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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 자본주의 이중성이론, 인간재료

나는 노동가치론이라는 표현에 약간의 불만을 갖고 있다. 노동가치론을 풀어서 설명하면 노동이 가치(와 가격)의 원천이라는 이론이라고 할텐데, 이것이 그 자체로 잘못됐다는 얘기는 물론 아니다. 그리고 노동만이 가치를 생산한다는 전제 하에서만 자본주의적 착취를 해명할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 올바르고 순수하고 단순한 명제의 진실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노동(이)가치(의 원천이라는 이)을 강조하는 마르크스 해석의 폐해는 이것이 노동이 가치의 원천이라는 단순한 (그러나 올바른) 주장을 넘어서지 못하고, 마르크스가 예술적 총체로 여긴 자본론을 지나치게 단순화하며 왜곡한다는 것에 있다. 여기서 나는 다음과 같은 주장들을 염두에 두고 있다: 1) 노동만이 가치의 원천이므로 노동이 아닌 것은 가치와 무관하다; 2) 가치를 생산하지 않는 비생산적 노동에는 별 의미가 없으며 생산적 노동만이 분석의 가치가 있다 – 이런 시각을 가진 이들은 어떤 노동이 생산적 노동이냐 아니냐의 문제에 집착한다; 3) 중요한 것은 착취의 존재를 해명하는 것이다; 4) 노동은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여 가치를 생산한다. 이런 류의 해석들은 공통적으로 노동과 가치를 (적어도 암묵적으로) 동일시하며, 따라서 대체 어떠한 역사적 조건에서 노동이 가치의 실체가 되는지, 그리고 왜 마르크스가 착취의 해명에 그치지 않고 현상형태의 영역으로의 상승을 시도하는지에 별 관심을 두지 않는다.

대조적으로 마르크스에게 있어 노동과 가치는 결이 다른 개념이다. 노동은 가치의 실체이지만, 노동은 가치뿐만 아니라 사용가치 역시 생산한다. 가치가 일면적이라면 노동은 이중적이다. 서로 가깝고도 먼 사이인 것이다.

그래서 다이앤 엘슨 (Diane Elson)과 같은 사람은 이러한 폐해에 주목해서 노동가치론 (the labour theory of value) 대신 노동의 가치이론(the value theory of labour)이라는 표현을 사용할 것을 제안한다. 노동에 근거한 가치(와 가격)의 해명이 아니라, 노동이 왜 가치의 모습으로 나타나는지를 밝히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입장이다.

노동가치론이라는 표현에는 스미스, 리카도 등의 고전파 정치경제학자와 마르크스 사이의 연속성을 과장한다는 문제도 있다. 노동가치론은 마르크스가 최초로 제시한 것이 아니다라는 주장은 분명히 옳지만, 노동가치론을 매개로한 연속성이 마르크스와 고전파 정치경제학 사이의 관계의 요체인 것은 아니다. 나는 연속성의 측면보다는 단절의 측면이 훨씬 크고, 마르크스의 이중성 이론이 바로 단절의 핵심에 해당한다고 생각한다.

노동가치론의 관점에서 보면 리카도의 “정치경제학과 조세의 원리” 1장은 자본론 1권 1장 1절의 내용과 놀랄만하게 유사한 내용을 담고 있다. 초반부에 가치와 사용가치 사이의 구분, (교환)가치량이 노동의 양에 의해 규정된다는 주장이 제시되며, 심지어 사용가치가 없는 상품은 가치를 갖지 않는다는 언급도 등장한다. 하지만, 리카도는 사용가치와 가치 사이의 관계를 상품의 이중성이라는 측면에서 다루지 않고, 따라서 상품을 생산하는 노동의 이중성에도 주목하지 않는다.

그래서 작명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마르크스의 독창성과 차별성을 부각시킨다는 측면에서  ‘자본주의 이중성이론’이라는 표현을 제안할 것 같다. 영어로 하면 the dual-character theory of capitalism 정도가 될까.

마르크스는 1867년 엥겔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본론의 두가지 최고의 포인트 중 하나로 노동의 이중성에 대한 논의를 꼽으면서 이것이 “모든 종류의 사실의 이해의 근본”이 된다고 했다. 마르크스에게 이중성이 중요한 까닭은, 그것이 자본주의 사회의 두 가지 차원 – 즉 필요의 충족을 위해 조직화된 경제체계로서의 차원과  임노동에 기초한 계급사회로서의 차원 – 을 개념화하고 서로를 전제하는 이 두 차원의 모순적 성격을 명백히 드러내기 때문이다. 이 이중성은 자기증식한다. 노동이 이중적이므로 (추상노동 vs. 구체노동) 상품 역시 이중적이고 (가치 vs. 사용가치) 이 내적 이중성은 일반상품과 화폐의 외적 대립으로 표현된다. 마찬가지 이유로 생산과정 또한 이중적이다 (가치증식과정 vs. 노동과정).  생산과정이 이중적이므로 지휘의 역할도 이중적이며 (노동과정의 조직 vs. 지휘의 전제성), 인간 역시 주체로서의 인간과 객체로서의 상품(물건)으로서의 이중적 존재로 전락한다.  여기에 더해 나는 노동의 이중성, 가치와 사용가치 사이의 모순이 생산관계와 생산력 사이의 모순으로까지 발전한다고 생각한다 (여기에 대해서는 추후에 상세히 논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자본주의의 패망의 유전자는 자본주의의 세포형태인 상품 속에서 그 발현을 기다리고 있다.

이중성 이론의 또다른 핵심은 서로를 전제하면서 서로를 배제하는 쌍방의 모순관계에서 언제나 한쪽이 공세를 취하고 다른 한쪽은 수세에 몰려 있다는 사실이다. 상품이 가치이기 위해서는 우선 사용가치이어야 하지만, 어느 순간에는 사용가치의 생산이 가치생산의 수단으로 변질된다. 노동과정도 마찬가지다. 노동과정의 생산물이 가치의 형태를 취하는 순간부터 노동과정 그 자체는 가치생산과 가치증식에 걸맞는 형태로 변형되어간다. 단순협업이 매뉴팩쳐로 매뉴팩쳐는 기계제대공업으로 발전하며, 노동자는 노동과정의 주체에서 인간재료로 전락한다. 여기에 대해 마르크스는 이렇게 담백하게 쓴다.

대공업의 출발점은 노동수단의 혁명이며, 그리고 이 혁명은 공장의 편성된 기계체계 안에서 가장 발달한 형태를 얻는다. 이 객체적 유기체에 인간재료(Menschenmaterial)가 어떻게 합체되는가를 고찰하기 전에 … -자본론 1권 15장, p. 529; MEW 23, p. 416

마르크스는 자본론에서 (모순적) 이중성을 1장을 제외하고는 별도로 상세히 논의하지는 않지만, 기계제 대공업을 다루는 15장에도 이중성의 중요성에 대한 그의 인식이 여기저기 녹아 있다. 예를 들어,

우선 말해두어야 할 것은, 기계는 노동과정에는 언제나 전체로 참가하지만 가치형성과정[가치증식과정이 맞다]에는 언제나 일부씩만 참가한다는 사실이다 … 생산물형성요소로서의 기계와 가치형성요소로서의 기계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 어떤 노동수단이라도 노동과정에는 언제나 전체로 참가하고 가치형성과정에는 항상 그것의 평균적 마멸에 비례해 일부만 참가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 p. 519-20; p. 408

그리고 각주24에서 마르크스는 리카도가 이 이중성의 문제를 인식하지 못했다는 것을 명시적으로 지적한다.

리카도는 … 다른 곳에서는 [기계의] 이러한 작용 [heesang: “기계의 생산적 효율성이 도구의 그것에 비해 크면 클수록 기계의 무상봉사의 크기도 그만큼 더 크다”는 것]에 주목하지 않았는데, 그것은 그가 노동과정과 가치형성과정 사이의 일반적 차이를 알지 못한 것과 마찬가지다 – p. 520; p. 409

(130) 전제와 아나키의 (외적) 이중성

우리는 앞에서 작업장 안의 분업과 사회 안의 분업이 서로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살펴본 바 있다.

상품생산과 상품유통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일반적 전제이므로, 매뉴팩쳐 안의 분업은 사회 안의 분업이 이미 일정한 정도로 발전하고 있을 것을 필요로 한다. 또한 거꾸로 매뉴팩쳐 안의 분업은 사회적 분업에 반작용해서 그것을 발전시키며 증가시킨다. – 자본론 1권 14장, 477; MEW 23; 374. (128) 보편적 분업, 특수한 분업, 개별적 분업 참조.

마르크스는 작업장 안의 분업과 사회 안의 분업을 서로 대조하여 분석한 후, 상호연관의 수준을 넘어 이들을 아예 자본주의적 생산이라는 총체 의 두 계기로 파악한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사회적 분업에서의 무정부상태[heesang – 아나키]와 매뉴팩쳐적 분업에서의 독재[heesang – 전제]가 서로 다른 것의 조건으로 되고 있[다]. – 482; 377

1.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지배하는 사회에서는’의 원문에는 ‘지배하는’이 없다. 직역하면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사회에서는 (in der Gesellschaft der kapitalistischen Produktionsweise)’이지만 좀 어색하긴하다. 길판에서는 ‘자본주의적 생산이 이루어지고 있는 사회’라고 풀어서 써 놓았다.

2. Anarchismus혹은 anarchism을 무정부주의로 번역하는 것에는 다소 문제가 있다고 알려져 있다. 우선은 무정부상태라고 하면 누구나 혼란을 떠올리게 마련이지만, 아나키스트들이 사회적 질서의 필요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가령 아나키스트 공산주의자들은 필요에 따른 분배를 주장하는데, 이것 자체가 이미 하나의 사회적 질서다. 여기에 더해 아나키스트들은 국가권력의 철폐라는 부정성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연합, 상호부조를 강조한다. 그래서 아나키스트들은 자유연합주의나 그냥 아나키즘을 선호한다고. 나도 무정부상태 혹은 길판의 무정부성 대신 ‘아나키’를 쓰기로 한다. 그런데 사실 이 아나키는 상호부조와 호혜의 아나키가 아니라 살벌한 경쟁과 이윤추구로 대표되는 아나키다. 그래도 등가교환이라는 질서에 따른 아나키므로 무정부상태는 아님. 여담이지만 얼마전에 자서전 읽었는데 크로포트킨 정말 매력적이다.

3. ‘독재’가 아니라 ‘전제’인 이유는 (117) 자본가의 전제적 지휘 참조. 지휘 기능은 협업 일반의 산물이지만, 자본주의적 생산에서는 지휘가 협업에 반작용하여 가능한 많은 잉여가치를 쥐어짜내는 역할을 한다. 지휘 그 자체는 전제적일 필요가 없지만, 자본주의적 지휘는 전제적이어야 하는 이유다.

4. ‘서로 다른 것의 전제가 되고 있다’의 원문은 ‘einander … bedingen’. 길판에는 ‘서로를 제약하고 있다’라고 되어 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자본주의의 아나키는 경쟁의 아나키다. 살아남기 위해, 더 많은 이윤을 얻기 위해, 생산단가를 끊임없이 낮추어야한다. 심하게 얘기하면 ‘너 죽고 나 살자’의 아나키. 생산단가를 낮추려면 노동일을 늘리거나 (절대적 잉여가치), 노동생산성을 높이거나 (상대적 잉여가치), 노동강도를 높여야 한다 (절대적 잉여가치). 자본가가 노동과정을 완전히 장악하고 그의 뜻대로 생산유기체를 작동시킬 수 있을때만 가능한 방식들이다. 결국 전제적 통제 없이 아나키는 불가능하며, 아나키가 없다면 굳이 전제적 통제가 필요하지 않다.

5. 다시 한번 이중성이다.

[가치 vs. 사용가치]. [추상노동 vs. 구체노동]. [상품관계 vs. 화폐]. [노동력 vs. 인간]. [가치증식과정 vs. 노동과정]. [자본 vs. 기계]. [생산수단으로부터의 자유 vs. 정치적 속박으로부터의 자유]. [자본가의 전제적 지휘 vs. 협업에 필요한 지휘]. [역사적으로 특수한 사회적 관계 vs. 초역사적이고 영속적인 존재]. 그리고 [작업장에서의 전제적 통제 vs. 아나키]

전자가 본질이고, 후자가 존재양식이다. 전자는 후자를 통해 후자 속에만 존재하지만, 후자는 전자를 은폐한다. 전자는 보통 관계고, 후자는 보통 존재다. 전자를 잊고 후자에 집중하면 물신주의로 빠지게 된다.

이중성은 동일한 존재의 이중성으로 나타나는 경우도 있지만, 아예 별도의 존재로 쪼개지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상품이 가치이면서 사용가치라는 내적 모순은, 상품과 화폐의 외적 대립으로 지양된다. 마르크스가 말한대로, “모순들을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이 모순들이 운동할 수 있는 형태를 제공”(133)하는 경우다. 전제적 통제와 아나키 사이의 외적 대립도 비슷한 경우다. 자본주의적 생산은 불평등한 계급관계에 입각한 생산이며 동시에 평등한 상품관계에 입각한 생산, 곧 계급관계의 상품형태에 입각한 생산이다. 불평등하면서 평등한, 불평등이 평등의 옷을 입고 나타나는 모순적인 생산방식이다. 이 내적 모순은 전제적 통제(=불평등한 계급관계)와 아나키(평등한 상품형태)의 외적대립으로 표현된다. 여기서 모순은 운동할 수 있는 새로운 형태를 얻었다.

자본주의의 산물로서의 작업장 안의 분업, 전제적으로 통제되는 이 분업에는 자본주의의 도장이 찍혀 있다:

전체사회 안의 분업은, 상품교환에 의해 매개되든 아니든, 매우 다양한 경제적 사회구성체에 존재할 수 있지만, 매뉴팩쳐에서 수행되고 있는 바와 같은 작업장 안의 분업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전혀 독특한 창조물이다. – 485; 380

이후 마르크스는 매뉴팩쳐의 자본주의적 성격을 다룬다.

(117) 자본가의 전제적 지휘

자본가의 지휘는 그 내용에서 이중적 성격을 띠고 있는데, 그것은 그가 지휘하는 생산과정 자체가 한편으로는 생산물의 생산을 위한 사회적 노동과정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자본의 가치증식과정이라는 이중적 성격을 띠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본가의 지휘는 그 형식에서는 독재적(despotisch; despotic)이다 – 자본론 1권 13장, 449; MEW 23, 351

1.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지휘 기능은 협업 혹은 사회적 노동과정에서 유래하지만 (협업 -> 지휘), 자본주의 경제에서는 사회적 노동과정에 반작용해서 이로부터 가능한 모든 것을 쥐어짜내는 기능(지휘 -> 협업)을 수행한다. 그런 측면에서 자본주의 경제에서 지휘 기능의 내용은 이중적이다. 반면 지휘 기능의 내용이 현실화되는 방식은 전제적이다. 이것은 물론 노동과정의 적대적 성격에서 발생하는 지휘 기능 (지휘 -> 협업) 때문이다.

반대로 협업에서 유래하는 지휘 기능, 집단적인 노동과정의 성질로부터 발생하는 지휘 기능은 반드시 전제적인 방식으로 수행되어야 할 필요가 없다.

2. 비봉판에서 ‘독재적’이라고 번역된 despotisch는 ‘전제적’ 혹은 이와 비슷한 용어로 번역하는 것이 나을 것 같다. 예를 들어, 박정희는 유신 이후 독재정치를 했고, 김일성은 정적 숙청 이후 전제정치를 했다. 독재자는 민주정을 참칭하지만 전제군주는 그럴 필요조차 느끼지 않는다.

3 상명하복의 조직문화로 대표되는 조직으로는 군과 검찰을 들 수 있다. 하지만 군의 경우에는 군정권과 군령권이 분리되어 있고, 검찰의 경우에는 일반사무는 검찰총장이 지휘하지만, 인사권은 법무부장관에게 있다. 이러한 제도가 존속하는 한 군과 검찰에서 독재가 가능할 수는 있어도 전제는 불가능하다.

4. 재벌총수는 본인이 원하는 바를 언제 어디서나 관철시킬 수 있는 전제권력을 갖고 있다. 감옥에 들어가도 그의 권력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는다. 심지어 옥중결재에도 모두가 복종해야 한다. 죄는 미워도 죄인은 미워할 수 없기 때문이다.

(116) 자본가의 지휘의 이중적 성격

많은 임금노동자의 협업에 따라 자본의 지휘(Kommando)는 노동과정 그 자체의 수행을 위한 필요조건으로, 생산의 현실적 조건으로 발전해 간다. 생산장소에서의 자본가의 지휘(Befel)는 이제 전쟁터에서의 장군의 지휘(Befel)와 마찬가지로 필수적인 것으로 된다 – 자본론 1권 13장, 447; MEW 23, 350; 강조 추가

1. 아주 단순한 협업에도 지휘는 필요하다. 백짓장이라도 맞들기 위해서는 누군가 하나 둘 셋을 외쳐야 한다.

2. 강조표시한 ‘노동과정’에 주목하자. 지휘가 ‘노동과정 그 자체의 수행을 위한 필요조건’이라는 것은 지휘가 사용가치 생산의 필요조건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3. 지휘는 노동과정 내부에서 수행된다. 그런 측면에서 지휘 기능은 노동과정 이전에 준비되어 있어야 할 지식(무엇을 어떻게 생산할 것인가; 디자인, 생산기술, 제품의 기능)의 생산과는 무관하다.

지휘(Leitung; directing)와 감독(Überwachung; superintending)과 조절(Vermittlung; adjusting)의 기능은 자본의 지배 하에 있는 노동이 협업적으로 되자마자 자본의 하나의 기능으로 된다. 자본의 독자적인(spezifisch) 기능으로서, 지휘(Leitung)의 기능은 자기 자신의 특수한(spezifisch) 성격을 획득하게 된다.

1. ‘조절’보다는 (매개와 중재의 의미를 갖고 있는) ‘조정’이 더 나은 번역이 아닐까 한다. adjusting이라는 번역어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

2. ‘자본의 독자적인 기능으로서’라는 번역은 옳지 않다. 원문이 뜻하는 바는, 자본주의 경제에서 지휘는 자본의 특수한 기능이 되며, 바로 자본의 기능이 됨으로써 지휘라는 기능이 특수한 성격들을 (원문에 복수로 표현되어 있다) 획득하게 된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경제에서) 지휘가 획득하는 특수한 성격들은 가치생산과 연관되어 있다. 지휘는 사용가치뿐만 아니라 가치생산의 필요조건이 된다. 아래를 보라.

자본가에 의한 통제(Leitung)는 사회적 노동과정의 성질로부터 유래하는 하나의 특수기능일 뿐 아니라, 그와 동시에 이 사회적 노동과정을 착취하는 기능이며, 따라서 착취자와 그의 착취대상 사이의 불가피한 적대관계에 근거하고 있다 – 448; MEW 23, 350

1. 번역의 일관성을 위해서는 통제 대신 ‘지휘’를 사용해야 한다.

2. 사회적 노동과정 vs. 사회적 노동과정의 착취 (즉, 가치증식과정). 마르크스는 여기에 대해서 아래와 같이 명확하게 쓴다.

자본가의 지휘는 그 내용에서 이중적 성격을 띠고 있는데, 그것은 그가 지휘하는 생산과정 자체가 한편으로는 생산물의 생산을 위한 사회적 노동과정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자본의 가치증식과정이라는 이중적 성격을 띠기 때문이다. – 449, MEW 23, 351; 강조 추가

7장에서 마르크스가 노동과정과 가치증식과정을 대비시키는 것을 감안하면, 노동과정 대신에 ‘사회적 노동과정’을 사용한 것이 인상적이다. 어찌되었건, 가치이면서 상품가치인 상품의 이중성은 이제 협업에서의 지휘 기능의 이중성으로까지 나아갔다. 이중성의 종착점은 과연 어디인가?

(102) 노동생산성은 단순히 숫자가 아니다

이것은 [heesang – 노동생산성을 2배로 만드는 것은] … 노동수단이나 노동방법 또는 이 두 가지가 변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따라서 그의 노동의 생산조건[즉, 그의 생산방식], 따라서 또한 노동과정 그 자체에 혁명이 일어나야 한다. 여기서 노동생산성의 상승이라는 말은 노동과정에 변화가 일어나 상품의 생산에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이 단축되며, 그리하여 주어진 양의 노동이 더 많은 양의 사용가치를 생산할 수 있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 자본론 1권, 12장, 426, 강조 추가

일정한 기술 수준 하에서 노동생산성의 증가에는 양적 제한이 따르기 때문에, 노동생산성을 순수히 그 양적 측면에서만 고찰하는 것은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노동생산성은:

여러 가지 사정에 의해 결정되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노동자들의 평균적 숙련도, 과학과 그 기술적 응용의 발전 정도, 생산과정의 사회적 조직, 생산수단의 규모와 능률, 그리고 자연적 조건에 의해 결정된다 – 49-50

4편에서 마르크스는 특히 2-4번째의 요인 – 과학기술, 생산과정의 사회적 조직, 생산수단의 규모와 능률에 관심을 쏟는다. 이것들이 노동과정에 변화를 아니 혁명을 일으키는 요인들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요인들은 노동과정의 질적 변화를 통해 노동생산성의 양적 변화를 야기한다 (혹은 노동생산성의 양적 제한을 제거한다).

지금까지 노동일의 연장에 의한 잉여가치의 생산을 고찰함에 있어 우리는 생산방식이 주어져 있고 불변인 것으로 전제했다. 그러나 필요노동이 잉여노동으로 전환됨으로써 잉여가치가 생산되야 하는 경우에는, 자본이 역사적으로 전해 온 형태의 노동과정을 그대로 계승해 그 노동과정의 계속시간을 연장하는 것만으로는 결코 충분하지 않다. 노동생산성이 증가할 수 있으려면 먼저 노동과정의 기술적, 사회적 조건, 따라서 생산방식 그 자체가 변혁되어야 한다 – 426, 강조 추가

1. 따라서 자본주의적 생산에서는 노동과정이 동시에 가치증식과정으로 나타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가치증식과정으로서의 노동과정의 존재가 노동과정 그 자신을 혁명적으로 변화시킨다. 가치의 멈추지 않는 자기증식은 노동과정의 멈추지 않는 자기변혁이다.

따라서 마르크스의 이중성은 초역사적 내용이 역사적 형태를 취한다는 존재적 이중성에 그치지 않는다. 도리어 지배적인 것은 역사적 형태가 초역사적 내용에 가하는 역습으로서의 이중성이며, 이 역습이 야기하는 변증법적 운동이다.

2. 노동과정의 기술적, 사회적 조건은 무엇을 뜻하는가? 앞에서 노동생산성의 결정 요인으로 “과학과 그 기술적 응용의 발전 정도”와 “생산과정의 사회적 조직”을 언급했는데, 기술적 조건은 전자에, 사회적 조건은 후자에 대응한다. 특히 14장에서 상세히 다루겠지만, 마르크스는 분업 하에서의 노동을 (협력적 노동이라는 의미에서) 사회적 노동으로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