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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신자유주의 비판자들의 역사왜곡과 비과학성 : ‘90% 세율’의 경우

1. 신자유주의는 오늘 ‘공공의 적’이 되었다. 심지어 미국으로 치면 크루그만과 스티글리츠도 신자유주의 비판하고, 한국으로 치면 새누리당 일부를 빼고는 다 비판한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신자유주의가 이렇게 살신성인에 가까울 정도로 모든 욕을 혼자서 먹는 동안, 사람들은 신자유주의 이전의 자본주의에 대한 향수를 술금슬금 키워왔다는 점. 언젠가부터는 스스로 좌파라 칭하는 자들도 신자유주의 이전의 자본주의를 쉽게 ‘황금기’라고 부르는가 하면, 신자유주의 시대에 주로 발달한 ‘금융’에 자본주의의 온갖 악덕을 몰아놓고 반대로 ‘산업’을 찬양하다 못해 신자유주의적 금융에 의해 희생당한, 그래서 우리가 되살려내야 할 무엇으로 묘사하고 있다.

2. 이러한 통념은 역사에 대한 심각한 왜곡 위에 근거해 있다. 그래서 위험하다.

신자유주의 이전의 자본주의는 결코 아름답지 않았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당대를 기록한 자료들을 보는 것이 제격인데, 멀리 갈 것도 없이 마르크스의 {자본론}과 레닌의 {제국주의론}, 룩셈부르크의 {자본축적론}, 바란/스위지의 {독점자본주의론}, 그밖에 제3세계의 종속이론가들의 저작이나 제2차세계대전 이후 제3세계의 민중운동, 산업자본주의 시대의 소외에 대한 여러 논의들… 지금은 마르크스주의의 ‘고전’으로 자리잡은 이런 저작들만 슬쩍 훑어보기만 해도 된다.

이들의 저자들은 저마다 당대의 자본주의야말로 역사상 가장 야만적인 형태이며 지속가능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따라서 자본주의는 곧 종말을 맞을지 모른다는 기대어린 추측을 담고 있다. 물론 그러한 추측이 틀렸음을 우리는 오늘날 몸소 경험하고 있다. 그래서 그들의 시대진단도 틀렸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묘사했던 자본주의를 ‘황금기’라고 부르는 게 정당화되는 게 아니다. 오늘날 관점에서 보아 그들의 분석에 미비한 점들이 있다고 해도, 그들은 각자의 시대에 인류역사상 가장 끔찍한 경험을 하고 있었다. (이쯤 되면, 위 저작들 중에서 당대의 성격을 규정짓는 구절들을 몇몇 인용해주길 기대하실 수도 있을텐데, 그건 독자들께서 직접 찾아보시길 권한다^^)

3. 현재의 부조리를 강조하기 위해 과거를 일정하게 왜곡하는 것, 어느 정도는 허용될만한 일이다. 그러나 그게 지나치면, 특히 그러한 왜곡을 ‘의도적 왜곡’이 아니라 ‘사실’이라고 믿어버리면 곤란하다. 그러한 왜곡 중 하나가 바로 세율과 관련된 거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책소개 기사를 보라.

피지개티에 따르면 1950년대 전후 미국은 ‘중산층 황금기’였다. (. . .) 중산층 황금기는 정부가 부자들에게 높은 세금을 매기면서 시작됐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미국인 중 어느 누구도 세금을 내고 난 후 한 해 2만5000달러 이상의 순 소득을 가져가선 안된다”고 못박는다. 드와이트 아이젠하워가 대통령이었던 시절 세금 최고구간의 소득세율은 90%를 넘었다. (. . .) 그러나 황금기는 끝났고 부자들의 논리는 또다시 힘을 얻었다. (. . .) 이 시점에서 피지개티는 최고 소득세율 90% 정책을 되살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출처)

상위 1%가 퍼뜨리는 ‘신화’들과 이에 대한 스티글리츠 교수의 반박은 다음과 같다. 부자들에 대한 세금을 깎아주면 전체 경제가 좋아질 것이다. 아니다! 레이건 정부 때 소득세 최고세율을 70%에서 28%로 낮춘 뒤부터 불평등만 심화됐다. 현재 35%인 상위계층에 대한 과세율은 70% 정도가 적당하다는 연구결과가 있다. (출처)

위와 같은 주장의 문제는 무엇인가? 일단, 신자유주의가 대대적인 감세정책과 함께 진행됐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어서, 특히 최근엔 MB정권에서의 감세가 두드러졌다. 이른바 ‘부자감세’, ‘재벌감세’가 그것. 그런데 2007/08년에 촉발된 선진국발 경제위기, 그에 뒤이은 ‘점령하라’ 운동 등을 거치면서, 부자와 대기업 및 금융회사 임원들의 부도덕성과 탐욕이 대중의 지탄대상이 되었다. 특히 이 과정에서 1%의 부자들이 충분한 세금을 내지 않는다는 점이 크게 부각되었고, 워렌 버핏이나 조지 소로스 같은 이들이 나서서 동료 억만장자들에게 세금을 많이 내자고 호소하는 기이한 풍경도 연출되었다.

이렇게, 부자들에게 세금을 더 걷어야 한다는 것은 일종의 시대정신과 같이 부상하고 있다. 선진국들 사이에 짙게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재정위기’ 때문에, 증세의 필요성이 더욱 부각되고 있기도 하다. (나 자신도 증세의 필요성에는 공감한다. 그것은 필연적이기까지 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1950~60년대를 위와 같이 미화하는 것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과연 그 당시가 지금보다 훨씬 평등하고 아름다웠던 시절이었는가? 일단, 아래 그림에서 보다시피, 미국의 경우 최고소득세율이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부터 베트남전 직전까지(흔히 ‘황금기’라고 부르는 기간) 90%를 넘었던 것은 사실이다. 지금은? 올해 개정되기 전까지 35%. 다른 선진국들의 경우도 대략 비슷하다. 다음 그림을 보라.

미국 소득세율의 변천

하지만 90% 세율 시절에 부자들이 정말로 자신의 소득 대부분을 세금으로 냈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아주 가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의도’와 ‘능력’의 차원에서만 봐도 말이 안 된다. 즉 세율이 90%인 상황에서는 그 누구라도 탈세의 유혹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고(의도), 과세당국도 현재와 같은 기술적 여건이 미비한 상황에서 그렇게 높은 세율을 실현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을 것이다(능력).

뿐만 아니라, 오늘날 특히 선진 자본주의국들에서 거의 공통적으로 ‘문제’로 인식되는 것들이 바로 그 ‘90% 세율’의 산물—100%는 아니더라도—이라는 점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이를테면, 오늘날 성행하는 복잡한 급여체계가 그렇다. 높은 소득세를 물지 않기 위해 기업들은 과세권이 미치지 않는 기이한 급여항목들을 만들어냈고(예컨대 회사가 임원에게 돈 대신 자동차를 지급하는 것), 이는 오늘날 완벽한 세금징수를 어렵게 하는 요인이 된다. 최근 애플이나 구글 등을 통해 급부상한 조세도피처(tax haven)를 이용한 역외탈세는 또 어떠한가? 물론 조세도피처의 기원은 적어도 19세기로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하지만, 그것이 오늘날과 같은 의미로 본격적으로 발달한 것은 1960년대 이후로 봐야 할 것이다(참조). 좀 더 일반적으로는, 높은 세율은 ‘지하경제’의 발달과 관계가 있음도 지적할만하다.

4. 요컨대, 위에서 소개한 자칭 ‘진보인사’들은 ‘또 다른 세상은 가능하다’의 근거를 과거에서 찾는 것—더구나 그에 대한 면밀한 분석도 없이—이다. 바로 90%의 세율이 존재했던—그것도 매우 오랫동안—미국이 바로 그 증거란 말씀(영국이나 프랑스도 마찬가지).

그런데 그들은, 바로 그 ‘90% 세율의 미국’이, 아무렇지도 않게 노동자를 죽음으로 몰고갔으며, 특히 제3세계에서 폭력적인 수탈을 일삼았다는 것은 언급하지 않는다. 그저 바보같이 입벌리며 ‘으어~~ 자본주의 종주국 미국도 빨갱이였다니!!’라고 외칠 뿐이다. 이런 언급에 깊게 뿌리박혀 있는 공산주의에 대한 혐오는 그렇다 치더라도, 이 정도면 ‘환자’ 아닌가? 매카시즘이 판치던 미국이, 갑자기 빨갱이 나라로 변신하는 순간이다.

또한 그들은, 바로 그 ‘90% 세율의 미국’이, 자국은 물론 세계 곳곳에 ‘조세도피처’를 세워놓고 자국의 기업으로 하여금 자유롭게 탈세를 할 수 있게 해줬음을, 그리고 그러한 기업들은 직원들(특히 관리자급 직원)의 임금을 통해 지불될 세금을 내지 않기 위해서 다양한 회피수단들을 만들어내는 데 매우 열정적이었음을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한 광범위한 조세회피는 단순히 국가의 조세행정을 무력화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자원을 비효율적으로 낭비함으로써 경제에 안좋은 영향을 미쳤다. 50~60년대 미국 비판경제학의 주된 주제 중 하나가 ‘풍요와 낭비’임을 떠올리라. 또한 오죽하면 케네디 대통령이 감세를 주장했겠는가.

끝으로 그들은, 과거에의 향수에 취해 바로 그 ‘90% 세율의 미국’이 오늘날 어떻게 가능한지를 엄격히 따지질 않는다. 위와 같은 온갖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90% 세율의 미국’을 오늘날 건설할 수 있다면야 그것도 해볼만한 일이겠다. 그러나 과연 그게 가능하겠는가? 이를테면 인간사의 30%가 과세대상인 세상과 80%가 과세대상인 세상—물론 이러한 수치들은 삶의 자본주의화의 정도를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에서 ‘90%’의 의미, 좀 더 직접적으로는 용인가능성은 다르지 않겠는가?

5. 신자유주의의 폐해가 좀 더 많은 이들에게 공감을 얻는 것은 좋은 일이다—나는 그들에게 ‘신자유주의가 그렇게 싫다면 왜 당신은 10년 전엔 아무말/일도 하지 않았는가’라고 묻지 않겠다. 그러나 오늘 신자유주의의 지나친 악마화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것의 정밀한 분석을 게을리 하게 만든다. 그들이 신자유주의를 악마화하기 위해 종종 기대곤 하는 역사 왜곡은 바로 그 좋은 증거다.

조금 다른 측면에서 말하면 이렇다. 최근 신자유주의의 위기 내지는 종말을 말하고, 섣부르게 자본주의 자체의 종말, 새로운 대안체제 구상을 내놓곤 한다는 거다. 물론 새로운 세상을 상상하는 것, 그것은 모든 억압받는 자들만의 특권이고, 그것의 실현을 위해 노력하는 것도 그 자체로는 권장할 일이다. 그러면서 역사가 발전하는 것 아니겠는가. 문제는 그러한 움직임이 현실에 대한 올바른 이해에 입각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단적으로 말해, 금융이란, 금융화란 무엇인가, 그리고 그것은 자본주의를 어떻게 변모시켰는가,라는 질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현재의 경우엔, ‘금융’ 자리에 ‘90% 세율’을 넣으면 된다. ‘90% 세율은 당대 자본주의를 어떻게 반영하고 있으며, 또 그것은 자본주의를 어떻게 변모시켰는가?’

무지가 인류에게 도움이 된 적은 결코 없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