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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이른바 “권력 세습”에 대한 메모

북한에 대해 간단한 메모.

(1) 권력을 “세습”한다고 말이 많은데… 후계자로 지정했을 뿐 실제로 “세습”이 이뤄진 게 아니라는 사실을 사람들이 종종 잊는 것 같다. 그렇게 보면, 이번 “후계자 지정”은 뭐랄까… “정상적인” 정치과정의 일부라고 보는 게 좀 더 유의미할 것 같다.

다시 말해, 나는 이번 문제에서 핵심은 김정은이 아니라 김정일이라 본다. 김정일이 당장 내일모레 죽을 것도 아닐텐데… 자기 아들을 후계자로 지정한 것은 그것 자체로만 보면 별로 의미가 없다. 오히려 그는, 후계자를 “지정”하는 행위를 통해 모종의 정치적 효과를 노린 것일 테다.

뭐 김정일… 그다지 건강해 보이지는 않는다만… 그래도 그가, 자신이 3년 안에 죽는다고 생각지는 않을 것. 오히려 30년은 더 산다고 가정하는 게–비록 3년 뒤에 급사를 하더라도–합리적인 게 아닐까? 그런 그에겐, 자신의 권력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것이야말로 최대의 관심거리일 것. 세습 문제는 오히려 부차적이며 현재의 권력유지에 봉사하는 한에서 고려되는 게 아닐까 한다. (“김정일” 대신 “김정일로 대표되는 현재 북한 지배집단”이라고 해도 되겠다.)

현재 북한 정권이 오랜 위기상태에 있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안다. 작금의 “후계자 지정의 정치”는 기본적으로 그런 배경에서 즉 그에 맞선 위기 타개책으로 볼 필요가 있고, 그런 의미에서 “세습”이라는 부분에만 초점을 맞춰 무분별한 비난을 거기에 퍼붓는 것은 아무 도움이 안 된다. (사실 “후계자 지정의 정치”는 우리나라 정치판에서도 그다지 낯선 게 아니며, 그렇게 지정된 후계자가 진짜 권력을 내려받느냐는 또 별개의 문제다.)

그렇다면 왜 하필 자기 아들을 “후계자로 지정”한 것인가? 그야 난 모르지… ㅎㅎ 하지만 현재 체제의 안정성이라는 관점에서만 보더라도 김정은, 나쁘지 않은 선택 아닐까 싶은데… (함 봐라… 김정은… 어째 좀 모지라 보이지 않나? 옆에서 주무르기도 쉬워 보이고..) 어쨌건 여기서도 “세습”이라는 프레임은 그다지 좋은 것 같진 않다.

(2) 삼성 또는 남한의 재벌 일반과 북한을 비교하는 사람도 많고, 또 그것을 터무니없는 짓이며 결과적으로는 북한을 옹호해주는 논리라고 콧방귀 뀌는 사람도 많은 것 같다.

그런데 북한의 이번 “후계자 지정”을 일반적인 정치과정의 일부로 볼 수 있는 데 비해서, 우리나라 재벌의 세습은 어떻게 봐도 말이 안 된다. 바로 그런 점에서, 우리나라 재벌들은 북한보다 말이 안 되는 집단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김상봉 교수의) 삼성 불매운동

많은 이들이 ‘생활 진보’를 강조한다. 좋은 말이지만, 이런 주장이 ‘총체성을 포기한 구체성’이라면 나는 동의할 수 없다. 현실 속의 구체적인 악(惡)과 맞설 수 없는 논리이기 때문이다. 악은 구체적으로 발현되지만, 뿌리는 총체적이다. 따라서 총체성을 포기해서는 이런 악과 맞설 수 없다. 그리고 악과 싸우지 않는 진보는 결국 보수에게 전용되기 마련이다. 물론, 총체성에 대한 집착이 구체적 현실을 외면하는 핑계가 돼서도 곤란하다. (김상봉, 《프레시안》 인터뷰 중에서.)

원래는 제목만 보고서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지나쳤는데, 며칠전 친구가 좋다고 소개해줘서 제대로 한번 읽어봤다. 과연 비슷한 성격의 다른 글들과 차별점이 보인다. 마침 그가 지난 3월에 쓴 삼성불매운동을 제안한 글도 함께 봤다. (미리 밝혀두지만, 아래 내용은 김상봉 교수의 입장에 대한 상당한 공감 위에서 작성된 것이다. 그리고 아래 글을 읽기 전에, 링크된 그의 글들을 미리 보는 것이 좋다.)

지금 당장 ‘삼성 불매 운동’을 제안합니다! (《프레시안》, 2010년 3월 10일)

1.기본적으로 위 글과 인터뷰는 “왜 삼성이고, 왜 불매운동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보인다. 평소 이런 문제로 고민하던 이들에게는 매우 좋은 참고자료가 될 것 같다. 첫째, 왜 ‘삼성’인가? 바꿔 말하면, 왜 다른 나쁜 기업들은 놔두고 삼성만 가지고 뭐라 하는가? 김교수의 대답은 간단하다. 삼성이 그런 ‘악’의 구조의 정점에 서 있기 때문이다. ‘학벌’에 관한 문제를 제기하면서 서울대를 집중적으로 까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둘째, 왜 ‘불매운동’인가? 여러가지 답을 내놓을 수 있겠지만, 삼성엔 ‘노조’가 없기 때문이라는 게 김교수의 설명에서 핵심인 것 같다. 즉 (법이나 기타 공식적인 수단에 의한 외부적인 제제를 가하는 것도 불가능할 뿐 아니라) 내부적으로 문제제기를 할 수 있는 메커니즘이 없단 얘기. 따라서 바깥에서 문제제기를 해줘야 하는데, 이 경우 ‘불매운동’은 효과적인 방법이 될 수 있겠다는 것. 여기까지는 별로 새로울 것 없는 얘기지만, 김교수의 주장에서 핵심은 불매운동이란 하나의 형식일 뿐이므로 그 형식에 지나치게 매달릴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아닐까 한다. 삼성을 상대로 불매운동을 하는 많은 이들이 실제로 삼성의 이윤의 상당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반도체와 같은… 일반 소비자로서는 직접적인 불매운동을 벌이기 어려운 대상이라는 사실 앞에서 절망하곤 하는데(다른 기업에 대한 불매운동에서도 마찬가지다), 김교수의 위와 같은 주장은 이런 이들에게 의미있게 다가올 것 같다.

결국 불매운동이란 하나의 형식이고 방식이므로, 우리는 그것을 수행할 때, 그것이 속한 더욱 큰 맥락을 늘 염두에 둬야 한다는 게 김교수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아니었나 싶다. 바로 맨앞의 인용문에서 보이는 바와 같은… ‘총체성’의 강조.

2. 그럼에도, 김상봉 교수의 위 글에는 동의할 수 없는 내용도 많다. 이를테면 ‘우리 안의 이건희’에 대한 부분에서 얘기를 시작해볼 수도 있겠다. 김교수는 “삼성을 비난하는 많은 이들 역시 마음 한 구석에서는 이건희 회장을 닮고 싶어 한다”라고 하는데, 난 도무지 누가 그런 희망/욕망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겠다. 물론 이 맥락에서 김교수가 말하는 ‘이건희’란 곧 ‘더러운 족벌 재벌’이다. 그러나 일반인들이 이건희로부터 닮고자 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그가 가졌다고 종종 ‘광고’되는 진취적인 비전, 넓은 시야, 깊은 안목, 추진력 등이지, 결코 그의 재벌로서의 지위가 아니다. 그와 같은 특수한 재벌로서의 위상을 닮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바보가 우리 사회에 과연 있을까(있다 해도 그것이 허황된 꿈이라는 것은 제정신인 사람이라면 다 안다)? 물론 이건희의 그와 같은 미덕들은 대체로 ‘만들어진 신화’일 것이고, 또 상당부분 그가 어쩌다가 갖게 된 ‘금권’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그러나 좋은 비전을 갖는 데 반드시 돈이 많을 필요는 없다. 바로 그래서 사람들이 ‘이건희’–그것이 실제 이건희이든, 아니면 허구의/광고된 이건희이든–를 닮으려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면, ‘이건희’라는 현상이 전혀 터무니없는 것만은 아니다. 이건희와 같은 지위가 있을 수 있는 것, 즉 “1퍼센트 수준의 지분만 갖고 삼성 그룹 안에서 황제처럼 지배하는 일”이 적어도 대한민국이 발전해온 특수한 역사적 상황들 안에서는, 그리고 그 안에서만은 이해될 수 있는 일이다. 이것을 인정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일이다. 이런 사정을, 김교수가 그러하듯, 문명사회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치부하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 이건 요새 유행하는 말로 하면 ‘서양중심적 사고’의 일단이다. (내가 알기론 김교수는 이런 사고방식에 분명 반대할 것이다.)

실은 이 대목에서 김교수는 서로 모순되는 두 가지 입장을 동시에 주장하고 있다. 한편으로 그는 ‘불매운동’에 반대하는 논리, 이건희는 나쁘지만 삼성이 나쁜 것은 아니라는 논리, 즉 “삼성과 이건희를 분리하자”는 주장을 비판하면서 “그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한지 모르겠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는, 현대사회에서 기업은 “사회적 삶이 일어나는 지평”이며 일종의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라면서, 결과적으로 삼성은 살리되 그런 중요한 기업을 턱없이 부족한 지분으로 떡주무르듯 하는 이건희는 ‘기업 민주화'(=주주자본주의!)라는 이름으로 퇴출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과연 어찌된 일인가? 그래서 이건희와 삼성을 분리하자는 얘긴가, 말자는 얘긴가? 또는 분리할 수 있다는 얘긴가, 없다는 얘긴가?

그밖에도 김교수는 쉽게 납득할 수 없는 얘길 늘어놓고 있다. 우리나라엔 공화국 전통이 없어서 기업독재가 특히 심하다거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겐 ‘저항공동체’의 전통이 있기 때문에 희망이 있다거나 하는 얘기들. 말은 그럴싸한데… 글쎄… 서양에서 어림잡아 몇백년 된 ‘전통’을 대체한다면서 고작 30년짜리 ‘전통’을 내세우는 게 내겐 그저 초라해보일 뿐이다. (이건 내가 ’80년 광주’를 무시해서 하는 얘기가 아니다. 김교수가 앞뒤가 잘 맞지 않는 얘길 하고 있단 말이다.)

3. 김교수의 모순에서 잠시 주의를 돌려, ‘기업 민주화’에 대해 좀 더 말해보자. 단적으로 말해 나는, 우리나라에서 주주자본주의적인 논리(=1주1표)로는 우리나라에서 재벌체제를 종식시킬 수 없다고 본다. 재벌체제란 우리나라의 특수한 역사적 상황에서 그 나름의 논리를 가지고 출현한 것이다. 이런 ‘역사적 산물’을,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의 역사에는 전혀 낯선 ‘1주1표’라는 논리로 (말로써 ‘논파’하는 것이 가능할지는 몰라도) 물리적으로 ‘격파’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현재의 주식배분 상태가 어떻든, 우리사회엔 삼성이란 이건희의 선조가 만든 ‘개인기업’이라는 인식이 매우 두텁게 형성되어 있다. 이건희의 1퍼센트 남짓인 현재 지분을 근거로 삼성은 이건희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비록 틀린 말은 아니지만 애석하게도 그다지 힘이 실릴만한 주장은 아니다.

이 대목에서 우린 솔직해질 필요가 있다. 삼성은 하나의 기업이고, 또 이건희의 소유물이 아니다. 하지만 그것이 자본주의 기업인 이상 누군가에 의해 ‘경영’되어야 하고, 현재 그 경영인이 (삼성이 그의 소유물이냐 여부와 관계없이) 이건희인 것이다. 삼성이 이건희가 아닌, 이사회에서 선출된 다른 ‘전문경영인’에 의해 이끌린다고 해보자. 무엇이 달라질까? 적지않은 변화가 있기야 하겠지만, 이런 기업운영의 전범인 미국의 대기업들을 떠올리면(엔론 같은 거 말이다), 여전히 다방면의 로비나 회계부정, 분별없는 투자 등이 횡행할 것은 불보듯 뻔하다. 요새 ‘금융화’에 대해 말하면서, 기업들이 ‘생산적’ 투자는 뒷전으로 하고 단기이익에 급급한 ‘금융적’ 투자에만 열을 올린다는 비판이 많이 들린다. 실은 이는 단기적인 이익(주가동향)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전문경영인 체제가 갖는 태생적 한계이기도 하다. 이런 측면(글로벌한 맥락)에서 보면, 삼성 특유의 재벌체제는 장기적인 안목을 가지고 기업의 가치 극대화에 헌신할 수 있는 기업운영방식이기도 하다. (장하준 교수 같은 이들이 재벌체제를 사실상 옹호하는 것도 대체로 이런 맥락에서다.) 이건희가 언론에 나와 하는 얘길 들어보라. 세상에, 그만한 애국자가 없다. 삼성의, 나아가 대한민국의 앞날에 대해 걱정하는 것으로 치면, 그는 대통령 이상이다. 그리고 나는 그 말이 나름 그의 ‘진심’이라고 믿는다. 무슨 말인가 하면, 재벌체제에 대한 비판은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란 얘기다. 적어도 그것을 대체할 마땅한 대안이 있어야 하는데, 그게 뭐냐는 말이다. 적어도 ‘주주자본주의’는 적절한 대안이 될 수 없다는 게 내 생각이다.

그보단 이런 상황에서는, 비록 삼성이 이건희 선조의 가족기업으로 출발했을지라도 그 발달 과정에서 국가로부터의 엄청난 특혜와 수많은 노동자/대중의 희생을 수반했음을 밝히는 것이 훨씬 더 효과적일 것이다. (다시 장하준 교수 얘길 하자면, 그는 바로 이런 역사를 근거로 해서 삼성과 같은 재벌에 압박을 가하고 또 양보를 요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장교수를 비판하는 이들은, 삼성이 그런 근거를 인정하고 양보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결국 ‘1주1표’라는 논리도 이와 같은 삼성의 역사적 발달맥락 위에서만 (그나마 그것이 가지고 있는) 제 힘을 낼 수 있다고 본다.

4. 뿐만 아니라, 바로 이것이 중요한데, 김상봉 교수는 ‘삼성엔 노조가 없다’라는 식으로 눙치고, 또 그것을 당연시 하면서 지나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조를 만드는 것, 또는 삼성에서 일하고 있는 노동자들을 조직해내는 것은 삼성에 대적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일이다. 이것이 중요한 까닭은, 삼성이라는 기업에 의해 가장 많은 피해를 보는 것이 바로 거기에서 일하고 있는 노동자들이라는 아주 단순하고도 명명백백한 사실 때문이다.

사실 불매운동이라는 것도 이런 측면에서 바라볼 수 있다. 나는 기본적으로 운동이란 ‘희생’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보는데(운동이란 타인에게/불특정 다수에게 강요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하는데, 운동이 희생이라면 어떻게 강요할 수 있겠는가), 따라서 (삼성) 불매운동의 가장 치명적인 한계는 그것이 그 운동을 수행하는 측의 적지 않은 희생을 수반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물론 불매운동이 크게 효과적인 맥락들이 있다. 이를테면 모피 불매운동 같은 거. 쉽게 말해, 있어도 그만이고 없어도 그만인 물건에 대해 불매운동을 벌이는 것은 효과적이다. 그러나 미국산 쇠고기 불매운동 같은 것은 그 효과가 적을 수밖에 없다(포인트가 뭐냐는 거다. 쇠고기를 먹지 말라는 건가, 아니면 비싼 한우를 사먹으라는 건가?! 미국산 쇠고기 불매운동론자들이 나한테 한우 사먹을 돈 줄건가?). 삼성도 마찬가지다. 핸드폰을 생각해보자. 삼성핸드폰 안 쓰면 무엇을 쓸 것인가? 엘지? 아이폰? 둘 다 웃긴다. 아예 핸드폰을 안 쓰면 모를까… 이런 식의 불매운동은 난 기만적이라 본다. (하지만 내가 거창한 ‘운동’이 아닌 ‘개인의 생활지침으로서의 불매’의 의미까지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 누구나 그런 식의 사소한 지침들을 가지고 산다. 이를테면 별로 시답잖은 이유로 롯데에서 나온 과자를 안 먹는다거나, 지하철을 타지 않는다거나 하는 것들 말이다. 나도 요새 핸드폰을 바꿀 생각을 하고 있는데, 삼성 때문에 살짝 고민이다.)

다시 말해, 일반 소비자한테야 삼성 제품을 살 것인가 말 것인가가, 다시 말해 그 나름의 입장(=소비자라는 입장)에서 삼성에 투쟁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가… 하나의 ‘선택’의 문제요, (그런 투쟁을 하기로 마음먹었을 때엔) ‘희생’의 문제이지만(바로 이런 성격 때문에, 불매운동을 일컬어 중간계급운동, 개량주의적 운동이라고 하는 거다. 즉 이런 ‘희생’을 해도 사는 데 별 지장이 없는 사람들의 운동이란 얘기다. 물론 그렇다고 불매운동이 나쁘단 건 아니다. 그 한계라는 걸 알아야 한단 얘기다), 삼성에서 일하고 있는 노동자들의 입장에서는 삼성에 투쟁하는 것이 ‘생존’의 문제요, ‘필연’의 문제다. 바로 이런 가장 중요한 사항이 김상봉 교수의 논의에는 생략되어 있는 것이다.

김교수는 다음과 같은 예를 든다.

사람들은 더 좋은 제품을 사용하고 더 좋은 서비스를 제공받는 것을 소비자의 권리라 생각한다. 이 기준에서 보자면 삼성은 소비자들이 선호할 만한 기업임이 분명하다. 제품의 품질은 물론이고 저녁 시간에 냉장고 수리를 신청했더니 두 시간 반만에 고쳐줄 정도로(<한겨레> 3월 9일자 김선주 칼럼) 완벽한 애프터서비스를 제공한다지 않는가. 하지만 그런 완벽한 서비스의 이면에 그만큼 완벽하고 비인간적인 노동 통제가 감추어져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면 우리 모두 자본주의 사회의 톱니바퀴로서 도구화되는 운명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내가 아무 불편 없이 저녁을 준비할 수 있도록 나의 냉장고를 수리하러 온 노동자가 자기 가족과의 저녁 식사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으리라는 것을 헤아릴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의 비인간성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말은 좋지만, 과연 냉장고 고장나서 미치겠는데 저런 부처님 가운데 도막 같은 생각이 날까? (내가 경험한 바로는, 선진적인 영국 시민들도 이렇게는 생각 안 한다.) 사람들이 그런 생각을 하길 기대하는 것이 과연–‘윤리적으로'(!)–옳은 것일까? 위 대목에 이어 김교수는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경제와 소비에 대한 새로운 철학과 윤리이다”라고 말하는데, 과연 이런 “새로운 철학과 윤리”를 (다름아닌) ‘소비자’에게 기대하는 것이 쉬울까, 아니면 노동자들이 투쟁을 통해 위와 같은 어처구니없이 ‘친절한’ 서비스를 끝장내는 것이 쉬울까? 후자야말로 실제로 가능할 뿐만 아니라 이제껏 역사가 보여준 방식이 아닌가?!

5. 글이 늘어지려 한다. 나아가고자 하는 바도 흐릿해지고 있다. 내가 지금 많이 피곤한 것도 한 가지 이유다. 해서 여기서 끝맺어야겠다. 하나만 덧붙이자. 맨앞에서 인용한 인터뷰의 한 대목에서 김상봉 교수는 ‘총체성’을 강조했다. 결국 내가 보기에, 삼성 불매운동과 관련해서 결부되는 총체성이란, 김교수의 의도와 상관없이, 그런 운동의 의의와 한계를 정확히 인식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특히 그 ‘한계’라는 측면을 보면, 불매운동은 적어도 노동조합 건설 등을 통한 내부 노동자들의 투쟁, 그리고 이런 투쟁에 대한 외부로부터의 지원활동에 전적으로 부차적이다. 이와 관련, 몇 주 전에 링크해둔 장대업 교수의 글을 참조할 수 있겠다(링크). 김교수도 모르지는 않겠지만, 지금 이 시간에도, 삼성의 노동자들은 (나같은 인물이 이렇게 쓰는 것이 조금 부끄럽긴 하지만) 자신의 생존을 위해, 그리고 버젓한 노조의 건설을 위해 투쟁하면서 피눈물을 흘리고 있다. 이런 사정을 고려하지 않은 채 어떻게 ‘총체성‘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굳이 ‘옳음’에 대해 말한다면, ‘소비자’라는 이름으로 ‘불매운동’을 제안하는 것이 옳은가, 아니면 노동자들의 투쟁에 연대하는 것이 옳은가? (둘 다 옳다는, 공자님 말씀 같은 소리는 말자.)

또 하나의 가족, 아시아의 삼성: 反삼성에서 아시아 연대로

장대업, <삼성은 한국인의 자랑, 과연? 아시아 노동자의 눈에 비친 삼성>, 《프레시안》, 2010년 5월6일 [링크]


최근에 언론매체에서 본 기사 중 최고다. 관심 없어도 꼭 한번 보시길.

저자가 말한대로, ‘삼성’이란 우리에게 넘어야 할 하나의 벽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황금같은 기회를 주는 고마운 존재이기도 하다. 삼성에 대항함으로써 우리는 그동안 우리가 잃어버린 가치들을 되돌아보고 나아가 새로운 영역에서 그것들을 더욱 크게 펼칠 수 있는 계기를 갖게 될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렇게 우리가 아시아의 노동자/민중들과 함께 아시아를 가로지르는 길에, 사회과학의 미래도 있다고 나는 굳게 믿는다.

우리는 ‘이런 거’ 왜 못 만드냐고?

<우리는 ‘이런 거’ 왜 못 만드냐고?>, 오마이뉴스, 2010년 5월1일 [링크]

이 기사가 화제인 모양이다.

그러니까 대충 이런 얘기인 것 같다: 아이폰이란 곧 창의력이고, 따라서 우리 기업들이 아이폰을 못 만드는 건 창의력이 없어서다. 우리 기업들이 창의력이 없는 까닭은 꽉 막혀서 ‘반대’가 불가능한 위계구조 때문이며, 이런 위계구조가 사회 전체를 지배하고 있다는 데서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우리나라는 나라 전체가 ‘기업’이며, 대학도 기업의 보조기관에 지나지 않는다. 결국 문제는 교육이다. 인문학 교육. 미국인들의 창의력의 바탕엔 바로 이런 인문학 교육과 ‘노는시간’을 중시하는 태도가 깔려있다. 우리가 인문학 교육을 가벼이 여기는 한 우리나라에서 아이폰 나올 일은 없다.

그냥 황당하다. 인문학 교육? 중요하다. 하지만 우리나라에 그게 없어서 아이폰을 못 만든다는 건 좀 오바다. 그렇게 따지면, 영국이나 이탈리아, 독일, 스웨덴에서도 아이폰이 안 나오는 까닭은 뭔가? 위계적인 기업문화? 물론 문제가 있다. 하지만 그것땜에 아이폰을 못 만든다? 우리나라에서 비록 아이폰은 못 만들고 있지만, 다른 좋은 것도 많이 만든다. 일본 예를 들고 있는데, 일본인이 창의력이 빈곤하다고? 그냥 웃긴다…

여러 얘길 할 수 있을 것이다. 일단 문제인 것은, 아이폰을 거의 절대화/신격화하고 있는 것. 아이폰이 그렇게 좋은가? 이 글을 쓰신 분은 미디어를 연구하시는 것 같던데, 이 분은 아이폰과 같은 상품이 그와 같은 신격화의 경지에 오르는 데 미디어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에 대해 좀 더 공부를 해보시는 게 어떨까 싶다. 정말로 아이폰이 (다른 여러 요인들은 관두고라도) 미디어의 호들갑 없이, 다른 경쟁상품들과 순수하게 품질경쟁만을 통해 그와 같은 자리에 올랐다고 생각하는 걸까?

지금 이 분은 아이폰에 대해 말하면서, 결국 한국과 미국을 비교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미국 기업이 가지고 있는–실질적으로 말해 ‘처음부터’ 가지고 있던–물적, 기술적 우위에 대해선 한마디 언급도 없다. 굳이 여기서 ‘제국주의’ 얘기까진 하고싶지 않다.

내가 삼성을 옹호하려고 이런 얘길 하는 게 아니다. 말할 필요도 없이, 삼성도 이건희도 미워 죽겠다. 근데 이건희가 맨날 반도체 얘길 하면서 강조하는 그 불안감은 대충 이해한다. 바로 그게 현실인 거다. 삼성전자 같은 데서 거두는 (엄청난) 이윤 같은 건, 어떻게 보면, 미국 애들이 그냥 떨궈준 개평 같은 거라고까지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저 위 기사는, 먹을게 많아 체격도 좋고 돈이 많아 여유가 있으니 머리에 플라톤도 집어넣는 부잣집 애랑 생긴것도 볼품없고 머리엔 그저 돈벌궁리만 가득한 가난한집 출신 애를 비교하는 거라고 할 수 있겠다. 이 가난한집 애는 이제 나름 열심히 노력해서 어느정도는 살만해졌는데도 끝내 그 부잣집 애한테 결정적인 순간에 밀리곤 하는데, 이런 것들 두고 위 기사는 이런 상황이 되풀이되는 건 그 가난한 집 출신인 애 머리에 플라톤이 없어서라고 주장하고 있는 셈이다. 말하자면 그렇단 거다.

플라톤을 머리에 집어넣는 것은 중요하다. 대개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은,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영혼을 살찌우고 삶을 더욱 깊이있게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라는 식으로 말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런 측면에서 위 기사의 저자는 좀 생각이 다른 것 같다. 그는 결국, 플라톤을 머리에 집어넣어야 돈을 잘 벌 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경영자를 위한 인문학’ 같은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