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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conomist on 중국 노동자/노동시장

<이코노미스트>에 재밌는 기사가 났다. 중국 노동자/노동시장에 대한 기사다(링크). “The rising power of the Chinese worker: In China’s factories, pay and protest are on the rise. That is good for China, and for the world economy”라는 제목만 봐서는 마치 중국에서 노동자들의 권익 향상을 반기는 것 같지만, 잘 보면 그렇지 않다. 어쩌면 이 기사가 전해주고픈 핵심적인 철학과 메시지는 다음과 같은 마지막 단락에 들어있는 것 같다.

캐임브리지 경제학자 고 존 로빈슨(Joan Robinson)이 언젠가 썼듯이, “자본가에게 착취당하는 비참함이란 착취당하지조차 못하는 비참함에 비할 바가 아니다”. 1962년에 씌인 이 재치있는 구절은 동남아시아의 과소고용(underemployment) 현실에서 자극받은 것이었다. 그때로부터, 자본은 그 지역과 그 북쪽의 거대한 이웃[중국]에서 노동자들을 분주히도 “착취”해왔으며, 이는 그들에게 크게 이익이 되었다. 이제 자본이 그들에게 투자할 때가 됐다.

1. 한 가지 재밌는 것은, “착취”라는 말에 따옴표를 침으로써 끝끝내 그 용어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는 것. 하지만 이건 뭐 아무래도 좋다. 나는 솔직히 저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아직까지 존재한다는 사실이 그저 경악스러울 따름이다. 멀쩡한 사람들이 굶어죽는 것을 보며 비탄에 가득차서, “차라리 저들이 자본에 착취라도 당했더라면 저보단 나았을텐데”라고 읊조리는 것이 곧장 “자본에 착취당하는 것은 좋은 것이다”라는 명제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2. “이제 자본이 그들에게 투자할 때가 됐다”란 또 무슨 소린가? 기사 전체를 보면 이는, 중국 노동자들도 이제는 “소비”를 해야 한다는 얘기다. 그러려면 그들의 소득수준도 높아져야 하고,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선 현재 불거지고 있는 노사갈등이란 필요악이라는 뉘앙스도 풍기고 있다. 이것이 위 기사가 말하는 자본이 노동자에게 하는 “투자”인가? 넌센스다. 이게 왜 “투자”인가? 노동자들이 투쟁을 통해 얻어낸 것이지!

자본은 그저, 주어진 상황의 (그 결과가 어떨지는 미리 정해지지 않은) 우연한 전개를, 즉 그런 사태의 추이에 따른 외적 강제를, 그 자신 내적 필연성으로 끌어안을 뿐이다. 위 경우, 애초 자본은 미래의 소비자인 노동자에게 “투자”한다는 의미에서 그들에게 “자발적으로 양보”한 것이 절대 아니다. 노동자들의 투쟁에 의한 강제, 또는 자본이 결코 의식적으로 지킬 필요가 없는 모종의 경제적/사회적 논리에 의한 강제(이를테면 노예라 하더라도 계속 굶긴 채 일을 시킬 수는 없다는 식의)를, 어쩔 수 없이, 그러나 동시에 그것이 마치 애초부터 거기에 있었고 또 따라서 자신은 그것을 자발적으로 받아안는다는 듯이 받아들일 뿐이다.

3. 사실은, 위 기사에서도 시사되는 바와 같이, 자본이 정작 어떤 “투자”를 하라고 요구하고 있는 대상은 바로 “중국 국가”다. 즉 그들은 자신들이 값싼 노동력을 안정적으로 공급받는 데 걸림돌이 되는 제반 사회제도들을 중국 정부가 재정비하길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엔 현재 시행되고 있는 중국의 이주에 대한 규제를 완화하는 것은 물론, 위 기사엔 나오지 않았지만 도시를 중심으로 한 제반 사회적 인프라 정비까지 포함될 것이다.

바로 이런 대목에서 끝끝내 드러나고야 마는 것은, 결국 “자본의 본성”이다. 즉 자본은 애초부터 노동자의 “복지”나 그들의 “소비수준” 내지는 “삶의 질”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값싸고 순응적인 노동력의 안정적인 공급“일 뿐. 그들은 오직 그것을 위해 중국 정부를 들볶고, 필요하면 이동도 하고 그러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사항들이 매우 잘 드러나 있다는 점에서, 아이러니컬하게도, 위 기사는 매우 좋은 기사, 한번쯤 읽어볼만한 기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