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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6] 토마 피케티의 {21세기 자본}의 이론적 의의와 한국에의 시사점

일전에 블로그에 조금 끄적걸여 놓은 것을 정리하고 보완해 국내의 한 학술지에 냈다. 이는 ‘학술지’ 기고용으로 작성된 것이라, 문체와 내용이 다소 점잖아보일 수도 있겠다. 하여간 내 나름대로 정성껏 썼다.

이 글을 쓴게 6월 초순. 그때는 확실치 않았는데, 나중에 점점 명확해진 추가적인 생각들이 있다. 이에 대해선 조만간 다른 기회에 정리할 일이 있을 것이다.

그와는 별도로, 현재 피케티 비판을 담은 좀 더 포괄적인 성격의 저작도 준비중이다. 이는 나뿐만 아니라 여러 훌륭하신 선생님들과 함께하는 것이라 나 스스로도 기대가 많이 된다.

글 링크: 토마 피케티의 {21세기 자본}의 이론적 의의와 한국에의 시사점

참고로, 위 글은 한국사회경제학회가 발행하는 {사회경제평론}에 실렸다. 여기 공개하는 것을 허락해준 편집진께 감사드린다. 한편 같은 호에 KDI 류종일 교수의 서평도 함께 실려 있으니 관심있으신 분들은 찾아보시길 바란다.

사회경제평론 링크: http://ksesa.org/page/page_view?menu_num=166

로버트 실러, 강남좌파의 사상적 지주

오늘날 (정치)경제학을 비판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만약 그 비판의 대상을 찾는다면, 그것은 ‘누구’일까? 당연히 한 두 사람이 아니겠지만, 로버트 실러(Robert Shiller)는 분명 그 중 맨 앞줄에 세워야 할 하나일 것이다.

실러가 최근에 또 하나의 책을 냈다고 한다(참조). 제목은 {Finance and the Good Society}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12). 제목에서 암시되듯이 이 책의 핵심 내용은 “금융을 잘 길들이면 좋은 사회를 이루는 데 요긴하게 써먹을 수 있다”, 나아가 “그렇게 하는 데 금융은 필수적이다” 정도로 요약될 것 같다. 어떻게 보면 누구나 하는 말이긴 하지만, 그간 금융의 부작용에 대해 경고성의 글을 써온 그이기에 조금은 예외라고 여길 사람도 있을 것 같다.

위에 링크한 {The Economist} 기사를 읽다가 내용이 궁금해 출판사 홈페이지에 공개되어 있는 ‘Introduction’을 좀 봤다(여기). 그런데…. 이건 정말, 뜨아..!! 마르크스를 언급하는 부분, 나아가 마르크스가 말한 ‘코뮤니즘'(소련이나 중국의 현실 사회주의 말고)를 전유하는 방식, 그럼으로써 궁극적으로 금융의 이로움을 역설하는…. 말하자면, 이 ‘삼단논법’이 정말 가관이다.

우리에겐 익숙한 ‘시초축적’, 그러니까 생산수단을 박탈당한 무산자가 근대적 임노동자 계급으로, 그리고 반대로 생산수단을 독점한 이들이 근대적인 자본가 계급으로 분화되는 것을 다룬 마르크스의 한 대목을 인용하면서, 실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마르크스는 왜 노동자들이 자본[=생산수단]에 접근할 수 없는지를 명확히 설명하지 않는다. 그는 그저 자본주의 하에서는 사회의 목표들이 모든 사람들이 아니라 윗대가리들—자본에 접근할 수 있는 자들—에 의해 설정된다고 암시할 뿐이다. 가난한 노동자가 은행으로부터 신용대출을 하거나 부유한 투자자들로부터 자본을 얻어 사업을 시작하는 게 절대 불가능하다는 암묵적인 가정이 있을 뿐이다. (p. 5)

물론 우리는 위에서 실러가 ‘명확하지 않다’고 하는 것을 꽤 ‘명확하게’ 알고 있으며, 그것은 ‘암묵적인 가정’이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의 물적 현실임도 잘 알고 있다. 그걸 모르는 것은 그저 실러 자신일 뿐이다. 하여튼, 위와 같이 자기 멋대로 문제를 설정해 놓고 바로 이어서 그는 다음과 같이 ‘공자님 말씀’을 내놓는다.

그러나 이상적인 자본주의 시스템에서는, 훌륭한 사업 아이디어를 가진 사람들은, 적어도 원칙적으로는, 그것[자본을 구해 사업을 시작하는 것]을 할 수 있다. 우리의 자본주의 제도들이 아직은 그 정도의 이상에 걸맞게 성숙하진 못했지만, 역사를 들여다보면 금융의 민주화, 즉 모두에 대한 금융 기회의 개방으로 향하는 장기추세가 관찰된다. (p. 5)

헛, 금융의 민주화라고? 카드대란도 모르냐?! 그게 니가 말하는 민주화냐!!!…라고 당신은 비웃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설마 우리의 실러 교수가 그걸 모를리가! 그러나 그는, 그런 문제는 그저 사춘기와도 같은, 성숙을 위해 겪어야 하는 불가피한 아픔이라고 보는 듯하다.

하지만 이것은 금융 자본주의(financial capitalism)의 근본적인 문제는 아니다. 오히려 문제는, 금융 자본주의를 민주화하고 인간화하며 그것의 범위를 확장하는 것이다. 이와 똑같은 기본적인 문제의식이 마르크스의 새로운 사회에도 깃들어 있다. (pp. 5-6. 강조는 원문.)

이쯤 되면, ‘막장’이란 말도 아깝지 싶다.

아, 조만간 이 책도 누군가가 번역해서 내겠지? 예상 독자는? 뻔하지. 한마디로, 강남좌파. 쩝… 그 자칭 ‘강남좌파’들이 위 책을 들고, 자신들의 한때 마음속 숭배대상이었던 ‘마르크스’와 자신들의 현실적인 숭배대상인 ‘금융’을 함께 품으며 젠체할 거 생각하니, 벌써부터 토나올라고 한다. 기분 드럽네.

마, 니들끼리 잘먹고 잘살어라!

(이쯤에서, 과거 글 자본주의 질서를 둘러싼 정당성 전쟁도 한번 더 되새겨본다. 이 글에서 스티븐 그린과 로버트 실러를 한패거리로 묘사했는데, 공교롭게도 실러의 이번 책은 벌써 그 제목부터가 그린의 ‘선한 가치’를 떠오르게 한다.)

[펌] 정운영 on 가라타니 고진

웬만하면 글을 잘 퍼오지 않는데, 이건 (혹시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걱정에) 좀 예외로…

두 개의 글을 퍼온다. 하나는 [마르크스, 그 가능성의 중심]이라는 책에 대한 고 정운영 선생의 서평이고, 다른 하나는 세종대의 박유하 교수가 쓴 이 서평에 대한 반론이다. 정운영 선생께서 혹시 재반론을 하시진 않았나 모르겠다. 이 말도 안 되는 ‘반론’을 접하고 씁쓸해 하셨을 정선생을 생각하니 가슴이 아프다.

정선생의 서평엔 평소 그의 문체가 잘 살아나 있다. 한때는 그게 좀 짜증이 나 일부러 그의 글을 피하기도 했었는데, 선생을 더 이상 뵐 수 없다 생각하니 새삼 그리워진다. 그의 문투는 사실 그의 어투와 크게 차이가 없다. 아래 글이, 그의 그 저음의 차분한 목소리에 실려 전해지는 것 같다.

[1] 현기증 나는 ‘유식’과 구제불능의 ‘무식’
(출판저널, 1999년 7월 20일, 정운영 경기대 경제학부 교수)

가라타니 고진의 [마르크스 그 가능성의 중심]을 읽은 나의 소감은 한마디로 저자의 현기증 나는 ‘유식’과, 매우 실례되는 말씀이나 구제 불능의 ‘무식’에 대한 동시 병발의 찬탄이었다. 나의 무식은 그에 비할 바조차 아니므로 그의 무식을 탓하는 나의 태도는 독자의 판단에 맡기겠다.

우선 유식이다. 그의 인문학과 사회과학적 소양은 읽기조차 어지러울 만큼 넓고 깊은 것 같다. 이를테면 1990년대 들어서야 우리 지식인 사회에 불기 시작한 각종 포스트모던 사조를 저자는 이 책을 쓴 1970년대 초에 벌써 자유자재로 인용하고 있다. 그 중의 하나가 소쉬르의 언어학이다. 일례로 나무가 나무인 까닭은 그것이 꽃도 풀도 아니기 때문이며, 따라서 나무의 본질 따위를 캐는 일은 헛수고일 뿐이다. 언어도 그렇다는 것이다. 말에 본질 따위는 없으며, 이 말과 저 말의 ‘차이’만 있다는 설명이다.

가라타니는 이 논리를 마르크스 해석에 대입한다. 단절이 아닌 차이와 이동에 대한 관심이 마르크스 자신의 연구는 물론이고, 마르크스에 대한 우리의 연구를 위해서도 올바른 독해라는 것이다. 헤겔과 마르크스의 관계가 그렇고, 청년 마르크스와 후기 마르크스의 관계가 그렇고, 철학과 경제학의 관계가 그렇고, 보나파르트와 프롤레타리아의 관계가 그렇다는 말씀이다. 심지어 마르크스주의와 스탈린주의 사이에도 오직 차이만 있을 뿐이라는 그의 주장은 자칫 ‘반공 교재’로 이용당할 위험마저 없지 않다. 이에 대한 시비 판정은 독자의 몫이겠으나, 거기 동원된 저자의 도도한 변설과 화려한 수사는 가히 독자를 압도한다.

그리고 그의 무식이다. 저자는 언어에 본질이 없듯이 가치에도 본질이 없다고 주장한다. 나무에도 풀에도 사용가치만 있으며, 기껏해야 그 사용가치 형태의 차이에서 가치가 나타난다는 주장이다. 가치 분석은 마르크스 경제학의 핵심이며, 가치의 실체―그 크기와 형태까지―를 해명한 책이 <자본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마르크스는 가치의 본질이 분명히 있다는데, 가라타니는 없는 것이 마르크스에 대한 올바른 해석이라니 참 딱한 노릇이다. 여기도 물론 도피로를 뚫어 놓았다. 작가와 작품의 관계가, 작품과 독자의 관계가 다를 수 있다는 발레리의 관찰이 그것이다. 아무튼 마르크스가 무어라고 썼든 그가 그렇게 읽겠다는 데야 우리한테 무슨 할 말이 있으랴. 그러나 그것이 마르크스 독해의 ‘가능성’이라면, 그야말로 무지막지한 배짱이고, 전대미문의 혼동이다.

가라타니의 관점에서 소쉬르의 문자는 마르크스의 화폐에 해당한다. 화폐는 상품 교환의 수단이고, 적어도 현대사회에서 화폐가 없으면 교환이 불가능하다. 플라톤의 이데아 세계가 아닌 한, 형태가 없으면 실체도 없다는 가라타니의 관찰은 옳다. 그렇다고 형태가 실체를 대신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화폐형태만이 진짜이고, 가치는 의제적 허구라는 그의 주장은 옳지 않다. 마르크스에 대한 이런 왜곡이 “나는 마르크스주의에 부정적”이라는 그의 고백으로 미뤄 별로 놀랄 일이 아니다.

그러나 놀랄 일도 있다. 서울에서의 100원짜리 물건을 부산에서 120원에 팔면 20원의 ‘잉여가치’가 나온다거나, 오늘 100원짜리 물건을 내일 80원에 만든다면 역시 20원의 잉여가치가 생긴다는 설명이 그러하다. 무식은 죄가 아니라지만, 잉여가치가 이처럼 공간적 차이나 시간적 차별에서 발생한다는 최첨단 이론에는 정녕 사회과학―마르크스적이든 반마르크스적이든―이 졸도할 지경이다. 학생의 답안이라면 서슴없이 F학점을 매기겠지만, 사계 권위자의 말씀이니 나로서는 채점을 보류할 수밖에 없다. 다만 본질을 거부하고, 주체를 파괴하며, 중심성을 부정하는 그의 작업이 마르크스를 ‘우롱하는’ 포스트모던 사고와 일맥 상통하는 것은 분명하다.

[2] 가라타니 고진은 ‘무식’한가? 정운영의 ‘가라타니 고진’ 서평을 반박한다
(출판저널, 1999년 8월 20일, 박유하 세종대 일문과 교수)

가라타니 고진의 [마르크스 그 가능성의 중심]에 대한 정운영 교수의 서평(<출판저널> 제262호)은 ‘전공’자로서의 권위의식이 때에 따라 얼마만큼 책 한 권을 제대로 “읽”을 수 없게 만드는지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서평이었다.

정교수는 이 책의 인문학적 “유식”에 대한 찬사를 보내면서도 “구제불능의 무식”한 책이라고 말하는데, 그 이유는 가라타니가 “가치에 본질이 없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경제학자인 정교수에 의하면 “가치분석은 마르크스 경제학의 핵심이며, 가치의 실체를 해명한 책이 <자본론>”이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자본론>에서 분명 “가치”에 대해 논하고 있지만 “가치의 실체”에 대해 논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가라타니의 작업이 다름 아닌 이런 유의 혼동에 대한 비판이라는 사실은 아이러니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정교수에 의하면 “무지”와 “왜곡”, “무지막지한 배짱”과 “전대미문의 혼돈”으로 가득 찬 “무식”하고도 “딱한” 이 책이 보여주는 것은 “교환”이라는 행위에 내재하는 ‘근원적인 패러독스’다. 바꿔 말하자면 “교환”을 둘러싼 ‘인간의 조건’에 대한 통찰이다.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읽’는 행위를 통해 마르크스 자신도 자각적이지 않았을 수도 있는 무의식적 사유체계를 발견해 나가는 과정이기도 하며 그 과정을 통한 가라타니 자신의 사유체계 자체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이 책은 마르크스의 ‘의도’에 대한 주석서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자본론>의 표층이 아닌 심층을 분석한 책이라 할 수 있는데, 그것이 작금의 문학비평과 닮아있음은 저자가 문학비평가이기 때문이 아니라, 텍스트의 뒤편을 보려 하는 정신분석적 시도가 그의 작업의 근간을 이루기 때문이다. 그에게 문제시되는 것은 마르크스가 무슨 말을 했는가가 아니라 그 말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는가다.

“가치”란 그것이 “교환”됐을 때 비로소 “가치”가 된다. 그것이 설령 보석이라 해도 아무도 그것을 화폐를 주고 “교환”하려 하지 않는다면 그것에 본질적인 “가치”가 있다고 볼 수는 없다. 그것은 “가치”라는 것이 본질로서 근원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조건(공간 혹은 시간의 ‘차이’)하에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가치”는 ‘실체’일 수 없는 ‘허구’다.

어떤 체계건(그것이 역사이건 국가이건) 그것은 원천적으로 존재한 적도 없고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도 없음을 그는 보여주고 있으며, 그 한 예로서 그는 자본제 경제가 “외부”를 필요로 함을 증명해 보이고 있다. 가라타니가 언급한 발레리의 예처럼, 문학이라는 예술 ‘가치’ 역시 마찬가지다. 본질적이고 근원적인 문학적 ‘가치’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한 ‘시대’와 ‘공간’이 그것을 “가치”로 만들 뿐이다. 이른바 ‘예술’은, 근대 이후에 주목받으면서 하나의 “아우라”화한 것임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그것에는 ‘가치’가 있을 수 있으나, 그것은 정교수가 생각하는 것처럼 “본질”적인 가치는 아니다.

“본질을 거부하고 주체를 파괴하는 포스트모던 사고”가 정교수에게는 불편한 듯하지만, “본질”이며 “가치”의 ‘허구성’이 당연한 전제가 되고 있는 지성계의 “최첨단” 동향에 혹여 무관심하다면 “무식”한 건 가라타니인가? 아니면, 사회과학을 “졸도”시킨다는 가라타니적 사고를 ‘깨임’으로서 체험한 필자인가? “학생의 답안이라면 F학점을 매기겠”다는 정교수의 서평에 대해, 젊은 날 이미 자신이 전공하는 경제학부 교수의 논문을 영역하다가 여백에 “멍청이!”라고 쓰지 않을 수 없었다던 가라타니가 과연 몇 점을 줄지 궁금하다.

[서평] 88만원 세대 (우석훈, 박권일)

다음 글은 [88만원 세대]를 다소 뒤늦게 읽고서 2008년 5월 하순에 세 번에 나눠 쓴 것이다. 원래는 진보넷 불로그에 올렸던 것인데, 다소 산만하게 전개되었던 원래 글을 가다듬어 지금 여기에 옮겨놓는다.


1. 경제학으로 사회현상을 설명하는 것인가, 사회현상으로 경제학을 설명하는 것인가

이 책을 처음 손에 집어들었을 때 가장 강하게 먼저 와 닿았던 것은, 공저자 중 하나인 우석훈이 서문에 쓴 다음과 같은 구절이었다. “이 책은 경제학에서 주로 사용되는 개념들의 도움을 받아서 논지를 전개한다.” 즉 그는 오늘날 대한민국의 10대가 처한 현실을 하나의 “경제학의 대상”으로 보고, 그것을 경제학의 개념을 빌려 풀어내겠다고 하는 것이다. 경제학도로서 흥미를 갖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인데, 그러나 책을 읽고 나서 든 생각은 저자들은 특정한 사회현상을 경제학의 도움을 받아 풀어내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우리에게 익숙한 흔한 사회현상의 예를 들어 상대적으로 덜 친숙한 현대 경제학의 여러 개념들을 설명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 만약 이런 평가가 타당하다면, 그것은 이 책에 매우 치명적일 수 있다. 왜냐하면 이 경우, 설령 저자들이 이 책을 통해 오늘날 10대가 처한 현실을 경제학적으로 풀어내는 것을 목표로 했다 할지라도, 결과적으로 그들이 한 일이란 어차피 뻔한 일을 굳이 예로 들면서 자기들이 알고 있는 (그러나 독자들은 잘 모르는) 다양한 경제학적인 개념들을 설명한 것밖에 안 되기 때문이다. (한편 여기서, 그렇다면 그런 방식을 통해 경제학적 개념들을 제대로 설명했느냐 하는 질문이 떠오를 것인데, 내가 판단하기엔 그렇지도 못한 것 같다.)

위 이야기를 몇 가지 예를 통해 좀 더 쉽게 설명해 보겠다.

[예 1] “왜 한국인들의 첫 섹스는 늦는가?”라고 물으면서 저자들은 다음과 같이 그들 나름의 대답을 내놓는다.

물론 지금 고등학교 1학년이나 2학년 소년 또는 소녀가 섹스를 즐기겠다고 공공연히 선언했다가는 집에서 ‘난리’가 날 것이다. 이게 알려진다면 사회적으로도 큰 물의를 일으킬 수 있다. 하지만 수요와 공급 그리고 ‘선호도’라고 부르는 선호함수만으로 놓고 보면 문제가 될 것은 없다. 16세 이상의 ‘성인’들에게 섹스를 제도적으로 금지하고 있는 것은 긴 인류의 역사로 보면 결코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다. 이 상황을 표준경제학적으로 설명한다면 ‘예산제약’이라는 용어가 필요하다. 청소년들이 원하는 것은 섹스 혹은 결혼생활인데,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예산’이 없기 때문에 섹스도 참고, 결혼도 뒤로 미루어야 하는 것이다. 좀 복잡하지만 이것을 우리 식으로 쉽게 말하자면, 그냥 “돈이 없기 때문”에 참아야만 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 나이에 성적 충동이 없고, 사랑하는 사람과 가정을 이루어서 같이 살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경우라면 경제학의 연구 대상이라기보다는 심리학의 연구 대상에 더 가깝다. (30-1쪽)


[예 2] 다른 선진국들에 비해 대학등록금이 턱없이 비싼 우리나라의 현실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저자들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현재의 시스템에서 18세에 고등학교를 졸업한 청소년이 취할 수 있는 방법은 세 가지이다. 첫째는 대학 진학을 포기하는 방법이다. 물론 이것도 하나의 해법은 해법이다. 두 번째는 등록금 융자와 같은 개인융자로 비용을 지출하고, 나중에 고소득의 연봉으로 빚을 상환하는 방법이다. 전형적인 인적자본론 이론에 따른 해법인데, 만약 대학 졸업 이후 고소득의 연봉을 확보하지 못한다면 평생 초기 출발 때의 빚을 떠안고 살아야 하는 부작용이 따를 수 있다. 개인의 삶을 전체적으로 디자인한다면 위험부담이 상당히 큰 방식인데, 투자 이론에서는 이를 ‘위험선호도(risk preference)’가 높다고 표현하고, 이러한 행위를 ‘위험감수형 행동(risk-taking behavior)’이라고 부른다. 세 번째 해법은 부모의 재정에 기대는 것인데, 이는 세대 간 소득 이전 모델로 설명할 수 있다. 물론 이런 경우에는 부모로부터의 독립이나 동거와 같은 자신의 의지에 의한 선택은 꿈도 꿀 수 없게 된다. (50쪽)


책 전반에 걸쳐 넘쳐나는 예들을 모두 여기서 내놓을 수는 없다. 그냥 위 두 개의 예만 가지고 얘기해 보자. 사실 저걸로도 충분하다.

나는 [88만원 세대]라는 책 곳곳에 널려있는 위의 두 예와 같은 구절들을 보며 무척 실망했다. 미리 말해둘 것은, 나는 이 책이 매우 좋은 시도를 하고 있다고 진심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 책은 그런 좋은 의도를 그다지 성공적으로 이뤄내지 못한 것 같다. 내가 보기에 (앞서 인용한 서문에서 우석훈이 이 책의 핵심적인 설명틀로 내세우는) “경제학”은 이 책의 논지 전개에 전혀 또는 거의 필요하지 않다.

그것은 위의 두 예에서 아주 명확하게 드러난다. 먼저 [예 1]. 이 단락의 핵심은 “한국의 청소년은 돈이 없어서 섹스도 동거도 못한다” 정도가 될 테다. 자 여기 하나의 현상, 즉 “한국의 청소년은 다른 나라 애들은 다 하고 다니는 섹스도 동거도 못한다”는 “현상”이 있다. 이건 누구나 안다. 저자들의 의도대로라면, 그들은 이런 현상의 본질 및 그 배후에 있는 어떤 메커니즘을 “경제학의 개념을 사용해서” 설명해줘야 할 것이다. 그들은 “이 상황을 표준경제학적으로 설명한다면”이라고 함으로써 앞으로 뭔가 그럴싸한 “경제학적 설명”을 내세울 것 같은 인상을 풍긴다. 이에 따라 저자들은 ‘선호도’, ‘선호함수’, ‘예산(제약)’ 등의 경제학 용어들을 들여오는데, 그럼으로써 그들이 결국 밝혀낸 위 “현상”의 원인은 “돈이 없어서”라는 거다! 이 이상의 설명은 없다. (혹시 이 단락 뒤에 좀 더 자세한 설명이 나와 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사람도 있겠는데, 그런 건 결코 없다.)

“돈이 없어서 섹스를 못 한다”라는 것은 (경제결정론으로 욕먹는)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을 공부하는 내가 봐도 정말 낯 뜨거운 수준의 경제결정론이 아닐 수 없다. “돈이 없어서” 섹스를 못한다는 것도 도통 이해가 안 가지만, 그러나 내가 문제 삼고자 하는 것은 그게 아니라 그런 논리전개 과정에서 “경제학”이 하는 역할이다. 거두절미 하면, 위 [예 1]에 등장하는 ‘선호도’, ‘선호함수’, ‘예산(제약)’ 등의 “경제학적 개념들”은 논지전개에 전혀 필요치 않다는 거다. 대체 그것들이 단락에 들어감으로써 어떤 논지전개상의 “이익”이 있는가? 결국 위와 같은 논의를 통해 우리가 실질적으로 얻을 수 있는 지식이란, “음, 경제학에서는 그냥 ‘돈이 없다’라고 하면 될 것을 ‘예산이 없다’라고 하는군”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바로 이런 까닭에 나는 이 책이, 주어진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몇 가지 경제학 개념들을 가져온 것이 아니라, 반대로 딱딱한 경제학의 개념들을 일상에서 우리가 쉽게 마주하는 현상을 통해 쉽게 독자에게 이해시키기 위해 쓰인 것처럼 보인다고 하는 거다. 요컨대 저자들은 몇 가지 생경한 경제학적 개념들을 동원해서 결국 “한국 청소년들은 돈이 없어서 섹스를 못 한다”는 아주 단순무식한 결론을 냈단 거고, 또 다른 한편으로 말하면, 그들은 그냥 “한국 청소년들은 돈이 없어서 섹스를 못 한다”라고 그냥 말하면 될 것을 가지고 불필요하게 어려운 경제학적 개념들을 끌어왔단 거다. 그리고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이 책의 성격도 아주 심각하게 바뀌는데, 그것은 (원래 저자들에 의해 의도되었듯이) 경제학을 도구로 삼아 우리 사회의 한 단면을 파헤치는 분석적/비판적인 저작이 아니라, 친근한 사회현상들 속에 숨어있는 경제학적 개념들을 찾아내보는 일종의 “경제학 입문서”가 되어 버렸다. 더 길게 말하진 않겠지만, 이와 같은 사항은 [예 2]를 보면 더 명백해진다. 그냥 지나가기 아쉬우니까 예를 하나만 더 들어보겠다.

사실 이런 새로운 종류의 문제에 대해 본격적으로 우리 사회가 부딪힌 건 이번이 처음이다. 기성세대 대부분은 이 문제가 성장률이 낮기 때문에 발생한다고 생각한다. 또 일부에서는 양극화 문제라고도 하는데, 단순히 양극화라 하기엔 문제가 너무 복잡하고 다면적이다. 경제학에서는 이런 종류의 문제를, ‘규모의 문제’가 아니라 ‘질에 관한 문제’라고 하고, ‘크기’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구조’에 관한 문제라고 표현한다. 조금 더 최신 경제학의 표현을 빌리자면 ‘시스템에 관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또, 규모가 커지더라도 그에 비례하는 좋은 변화가 같이 발생하지 않으므로 ‘비선형적 문제’라고 표현할 수도 있다. 학문은 원래 현실보다 한 걸음 늦는 법이어서 그런지, 우리나라 경제학계 내부에서는 이런 문제에 대해 별로 관심이 없는 듯하다. (64-5쪽)


여기서 저자들은 자기들이 말하는 “문제”를 경제학, 나아가 “최신” 경제학적으로 풀어낼 것 처럼 말한다. 그러나 정작 “설명”은 볼 수 없다. 여기서도 그들은 그저 “용어”만을 나열하고 있을 뿐이다. “아하~! 그런 현상을 ‘최신’ 경제학에서는 ‘시스템에 관한 문제’라 하는군!”

한편, 이런 과정에서 그렇다면 경제학 또는 경제학적 개념들이 적절하게 구사되고 설명되었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이 점은 앞으로 더 보도록 하겠다.


2. 우석훈/박권일의 경제학

이제 이 책의 내용에 좀 더 주목을 해보자. 사람은 보통 자기가 처한 입장에서 책을 보기 마련. 경제학 연구자로서 나는 이 책의 저자들이 경제학을 바라보는 방식, 또 바로 그 경제학을 사회현상과 연결시키는 방식, 끝으로 그런 과정에서 그들이 채용하는 논리전개의 방식 등에 관심이 많았다. 따라서 그런 사항들을 중심으로 좀 더 이야기해 보겠다.

(1) 경제학이란 무엇이고 그 대상은 무엇인가

맨 먼저, 저자들이 경제학을 바라보는 방식. 내가 보기에 그들은, 인간의 사회적 삶의 물신화된 하나의 영역, 즉 흔히 “돈”에 관련된 것으로 일컬어지는 영역을 “경제”라고 이해하고 그것을 다루는 학문을 “경제학”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다음과 같은 구절들을 보면 말이다.

  1. 오늘의 청소년들이 지난 3천여 년 동안 또래의 집단이 누렸던 자유를 가지고 있지 못한 이유가 윤리나 규범의 억압 때문이라면, 경제학이 관심을 가질 문제는 아니다. 그러나 가난하고 돈이 없다는 이유로 권리가 통제되고 있다면, 그것은 분명 경제학의 대상이다. (32쪽)
  2. 물론 그 나이에 성적 충동이 없고, 사랑하는 사람과 가정을 이루어서 같이 살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경우라면 경제학의 연구 대상이라기보다는 심리학의 연구 대상에 더 가깝다. (31쪽)
  3. 사회학, 문화인류학 등 여러 분야에서 다양한 이야기가 나올 수 있겠지만, 경제학자로서 나는 돈 얘기로 이를 풀어갈 수밖에 없다. (44쪽)


사실 경제(학)를 위와 같이 이해하는 것, 사회(학), 정치(학), 문화(학) 등과는 구별되는 하나의 영역, 좀 더 구체적으로는 “돈”에 관련된 영역이라고 이해하는 것은, 제 정신 박힌 좌파들에겐 경계의 대상이었다. 우리는 이명박이 “나는 경제 대통령, 경제는 내게 맡겨라”라고 말할 때, “아니다, 당신의 ‘경제’ 이해는 틀렸다. 경제는 그게 다가 아니다”라고 반박할 줄 알아야 한다.

경제란 단순히 “돈”에 관련된 문제도 아니지만, 사회/정치/문화 등의 “영역들”과 구분되는 것도 아니다. 다시 말해, 어떤 문제는 “정치”의 문제, 또 다른 어떤 문제는 “경제”의 문제 등등인 게 아니란 얘기다. 오히려 주류, 비주류를 막론하고 전통적으로 경제학은 흔히 경제학의 대상이 아닌 것처럼 보이는 문제나 인간의 행위에 담긴 “경제(학)적 의의” 내지는 “경제적 동기”를 캐내는 데 많은 노력을 들여왔다. 그런 과정에서 얻은 게 있다면, 비록 그런 “경제적 설명”이 모든 것을 말해주는 것은 아니지만, 흔히 윤리니 법률이니 하는 것과 같이 그저 “말”에 지나지 않는 것의 근저에 깔린 “물적 이해관계(material interests)”에 사람들이 주의를 기울이도록 만들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주어진 현상에 대한 왜곡된 이해만을 반영하는 한낱 “말”이 아니라 “물적 이해관계”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저자들이 (1)에서 그러듯이 그저 무턱대고 “이 문제는 윤리의 문제가 아니라 경제의 문제야”라고 할 게 아니라, 그 문제가 경제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윤리의 문제라고 볼 수도 있음을 인정하고 바로 그 “윤리적 문제”의 근저에 깔린 “물적 이해관계”를 밝혀내는 데 힘을 쏟아야 할 것이다.

사실 내가 앞에서 저자들의 주장 즉 “한국 10대는 돈이 없어서 섹스도 동거도 못 한다”라는 주장이 “경제결정론”이라고 한 것도 바로 거기엔 위와 같은 사려 깊은 이해(understanding)가 없기 때문이다. (경제결정론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이런 비판이 지금까지 대개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가해졌던 데 반해, 내가 보기엔 가장 악질적인 경제결정론자들은 저자들이 꽤 호의적으로 인용하기도 한 Gary Becker 같은 주류경제학자 무리들이다. 그는 개인이 자식을 몇 명 낳을까와 같은 문제를 결정할 때 ‘경제적 동기’가 중요하다고 했는데, 과연 그게 말이 되느냐 말이다. 내가 보기엔 저자들이 말하는 경제학 또는 경제적 설명이란 그런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 같다.)

(3) 에 대해선 따로 덧붙일 게 없지만 (2)에 대해선 조금 더. 저자들은 그들이 “이런 경우”라고 일컫는 것을 매우 예외적인 현상으로 보는 모양인데, 내 생각은 다르다. 물론 그들의 말대로 그게 지극히 예외적인 경우라면 심리학의 사례연구(case study)감일 게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적어도 대한민국에 이성과 동거를 갈구하는 10대는 별로 없다. 왜 그런가? 바로 그것을 밝혀내는 게 중요한 것인데, 저자들은 오히려 “대한민국 10대는 대부분 동거를 하고 싶어한다, 그런데 못한다”라는 무지막지한 전제를 깔고 있다. 어쨌든 이런 문제는 분명 심리학의 대상이 될 것이다. 그러나 저자들이 말한 대로 인간 개개인에 대한 사례연구로서의 심리학이 아니라 사회 전체의 병리적 현상에 관심이 있는 사회심리학의 대상에 더 가깝다. 그러나 그게 끝은 아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저자들은 이런 현상들을 경제학의 대상이 아니라고 내팽개쳐버릴 게 아니라 오히려 그런 사회적 병리현상의 근저에 깔린 물적 이해관계, 즉 이런 사회현상을 낳고 또 끈질기게 유지시키는 바로 그 물적 이해관계를 밝혀내는 데 힘을 쏟아야 한다. 내가 보기엔 바로 그게, (문제의 전부는 결코 아니지만) 경제학이 진정 개입해야 할 지점인 것이다.

(2) 경제학 개념의 구사방식: 동어반복

경제 및 경제학에 대한 위와 같은 이해, 즉 마르크스라면 분명 “피상적인 이해”라고 불렀을 위와 같은 이해에 기반을 두고 저자들은 논의를 펼치고 있다. 따라서 경제학의 여러 복잡한 용어들을 가지고 그들이 관심있는 현상을 설명하려 할 때에도, 필연적으로 문제가 노출된다. 이 대목에서 내게 가장 인상적인 점은, 저자들이 여러 용어들을 사용하는 방식이 매우 “동어반복적”이라는 것이다. 이는 이미 위에서도 일부 살펴봤다. 그들이 내세우는 경제학적 용어들은 분석/설명에 채용됨으로써 뭔가 새로운 것을 덧붙이기보다는 그저 누구나 다 아는 것을 “재서술”할 뿐이다. 그러니까 이건 가장 단순한 수준의 동어반복이다. 하지만 강조하건대, 이건 단순히 저자들만의 잘못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그들이 쓰는 언필칭 “개념들”, 그들이 옹호하는 이른바 “경제학” 자체의 문제이기도 하다. 우석훈이 쓴 서문의 일부인 다음 인용문을 보자.

하지만 이런 세대 간 불균형이 문화적 성찰 혹은 철학적 사유 없이 시장에서의 거래자 관계로만 환치될 때 세상은 순식간에 전쟁터가 되어버린다. 이러한 세대 간 불균형은 20대들의 힘만으로는 절대 균형을 회복하지 못한다. 유일한 가능성은 그들이 “더 이상 승자 독식 게임을 하지 않겠다”고 윗세대에 대항해 집단 반란을 일으키는 경우이지만, 죄수의 딜레마라는 게임 법칙에 걸려 있기 때문에 그들 스스로는 불균형에서 헤어 나올 수가 없다. (22쪽)


언뜻 보면 저 밑줄 친 부분이 말이 되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인과관계의 외형을 취하고 있지만, 그것도 아니다. 일단 저 진술은 거꾸로 되어야 한다. 즉 “죄수의 딜레마에 걸려 있어서 불균형에서 못 빠져나오는 것”이 아니라 “불균형에서 헤어나올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을 “죄수의 딜레마에 걸려 있다”라고 부르는 것이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 때문에”로 연결되어 있다고 해서 다 같은 인과관계가 아니란 거다. 내가 보기에 저 진술은 인과관계가 아니라, “죄수의 딜레마”의 정의(definition)를 재진술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즉 “… 스스로 헤어나올 수 없는 것을 ‘죄수의 딜레마’라 한다”라는 진술을, 인과관계의 외형을 입혀 재진술한 것, 즉 동어반복이란 얘기다. (“못 빠져나온다”라는 “현상”에 대해 “걘 죄수의 딜레마에 빠져서 그래”라는 설명은 아무런 정보도 추가하지 못한다. “왜” 죄수의 딜레마에 빠졌는가가 중요한 거다.)

얘기가 좀 복잡하니 다른 방식으로 풀어보자. 일단 여기엔 “죄수의 딜레마”라는 경제학의 용어가 등장한다. 사실 “죄수의 딜레마”란 어떤 현상에 대한 진술에 지나지 않는다. 거기엔 어떠한 “심오함”도 없다. 그것은 그저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어떤 상황을 한 마디로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어떤 상황을 보고 “너는 죄수의 딜레마에 빠져있는 거야”라고 하는 것은, 비록 그 상황을 (적어도 “죄수의 딜레마”가 뭔지 알고 있는 청자에게는) 한마디로 요약해주는 기능은 갖지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다시 말하면, 위 인용구절에서, 오늘날의 20대들이 “그들 스스로는 불균형에서 헤어나올 수가 없”는 까닭은, 저자들이 말하듯 그들이 “죄수의 딜레마에 빠져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죄수의 딜레마에 빠지게 만든 “그 어떤 다른 원인들” 때문이다. 바로 이와 같이, “죄수의 딜레마”와 같은 경제학 개념들, 즉 그 자체로는 그저 현상에 대한 재진술(즉 동어반복)에 불과한 것이면서 마치 그것이 그 현상과 관계된 모든 진실을 담고 있다는 듯이 그런 개념들을 이해하는 것을, 마르크스는 경제학적 범주에 대한 물신주의적 이해라고 불렀다.

(동어반복 얘기가 나온 김에 재밌는 것 하나 더. 27쪽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엥겔스는 폴리가미라 부르는 난혼 시절에서 어떻게 모노가미라고 불리는 일부일처제가 등장하게 되었는가…를 규명하는 데 상당히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요 밑줄 친 부분은 그러니까 이런 거다. “labour라 부르는 노동”, “cat이라 불리는 고양이”. 이런 것이 바로 “경제학 박사”이자 “현직 인류학 강사”의 표현이다.)


3. [88만원 세대], 무지의 향연

앞에서, 이 책의 저자들이 말하는 “경제학적 개념들”이란 것이 사실은 현상에 대한 재진술일 뿐인, 아주 피상적인 “말”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더 나쁜 것은, 그들은 여기에 덧붙여 전통적으로 경제학에서 벼려져 온 (비록 오늘날의 “주류” 경제학에서는 거의 무시당하기는 하지만) 진정한 “개념들”에 대한 무지를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그들이 “노동”이라는 개념을 쓰는 방식을 보자.

학생들이 ‘공부’라는 이름으로 수행하는 일은 지적 노동이며, 그것도 경쟁이라는 명확한 틀을 가지고 있는 중노동이다.” (40쪽)


대체 저자들은 “노동”이 뭐라고 생각하는가? 더구나 위 구절은 흔히 부르주아 학자들에 의해 자행되는 아주 천박한 짓거리, 즉 노동을 “이론적으로” 천시하는 짓거리를 그대로 되풀이하고 있다. 우리가 이론에서든 현실에서든 노동을 굳이 신성시할 필요는 없지만, 위와 같은 몰개념적인 표현이 경제학자, 아니 “경제학 박사”의 손끝에서 나왔다는 게 놀라울 뿐이다. “공부”가 “(중)노동”이다?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그들에게 “임금”이라도 줘야 한단 얘긴가?

착취”라는 개념도 마찬가지다. 이 말은 원래 자본주의에서 자본-노동 사이의 임노동관계를 표현하는 것이었다. 즉 자본가에게 고용된 노동자는 자본의 통제 아래 노동을 수행하게 되는데, 노동자가 받는 임금(=가변자본)은 그가 실제로 자본가를 위해 행한 노동량에 훨씬 못 미치며 그 차액을 자본가가 가져간다. “착취”는 바로 이런 사정을 표현한다. 이런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저자들은 요새 젊은 세대가 나이든 세대에 의해 “착취당한다”라는 표현을 심심치 않게 쓰고 있다.

그래, 이해를 못 하는 바도 아니다. 그들은 10대/20대가 나이든 세대들에 의해 뭔가를 “빼앗기고 있다”라는 얘길 하고 싶었을 거다. 그러나 “빼앗기고 있다”라고 하면 될 일을 왜 “착취”라고 하냔 말이다. 내가 지금 말장난을 하는 건 아니다. 이건 매우 중요한 문제다. 위에서 봤듯이 “착취”란 생산의 범주다. 그러나 저자들은 그것을 “분배”의 영역에서 적용하고 있기 때문에 특히 문제가 되는 거다. (그러니까 나는, 단순히 마르크스가 그렇게 썼기 때문에 이러는 게 아니란 얘기다. 이 얘긴 뒤에서 더 다루겠다.)

그런데 잘 보면 저자들의 무지(또는 “매우 특이한 이해”)는 단순히 경제학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보자.

사람들은 잘 읽지 않지만, 마르크스는 <자본론> 2권에 영국의 좁은 다락방에 갇힌 채 쭈그리고 앉아 면실을 자아내는 키 작은 소년 소녀들의 모습…에 대해서 상당히 많은 지면을 할애해서 묘사하고 있다. (54쪽)


글쎄… “사람들은 잘 읽지 않지만”이라? 대체 왜 이런 구절을 붙이는 걸까? “사람들은 잘 읽지 않지만 한 번쯤 읽어볼 만한 책”이란 뜻일까, 아니면 “사람들이 잘 읽지 않기 때문에 자기들도 안 읽어봤다”는 뜻일까? 그러나 불행히도 <자본론> 2권에는 저런 묘사가 없다. 1권에는 있지만 말이다. 이 책 전체의 논지로 봤을 때 “토익책을 덮고 <자본론> 같은 책도 좀 봐라, 자식들아”라는 함의를 가지고 있을 “사람들은 잘 읽지 않지만”이라는 구절이 더더욱 “기만적으로” 보이는 것은 바로 이래서다.

너무 지나친 비아냥 아니냐고? 설마.. 오타 아니겠냐고? 나도 그렇게 생각했었다. 아니, 심지어 나는, 내가 <자본론> 2권에 있다는 저 내용을 기억 못하는 것 아닌가, 하면서 자책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책의 곳곳에는, 실제 저자들이 어땠는지는 몰라도 저것이 “오타”가 아닐 것이라는 심증을 굳게 만드는 예들이 적지 않다.

사회학의 용어를 빌리자면, 이 ‘세대’에 대한 ‘사회적 통제’가 진행되고 있다고 표현할 수 있다. 물론 루이 알튀세의 ‘이데올로기 국가기구’와 같은 개념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지만 누가 어떠한 의도로 통제하는지 설명하긴 좀 곤란하다. (32쪽)


어차피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ISA)에 대해 더 설명하거나 논의할 것도 아니라면 사실 저 대목에서 굳이 알튀세 이야기를 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저자들은 했는데, 불행히도 저 짧은 문장은 (때때로 짧은 구절이 핵심을 표현해주기도 한다지만) 저자들의 무지만을 표현할 뿐이며, 더 극단적으로 말하면 마르크스주의를 음해하려는 매우 불순한 의도까지도 읽을 수 있다. (일전에 홍기빈에 대한 글에서 나는, 굳이 마르크스를, 또 알튀세를 엿먹일 게 아니라면, 잘 알지도 못하는 저런 식의 얘긴 하지 말라고 했었다.) 내가 여기서 ISA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할 필요는 없겠지만, 그것에 대해 “‘누가’ 통제한다는 건데?”라고 묻는 것보다 부적절한 것은 없다. 그런데 진짜로 어이없는 것은 따로 있다. 위와 같은 몰이해를 과시한 다음 저자들은, 바로 한 페이지 뒤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가난해서 결혼할 수 없고, 그래서 10년 이상을 더 기다려야 하는 우리나라 이팔청춘들의 사랑은 슬프다. 그러나 사랑이 제약받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지금의 청소년들의 삶이 슬픈 것은 아니다. 그들은 상상도 하지 못한 더 큰 음모가 이들을 기다리고 있다. (33쪽)


대체 “누가 어떠한 의도로” 음모를 꾸민다는 건가? 그들을 “착취”하는(!) 기성세대의 음모인가? (이 자리에서 논의를 더 자세히 진행시킬 수는 없지만, 내가 굳이 이런 부분을 지적하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위와 같은 일관적이지 않은 표현들은, 사회를 구성하는 다양한 집단이나 개인들 사이의 상호작용, 말하자면 “사회적 과정” 내지는 “경제과정”에 대한 저자들의 이해가 매우 불명확함을 내비치기 때문이다.)

자기들이 다루는 대상에 대한 저자들의 지식이 부족하거나 또는 단순히 틀렸음을 보여주는 증거는 그 밖에도 많다. 먼저 그들은 “독일 68세대의 이론을 대변했던 사람들은 프랑크푸르트학파라고 부르는데, 주로 프랑크푸르트 대학에서 강의했던 마르쿠제와 아도르노 같은 교수들이었다”(156쪽)라고 했는데, 프랑크푸르트학파는 “프랑크푸르트 대학”이 아니라 그 대학의 부설 “사회연구소”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이 둘은 전혀 다른 거다. 더구나 마르쿠제는 사회연구소에 가입한 바로 그 해에 독일을 떠났다.

뿐만 아니라 저자들은 프랑스 68운동을 주도했던 학생들이 아주 딱딱하고 어렵기 짝이 없는 싸르트르의 <존재와 무>를 가지고 있어야 또래그룹에 낄 수 있었다면서, 이것을 일컬어 “역사의 미스테리”라고 했는데, 내가 알기로는 그런 주제를 다룬 책들이 적지 않다. 더구나 이 책 <88만원 세대>의 성격에 비춰보면, 왜 그런 현상이 나타났는지를 간략하게라도 설명해 주는 것이 중요할 것 같은데, 오히려 저자들은 자신들의 무지를 숨기기에 급급할 뿐이다. 그것도, “역사의 미스테리”라는 아주 거창하고 우아한 수사를 써가면서 말이다.


4. “세대” 문제에 관하여

지금까지 나는 <88만원 세대> 곳곳에 드러난 논리적 결함이나 개념에 대한 천박한 이해/구사 등등을 지적했다. 이제는 (사실은 많은 이들의 관심은 여기에 더 있을 것 같은데) 이 책이 분석의 대상이자 단위로 삼고 있는 “세대”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다.

많은 이들이, 특히 (고전적인 마르크스주의-레닌주의에 친화성이 있는) 고전적인 좌파들은 “세대”라는 것에 치를 떠는 경향이 있다. 어떤 이들은 단순히 <88만원 세대>가 “세대”에 기반을 두고 분석을 진행했다는 이유로 이 책을 비난하기까지 한다. (물론 이런 얘길 내놓고 하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을 거다. 그것만으론 논거가 부족하다는 걸 자기들도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순히 “세대”를 전면에 내세웠다고 해서 욕먹을 일은 아니다. 이 대목에서 분명히 구별해 둬야할 것이 있다. 즉 “세대”를 어떤 식으로 쓰느냐 하는 건데, 여기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1) 분석의 단위로서의 세대, (2) 분석의 대상으로서의 세대. 이렇게 구분하면 명확해 지듯이, 흔히 “세대론”이 욕먹는 이유, 즉 세대라는 개념으로 전통적인 “계급”을 대체한다는 것은, 세대가 분석의 “단위”로 쓰였을 때다. (물론, 미리 밝혀두지만, 저자들은 이런 식의 구분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은 것 같다. 책의 어딘가에서 그들은 그저 세대가 계급 같은 것보다 더 나은 단위라는 암시를 줬던 기억은 난다.)

나는, 세대를 분석의 대상으로 삼을 수는 있지만 주어진 경제를 전체적으로 분석하는 단위로 삼을 수는 결코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바로 이런 까닭에, 세대를 분석의 대상으로 삼을 때에도 신중을 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칫 그것을 오남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1) 분석의 단위로서의 세대

세대가 분석의 단위로 적절하지 않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이런 이야기를 할 때 갑갑한 게 있다. 좌파진영에 있는 많은 이들이, 분석단위로서의 세대에 반대하면서도 “왜”라는 질문에 제대로 된 답변을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경험적으로 봤을 때, 많은 이들이 결국 하는 얘기는, “마르크스가 그랬으니까”다. 하지만 이래서는 안 된다. 마르크스가 그랬다는 것은 이유가 못 되고, 그가, 아니, 마르크스를 포함한 당대의 이름난 정치경제학자들(여기엔 저자들이 존경해 마지않는 존 스튜어트 밀도 포함된다)은 물론 이른바 “고전파” 경제학자들(아담 스미스, 데이빗 리카도)이 “왜” 그랬는가, 왜 그들은 세대나 기타 다른 것이 아닌 “계급”을 분석의 단위로 삼았는가가 중요하다.

이에 대한 대답은 “경제”가 무엇인가, “경제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조금만 생각해보면 쉽게 할 수 있다. 앞에서 저자들의 “경제(학)”에 대한 이해가 아주 피상적이고 천박하다고 했는데, 그들이 아무런 문제없이 “세대”를 분석단위로 삼을 수 있고 나아가 기존의 계급범주 등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비웃을 수 있는 까닭도 결국은 그들의 독특한 “경제(학)” 이해방식에 있다. 기본적으로 경제학이란 한 사회의 물질적 흐름을 다루는 학문이다. 특히 역사적으로 “정치경제학”이란 근대시민사회의 물질적 부의 흐름에 대한 학문으로서 출현했다. 한 사회(=근대시민사회)의 물질적 부(material wealth)란, 맨 먼저 누군가에 의해 생산될 것이며, 일단 생산된 다음에는 (시장을 통해) 유통될 것이다. 한편 그 생산에 참여한 주체들은 적절하게 보상을 받을 것인데, 이런 보상은 주로 화폐형태의 소득으로 이뤄지며, 그들은 다시 그 화폐를 가지고 시장에서 소비행위를 한다. 물론 이때 소비의 대상이 되는 것은 애초에 그들이 만든 바로 그 물적 형태의 부일 것이다. 바로 이렇게 한 사회의 물질적 부는, 생산-유통(교환)-분배-소비라는 일련의 과정을 계속해서 번갈아 가며 거치는 것이다.

존 스튜어트 밀과 같은 경제학자들이 당대 자본주의 경제를 위와 같은 네 가지(또는 세 가지) 측면에서 다룬 것도 바로 그래서다. (이 책에서 저자들은 밀을 일컬어 가장 인간적인 경제학자라고 칭송했는데, 그들은, 아니 우석훈은 스스로 경제학자라고 생각한다면 밀의 인간적인 면모보다는 그의 경제학자로서의 면모, 즉 그가 왜 세대를 단위로 경제를 분석하지 않았는지를 생각해볼 일이다.) 그렇다면 “계급”이 분석단위로 채용된 것은, 당연하게도 위와 같은 네 가지 (어떤 학자들에겐, 세 가지) 영역에서 상당히 일관된 방식으로 때로는 대립하고 때로는 협력하면서 한 사회의 경제적 과정을 굴러가게 만드는 단위로 “계급”이 적절하기 때문이다. 즉 자본주의 사회의 양대계급인 노동자와 자본가는, 먼저 생산의 영역에서 협력 또는 대립하면서 물질적 부를 상품의 형태로 생산해내며, 분배의 영역(자본가의 이윤, 노동자의 임금)에서도 그들의 이해관계는 첨예하게 대립한다. 그들의 소비행태 또한 서로 다른데, 원칙적으로 자본가는 “생산적 소비” 즉 다음기의 생산을 위해 자신들의 이윤을 소비하고 노동자는 “생계적(또는 비생산적) 소비” 즉 자기 자신과 가족들의 생활을 위해 소비한다. 등등.

경제학의 영역에서 전통적으로 계급이라는 범주가 정당화되었던 것은 바로 위와 같은 사정 때문이다. 그렇다면 “세대”는 어떤가? 당연히 세대는 위와 같은 역할을 못한다. 비록 (앞에서 지적한 대로) 저자들은 “착취”라는 생산의 범주를 세대 간의 문제에 대입하고 있지만, 매우 명백하게도 “세대”란 생산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대체 생산의 영역에서, “세대”라는 이름으로 구분된 한 사회의 인간집단들이 어떤 일관된 상호작용을 한단 말인가? 20대와 40대가 거기에서 어떤 상호작용을 하는가? 다른 영역에서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소비”의 영역에서는 “세대”라는 구분이 적절해 보이기도 한다. 실제로 세대별로 서로 다른 소비패턴이 존재하는 것 아닌가? 솔직히 나는 이 문제에 대해 쉽게 답할 수 없다. 다만 설령 이 문제에 “그렇다”라고 대답한다고 하더라도, 상황이 저자들에게 호의적으로 변하지는 않는다는 거다. 오히려 정반대다. 저자들은 이 책 곳곳에서 “세대”라는 개념이 그저 (이를테면 상이한 소비패턴을 기준으로 한 시장분할을 위한) 마케팅의 수단으로 전락하고 있다고 비판하는데, 사실 그것은 그럴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런 거다.

저자들은 이른바 “386세대”니 “사치세대”니 하는 규정들이 인위적이고 포괄적이지 못하다고 하면서 좀 더 경제학적으로 의미 있는 방식으로 세대를 규정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결국 그런 식의 시도는 거듭될수록 안타까움만 자아낼 뿐이다. “세대”는 그저 “세대”일 뿐이다. 거기에 어떤 일관된 경제학적 의미를 집어넣으려 하는 순간 그런 “세대” 규정은 저자들이 경계하는 “마케팅의 도구”로 전락하기가 쉽다. 그러지 않기 위해 저자들은 “억지”도 부린다.

73년에서 80년 사이에 자신의 경제적 삶을 시작한 지금의 40대 후반에서 50대 중반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유신 세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사람들을 일부에서는 ‘한국경제의 재건세력’이라 부르기도 하고, 또 ‘건전한 보수’라 부르기도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중도’라 부르기도 하는데, 어쨌든 현재 한국경제를 일종의 인구 피라미드로 구성한다면 최상위에 해당하는 사람들을 이렇게 규정된 유신 세대라고 부르면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172쪽)


나는 이 구절을 읽고서 ‘건전한 보수’ 또는 ‘중도’가 세대에 대한 규정임을 처음 알았다! 세상에 이런 억지가 어디 있나. 그리고 40대 후반에서 50대 중반이 “최상위”에 있다고? 최상위에 있는 사람이 40대 후반에서 50대 중반이다”라고 하면 맞는 얘기일지 모르나, 그 역은 결코 참이 아니다. 대체 그럼 “사오정”, “오륙도”는 뭔가. 대체 예컨대 “58년 개띠”를 무슨 수로 “경제학적으로” 한데 묶느냐는 말이다.

억지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저자들은 “KTX 여승무원과 철도공사 이철 사장 사이에서 벌어진 정규직 전환 투쟁”을 “유신 세대와 20대” 사이의 갈등으로 만들어버린다! 뭣보다 사태를 “여승무원 vs 이철 사장”이라고 묘사하는 것도 어이없지만, 저자들 말대로라면 사장이 만약 홍정욱 같은 이로 바뀌면 갈등은 “20대 vs 386세대”가 되는 건가? “성별갈등”이라고 하지 않은 것이 기특할 정도다—“세대갈등”이라기보단 차라리 “성별갈등”이라고 보는 게 훨씬 더 그럴싸하지만 말이다.

결국 주어진 (국민)경제의 분석단위로서의 “세대”란 위와 같은 억지 없이는 결코 성립될 수 없는 것이다. 저자들은 “세대”를 분석의 단위로 설정해 놓고도 “세대 간 갈등”과 “세대 내 갈등”이라는 매우 애매모호한 개념을 무분별하게 사용함으로써, 오히려 스스로 설정해둔 “분석단위로서의 세대”의 타당성을 스스로 무너뜨리고 있다. (거꾸로 말하면, “세대”라는 구분 자체가 취약하기 짝이 없기 때문에, 그것을 만회하기 위해서는 온갖 보조적인 수단들이 필요한 것이다—그러나 이런 시도는 태생적으로 헛될 뿐이다.)

(2) 분석의 대상으로서의 세대

그래도 아직 희망은 있다. “세대”란 적어도 분석의 “대상”으로서는 타당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요즘의 젊은 세대를 “분석의 대상”으로 다룬다 했을 때 떠오르는 가장 중요한 과제는 뭣보다 해당 세대를 특정한 방식으로 특징짓는 것일 게다. 저자들에겐 “88만원 세대”라는 규정이 바로 그 최종적인 산물이며, 이런 특징화는 가장 기본적으로 일정한 비교의 맥락에서 이뤄진다. 즉 “그 나라의 다른 세대들과는 어떻게 다른가” 그리고 “다른 나라의 같은 세대들과는 어떻게 다른가” 등의 문제를 통해 이뤄질 것이다. 한편 저자들에게 또 하나 특히 중요하게 다뤄지는 것이 바로 “세대 간 상호작용의 양상”이다. 저자들은 제2부 제1장에서 이런 다양한 작업들을 시도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것들을 서로 명확하게 구분하지도 않은 채, 그리고 (부분적으로는 그 결과로서) 비록 성공적이지 못했지만 말이다.

왜 성공적이지 않았단 말인가? 까닭은 그들이 비교의 가장 기본적인 원칙을 저버렸기 때문이다. 비교의 원칙, 그거 간단하다. 뭔가를 비교할 때는 비교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외적 요인들을 최대한 통제해 줘야 한다는 거다. 예컨대 저자들은 한국의 “88만원 세대”와 “프랑스 68세대”를 비교하고 있다. 이런 비교를 통해 저자들은 전자가 후자에 비해 불쌍하다는,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우리나라” 젊은이가 “외국(=유럽)” 젊은이보다 불쌍하다는 얘길 하고 싶은 것 같은데, 이건 완전히 넌센스다. 적어도 비교를 통해 이런 결론을 이끌어내려면, “88만원 세대”와 적어도 동일한 시대적 조건을 공유하는 세대를 비교대상으로 삼아야 한다. 즉 이 맥락에서 적절한 비교대상은 “프랑스 68세대”가 아니라 “오늘날 프랑스의 10대후반~20대초반”인 것이다.

그러나 비교의 부적절함은 단순히 “시기”의 문제에 국한되지 않는다. 위에서 밝혔듯 외국 사례와의 비교를 통해 저자들이 하고자 하는 말이 결국은 “88만원 세대는 아주 불쌍하다”라는 것이었다. 그들은 이를, 제2부 제1장에서 영국/독일/프랑스/미국/일본과 같은 외국의 사례, 그리고 유신세대/전두환세대/X세대 등의 한국의 older 세대와 “88만원 세대” 사이의 관계 등을 검토함으로써 논증하려고 한다. 즉 다른 세대들이 가졌던 기회를 갖지 못했기 때문에 88만원 세대는 불쌍하다는 거다. 그러나 이런 분석과 결론 또한 완전 넌센스다. 왜냐하면 책을 잘 읽어보면 저자들이 “88만원 세대”에 비해 운이 좋았다고 평가한 다른 나라의 세대들과 한국의 앞세대들의 “운”(luck)은 그들이 상당히 나이가 든 뒤에 찾아왔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런 식의 비교를 통해 내릴 수 있는 논리적 결론이란, “오늘날 한국의 20대는 참 운이 없다”가 아니라 예컨대 “외국의 사례들을 봤을 때, 비록 오늘날 한국의 20대가 처한 상황이 좀 암울해 보이긴 하지만 앞으로 나아질 것이다. 너무 걱정 마라.” 정도가 아닐까 싶다. 좀 웃기겠지만 그렇다. 아니, 또 아는가. 한 10년쯤 뒤에 오늘날의 빌빌대는 “88만원 세대”에게 대박이 터질지! 그 때가 되면 저자들이 동정해 마지않는 “88만원 세대”는, 저자들이 동경해 마지않는 유럽의 “68세대”의 반열에 오를 수도 있는 것 아니냔 말이다.

그리고 저자들은 서유럽의 이른바 “68세대”가 무슨 대단한 것이나 되는 듯이 (“역사상 가장 똑똑한 세대” 운운) 생각하는 모양인데, 그건 상당부분 신화화된 거고, 또 이른바 “68세대”란 (저자들이 비판하는 마케팅의 개념들과 마찬가지로) 그다지 포괄적인 개념이라 할 수도 없다. 그들이 나중에 엄청난 (경제적) 기회를 누렸다는 것보다는, 당대에 그들에 대한 시각이 어떠했는가가 더 중요하다. 68년에는 똑똑한 혁명가만 있었던 게 아니며, 그런 이들이 “절대다수”였다고 보기도 어렵다. (여담인데, 이 대목에서, 당대 영국 젊은이들의 삶과 좌절을 그린 [Quadrophenia]라는 영화를 저자들에게 권한다.)

물론 내가 지금 “68세대” 또는 “68혁명”을 폄하하자는 게 아니라는 것은 여기서 길게 변명할 필요는 없을 줄로 안다. 오히려 저자들이 “68세대”와 “68혁명”을 “신화화”하고 있는데,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이런 신화화는 여기 그치지 않는다. 그들의 “포디즘” 숭배도 아주 걱정스럴 정도다. 전혀 통제가 불가능하다. 다음 구절을 보라.

  • 만약 3세계에도 이러한 풍요를 조금 나눠줄 수 있고 지구 생태계의 위기가 없다면, 포드주의 시스템에 따라 움직이는 세상은 가장 멋진 곳일지도 모른다. (83쪽)

저자들은 여기서 “포디즘”을 미화하고만 있는 게 아니라 포디즘에 대한 무지까지도 드러내고 있다. 세상에, “3세계에도 … 풍요를 조금 나눠줄 수 있고 지구 생태계의 위기가 없”는 포디즘이 어딨나? 제3세계의 제국주의적 수탈과 환경의 무분별한 파괴는 포드주의적 번영의 가장 중요한 물적기반 중 하나였다. 또 일부 자율주의자들이나 ‘열린 마르크스주의’ 논자들이 효과적으로 보여줬듯이, 그것은 각종 비정규/비표준 노동에 대한 초과착취에 기반을 둔 “백인 남성 노동자들만의 번영 체제”이기도 했다.

이렇게 보면, 우리는, 흔히 (그리고 저자들이 생각하듯이) 어느 정도의 일관성을 가진 “세대”들, 이를테면 일본의 “단카이 세대”, 한국의 “유신세대” 등의 규정들이, 또 더 중요하게는, 그런 세대들이 공유한다고 여겨지는 공통의 특징들이, 사실은 상당부분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사후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해봐야 한다. 그리고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지만) 그런 과정에서 그와 같은 “세대명칭”들이 갖는다고 여겨지는 공통의 특징들을 수용해내기 위해, 바로 그 “세대” 개념들은 점점 더 그 포괄범위가 줄어드는 경향, 생물학적으로 같은 세대에 속한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을 소외시키는 경향이 있었다는 점도 명심해야 한다. 한 세대를 일컫는 가장 비참한 수사로 고안되었을 “88만원 세대”라는 명칭을 통해 “실제로” 호출되는 것은, 그 세대에 속하는 가장 비참한 이들이라기보단 오히려 비교적 그런대로 행복한 축에 속하는 이들—대충 말해서 대학재학 이상의 중산층 출신자—임을 우리는 여기서 기억할 필요가 있다.

요컨대 이 책에서 말하는 “88만원 세대”란 “경제학적으로 봤을 때” 매우 성급한, 진지함이 결여된, 인상에 기반을 둔 규정이다. “성급함”에 대해 우스갯소리 하나. 192쪽에 보면, 저자들은 40-50대와는 달리 오늘날 20대는 “아는 사람[친구]이 운영하는 카페보다 스타벅스를 더 선호하는 사람들”이라고 규정한다. 내가 보기엔 이런 규정은 매우 성급한 것인데, 까닭은, 아직 우리 20대들에겐 아는 사람 또는 친구가 운영하는 카페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내가 보기엔 저자들의 바람과는 반대로 그들의 “세대” 개념은, “마케팅 개념”으로는 아주 적절하다. (그리고 실제 그렇게 되고 있다.)


5. 마치며

이제 글을 끝내야겠다. 비록 지금까지 거의 “까대기”로 일관했지만, 맨 앞에서 밝힌 대로 나는 이 책이 행한 것과 같은 시도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정말이지 저자들은 누구도 감히 엄두를 내지 못한 것을 했다. 그러나 나는 이런 시도가 “경제학적이지 않게” 이뤄졌었다면 훨씬 더 나았을 거라 생각한다. 이 책에 난무하는 “경제학적으로 봤을 때…”, “시스템적으로 고려하면…”, “진화경제학에서는…” 등의 어법은 내게 거북함과 역겨움만 줬다. 대체 “경제학”은, “시스템적 고려”는, “진화경제학”은 어딨냐고! 그래서 이 책은 “경제학 입문서”가 되기에도 (비록 그런 형태를 취하고는 있지만) 매우 부족하다고 판단내리지 않을 수 없다.

솔직히 위와 같은 거창한 수사들은 기존의 우석훈의 글에서 많이 봤던 거다. 그래서 그다지 낯설지만은 않았다. 이렇게 어깨에 힘 잔뜩 들어간 경제학적이고 시스템학적인 글 말고, 이 책만큼 오늘날 젊은이들의 처지에 sympathetic하면서도 이 책보다는 좀 더 modest(이 말은 우리말로 번역할 때 꽤 난감하다)하고 realist한 글을 기대하며 잡다한 글을 마친다.


[부록: “첫 섹스의 경제학”에 대한 메모]

저자들은 “첫 섹스”와 “오늘날 한국의 10대”와 “그들의 경제적 상황” 사이의 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결론내린 바 있다. “한국 10대의 첫 섹스가 늦는 것은 그들이 돈이 없어서다”라고. 당장 떠오르는 게 이거다. 저자들의 이 주장에 따라 단순하게 생각하면, 섹스와 동거를 하는 10대는 부자여야 한다. 그러나 저자들은 어떤지 모르겠는데, 적어도 내가 직/간접적으로 경험해서 알기로는, 굳이 “경제학적으로” 말하자면, 일찍 섹스도 하고 동거도 하는 애들은 대체로 별볼일없이 사는 애들이라는 거다. 중고등학교 시절을 떠올려보라. 오히려 집도 좀 살고 공부도 좀 하는 애들은 그런 거 못한다. 가난해서 공부에도 별 관심 없고, 집에서도 별로 신경 안 쓰는 애들은 자기들끼리 어울리며 섹스도 하고 가출도 하고 동거도 한다. 뽄드도 빨고 더러는 마약에도 손댄다. 얘들이 돈이 많아서 섹스/동거를 하나? 또… 돈이 많든 적든, 얘들이 경제적으로 부모로부터 독립을 해서 섹스/동거를 하는 건가??

뭐 요새는 외국으로 유학가는 아이들이 무지하게 많이 늘어났고 또 그들은 대체로 성적으로 더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생활한 테니, 그리고 또 이들은 대개 부유층에 속할 테니, 돈많은 애들이 섹스를 일찍 한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뭔가? 결국 저자들 말대로 하고 싶어 안달이 난 섹스도 못하고 빌빌대는 애들은 그만그만하게 살고 그만그만하게 공부도 하고 그만그만한 부모의 통제도 받는, 그만그만한 애들뿐인가? 이들이 아무리 다수라 해도, 적지 않은 예외를 감당하기에는 “10대는 돈이 없어 섹스를 못 한다”라는 저자들의 명제는 너무도 취약해 보인다. 그리고 요새는, 내가 알기로는, 꽤 많은 10대들이 연애경험이 있다. 그런 그들에겐, 동거까지는 몰라도 “섹스”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을 만큼의 “경제력”도 가지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사실 뭐 여관에 “쉬었다 가기” 위해 “경제력”이라고 할 만한 거창한 무언가가 요구되는 것도 아니다.)

누군가는 내게 “그럼 한국 10대의 첫 섹스가 늦은 까닭은 뭐냐?”라고 물을 수 있다. 그러나 만약 한국의 상황이 위와 같다면, 그것이 굳이 오늘날의 외국과 비교했을 때 대단하게 뒤쳐져 있다거나 억압적이라는 생각은 별로 들지 않는다. 오히려 만약 정말로 한국인들의 첫 섹스가 외국에 비해 늦는다면 그것은 사회문화적 배경의 차이로 돌려도 크게 문제는 안 될 정도라고 본다. 여기에 덧붙여, 실제로 중요한 문제는 첫 섹스가 아니라는 것이고, 또 하나 덧붙인다면, 저자들과 같이 아무 데나 경제학을 들이대지는 것은 그다지 좋은 태도도 아니다. 다시 말하지만, “저자들이 말하는 경제학”에 입각하더라도, 내가 보기엔 “첫 섹스의 경제학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