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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 번외편: 귀중한 역사유물론

이 글을 읽고 꽤 오랫 동안 책을 뒤적이면서 고민을 했다. 내 생각을 요약하면 이렇다. 마르크스의 변증법은 전제가 아니라 결과다. 강신준 교수에게서처럼 변증법이 전제로 사용될 때 변증법은 정당화의 도구로 전락하고 만다. 이런 내용으로 글을 쓰는 도중 문득 본회퍼의 ‘귀중한 은혜‘ (그의 ‘나를 따르라’에 수록되어 있다)라는 글이 떠올랐다. 곧장 패러디를 해야겠다는 예술적 갈망이 솟아났고 몇몇 주요한 단어들을 마르크스, 역사유물론 등등으로 바꾸는 것으로 충분했다.


귀중한 역사유물론

역사유물론을 값싸게 보는 우리의 견해는 마르크스주의의 대 원수임을 알아야 한다. 오늘 우리의 싸움은 역사유물론을 얻으려는 싸움이다. 값싼 역사유물론은 싸구려로 팔아버리는 상품과 같은 것으로, 억지로 내맡기는 자본주의의 극복이요 혁명이다. 무진장한 식료품 창고에서 물품을 내오듯이 생각 없이 마르크스주의에서 털어 내는 역사유물론을 뜻한다. 값도 댓가도 없는 역사유물론이다. 이것을 역사유물론의 본질이라 한다. 역사유물론은 이미 마르크스가 발견했기 때문에 언제나 공짜라는 것이다. 역사유물론을 이미 발견한 마르크스를 생각해서라도 무엇이나 거저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마르크스의 통찰이 엄청난 때문에 소비와 낭비도 엄청난 것이다. 꼭 인간의 실천을 필요로 한다면 그것이 과연 역사유물론인가? 싸구려 역사유물론이라 함은 교훈과 원리와 체계 같은 역사유물론을 말한다. 자본주의의 긍극적인 종말은 보편적 진리라 했다. 역사유물론은 인간사회의 근본적인 발전 원리이고 이념이라 했다. 이것이 사실임을 시인하는 자는 이미 자본주의를 극복한 것이나 다름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역사유물론을 소유하고 있는 마르크스주의자는 그 이론이 흡족해할만한 옳은 마르크스주의자라 하였다. 세상은 자본주의를 극복하기를, 자본주의에서 해방되기를 애걸할 필요도 없다. 이런 종류의 역사유물론을 신봉하는 마르크스주의자로부터 자본주의의 폐해를 덮어 감출 뚜껑을 얼마든지 싸게 얻을 수 있는 때문이다. 그러므로 싸구려 역사유물론은 마르크스의 이론의 부정이며 인간이 자신의 역사를 만들어 간다는 마르크스의 역사관의 부정이다.

싸구려 역사유물론은 자본주의의 극복에 대한 것이요, 자본주의사회에서 생활하는 자본주의적 인간의 극복에 대한 것은 아니라 하였다. 역사유물론은 홀로 무엇이나 원만히 처리하기 때문에 다른 것은 모두 옛 자리에 그대로 머물러 있어도 좋다는 것이다. “여하간 우리의 행함이란 헛된 것이라” 하였다. 우리는 어쨌든 견고하게 구조화된 사회 속에서 살아가고 있으니 최선을 다해도 결국 자본주의를 벗어날 수 없는 것 아닌가. 그러므로 마르크스주의자도 자본주의사회의 구조 속에서 다른 사람들과 다름 없이 살라. 모든 일을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처리하고 역사유물론이 자연법칙으로 관철되도록 하기 위하여 자본주의적 생활 이상을 바라지 말라. 역사유물론을 저버리지 않도록, 거저 주어진 큰 역사유물론에 불만을 갖지 않도록, 부질없이 자본론 같은 것을 성실히 연구하거나 자본주의와 맞서 싸우는 활동에 몰두하여 주의주의와 인간주의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하라. 자본주의는 이미 역사유물론에 의하여 그 정당성을 인정받았다. 그러므로 – 이 역사유물론의 참됨을 위하여, 비할 데 없는 이 역사유물론을 배반하지 않기 위하여 – 마르크스주의자들이여, 세상과 다름없이 살라. 비범한 일을 하고 싶은 것이 일반 인정이지만 비범한 생활이 아니라, 오히려 자본주의적 세상과 합하여 드러나지 않게 사는 것이 마르크스주의자에게 가장 어려운 일이다. 그러므로 단념과 극기에 힘써 자신의 생활이 자본주의적 세상과 차별 없도록 하라는 것이다. 역사유물론을 역사유물론답게 지속하여 거저 받은 역사유물론에 대한 이론적 이해를 자본주의 세상에서 해소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이것이 마르크스주의자 자신의 세속성에 가해야 할 필요한 제재라는 것이니 이것은 세상, 아니, 역사유물론을 위한 것이며, 우리 의식 저편에서 도도히 흐르고 있는 역사유물론을 우리가 소유하게 된 것이며 생활의 위로며 안전이라 했다. 잘라 말해서 따라갈 필요 없이 앉은 자리에서 자본주의를 극복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과는 무관한) 역사의 자기실현을 뜻하는 싸구려 역사유물론일 수는 있어도 자본주의적 폐해와 악습을 극복하고 새로운 인간상을 만들어가는 것과는 무관하다. 자본주의의 극복이 문제의 전부는 아니다. 싸구려 역사유물론은 우리 자신에 근원을 가진 우리 자신의 문제임을 잊으면 안 된다. 싸구려 역사유물론은 자본주의의 타도 없이 자본주의의 극복이 가능하다는 설교이며, 마르크스주의 전통을 무시한 이론적 이해요, 자본주의의 폐해에 대한 뼈아픈 통찰 없는 정신 승리, 자각과 반성 없는 진보의 확인이다. 투쟁 없는 역사유물론, 고통 없는 역사 유물론, 자본주의 타도에 앞장성 이들을 애써 무시하는 역사유물론이 싸구려 역사유물론이라 하겠다.

그러나 귀한 역사유물론은 밭에 숨은 보물과 같다. 이 보물을 사려는 사람은 집에 돌아가 가진 전 재산을 기쁨으로 팔아 댓가로 지불한다. 장사군이 전 재산을 내어줄 수 있는 귀한 진주, 이것이 귀한 역사유물론이다. 인간의 비위를 거스르거나 놀라게 하는 역사의 진보의 흐름이 바로 역사유물론이요, 안락한 생활을 포기하고 즉석에서 따라가게 하는 역사의 부름이 그것이다.

귀한 역사유물론은 계속해서 짓궂게 찾아야 할 이론이요, 간곡히 구해야 할 세계사적 이론이요, 두드려야 할 문이다.

역사유물론은 따라오라는 부름인 때문에 비싸고 역사의 진보의 길로 따라오라는 때문에 보물인 것이다. 역사유물론은 인간에게 희생을 요구하기 때문에 비싸고 동시에 인간에게 진보를 선사하기 때문에 보물인 것이다. 비싸다 함은 자본주의를 저주하는 때문이요, 보물이라 함은 인간 하나하나의 가능성을 긍정하기 때문이다. 역사유물론이 비싼 이유는 무엇보다도 역사의 흐름을 좇는 사람들이 역사와 함께 흘린 피와 땀과 눈물 때문이요 – “학문에는 지름길이 없습니다” – 마르크스에게 비싼 것이 우리에게 쌀 리 없는 것이다. 이같이 비싼 역사유물론이 보물임은 무엇보다도 역사가 우리와 함께 한다는 사실에 있다. 귀한 역사유물론은 바로 우리가 역사의 에이전트가 된 것을 뜻한다.

역사유물론이 귀함은 그것이 인류의 나아갈 길을 제시한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세상을 항상 주의하여 역사유물론을 개에게 던지지 않도록 해야 하며, 그것은 동시에 마르크스가 명료하게 제시한 것이므로 그의 뜻대로 말하도록 제한하지 않아야 한다. 역사의 진보의 길로 따라오라는, 자본주의의 극복의 길로 나서라는 부름은 우리를 감동시키며, 자본주의는 궁극적으로 패망할 것이라는 마르크스의 확신에 찬 이론은 불안하고 지친 마음을 위로한다. 역사유물론이 비싼 것은 자본주의의 극복의 길에 널려 있는 멍에를 사람이 지도록 하는 때문이요 그것이 가슴뛰게 하는 것은 “피로를 두려워하지 않고 학문의 오솔길을 기어 올라”간다면 그 “정상에 도달할 수 있”다는 선례 때문이다.

역사유물론에 대한 깨달음이 마르크스에게 있어서는 두 가지 다른 방식으로 나타난다. 하나는 그가 독일 이데올로기를 저술한 초창기의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산전수전을 다 겪은 후 자본론을 저술할 때 사용한 방식이다. 이 두 가지 방식은 하나의 총체의 계기들인 것으로 이러한 변증법적 사고가 이 학자의 전 생애를 감싸고 있다. 첫번째 것은 주로 경제학-철학 초고에 나타나는데, 그 때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에서 나타나는 인간의 소외의 문제에 주목했다. 두번째 것은 자본론의 자본주의에 대한 체계적, 내재적 비판에 나타나는 것으로 여기서 관심은 인간의 아픔 그 자체 보다는 자본주의에 내재한 자기파괴적 성격에 대한 것이었다. 이 두 가지 상호연관된 관점 사이에 역사의 진보를 따라가는 마르크스의 전 생애가 들어 있고 이 두 가지의 관점이 그의 생애를 감싸 주고 있다. 이 두 가지 관점의 중심에는 역사유물론에 대한 신념이 뚜렷이 솟아 있다. 즉 역사는 마침내 진보할 것이고 자본주의는 패망할 것이라는 고백인데 마르크스는 이 고백을 여러번 남겼다. 자본주의의 참상에 대한 즉각적인 분노와 이를 극복하기 위한 열정적이고 자기 희생적인 노력, 그리고 학적 연구를 통해 통찰하게 된 자본주의의 자기 파괴성은 같은 역사유물론의 두 가지 다른 모습일 뿐이다.

역사유물론은 마르크스에게 조금씩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 중 하나만을 취하고 다른 것을 버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역사유물론이 그에게 힘을 주어 마르크스로 하여금 모든 것을 버리고 진보의 길로 나서게 하였으며 온 세상이 신성모독이라 간주하는 이론을 세상에 내놓게 하였다. 이렇게 마르크스가 이해한 역사유물론은 비싼 것이었다.

사회의 진보에 대한 사상이 널리 전파되고 확대됨에 따라 세속화되고, 역사유물론은 비싼 면을 차차 상실하게 되었다. 세상은 진보의 이름 속에 보수화되고 역사유물론은 진보에 대한 신뢰라는 통속적 개념이 되어 버렸다. 싸게 소유할 수 있는 것이 된 것이다. 그러나 그 일면이 아직 사회에 남아 있음을 다행으로 생각한다. 마르크스주의 전업운동가, 학자들의 존재가 곧 그것이다. 이들이 사회에서 제거되지 않았다는 것과 그것을 사회가 용납할 수 있다는 것은 뜻깊은 일이 아닐 수 없다. 자본주의의 극복에 비싼 값을 치루어야 하며 인내를 요구한다는 인식이 물론 사회의 진보적인 사람들의 한 변두리를 돌고 있음은 사실이나 이들의 생활의 핵심은 여하간 입신양명과 부귀안락의 가능성을 버리고 자본주의의 극복을 향해 나아가고자 하는 엄격한 훈련을 닦는 일이었다. 전업운동가, 학자들의 존재는 역사유물론의 세속화와 이의 무력화에 대한 모진 항의이기도 하였다. 여기까지는 좋았으나 사회는 이 항의를 기뻐하였을 뿐 적극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음으로 그와의 최후결렬은 면하였으나 그것을 상대화하게 되어 결국 이러한 생활은 진보운동의 세속화의 일종의 변명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즉 활동가로서, 혁명가로서, 학자로서의 삶은 특수 개인의 특수 행위로 인정받았을 뿐 사회 대중의 관심을 거두지 못하고 말았다는 말이다. 역사유물론의 현실적 관철을 위한 노력을 특별한 취미의 인간들의 특별한 집단에 한정시킨 것은 숙명적으로 자본주의 극복을 위한 노력을 최고의 노력과 최저의 노력으로 나누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이렇게 마르크스주의 전업활동가, 학자의 존재를 인정함으로 진보 세력은 세속화에 대한 항의를 피할 수 있는 길을 열었고 또 한편 아주 저급한 세속 생활의 가능성도 절대적 변호를 받게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이들의 노력에 의하여 사회에 보관되고 있었던 역사유물론에 대한 저 충실한 이해는 자신을 다시 보수화된 진보진영에 변호해야 하는 결정적 모순에 떨어지고 말았다. 여하간 이러한 전업활동가, 학자들이 결정적 과오를 초래한 것은 – 역사유물론에 대한 내용적 오해는 차치하더라도 – 역사유물론의 길을 엄격한 따름의 길로 이해한데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들의 생활을 역사유물론에서 멀어지게 한 것은 자기 의사 결정에 따른 소수인의 특별 행위를 인정하고 이에 따른 특수 업적과 공로를 위한 상을 요구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은 데 있다.

마르크스는 본래 학자의 길을 택했으며 그를 통해 순수하고 귀한 역사유물론이 일어났다. 그는 사회의 진보와 자본주의의 극복에 전념하는 학자가 되기 위해 많은 것을 버렸다. 세상을 버리고 역사를 진보하게 하는 작업에 착수한 것이다. 그는 역사를 만드는 것은 인간이고 오직 이를 통해 사회가 진보한다는 것을 알았다. 노력을 통해서만 이 흐름에 동참할 수 있는 것을 안 때문에 그는 밤낮없이 끊임없이 연구에 매진했다.

학자의 길을 택한 것은 삶 전체의 투기를 뜻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이 길은 역사유물론에 의하여 좌절당하고 말았다. 역사유물론을 따라감은 개인의 공을 쌓는 어떤 특수 행위가 아니라 자본주의 극복을 원하는 모든 사람들에게서 관철되어야 할 분명한 요구사항임을 그가 깨달은 때문이었다. 학자로서의 겸손한 행동은 훌륭한 다른 학자의 선례를 따르는 것이었다. 이것은 결국 모방하는 사람들 자신의 극기요 연구에 몰두하는 자들의 결정적 자기 주장이 되어 버렸다. 이렇게 되자 세상은 학자들의 삶의 중추에 침투하여 위험한 일을 다시 시작하였다. 학자의 세계 도피는 아주 교활한 세계애가 된 것이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이러한 상아탑에서의 생활의 최후 가능성이 그에게서 좌절되자 역사유물론을 붙잡았던 것이다. 학자 세계의 붕괴 속에서 마르크스는 도리어 역사유물론의 섭리의 작동을 본 것이다. 그가 역사유물론을 붙든 것은 “개인은 아무리 이러한 관계들을 초월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사회적으로는 여전히 그것들의 산물”이며 “경제적 사회구성의 발전을 자연사적 과정”으로 본 그가 그의 엄청난 개인적 노력의 허망함을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얻은 역사유물론은 이렇게 비싼 것이었다. 그는 역사유물론에 투신하기 위해 그의 삶 전체를 꺾었다. 그리고 그는 이제 헤겔의 책을 버리고, 우선은 세계를 해석하고자 했던 그 생각을 버리고 역사유물론이 이끄는 길로 따라가야 했다. 이제는 학자로서의 자신의 공적을 위한 따름이 아니고 역사유물론의 흐름에 그 몸을 내맡기기 위한 것이었다. 자본주의는 끔찍한 것이나 결국 망하게 되어 있으니 네가 있는 곳에 그대로 있으면서 자본주의의 붕괴의 날을 기다리라는 깨달음은 마르크스의 것이 아니다. 마르크스는 오히려 안정적인 학자로서의 삶의 가능성을 버리고 자본주의 사회로 다시 돌아와야 했다. 그것은 자본주의 사회가 선하고 정의로워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상아탑도 이와 다름이 없었던 때문이다.

학자의 길을 버리고 세상으로, 자본주의 사회로 돌이킨 마르크스의 길은 세상을 꾸짖은 힐책 중 가장 신랄한 공격을 뜻하였다고 본다. 세상의 길을 택한 마르크스의 세상에 대한 선전포고는 학자들의 세상에 대한 태도를 아이들의 장난으로 폭로시킨 것이다. 그의 싸움은 백병전이었다. 자본주의의 극복을 생활의 중심에 세워 놓은 것이다. 특수한 환경 속에서 특수한 사람들의 역할과 책임으로 간주되었던 일들이 이제는 모든 사람들에게 요구되는 피할 수 없는 명령이 되었다. 역사유물론을 따른다는 것이 일상적 생활에 미치는 영향이 예측할 수 없을 만큼 깊어진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자는 세상과 몸을 맞댈 수 밖에 없다. 이것을 백병전이라 한다. 마르크스의 이론, 특히 역사유물론을 순수한 학적 연구의 결실이라 하여 더 이상의 이론적, 실천적 노력/투신의 면제를 세상에 선포한 것으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불행한 오해라 하겠다. 역사유물론의 발견, 곧 자본주의의 필연적 패망의 이론의 선포는 자본주의에 대한 정당화도 그것의 긍정도 아니다. 오히려 마르크스주의자의 행동이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은 오직 그의 행동에 의한 자본주의적 세상에의 항의가 아주 날카로울 때 한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자가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생활을 역사유물론을 따르는 방식으로 수행할 때 그의 생활은 정당화될 수 있다. 자본주의를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를 살아가는 사람을 정당화하려는 것이 – 왜냐하면 사람은 역사유물론의 부름에 응답할수 있으므로 – 상아탑의 길을 포기한 마르크스의 목표라 하겠다. 마르크스는 역사유물론을 비싼 값을 주고 산 것이다. 메마른 땅의 생수며 공포에 대한 위로요, 스스로 택한 노예 생활에서의 해방이며, 모든 자본주의적 패악의 소멸을 뜻하는 때문에 그것은 보물인 것이다. 이 보물은 책임을 불문에 붙이지 않고 오히려 따라오라는 부름을 극도로 날카롭게 하는 때문에 비싼 것이다. 정확히 말해서 비싼 점에서 보물은 보물이요, 보물이라는 점에서 그것은 비싼 것이다. 이것이 반자본주의자의 이론의 비의요, 인간을 그가 자본주의 사회의 산물임에도 변호할 수 있는 비의인 것이다.

그런데도 이 승리적 유물은 귀하고 비싼 보물이라는 마르크스적 인식이 아니라 인간의 세속적, 자본주의적 본능에 권리를 만들어주는 결과가 되고 역사유물론은 그로 인하여 점차 싸구려로 전락해 갔다. 이러한 본의 아닌 결과는 극히 적은 잘못된 액센트에 따른 것으로 말하자면 이 적은 과오가 가장 위험하고 저주스러운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경건한 생활과 일에서 세상의 진보 그 자체보다는 자기 자신을 찾는 때문에 마르크스는 그러한 개인적 노력만으로는 자본주의적 극복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을 가르쳤던 것이다. 이러한 숙명 속에서 마르크스는 인간의 역사를 자연사적 과정으로 파악했던 것이다. 동시에 마르크스는 이러한 자연사적 과정으로서의 자본주의의 극복이 생명의 대가라는 것과 그리고 이를 위하여 아직 날마다 생명을 지불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다. 역사유물론이라는 이론에 의하여 인간의 노력이 면제를 받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노력이 이 이론을 통해 비로소 올바른 노력으로 자리매김되는 것이었다. 역사유물론에 대한 마르크스의 언급 배후에는 언제나 엄청난 노력을 통해 역사유물론이 제시하는 길을 따라가려 하였던 그의 생활이 밑받침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자본주의의 타도를 위한 노력과 역사유물론은 하나였다. 자신의 모든 생활 행위 속에서 그는 역사유물론의 도도한 흐름을 자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제자들도 마르크스의 이론을 그대로 되풀이하였다. 그러나 시간 경과에 따라 단 하나의 차이가 그들 사이에 드러나기 시작했다. 즉 마르크스에게 가장 자연스러웠던 자본주의 극복을 위한 끊임없는 노력을 후계자들은 빼놓고 만 것이다. 마르크스의 역사유물론 이해에는 인간이 역사를 만들어간다는 점이 그 중심까지 스며들어 있어 인간의 노력의 중요성을 꼬집어 말할 필요가 없었다. 그의 후계자들의 이론이 마르크스에게서 온 것임은 의심할 바 없으나 그의 역사유물론이 비싼 보물이었다면 이의 본의 상실은 이미 마르크스의 제자들 중에 깃들었다고 볼 것이다. 인간의 역사를 자연사적 과정으로 파악하고자 하였으며, 그리하여 개인을 사회의 산물로 간주하는 마르크스의 이론이 (이제 사회주의로 나아가는 한 과정이라는 측면에서) 자본주의의 역사적 정당성을 인정하는 방향으로까지 나아가게 된 것이다. 비싼 역사유물론이 인간의 행위와 노력을 무시하는 싸구려 역사유물론으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개인은 주관적으로는 아무리 이러한 관계들을 초월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사회적으로는 여전히 그것들의 산물이다”라고 말하는 순간에도 마르크스는 역사유물론에 투신하라는 부름에 접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공부하고 깨닫는 것은 자신의 잘못된 생활을 결정적으로 끊는 일이지 결코 그 생활의 변명을 뜻할 수는 없다. 그것은 개인적 주장과 선호를 사회의 진보라는 대의에 맞추어나가기 위해 끊어내는 최후 선언을 위한 것이다. 자본주의의 붕괴는 ‘결과’적으로 자연사적 과정이다. 그러나 이 개념은 후계자들에 의하여 추리의 원리를 위한 전제가 되어 버렸다. 모든 불행은 여기에 있다. 자본주의의 자동붕괴를 인간의 행위와 노력의 ‘결과’로 보았던들 이러한 불행이 초래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자본주의의 모순에 기인하는 자본주의의 궁극적 자기파괴를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전제로 본 때문에 그것은 자본주의적 이념에 부합한 생활을 이롭다하는 나의 기정 소유물이 되고 만 것이다. 이때 내가 이 이론에 힘입어 자본주의적 생활에 영합할 수 있는 것은 세상이 이미 원리적으로 자본주의를 극복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전히 시민적이며 세속적인 생활에 그대로 머물러 모든 옛 것을 그대로 행하여도 좋으며 이론이 도리어 이러한 생활을 지지한다는 확신에 이른 것이었다. 이 이론을 통해 자본주의 사회는 진보적인 사회로 화하고 마르크스주의는 이 이론 속에서 전대미문적으로 보수화하였다. 이렇게 마르크스주의적 이론과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일상적 생활간의 갈등은 해소되었다. 마르크스주의적 삶이란,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자본주의와 함께 살며 자본주의와의 차이를 어떤 점에서도 두지 않고 – 그렇다 이론을 위해서라도 나를 자본주의로부터 구별해서는 안된다 – 그때 그때 자본론을 읽으며 자본주의의 궁극적 붕괴의 확실성만을 되풀이하며 얻으면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나는 인간성에 대한 가장 무서운 적인, 참 인간성을 증오하고 멸시하는 싸구려 역사유물론에 의하여 자본주의 극복에 투신해야 한다는 필요와 의무에서 해방된 것이다. 가설은 싸구려다. 이론이 한 가설 구실밖에 못할 때 그것은 싸구려가 되어 버린다. 그 대신 결과로서의 이론은 무한히 비싼 것이다. 하찮은 표현의 차이가 마르크스의 역사유물론의 진리를 이렇게 좌우하는 것을 생각하면 가공할 일이다. 자본주의가 그 모순으로 인해 마침내 자동붕괴할 것이라는 이론은 결과로서의 이론으로 옳다. 그러나 이같은 문구의 오용은 그것의 본질을 근본적으로 파괴해 버린다.

파우스트가 무엇을 알아 보려고 일생 동안 노력한 끝에 “알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하였을 때, 이 말은 그의 전생애적 노력의 결과이다. 가령 이 같은 말을 대학 신입생이 이용한다면 그 뜻은 전혀 달라질 것이다 (키에르케고르). 결과로서의 이 말은 진리요, 전제일 때 자기 기만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실생활에서 얻은 인식을 생활에서 분리할 수 없음을 뜻한다. 자본주의를 부정하고 역사유물론이 제시하는 길을 따르는 사람만이 오직 이 역사유물론 속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이다. 이 부름을 역사유물론으로, 역사유물론을 부름으로 인식해야 하는 것이다. 역사유물론의 혜택으로 오히려 자본주의의 부정을 모면하려는 자는 스스로 속는다.

그러나 이를 완전히 전도시킬 위험한 지점에 마르크스 자신도 빠져 들지 않았던가? 즉 “사회적 노동생산력의 발전은 자본의 역사적 과제이며 그것의 역사적 정당성이다. 바로 이를 통해서 자본은 무의식중에 더욱 고도의 생산형태를 위한 물적 조건을 창출한다. …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 생산력의 발전을 저지하게 된다면 자신의 역사적인 소명에 불성실한 것이 된다.”고 한 마르크스의 말은 무엇을 뜻하는가? 너는 이미 자본주의 속에서 살아가고 있고 거기에서 결코 벗어나지 못할 것이니 학자이건 혁명가이건 아니면 마르크스주의에 호의를 갖고 있는 사람이건, 자본주의의 극복을 원하건 유지를 원하건 자본주의의 올가미에서 벗어 나오기는 틀렸으며, 이렇든 저렇든 자본주의와 더불어 그 패악에 참여할 것이니 어차피 그럴 바에야 차라리 – 게다가 자본주의는 어차피 결국 망할 것인데 – 용감하게 주저하지 말고 효용과 이윤을 극대화하며 살아가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이론은 싸구려가 되고 면죄부가 되고 인간성은 해체되고 말 것이다. 이론은 이때 인간성의 파괴에 필요한 용기의 근원이 되지 않는가? 마르크스가 우리에게 전해준 역사유물론을 핑계삼아 이러한 자해를 저지르는 것보다 더 반마르크스주의적인 것이 또 어디 있을까? 이것을 반마르크스주의적인 것으로 보려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의 태도는 옳은 견해가 아닐까?

옳게 이해하는 관건은 결과와 전제의 차이를 뚜렷하게 하는 데 있다. 마르크스의 이 말이 소위 자본주의의 역사적 정당성의 전제가 되면 싸구려 역사유물론의 논리가 선포된다. 그러나 처음이 아니라 끝으로, 결과로, 마지막 돌로, 최후의 말로 보면 마르크스의 이 말은 옳게 이해된다. 전제가 될 때, “자본의 역사적 과제”는 윤리적 당위가 되고 이론의 본질은 이 윤리적 당위와 일치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은 자본주의의 정당화다. 마르크스의 글은 이 때 그가 생각한 것과는 정반대가 되어 버린다. “자본의 역사적 과제”, 이 말은 마르크스의 최후적 탈출구였으며 결국 극한의 개인의 노력에 드리워져 있는 허망함을 안 그가 이 허망함에 좌절하여 결국 포기 외에 다른 길을 찾아내지 못하는 사람을 위로하는 말이었다. 마르크스의 이 말은 자본주의가 주는 안락과 평화를 포기하지 못하는 자신의 생활을 근본적으로 승인하는 것이 아니라 길이 없어 보이는 곳에 다다랐을 때 마침내 역사가 그 얼굴을 드러낸다는 이론적 낙관주의이다. 자본주의의 장점을 보는데 과감하라. 자본주의에서 도망하는 대신 자본론을 읽으며 정신을 가다듬어라. 우리는 결코 자본주의의 사슬을 벗어날 수 없다. 그러므로 오늘도 너는 벗어날 수 없는 멍에를 지고 있는 너는 너 이상 다른 것이 되려고 하지 말라. 그렇다. 날마다 다시 자본주의에 사로 잡히고 포로로서 용감하라. 그러나 누구에게 이런 말이 해당할 것인가? 이 말이야말로 항상 충실히 자본주의와 싸우고 역사유물론을 따라가는 데 지장이 되는 모든 방해물에 날마다 항의하는데도 사라지지 않는 장애물과 능력의 한계로 불안해 하는 사람에게 할 수 있는 말이 아니겠는가? 이론의 위태함을 느끼지 않으면서 누가 감히 이 말을 들어 이해할 수 있을까? 이 말이 주는 위로를 통하여 다시금 기운을 얻고 역사의 진보를 향한 출발을 새로 다짐하는 자가 아니겠는가? 마르크스의 이 문구를 이렇게 결과로 이해할 때에만 역사유물론은 귀한 역사유물론이 될 것이다.

장을 달리하여, 이론에 공허를 느끼고 고민하는 사람을 위하여 이 사실을 다시 되풀이하겠거니와 특히 싸구려 역사유물론으로 인해 인간의 치열한 노력의 길을 잃고, 이 이론에 대한 이해까지도 잃어버린 것을 고백하는 사람을 위하여 이 사실을 성실히 그리고 솔직히 다루어 보고자 한다. 여기에 우선 요약하면 우리는 올바른 이론을 가진 사람일지는 모르나 그 이론의 의미를 올바로 이해하고 그에 맞추어 행동하는 사람들이 아닌 것을 부인할 수 없는 때문에, 결과로서의 역사유물론과 자본주의의 극복을 위한 인간의 노력 사이의 상호관계를 바로 이해하는 노력을 다시 해보자는 이 과제는 오늘 우리에게 피할 수 없는 것이 되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의 고민이 우리에게 점점 명백히 보여 주는 것은 마르크스를 따르는 사람들의 실생활에 대한 자세의 문제이다.

우리 자신의 길 마지막에 서서 사실 파악할 수 없는 것, 즉 마르크스의 역사유물론은 순수하고 이것은 결과로서의 자연사적 과정인 덕분에 귀한 것이라는 사실을 파악한 자들에게는 복이 있다 할 것이다. 역사유물론에 대한 신뢰로 자신을 극복하고 겸손하고 묵묵하게 인류를 진보의 길로 이끄는 자들에게는 복이 있을 것이다. 이것을 인식하고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생활에서 이 인식을 지키고, 역사유물론을 따라감으로 자본주의의 극복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되어 세상 생활에 사실 자유한 자들에게는 복이 있을 것이다. 역사유물롬을 따름이 사회의 진보에 대한 확신에 뿌리내린 생활임을 알기 때문에 역사유물론을 따르는 자들에게는 복이 있을 것이다. 이러한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어 역사의 흐름 속에 함께하며 역사의 축복을 받은 자들에게는 복이 있을 것이다.

[2008] 마르크스 연구의 새로운 장, 그리고 비판적 사회과학의 재구성

〈마르크스 연구의 새로운 장, 그리고 비판적 사회과학의 재구성: 2007년 《역사유물론》 연례 학술대회 보고〉, 《마르크스주의 연구》 제5권 제3호, 2008년 8월, 228-52쪽.


이 글은 2007년 11월 런던에서 열린 제4회 ≪역사유물론≫ 연례 학술대회를 소개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예년과 같이 매우 다양한 주제의 토론이 이뤄졌지만, 이 글은 그중에서도 특히 마르크스주의는 물론 비판적 사회과학 자체의 발달을 위해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두 가지 흐름에 주목한다. 그중 하나는 마르크스 또는 마르크스주의 연구에 가히 새로운 장을 열었다고 여겨지는 것으로, 주로 독일어권 학자들에 의해 마르크스·엥겔스의 새로 출판된 전집(MEGA)에 대한 면밀한 연구를 바탕으로 이뤄진 성과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정치경제학 진흥을 위한 국제발의(IIPPE)’라는 새로운 국제적 연구프로젝트가 SOAS대학 경제학 교수로 있는 벤 파인(B. Fine) 등의 주도로 이번 학술대회에서 출범함으로써 구체화된 비판적 사회과학 전반의 새로운 연구의제를 가리킨다. 끝으로 이번 학술대회에서 제시된 이런 과업들을 제대로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국내 연구자들의 적극적 참여가 필수적임이 강조될 것이다.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