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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신자유주의 비판자들의 역사왜곡과 비과학성 : ‘90% 세율’의 경우

1. 신자유주의는 오늘 ‘공공의 적’이 되었다. 심지어 미국으로 치면 크루그만과 스티글리츠도 신자유주의 비판하고, 한국으로 치면 새누리당 일부를 빼고는 다 비판한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신자유주의가 이렇게 살신성인에 가까울 정도로 모든 욕을 혼자서 먹는 동안, 사람들은 신자유주의 이전의 자본주의에 대한 향수를 술금슬금 키워왔다는 점. 언젠가부터는 스스로 좌파라 칭하는 자들도 신자유주의 이전의 자본주의를 쉽게 ‘황금기’라고 부르는가 하면, 신자유주의 시대에 주로 발달한 ‘금융’에 자본주의의 온갖 악덕을 몰아놓고 반대로 ‘산업’을 찬양하다 못해 신자유주의적 금융에 의해 희생당한, 그래서 우리가 되살려내야 할 무엇으로 묘사하고 있다.

2. 이러한 통념은 역사에 대한 심각한 왜곡 위에 근거해 있다. 그래서 위험하다.

신자유주의 이전의 자본주의는 결코 아름답지 않았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당대를 기록한 자료들을 보는 것이 제격인데, 멀리 갈 것도 없이 마르크스의 {자본론}과 레닌의 {제국주의론}, 룩셈부르크의 {자본축적론}, 바란/스위지의 {독점자본주의론}, 그밖에 제3세계의 종속이론가들의 저작이나 제2차세계대전 이후 제3세계의 민중운동, 산업자본주의 시대의 소외에 대한 여러 논의들… 지금은 마르크스주의의 ‘고전’으로 자리잡은 이런 저작들만 슬쩍 훑어보기만 해도 된다.

이들의 저자들은 저마다 당대의 자본주의야말로 역사상 가장 야만적인 형태이며 지속가능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따라서 자본주의는 곧 종말을 맞을지 모른다는 기대어린 추측을 담고 있다. 물론 그러한 추측이 틀렸음을 우리는 오늘날 몸소 경험하고 있다. 그래서 그들의 시대진단도 틀렸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묘사했던 자본주의를 ‘황금기’라고 부르는 게 정당화되는 게 아니다. 오늘날 관점에서 보아 그들의 분석에 미비한 점들이 있다고 해도, 그들은 각자의 시대에 인류역사상 가장 끔찍한 경험을 하고 있었다. (이쯤 되면, 위 저작들 중에서 당대의 성격을 규정짓는 구절들을 몇몇 인용해주길 기대하실 수도 있을텐데, 그건 독자들께서 직접 찾아보시길 권한다^^)

3. 현재의 부조리를 강조하기 위해 과거를 일정하게 왜곡하는 것, 어느 정도는 허용될만한 일이다. 그러나 그게 지나치면, 특히 그러한 왜곡을 ‘의도적 왜곡’이 아니라 ‘사실’이라고 믿어버리면 곤란하다. 그러한 왜곡 중 하나가 바로 세율과 관련된 거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책소개 기사를 보라.

피지개티에 따르면 1950년대 전후 미국은 ‘중산층 황금기’였다. (. . .) 중산층 황금기는 정부가 부자들에게 높은 세금을 매기면서 시작됐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미국인 중 어느 누구도 세금을 내고 난 후 한 해 2만5000달러 이상의 순 소득을 가져가선 안된다”고 못박는다. 드와이트 아이젠하워가 대통령이었던 시절 세금 최고구간의 소득세율은 90%를 넘었다. (. . .) 그러나 황금기는 끝났고 부자들의 논리는 또다시 힘을 얻었다. (. . .) 이 시점에서 피지개티는 최고 소득세율 90% 정책을 되살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출처)

상위 1%가 퍼뜨리는 ‘신화’들과 이에 대한 스티글리츠 교수의 반박은 다음과 같다. 부자들에 대한 세금을 깎아주면 전체 경제가 좋아질 것이다. 아니다! 레이건 정부 때 소득세 최고세율을 70%에서 28%로 낮춘 뒤부터 불평등만 심화됐다. 현재 35%인 상위계층에 대한 과세율은 70% 정도가 적당하다는 연구결과가 있다. (출처)

위와 같은 주장의 문제는 무엇인가? 일단, 신자유주의가 대대적인 감세정책과 함께 진행됐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어서, 특히 최근엔 MB정권에서의 감세가 두드러졌다. 이른바 ‘부자감세’, ‘재벌감세’가 그것. 그런데 2007/08년에 촉발된 선진국발 경제위기, 그에 뒤이은 ‘점령하라’ 운동 등을 거치면서, 부자와 대기업 및 금융회사 임원들의 부도덕성과 탐욕이 대중의 지탄대상이 되었다. 특히 이 과정에서 1%의 부자들이 충분한 세금을 내지 않는다는 점이 크게 부각되었고, 워렌 버핏이나 조지 소로스 같은 이들이 나서서 동료 억만장자들에게 세금을 많이 내자고 호소하는 기이한 풍경도 연출되었다.

이렇게, 부자들에게 세금을 더 걷어야 한다는 것은 일종의 시대정신과 같이 부상하고 있다. 선진국들 사이에 짙게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재정위기’ 때문에, 증세의 필요성이 더욱 부각되고 있기도 하다. (나 자신도 증세의 필요성에는 공감한다. 그것은 필연적이기까지 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1950~60년대를 위와 같이 미화하는 것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과연 그 당시가 지금보다 훨씬 평등하고 아름다웠던 시절이었는가? 일단, 아래 그림에서 보다시피, 미국의 경우 최고소득세율이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부터 베트남전 직전까지(흔히 ‘황금기’라고 부르는 기간) 90%를 넘었던 것은 사실이다. 지금은? 올해 개정되기 전까지 35%. 다른 선진국들의 경우도 대략 비슷하다. 다음 그림을 보라.

미국 소득세율의 변천

하지만 90% 세율 시절에 부자들이 정말로 자신의 소득 대부분을 세금으로 냈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아주 가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의도’와 ‘능력’의 차원에서만 봐도 말이 안 된다. 즉 세율이 90%인 상황에서는 그 누구라도 탈세의 유혹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고(의도), 과세당국도 현재와 같은 기술적 여건이 미비한 상황에서 그렇게 높은 세율을 실현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을 것이다(능력).

뿐만 아니라, 오늘날 특히 선진 자본주의국들에서 거의 공통적으로 ‘문제’로 인식되는 것들이 바로 그 ‘90% 세율’의 산물—100%는 아니더라도—이라는 점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이를테면, 오늘날 성행하는 복잡한 급여체계가 그렇다. 높은 소득세를 물지 않기 위해 기업들은 과세권이 미치지 않는 기이한 급여항목들을 만들어냈고(예컨대 회사가 임원에게 돈 대신 자동차를 지급하는 것), 이는 오늘날 완벽한 세금징수를 어렵게 하는 요인이 된다. 최근 애플이나 구글 등을 통해 급부상한 조세도피처(tax haven)를 이용한 역외탈세는 또 어떠한가? 물론 조세도피처의 기원은 적어도 19세기로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하지만, 그것이 오늘날과 같은 의미로 본격적으로 발달한 것은 1960년대 이후로 봐야 할 것이다(참조). 좀 더 일반적으로는, 높은 세율은 ‘지하경제’의 발달과 관계가 있음도 지적할만하다.

4. 요컨대, 위에서 소개한 자칭 ‘진보인사’들은 ‘또 다른 세상은 가능하다’의 근거를 과거에서 찾는 것—더구나 그에 대한 면밀한 분석도 없이—이다. 바로 90%의 세율이 존재했던—그것도 매우 오랫동안—미국이 바로 그 증거란 말씀(영국이나 프랑스도 마찬가지).

그런데 그들은, 바로 그 ‘90% 세율의 미국’이, 아무렇지도 않게 노동자를 죽음으로 몰고갔으며, 특히 제3세계에서 폭력적인 수탈을 일삼았다는 것은 언급하지 않는다. 그저 바보같이 입벌리며 ‘으어~~ 자본주의 종주국 미국도 빨갱이였다니!!’라고 외칠 뿐이다. 이런 언급에 깊게 뿌리박혀 있는 공산주의에 대한 혐오는 그렇다 치더라도, 이 정도면 ‘환자’ 아닌가? 매카시즘이 판치던 미국이, 갑자기 빨갱이 나라로 변신하는 순간이다.

또한 그들은, 바로 그 ‘90% 세율의 미국’이, 자국은 물론 세계 곳곳에 ‘조세도피처’를 세워놓고 자국의 기업으로 하여금 자유롭게 탈세를 할 수 있게 해줬음을, 그리고 그러한 기업들은 직원들(특히 관리자급 직원)의 임금을 통해 지불될 세금을 내지 않기 위해서 다양한 회피수단들을 만들어내는 데 매우 열정적이었음을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한 광범위한 조세회피는 단순히 국가의 조세행정을 무력화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자원을 비효율적으로 낭비함으로써 경제에 안좋은 영향을 미쳤다. 50~60년대 미국 비판경제학의 주된 주제 중 하나가 ‘풍요와 낭비’임을 떠올리라. 또한 오죽하면 케네디 대통령이 감세를 주장했겠는가.

끝으로 그들은, 과거에의 향수에 취해 바로 그 ‘90% 세율의 미국’이 오늘날 어떻게 가능한지를 엄격히 따지질 않는다. 위와 같은 온갖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90% 세율의 미국’을 오늘날 건설할 수 있다면야 그것도 해볼만한 일이겠다. 그러나 과연 그게 가능하겠는가? 이를테면 인간사의 30%가 과세대상인 세상과 80%가 과세대상인 세상—물론 이러한 수치들은 삶의 자본주의화의 정도를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에서 ‘90%’의 의미, 좀 더 직접적으로는 용인가능성은 다르지 않겠는가?

5. 신자유주의의 폐해가 좀 더 많은 이들에게 공감을 얻는 것은 좋은 일이다—나는 그들에게 ‘신자유주의가 그렇게 싫다면 왜 당신은 10년 전엔 아무말/일도 하지 않았는가’라고 묻지 않겠다. 그러나 오늘 신자유주의의 지나친 악마화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것의 정밀한 분석을 게을리 하게 만든다. 그들이 신자유주의를 악마화하기 위해 종종 기대곤 하는 역사 왜곡은 바로 그 좋은 증거다.

조금 다른 측면에서 말하면 이렇다. 최근 신자유주의의 위기 내지는 종말을 말하고, 섣부르게 자본주의 자체의 종말, 새로운 대안체제 구상을 내놓곤 한다는 거다. 물론 새로운 세상을 상상하는 것, 그것은 모든 억압받는 자들만의 특권이고, 그것의 실현을 위해 노력하는 것도 그 자체로는 권장할 일이다. 그러면서 역사가 발전하는 것 아니겠는가. 문제는 그러한 움직임이 현실에 대한 올바른 이해에 입각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단적으로 말해, 금융이란, 금융화란 무엇인가, 그리고 그것은 자본주의를 어떻게 변모시켰는가,라는 질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현재의 경우엔, ‘금융’ 자리에 ‘90% 세율’을 넣으면 된다. ‘90% 세율은 당대 자본주의를 어떻게 반영하고 있으며, 또 그것은 자본주의를 어떻게 변모시켰는가?’

무지가 인류에게 도움이 된 적은 결코 없다. (끝)

‘근혜노믹스’의 밑그림 (5) 우리가 어부지리로(?) 배운 값진 것

12. 지금까지 ‘근혜노믹스’의 특징을 ‘국민 행복’론에 기초를 둔 ‘개체’에의 강조라는 측면에서 생각해봤다. 씨리즈의 마지막인 이번엔, 바로 그러한 특성이 사실은 ‘근혜노믹스’뿐만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사상지도에서는 ‘좌파’라고 흔히 불리는) 범중도파가 가진 ‘노믹스(들)’의 일반적 특징임을 보이겠다. 바로 이 점을 드러냈다는 것이, 박근혜의 당선과 집권이 범중도파를 포함한 (한국적) ‘범좌파’ 진영에 주는 가장 값진 교훈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렇다면 범중도파의 ‘노믹스(들)’이란 무엇인가? 나는 이를, 때로는 ‘사회자본'(social capital)으로, 때로는 ‘사회적 경제’나 ‘협동조합’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그 어떤 것이라고 본다. 이는 이미 이명박 정부시절부터 참여연대 등 시민사회운동 진영과 <한겨레> 등의 언론에 의해 적극적으로 옹호되었고, 신자유주의에 대한 대안으로서 선전되었다. 즉 보수파들에게 ‘자본주의 4.0’과 ‘국민 행복’론이 있었다면 진보파들에겐 사회자본과 협동조합이 있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신자유주의의 폐해를 치유하고 새로운 ‘상생’의 경제질서를 구축한다고 흔히 광고되곤 하는 사회자본과 협동조합도 현재 한국경제와 세계경제가 직면하고 있는 구조적 위기의 심연을 가늠하기엔 턱없이 부족하며, 이런 한계는 좀 더 근본적으로 보면 사회자본론이나 협동조합론 또한 방법론적으로 ‘개체’에 초점을 두고 있는 틀이라는 데서 기인한다.

 

13. ‘사회자본’ 개념이 신자유주의 시기에 그 위상이 추락한 ‘사회적인 것’을 복원하기보다는 주류 경제학이 자신의 방법론(개체주의individualism)을 여타 사회과학, 나아가 현실 사회의 모든 영역으로 확장하는 원대한 기획을 내포한다는 얘기는 이미 나도 이 블로그에서 몇 차례 풀어낸 바 있다(예컨대 링크).

또한 협동조합에 대해서는 최근 당인리대안정책발전소(링크)의 한형식 부소장께서 좋은 논점을 제시해, 그간의 내 ‘심증’을 확증해주기도 했다. 먼저 그는 협동조합을 고정된 그 무엇으로 보는 말하자면 ‘협동조합 물신주의’를 거부하면서 ‘오늘 우리에게 협동조합은 무엇이고, 또 어떤 이유와 목적을 가지고 옹호되는가’라는 핵심적인 질문을 제기한다(링크). 그에 따르면 오늘날 협동조합은 크게 두 가지 두드러진 특징을 갖는다. 첫째로, 그것은 한때 마르크스조차도 (제한적으로) 옹호했던 긍정성을 잃고 “신자유주의적 금융화라는 주어진 조건에 순응”하는 방향으로 발달하고 있다. 이는 “기존 협동조합의 실패 원인이 이윤을 사적으로 전유하지 못하게 하는 협동조합의 방식 때문”이라는 지극히 제한된 반성에 따른 방향설정이다.

현재 옹호되고 있는 협동조합이 위와 같은 성격을 갖는다는 것은 그간 막연하게 협동조합을 긍정적으로 바라보았던 이들에게 충격으로 다가갈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현재 우리의 논의에서는 다음과 같은 두 번째 특징이 더 유의미하게 와닿는다. 즉 협동조합은 “국가와 시장의 실패를 보완하기 위해, 사회적 서비스를 국가와 시장 사이에 있는 시민사회가 제공하는 수단” 구실을 한다는 것이다. 이는 “신자유주의가 전면화한 상황에 대응—‘순응’이라고 읽어야 한다/EM—하는 협동조합의 새로운 형태”로서, 한편으로 그것이 시장의 실패에서 기인하는 한 그것은 시장을 보완할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 그것이 정부(여기에서는 서유럽 복지국가)의 실패에서 기인하는 한 그것은 사회복지를 대체(‘정부의 외주화’/한형식)할 것이다. 물론 애초부터 정부도 시장도 제 기능을 못하는 곳(예컨대 제3세계)에서는 협동조합과 같은 공동체적 형태가 정부와 시장을 동시에 대신할텐데(비근한 예로, 대안화폐가 도시보다는 시골에서 더 성공적이라는 실증적 결과들을 들 수 있다), 이 경우엔 체제가 발달함에 따라 거꾸로 협동조합 등은 약육강식의 시장이나 권위주의적 정부로 대체될 것이다.

요컨대 어떤 경우에도 협동조합은 기존의 체제를 전복하거나 대체하는 새로운 질서를 제공하기는커녕 그것을 둘러싼 ‘구조’에 의해 규정될 뿐만 아니라 기껏해야 그 ‘구조’의 빈틈을 메워주는 ‘보완물’에 지나지 않는다. 이로부터 우리가, 협동조합은 ‘사회’ 내지 ‘구조’에 대한 시각이 결여되어 있다는, 그리하여 그것이 어떻게 ‘공동체’를 강조한다고 해도 방법론적으로는 ‘개체’의 관점에 입각해 있을 뿐이라는 결론에 이른다고 해도 결코 그것이 무리는 아닐 것이다.

 

14. 자, 이제 그럼 협동조합은 어디로 갈 것인가? 그리고 그 이론적 배경이 되는 ‘사회자본’론은, ‘사회적 경제’론은 또 어떻게 될 것인가? 그것을 주도적으로 옹호했던 세력들이 선거에서 패퇴했으므로, 이런 담론들과 시도들도 사라지겠는가?

일단 대통령선거 직후엔 그래 보였던 것도 부분적으로 사실이다. 하지만 이내 전열은 정비되었고, 장수들은 저마다 살 길을 찾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가장 열렬한 옹호자였던 <한겨레>도 대선 직후엔 협동조합 기사를 전국기사로는 거의 내보내지 않다가 새해 들어 협동조합을 ‘멘붕 탈출을 위한 첫 걸음’으로 내세우고 있는 형국이다(링크1링크2). <경향신문>은 아예 ‘신년기획’으로 사회적 경제를 다뤘다(링크). 이 기획은 총 4차례에 걸쳐 다뤄졌는데, 그 중 압권은 기획의 최종편을 장식한 박원순과 정태인의 대담에서 “신뢰·네트워크 같은 사회적 자본 축적되면 거래비용이 준다”라는 정태인의 주장이다(링크). 이는, 내가 앞서 Ben Fine을 인용해 했던 치명적인 비판에 대해 그가 전혀 무지함을 보여주는 명백한 사례다.

그러니까 정태인과 같은 이들은 사회적 경제와 협동조합을 포기할 생각이 없다는 것인데(물론 포기할 필요도 없다), 그렇다면 사회적 경제와 협동조합은 앞으로 어떻게 존재할 것인가? 위 대담에서 정태인은 “박근혜 당선인은 사회적 경제라는 용어를 써본적이 없습니다”라고 함으로써 박 당선인의 인식이 낮음을 조롱한 뒤 현직 서울시장인 박원순에게 한 수 가르침을 베풀어주라고 점잖게 훈수를 두고 있다. 이러한 훈수가 역겹다 못해 안쓰러워 보이는 까닭은, 다름아닌 사회적 경제 및 협동조합이 향후 박근혜 행정부에 의해 적극적으로 채용될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국민 행복’의 수단으로서, 그리고 불충분할 수밖에 없는 ‘복지제도’의 그럴싸한 보완물로서!

(덧붙이자면, 여기서 ‘보완물’의 의미를 보다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보통 서유럽/북유럽과 같이 이미 복지제도가 잘 갖춰져있는 곳에서는 협동조합은 기존의 복지제도가 미처 침투하지 못하는 사각지대를 메워주는 역할을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와 같이 복지가 매우 미미한 곳, 그래서 복지제도가 앞으로 발달해야 하는 곳에서는 협동조합은 오히려 복지제도의 발달을 저지할 수 있고 또한 복지제도 발달의 미미함에 대한 변명꺼리를 제공해줄 수도 있다. 전자와 후자에서 ‘보완물’의 의미가 크게 다름을 주목.)

이 대목에서 내가 정말로 궁금한 것은, 이렇게 사회적 경제와 협동조합이 박근혜 정부와 ‘안락한 동거’를 할 때, 이제껏 마치 그것이 세상을 일거에 바꿔낼 것이라는 듯이 그것을 옹호했던 자들이 어떤 자세를 취할 것인가이다. 당연히 둘 중 하나일 것. 투항하거나 투항하지 않거나.

현재로서는 ‘투항’이라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형태를 띨 것인지조차 분명치는 않지만, 내가 보기엔 어떤 의미에선 투항하지 않는 이들이 장기적으로는 진짜 문제다. 왜냐하면 그들의 ‘비투항’은 박근혜 정부에 대한 적극적인 저항의 진지를 구축하기보다는 기껏해야 박근혜 일당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 ‘그들만의 해방구’를  쌓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지는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야말로 사회자본/사회적 경제/협동조합론과 ‘국민 행복’론이 상통한다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그간 전자를 열성적으로 옹호하고 선전했던 이들의 뼈저린 반성이 필요한 것도 바로 그러한 의미에서다.

(일단, 끝)

‘근혜노믹스’의 밑그림 (4) ‘국민 행복’론의 한계와 모순

8. 출발은 그랬다. 국민이 더 행복해질 수 있는 따뜻한 자본주의. 그러한 기조 아래 복지도 하고, 경제민주화도 하겠다는 거였다. 그러나 시간의 흐름에 따라 ‘방법론적 개체주의’에 기반을 둔 ‘국민 행복’론과 복지체제/경제민주화가 어울리지 않는 조합임이 드러났다. 이는 선거과정 중에 김종인과 시장주의자들의 갈등으로 외화되기도 했지만, 일정한 내부단속을 통해 극복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선거에서 이겼다.

앞서 말한대로, 선거 이후 그들이 한 것은 자신들의 ‘국민 행복’론에 맞는 한도 내에서 복지와 경제민주화를 선별하고 각색하는 일이었다. 즉 박근혜 등은 자신들의 외연을 넓혀 (애초 자신들의 문제틀로는 포착되지 않는) ‘구조’의 문제를 수용하려고 하기보다는, 반대로 그러한 문제를 외면하는 쪽으로 방향을 정한 듯 하다. 어떻게 보면 이것은 실용적이진 못해도 일관되긴 하다. 현재 박근혜 쪽의 경제정책 기조는 그들의 본원적인 ‘이념’에 맞게, 좀 더 탄탄하게 세워지고 있는 셈이다. 이명박 때와는 달리 그들이 구체적인 거시경제적 목표를 정하지 않고 있다고 비판하는 사람도 있는데, 이는 박근혜 쪽의 ‘국민 행복’론의 본질을 이해 못하고 하는 소리다. 예컨대 다음을 보라.

공약의 대상이 국가에서 철저히 개인으로 바뀌었다. … 이종훈 새누리당 의원은 “박 당선인은 경제성장과 물가 안정 등 역대 정부가 초점을 맞췄던 거시(macro) 정책에서 탈피해 국민 개개인의 행복 증진에 중점을 둘 것”이라며 “자본주의의 단점을 보완하는 따뜻한 자본주의, 이른바 ‘자본주의 4.0’이 ‘근혜노믹스(박근혜의 경제학)’의 핵심”이라고 말했다. (출처)

매우 아이러니컬하게도, 이론적으로 보면 이것은 매우 강력한 신자유주의 경제학이다. 주지하다시피 케인스적 패러다임 아래서 경제학은 두 갈래로 존재했다. 개별 경제주체의 행위를 다루는 미시경제학과 그러한 개체 차원으로 환원되지 않는 구조적 차원을 다루는 거시경제학. 간단히 말해 신자유주의 경제학이란 이러한 구분을 거부한다. 그냥 거부하는 게 아니라 기존의 거시경제학을 모조리 미시경제학의 틀 안으로 해소시켜버린다. 이에 따르면, 경제 전체의 모든 정보는 가격에 반영되고 각 개인은 그러한 가격을 보고 합리적 판단을 내리므로, 모든 경제현상은 개별 경제주체의 차원에서 다뤄질 수 있다는 것이다(이른바 ‘효율시장가설'[EMH: efficient market hyphthesis]).

아니, 신자유주의를 극복한다면서 극단적인 신자유주의 경제학이라니?! 누구든 이런 의문을 품을 것이다. 그러나 두 번째 글에서 강조했듯이, 지금 이 대목에서 ‘신자유주의 경제학’이라고 부르는 것은 사실 경제학의 발달사에서 보면 주류경제학의 핵심 기조에 정확히 부합한다. 기이하게도 경제위기가 닥치면 지배블록 내부에서 어떤 투쟁이 벌어지는데, 이는 곧 위기를 통해 자기 자신을 돌아보면서 약간의 ‘개혁’을 꾀하려는 쪽과 위기를 계기로 기존의 노선을 좀 더 강경하게 밀어붙이려는 쪽의 갈등이다. 현재 세계적으로 보면 이 투쟁은 백중세를 보이는 중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후자가 거의 압도하고 있는 셈이라고 보면 될 것 같다.

 

9.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문제를 무시한다고 문제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는 문제를 키우기만 할 것이다. 이명박 정부 하에서 7.4.7 공약이 실패했다고 해서 경제성장에 대한 목표치를 아예 세우지 않는 것은 그다지 바람직한 태도는 아니다. 문제는 ‘7% 성장’이라는 약속을 못 지킨 게 아니라 (7%든 4%든) 성장을 어렵게 만드는 구조적 원인이 현재 자본주의 경제 내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박근혜 당선자 쪽에서는 아예 거시경제(학)을 무시하는 방향으로 가려고 하고 있다. 이것은 지배계급들의 일반적인 생각에 부합하는 것이어서 당연한 반응이기는 하지만 동시에 매우 충격적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왜냐하면 서유럽 등에서는 2007년 이후의 경제위기를 겪으면서 오히려 거시경제학의 중요성을 재발견하는 흐름이 강력하게—지배적이라고 할 수는 없어도—유지되고 있기 때문이다(그 선봉에 서 있는 학자들 중에는 노벨상 수상자인 크루그만도 있다).

이론적인 영역에서뿐만이 아니다. 정책적인 차원에서도 현재 서유럽과 북미의 선진 자본주의국들에서는 경제가 (개별 주체의 행위들의 집합으로 환원될 수 없는) 하나의 거대한 구조라는 사실에 대한 인식 아래 일정한 ‘개혁’이 추진되고 있는 것이다. 그 자체로만 보면 보잘 것 없는 규모인 ‘서브프라임 모기지’ 부문의 문제가 미국경제는 물론 유럽경제까지 뒤흔들 수 있었던 것은 왜였겠는가? 이러한 사태로부터 교훈을 얻은 서유럽과 미국의 정책당국자들은 경제 전체에 걸친 이른바 ‘시스템적 위험'(systemic risk/crisis)에 대처하기 위해 기존의 경제부처들 간의 구획을 초월하는 전담기구를 디자인하는 데 지난 몇 년을 보내고 있다.

중앙은행 개혁 문제는 또 어떤가? 흔히 알려진 것과 달리 하나의 독립된 기관으로서의 중앙은행은 그리 오래된 조직이 아니며, 경제적으로 중요해진 것도 매우 최근의 일이다. 특히 중앙은행은 신자유주의 시대에 들어서면서 위상이 각별해졌는데, 이때 중앙은행이 부여받은 최고의, 그리고 유일한 정책목표는 물가안정이었다. 그러던 중앙은행에, 이번 경제위기 이후 금융체계 전체의 관리라는 역할이 부여되고 있는 중이다(특히 영국이 그러함). 여기에서 나아가 최근 들어서는 중앙은행이 전통적인 물가안정 외에도 경제성장이나 실업문제에도 관여하고 있음은 이미 국내에도 수차례 보도되고 있는 바다(링크). 왜일까? 표면적인 이유는 현재 주요한 것은 인플레이션 위험보다는 디플레이션 위험이기 때문에, 일정한 물가상승을 허용하고서라도 경기를 부양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배경에는, 물가안정이나 경제성장, 고용 등이 사실은 종합적인 경제의 움직임 속에서 결정된다는 (암묵적인) 깨달음이 자리한다.

 

10.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일단 이명박 정부는 위와 같은 세계적인 움직임을 전혀 감지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한때 저축은행 부실화를 중심으로 ‘시스템적 위기’에 대한 불안감이 고조되기도 했지만 지금은 경계가 많이 늦춰져 있다는 느낌이고, 실제로 금융시스템 전반에 걸친 ‘총체적 (위험) 관리’를 전담할 기구조차—그 구체적 방안은 고사하고—마련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오히려 거의 모든 경제전문가들이 올해 한국경제의 ‘뇌관’으로 꼽고 있는 가계부채 문제의 경우, 새로 들어설 박근혜 인수위 쪽에서는 개별 가계의 ‘자력갱생’에 더 무게를 두고 있는 실정이다. 그와 동시에 그들은 부동산에 대한 기대도 아직 버리지 못하고 있다.

가계부채 문제, 그리고 그것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는 금융시스템 전반의 취약성의 문제는 결코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예컨대 고용시장의 불안과도 궤를 함께 한다. ‘하우스 푸어’라는 사람들이 결국은 노동자요 동네 자영업자 아니겠는가? 불안정한 고용상황에 처한 노동자가 단순히 고용불안에만 시달리는 게 아니다. 그들은, ‘만약 내가 회사에서 잘리면 우리집은 빚더미에 올라 앉는다’라는 두려움에도 시달리고 있다. 주택 대출금 원리금 상환, 자녀들의 교육에 월급의 절반 이상이 깨지는 게 누구이겠는가? 정권이 기획하고 언론 매체가 동조해 조작된 주식시장 붐에 희생된 것은 또 누구인가? 그리고 그러한 부모 밑에서 어렵게 대학은 갔으나 취업을 못해 몇년째 청년백수로 살고 있는 것은 또 누구이겠는가? 한진중공업, 쌍용자동차, 현대자동차 등등의 문제가 어찌 조남호나 정몽구만 악마로 만들어 해결될 수 있는 일이던가? 쌍용차 국정조사가 아니라 청와대 국정조사를 해야하지 않겠는가?

지배계급들이 이제껏 위와 같은 문제들은 다룰 때 가장 애용하는 단어가 ‘도덕적 해이'(moral hazard)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니까 ‘니가 그릇된 결정을 한 것이니, 책임도 니가 져야 한다’라는 것. 누가 주제 넘게 비싼 집 사랬냐? 집값 오를 것 예상하고 산 거잖아. 망해도 넌 할 말 없어. 등록금도 제대로 못 내면서 대학은 왜 갔니? 취업 못 한거야 니가 부족해서 그런 거지. 주식대박 좇더니 꼴 좋다…. 어리석은 녀석들! 불행하지? 내가 행복하게 해 줄게. 자, ‘국민 행복’!

그러니까, 박근혜의 ‘국민 행복’은 ‘도덕적 해이’와 논리적 찰떡궁합 관계인 것이다.

 

11. 그러나 이렇게, 박근혜와 그 측근들이 ‘도덕적 해이’와 ‘국민 행복’을 내세우며 사태를 개체적 차원에서 접근하면 할수록, 문제가 그렇게 단순한 게 아니며 시스템적 차원에서 접근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임이 속속 드러날 것이다. 이 대목에서, 미국의 금융규제법인 도드-프랑크(Dodd-Frank) 법안에 반대하던 공화당 의원들이 기존의 입장을 바꾸고 있음을 전한 {파이낸셜 타임스(Financial Times)}의 최근 기사를 떠올릴 수도 있겠다. 이에 따르면 공화당 상원의원 데이비드 비터(David Vitter)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도드-프랑크 논쟁이 벌어지던] 처음엔 나는 공화당원들이 이에 반대하는 것은 그것이 규제인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것은 우리가 필요로하는 제대로 된 시스템 개혁(systemic reform)임을 사람들이 깨닫고 있다.” (출처)

아직까지도 ‘규제완화’ 노래만 부르고 있는 우리나라 보수파들은 언제쯤 위와 같은 깨달음을 얻게 될까? (대체 규제완화 15년에, 더 완화될 규제가 있더란 말이냐…) 그들이 ‘국민 행복’을 부르짖으며 ‘구조’에 대한 문제로부터 눈을 돌리고 있는 동안, 우리가 마침내 대면하지 않을 수 없는 문제의 규모도 걷잡을 수 없게 불어날 것이다. 이것이 바로 ‘국민 행복’론에 기초한 근혜노믹스의 모순이다. 즉 박근혜 식 ‘국민 행복’은 그것이 추구되면 추구될 수록 그것이 외면하려고 하는 ‘구조’의 존재를 더욱 강력하게 드러낼 것이며, 나아가 ‘국민 행복’이 아니라 ‘국민 절망’, ‘국민 파멸’로 이르게 될 것이라는 얘기다.

물론 이렇게 거창한 차원이 아니더라도, ‘국민 행복’을 모토로 한 ‘개체적 접근’은 매우 명확한 한계를 갖는다. 기본적으로 ‘국민 행복’론의 골자는 어려운 국민들에게 구호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누가 어려운가? 지금은 일부 부자들을 빼면 누구나 다 어렵다. 99%까지는 아니어도 줄잡아 80%는 어렵다고 봐야 할 것이다. ‘내가 세상에서 제일 어렵다’라는 외침이 이제 곧 곳곳에서 들려올 것이다. 깡통주택, 깡통전세에 이어, 최근엔 ‘깡통원룸’도 나왔다(링크).

반값등록금만 해도, 박근혜 식의 ‘차등 등록금’제가 실행가능하려면, 그 이전에 이미 대상자들에 대한 가계소득 및 가계자산/부채조사가 완벽하게 이뤄져 있어야 한다. 그러나 과연 박근혜 측은 이러한 조사를 실시할 것인가? 내가 보기엔 ‘못한다’가 정답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들의 이해관계에 반하기 때문이다. (내가 보기에 박근혜 측은 막대한 조사비용을 핑계로 일정한 한도 안에서 조사의 범위를 결정하려 할 것이다.) 이를테면 상위 1%의 부자들은 장학금을 받지 못할텐데, 이들은 장학금을 받지 않기 위해(!) 소득/자산/부채조사에 응해야 한다는 아이러니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다른 한편, 만에 하나 위와 같은 조사가 충분히 이뤄진다면, 그것은 역설적으로 박근혜 측이 알고 싶지 않은 ‘불편한 진실’을, 즉 현재 한국경제의 온갖 ‘구조적 문제들’을 폭로할 것이다. 이를테면 상당수의 가계들이 겪고 있는 다중채무의 실태가 이를 통해 드러날 것인데, 그것은 현재 한국경제의 금융구조의 실상은 물론 예컨대 가계부채와 청년실업 간의 관계를 보여줄 수도 있다.

이렇게 보면, 예전에는 박근혜의 ‘차등 등록금제’에 반대하면서 ‘보편적인 반값등록금’을 주장하는 것이 ‘범좌파’의 입장이었다면, 앞으로는 ‘차등 등록금 제대로 시행하기 위해 모든 가계에 대한 소득/자산/부채조사 철저히 시행하라’가 매우 실효성 있는 구호가 될 수 있으리라 예상된다.

(계속)

‘근혜노믹스’의 밑그림 (3) ‘국민 행복’의 현실적 의의

5. 물론 박근혜 당선자 등이 단순히 자신들의 ‘이론적 입장’ 또는 ‘지적 한계’ 안에 갇혔기 때문에 자기들도 어쩔 수 없이 ‘국민 행복’을 들고 나오는 것은 아니다. 어쩔 수 없음으로만 친다면야, 그러한 한계보다는 현실의 강제가 더 중요한 요소다. 어쨌든 ‘국민 행복’이 처음엔 그러한 한계의 산물이었는지 몰라도 일정한 임계점을 지나면 그것은 계산된 ‘의도’에 의해 조장되고 조정된다. 즉 그것은 이른바 ‘이데올로기화’하는 것이다. 이것은 이전의 위기극복 시도들, 즉 케인스주의나 신자유주의도 겪었던 과정이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국민 행복’의 의미가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살펴보면, 그러한 조장과 조정의 증거를 어렵지 않게 잡아낼 수 있다.

이와 관련, 우리는 국내의 대표적인 보수 일간지를 통해 유포되어 한동안 인기를 끌었던 ‘자본주의 4.0’이라는 담론을 한번 떠올려봐도 좋겠다. 요새는 (특히 미디어계 안에서는) 시간이 너무 빨리 흘러, 이미 ‘자본주의 4.0’에 대해 잊어버린 분들도 많으시리라. 이분들을 위해 잠시 ‘자본주의 4.0’에 대한 기억을 되짚어보자.

‘자본주의 4.0’이란 말 그대로 ‘4세대 자본주의’를 말한다. 19세기에 걸쳐 유럽을 중심으로 발달하고 산업혁명이라는 용어와 이미지로 기억되는 ‘자유방임 자본주의’가 제1세대라면, 케인스주의적 정책 패러다임에 입각해 정부가 적극적인 역할로써 번영을 주도하던 ‘수정 자본주의’가 제2세대다. 그렇다면 제3세대 자본주의, 즉 ‘자본주의 3.0’은 그 이후에 출현했던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될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이는 기존의 케인스주의적 모형이 봉착한 한계를 ‘금융화’와 ‘작은정부’론으로 극복하고자 했지만, 오늘날 우리가 목격하고 있듯 그것은 한때 바로 그러한 자신의 ‘성공’을 낳았던 특징들 때문에 돌이킬 수 없는 위기를 겪고 있는 중이다.

결국 ‘자본주의 4.0’이란 바로 위와 같은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를 극복하자는 취지에서 제안된—박근혜의 ‘국민 행복’과 마찬가지로—것이다. 신자유주의에 그 어떤 장점이 있다손 치더라도 그것이 몇 가지 심각한 결과들, 예를 들어 소득과 부의 양극화, 일자리의 비정규직화/불안정화, 엄청난 규모의 금융시스템적 취약성, 모든 경제주체들(가계, 기업, 정부)에 있어 부채의 급증 등을 낳았다는 데는 정치적 입장을 막론하고 이견의 여지가 없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문제들을 극복하기 위해 제안된 ‘자본주의 4.0’은 마치 어머니의 손길 같이 따뜻한 자본주의여야 할 것이다. 제안된 시기나 표현은 조금씩 다르지만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나 ‘박애자본주의’, ‘사회책임경영’ 등도 비슷한 취지를 담고 있다.

‘어머니의 손길과 같은 따뜻한 자본주의’—바로 박근혜 당선자와 ‘자본주의 4.0’이 연결되는 지점이다. 물론 그는 한 번도 (적어도 알려진 한에서는) ‘어머니’였던 적은 없었으며 그런 이미지는 순전히 자신의 어머니의 모습을 그가 가상적으로 복제함으로써만 그에게 덧씌워질 수 있었다. 하여튼 보수주의자 박근혜 및 그 측근들이 소득 재분배와 복지를 입에 올리고 심지어 상행위의 자유를 일정 정도 제한할 수 있다는 식의 태도를 취하는 것, 다시 말해 신자유주의의 폐해를 인정하고 그것을 제한할 수도 있다는 태도를 보인 것은 언뜻 봐서는 매우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6. 요컨대 ‘어머니의 손길과 같은 따뜻함’을 복지와 경제민주화로 구체화시켜 궁극적으로 ‘국민 행복’을 이뤄내겠다는 것이 후보시절 박근혜 캠프가 내세웠던 바였다.

그러나 한번 잘 생각해보자. 과연 복지(여기서는 전면적인 복지, 즉 ‘복지국가’)나 경제민주화가 ‘국민 행복’이라는 틀로 포괄이 가능한 것인가? 앞에서 언급했던 이론적 틀에 입각해 말하면, ‘국민 행복’이란 철저한 ‘개체주의’에 입각해 있는 반면 복지국가나 경제민주화는 누가 뭐래도 하나의 국민경제의 재생산구조의 문제다. 즉 그것은 ‘사회’에 대한 문제이고 ‘구조’에 대한 문제이다. 곧 보수적인 지배계급들이 볼 수 없는 차원, 또는 애써 건들지 않으려는 차원의 문제란 얘기다. 이렇게 보면, ‘경제민주화론자’로 알려진 김종인이 왜 박근혜 캠프 안에서 다른 시장주의자들과 그토록 반목했는지, 왜 김종인이 ‘박근혜 캠프 안에서 경제민주화를 이해하는 자가 하나도 없다’라고 틈만 나면 성토했는지가 감이 잡힐 것이다. 하지만 그가 겪었던 문제의 시발점은, 경제의 구조 전반을 개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경제민주화론자가 ‘국민행복추진위원회’라는 기이한 모임의 대표 자리를 받아들였다는 데 있다. 누구를 탓하고 누구를 원망하겠는가?

‘국민 행복’은 일반적 의미에서의 복지나 경제민주화와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얘기다. 먼저, 박근혜가 ‘국민 행복’을 내세우는 한 그는 경제민주화를 이룰 수 없다. 후보마다 의견이 조금씩 다르기는 했지만, 지난 대선 과정에서 경제민주화의 핵심으로 공통적으로 강조되었던 두 가지가 바로 대기업 내부의 지배구조 문제와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의 관계 문제였다. 물론 선거에서 주축을 이뤘던 박근혜-문제인 구도에서 벗어나는 후보들, 특히 김소연, 김순자 등은 진정한 경제민주화란 재벌개혁으로 축소될 수 없음을 역설했지만, 적어도 경제민주화를 재벌개혁 수준에서만 파악하더라도 거기엔 ‘구조’에 대한 문제의식이 살아있다고 봐줄만했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요즘, 즉 박근혜 후보가 당선된 뒤에, 정권인수위원회 차원에서 경제민주화라는 단어가 거의 발언되지 않고 있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재벌개혁은 몇몇 만만한 기업총수를 겁주는 선에서 봉합되고 있는 듯하고(지금까지 희생양으로 선택된 것은 한화 김승연과 SK 최태원. 그마저도 김승연은 이제 풀려난 거나 마찬가지다), 대기업-중소기업 간의 구조 문제는 중소기업에 대한 자금지원 원활화의 차원으로 축소되고 있는 듯하다. 어차피 있으나마나한 전경련을 해체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면서 중소기업협회를 방문해 고개를 조아리는 당선자의 제스처. 이 모든 것이 겨냥하는 것은 ‘경제민주화’가 아니라 ‘국민 행복’, 즉 이 맥락에서는 ‘중소기업주의 행복’이 아닌가.

(그렇다고 해서 이 과정이 대기업에게 불행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 대목이 매우 중요한데, 왜냐하면 만약 문재인이 당선되어서 현재 박근혜가 하고 있는 것과 똑같은 일을 벌이고 있었더라면, 그는 분명 재벌로부터 엄청난 저항을 받아야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문재인이 전경련 해체해야 한다고 했었더라면, ‘이것은 재벌에 대한 선전포고다’라는 선언이 벌써 나왔을 것이다. 물론 전경련 해체가 재벌에게 주는 피해는 거의 없다. 어차피 거기 회장, 아무도 안 하려고 한다. 개인적으로 나는 전경련 같은 친목단체에 국가가 나서서 해체해라 마라 하는 것 자체가 웃긴다고 생각한다.)

 

7. 복지는 또 어떤가? 주지하다시피 박근혜 복지의 특징은 선별적이라는 데 있다. 왜 그들은 보편복지 대신 선별복지를 주장하는가?

흔히 선별복지를 주장하는 쪽에서는 비용문제를 거론한다. 즉 보편복지에는 돈이 많이 들고, 아직 우리나라는 그것을 시행할 여력이 없다는 거다. 반대로 보편복지를 주장하는 쪽에서는 (지난번 ‘무상급식’ 논란에서도 나타났듯이) ‘낙인이론’이 거론되곤 한다. 그러나 내가보기엔 둘 다 틀렸다. 낙인은 보편복지를 해도 찍히고, 비용으로 치면 (규모의 경제 등을 무시하고 기회비용을 고려하면) 효과가 같으면 비용도 같다. 예컨대 경제수준에 따른 등록금 차등화와 부자증세를 통한 반값등록금제는 결국 같은 것이 아닌가.

(등록금 차등화의 경우, 오히려 순기능도 있다고 본다. 가장 중요한 것이, 이 제도를 제대로 시행하기 위해서는 가계소득 및 자산/부채조사가 철저히 이뤄져야 한다는 것인데, 만약 그런 조사가 제대로 이뤄지기만 한다면 여러가지 쓸모가 있을 것이다. 금융실명제를 크게 능가하는 것이 될수도 있다. 특히 그런 조사는, 지하경제양성화라는 박근혜 측의 기조와도 맞기 때문에 야당이나 시민사회 쪽에서는 강력하게 ‘철저 조사’를 압박할 수 있을 것이다.)

선별복지와 보편복지의 가장 핵심적인 차이는, 이미 지금까지 논의의 진행을 통해 상당히 명확해졌듯이, 전자는 ‘개인’에 초점을 둔 시스템인 반면 후자는 ‘사회’에 대한 문제제기에 입각한 시스템이라는 데 있다. 후자는 이 사회엔 소득과 부의 양극화, 그리고 각종 사회적 병리현상들이 만연해 있으며 그런 문제들은 사회의 전체 메커니즘에 의해 재생산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이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경제/사회시스템 전반에 걸친 리디자인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입각해 있다. 반대로 ‘선별적 복지’는 위와 같은 병리현상들은 몇몇 개인들이 (부모로부터든, 공동체로부터든) 적절한 보살핌을 받지 못해 겪는 불행이라는 생각 위에 서 있다. 이들 몇몇 불행한 이들(레 미제라블!)과는 달리 다른 모든 이들은 나름대로 행복하게 잘 살고 있으며, 법률이 정하는 범죄를 그들이 저지른 것이 아니라면 그들은 그들의 이웃이 겪는 불행에 책임을 질 필요는 없다. 따라서 국가가 나서서 불행한 이들을 도와야 하며, 흔히 ‘복지’라고 하는 게 바로 그 수단이다. 요컨대 이 사회에 살고 있는 불행한 이들에게 선별적으로 복지를 제공함으로써 그들에게 ‘행복’이 뭔지를 알게 해 주자. 이것이 바로 박근혜식 복지다.

그런데 이런 식의 복지는 사실 그다지 새로울 게 없다. 왜냐하면, 만약 복지가 그런 것이라면 이미 우리나라도 복지국가라고 보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어리석은 국민을 돌봐주는 국가, 그리고 그 국가의 수반, 국민의 아버지! 박정희! 그의 딸, 박근혜! 권위주의!! 복지 얘기가 많아지니까 ‘복지 경험’이라는 용어도 생겼는데, 그런 측면에서 생각해보면: 보편복지 하에서 복지경험은 사회적 연대의식에 기반해 있고 또 그것을 증진시킬 것이지만, 선별복지 하에서 복지 경험은 ‘국가에 대한 고마움’만을 낳을 것이다. 각하 만세! 박근혜의 복지, 박근혜의 ‘국민 행복’은 그래서 경제민주주의하고는, 나아가 민주주의 일반과는, 그래서 우리 중 몇몇이 건설하고자 하는 ‘복지국가’하고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계속)

‘근혜노믹스’의 밑그림 (2) ‘국민 행복’의 이론적 의의

3. 근혜노믹스의 핵심을 ‘국민 행복’으로 정의한다는 것은, 단순히 수사적이거나 향후 상황전개에 대한 정치적 책임을 피할 구실을 마련한다는 의미만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여기엔 매우 뿌리깊은 보수파의 ‘입장’이 깃들어있다고 보는 것이 옳다.

그 입장은 경제학에 고질적인 ‘개체주의'(individualism)와 관계가 깊다. 주지하다시피 스미스에 의해 집대성되었고 리카도에 의해 (부르주아적으로) 완성된 고전정치경제학에서 주인공은 ‘개인’이다. 흔히 이 대목에 이르면,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개인’과 ‘사회’를 대립시켜, 전자를 강조하면 속류/(신)고전파, 후자를 강조하면 과학/마르크스파라고 여기고자 하는 유혹에 빠지곤 하는데, 엄밀히 말하면 꼭 그렇진 않다. 마르크스가 비록 ‘사회’를 강조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그가 ‘개인’을 중심으로 한 논의를 싸잡아 부정한 것은 아니다. 다만 그는 그러한 논의들이 개인을 ‘사회의 산물로서’ 다루지 않고 ‘사회로부터 동떨어진 개인’으로 취급하는 것을 비판했을 뿐이다. 실제로 마르크스 자신 또한 {자본론} 등에 ‘대표적 개인'(representative individual)을 등장시키곤 하는데, 사실 이것은 그가 강조하는 ‘추상화’의 중요한 기법이다(물론 마르크스의 ‘대표적 개인’은 부르주아 사회과학의 ‘대표적 개인’이랑은 크게 다르다. 후자는 일반적으로 이성적 능력만을 갖는 텅빈 개인이지만, 전자는 만약 그것이 텅비어있다면 이는 오직 단계적인 추상과정의 필요에 의해서만 그런 것이며 이후 서술과정을 통해 채워넣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마르크스가 보기에 스미스나 리카도를 포함하는 18-19세기 유럽 선진국들의 사회사상가들, 정치경제학자들은 ‘개인’을 다루면서도 위에서와 같은 구별을 명확히 인식하지 못했다. 이는 나중에 정치경제학이 속류화하는 빌미가 되기도 한다. 즉 마르크스에 따르면 고전파경제학에서는 ‘사회의 산물로서의 개인’이라는 관점과 ‘동떨어진 개인’이라는 관점이 혼재되어 있었던 데 반해 속류경제학에서 개인은 오로지 후자의 측면에서만 고찰된다. 말하자면, 마르크스에게 고전정치경제학은 딱 그 만큼 과학적이었던 것이고, 속류정치경제학은 딱 그런 의미에서 일말의 과학성도 담보하지 못한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이 문제는 이미 이 블로그에서 다룬 적이 있다(링크). 링크된 글에서 말하는 ‘사회’ 관점이 비록 마르크스에 의해 꿋꿋하게 견지되었던 반면 리카도에서 밀(J. S. Mill)을 포함한 경제학의 ‘주류적’ 전통에서는 점점 희미해져 갔다. 그러나 ‘사회’ 관점이 단순한 ‘시점’의 문제가 아니라 현대세계 특유의 물적 현실을 포착하는 것인 한, 속류경제학이 보지 못한다고 해서 그것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주류적 전통 내에서도 ‘사회’ 관점은 어떤 식으로든 ‘재발견’될 수밖에 없었는데, 바로 1930년대부터 본격화한 이른바 ‘케인스주의 경제학’의 출현이 그 결과물이었다. 물론 사태가 이렇게 된 것은 당시의 경제위기 속에서 ‘구조’에 대한 문제의식을 떨쳐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불행히도, 그렇다고 해서 경제학이 그 특유의 속류성을 버린 것은 결코 아니었지만 말이다.

결국 앞서 박근혜를 포함한 보수파의 뿌리깊은 ‘입장’이라고 부른 것은 바로 위와 같은 속류성, 곧 ‘사회’ 내지는 ‘구조’를 이론적으로 무시하는 태도에 다름 아니다. 말할 것도 없이 그러한 태도는 단순히 ‘이론’의 영역에만 머무는 게 아니고, 박근혜의 각종 정책들로 구체화되어 현실적이고 실천적인 차원에서까지 재현된다. 바로 ‘국민 행복’이라는 캐치프레이즈 아래서 말이다.

 

4. 위와 같이 보면, 박근혜가 ‘국민 행복’을 들고 나왔다는 것은 결코 놀랄 일이 아니며, 또 그와 유사한 선례가 없는 것도 아니다. 아마 가장 비근한 예가 이명박의 ‘공정사회’론이고, 비슷한 시기에 영국의 보수정권에서 주창된 ‘빅 소사이어티’가 아닐까 한다(다음 글 참조: 링크). 물론 이러한 입장의 직접적 원류는 오늘날 ‘신자유주의’라고 불리게 된 정책 패러다임을 가지고 기존의 ‘케인스주의’의 위기를 (나름대로) 극복하려고 했던 쌔처(Margaret Thatcher) 등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 신자유주의가 오늘날 위기를 맞았고, 우리는 그 대안으로 박근혜 버전의 ‘국민 행복’을 눈앞에 두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매우 자연스럽게 이런 의문이 제기된다: ‘박근혜 등의 “국민 행복”이 쌔처의 “사회따위는 없다”(There is no such thing as society)와 판박이라면, 그들은 신자유주의를 가지고 신자유주의를 극복하려 한다는 것인가?’ 겉으로 보기엔 모순 그 자체인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매우 단호하게도 ‘그렇다’이다. 무슨 얘기냐면, 오늘날 세계를 지배하는 세력들은 그들이 갇혀 있는 지적 한계 안에서만 자신들의 문제를 인식하고 또 그 해결을 구한다는 점이다.

(계속)

[강의] 신자유주의와 경제학 (2012년 6월)

‘고래정치학교’라는 곳에서 ‘신자유주의와 경제학’이라는 주제로 강의를 하게 되었다. 다음은 강의에 들어가기 전에 쓴 소개글이다(강좌정보).

*                            *                            *

[. . .] 제 소개는 이쯤에서 마치고, 다음으로 우리가 2회에 걸쳐 함께 공부할 내용을 간단히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신자유주의와 경제학’이라. 제목이 좀 애매모호하죠? 신자유주의도 잘 모르고, 경제학도 잘 모르겠는데, 둘을 조합하니 도무지 무슨 이야기가 나올지 감이 안 잡히실 것도 같습니다. 자세한 얘기를 벌써부터 내놓으면 재미가 없으니, 지금은 아주 간단한 개요만 말씀드리겠습니다.

– 먼저 신자유주의. 흔히 신자유주의를 ‘정책’의 차원에서 이해하곤 합니다. 이를테면 자본의 국제적 운동을 자유롭게 허용해주는 것은 신자유주의적 정책입니다. 하지만 이런 정책은, 한때 우리에겐 ‘신성장동력’이라는 이름으로 옹호되기도 했지만, 적어도 2008년 리만브러더스의 파산 이후에, 그리고 최근 그리스와 스페인이 맞고 있는 파국 앞에서 결정적으로 정당성을 잃었습니다. 즉 그것은 ‘종말’을 고한 것이며, 현재 선진국들을 중심으로 하나의 정책 패러다임이었던 신자유주의를 대체할만한 새로운 틀이 한창 고안중에 있음을 우리는 압니다.

그러나 저는, 신자유주의에 정책적인 차원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한 정책은 그보다 근본적인, 즉 ‘물질적인’(material) 차원에서 벌어지는 어떤 변화를 반영한 것이라고 봅니다. 따라서 신자유주의를 설명하거나 비판할 때, 나아가 그 대안을 모색할 때, 신자유주의라는 정책 패러다임이 한편으론 반영했고 또 다른 한편으론 어느 정도 만들기도 했던 바로 그 ‘물적 차원’을 중심에 놓지 않는다면, 그러한 논의는 쓸모없는 것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큰 것입니다.

– 바로 그러한 ‘물적 차원’을 우리는 ‘경제’—좀 더 정확히는 ‘정치경제’(political economy)—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이 ‘물적 차원’ 곧 ‘정치경제’를 이론적으로 다루는 학문이 경제학이고요. 한때 철학자였던 마르크스가 자신의 삶의 황금기를 (정치)경제학 연구에 바친 것도 경제학의 이러한 성격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오늘날의 경제학은 그렇지가 못합니다. 사실은 바로 이것이, 이번 강좌에서 ‘신자유주의’와 ‘경제학’을 함께 다루는 까닭입니다. 즉 경제학이란 현대사회의 물질적 재생산 메커니즘을 밝히는 것을 응당 그 과제로 삼아야 하지만, 오늘날의 경제학은 그런 모습을 보이지 못하고 있으며, 이는 ‘경제의 신자유주의화’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를 우리는 이미 충분히 목격했습니다. 이를테면, 리만브러더스가 몰락하고 얼마 뒤 ‘왜 누구도 파국이 오는 것을 보지 못했느냐’라는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의 당연한 질문 앞에서 수많은 존경받는 경제학자들이 꿀먹은 벙어리가 되었을 때 말입니다. 그러니까 만약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파국의 원인이 위에서 말한 ‘물적 차원’에 깊이 뿌리박고 있는 것이라면, 오늘날의 경제학은 그러한 차원의 운동 메커니즘을 이해하는 데 실패한 셈이며, 이렇게 잘못된 경제학은 ‘신자유주의’라고 불리는 정책 패러다임이 고안되고 나아가 옹호되었던 지적 환경을 제공한 것입니다(이를테면 금융시장에서는 모든 정보가 즉각적으로 가격에 반영되어 비효율이나 갑작스런 가격변동은 발생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효율시장가설’ 같은 것을 떠올려 보세요!). 나아가 이렇게 엇나간 ‘신자유주의 경제학’과 ‘신자유주의 정책’은 현실 그 자체에 되먹임질을 해, 애초 그것이 출현하는 데 기반이 되었던 ‘물적 조건’을 일정 정도로 변형하기에 이릅니다(동아시아에 경제위기가 닥쳤을 때 강요되었던 정책들이 한국경제 자체를 얼마나 크게 변화시켰는지를 떠올려 보세요!). 요컨대, 오늘날의 파국은 이 모든 것들의 종합적인 결과인 셈입니다.

– 이상의 사항들을 염두에 두면, 오늘 우리 모두가 ‘괴물’이라는 데 동의하고 있는 신자유주의를 폐기하거나 극복하는 것, 나아가 그 대안을 내놓는 것은 생각보다 복잡한 일임을 금새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먼저, 신자유주의가 무엇인지에 대해 좀 더 심사숙고해보아야 합니다. 또한 다른 측면에서 보면, 신자유주의의 극복이란 동시에 그것과 짝을 이루는 경제학과의 결별이기도 함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요즘 출판가에서 하나의 ‘트렌드’로 자리잡은 ‘새로운 경제학’에 대한 논의들은 명시적이건 암묵적이건 이런 사정을 반영한다고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아쉽게도, 이상에서 슬쩍슬쩍 건드린 이슈들을 이번 강좌에서 모두 다룰 수는 없을 겁니다. 대신 우리는 주로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중심으로, 그러나 각각을 따로따로 보기보다는 상호연관되는 한에서—그러니까 ‘수박겉핥기’ 식으로(!)—살펴보게 될 것입니다. 첫째, 신자유주의란 무엇인가, 둘째, 경제학이란 무엇인가, 셋째, 오늘날의 경제학은 어떤 모습을 보이고 있는가, 넷째, 오늘날 진행되고 있는 경제에 대한 대안적인 이해들, 또는 대안적인 경제학들은 과연 신자유주의와 충분히 단절을 이루고 있는가 등등. 특히 마지막 사항과 관련해서는, 최근에 인기를 얻고 있는 진화경제학이나 행동경제학, ‘사회자본’론이나 ‘착한경제’론 등이 검토될 것입니다. 자 그럼 다음주에 뵙겠습니다!

끝으로, 글 몇 개. 다음 글들을 미리, 여건이 안 된시면 나중에라도 읽어두시면 도움이 되실 것입니다. 몇몇은 이런저런 매체에 공식적으로 발표된 것이고, 모든 글들은 제 블로그에서 읽으실 수 있습니다(링크되어 있습니다).

기본적인 ‘관점’에 관한 글

경제학에 대한 고민들

각종 대안적 움직임들에 대한 비판적 고찰들

구체적인 사례들

이상입니다!

[201010] ‘경제학 제국주의의 첨병, 사회자본론’

한 대학 매체에 글을 하나 썼다. 원래 청탁받은 제목은 ‘경제학 제국주의의 첨병, 사회자본론’이었는데, 인터넷으로 확인해보니 ‘사회적이지도 경제적이지도 않은 사회자본론’이라는 제목이 더 큰 활자체로 덧붙어 있다. 나쁘지 않다.

원래 저쪽에 보낸 파일엔 각 내용단락 앞에 로마자 대문자로 수자를 붙여두었는데, 인터넷에 올라온 글을 보니 그게 빠져 있다. 어떻게 인쇄되어 나갔는지는 모르겠다. 하여간 인터넷에 있는 것은 조금 산만한 느낌이다. 물론 그건 애초에 내 잘못이기도 하다.

이 글은 <중대신문>에서 기획한, ‘사회적인 것’이 현재 사회과학에서 다뤄지고 있는 현황과 그에 대한 비판에 대한 시리즈물 중 하나다. 여튼 사회학자도 아닌 내게 좋은 기회를 허락해 줘서 고맙다.

(참고로, 글 맨마지막에, 내가 이 블로그를 통해 수차례 소개하기도 했던 IIPPE에 대해 쓰고 싶었지만, 그냥 슬며시 암시를 주는 것에 그쳤다. 소심했나…)

*                         *                         *

I. 최근 영국에서는 보수당 출신의 데이빗 카메론 총리의 주도로 ‘big society’라는 것이―우리로 치면 ‘공정사회’와 같이―커다란 화두로 등장하고 있다. 이는 카메론의 같은 당 대선배 마가렛 대처 전총리의 저 유명한 선언, 즉 “사회 따위는 없다”라는 선언과 재밌는 대비를 이룬다. 후자가 줄잡아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사회’의 ‘과잉’에 대한 반작용이었다고 한다면, 카메론의 최근 기획은 대처의 선언 이후 땅에 떨어졌던 ‘사회’의 권위를 적정 수준에서 바로 세워줄 것으로 기대할 수 있을까?

그런데 우리는 위와 유사한 사태 전개를 지성의 영역에서도 볼 수 있다. 대처의 선언과 궤를 같이 해서 사회의 불가능성을 핵심 테제 중 하나로 삼는 포트스모던적 경향이 지성계를 휩쓸고 지나간 뒤, 오늘날 우리는 다시금 ‘사회’의 과잉을 보고 있는 것이다. 바로 ‘사회자본’이라는 개념을 통해서.

그러나 실제 내용을 들여다보면 카메론의 ‘big society’라는 것이 결국은 개인들의 자조(自助)와 이웃 간의 친목 강화 등을 강조하는, 낡은 대처리즘에 새 옷을 입힌 것에 지나지 않다는 게 드러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회자본’이라는 개념도 그간 특히 여러 사회과학의 분과들이 경제학화(化)하는 과정에서 실추되었던 ‘사회적인 것’의 의의와 권위를 회복시키기보다는 바로 그 경제학화의 새로운 방식으로 채용되고 있을 따름이다. 요컨대, 경제학이 그 특유의 방법론을 가지고 여타 사회과학 분과들의 영역을 침범하고 나아가 이를 자신의 발아래 복속시켜 나가는 현상을 ‘경제학 제국주의'(economics imperialism)라고 부른다면, 특히 최근 20-30년 사이에 그 제국주의의 전위대 노릇을 하고 있는 게 사회자본 개념이라는 얘기다.

II. 최근 사회과학은 그 분야를 막론하고 다양하게 정의되는 사회자본‘들’의 각축장으로 변모하고 있다. 다양한 정의들에서 공통으로 강조되는 것은 바로 ‘인간관계’ 자체다. 즉 “중요한 것은 당신이 무엇을 아느냐가 아니라 누구를 아느냐다.” 더 많은 양질의 인간관계를 맺을수록 당신의 삶은 개선될 것이며, 따라서 이를테면 미국의 백인이 고도비만에 시달리는 것도 수많은 아프리카 흑인이 굶주림에 죽어가는 것도 모두 사회자본이 부족한 때문이다!

바로 이렇게 사회자본 개념의 문제는 그것이 마치 모든 사회적 이슈들의 해결책인 듯이 제시되고 있으면서도 내용상으로는 충분히 ‘사회적’이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자본’도 아니라는 데 있다. 즉 이 개념은 여타 사회과학들의 경제학화를 표상하지만 충분히 ‘경제(학)적’이지도 않고, 다양한 사회과학 분야들에 걸쳐있지만 충분히 ‘사회(학)적’이지도 않다. 뿐만 아니라, 사회자본 개념은 특히 연구자들에게 묘한 안락함을 주곤 한다. 이것이 바로, 사회자본 개념이 지금처럼 많이 쓰이기 전부터 꾸준히 그것을 비판해온 벤 파인(Ben Fine)이 자신의 최근 저작, <사회자본의 이론들>(Theories of Social Capital: Researchers Behaving Badly, 2010)의 부제목을 ‘불량하게 행동하는 연구자들’이라고 지은 까닭이다. 이제 그들은 역사, 계급, 전통, 관습, 사회구조, 그리고 경제적 토대(!)를 참조하지 않고도, 단지 ‘사회자본과 xx’라는 식으로 얼마든지 손쉽게 새로운 연구분야를 개척해나갈 수 있게 되었다. [벤 파인의 이 책은 내년 중에 나의 번역으로 국내에 나올 예정이다. 기대하시라! ;;;]

결국 만약 우리가 ‘사회적인 것’으로써 단순한 ‘인간관계’보다는 역사, 계급, 구조, 경제적 토대 등을 의미한다면, 사회자본 개념이 사회과학들에서 두루 융성하고 있다는 것은 사회과학이 타락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한 징후로 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III. 사회자본은 비록 전통적으로 경제(학)적 의미의 자본이 쓰이기에 적합하지 않은 사항들을 묘사하기 위해 도입되었지만, 여전히 그것은 소비되고 축적될 수 있다는 점에서 ‘자본’이다. 따라서 그것은 태생적으로 사회과학들의 경제학화에 봉사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 가능성이 현실성으로 실현된 것은, 현대적 사회자본 논의의 원조로 꼽히는 부르디외(Pierre Bourdieu)보다는 코울만(James Coleman)이나 퍼트남(Robert Putnam) 등을 거치면서였다. 특히 코울만은 원래 경제학에서 발달된 ‘합리적 선택’ 이론을 사회학에 적용시키는 데 열정적이었던 사회학자, 말하자면 경제학 제국주의의 영역에서 ‘일제의 조선인 앞잡이’에 해당하는 인물인 것이다.

원래 경제학 제국주의란 사회과학의 분과체계가 형성되는 과정(1930년대 초)에서부터 이미 제기되었던 문제였다. 현실의 제국주의와 마찬가지로 여기에도 그 열렬한 옹호자가 있었는가하면 단호한 반대자도 있었다. 그 옹호논리라는 것도, 경제학 제국주의가 ‘계몽적이고 민주적으로’ 이뤄지기만 한다면 이는 억제되기보다는 장려되어야 한다는, 현실의 제국주의의 그것과 꼭 닮아있었다. 그 반대편에는 이를테면 파슨스(Talcott Parsons) 같은 인물이 있는데, 1930년대 경제학에 대해 사회학의 고유의 영역을 확립하려던 그의 노력을 최근 저프 호지슨(Jeoff Hodgson)은 <어쩌다 경제학은 역사를 잊어버렸는가>(How Economics Forgot History: The Problem of Historical Specificity in Social Science, 2001)에서 ‘경제학 제국주의에 맞선 해방투쟁’이라고 묘사하기도 했다.

그러나 경제학 제국주의가 진정으로 융성하기 시작한 것은 1950년대 이후 개리 베커(Gary Becker)를 통해서였다. 기본적으로 그는 사회의 모든 문제들을 개인의 합리적 선택에 관한 것으로, 즉 합리적 개인의 효용극대화라는 문제로 변환시켜 경제학에서 적용된 수리적 방법에 따라 그것에 접근한다는 전략을 취했다. 최근 공전의 히트를 친 <괴짜경제학> 저자들의 “그 어떤 주제도 경제학의 범위 너머에 위치할 필요가 없다”라는 선언도 이런 태도와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괴짜경제학>의 무분별한 유행은 경계심을 가지고 봐야 할 필요가 있다. 특히 이 책이 심지어 진보적인 성향의 사람들 사이에서도 꽤 인기를 모으고 있다는 점은 크게 걱정스럽다. 언젠가 본격적인 비판을 내놓아야 하는데…]

이와 같은 베커의 경제학 제국주의는 우리가 흔히 ‘신자유주의’라고 부르는 것과 더없이 잘 어울린다. 우리도 지난 1997-98년에 겪었듯이, 신자유주의란 세계 모든 나라에 시장만능주의적인 단일 모델에 입각한 경제 및 사회 전반에 걸친 재구조화 프로젝트였음을 떠올려보라.

IV. 그렇다면 경제학 제국주의 또는 신자유주의가 어떻게 사회자본과 연결되는가? 이는 1990년대 중반 이후 이른바 ‘시장의 실패’ 사례가 빈번해짐에 따라 경제학 제국주의가 자체변모를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처한 것과 관계가 깊다. 요컨대, 경제학 제국주의가 지금까지는 경제학의 방법으로 여타 사회과학들을 무지막지하게 식민화해왔다면, 이제 그것은 자신의 한계(‘시장 실패’)를 인정하고 그런 한계가 드러나는 곳, 말하자면 시장이나 가격이 아니라 역사, 전통, 관습, 계급, 경제적 토대 등의 고찰이 필연적으로 요구되는 지점들을 ‘사회자본’이라는 ‘전가의 보도’로 채워버렸다는 것이다.

V. 기실 경제학은 그 자신의 편협한 방법론과 시야로 사회과학 전체에 걸친 하나의 제국을 형성한다는 야심을 가지고 있다. 사회자본 개념은 최근 그런 야심이 드러나는 가장 중요한 통로 중 하나다.

만약 경제학 제국주의와 사회자본이 사회과학 전체를 타락시키고 있다면 이에 대한 저항도 필연적으로 생겨나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 저항이란, 현실의 제국주의에 대한 투쟁이 그렇듯 단순히 민족주의에 그쳐서는 성공할 수 없을 것이다. 즉 그것은 단 하나의 분과학문에만 머물러서는 안 되며, 만약 이 저항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이 ‘사회적인 것’의 복원이라면 더욱 그렇다. 다양한 사회과학 분과들을 아우를 수 있는 지적 기획이 필요한 시점이다. (끝)

“소비”의 문제가 아니다: “이미트 피자” 논란에 부쳐

[정용진] “소비를 이념적으로 하나? 많은 분들이 재래시장 이용하면 그 문제는 쉽게 해결되고 어차피 고객의 선택이다.”

[조국] 헌법의 경제이념: “헌법은 자유경쟁의 이름 아래 시장 약자를 몰락시키는 경제질서를 상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현재의 정권은 위와 같은 헌법의 이념을 실천할 의지가 없다면서, “생각건대 헌법 경제조항의 이념이 구현되려면 국가를 압박하는 주권자 시민의 역할이 필요하다”라고 주장. 덧붙여, “시민은 정 부회장이 비웃는 ‘이념적 소비’를 보란듯이 실천해야 한다”라고 촉구. (전문)

[김규항] 국가의 역할이라는 명목으로 조국은 이명박 정권을 비판하지만, 이런 비판은 정작 오늘 대한민국에 시장 지상주의를 본격화/구조화한 김대중/노무현 정권을 동시에 시야에 넣지 않는다면 기만이다. 또한 조국은 시민의 자발적인 ‘이념적 소비’ 또는 ‘착한 소비’를 촉구하는데, “노동자의 절반을 넘는, 생존 자체가 숙제인 비정규 노동자들이 ‘착한 소비’를 촉구받는 건 공정한 일일까?”라고 반문. “시민에게 촉구해야 할 것은 ‘착한 소비’가 아니라 ‘시장 자유에 대한 경계심’이다.” (전문)

*                                 *                                 *

조국, 김규항, 다 좋은 말 했다. 그래도 간단히 논평을 하자면…

1. 먼저 김규항. 좀 엉뚱하다. 이마트 피자에 대해 어떻게 해야 한단 것인지가 좀 부실하다는 점에서… 논의의 맥락에서 조금 벗어난 것 같지만, 그래도 그 나름의 미덕이 있다. 근데 김규항은 조국교수를 비판하면서 “착한 소비”가 아니라 “시장 자유에 대한 경계심”이 더 중요하다고 하는데, 정작 조국 교수는 그 둘 모두를 강조했다.

2. 조국. 미진하고 그래서 아쉽다. 자신의 전문지식을 이용해 좀 더 강력하게 주장했다면 더 좋았을 뻔했다. 특히 다음 부분.

한나라당은 [. . .] 대중소기업상생촉진법 개정안 처리에 반대하고 있다. 당내에서 기업형 슈퍼마켓 규제시 세계무역기구(WTO) 제소가 우려된다 또는 자유무역협정(FTA) 체결에 지장을 준다 등의 주장이 나온다. 도대체 어떠한 법적 근거에서 그런 주장을 하는지 이해하기 힘들다. 이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다수 국가는 지자체 조례를 통하여 중소상인의 매출영향 평가, 지역주민의 동의를 대형 상가점포 신설의 조건으로 만들고 있지 않은가.

내 단순한 느낌인지 몰라도, 위 대목에서 어조가 매우 약해 보인다. 법학자이므로, 위와 같은 한나라당의 주장엔 전혀 어떠한 법적 근거도 없음을 좀 더 강조해줬다면 더 좋았을 거란 얘기다. 몸 사리는 것 같단 느낌도 받는다. 과민반응일까? 여튼 그밖에는… 조교수의 얘기, 뭐 그냥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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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 자기들 나름대로는 최선의, 좋은 얘기를 했지만, 내가 보기엔, 이번 문제를 단순히 “소비”의 문제로만 바라보는 데는 문제가 많다. (문제, 문제, 문제…!)

나는, 좀 엉뚱해 보일지 모르지만, 왜 우리들의 “동네”에 이다지도 “동네 빵집”, “동네 피자집”, “동네 치킨집”이 많은지에 대해 먼저 의문을 제기해보고 싶다. 거대기업과 동네 구멍가게 사이의 경쟁을 국가가 나서서 조율해줘야 한다고 두 사람 모두가 주장하는데, 이 허울 좋은 주장은 결과적으로 코딱지만한 동네를 무대로 박터지게 경쟁해야 하는 그 수많은 빵집/치킨집/피자집의 현실에 대해서는 수긍하는 논리일 뿐이다. 그런 주장 가지고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고사하고 의미있게 제기할 수도 없다. 지금까지 이런 문제가 제대로 논의된 적이 거의 없는 것 같은데, 그렇게 보면 이번 “이마트 피자”의 등장은, “왜 우리들의 ‘동네’가 다들 그만그만한 빵집/치킨집/피자집의 박터지는 경쟁의 장이 되었는가”라는, 어쩌면 적어도 지난 1997년 이른바 “IMF 체제” 이래 우리 사회를 은밀하게 괴롭히던 문제를, 매우 극적인 방식으로 터뜨린 것이라고 봐도 좋을 것 같다.

그러니까, 위의 두 명망가께서 그러듯, 만약 우리가 이번 “이마트 피자” 사태를 맞아 “국가의 역할”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바로 위 질문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얘기다. 사실은 애초에 국가는, 우리들의 “동네”에 그렇게 많은 빵집/치킨집/피자집 등등이 생기는 것을 방치하지 말았어야 했다. 왜 그런 것들이 좁아터진 동네에 그다지도 많이 들어섰는가? 멀쩡하게 잘 다니던 직장에서 쫓겨나고, 그다지 대단할 것은 없어도 나름 먹고살만한 수입은 안겨줬던 작은 사업체를 청천벽력 같은 “IMF 체제” 아래서 하루아침에 말아먹고, 그들은 다 어떻게 됐는가? 만만한 동네에 피자집을 냈다. 때마침 우후죽순처럼 등장한 “프랜차이즈”도 하나 가입하고. 그러니까 국가는, 이런 이들이 애초에 동네에 피자집을 내지 않아도 되게, 좀 더 그들이 이제껏 살면서 배양해온 그들 나름의 기술을 발휘할 수 있거나, 또는 새로운 기술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었어야 했다. (추가: 물론 그 이전에 국가는, 이들이–때로는 “명예퇴직”이라는 허울좋은 이름으로–허망하게 회사에서 잘리거나 망하게 하지 말았어야 했음은 말할 것도 없고.)

김규항은 김대중/노무현 정권이 신자유주의를 본격화/구조화한 원흉이라고 했는데, 그 정권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커다란 저항에 부딪히지 않은 것은 바로 위와 같은 신자유주의의, “피자맛도 모르는”(띠-디-리.띠리리~♬) 희생자들이 동네에 피자집 내면서 바득바득 살아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들의 문제가, 이번 “이마트 피자” 사태를 통해 극적으로 드러나게 된 것이다.

우리는 이 대목에서 솔직해질 필요가 있다. 동네 피자집들이 과연 “이마트 피자” 때문에 망할까? 내가 보기엔 아니다. 이마트에 당하기도 전에 아마 자기들끼리 치고받다가 망할 가능성이 더 크다. 솔직히 말해, 피자집? 우리 주변에, 한 동네에서 5년, 10년 살아남은 피자집이 얼마나 될까? 피자집 하다가 안 되면 닭튀겨 팔고, 그러다 안 되면 포장마차도 했다가… 뭐 이러는 거 아닐까? 물론 개중에는 좀 오래된 곳도 있다. 그러나 우린 그런 피자집들이 십중팔구 점점 이상해지는 것을 목격했다. 토핑이 부실해지고 배달알바도 점점 싸가지없어진다. 왜 그럴까?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바로 “피자맛도 모르는” 사람들이 프랜차이즈 하나 믿고 겁도없이 들어와 나름 “공격적인 영업”으로 분위기 다 망쳐놓고 망해서–이 경우 프랜차이즈 자체가 망하기도 많이 한다–떨어져나간 다음에, 기존에 그나마 괜찮던 피자집들이 비록 살아남기는 해도 만신창이가 되기 때문이다.

적어도 “우리 동네 피자집이 이마트 피자 때문에 망하게 생겼으니 우리가 나서서 도와야 한다”라는 말이 씨알이 먹히려면, 그 피자집은 이마트 피자가 없던 지난 적어도 10년, 20년 세월동안 우리 동네에서 주민들의 사랑을 받아온 “착한” 피자집이어야 한다. 이런 피자집이 아닌 다음에야… 위 칼럼에서 조국교수가 말하는 “착한 소비”의 대상이 될 수도 없다(나, 안 착한거?). 까놓고 말해, 대체 왜!! 자본주의 경제의 모순과 정부의 잘못된 정책으로 인해 동네에 들어선 별볼일없는 (“별볼일없다”는 게 중요하다) 피자집들을 소비자들이 지켜줘야 한단 말인가? 동네에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어차피 애착도 없는데? 김규항 말마따나… 당장 내가 죽게 생겼는데 말이다….

그렇담… 동네 주민들도 안 지켜주면 이제 동네 피자집은 어쩌란 말인가? 일단 앞에서 말했다. 이들이 당장에 이마트 피자 때문에 망할 일은 없을 거다. 이들에겐, 아직은 먼 이야기인 “이마트 피자”보다는 옆에 새로 연 통닭집이 더 신경이 쓰일 것이다. 착한 소비? 아마 이들은 기대도 안 할 거다. 어차피 사람들이–그래봐야 몇몇–착한 소비 해봐야, 그 착한 사람들이 돌봐줘야 할 “동네 빵집”, “동네 치킨집”, “동네 피자집” 등은 넘쳐나고, 그들이 우리집 피자 안 사먹고 옆집 피자, 뒷집 통닭 사먹으면 말짱 소용없는 거니까.

지금 시점에서 정부의 역할이 각별히 중요한 것도, 사태가 바로 이렇기 때문이다. 정부의 역할은 따라서 두 가지로 갈린다. 첫째로는 당연히 대기업과 동네 구멍가게의 무한경쟁 상황을 어서 종식시켜야 한다. 질서를 좀 잡아줘야 한단 얘기다. 둘째로는 동네에 피자집 등이 난립하고 있는 상황이 사실은 자기들이 여태껏 책임방기한 결과임을 통감하고 어서 그에 대한 대책을 세워야 한다.

끝으로: 피자집, 절대 만만한 게 아니다. 그것이 동네에 여는 것이든, 이마트가 하는 것이든.

신자유주의는 끝났는가? (2/끝)

3. 위에서 (“이데올로기” 또는 “정책 패러다임”으로서의) 신자유주의의 시대구분을 느슨하게나마 해봤다. 편의상 “형성기-전파기/완숙기-내파기(?)” 정도로 이름을 붙여보면 어떨까. 음, 나쁘지 않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현재 시점에서는 우리가 신자유주의의 기원을 저렇게 1970년대 말 내지는 1980년대 초로 잡을 뿐만 아니라 위에서 행한 것과 같은 식의 시대구분을 별 문제없이 받아들이는 데 반해, 정작 그런 움직임을 겪었던 순간순간에는 그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조차 잘 몰랐다는 사실이다. 내가 기억하기에 1990년대 중반에만 해도 신자유주의라는 “말 자체”가 일반 대중에게는 물론 연구자들 사이에서도 그리 많이 쓰이진 않았다. 한편으론 이것이 (일반적으로 봐서 지성이 현실의 흐름을 소화해내는 데는 시간이 걸리기 마련이니) 별로 이상할 것도 없는 일이지만, 다른 한편으론 우리가 현재 신자유주의라고 부르는 것은, 선진국 내부에서 완성되어 그 외부로 전파된 게 아니라 실제로는 지난 약 30년 동안 때론 서서히, 때론 급속히 불균등한 방식으로 형성되어 왔음을 시사하는 것이기도 하다.

좀 더 단적으로 말하면, 그 “형성기”에 몇몇 선진국들 내부의 이해관계와 물적 조건을 반영해서 형성된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 또는 “정책 패러다임”은, 이후 몇몇 조항들로 독트린화되어 세계 각지로 수출되었고, 사실은 바로 그런 과정을 통해 신자유주의는 우리가 현재 신자유주의라고 부르는 것과 같은 “일정하게 고정된 모습”을 갖춰나갔다는 얘기다. 이를테면 IMF나 세계은행은, 1980년대 이후 남미나 러시아, 동/동남아시아의 몇몇 경제들이 위기에 내몰렸을 때 구제금융을 제공해주는 대가로 일정한 조건conditionality을 내걸었는데(우리도 그것이 얼마나 끔찍한 것이었는지를 1997-98년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바로 이 “조건”이야말로 신자유주의를 몇몇 독트린으로 정리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어쨌든 바로 이런 과정을 거쳐 신자유주의는 세계 각지로 전파된 동시에 완숙된 모습을 갖춰나갔다.

4. 이야기를 좀 더 진행하기 전에 “이데올로기”니 “정책”이니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간단히 생각해보자. 전통적인 해석에 따르면 이데올로기란 그저 관념적인 것, 말에 지나지 않는다. 다만 그것은 그 기반이 되는 어떤 “물적 현실/조건”을 가지고 있을 따름이다. 그러나 그것이 특정한 현실전개의 국면에서 (대중에 의해서건 권력을 쥔 집단에 의해서건) 전폭적인 지지를 얻어 힘을 획득하게 되면, 그것은 현실을 단순히 반영하는 것을 넘어 적극적으로 만들어 나가기도 한다(이 점은 일찍이 마르크스도 지적한 바가 있다).

이제껏 (대부분의 관련 논자들을 따라서) 신자유주의를 “이데올로기” 또는 “정책 패러다임”이라고 했다. 만약 그것이 “단순하고 힘 없는” 이데올로기였다면, 어차피 그것은 “말” 또는 정권을 일시적으로 잡은 집단의 “의도”에 지나지 않을 것이므로, 그보다 더 강력한 “말”이나 “의지”에 의해 부정되고 나아가 소멸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렇지 않다. 누구나 인정할 것이듯이, 신자유주의는 지난 약 30년 동안, 처음엔 세계에서 가장 힘있는 두 나라–미국과 영국–에서 매우 강력한 위력을 발휘했으며 그 다음엔 범지구적 차원에서 전보다 더 위력적이고 나아가 노골적으로 폭력적이기까지 한 존재감을 과시했다. 그 과정에서 각 개별 국민경제들은 물론 세계경제 자체의 재생산방식에 결코 작다고 할 수 없는 변화를 낳았다. 이 “변화”의 실제 내용이 무엇인가를 밝히는 것은 별도로 하더라도, 최소한 그런 변화가 일어났음을 인정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하다.

얘기가 이쯤 진행되면, 눈치 빠른 사람이라면, “신자유주의는 끝났는가”라는 질문이 그 자체로는 그다지 중요한 게 아님을 알아챌 수 있으리라. 물론, 이에 앞선 포스트의 제2절 끄트머리에 요약한 식으로 사태가 전개되고 있는 마당에, “이데올로기” 또는 “정책 패러다임”으로서의 신자유주의는 아마도 더 이상 전과 같은 형태로는 존속할 수 없을 것이다. 아니, 바로 그런 까닭으로, 신자유주의는 끝났다고 한대도 크게 문제는 없다. 그러나! 과연 그것을 “신자유주의의 종말”이라고 부르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결국, “신자유주의가 한편으로는 반영했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스스로 만들어낸 현실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야말로 핵심적이란 얘기다. 바로 그런 현실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이고 해석해야 하는가, 또 나아가 거기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5. 이 대목에서, 좀 더 지적인 차원에서는 사태가 어떻게 전개되었는가를 되짚어볼 수도 있다. 영국과 미국에서 각각 쌔처와 레이건이 집권했을 때 그들은 국가의 경제 및 사회에의 개입을 크게 축소시키는 정책을 폈다. 이런 경향은 그와 동시에 진행되고 있던 구공산권의 몰락, 오늘날 우리가 “범지구화”(globalisation)라고 부르는 현상의 전개, 나아가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의 융성 등과 복잡한 되먹임질을 주고받으며, 마침내 “국가의 소멸”이라는 다소 황당한 비전(vision)으로까지 승화되기에 이른다. 물론 이것은 단순히 우파들에나 해당되는 얘기가 아니다. 구공산권의 몰락으로 “마르크스(주의)”니 “(대문자로 된) 역사”니 하는 것들에 환멸을 느낀 무정부주의적/자유주의적 지식인들도 “가상현실”(virtual reality) 따위에 매료되어 <토탈 리콜>(Total Recall)이나 <블레이드 러너>(Blade Runner) 같은 영화나 보면서, 혹은 밤새워 온라인 머드게임(MUD: multi-user dungeon)이나 하면서 “새로운 세상”을 꿈꾸곤 했다.

바로 이런 지적 배경을 두고, 적어도 1990년대 중후반까지 “신자유주의”, 그리고 이 시점에 이르면 거의 그것과 동의어로까지 여겨지게 된 “범지구화”에 대한 논의의 주류를 이뤘던 질문들이 바로, “국가냐 시장이냐”, “국가는 소멸할 것이냐”, “세계정부는 가능한 것인가” 등등이었다. 물론 좌파들은 대체로, “시장보다는 국가”, “국가는 소멸하지 않고 오히려 더 강화되기까지 한다”, “세계정부는 허황된 꿈이다” 등의 입장을 견지했다.

그러니까 무슨 얘기냐면, 우파들이 쳐 놓은 국가의 기능축소 내지는 소멸이라는 이데올로기의 덫에 좌파 지식인들이 완전히 걸려들었다는 얘기다. 그렇다. 그것은 철저히 이데올로기였다. 선진국들의 정부들은 입에 부부젤라를 대고 “국가의 경제/사회 개입 최소화”를 부르대면서도, 막상 자기들이 필요할 때는 경제 및 사회 전반에 마음껏 개입했다. 미국의 경우, 각종의 금융적 위기들(저축대부조합 파산, 주식시장 붕괴 등)로 점철된 1980년대는, 그들이 정책적으로 내걸었던 것과는 달리 대규모의 정부개입을 요구했다. 이건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었지만, 현실을 움직이는 힘은 우파들이 가지고 있었으므로 그들이 숨기고자 하면 (어느 정도는) 숨길 수 있었다. 그리고 좌파들은, 이런 당연한 사실들을 밝혀내는 데 불필요하게 힘을 탕진했고(하지만 이들의 그런 노력들이 헛된 것이었단 얘긴 결코 아니다. 그들의 끈질긴 노력이 있었기에 현재 우리가 신자유주의를 좀 더 제대로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1997-98년, 세계경제의 다크호스로 부상중이던 동/동남아시아에 금융통화위기가 터졌을 때도 그랬다. 좌파들은 매우 정당하게도 그것이 신자유주의와 범지구화 아래서 육성된 이른바 “선진국”들의 금융적 자본이 일으킨 불장난이었음을, 나아가 그런 금융적 자본을 핵심적인 행위자로 가진 현대 자본주의의 모순의 필연적 폭발임을 끊임없이 지적했지만, 오히려 우파들은 그 위기들의 원인을 해당지역 경제들이 충분히 신자유주의적이지 않았다는 데서 찾았다.

6. 자, 이제 현재로 돌아와보자. 신자유주의가 끝났다고 한다. 왜인가? 2008년부터 본격화한 이번 공황에서 특히 (그간 신자유주의의 전도사이자 선봉이었던) 선진국 국가들이 자국 경제의 붕괴를 막기 위해 경제 및 사회 전반의 재생산에 엄청난 규모의 “개입”을 하고 있는 것이 눈에 빤히 보이기 때문이다. 더불어 그 대안으로서, 신자유주의와 “상극”으로 여겨지는 케인스주의적 방식 등이 (꽤 힘있게) 제안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 앞절의 역사적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저 선진국들은 입으로는 “국가의 경제 개입 최소화”를 외치면서도 실제로는 필요할 때면 언제나 그런 원칙을 무시하는 방식으로 행동해왔다. 이번 토론토에서 열린 G20회의에서도 극적으로 드러났듯이(참조), 저들은 이번에도 그런 식으로 눙치고 지나가려는 의도를 아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몇몇 낙관적인 지식인들이 케인스주의로의 회귀를 거의 기정사실로 여기고 있는 것과는 반대로, “케인스주의냐 통화주의(여기선 ‘신자유주의’라고 읽어도 된다)냐”라는 매우 낡은 논쟁은 여전히 치열하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파이낸셜 타임스>의 기획을 보라: “Austerity vs Stumulus“. 아마도 케인스주의자들을 포함한 신자유주의 종말론자들은, 대체 뭣때문에 이런 것을 “논쟁”씩이나 하고 있냐며 분통을 터뜨릴 것이다.

7. 글을 정리해보자. 결국 나는 두 가지 주장을 한 셈이다.

(1) “이데올로기” 내지는 “정책 패러다임”으로서의 신자유주의는, 한편으로는 그 논리적 및 현실적 한계에 다다른 것 같지만, 다른 한편으론 특히 지난 30년 동안의 역사적 경험으로 봤을 땐, 과거의 낡은 문제틀을 다시금 불러와 그 안에다가 현재 폭로되고 있는 “한계”의 파괴력을 해소시킬 것이다. 물론 그럼으로써 신자유주의는 계속해서 존속할 가능성도 크다.

(2) 설령 “이데올로기” 내지는 “정책 패러다임”으로서의 신자유주의가 종말을 고했다고 하더라도, 그래서 이를테면 “케인스주의”가 다시금 권력을 잡더라도, “신자유주의”라는 이름 아래 야기된 자본주의 경제 및 사회의 재생산 방식의 심대한 변화는 고스란히 남아있다. 따라서 그런 변화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나아가 바로 이런 측면에서 보면, 이번 범지구적 위기는, 우리의 주의를 “국가냐 시장이냐”, “국가는 소멸할 것이냐” 등과 같은 별 시답잖은 문제들로부터 진짜 중요한 문제 즉 “현대 자본주의의 고유한 재생산 매커니즘은 무엇인가”라는 문제로 우리가 주의를 기울일 수 있는 기회를 열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평가될 수 있다. 쉽게 말하면, 이제 좌파들은, “국가는 여전히 중요하다구!”라고 힘들여 볼멘소리를 할 필요가 없어졌단 얘기다. 대신 그들은 이제 “현대 자본주의”에 대해 좀 그럴싸한 이론을 내놓아야 한다. 제발 좀, “그럴싸한” 것으로 말이다!

다시 물어보자. 신자유주의란 뭘까? “이데올로기”일까, “정책 (패러다임)”일까, 아니면 그런 것들로 표현되곤 하는 “자본주의의 어떤 심층적인 운동/변화”일까? 난 아무래도 좋다. 어차피 이 질문은 대답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대답될 수 없는 질문에 자의적인 대답을 내놓고 제시되는 “신자유주의 종말”론에 휘둘릴 필요는 없다. 설령 그 주장대로 (“이데올로기” 또는 “정책”으로서의) 신자유주의가 종말했다손 쳐도, 그것이 관계했던 현실은 남는다.

[끝]

신자유주의는 끝났는가? (1)

1. 어림잡아 지난 2008년 이래, 그러니까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는 범지구적 위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이래 “신자유주의”(neoliberalism)의 종말에 대한 이야기들이 많이 나오고 있다. (실은 나 자신도 예전에 진보 불로그 시절에 그런 포스트를 올린 적이 있다.) 과연 신자유주의는 끝났는가? 비슷한 맥락에서, 이른바 “제3의 길”(the third way)은 끝났는가, “글로벌라이제이션”(globalisation)은 끝났는가 등등의 물음을 제기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문제들에 답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어려워서라기보다는, 그것들에 “제대로”, “의미있게” 답하기 위해서는, 이런 단순한 질문들이 대개 그렇듯, 그에 앞서 그보다 좀 더 근본적인 다른 질문들을 다루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위 질문들은, “신자유주의란 무엇인가”라는 좀 더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일정한 답변을 전제한다. 그러나 내가 아래서 밝힐 것이듯이, 이 후자의 질문에 진지하게 접근하다 보면, 결국 “신자유주의”라는 것 자체가 매우 의심스러운 것으로 판명날 것이고, 따라서 그것의 종말을 “논한다는 것” 자체–그러니까 그것이 “종말했느냐 여부”가 아니라–가 잘못된 문제설정일 수도 있음이 드러날 것이다.

2. 신자유주의란 무엇인가? 그것은 “이데올로기”인가, 아니면 각국 정부들이 추구하는 일종의 “정책 패러다임”인가, 또는 그보다는 좀 더 근본적인 수준에서의 자본주의 발달을 표현하는 하나의 “시기”인가? 많은 이들이 신자유주의의 종말에 대해 말하고 있지만, 그들은 대개 (이런 질문들을 심각하게 다루지 않고) 신자유주의를 자의적으로 규정한 채 논의를 진행시키곤 한다.

최근 신자유주의의 종말을 말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신자유주의를 “이데올로기”나 “정책 패러다임” 정도로 여기고 있는 것 같다(앞서 지적했듯, 이 둘이 크게 다른 것은 아니다). 좋다. 기본적으로 나는, 그 자체로는 별 문제가 아니라 생각한다. 그러니 나도 그런 측면에서 시작해볼 수 있겠다. 신자유주의를 “이데올로기” 또는 “정책 패러다임”으로 본다고 할 때, 그렇다면 그 내용은 무엇인가? 뭐 크게 어렵진 않다. “이데올로기”로서의 신자유주의란 곧 “시장 만능주의”라고 요약할 수 있겠고, “정책”이란 그런 이데올로기의 구체화로서, 기본적으로는 경제정책이지만, 필연적으로 제반 사회정책들을 두루 포괄할 것이다. 이를테면 국가의 경제개입 최소화, 자본시장 자유화, 국영기업 및 공기업 민영화, 금융산업 육성 등은 물론 복지 축소, 이민자에 대한 배척 등도 거기에 포함되겠다. 이들 중 몇몇은 우리도 1997년 이른바 “IMF 체제” 이후 매우 생생하게 경험해왔던 것이다.

신자유주의를 어떻게 정의하더라도, 그 시작을 1970년대 말이나 1980년대 초로 잡는다는 데서는 논자들 사이에 별다른 이견이 없다. 특히 신자유주의를 이렇게 특정한 이데올로기나 정책이라고 정의할 때, 우리는 커다란 어려움 없이, 그러니까 직관적인 수준에서도, 그것의 “시기구분”(periodisation)을 개략적으로 할 수도 있다.

(1) 신자유주의가 처음으로 시작된 곳이 미국이나 영국 등이라는 데는 별 이견이 없다. 특히 신자유주의를 범지구적으로 확산시키는 데 열을 올렸던 미국을 가지고 말한다면, 대체로 레이건에서 아버지 부시로 이어지는 기간을 “신자유주의 1기”라고 할 수 있겠다. 흔히 “레이거노믹스”(Reaganomics) 내지는 “쌔처리즘”(Thatcherism)이라 불리는 경제 및 사회 전반에 걸친 “신보수주의적 (반anti)개혁”의 기조가 주도권을 행사하던 시기다. 영국을 비롯한 이른바 “제1세계”에서, 그 이전 시기에 있었던 사회의 다양한 자원들의 사회화/국유화 행진은 완전히 뒤집혔고, 대신 거대한 민영화의 흐름이 뒤따랐다. 오랜 노력 끝에 “공공재”로서의 성격을 확립한 교육이나 의료 등도 다시 다른 상품들과 다름없게 취급되기 시작했다. 경제나 사회 전반에 걸친 정부의 광범위한 역할도 축소되었다. 첨언하자면, 이런 움직임이 가능했던 것은, 한편으로는 줄잡아 1930년대의 대공황 이후 그런대로 잘 작동해오던 이른바 “케인스주의적 모델”(Keynesian model)이 1970년대 들어 심각한 위기를 맞아 한계를 보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이건 누구나 다 하는 얘기), 다른 한편으로는, 역설적이게도, 바로 그렇게 긴 기간동안 (케인스주의에 의해서건 다른 무엇에 의해서건) 별 탈 없이 경제가 운영되었다는 데서 오는 일종의 “자신감”–즉 국가가 개입하지 않아도 다시 “대공황” 같은 일이 벌어지지는 않을 것이라는–의 표현이기도 하다(이건 잘 안 하는 얘기).

(2) 다시 미국을 대상으로 했을 때, 부시에서 클린턴으로 정권이 넘어가면서 “신자유주의 2기”는 시작된다(영국의 경우엔 1997년 “New Labour”가 승리한 것을 전환계기로 삼을 수 있겠다). 어차피 신자유주의를 “이데올로기” 내지는 “정책 패러다임”으로 보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정권을 잡은 주체가 어디냐를 기준으로 삼는 것은 그 자체로는 문제가 없다. 어쨌든 이 기간에 신자유주의는 (미국/영국 내에서 그것이 어떻게 진행되었느냐와는 별도로) 전세계로 적극적으로 수출된다. 물론 그것이 이때 “시작”된 것은 아니다. 하여간 김영삼 정권이 (1993년부터) 적극적으로 홍보했던 “세계화”라는 것도 한편으론 이런 범지구적 운동의 산물이기도 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신자유주의의 범지구적 확산에서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것은 바로 남미, 동아시아 등지에서 벌어졌던 1990년대 중반의 이른바 “금융통화위기”다. 위기의 원인이 이들 지역의 신자유주의적이지 않은 경제구조에 돌려졌고, 그 결과 경제의 신자유주의적 재편만이 그와 같은 위기를 다시 겪지 않는 길이라는 “정책 처방”이 (특히 IMF나 세계은행 등으로부터) 내려졌기 때문이다.

(사족을 하나만 더 붙여보자. 우리나라에서 1990년대 초중반 진행되었던 (김영삼의) “세계화”나 (김우중의) “세계경영” 등을 반드시 “신자유주의”하고만 연결시킬 필요는 없다. 오히려 거기엔, 냉전의 종식 및 구공산권(러시아, 동유럽)의 개혁/개방이라는 조금은 다른 사정도 개입된다. 그런 면에서, 이를테면 “세계경영”은 “신자유주의”보다는 “골드러시”에 가까운 성격이 있다.)

(3) 그리고 지금, 우리는 어쩌면 “신자유주의 3기”일지도 모르고 어쩌면 “다른 무엇의 1기”일지도 모를 시기를 살고 있다.

직접적으로는 2008년 본격적인 위기발발 이후, 그간 선진국들이 옹호했던 신자유주의적 “이데올로기” 및 “정책 패러다임”은 바로 그 선진국들에 의해 부정당하고 있다. 국가는 경제에 개입하면 안 된다는 바로 그 원칙을, 선진 각국의 정부들은 자신들의 실패한 금융시스템을 살리기 위해 저버리고 있다. 그 개입의 정도는 정말로 아찔할 정도다. 다른 한편 그러는 과정에서, 어쩌면 필연적으로 케인스(J.M. Keynes)가 불려들여지고 있고, 갑자기 칼레츠키(M. Kalecki)나 민스키(H. Minsky) 등이 우리나라에 번역되고 있으며, 폴라니(K. Polanyi)가 (심지어 경제학자들 사이에서도) 추앙의 대상으로 떠오르고 있다. 결국 최근 “신자유주의의 종말”이 운위되는 것도 바로 이런 모순적인 상황전개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뭔가 “천지개벽”과 같은 현상이 진행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기에 충분할 정도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