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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혜노믹스’의 밑그림 (3) ‘국민 행복’의 현실적 의의

5. 물론 박근혜 당선자 등이 단순히 자신들의 ‘이론적 입장’ 또는 ‘지적 한계’ 안에 갇혔기 때문에 자기들도 어쩔 수 없이 ‘국민 행복’을 들고 나오는 것은 아니다. 어쩔 수 없음으로만 친다면야, 그러한 한계보다는 현실의 강제가 더 중요한 요소다. 어쨌든 ‘국민 행복’이 처음엔 그러한 한계의 산물이었는지 몰라도 일정한 임계점을 지나면 그것은 계산된 ‘의도’에 의해 조장되고 조정된다. 즉 그것은 이른바 ‘이데올로기화’하는 것이다. 이것은 이전의 위기극복 시도들, 즉 케인스주의나 신자유주의도 겪었던 과정이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국민 행복’의 의미가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살펴보면, 그러한 조장과 조정의 증거를 어렵지 않게 잡아낼 수 있다.

이와 관련, 우리는 국내의 대표적인 보수 일간지를 통해 유포되어 한동안 인기를 끌었던 ‘자본주의 4.0’이라는 담론을 한번 떠올려봐도 좋겠다. 요새는 (특히 미디어계 안에서는) 시간이 너무 빨리 흘러, 이미 ‘자본주의 4.0’에 대해 잊어버린 분들도 많으시리라. 이분들을 위해 잠시 ‘자본주의 4.0’에 대한 기억을 되짚어보자.

‘자본주의 4.0’이란 말 그대로 ‘4세대 자본주의’를 말한다. 19세기에 걸쳐 유럽을 중심으로 발달하고 산업혁명이라는 용어와 이미지로 기억되는 ‘자유방임 자본주의’가 제1세대라면, 케인스주의적 정책 패러다임에 입각해 정부가 적극적인 역할로써 번영을 주도하던 ‘수정 자본주의’가 제2세대다. 그렇다면 제3세대 자본주의, 즉 ‘자본주의 3.0’은 그 이후에 출현했던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될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이는 기존의 케인스주의적 모형이 봉착한 한계를 ‘금융화’와 ‘작은정부’론으로 극복하고자 했지만, 오늘날 우리가 목격하고 있듯 그것은 한때 바로 그러한 자신의 ‘성공’을 낳았던 특징들 때문에 돌이킬 수 없는 위기를 겪고 있는 중이다.

결국 ‘자본주의 4.0’이란 바로 위와 같은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를 극복하자는 취지에서 제안된—박근혜의 ‘국민 행복’과 마찬가지로—것이다. 신자유주의에 그 어떤 장점이 있다손 치더라도 그것이 몇 가지 심각한 결과들, 예를 들어 소득과 부의 양극화, 일자리의 비정규직화/불안정화, 엄청난 규모의 금융시스템적 취약성, 모든 경제주체들(가계, 기업, 정부)에 있어 부채의 급증 등을 낳았다는 데는 정치적 입장을 막론하고 이견의 여지가 없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문제들을 극복하기 위해 제안된 ‘자본주의 4.0’은 마치 어머니의 손길 같이 따뜻한 자본주의여야 할 것이다. 제안된 시기나 표현은 조금씩 다르지만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나 ‘박애자본주의’, ‘사회책임경영’ 등도 비슷한 취지를 담고 있다.

‘어머니의 손길과 같은 따뜻한 자본주의’—바로 박근혜 당선자와 ‘자본주의 4.0’이 연결되는 지점이다. 물론 그는 한 번도 (적어도 알려진 한에서는) ‘어머니’였던 적은 없었으며 그런 이미지는 순전히 자신의 어머니의 모습을 그가 가상적으로 복제함으로써만 그에게 덧씌워질 수 있었다. 하여튼 보수주의자 박근혜 및 그 측근들이 소득 재분배와 복지를 입에 올리고 심지어 상행위의 자유를 일정 정도 제한할 수 있다는 식의 태도를 취하는 것, 다시 말해 신자유주의의 폐해를 인정하고 그것을 제한할 수도 있다는 태도를 보인 것은 언뜻 봐서는 매우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6. 요컨대 ‘어머니의 손길과 같은 따뜻함’을 복지와 경제민주화로 구체화시켜 궁극적으로 ‘국민 행복’을 이뤄내겠다는 것이 후보시절 박근혜 캠프가 내세웠던 바였다.

그러나 한번 잘 생각해보자. 과연 복지(여기서는 전면적인 복지, 즉 ‘복지국가’)나 경제민주화가 ‘국민 행복’이라는 틀로 포괄이 가능한 것인가? 앞에서 언급했던 이론적 틀에 입각해 말하면, ‘국민 행복’이란 철저한 ‘개체주의’에 입각해 있는 반면 복지국가나 경제민주화는 누가 뭐래도 하나의 국민경제의 재생산구조의 문제다. 즉 그것은 ‘사회’에 대한 문제이고 ‘구조’에 대한 문제이다. 곧 보수적인 지배계급들이 볼 수 없는 차원, 또는 애써 건들지 않으려는 차원의 문제란 얘기다. 이렇게 보면, ‘경제민주화론자’로 알려진 김종인이 왜 박근혜 캠프 안에서 다른 시장주의자들과 그토록 반목했는지, 왜 김종인이 ‘박근혜 캠프 안에서 경제민주화를 이해하는 자가 하나도 없다’라고 틈만 나면 성토했는지가 감이 잡힐 것이다. 하지만 그가 겪었던 문제의 시발점은, 경제의 구조 전반을 개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경제민주화론자가 ‘국민행복추진위원회’라는 기이한 모임의 대표 자리를 받아들였다는 데 있다. 누구를 탓하고 누구를 원망하겠는가?

‘국민 행복’은 일반적 의미에서의 복지나 경제민주화와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얘기다. 먼저, 박근혜가 ‘국민 행복’을 내세우는 한 그는 경제민주화를 이룰 수 없다. 후보마다 의견이 조금씩 다르기는 했지만, 지난 대선 과정에서 경제민주화의 핵심으로 공통적으로 강조되었던 두 가지가 바로 대기업 내부의 지배구조 문제와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의 관계 문제였다. 물론 선거에서 주축을 이뤘던 박근혜-문제인 구도에서 벗어나는 후보들, 특히 김소연, 김순자 등은 진정한 경제민주화란 재벌개혁으로 축소될 수 없음을 역설했지만, 적어도 경제민주화를 재벌개혁 수준에서만 파악하더라도 거기엔 ‘구조’에 대한 문제의식이 살아있다고 봐줄만했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요즘, 즉 박근혜 후보가 당선된 뒤에, 정권인수위원회 차원에서 경제민주화라는 단어가 거의 발언되지 않고 있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재벌개혁은 몇몇 만만한 기업총수를 겁주는 선에서 봉합되고 있는 듯하고(지금까지 희생양으로 선택된 것은 한화 김승연과 SK 최태원. 그마저도 김승연은 이제 풀려난 거나 마찬가지다), 대기업-중소기업 간의 구조 문제는 중소기업에 대한 자금지원 원활화의 차원으로 축소되고 있는 듯하다. 어차피 있으나마나한 전경련을 해체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면서 중소기업협회를 방문해 고개를 조아리는 당선자의 제스처. 이 모든 것이 겨냥하는 것은 ‘경제민주화’가 아니라 ‘국민 행복’, 즉 이 맥락에서는 ‘중소기업주의 행복’이 아닌가.

(그렇다고 해서 이 과정이 대기업에게 불행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 대목이 매우 중요한데, 왜냐하면 만약 문재인이 당선되어서 현재 박근혜가 하고 있는 것과 똑같은 일을 벌이고 있었더라면, 그는 분명 재벌로부터 엄청난 저항을 받아야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문재인이 전경련 해체해야 한다고 했었더라면, ‘이것은 재벌에 대한 선전포고다’라는 선언이 벌써 나왔을 것이다. 물론 전경련 해체가 재벌에게 주는 피해는 거의 없다. 어차피 거기 회장, 아무도 안 하려고 한다. 개인적으로 나는 전경련 같은 친목단체에 국가가 나서서 해체해라 마라 하는 것 자체가 웃긴다고 생각한다.)

 

7. 복지는 또 어떤가? 주지하다시피 박근혜 복지의 특징은 선별적이라는 데 있다. 왜 그들은 보편복지 대신 선별복지를 주장하는가?

흔히 선별복지를 주장하는 쪽에서는 비용문제를 거론한다. 즉 보편복지에는 돈이 많이 들고, 아직 우리나라는 그것을 시행할 여력이 없다는 거다. 반대로 보편복지를 주장하는 쪽에서는 (지난번 ‘무상급식’ 논란에서도 나타났듯이) ‘낙인이론’이 거론되곤 한다. 그러나 내가보기엔 둘 다 틀렸다. 낙인은 보편복지를 해도 찍히고, 비용으로 치면 (규모의 경제 등을 무시하고 기회비용을 고려하면) 효과가 같으면 비용도 같다. 예컨대 경제수준에 따른 등록금 차등화와 부자증세를 통한 반값등록금제는 결국 같은 것이 아닌가.

(등록금 차등화의 경우, 오히려 순기능도 있다고 본다. 가장 중요한 것이, 이 제도를 제대로 시행하기 위해서는 가계소득 및 자산/부채조사가 철저히 이뤄져야 한다는 것인데, 만약 그런 조사가 제대로 이뤄지기만 한다면 여러가지 쓸모가 있을 것이다. 금융실명제를 크게 능가하는 것이 될수도 있다. 특히 그런 조사는, 지하경제양성화라는 박근혜 측의 기조와도 맞기 때문에 야당이나 시민사회 쪽에서는 강력하게 ‘철저 조사’를 압박할 수 있을 것이다.)

선별복지와 보편복지의 가장 핵심적인 차이는, 이미 지금까지 논의의 진행을 통해 상당히 명확해졌듯이, 전자는 ‘개인’에 초점을 둔 시스템인 반면 후자는 ‘사회’에 대한 문제제기에 입각한 시스템이라는 데 있다. 후자는 이 사회엔 소득과 부의 양극화, 그리고 각종 사회적 병리현상들이 만연해 있으며 그런 문제들은 사회의 전체 메커니즘에 의해 재생산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이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경제/사회시스템 전반에 걸친 리디자인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입각해 있다. 반대로 ‘선별적 복지’는 위와 같은 병리현상들은 몇몇 개인들이 (부모로부터든, 공동체로부터든) 적절한 보살핌을 받지 못해 겪는 불행이라는 생각 위에 서 있다. 이들 몇몇 불행한 이들(레 미제라블!)과는 달리 다른 모든 이들은 나름대로 행복하게 잘 살고 있으며, 법률이 정하는 범죄를 그들이 저지른 것이 아니라면 그들은 그들의 이웃이 겪는 불행에 책임을 질 필요는 없다. 따라서 국가가 나서서 불행한 이들을 도와야 하며, 흔히 ‘복지’라고 하는 게 바로 그 수단이다. 요컨대 이 사회에 살고 있는 불행한 이들에게 선별적으로 복지를 제공함으로써 그들에게 ‘행복’이 뭔지를 알게 해 주자. 이것이 바로 박근혜식 복지다.

그런데 이런 식의 복지는 사실 그다지 새로울 게 없다. 왜냐하면, 만약 복지가 그런 것이라면 이미 우리나라도 복지국가라고 보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어리석은 국민을 돌봐주는 국가, 그리고 그 국가의 수반, 국민의 아버지! 박정희! 그의 딸, 박근혜! 권위주의!! 복지 얘기가 많아지니까 ‘복지 경험’이라는 용어도 생겼는데, 그런 측면에서 생각해보면: 보편복지 하에서 복지경험은 사회적 연대의식에 기반해 있고 또 그것을 증진시킬 것이지만, 선별복지 하에서 복지 경험은 ‘국가에 대한 고마움’만을 낳을 것이다. 각하 만세! 박근혜의 복지, 박근혜의 ‘국민 행복’은 그래서 경제민주주의하고는, 나아가 민주주의 일반과는, 그래서 우리 중 몇몇이 건설하고자 하는 ‘복지국가’하고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계속)

‘근혜노믹스’의 밑그림 (2) ‘국민 행복’의 이론적 의의

3. 근혜노믹스의 핵심을 ‘국민 행복’으로 정의한다는 것은, 단순히 수사적이거나 향후 상황전개에 대한 정치적 책임을 피할 구실을 마련한다는 의미만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여기엔 매우 뿌리깊은 보수파의 ‘입장’이 깃들어있다고 보는 것이 옳다.

그 입장은 경제학에 고질적인 ‘개체주의'(individualism)와 관계가 깊다. 주지하다시피 스미스에 의해 집대성되었고 리카도에 의해 (부르주아적으로) 완성된 고전정치경제학에서 주인공은 ‘개인’이다. 흔히 이 대목에 이르면,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개인’과 ‘사회’를 대립시켜, 전자를 강조하면 속류/(신)고전파, 후자를 강조하면 과학/마르크스파라고 여기고자 하는 유혹에 빠지곤 하는데, 엄밀히 말하면 꼭 그렇진 않다. 마르크스가 비록 ‘사회’를 강조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그가 ‘개인’을 중심으로 한 논의를 싸잡아 부정한 것은 아니다. 다만 그는 그러한 논의들이 개인을 ‘사회의 산물로서’ 다루지 않고 ‘사회로부터 동떨어진 개인’으로 취급하는 것을 비판했을 뿐이다. 실제로 마르크스 자신 또한 {자본론} 등에 ‘대표적 개인'(representative individual)을 등장시키곤 하는데, 사실 이것은 그가 강조하는 ‘추상화’의 중요한 기법이다(물론 마르크스의 ‘대표적 개인’은 부르주아 사회과학의 ‘대표적 개인’이랑은 크게 다르다. 후자는 일반적으로 이성적 능력만을 갖는 텅빈 개인이지만, 전자는 만약 그것이 텅비어있다면 이는 오직 단계적인 추상과정의 필요에 의해서만 그런 것이며 이후 서술과정을 통해 채워넣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마르크스가 보기에 스미스나 리카도를 포함하는 18-19세기 유럽 선진국들의 사회사상가들, 정치경제학자들은 ‘개인’을 다루면서도 위에서와 같은 구별을 명확히 인식하지 못했다. 이는 나중에 정치경제학이 속류화하는 빌미가 되기도 한다. 즉 마르크스에 따르면 고전파경제학에서는 ‘사회의 산물로서의 개인’이라는 관점과 ‘동떨어진 개인’이라는 관점이 혼재되어 있었던 데 반해 속류경제학에서 개인은 오로지 후자의 측면에서만 고찰된다. 말하자면, 마르크스에게 고전정치경제학은 딱 그 만큼 과학적이었던 것이고, 속류정치경제학은 딱 그런 의미에서 일말의 과학성도 담보하지 못한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이 문제는 이미 이 블로그에서 다룬 적이 있다(링크). 링크된 글에서 말하는 ‘사회’ 관점이 비록 마르크스에 의해 꿋꿋하게 견지되었던 반면 리카도에서 밀(J. S. Mill)을 포함한 경제학의 ‘주류적’ 전통에서는 점점 희미해져 갔다. 그러나 ‘사회’ 관점이 단순한 ‘시점’의 문제가 아니라 현대세계 특유의 물적 현실을 포착하는 것인 한, 속류경제학이 보지 못한다고 해서 그것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주류적 전통 내에서도 ‘사회’ 관점은 어떤 식으로든 ‘재발견’될 수밖에 없었는데, 바로 1930년대부터 본격화한 이른바 ‘케인스주의 경제학’의 출현이 그 결과물이었다. 물론 사태가 이렇게 된 것은 당시의 경제위기 속에서 ‘구조’에 대한 문제의식을 떨쳐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불행히도, 그렇다고 해서 경제학이 그 특유의 속류성을 버린 것은 결코 아니었지만 말이다.

결국 앞서 박근혜를 포함한 보수파의 뿌리깊은 ‘입장’이라고 부른 것은 바로 위와 같은 속류성, 곧 ‘사회’ 내지는 ‘구조’를 이론적으로 무시하는 태도에 다름 아니다. 말할 것도 없이 그러한 태도는 단순히 ‘이론’의 영역에만 머무는 게 아니고, 박근혜의 각종 정책들로 구체화되어 현실적이고 실천적인 차원에서까지 재현된다. 바로 ‘국민 행복’이라는 캐치프레이즈 아래서 말이다.

 

4. 위와 같이 보면, 박근혜가 ‘국민 행복’을 들고 나왔다는 것은 결코 놀랄 일이 아니며, 또 그와 유사한 선례가 없는 것도 아니다. 아마 가장 비근한 예가 이명박의 ‘공정사회’론이고, 비슷한 시기에 영국의 보수정권에서 주창된 ‘빅 소사이어티’가 아닐까 한다(다음 글 참조: 링크). 물론 이러한 입장의 직접적 원류는 오늘날 ‘신자유주의’라고 불리게 된 정책 패러다임을 가지고 기존의 ‘케인스주의’의 위기를 (나름대로) 극복하려고 했던 쌔처(Margaret Thatcher) 등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 신자유주의가 오늘날 위기를 맞았고, 우리는 그 대안으로 박근혜 버전의 ‘국민 행복’을 눈앞에 두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매우 자연스럽게 이런 의문이 제기된다: ‘박근혜 등의 “국민 행복”이 쌔처의 “사회따위는 없다”(There is no such thing as society)와 판박이라면, 그들은 신자유주의를 가지고 신자유주의를 극복하려 한다는 것인가?’ 겉으로 보기엔 모순 그 자체인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매우 단호하게도 ‘그렇다’이다. 무슨 얘기냐면, 오늘날 세계를 지배하는 세력들은 그들이 갇혀 있는 지적 한계 안에서만 자신들의 문제를 인식하고 또 그 해결을 구한다는 점이다.

(계속)

‘근혜노믹스’의 밑그림 (1) 왜 ‘국민 행복’인가?

0. 기가 막히게도, 박근혜가 제18대 대한민국의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많은 이들이 허탈했을 테지만, 괜히 유치하게 ‘멘붕-힐링 놀이’따위에 시간을 더이상 허비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저들은 이미 ‘박근혜 시대’를 어떻게 만들어갈 것인지에 대한, 꽤 치밀하게 준비된 비전들을 속속 내놓고 있기 때문이다.

자, ‘박근혜 시대’, 어떤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올까? 나는 뭐 경제학을 하는 입장이니까, 다른 것은 모르겠고, 그냥 경제(학)적인 측면에서 생각을 조금 풀어보겠다.

박근혜 시대 경제정책을 특징짓는 키워드 하나만 꼽아보라면 나는 ‘국민 행복’을 택하겠다. 나는 이 표현 속에 ‘근혜노믹스’의 모든 것이 함축되어 있다고 감히 단언한다.

 

1. 내가 감지하고 있는 한 시초(beginning)는 아마도 ‘국민행복추진위원회’였던 것 같다. ‘도대체 이 뚱딴지 같은 이름은 뭔가?’ 박근혜 당선자가 김종인이라는 사람을 데려와서 ‘국민행복추진위원장’이라는 야릇한 직함을 맡겼을 때, 내가 했던 생각이다. ‘이런 ㅆㅂ, 사람들이 죽겠다고 아우성인데, 어디서 행복타령이냐?’ 이런 생각도 했다.

아닌 게 아니라 ‘행복’을 전문적으로 연구한다는 어떤 학자는 “박근혜의 행복 추진은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다”고 혹평을 하기도 했고(링크), 선거가 끝난 뒤 (특히 노동자들이 잇따라 자살하자) 많은 매체에서는 박근혜의 행복은 곧 국민의 불행이라는 성토가 난무했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듯이, 그 ‘행복타령’이 먹혀들었고, 박근혜는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가 말하는 ‘국민 행복’의 실체가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2. 박근혜가 말하는 국민행복이란 무엇인가? 무릇 경제학에서는, 국민소득과 같은 ‘경제적 지표’로는 삶의 전반적인 질을 나타낼 수 없다는 깨달음에 도달했을 때 비로소 ‘행복’에 주의를 돌린다. 인간이란 행복을 추구하는 존재인데, 돈을 좀 벌어보니 꼭 돈이 많다고 해서 행복한 게 아니더라는… 뭐 그런 스토리다.

그러니까 물질적 풍요는 일정 정도 누리고 있지만 오히려 사람들은 육신의 배고픔과는 다른 그 어떤 빈곤에 시달리고 있을 때, 즉 버젓한 직업과 단란한 가정이 있지만 여전히 자신의 삶의 주인이 되지 못하고 있을 때, 자살자가 넘쳐나고 온갖 반사회적 범죄가 여전히 횡행할 때…! 비로소 ‘행복’이라는 것이 경제학적으로 유의미하게 다가오는 법이다. 앞에서 내가 어리둥절했다고 말한 것도 그래서다. 지금은 ‘행복’을 추구할 때가 아니라 최소한의 ‘생존’을 확보해야 할 때이니까. 아니, 집값 떨어져서 몰락한 가장에게 빚을 탕감해주면서 ‘행복 자금’이라고 하는 건 좀 웃기지 않은가.

더구나 박근혜 아닌가? 그는 ‘성장주의자’ 박정희의 딸이다. 그리고 그의 주변은 ‘여전히 우리는 분배보다는 성장에 목마르다’라는 고백을 서슴지않는 자들로 넘쳐난다(링크). 이런 자들이 왜 ‘행복’을 입에 담는가? 오히려 그들은, ‘행복이니 복지니 분배니 하는 것들, 그저 복에 겨워서 내뱉는 소리다. 그리스 안 보이나? 우리는 더 성장해야 한다,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라고 해야하지 않느냐는 거다.

하지만 굳이 이해를 하자면 못할 것도 없다. 아마도 가장 손쉬운 방법은 ‘수사적 차원’에서 이해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간단히 말해, 박근혜와 그 측근들은, 사람들이 흔히 ‘복지’라고 말하는 것을 그냥 ‘국민 행복’이라고 표현하는 것뿐이라는 거다. ‘복지’라는 표현이 흔히 ‘좌파적’ 색채로 덧칠되어 있으니, 그들이 이런 표현에 일정 정도 불편함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이해할 만하다. 실제로 요즘 돌아가는 꼴을 보면, ‘복지’가 있어야 할 곳에 ‘국민 행복’만이 난무한다.

그러나 전체적인 경제정책의 기조로서 ‘국민 행복’이 ‘복지’를 (완전히는 아니지만) 대체하는 것은 단순히 보수파—특히 한국의—가 갖는 ‘복지 알러지’ 때문만은 아니다. ‘복지’ 대신 ‘국민 행복’을 썼을 때 얻을 수 있는 매우 훌륭한 이점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후자가 전자에 비해 그 실체가 애매모호하고 측정도 어렵다는 점에서 행여 나중에 ‘실패’하더라도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기가 훨씬 쉽다는 게 아닐까 한다. 이렇게 보면, 박근혜 캠프는 (애초 의도와 상관없이) 매우 훌륭한 캐치프레이즈를 만든 것이고, 나아가 박근혜 아닌 문재인이라 해도 가능만 하다면야 ‘국민 행복’을 선호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계속)

Shiller on stimulus: 고용이냐 성장이냐

예전에 김수행 선생의 대중강연을 소개했었는데(링크), 그때 그가 이야기한 많은 인상적인 내용들 중에서도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이, 경제의 상태 즉 경제가 현재 위기에 처해있느냐 여부는 크게 두 가지 지표에 달려있다는 거였다. 그 두 지표란 바로 “경제성장률”과 “실업률”이었다. 좀 극단적으로 말하면, 이 두 가지 지표에 의거하지 않은 경제의 현상태에 대한 진단이나 전망은 모두 가짜라는 것. 이를테면, 요즘 경제와 관련된 미디어의 기사들을 보다 보면, “주가가 반등하고 있다”라는 등의 근거를 들어 경기가 좋아졌다거나 좋아질거라는 주장을 종종 마주치곤 하는데, 이런 것들은 죄다 헛소리라는 얘기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할 점은, 경제성장률과 실업률의 추이가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점이다. 경제성장률은 대체로 국민총생산(GDP)을 이용해서 구한다. 그러나 이 GDP라는 것은, 이를테면 사람들이 죄다 굶어죽고 있어도 증가하는 게 가능하다. 그러니까 요새 나오는 “jobless growth”라는 표현이 이런 현상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보면 된다.

그렇다면 현재와 같은 “저성장”과 “고실업”이 동반된 경제위기 상황에서, 가장 핵심적으로 정책의 포커스가 맞춰져야 할 부분은 어디일까? 다시 말해, “저성장”을 먼저 치유하려고 해야 할까, 아니면 “고실업”을 먼저 없애려고 해야 할까? 물론 장기적으로 보자면야 이 둘이 함께 간다고 할 수 있겠지만, 단기적으로는 얼마든지 괴리될 수 있고, 또 (“jobless growth”라는 표현이 유행하고 있는 데서 볼 수 있듯이) 둘의 괴리현상을 어떤 이들은 아예 “현대경제의 질적 변화”의 결과로 보고 있기도 하다.

우리나라는 어떤가? 아마도 4대강 사업이라는 것이 현재의 경제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정부의 핵심 정책이 아닐까 싶다. 즉 대규모 토목사업으로 고용을 늘리고, 나아가 이를 토대로 경제 전반에 걸친 선순환(virtuous cycle)을 일으켜 궁극적으로는 경제성장도 이룬다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막상 뚜껑을 열고 보니, 이 4대강 사업이라는 게 “고용”에 미치는 영향이 그다지 신통치 않은 모양이다(링크1, 링크2). 아마도 정부로서도 난감한 일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미국에서도 이와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 우리와 마찬가지로 미국도 현재 파탄난 경제로 앓고 있다. 특히 높은 실업 때문에 골머리를 썪이고 있다. 공식 통계에 따르면 현재 실업률이 10%에 조금 못미치게 나오는데, 하지만 통계에 잡히지 않고 있는, 이를테면 초장기 실업자들–이들은 실업급여를 신청할 수도 없다–까지 더하면 그 수치는 훨씬 더 올라갈 것이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미국 정부는 과거 “뉴딜”을 연상시키는 대규모 토목공사들을 여기저기서 발주하고 있는 모양인데, 그 효과가 (역시 우리와 마찬가지로) 신통치 않다는 거다.

마침 이런 문제에 대해, 예일대의 로버트 실러(Robert Shiller) 교수가 <뉴욕타임스>에 좋은 글을 썼다(링크). 그의 주장의 요지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1) 현재 미국정부가 시행하고 있는 공사들은 자본투자를 통한 경제성장 효과를 거둘 수는 있을지 몰라도, 직접적으로 일자리를 창출하는 데는 효과가 매우 적다; (2) 현재 가장 시급한 것은 실업을 줄이는 것이므로, 정책의 포커스가 “일자리 창출”에 맞춰져야 한다; (3) 그러기 위해서는 노동집약적인 부문에 정부의 자금을 집중시킬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그가 말하는 “노동집약적인 부문”이란 무엇일까? 이제껏 우리는 “공사판”이 노동집약적이라고 생각해왔지만, 현재 드러나고 있듯이 그쪽은 오히려 자본 집약적이다. 그러니까, 결국 토목공사는 “자본”이 하는 것이고, 그 자본은 그 토목공사를 “노동” 대신 “기계”만으로도 할 수 있다는 얘기. 이에 비해, 실러 교수가 주문하는 것은, 그렇게 고용을 자본을 거쳐 “간접적”으로 창출하려 하지 말고 “직접” 창출해내라는 것. 여기서 하나 더 재밌는 것은, 그가 말하는 노동집약적 부문이란 곧 서비스업이다. 그것도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교육, 공공보건 및 안전, 도시 기반시설 보수/확충, 청년 프로그램, 노인돌보기, 환경보호, 문예, 과학연구” 등.

이런 것들이 과연, 고용을 창출하는 데는 효과가 있다고 치더라도, 경제 전체적으로 봤을 때 자원을 효율적으로 배분하는 것일까? 경제학을 어설프게 배운 사람들은 아마도 고개를 젓겠지만, “효율적 자원 배분”이라는 차원에서 보더라도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는 게 실러 교수의 설명이다. 즉 위와 같은 부문들에서 창출되는 benefit들은 가격이 매겨지기 어렵고, 따라서 단순한 비용-산출 분석(cost-benefit analysis)을 통해서는 당연히 비효율적이라고 판명이 나겠지만, 장기적으로는 경제의 체질을 개선하고 더 나은 비즈니스 환경을 만들어낼 것이라는 얘기다.

글쎄… 이런 주장들을 MB와 그 측근들이 귀담아 들을리는 만무하고… 결국엔 사회적으로 정부를 압박해서 좀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할 수밖에 없다. 하여간 이론적으로는 실러 교수와 같은 이들의 접근을 좋아하는 편은 아닌데, 이번 얘기는 아주 좋다. ㅎㅎ

“직접 일자리를 만들어내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