’이라는 개념을 통해서.

그러나 실제 내용을 들여다보면 카메론의 ‘big society’라는 것이 결국은 개인들의 자조(自助)와 이웃 간의 친목 강화 등을 강조하는, 낡은 대처리즘에 새 옷을 입힌 것에 지나지 않다는 게 드러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회자본’이라는 개념도 그간 특히 여러 사회과학의 분과들이 경제학화(化)하는 과정에서 실추되었던 ‘사회적인 것’의 의의와 권위를 회복시키기보다는 바로 그 경제학화의 새로운 방식으로 채용되고 있을 따름이다. 요컨대, 경제학이 그 특유의 방법론을 가지고 여타 사회과학 분과들의 영역을 침범하고 나아가 이를 자신의 발아래 복속시켜 나가는 현상을 ‘경제학 제국주의'(economics imperialism)라고 부른다면, 특히 최근 20-30년 사이에 그 제국주의의 전위대 노릇을 하고 있는 게 사회자본 개념이라는 얘기다.

II. 최근 사회과학은 그 분야를 막론하고 다양하게 정의되는 사회자본‘들’의 각축장으로 변모하고 있다. 다양한 정의들에서 공통으로 강조되는 것은 바로 ‘인간관계’ 자체다. 즉 “중요한 것은 당신이 무엇을 아느냐가 아니라 누구를 아느냐다.” 더 많은 양질의 인간관계를 맺을수록 당신의 삶은 개선될 것이며, 따라서 이를테면 미국의 백인이 고도비만에 시달리는 것도 수많은 아프리카 흑인이 굶주림에 죽어가는 것도 모두 사회자본이 부족한 때문이다!

바로 이렇게 사회자본 개념의 문제는 그것이 마치 모든 사회적 이슈들의 해결책인 듯이 제시되고 있으면서도 내용상으로는 충분히 ‘사회적’이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자본’도 아니라는 데 있다. 즉 이 개념은 여타 사회과학들의 경제학화를 표상하지만 충분히 ‘경제(학)적’이지도 않고, 다양한 사회과학 분야들에 걸쳐있지만 충분히 ‘사회(학)적’이지도 않다. 뿐만 아니라, 사회자본 개념은 특히 연구자들에게 묘한 안락함을 주곤 한다. 이것이 바로, 사회자본 개념이 지금처럼 많이 쓰이기 전부터 꾸준히 그것을 비판해온 벤 파인(Ben Fine)이 자신의 최근 저작, <사회자본의 이론들>(Theories of Social Capital: Researchers Behaving Badly, 2010)의 부제목을 ‘불량하게 행동하는 연구자들’이라고 지은 까닭이다. 이제 그들은 역사, 계급, 전통, 관습, 사회구조, 그리고 경제적 토대(!)를 참조하지 않고도, 단지 ‘사회자본과 xx’라는 식으로 얼마든지 손쉽게 새로운 연구분야를 개척해나갈 수 있게 되었다. [벤 파인의 이 책은 내년 중에 나의 번역으로 국내에 나올 예정이다. 기대하시라! ;;;]

결국 만약 우리가 ‘사회적인 것’으로써 단순한 ‘인간관계’보다는 역사, 계급, 구조, 경제적 토대 등을 의미한다면, 사회자본 개념이 사회과학들에서 두루 융성하고 있다는 것은 사회과학이 타락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한 징후로 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III. 사회자본은 비록 전통적으로 경제(학)적 의미의 자본이 쓰이기에 적합하지 않은 사항들을 묘사하기 위해 도입되었지만, 여전히 그것은 소비되고 축적될 수 있다는 점에서 ‘자본’이다. 따라서 그것은 태생적으로 사회과학들의 경제학화에 봉사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 가능성이 현실성으로 실현된 것은, 현대적 사회자본 논의의 원조로 꼽히는 부르디외(Pierre Bourdieu)보다는 코울만(James Coleman)이나 퍼트남(Robert Putnam) 등을 거치면서였다. 특히 코울만은 원래 경제학에서 발달된 ‘합리적 선택’ 이론을 사회학에 적용시키는 데 열정적이었던 사회학자, 말하자면 경제학 제국주의의 영역에서 ‘일제의 조선인 앞잡이’에 해당하는 인물인 것이다.

원래 경제학 제국주의란 사회과학의 분과체계가 형성되는 과정(1930년대 초)에서부터 이미 제기되었던 문제였다. 현실의 제국주의와 마찬가지로 여기에도 그 열렬한 옹호자가 있었는가하면 단호한 반대자도 있었다. 그 옹호논리라는 것도, 경제학 제국주의가 ‘계몽적이고 민주적으로’ 이뤄지기만 한다면 이는 억제되기보다는 장려되어야 한다는, 현실의 제국주의의 그것과 꼭 닮아있었다. 그 반대편에는 이를테면 파슨스(Talcott Parsons) 같은 인물이 있는데, 1930년대 경제학에 대해 사회학의 고유의 영역을 확립하려던 그의 노력을 최근 저프 호지슨(Jeoff Hodgson)은 <어쩌다 경제학은 역사를 잊어버렸는가>(How Economics Forgot History: The Problem of Historical Specificity in Social Science, 2001)에서 ‘경제학 제국주의에 맞선 해방투쟁’이라고 묘사하기도 했다.

그러나 경제학 제국주의가 진정으로 융성하기 시작한 것은 1950년대 이후 개리 베커(Gary Becker)를 통해서였다. 기본적으로 그는 사회의 모든 문제들을 개인의 합리적 선택에 관한 것으로, 즉 합리적 개인의 효용극대화라는 문제로 변환시켜 경제학에서 적용된 수리적 방법에 따라 그것에 접근한다는 전략을 취했다. 최근 공전의 히트를 친 <괴짜경제학> 저자들의 “그 어떤 주제도 경제학의 범위 너머에 위치할 필요가 없다”라는 선언도 이런 태도와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괴짜경제학>의 무분별한 유행은 경계심을 가지고 봐야 할 필요가 있다. 특히 이 책이 심지어 진보적인 성향의 사람들 사이에서도 꽤 인기를 모으고 있다는 점은 크게 걱정스럽다. 언젠가 본격적인 비판을 내놓아야 하는데…]

이와 같은 베커의 경제학 제국주의는 우리가 흔히 ‘신자유주의’라고 부르는 것과 더없이 잘 어울린다. 우리도 지난 1997-98년에 겪었듯이, 신자유주의란 세계 모든 나라에 시장만능주의적인 단일 모델에 입각한 경제 및 사회 전반에 걸친 재구조화 프로젝트였음을 떠올려보라.

IV. 그렇다면 경제학 제국주의 또는 신자유주의가 어떻게 사회자본과 연결되는가? 이는 1990년대 중반 이후 이른바 ‘시장의 실패’ 사례가 빈번해짐에 따라 경제학 제국주의가 자체변모를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처한 것과 관계가 깊다. 요컨대, 경제학 제국주의가 지금까지는 경제학의 방법으로 여타 사회과학들을 무지막지하게 식민화해왔다면, 이제 그것은 자신의 한계(‘시장 실패’)를 인정하고 그런 한계가 드러나는 곳, 말하자면 시장이나 가격이 아니라 역사, 전통, 관습, 계급, 경제적 토대 등의 고찰이 필연적으로 요구되는 지점들을 ‘사회자본’이라는 ‘전가의 보도’로 채워버렸다는 것이다.

V. 기실 경제학은 그 자신의 편협한 방법론과 시야로 사회과학 전체에 걸친 하나의 제국을 형성한다는 야심을 가지고 있다. 사회자본 개념은 최근 그런 야심이 드러나는 가장 중요한 통로 중 하나다.

만약 경제학 제국주의와 사회자본이 사회과학 전체를 타락시키고 있다면 이에 대한 저항도 필연적으로 생겨나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 저항이란, 현실의 제국주의에 대한 투쟁이 그렇듯 단순히 민족주의에 그쳐서는 성공할 수 없을 것이다. 즉 그것은 단 하나의 분과학문에만 머물러서는 안 되며, 만약 이 저항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이 ‘사회적인 것’의 복원이라면 더욱 그렇다. 다양한 사회과학 분과들을 아우를 수 있는 지적 기획이 필요한 시점이다. (끝)

IIPPE: 경제학을 넘어 사회과학의 재편으로 (3)

2. 정치경제학을 통한 ‘사회적인 것’의 복원

결국 IIPPE의 경제학에 대한 문제제기는 크게 두 가지 측면을 갖는다고 요약될 수 있다. 첫째, 내적으로 봤을 때 경제학은 점점 더 편협해지고 있다. 둘째, 외적으로 봤을 때 경제학은 그 편협하고 파괴적인 성격으로 다른 사회과학들을 물들이고 있다. 특히 이 두 번째 사항을 통해 경제학에 대한 문제제기는 곧 사회과학 전체를 시야에 두고 그것을 재편하는 데로 나아가지 않을 수 없게 되는데, 따라서 경제학의 개혁은 경제학 안팎의 다양한 비판들이 건설적으로 소통하는 것을 요구할 것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이 비록 불가피하게도 벤 파인을 비롯한 몇몇 소수에 의해 체계화되었지만, 그것은 IIPPE 안팎에서의 토론은 물론이고 IIPPE가 생기기도 훨씬 이전부터 경제학 내부와 기타 사회과학들에 지속적으로 존재했던 다양한 비판과 불만을 반영하고 있다는 게 중요하다. [하버드 대학교에 사회학과가 신설되어 그 첫 강사로 부임했을 무렵 탈코트 파슨스(Talcott Parsons)는 경제학 제국주의를 두고, “이웃한 ‘나라들’을 부유하게 할 수도 있지만 …… 그들을 그들이 가진 조건들에는 맞지 않는 ‘경제적’ 범주들이라는 구속복(strait jacket)을 입히는 결과를 빚을 수도 있다”며 경계하기도 했다(Parsons, 1934, p. 512). 이는 경제학 제국주의의 파괴적 결과를 비판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이 구절엔 당시 막 형성되고 있던 사회학의 정체성을 확보해야 한다는 절박함이 숨어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비판과 불만은, 경제학의 내부와 외부에서 공히 ‘정치경제학’이라고 불리면서 제기되고 발달해왔다. 바로 이것이 IIPPE가 ‘정치경제학 진흥’이라는 명목으로 그런 비판과 불만들을 북돋고 체계적으로 결집시키려는 까닭이다.

먼저 경제학 내부에서 보면, 앞서 소개한 밀로나키스와 파인의 책 제목에서도 내비쳐지듯이, 정치경제학이란 경제학이 필연적으로 사회적•역사적 성격을 갖기 마련인 그 대상에, 이 대상의 그런 성격을 효과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방법론을 가지고 개입하려던 시절에 불리던 이름이다. 따라서 위에서 묘사한 경제학의―특히 19세기 말부터 현재에 이르는―역사적 발전양상을 참조하면, 이러한 ‘정치경제학’의 정신과 접근법을 복원하고 발전시키는 것은 그 자체로 의의가 있는 일이다.

그렇다고 이 복원을 꽉막힌 원칙론, 또는 과거로의 회귀로 보는 것은 잘못이다. 여기서는 정치경제학이란 근대사회 고유의 문제에 관계되는 특수한 학문임을 음미할 필요가 있다. 왜 그런가? 고대 그리스에서 ‘경제’란 말이 처음 생겨났을 때 그것이 ‘가계의 관리’를 일컬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물론 여기서 가계란 오늘날의 핵가족이 아니라 가족과 더불어 거기 부속된 노예 등까지 포함하는, 말하자면 하나의 생산 공동체이자 단위를 가리킨다. 따라서 이와 같은 ‘가계의 관리’란 곧 ‘공공문제의 관리’와 유사성을 띤다. [크세노폰(Xenophon)이 《소크라테스 회상》에서 전하는 바에 따르면, 소크라테스는 친구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개인 업무의 경영과 공공 임무의 처리는 다만 양에 있어서 다를 뿐 그 외의 점에서는 비슷한 것이라네”(크세노폰, 2002[1923], 122쪽). Roncaglia(2005), p. 25n에서 재인용.] 그러나 이런 유비관계는 서유럽으로 치면 대체로 절대왕정과 거의 나란히 근대사회가 떠오름에 따라 더 이상 충분치 않은 것으로 판명난다. 하나의 단위로 묶일 수 있는 공동체의 규모 자체가 커졌을 뿐만 아니라 그 운영도 이제는 가계의 운영만 참조해가지고는 제대로 수행될 수 없을 정도로 매우 복잡한, 즉 그 정도와 범위에 있어 엄청나게 심화되고 확장된 분업관계에서 비롯되는 문제들을 동반하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이렇게 기존의 ‘경제’라는 용어로는 더이상 공동체가 직면한 ‘경제적’ 이슈들을 만족스럽게 포착하고 개념화하며 그로부터 떠오르는 질문들에 답변을 구하기가 어렵게 된 상황을 반영해서, ‘공동체의 경제’를 일컫기 위해 ‘정치경제’(political economy)라는 새로운 용어와 그와 결부된 일련의 개념들이 필요하게 되었단 얘기다. 바로 이런 변화를 포착하여, 스미스(Adam Smith)의 《국부론》이 나오기 약 10년 앞서 스튜어트(Sir James Steuart)는 다음과 같은 구절들로 자신의 《정치경제학 원리 탐구》(An Inquiry into the Principles of Political Economy)를 연다. “일반적으로 경제란 한 가계의 모든 결핍을 분별있고 검소하게 채워주는 기술이다. …… 경제가 가족에 대한 것이라면 정치경제는 국가에 대한 것이다”(Steuart, 1805[1767], pp. 1, 2). [물론 ‘정치경제’라는 용어의 기원은 이보다 훨씬 앞선다. 대체로 17세기 초부터 여러 사람에 의해 약간의 시차를 두고 거의 동시다발적으로 쓰이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King(1948) 참조.]

결국, 고전파에 의해 발전된 정치경제학이란 ‘(근대) 사회’ 자체에 대한 학문, 좀 더 정확히는 사회 전체를 총체적으로 시야에 넣고서 그 사회를 구성하는 주요한 계급들 사이에서 물적 부가 어떻게 생산되고 교환되는지, 어떻게 분배되고 소비되는지를 체계적으로 좇으며 근대시민사회의 운동방식을 탐구하는 학문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마르크스는 정치경제학을 “시민사회의 해부학”(마르크스, 1988[1859], 6쪽)이라고, 즉 근대사회에 고유한 과학이면서도 동시에 그 물적 근간을 다루는 본원적인 과학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앞서 밀로나키스와 파인의 공동저작을 언급하면서 밝혔듯이, 바로 이와 같은 정치경제학은 만약 그것이 제대로 행해질 경우, 자신이 그 대상―즉 사회―에 접근하는 ‘방법’이라는 문제에 필연적으로 민감할 수밖에 없으며, 또 그 자체가 근대시민사회라는 하나의 역사적으로 특수한 체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대상의 역사성이나 사회성에 대해 사려깊을 것이다.

‘경제학’의 성립, 곧 정치경제학에서 경제학으로의 전환은, 바로 정치경제학이 근대사회라는 특수한 역사적 체제 안에서 할당받은 위와 같은 역할로부터의 이탈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는 사이에 (정치)경제학의 본질적인 과제들은 일부는 경제학 내부의 변두리에서, 또 일부는 경제학 바깥에서 이러저러한 ‘정치경제학’이라는 이름으로 수행되곤 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경제학 내부에서는 그런 ‘비주류’(heterodox) 접근들이 주변화되고 거의 말살되다시피 하고있는 실정이지만, 경제학 외부의 다른 사회과학들에서는 그런 접근들이 꽤 강하게 유지되었고 특히 최근 들어서는 그 어느 때보다 활기를 띠고 있다는 점이다. 실은 바로 이것이, ‘정치경제학’을 장려함으로써 경제학을 개혁할 때 우리가 경제학 외의 학문분야들에도 주목해야 하는 또 다른 까닭이다.

이 자리에서 경제학 내부의 참담한 상황을 새삼 상론할 필요는 없겠고, [한동안 비주류 경제학의 산실이었던 영국 캐임브리지 대학에서 비주류 경제학이 사라지고 있는 데 대한 안타까움을, 그런 전통의 한 주역이었던 저프 하코트(Geoffrey C. Harcourt)는 한 인터뷰에서 내비치고 있다(Mongiovi, 2001). 크게 영국과 미국에서 비주류 경제학의 발달에 대한 좀 더 일반적이고 포괄적인 서술로는 Lee(2009)를 들 수 있다.] 그렇다면 다른 사회과학분야들에서 정치경제학이 현재 호황이라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파인(2006[2004]; Fine, 2010)은 이를 신자유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의 극단적인 과잉상태로부터의 ‘후퇴’(retreat)라는 관점에서 이해한다. 즉 1970년대 말 이후 사회과학 전반에 팽배했던 이와 같은 두 극단적 형태의 지적 지향이 1990년대 초반 들어 약해졌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포스트모더니즘과 관련해 말하자면, “사회과학 전반이 해체와 기호학에 사로잡혀 있다가, 이제 오늘날 자본주의의 본질을 권력과 갈등, 가난과 불평등, 환경파괴 등등의 체계로서 이해하는 쪽으로”(파인, 2006[2004], 392쪽) 점차 지적 관심이 이동함을 우리는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신자유주의는? 위와 같은 지적 지향의 변화는 앞서 신자유주의의 제1국면에서 제2국면으로의 이동과 대체로 겹친다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이 비록 자본주의의 본질적인 변화를 나타내는 것은 아닐지라도 지적 차원에서는 분명 비판적 사회과학에 좀 더 숨통을 틔워주는 역할은 했다. [이런 이중의 후퇴가 지적으로 어떤 결과를 낳았는가는, ‘범지구화’(globalisation)와 ‘사회자본’(social capital)이라는 개념이 다뤄지는 방식이 어떻게 달라졌는가를 보면 짐작할 수 있다. 파인(2006[2004]), 404-13쪽 참조.]

이와 같이 지적으로 이완된 상황을 배경으로, 그러나 동시에 경제학 내부에서는 비판적 목소리들이 그 어느 때보다도 위축되어있는 상황 속에서, 비판적 사회과학들은 오늘날의 범지구적 자본주의가 처한 물적 현실의 다양한 면모들을 풍부하게 밝혀낼 수 있었다. 이번 범지구적 차원의 경제위기는 크게 봐서 바로 이와 같은 지적 배경 위에서 터진 것이다. 경제학의 각별한 분발이 요구되는 게 그런 까닭이다. 하지만 그것이 경제학의 ‘자체정화’ 노력이기보다는 ‘정치경제학’이라는 기치 아래 다양한 분야들에서 나오는 비판들을 증진시키고 체계화하는 것이어야 하는 것도 같은 까닭에서다. (계속)

IIPPE: 경제학을 넘어 사회과학의 재편으로 (1)

IIPPE: 경제학을 넘어 사회과학의 재편으로 (2)

IIPPE: 경제학을 넘어 사회과학의 재편으로 (3)

IIPPE: 경제학을 넘어 사회과학의 재편으로 (4)

IIPPE: 경제학을 넘어 사회과학의 재편으로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