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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금의 이해 – 어느 반면교사에 대하여

1.
누군가 말했듯 신문은 가장 좋은 선생님이다. 꼭 긍정적인 의미에서만은 아니다. 즉 신문은 “교사”이기도 하지만 “반면교사”이기도 하다. 오늘 후자에 속하는 매우 좋은(?) 글을 하나 발견했다. 바로 {매일경제}에 실린 “국민에 부담 주는 대기업 법인세 인상”이라는 기고문이다(링크). 글쓴이는 현 모라는, 매우 위엄이 철철 넘치는 분이다(이렇게 말이다: 링크).

여기서 현모는 대기업에 세금을 더 물리겠다는 발상이 대기업과 재벌에 대한 근거없는 반감에서 나온 것이라면서, 그런 식의 대기업 과세는 대기업에 고용된 노동자와 협력 중소기업 등을 포함한 모든 국민에게 피해를 줄 뿐이라고 일갈한다.

대기업 법인세를 인상하면, 재벌총수와 그 가족들에게 세금폭탄을 안길 수 있다고 보는 모양이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법인세에 대해 미신에서 비롯된 것이다.
법인은 생명체가 아니므로, 세금 부담의 주체가 될 수 없다. 결국 사람이 내게 된다. 대기업의 주인은 재벌가족들이 아니고, 주주다. 한국의 대표적 기업인 삼성그룹의 가족지분도 2% 이내이다. 법인세가 인상되면 주주인 재벌가족들에게도 부담이 돌아가겠지만, 일반 주주들도 당연히 부담을 지게 된다. 이뿐만 아니라 법인세의 일부는 종업원, 자본가는 물론 소비자들에게까지 전가된다.
결과적으로 법인세 인상에 따른 부담은 재벌총수와 그 가족들에게 가는 것이 아니라 국민 전체에게 간다.

매우 재미있는 대목이다. 옳은 부분도 있고, 잘못된 부분도 있다. 먼저 우리나라 재벌기업의 실제 주인이 주주라고 한 것은 잘못이다. 물론 법적으로야 그럴 수 있지만, 사실상 그것은 그 설립자 및 그 후손의 사유물로 존재하는 게 현실이다—그렇다고 이것이, 그들이 기업을 자기들 멋대로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닐지라도 말이다.

다른 한편, 위 대목은 세금을 둘러싼 “진실”을 폭로하고 있다는 점에서—그러나 “은연중에” 그러는 것이긴 하지만—높이 살만 하다. 그 “진실”이란 바로, 세금의 형식적 담세자가 누구냐와 관계없이 그것은 결국 일정 기간동안 생산된 부가가치로부터 지불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또한 바로 그 부가가치는 오늘날과 같은 자본주의 경제에선 결국 기업에 의해 생산될 것이므로, 기업이 거둔 잉여가치로부터의 공제분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이에 대해서는 나의 과거 포스팅 “세제개편안 논란에 대하여” 씨리즈를 참조하시길 바란다(링크1, 링크2, 링크3).

2.
암튼 이런 생각에 입각하면, 소득세나 법인세, 나아가 소비세 등은 모두 형태상의 차이만 가질 뿐이다. 이들이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말하는 사람들, 그리하여 예컨대 “법인세는 올려야 하지만 소득세는 절대 못 올린다”라거나 “소득세나 법인세는 올리기 어려우니 소비세를 올리자”라는 등의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보통 개별 경제주체들이 거두는 “수입”이라는 것을 물신화(fetishise)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경제 전체의 순환이라는 차원에서 보면 그러한 수입이란 개별 경제주체들에게 잠시동안 맡겨질뿐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은 일정한 기간동안 자신에게 맡겨진 수입들을 소비함으로써 자본순환의 한 주기(cycle)를 마무리지어야 하기 때문이다(여기에서 저축 따위는 없다고 가정하자).

그런데 기이하게도 현모는 위 글에서 “법인세란 결국은 온국민이 내는 것이다”라고 (어떤 의미에선 매우 올바르게) 갈파하면서도, “법인세 인상은 기업경쟁력을 악화시킨다”라는 구태의연한 논리를 펴고 있다. 후자의 논리가 말이 되려면 법인세를 기업이 내야 하는 것 아닌가? 즉 법인세를 기업이 내는 것도 아닌데, 왜 법인세를 올린다고 기업 경쟁력이 악화될까? 나는 잘 모르겠다.

3.
앞에서 법인세니, 소득세니, 소비세니 하는 것들은 사실은 형태상의 차이만 있을 뿐이며, 본질적으로 한해동안 생산된 부가가치로부터 공제된다는 점에선 똑같다고 했다. 또한 글을 쓴 현모의 말마따나 만약 법인세 인상이 기업경쟁력을 악화시킨다면, 소득세나 소비세도 마찬가지다. 왜냐하면 이들이 오르면 노동자들은 기존의 생활수준을 유지하기 위해선 기업에 대해 임금인상을 요구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기업의 경쟁력”이라는 측면에서 봤을 때 한 나라의 세금 수준이 높은지 낮은지는, 개별 세목—그것이 기업이 직접 부담하는 “법인세”라 할지라도—의 세율로는 알 수 없고, 전체 부가가치, 즉 국민총생산(GDP) 대비 총세수의 비율이 얼마나 되는지를 봐야만 알 수 있는 것이다. 이를 나타내는 개념이 바로 “조세부담률”이다. 그리고 여기에 세금이나 마찬가지인 사회보장기여금을 함께 고려한 것이 “국민부담률”이다. 우리나라 조세부담률과 국민부담률은 OECD에서 거의 꼴찌 수준이다.

우리나라 조세부담률은 ’09년 기준으로 19.7%이고, 국민부담률은 25.5%로서 OECD 회원국 34개국의 평균 조세부담률(24.6%) 및 국민부담률(33.8%)에 비해 낮은 수준(조세부담률 26위, 국민부담률 30위) (출처: e-나라지표)

요컨대 우리나라의 세율은 높다기보다는 매우 낮은 편이며, 따지고보면 임금도 그러하다. 결국 우리나라의 기업들은 “생산성”을 두고 세계시장에서 처절한 경쟁전을 치르고 있다기보다는 낮은 세율과 임금 덕분에 엄청난 이윤을 거저 먹고 있는 셈이다—뭐, 약간 과장해서 말하자면 그렇단 얘기며, 업종에 따라, 그리고 기업규모에 따라 사정이 다르겠다. 여기에 덧붙여 재벌/대기업은 하청 중소/자영업자들을 수탈하기까지 한다.

4.
다시 세금 얘기로 돌아와서… 세금을 위와 같이 이해하면, 법인세니, 소득세니, 소비세니 하는 것들은, 적정한 조세부담률 또는 국민부담률 수준을 달성하는 세수를 거둬들이는 상이한 방식들에 다름 아니다. 여기서 “적정 수준”이란, 일반적으로 일정 시기 해당 국민경제의 발전수준을 나타낼 일정한 국민총생산(GDP) 수준에 조응하여 당시 사회경제적으로 요구되는 국가활동의 크기를 측정한다고 보면 되겠다. 그러한 “적정 수준”에 대비해 현재 세수가 적다고 판단되면 세금을 더 거둬들여야 할 것인데, 어떠한 세목을 올릴 것인가의 문제는 바로 이러한 차원에서 제기되어야 할 사항이다.

물론 이러한 결정에는 해당 시기 사회경제적 제반 역관계가 종합적으로 고려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나는 앞서 링크한 나의 과거 글에서 법인세율 인상의 필요성을 제기했는데, 이는 현모가 넘겨짚듯 단순히 재벌이 미워서가 아니다. 이를테면 소득세를 올려도 이론상 효과는 같다. 그러나 현재 한국사회에서 노동자 세력은 매우 약화돼 있어서, 소득세가 인상되었을 때 기존 생활수준의 유지를 위해 임금인상을 실질적으로 쟁취해낼 수가 없는 정도다. 이런 경우엔 법인세 인상이 더 효과적이며, 이를 통해 기존의 왜곡된 노-자관계도 일정 정도 바로잡는 부수적인 효과도 거둘 수 있다. 등등. (끝)

 

오늘 신자유주의 비판자들의 역사왜곡과 비과학성 : ‘90% 세율’의 경우

1. 신자유주의는 오늘 ‘공공의 적’이 되었다. 심지어 미국으로 치면 크루그만과 스티글리츠도 신자유주의 비판하고, 한국으로 치면 새누리당 일부를 빼고는 다 비판한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신자유주의가 이렇게 살신성인에 가까울 정도로 모든 욕을 혼자서 먹는 동안, 사람들은 신자유주의 이전의 자본주의에 대한 향수를 술금슬금 키워왔다는 점. 언젠가부터는 스스로 좌파라 칭하는 자들도 신자유주의 이전의 자본주의를 쉽게 ‘황금기’라고 부르는가 하면, 신자유주의 시대에 주로 발달한 ‘금융’에 자본주의의 온갖 악덕을 몰아놓고 반대로 ‘산업’을 찬양하다 못해 신자유주의적 금융에 의해 희생당한, 그래서 우리가 되살려내야 할 무엇으로 묘사하고 있다.

2. 이러한 통념은 역사에 대한 심각한 왜곡 위에 근거해 있다. 그래서 위험하다.

신자유주의 이전의 자본주의는 결코 아름답지 않았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당대를 기록한 자료들을 보는 것이 제격인데, 멀리 갈 것도 없이 마르크스의 {자본론}과 레닌의 {제국주의론}, 룩셈부르크의 {자본축적론}, 바란/스위지의 {독점자본주의론}, 그밖에 제3세계의 종속이론가들의 저작이나 제2차세계대전 이후 제3세계의 민중운동, 산업자본주의 시대의 소외에 대한 여러 논의들… 지금은 마르크스주의의 ‘고전’으로 자리잡은 이런 저작들만 슬쩍 훑어보기만 해도 된다.

이들의 저자들은 저마다 당대의 자본주의야말로 역사상 가장 야만적인 형태이며 지속가능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따라서 자본주의는 곧 종말을 맞을지 모른다는 기대어린 추측을 담고 있다. 물론 그러한 추측이 틀렸음을 우리는 오늘날 몸소 경험하고 있다. 그래서 그들의 시대진단도 틀렸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묘사했던 자본주의를 ‘황금기’라고 부르는 게 정당화되는 게 아니다. 오늘날 관점에서 보아 그들의 분석에 미비한 점들이 있다고 해도, 그들은 각자의 시대에 인류역사상 가장 끔찍한 경험을 하고 있었다. (이쯤 되면, 위 저작들 중에서 당대의 성격을 규정짓는 구절들을 몇몇 인용해주길 기대하실 수도 있을텐데, 그건 독자들께서 직접 찾아보시길 권한다^^)

3. 현재의 부조리를 강조하기 위해 과거를 일정하게 왜곡하는 것, 어느 정도는 허용될만한 일이다. 그러나 그게 지나치면, 특히 그러한 왜곡을 ‘의도적 왜곡’이 아니라 ‘사실’이라고 믿어버리면 곤란하다. 그러한 왜곡 중 하나가 바로 세율과 관련된 거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책소개 기사를 보라.

피지개티에 따르면 1950년대 전후 미국은 ‘중산층 황금기’였다. (. . .) 중산층 황금기는 정부가 부자들에게 높은 세금을 매기면서 시작됐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미국인 중 어느 누구도 세금을 내고 난 후 한 해 2만5000달러 이상의 순 소득을 가져가선 안된다”고 못박는다. 드와이트 아이젠하워가 대통령이었던 시절 세금 최고구간의 소득세율은 90%를 넘었다. (. . .) 그러나 황금기는 끝났고 부자들의 논리는 또다시 힘을 얻었다. (. . .) 이 시점에서 피지개티는 최고 소득세율 90% 정책을 되살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출처)

상위 1%가 퍼뜨리는 ‘신화’들과 이에 대한 스티글리츠 교수의 반박은 다음과 같다. 부자들에 대한 세금을 깎아주면 전체 경제가 좋아질 것이다. 아니다! 레이건 정부 때 소득세 최고세율을 70%에서 28%로 낮춘 뒤부터 불평등만 심화됐다. 현재 35%인 상위계층에 대한 과세율은 70% 정도가 적당하다는 연구결과가 있다. (출처)

위와 같은 주장의 문제는 무엇인가? 일단, 신자유주의가 대대적인 감세정책과 함께 진행됐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어서, 특히 최근엔 MB정권에서의 감세가 두드러졌다. 이른바 ‘부자감세’, ‘재벌감세’가 그것. 그런데 2007/08년에 촉발된 선진국발 경제위기, 그에 뒤이은 ‘점령하라’ 운동 등을 거치면서, 부자와 대기업 및 금융회사 임원들의 부도덕성과 탐욕이 대중의 지탄대상이 되었다. 특히 이 과정에서 1%의 부자들이 충분한 세금을 내지 않는다는 점이 크게 부각되었고, 워렌 버핏이나 조지 소로스 같은 이들이 나서서 동료 억만장자들에게 세금을 많이 내자고 호소하는 기이한 풍경도 연출되었다.

이렇게, 부자들에게 세금을 더 걷어야 한다는 것은 일종의 시대정신과 같이 부상하고 있다. 선진국들 사이에 짙게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재정위기’ 때문에, 증세의 필요성이 더욱 부각되고 있기도 하다. (나 자신도 증세의 필요성에는 공감한다. 그것은 필연적이기까지 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1950~60년대를 위와 같이 미화하는 것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과연 그 당시가 지금보다 훨씬 평등하고 아름다웠던 시절이었는가? 일단, 아래 그림에서 보다시피, 미국의 경우 최고소득세율이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부터 베트남전 직전까지(흔히 ‘황금기’라고 부르는 기간) 90%를 넘었던 것은 사실이다. 지금은? 올해 개정되기 전까지 35%. 다른 선진국들의 경우도 대략 비슷하다. 다음 그림을 보라.

미국 소득세율의 변천

하지만 90% 세율 시절에 부자들이 정말로 자신의 소득 대부분을 세금으로 냈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아주 가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의도’와 ‘능력’의 차원에서만 봐도 말이 안 된다. 즉 세율이 90%인 상황에서는 그 누구라도 탈세의 유혹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고(의도), 과세당국도 현재와 같은 기술적 여건이 미비한 상황에서 그렇게 높은 세율을 실현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을 것이다(능력).

뿐만 아니라, 오늘날 특히 선진 자본주의국들에서 거의 공통적으로 ‘문제’로 인식되는 것들이 바로 그 ‘90% 세율’의 산물—100%는 아니더라도—이라는 점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이를테면, 오늘날 성행하는 복잡한 급여체계가 그렇다. 높은 소득세를 물지 않기 위해 기업들은 과세권이 미치지 않는 기이한 급여항목들을 만들어냈고(예컨대 회사가 임원에게 돈 대신 자동차를 지급하는 것), 이는 오늘날 완벽한 세금징수를 어렵게 하는 요인이 된다. 최근 애플이나 구글 등을 통해 급부상한 조세도피처(tax haven)를 이용한 역외탈세는 또 어떠한가? 물론 조세도피처의 기원은 적어도 19세기로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하지만, 그것이 오늘날과 같은 의미로 본격적으로 발달한 것은 1960년대 이후로 봐야 할 것이다(참조). 좀 더 일반적으로는, 높은 세율은 ‘지하경제’의 발달과 관계가 있음도 지적할만하다.

4. 요컨대, 위에서 소개한 자칭 ‘진보인사’들은 ‘또 다른 세상은 가능하다’의 근거를 과거에서 찾는 것—더구나 그에 대한 면밀한 분석도 없이—이다. 바로 90%의 세율이 존재했던—그것도 매우 오랫동안—미국이 바로 그 증거란 말씀(영국이나 프랑스도 마찬가지).

그런데 그들은, 바로 그 ‘90% 세율의 미국’이, 아무렇지도 않게 노동자를 죽음으로 몰고갔으며, 특히 제3세계에서 폭력적인 수탈을 일삼았다는 것은 언급하지 않는다. 그저 바보같이 입벌리며 ‘으어~~ 자본주의 종주국 미국도 빨갱이였다니!!’라고 외칠 뿐이다. 이런 언급에 깊게 뿌리박혀 있는 공산주의에 대한 혐오는 그렇다 치더라도, 이 정도면 ‘환자’ 아닌가? 매카시즘이 판치던 미국이, 갑자기 빨갱이 나라로 변신하는 순간이다.

또한 그들은, 바로 그 ‘90% 세율의 미국’이, 자국은 물론 세계 곳곳에 ‘조세도피처’를 세워놓고 자국의 기업으로 하여금 자유롭게 탈세를 할 수 있게 해줬음을, 그리고 그러한 기업들은 직원들(특히 관리자급 직원)의 임금을 통해 지불될 세금을 내지 않기 위해서 다양한 회피수단들을 만들어내는 데 매우 열정적이었음을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한 광범위한 조세회피는 단순히 국가의 조세행정을 무력화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자원을 비효율적으로 낭비함으로써 경제에 안좋은 영향을 미쳤다. 50~60년대 미국 비판경제학의 주된 주제 중 하나가 ‘풍요와 낭비’임을 떠올리라. 또한 오죽하면 케네디 대통령이 감세를 주장했겠는가.

끝으로 그들은, 과거에의 향수에 취해 바로 그 ‘90% 세율의 미국’이 오늘날 어떻게 가능한지를 엄격히 따지질 않는다. 위와 같은 온갖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90% 세율의 미국’을 오늘날 건설할 수 있다면야 그것도 해볼만한 일이겠다. 그러나 과연 그게 가능하겠는가? 이를테면 인간사의 30%가 과세대상인 세상과 80%가 과세대상인 세상—물론 이러한 수치들은 삶의 자본주의화의 정도를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에서 ‘90%’의 의미, 좀 더 직접적으로는 용인가능성은 다르지 않겠는가?

5. 신자유주의의 폐해가 좀 더 많은 이들에게 공감을 얻는 것은 좋은 일이다—나는 그들에게 ‘신자유주의가 그렇게 싫다면 왜 당신은 10년 전엔 아무말/일도 하지 않았는가’라고 묻지 않겠다. 그러나 오늘 신자유주의의 지나친 악마화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것의 정밀한 분석을 게을리 하게 만든다. 그들이 신자유주의를 악마화하기 위해 종종 기대곤 하는 역사 왜곡은 바로 그 좋은 증거다.

조금 다른 측면에서 말하면 이렇다. 최근 신자유주의의 위기 내지는 종말을 말하고, 섣부르게 자본주의 자체의 종말, 새로운 대안체제 구상을 내놓곤 한다는 거다. 물론 새로운 세상을 상상하는 것, 그것은 모든 억압받는 자들만의 특권이고, 그것의 실현을 위해 노력하는 것도 그 자체로는 권장할 일이다. 그러면서 역사가 발전하는 것 아니겠는가. 문제는 그러한 움직임이 현실에 대한 올바른 이해에 입각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단적으로 말해, 금융이란, 금융화란 무엇인가, 그리고 그것은 자본주의를 어떻게 변모시켰는가,라는 질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현재의 경우엔, ‘금융’ 자리에 ‘90% 세율’을 넣으면 된다. ‘90% 세율은 당대 자본주의를 어떻게 반영하고 있으며, 또 그것은 자본주의를 어떻게 변모시켰는가?’

무지가 인류에게 도움이 된 적은 결코 없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