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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 울프, ⟪왜 세계화는 작동하는가⟫ (2004) 서문

마틴 울프(Martin Wolf)는 아마도 전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경제칼럼니스트 중 하나일 것이다. 그는 80년대 후반부터 영국의 경제일간지 ⟪파이낸셜 타임스⟫(Financial Times)에서 일하기 시작해 지금은 수석 경제 칼럼니스트(chief economics commentator)다. 이분은 단행본도 몇 냈는데, 지금 소개하는 ⟪왜 세계화는 작동하는가: 범지구적 시장경제 옹호⟫(Why Globalization Works: The Case for the Global Market Economy, 2004)도 그 중 하나다. 국내에는 ⟪금융공황의 시대⟫라는 책이 번역되어 나와 있다. (이분에 대해 좀 더 자세한 사항은 여기를 보시길.)

이하는 ⟪왜 세계화는 작동하는가⟫에 실린 자전적 성격의 서문을 우리말로 번역한 것이다. ‘사상은 중요하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이 짤막한 글에서 그는, 자기가 가진 자유주의(liberalism) 사상의 우월성과 그것이 어떻게 해서 이 세상을 좋은 방향으로 바꿀 수 있는 ‘유일한’ 사상이 되었는지를 설명한다. 진정 열심히 달려 왔기에 자신의 삶에 부끄러움이 없는 지식인답게, 그는 자신의 어린시절부터 자기가 살아온 길을 꽤 소상하게, 그리고 상당히 ‘솔직하게’ 서술한다. 그러나 이 글의 진정한 특징은, 그런 서술의 과정에서, 평소 그의 신문 칼럼에서는 보기 어려운 온갖 비논리적이고 억지스러운 진술들이 난무한다는 거다. 특히 그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마르크스주의 등등에 대한 혐오는 정말 입이 벌어질 정도다. 아아… 그의 빛나는 신문칼럼 뒤에는 정녕 이런 일그러진 ‘사상’이 있었단 말인가! (아, 물론 이에 대한 판단은 사람마다 다르겠다. 그런 판단에 영향을 줄 마음은 없다. 그리고 나는 그의 결론적인 생각 그 자체에 대해서는 ‘저정도면 좋다’라고 인정하는 편이다.)

야니스 바루파키스(왼쪽)와 함께. 런던에 있을 때 마틴 울프를 몇 번 보았는데, 이분, 좀 '펭귄맨' 닮으셨다. 글을 많이 읽다보니, 친근해져서 더 그런 것 같기도.. ㅎㅎ
야니스 바루파키스(왼쪽)와 함께. 런던에 있을 때 마틴 울프를 몇 번 보았는데, 이분, 좀 ‘펭귄맨’ 닮으셨다. 글을 많이 읽다보니, 친근해져서 더 그런 것 같기도.. ㅎㅎ

더군다나, 이 책이 나오고 나서 몇년 뒤 ‘선진국발’ 세계경제공황이 났고, 그로부터 8년여가 지난 지금까지 세계경제는 그 여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지금 우리는 ‘세계화는 끝났다’라는 말을 질리도록 듣고 있다! 적어도 울프가 이 책에서 했던 말들의 상당 정도는 좀 더 신중하게 재고되어야만 할 것이다.

어쨌거나 아래의 ‘서문’은 그 자체로 꽤 재밌는 글이다. 이 글은 비단 마틴 울프 자신만이 아니라 그 세대의 영국의 (또는 유럽의) 한때는 좌파 사상에 매력을 느꼈으나 지금은 거기에서 멀어진, 그러나 여전히 이 사회의 진보를 믿는다고 스스로 자임하는 중도 자유주의자들이 으레 살아왔을 법한 모습을 담고 있다고 보면 더 좋을 것 같다. 원래 이 번역문은 2008년 8월에 내 과거 블로그에 올려뒀던 것이다.


Martin Wolf, Why Globalization Works: The Case for the Global Market Economy, New Haven: Yale Nota Bene, 2004, pp. x-xviii.
(원문에 달린 미주는 번역하지 않음.)

서문―왜 나는 이 책을 썼는가

정부가 인민에게 제공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은총의 하나인
자유무역은 거의 모든 나라에서 인기가 없다.
— 토머스 맥콜리(Thomas Macaulay), 1824

사상(ideas)은 중요하다. 아마도 이것은 내가 내 아버지 고 에드먼드 울프(Edmund Wolf)로부터 배운 가장 중요한 교훈일 것이다. 그는 히틀러로부터 도망 온 오스트리아 유태인 난민으로, 제2차 세계대전 전에 영국으로 건너왔다. 극작가이자 열정적인 지식인이었던 그는, 나치의 미치광이 사상과 그것과 거의 같은 정도로 미치광이 사상인 공산주의자들의 그것이 과연 어떻게 세계의 커다란 부분에서 문명화한 삶을 파괴했는지, 그리고 파괴하고 있는지를 내게 가르쳐줬다. 나는 제2차 세계대전 직후인 1946년에 태어났으므로, 이와 같은 위험이 그다지 오랜 얘기가 아니었다. 독일은 내가 태어나기 겨우 일 년 전에 패망했다. 내가 외부세계를 지각하기 시작할 무렵, 나는 사상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예컨대 나는 내 양친이 무장한 사상을 피해 달아난 난민이라는 것을 이해하고 있었다. 비록 내 친가와 외가 직계가족들은 유럽을 떠남으로써 살아남긴 했지만, 그들의 대부분의 친척들은 오늘날 홀로코스트라 불리게 된 것―나는 이를 그 히브리어 이름, 쇼아(Shoah, 파괴)라고 부른다―에서 사라져갔다는 것을 나는 알게 됐다. 네덜란드 유태인 집안 출신인 내 어머니는 그녀의 아저씨, 아주머니, 사촌들 중 거의 서른 명이 나치 치하에서 죽었다는 얘길 우리에게 해 줬다. 나는 또한 공산주의 독재정권들이 유럽을 분할해 놓고도 내가 자라난 나라의 자유와 평온까지도 위협하고 있음을 곧 알게 되었다.

내 아버지는 정직한 사람이자 작가였으므로, 그는 사람들에 대해 생각하고 말할 때 추측에 의거하기보단 사실에 바탕을 뒀다. 그런 까닭에 그는 수많은 그의 동시대인들과는 달리 결코 공산주의에 매료되지 않았다. 그는 공산주의를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라며 비난했는데, 그 위에서 이데올로기적으로 고무된 폭군들이 인류애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을 고문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언제나 민주주의에 우호적이었고 공산주의에 적대적이었다. 당시는 많은 지식인들이 반(反)공산주의를 꽤 부끄러운 일로 여겼지만, 그의 생각은 정반대였다. 그래도 당시 대부분의 지식인이 그랬듯, 그는 사회주의―온건하고 신중한 종류의 것이긴 했지만―에는 끌렸었다. 사회민주주의가 당시 그의 천성에 맞는 지적 거처였다. 그가 한 인간으로서 토니 블레어(Tony Blair)를 어떻게 생각했을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그의 정치는 좋아했을 것이다. 언론인이자 방송인 및 작가로서의 긴 경력을 거치며(다른 뭣보다도 그는 1950년대에 BBC의 독일어 방송의 프로그램 편성자였고, 1960년대에서 1980년대까지는 독일 주간지 ⟪디 차이트⟫(Die Zeit)의 런던 통신원이자 나중엔 칼럼니스트였으며, 독일 텔레비전용 다큐멘터리 감독 겸 극작가였다), 그는 자유민주주의의 중요성을 반복해서 강조하고는 했다. 이 당시는 많은 독일 지식인들이 급진적인 마르크스주의의 다양한 변종들에 놀아나던 때였다는 게 중요하다.

내 아버지는 지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나에게 가장 중요한 영향을 끼친 사람이었다. 뿐만 아니라 나는 아버지보다 덜할 것 없이 훌륭한 어머니로부터 담백한 인간적 품위가 갖는 영속적인 가치를 배웠다. 나는 내 부모님의 가치관에 저항해본 적이 한 번도 없긴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사회민주주의자 즉 ‘사회적 자유주의자’에서 고전적 자유주의자(classical liberal)―이것이 바로 내가 이 책을 통틀어 ‘자유주의자’라 했을 때 의미하는 바다―로 바뀌어 갔다. 나는 자유(freedom), 민주정부, 무관심적 진리추구와 같은 계몽주의적 이상들은 한없이 귀중하지만 동시에 끔찍스러우리만치 취약하다는 것을 배웠다. 또 나는 이런 가치들에는 수많은 적들이 있으며, 그 중 몇몇은 공개돼 있지만 다른 몇몇은 잘 보이지 않는다는 것도 발견했다. 그 중에서 가장 나쁜 것은, 오직 자유민주주의만이 제공할 수 있는 자유를 통해 혜택을 보면서도 그것을 공격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는 지식인들이다. 이들이 바로 제2차 세계대전 무렵에 조지 오웰(George Orwell)이 공격했던 그런 종류의 인간들이었음을 나는 나중에 알게 됐다. 그러나 그들은 매 세대마다 되돌아오며, 순진한 젊은이들을 망쳐놓고는 한다. 1960년대 가장 영향력 있었던 피리 부는 사나이(pied piper)는 허버트 마르쿠제(Herbert Marcuse)였다. 좀 더 최근에 그것은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였지 않나 한다.

1965년 10월, 나는 옥스퍼드대학교의 코퍼스 크리스티 칼리지(Corpus Christi College)에 입학해서 고전학(classics)을 공부했다. 내 세대를 휩쓸었던 저항의 파도가 휩쓸기 직전이었다. 그런 저항들 중 몇몇―특히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는 것 같은―은 당시에도 그리고 지금도 정당해 보인다. 개인의 해방을 위한 요구에 나는 공감했다. 비록 지금은 혁명들이 다들 그렇듯 그것 또한 좋기도 하고 나쁘기도 하다고 여기지만 말이다. 그러나 많은 저항들이 나는 이미 그로부터 면역되어 있었던 유치한 좌익급진주의의 형태를 띠었다. 나는 수많은 마르크스주의 아류들과 마주쳤다. 그들은 그들 사이의 차이들이 중요하다고 믿는 듯했다. 나는, 별 볼일 없는 두 시인의 장점들을 구별해달라는 요청을 받았을 때 새뮤얼 존슨(Samuel Johnson)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즉 해충과 벼룩 중에서 어느 쪽이 더 나은지 따져볼 필요는 없다는 거다. 어차피 나는 모든 종류의 마르크스주의들이 사악할 뿐만 아니라 어리석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들이 공유하고 있는 자유―또는 ‘부르주아’―민주주의에 대한 적대는 혐오스러웠다. 그 이후 역사는 내가 내 부모님으로부터 일찌감치 배운 나의 태도를 승인해 마지않았다.

다행스럽게도 나는 옥스퍼드에서 좀 더 긍정적인 것들을 찾을 수 있었는데, 그것은 특히 1967년 고전학에서 정치학/철학/경제학(PPE)으로 전공을 바꾼 뒤였다. [그 때 배운 것으로서] 이 책과 관련된 주요한 교훈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일단의 집단주의 이데올로기―제국주의, 군사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그리고 마침내 파시즘―의 공격으로 자유주의가 무너짐에 따라 빚어진 폐해에 대한 것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좋은 경제정책―당시 많은 수의 옥스퍼드 경제학자들은 그것을 현명한 케인스주의 정도로 잘못 생각하고 있었긴 하지만―이 자유로운 사회와 경제를 그런 공격들로부터 지켜줄 수 있으리라는 것도 배웠다. 1930년대에처럼 경제가 실패하면 정치의 안정과 사회의 조화는 커다란 위험에 처한다. 번영이 비록 중요한 것이긴 하지만 경제학은 그것을 훨씬 넘어서는 것에 관여한다. 경제학은 우리가 문명을 계속해서 이어나가려 할 때에도 중요하다. 사람들이 그들 자신은 물론 그들 자녀들을 위한 더 나은 삶에 대한 희망이 없다면, 동의에 기반을 둔 사회는 주저앉는다.

내가 옥스퍼드로 갔을 때 나는 아버지의 영향으로 여전히 사회민주주의자―그 당시 죽은 지 얼마 안 됐던 노동당수 휴 개츠켈(Hugh Gaitskell) 성향의―였다. 나는 16살 때부터 노동당의 ‘젊은 사회주의자들’(Young Socialists) 그룹에서 철두철미한 반마르크스주의자로 활동했다. 옥스퍼드에서 나는 ‘노동당 클럽’(Labour Club)에 가입했다. 첫 번째 학기가 끝날 무렵, 해롤드 윌슨(Harold Wilson) 당시 노동당 정부에 반대하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기존 ‘노동당 클럽’을 장악하자 나는 ‘옥스퍼드대 민주 노동당 클럽’(Oxford University Democratic Labour Club)이라는 이탈조직을 만드는 데 관여했다. 1967년 나는 1966년 초에 우리가 세웠던 ‘민주 노동당 클럽’의 의장이 되었다. 나는 1970년대 초까지 노동당의 적극적인 지지자였다.

1969년, 나는 옥스퍼드의 너필드 대학(Nuffield College)로 가서 지금은 경제학 석사(Master of Philosophy)라고 부르는 것을 했다. 거기서 나는 주로 세 명의 스승―이안 리틀(Ian Little), 모리스 스콧(Maurice Scott), 맥스 코든(Max Corden)―에게서 번영, 특히 제3세계의 번영을 위해 국제무역이 중요함을 배웠다. 맥스 코든은 당시 실효적 보호에 대한 중요한 저작을 끝마쳤고, (나처럼) 수학에 자신 있는 학생들에게 특히 유의미한 방식으로 무역이론을 가르쳤다. 다른 둘은 (예일대의 티보 스키토프스키Tibor Scitovsky와 함께) 이전 반 세기동안의 경제발전에 대해 당시로서는 가장 중요한 저작의 하나인 ⟪몇몇 개발도상국에서 산업과 무역⟫(Industry and Trade in Some Developing Countries)을 1970년에 펴냈다. 우리 시대의 ⟪국부론⟫이라 할 만한 이 훌륭한 책은 여러 나라의 무역정책과 경제발전에 대한 연구로서, 리틀 교수가 OECD의 ‘발전센터’(Development Centre)에서 행한 것이다. 그것은 수입대체가 아닌 외향적 무역 체제(regime)의 중요성을, 그리고 통제경제정책(dirigisme)이 아닌 시장경제를 옹호하는 하나의 반혁명 선언(counterrevolutionary manifesto)이었다. 나중에 이런 접근은 일반적인 상식이 되었지만, 당시로서는 나쁜 인습에 대한 도전이었다.

그 책은 내가 시장경제가 그에 대한 다른 어떤 대체물보다도 뛰어나다는 믿음으로 개종하도록 만들었다.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이 민주주의에 대해 했던 기막힌 표현을 사용하자면, 그것[시장경제]은 이제껏 시도되었던 모든 형태의 것들만 빼면 가장 형편없는 경제시스템이다. 이와 같은 관점의 변화는 영국의 주택정책에 대한 짤막한 논문을 쓰면서 굳어졌다. 이 과정에서 나는 지대에 대한 통제와 공공임대주택의 증가가 재앙적인 결과를 낳을 것임을 알았다. 당시 너필드 대학에 있다가 나중에 런던정경대(LSE)로 옮겨간 콜린 크라우치(Colin Crouch)는 내가 이 주제로 ‘젊은 페이비안들’(Young Fabians)을 위해 짧은 팸플릿을 쓰도록 설득했다. 이 팸플릿은 익명의 심사자로부터 즉각 거부되었고, 나중에 나는 그가 그 바로 전에 장관을 지냈던 리처드 크로스만(Richard Crossman)이었음을 알게 됐다. 이런 일을 통해 나는 노동당이 낡고 작동 불가능한 국가주의(statism)와 결합한 채 지적으로 죽어가고 있다고 믿게끔 되었다. 이런 확신은, 영국의 재앙적인 주택정책에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하다는 내 말에 [크로스만보다] 훨씬 더 지적인 앤써니 크로슬랜드(Anthony Crosland)마저도 설득되지 않는 것을 보고 더 굳어졌다.

이후 프리드리히 하이에크(Friedrich Hayek)의 작품들, 특히 ⟪노예의 길⟫(The Road to Serfdom)과 ⟪자유헌정론⟫(The Constitution of Liberty)을 통해 나는 시장경제는 안정되고 내구성 있는 민주주의를 위한 필요조건이기도 함을 확신하게 됐다. 시장경제는 그와 같은 민주주의의 충분조건이 아닐지는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필요조건이기는 한데, 계획경제에 내재된 권력의 집중은 아래로부터의 압력과 양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시장은 또한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의 개인적 선택을 표현할 수 있게 해 준다. 시장은 자유의 차원(dimension)이다.

이와 같은 일련의 신념들은 나를 사회민주주의에서 고전적 자유주의로 돌려세워 놓았다. 지금도 여전히 난 자유주의자인데, 그것은 내가 개인의 자유에 최상의 가치를 두기 때문만이 아니라 주제넘게 나서는 정부(intrusive government)의 지력과 능력에 대해 끊임없이 회의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오늘날 나는 내가 사회민주주의자들(미국에서라면 그들이 말하는 자유주의자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부분적으로 이는 사회주의의 소멸이 건전한 이들의 계획경제와 국가소유에 대한 믿음을 말살했기 때문이다. 종교적 광신자, 반(反)계몽주의자, 극단적 환경론자, 파시스트, 마르크스주의자, 그리고 오늘날의 반(反)지구화론자와의 전투에서 자유주의자, 사회민주주의자, 온건한 보수주의자는 같은 편에 있다. 이 책은 이와 같은 폭넓은 범주에 속하는 모든 이들을 위한 것이며, 바라건대 그들이 범지구적 시장경제가 매우 바람직한 것임을 믿게 만들었으면 좋겠다. [물론] 중요한 문제는 그것 자체라기보단 이 범지구적 시장경제를 어떻게 운영(govern)하고 규제할 것이냐다.

너필드 대학에서의 마지막 해에 나는 세계은행(World Bank)에 젊은 전문가(young professional)로 지원했다. 당시 은행의 경제국 수장이었던 데이빗 헨더슨(David Henderson)이 나의 이런 결정에 강력한 영향을 미쳤는데, 역설적이게도 그는 은행의 총재였던 로버트 맥나마라(Robert McNamara)와 함께 얼마 뒤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러고 나서 그는 은행을 떠나 영국으로 돌아왔고, 1980년대에는 OECD의 수석 경제학자가 되었다. 같은 시기에 만났던 또 다른 자유주의 대의의 전사로, 당시 [너필드] 대학의 연구원이었던 디팍 랄(Deepak Lal)이 있다.

1971년 세계은행에서 내 경력은 훌륭한 영국인 경제학자 스탠리 플리즈(Stanley Please)가 이끌던 부서에서 시작됐다. 그런 선택을 한 까닭은, 그것이 매력적이고 보람 있는 기회로 보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가난한 나라의 소득을 높이는 것이야말로 경제학자에게는 가장 중요한 현대적 과업이라고 당시에―그리고 지금도―믿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것은 최고의 훈련이었음이 드러났다. 많은 평생의 친구들도 사귀었다. 그 중 몇몇은 그들의 모국에서 중요한 역할을 계속해서 했다. 그 초창기 동료들 중에는 나중에 인도의 개혁적인 재무 비서관이 되는 몬텍 싱 알루왈리아(Montek Singh Ahluwalia), 나중에 인도의 수석 경제자문관이 되는 샹카 아카리야(Shankar Acharya)가 있었는데, 이 둘은 1990년대 인도의 시장 지향적 개혁에서 핵심적 역할을 했다.

1972-74년에는 동아프리카, 1974-77년에는 인도를 담당하는 경제학자로 일하면서 나는 국가가 통제하고(dirigiste) 내향적인 경제정책이 행하는 폐해를 직접 배울 수 있었다. 이는 기괴한 비효율성 때문만이 아니고, 그것이 낳는 부패라는 돌림병 때문이기도 하다. 은행에서의 10년에 걸쳐 나는 주로 시장 메커니즘과 무역에 더 많이 의존할 것을 주장했다.

세계은행에서 내가 쓴 첫 번째 주요 보고서는 케냐의 민간부문에 대한 것이었다. 얼마 뒤 나는 잠비아에서 행해지고 있던 정책들의 반(反)농업적 편향에 대해 연구했다. 이 경험을 통해 나는 무척 기가 꺾였는데, 이 두 나라가 세계은행의 꽤 열정적인 지원을 등에 업고서도 경제적 낭떠러지 위로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은행에서 내가 가장 오랜 기간 매달린 것은 인도의 터무니없이 반무역적이고 개입주의적인 정책에 대한 연구였다. 인도가 큰 나라라는 이유로, 세계은행의 지원은 비록 작게나마 계속 유지되었다. 기업들에 어떤 기술과 투입물로 무엇을 생산할 것인지를 명령하도록 고안된 면허제도가 빚어낸 결과들을 나는 잊을 수가 없다. 이 작업은 인도의 수출에 대한 한 권의 책으로 결실을 맺었다. 인도에 대해 연구하는 동안 수많은 친구들을 사귈 기회를 가졌다. 그들 중 가장 인상에 남는 이가 만모한 싱(Mannohan Singh)이었다. 당시 그는 인도정부의 수석 경제자문역이었고 나중에는 개혁적인 재무장관이 되었다.

세계은행에서 나는 1978년에 출판된 첫 번째 ‘세계개발보고서’(World Development Report) 작성을 위한 팀원으로 일 년 간 일한 적도 있다. 이는 당시 은행의 총재였던 로버트 맥나마라의 가장 창의력 있는 기획의 하나였으며, 당시 은행의 사업부문 수장으로 막 뽑혀서 나중에 그 자리를 약 20년 지켰던 어네스트 스턴(Ernest Stern)이 지휘했다. 여기서도 나는 무역에 초점을 맞췄다. 은행에 있는 동안 내게 중요한 영향을 끼친 인물로 이젠 고인이 된 벨라 발라사(Bela Balassa)가 있다. 그는 존스홉킨스 대학교와 세계은행에 소속되어 있었고, 수출지향적 무역정책을 장려하기 위해 끈기 있게 일했다. 다른 중요한 지적 영향을 끼친 인물로 당시엔 MIT에 있었고 지금은 콜럼비아 대학교에 있는 자그디쉬 바그와티(Jagdish Bhagwati)와 당시엔 미네소타 대학교에 있었고 지금은 IMF 부총재인 앤 크루거(Ann Krueger)가 있다. 이 두 학자 모두 외국무역체제 및 경제발전에 대한 고전적 연구의 개론서를 1970년대에 낸 바 있다.

1970년대 말에 이르자 나는, 세계은행은 그 직원들의 훌륭한 의도와 능력에도 불구하고 치명적인 단점을 가진 기관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것의 실패의 가장 중요한 원인은, 그것이 돈을 빌려주는 나라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에는 거의 무관심한 채로 대부에 매달리고 있다는 데 있었다. 이것은 불가피한 단점인데, 왜냐하면 세계은행은 그것이 제공할 수 있는 것―돈―이 종종 [그 돈을 받는 나라에] 별다른 변화를 만들어내지 못할 수도 있음을 인정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단점은 과거 미 국방장관을 지냈고 1967년부터 1981년까지 은행 총재였던 로버트 맥나마라의 성격 때문에 더 증폭됐다. 맥나마라는 무지막지한 의지의 사나이로, 빈곤경감에 개인적인 사활을 걸었으며 끔찍하리만치 상식이 없는 사람이었다. 본성상 그는 계획자이자 수량화에 능했다. 그의 수석 경제자문관이었던 고(故) 홀리스 치너리(Hollis Chenery)의 보좌 아래 그는 스탈린식 발전관을 실행시켰다. 즉 (1) 빠른 성장이 투자증대와 이용 가능한 외환의 증가에 뒤따를 것이다, (2) 이 둘은 외부로부터 추가적인 자원을 필요로 한다, (3) 이런 자원의 상당 부분은 세계은행에서 나오게 된다. 그의 관리 아래 은행과 은행의 대부는 엄청나게 커졌는데도, 모든 부서는 프로젝트의 질이나 수혜국의 발전 프로그램에 사실상 상관 않고 돈을 더 많이 대출하라는 압력에 시달렸다. 이는 은행 직원들의 전문성을 훼손시켰고, 돈을 빌리는 쪽으로 하여금 뻔한 결과를 무시하고 부채를 쌓아 나가도록 부추겼다. 이런 상황은 계속될 수 없었고 실제로 그랬다. 몬텍 알루왈리아가 언젠가 내게 말했듯, 세계은행은 죽어가는 산업의 성장하는 기업이었다. 그 성장의 한계에 다다를 것은 뻔했고, 맥나마라가 은행을 떠난 뒤 곧 그렇게 됐다.

이런 일에 질색이 날 때쯤, 나는 부서의 선임 경제학자로서 인도를 대상으로 3년째 일하고 있었다. 이 기간에 은행과 관련한 내 주요한 기능은 엄청난 양의 원조제공을 정당화하는 일이었다. 바로 이 돈이 인도정부로 하여금 그들에게 절실한 정책전환을 보류할 수 있게 해주고 있었는데도 말이다. 결국 이 정책전환은 거의 20년을 낭비한 끝에 1991년 외환위기의 깊은 수렁 속에서 단행되었다. 당시 재무장관이던 만모한 싱이 이 전환의 책임자였고, 몬텍 알루왈리아가 경제비서관으로 그리고 나중에는 재무비서관으로 그를 도왔다. 이와 같은 경험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교훈을 확인시켜줬다. (1) 정책전환은 경제성과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 (2) 그런 정책전환은 똑똑하고 의욕있으며 규율이 잘 잡힌 비교적 소수의 팀에 의해서도 실행될 수 있다, 끝으로 가장 중요한 것으로 (3) 그런 정책전환은 바깥에서 부과될 수는 없다.

불행히도 세계은행의 잘못은 과도한 대부만이 아니었다. 은행은 또한 정부들에도 대부를 해줘야만 했다. 이는 두 가지 바람직하지 못한 결과를 낳았다. (1) 은행은 정부가 해당국의 이해관계를 대변한다고 가정해야만 했다, (2) 은행은 부당하게도 그 국가이익에 대한 집단주의적 견해를 강화시켰다. 은행의 대부는 부패하고 종종 사악한 정부들이 그들 국민들의 이해관계와 바람을 무시하는 것을 쉽게 만들었다. 은행을 그만둘 무렵 나는 은행의 대부자들을 세 가지 범주로 나눌 수 있다는 결론을 얻었다. (1)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 대부자, (2) 도움을 이용하지 않으려 하는 대부자, (3) 도움을 필요로 하고 또 그것을 이용하고자 하는 대부자. 세계은행은 그 구조상 통상 매우 작은 그룹인 이 세 번째 범주의 대부자들에게 그것의 역량을 집중시킬 수 없었다. 그 결과 그것이 행하는 노력들은 불필요하거나 소모적이었다. 따라서 나는 고(故) 피터 바우어(Peter Bauer) 경이 오래 전에 원조에 대해 했던 비판의 대부분에 동의하게 되었다.

성공적인 발전을 위해 통합이 중요한 요소이긴 하지만 세계경제의 몇 가지 측면들을 감시하도록 디자인된 기관들이 실패할 수 있다는 깨달음은 오늘날까지 나를 떠나지 않고 있다. 자유로운 세계경제를 수호하는 것이 IMF, 세계은행, WTO와 같은 특정 기관을 수호하는 것은 아니다. 이런 기관들은 그들 자체로서 판단되어야―그리하여 개혁되거나 폐기되거나 해야―한다. 이 단계에서 이런 깨달음을 통해 나는 은행의 보호막을 나와 비교적 불확실한 민간연구소(think tank)의 세계로 들어갔다. 1981년 9월, 나는 런던에 있는 무역정책연구센터(Trade Policy Research Centre)에 연구국장으로 들어갔다. 이 자리는 전후(戰後) 국제무역이론의 거성인 고(故) 해리 존슨(Harry Johnson)이 차지했던 것이기도 하다. 정력적인 소장 휴 코벳의 지휘 아래 센터는 무역자유화와 다자간무역체계에 대한 연구로 그에 합당한 명성을 얻고 있었다. 나는 세계은행에서 근무하던 마지막 두 해에 센터와 처음 접촉했다. 동료 도널드 키싱(Donald Keesing)과 함께 나는 개발도상국의 섬유/의류 수출품에 대해 선진국들이 행하고 있던 수입할당제도에 대한 건실한 연구보고서를 썼다. 그것은 빈국의 비교우위에 대한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들의 반응에 들어있는 위선에 대한, 그리고 몇몇 무역정책기조의 복잡성과 불합리성에 대한 귀중한 교훈을 제공했다.

나는 센터에서 6년간 연구국장을 지냈다. 그 기간 동안 대부분의 작업은 다자간무역협상의 여덟 번째 라운드를 열 것을 촉구하는 일이었다. 이는 나중에 우루과이 라운드로 알려지게 된 것으로, 결국 1986년에 시작됐다. 센터는 서비스에 관한 무역협상을 위한 의제를 만들어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하지만 내가 한 가장 중요한 기여는 무역체계에서 개발도상국의 역할에 대한 연구들을 기획한 것이다. 이 연구들의 목적은 개발도상국이 호혜적인 방식으로 무역협상에 나서기를 꺼리는 오랜 관행에 의문을 제기하고, ‘특례 및 우대 조치’(special and differential treatment)를 옹호하기 위함이었다. 이 주제에 대한 가장 중요한 연구는 저명한 국제무역법 학자이자 당시엔 미네소타 대학교에서 일하고 있던 로버트 휴덱(Robert E. Hudec)에 의해 수행되었다.

아아, 적어도 영국에서 민간연구소의 재정은 고질적으로 취약하다. 1986년에 이르자 센터는 문을 닫아야 할 것임이 점점 명백해지고 있었고, 머지않아 그렇게 됐다. 새로운 일을 찾고 있는데 1987년, 나는 당시 ⟪파이낸셜 타임스⟫(Financial Times)의 편집인이던 저프리 오웬(Geoffrey Owen)으로부터 거기의 수석 경제학 필자가 되어 달라는 초청을 뜬금없이 받았다. 이것은 그로서는 엄청난 도박이었다. 내가 그 신문에 몇 번 글을 낸 적이 있긴 하지만, 나는 언론인은 아니었고 그렇게 될 생각을 한 적도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거부할 수 없는 도전이었고, 결국 나는 1987년 9월에 ⟪파이낸셜 타임스⟫에 들어갔다.

이 무렵 경제정책에 대한 일반적인 믿음은 수차례의 혁명적 변화를 겪었다. 주어진 현실의 결과들을 달성하기 위해 경제를 미세조정할 수 있다는 순진한 케인스주의적 신념은 1970년대의 스태그플레이션으로 깨져버린 바 있다. 그것은 화폐적 안정을 추구하는 것으로 대체되어, 물가안정(inflation targetting)―나는 이 개념을 1970년대 모리스 스콧으로부터 처음 들었다―이라는 목표가 널리 채택되는 결과를 낳을 것이었다. 통제경제정책과 보호주의는 거의 모든 곳에서 인기가 시들해졌다. 영국에서 환율통제는 1979년 쌔처(Thatcher)정부에 의해 폐기됐다. 민영화가 1980년대 초 영국에서 시작되었고, 이후 세계를 휩쓸었다. 1980년대의 이른바 ‘워싱턴 컨센서스’(Washington consensus)―영국 경제학자 존 윌리암슨(John Williamson)이 만든 용어―는 경제발전에 있어 건전한 재정/통화정책과 적극적인 시장의존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내게 가장 직접적으로 와닿았던 것은, 내향적 무역정책의 실패 및 무역자유화의 뛰어남이 널리 받아들여졌다는 점이다. 부분적으로는 이런 이유로 개발도상국들은 과거 무역라운드에서보다 우루과이라운드에서 더 큰 역할을 실제로 했다. 이는 1995년 1월에 세계무역기구(WTO)의 설립으로 이어졌다.

시장관계를 기반으로 통합된 하나의 세계경제라는 아이디어가 한동안의 집산주의적 휴지기 뒤에 다시 태어난 것만 같았다. 1989년-91년 사이 소비에트제국(Soviet empire)의 붕괴―내 생애 가장 즐거웠던 깜짝쇼―는 정치와 경제정책에서의 범지구적 변환을 확정짓는 것만 같았다. 사회주의는 죽었다. 미국 분석가 프란시스 후쿠야마(Francis Fukuyama)는 심지어 역사의 종말을 선언했다. 이런 시각은 그것을 부당하게 희화화한 자들에 의해 경멸받았다. 후쿠야마가 주장한 것은 자유민주주의야말로 앞선 경제와 사회를 운영하는 유일한 방식이라는 거였다. 이 점에서 그는 옳았다. 그러나 자유주의의 적들은 그것의 생존을 여전히 위협할 수 있고, 역사가들이 거의 확정적으로 황금시대라고 보는 것을 끝장낼 수도 있다. 이 명제가, 대부분의 인류역사를 훼손시키는 어리석은 짓과 범죄가 앞으로 이런 저런 형태로 다시는 반복되지 않으리라는 뜻은 아니다. 최악의 경우, 무질서가 다시금 세계를 집어삼킬 수도 있다. 만약 역사가 무언가를 가르친다면, 그것은 우리에게는 선택지가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더 나은 세상을―또는 더 나쁜 세상을―고를 수 있다.

따라서 이 책은 학문적인 것이라기보단 설득을 위한 것이다. 이 책은, 시장을 통해 통합된 세계는 인류 대다수에게 엄청난 이익을 안겨줄 거라는 명제에서 시작한다. 시장은 생활수준을 높임에 있어 지금까지 발명된 그 무엇보다 더 강력한 제도(institution)다. 사실 그에 필적할 상대는 없다. 그러나 국가가 시장을 필요로 하듯 시장은 국가를 필요로 한다. 이 둘이 잘 결합했을 때 우리는 한 사회를 운영하는 데 가장 훌륭한 방식인 현대 자유민주주의를 갖게 된다. 그것의 혜택은 더 널리 퍼져나가야 한다. 오늘날의 문제는 너무 많은 범지구화가 있다는 게 아니라 그것이 너무 적다는 데 있다. 더 많은 자유시장과 더 많은 협력적 세계운영(co-operative global governance)을 잘 조합한다면, 우리는 지금보다 더 잘할 수 있다. 나는 국가를 다른 무언가로 대체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게 아니다. 그것은 말도 안 될 뿐 아니라 해롭기까지 하다. 내가 주장하는 것은 국가가 협력적 세계경제질서에서 그들의 장기적 이익에 대해 더 잘 이해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런 명제들을 정당화하는 것이 이 책의 핵심이다.

첫 번째 자유주의적 질서의 붕괴는 30년 동안의 대재앙을 낳았고, 내 부모세대는 그것 때문에 엄청난 고통을 겪었다. 수백만의 생명들이 그런 실책 때문에 사그라져갔다. 이제 우리 모두는―또는 거의 모두는―철이 들었다. 자유주의 질서에 대한 신념에 흠집을 내는 사상들은 잘못됐다. 사회주의는 작동하지 않는다. 공산주의와 파시즘은 실수였을 뿐만 아니라 범죄였다. 제국주의는 일종의 막다른 골목이었다. 군사주의와 민족주의는 유럽문명을 파괴했다. 이제 우리는―분별력 덕분일 뿐 아니라 요행수로―전보다 나은 자유주의적 국제질서를 다시 창조했다. 이는 기회를 세계 전체로 확장한다. 이 천금 같은 기회를 내던져버리지 않는 것은 우리 후손에 대한 우리의 의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