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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정 욕구와 자기 비하

강남스타일의 세계적 대성공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애초에 세계적 대성공에 대한 기대나 인정 욕구 따위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냥 뮤직 비디오 유튜브 업로드로 끝. 싸이의 자연스러움도 마음에 들었다. 유창한 영어를 구사하지는 않지만,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편안하게 할 줄 아는 사람이다. 한국인 대 외국인의 대화가 아니라 사람 대 사람의 대화가 된다.

반대로 한식 세계화 같이 국가 브랜드나 국격(이건 정말 해괴망측한 단어다)과 관련된 기획에는 인정 욕구와 자기 비하가 깔려 있다. 선진국 여러분, 중진국 한국의 음식을 드셔보아요. 그리고 맛있다고 칭찬해 주세요. 칭찬을 받으면 저는 환호하고 기뻐할게요! 어서 선진국이 되고 싶어요! 컨텐트에 자신이 있으면 담백하게 정공법을 쓰면 된다. 뭔가 켕기는 것이 있고, 자신은 없고, 불안하니까 자꾸 이것저것을 더한다. 실속은 없으면서 조금이라도 인정을 받으면 자랑하느라 바쁘다.

오늘 이명박 대통령께서 Economist의 ‘태어나기에 가장 좋은 나라 (where-to-be-born)’ 컨테스트에서 한국이 19위 했다며, 한국이 살기 좋은 나라가 되어 자랑스럽다고 자랑하셨다. 이게 무슨 대단한 자랑거리라고 대통령에게 보고한 비서진이나, 그걸 청와대 신년인사회에서 그것도 한미연합사령관에게 자랑삼아 말하는 대통령이나 정말 창피스럽다. 이 사령관은 대통령 인격과 한국 국격을 얼마나 같잖게 보았겠는가.

나도 며칠 전 Economoist 홈페이지에서 이 기사를 읽었다 (여기). 19위는 고만고만한 등수라고 생각했다 (정말 애매한 등수다). 도리어 눈길을 끈 것은 Economist가 비슷한 조사를 25년 전인 1987년에도 했었고 (그러니까 1988년에 아이가 태어나기 가장 좋은 나라), 한국의 등수는 10위였다는 사실이다. 그때 한국의 경제규모는 지금보다 작았고, 정치적 자유와 문화 수준도 높지 않았다. 하지만, 일종의 문화적 역동성(philistine factor와 yawn index)에서 높은 점수를 받았었다 (아마도 이 조사는 87년 6월 항쟁 얼마 후에 이루어졌을 것이다).

영국 신문의 이런 류의 조사에 별다른 의미를 둘 필요는 없다. 하지만, 중요한 조사라고 생각한다면 일단 등수가 9등이나 떨어진 것에 대해 반성하고 대국민 사과성명을 발표하는 게 우선이다. 그리고 자료를 꼼꼼히 분석한 후에 어떻게 등수를 올릴 계획인지 연구해서 대통령 당선인에게 인계하기 바란다. 미래창조과학부에서 국가 주요 전략과제로 삼아 등수 올리기에 전력을 다할 것이다.

econ

(105) 노동생산성 특집2: ‘보몰효과’와 노동가치론

상품의 가치는 노동생산성에 반비례한다 – 자본론 1권 12장, 432.

얼마전 {이코노미스트}에는 윌리엄 보몰(William Baumol)의 책 “비용질병: 왜 컴퓨터는 점점 저렴해지는데, 의료비는 그렇지 않은가 (The Cost Disease: Why Computers Get Cheaper and Health Care Doesn’t)“에 대한 흥미로운 리뷰기사가 실렸다.

“왜 컴퓨터는 점점 저렴해지는데, 의료비는 그렇지 않은가?”에 대한 답은 간단하다. 한 산업의 일반적인 기술수준이 높아지면 상품 한 단위당 생산비용이 낮아지는데, 의료 산업에 비해 컴퓨터 산업의 기술발전 속도가 빠르기 때문이다. 컴퓨터(와 부품) 생산의 자동화 수준이 계속해서 높아진 반면, 병원의 간호사가 한 시간에 돌볼 수 있는 환자의 수는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반 다르지 않다는 점에 아무도 의의를 제기하지는 못할 것이다.

통계를 살펴보자. 미국 노동통계청의 통계에 따르면 1987년부터 2010년 사이에 컴퓨터 및 주변기기 산업의 총요소생산성은 연간 15.4% 씩 증가했다 (노동생산성은 보통 총요소생산성을 초과하여 증가한다). 그리고 미국정부의 공식 통계는 아니지만, 미국 의료산업의 노동생산성은 1987년부터 1995년까지는 연간 0.7%씩 하락했으며, 1995년부터 2001년까지는 연간 0.9%씩 상승했다.

보몰이 마르크스 정치경제학자였다면 아마 그는 여기에서 멈추었을 것이다. 마르크스의 노동가치론이 이 문제에 대한 너무나 명쾌한 설명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고전파 경제학자인 보몰에게는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가 있었다.

신고전파 경제학에 따르면 실질임금은 노동생산성과 연동하여 상승해야 한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여기 참조). 따라서 이론적으로는 지난 25년간 컴퓨터 생산노동자의 실질임금은 연간 15%씩 증가해야 했고 (25년간 33배. 허걱 –;), 간호사의 임금에는 거의 변동이 없어야 했다. 하지만 현실은 이론과는 너무 달랐던 것. 통계를 보나마나 컴퓨터 생산노동자와 간호사의 임금상승율에는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

보몰은 이것을 노동자를 둘러싼 자본가들의 경쟁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의료 산업의 자본가들이 (낮은 임금상승률로 인한) 간호사들의 퇴직을 막기 위해 임금을 대폭 인상해 주었다는 것이다 (같은 이유로 컴퓨터 산업에서의 임금상승의 폭은 생산성 상승 수준을 밑돌게 된다). 이러한 임금인상이 없었다면 간호사들은 컴퓨터 산업으로 대거 이동했을 것이고, 의료산업은 붕괴하고 말았을 것이다. 결국 의료산업과 같은 노동집약적 산업의 임금수준은 산업 내의 노동생산성 발전 수준을 뛰어넘는 비율로 인상될 수밖에 없었고, 이와 같은 노동비용의 증가로 인해 노동집약적 산업에서 생산되는 상품의 가격 역시 지속적으로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요약하면, 컴퓨터의 가격은 컴퓨터 산업의 노동생산성 증가에 따라 점진적으로 큰 폭으로 하락하지만, 의료비는 컴퓨터 산업의 노동생산성 증가에 기인하는 임금 상승으로 인해 지속적으로 증가한다. 보몰은 노동집약적 산업의 이러한 비정상적인 생산비용과 가격의 증가, 즉 ‘비용질병 (cost disease)’이 오늘날 미국의 가장 큰 사회문제로 꼽히는 과도한 의료비, 교육비 지출의 근본적 원인이라고 주장한다. 꽤 설득력 있다. 참고로 {이코노미스트} 지는 이를 “발전의 비용”이라고 부른다 (아래 차트를 보라).

비용질병은 좀더 거시적인 관점에서 다음과 같은 결과를 낳는다. 첫째, 제조업에서의 노동생산성의 상대적으로 빠른 속도의 증가는 경제 내의 제조업 취업자의 비중을 점진적으로 하락시킬 것이다. 둘째, 상대적으로 노동생산성 증가 속도가 느린 노동집약적 서비스업이 전체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높아질 것이다. 셋째, 경제 전반의 노동생산성이 하락함에 따라 경제성장 역시 둔화될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자본주의 경제가 궁극적으로 저성장 국면으로 진입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일단 제조업의 생산성이 급속도로 발전하여, 서비스업의 확대에 따른 노동생산성 저하 효과를 상쇄할 수 있다. 또한 제조업에서의 기술의 발전은 단순히 기존 상품의 생산비용과 가격을 하락시킬 뿐만 아니라 새로운 종류의 상품의 개발과 새로운 산업의 출현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에 설령 의료, 교육 등에 대한 지출이 늘어나더라도 소비자는 더 적은 비용을 지불하고 더 많고 다양한 종류의 재화를 구매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흔히 서비스업으로 분류되는 통신, 운송, 유통산업 등의 노동생산성은 제조업에 견줄 수준으로 발전해 왔기 때문에 서비스업 비중의 확대가 직접적으로 노동생산성의 저하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결국 보몰효과는 산업별 노동생산성의 불균등 발전이 신고전파 경제학에 야기하는 이론적 도전을 노동자들의 경쟁에 따른 임금의 균등화라는 방식으로 해결한 것이다. 산업 별 편차로 인한 임금상승율의 격차가 노동자들 사이의 경쟁을 통해 해소되기 때문에, 경제 전체의 실질임금상승율은 노동생산성 상승율에 연동해서 변화하게 된다는 것, 즉 신고전파 경제학의 보상임금론이 유효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경제전체로는 임금상승이 생산성 상승에 연동되어 경쟁균형이 존재하지만, 개별 산업 내에서는 이 둘이 괴리하기 때문에 경쟁균형이 존재할 수 없다는 황당한 결론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이런 어이 없는 이론이 여전히 현실분석과 미래예측의 도구로 진지하게 활용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현기증이 느껴진다. (물론 이것은 신고전파 경제학 이론체계의 내재적인 문제점 때문이다. 보몰과 같은 학자는 정말 존경할만하다).

마르크스의 노동가치론의 관점에서 살펴보면, GDP에서 교육비와 의료비의 비중이 점점 높아지고 있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교육산업과 의료산업의 노동생산성의 증가속도가 느리기 때문에, 교육서비스 상품과 의료서비스 상품의 가치가 대략 고정되어 있는 것과는 달리 제조업에서 생산하는 다종의 상품들의 가치는 지속적으로 하락하기 때문이다. 교육서비스 상품과 의료서비스 상품의 가격이 제조업 상품들에 비해 지속적으로 높아지는 것이다. 노동가치론에는 신고전파 경제학에 존재하는 임금의 균등화와 산업별 노동생산성의 불균등성 사이의 모순 같은 것은 없다. 노동력의 가치는 노동력의 소비를 통해 생산되는 가치와는 전혀 무관하기 때문이다. 노동자의 임금이 노동자가 생산하는 가치와 무관하게 결정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보몰효과는 신고전파 경제학의 이론적 파산과 노동가치론의 이론적 유효성을 보여주는 훌륭한 효과를 갖고 있다.

[200908] 경제학이 나아갈 길

내친김에… 앞서 글과 같은 매체에 실렸던 글 하나 더. 2009년 8월에 썼다. 아래 글에서 묘사된 <이코노미스트> 지상의 논쟁이 문득 떠오른다. 상당히 치열했고, 그런 점에서 우리가 본받을 만한 것이었다.

글의 말미에 ‘국가의 역할’에 대한 언급이 있는데, 적어도 이때만 해도 여러 논쟁들 중에서 국가의 역할과 위상이 과감하게 인정되는 분위기였는데, 최근들어 많이 바뀌고 있는 것 같다. 돌이켜보면, 2008년 9월 이후 엄청난 액수의 돈(물론 그 돈은 모두 국민의 세금에서 조달되는 것으로 보면 된다)이 망가진 금융시스템의 구출에 쓰였고, 또 이를 위한 ‘정당성’을 확보하는 과정에서 ‘금융시스템은 국가의 일부다'(당시 영국 총리였던 고든 브라운의 말)라는 이야기까지 나올 정도였다. 그러나 요즘 돌아가는 상황을 보라. 이를테면 최근 우리나라에 와서 논쟁을 벌이기도 했던 크루그만(Paul Krugman)과 나이올 퍼거슨(Niall Ferguson)을 보라. 크루그만이 대체로 케인스주의에 입각해서 국가의 역할을 과감히 인정하고 있는 반면, 퍼거슨은 (속류) 고전파적인 입장–이는 곧 케인스의 정의에 따른 고전파를 의미한다–에서 거의 ‘야경국가론’에 다름 아닌 논조를 유지하고 있지 않은가. (크루그만과 퍼거슨의 논쟁은 2008년 4월부터 시작되었는데, 논쟁 초기엔 퍼거슨도 국가의 역할에 심각하게 의문을 달지는 않았었다. 그의 입장은 시간이 가면서 묘하게 바뀌어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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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이 나아갈 길

1. 최근 <이코노미스트>가 현재의 범지구적 경제위기와 관련, 경제학을 본격적으로 문제삼고 나섰다. 이 주간지는 7월 18일자에서 “경제거품 중에서 경제학의 명성에 낀 거품만큼 장관을 연출하며 터진 것도 없을 것이다”라는 구절로 시작하는 일련의 논쟁적인 기사들을 무려 6면 이상에 걸쳐 냈다.

흔히 경제학자를 “세속의(worldly) 철학자”라고 하는데, 이를 비꼰 게 분명한 “다른 세상의(other-worldly) 철학자들”이라는 한 기사의 제목이 보여주듯, 이번 비판은 경제학의 비현실성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재밌는 것은 이 기사들이 경제학자들을 “수학적 모형화”와 “효율시장가설”의 맹신자로 묘사하면서, 그런 경향에 반대하는 크루그만(Paul Krugman)이나 스티글리츠(Joseph Stiglitz) 같은 또 다른 경제학자들의 견해에 크게 기대고 있다는 점이다.

이 기사들은 곧바로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고, 이 잡지는 3주 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로버트 루카스(Robert Lucas) 시카고대 교수의 반론기사를 이례적으로 한 면 가득 내보내기에 이르렀다. 동시에 같은 호의 “독자편지”란은 3주 전의 기사들과 관련된 의견들로만 채워졌다.

2. 현대경제학의 발상지답다고 해야 할까? 꼭 <이코노미스트>가 아니라도, 영국 종이매체엔 경제학의 잘못을 꾸짖는 기사들이 연일 끊이지 않고 있다. 이때 매체들은 단순히 여러 의견들의 전달자에 그치는 게 아니라 각기 꽤 명확한 “입장”을 가지고 다양한 의견기사들을 통해 적극적으로 논의를 이끌고 있다. 특히 문제의 성격상 가장 활발하게 논쟁에 참여하면서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질 수밖에 없는 <이코노미스트> 같은 경제지의 경우, 그 입장의 “배경”도 커다란 흥밋거리다.

<이코노미스트>는 자유무역 옹호, 보호주의 반대라는 기치를 내걸고 1843년에 창간됐다. 그 시작부터 “정치적”이었던 셈인데, 그 당시엔 대기근을 겪던 아일랜드에 식량원조를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할 정도로 자유방임 원칙에 충실했다. 1980년대엔 현재 신자유주의라 불리는 경제・정책이념의 화신인 레이건과 샛처 정부에 호의적이었다.

이와 같은 과거 행적을 놓고 볼 때, 앞서 소개한 <이코노미스트>의 경제학 비판은 언뜻 보면 그 기존입장에 배치되는 것 같다. 과연 이 잡지가 한때 자신이 옹호하던 신자유주의 경제학을 비판하고, 케인스주의자이자 오바마 지지자이며 “복지국가의 수호자”를 자임하는 크루그만 같은 인물에 의존하고 있는 까닭은 무엇인가? 좀 더 폭넓게 말하면, 현재 세계적으로 뜨거운 감자로 떠오르고 있는 전국민의료보험체계의 필요성을 대체로 인정하고 영국 국내정치에서는 보수당보다 노동당에 호의적인 모습을 종종 보이는 까닭은 무엇인가? [그러나 이런 입장은 2009년 하반기에 들어서면서 보수당 지지 쪽으로 급선회한다. 그리고 이런 입장변화를 주도한 것이 ‘황색언론’의 대명사 <더 선>(The Sun)이었다는 사실은, 그 입장 변화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말해주는 것 같아 매우 흥미롭다.]

3. 그 해답은 궁극적으로는 20세기 말에 닥친 이데올로기의 혼란과 재편에서 찾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요컨대 현실사회주의 붕괴는 기존의 좌파에 치명적인 타격을 날렸지만, 동시에 이 잡지가 떠받드는 고전적 자유주의의 이념적·실천적 공간을 넓혀놓았다는 것이다.

적어도 이번 경제위기를 전후해 제기된 이슈들, 즉 몇몇 거대기업들의 국유화나 중앙은행의 역할, 경제학의 향후 재편방향 등을 둘러싸고 <이코노미스트>나 <파이낸셜 타임스>―소유구조로 보면 이 둘은 거의 하나나 다름없다―가 내놓는 의견이 전통적으로 노동당 성향인 <가디언>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이는 것은, 이런 배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조금 오래된 우스갯소리를 하나 하자면, 한 번은 <이코노미스트>가 당시 이탈리아 총리후보였던 베를루스코니(Silvio Berlusconi)를 무자격자라고 비판했다가 그로부터 “이코뮤니스트”(Ecommunist)라는 무시무시한(!) 별칭을 얻기도 했다.

4. 이런 사정을 두루 생각하면, 현재 <이코노미스트>가 제기하는 종류의 것이 경제학 자체에 대한 내재적이고 심도 있는 비판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 같다. 하지만 학문이란 것도 결국엔 현실의 반영이고 그 다양한 이해관계들의 대립상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으니, 이는 한편 당연한 듯도 싶다.

그렇다면 역설적이게도, 경제학이 비현실적이라는 데서 출발했지만 결국 그것은 “세속의” 학문임을 보였다는 게 <이코노미스트>의 경제학 비판의 미덕이라고 해도 될까? 나아가 그것이 경제운영에서 국가의 역할을 크게 인정하고 있는 것도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런 분위기를 계속해서 끌고가지 못한 것은 좌파들이 크게 반성해야 할 부분이다.] (끝)

Economist on 중국 노동자/노동시장

<이코노미스트>에 재밌는 기사가 났다. 중국 노동자/노동시장에 대한 기사다(링크). “The rising power of the Chinese worker: In China’s factories, pay and protest are on the rise. That is good for China, and for the world economy”라는 제목만 봐서는 마치 중국에서 노동자들의 권익 향상을 반기는 것 같지만, 잘 보면 그렇지 않다. 어쩌면 이 기사가 전해주고픈 핵심적인 철학과 메시지는 다음과 같은 마지막 단락에 들어있는 것 같다.

캐임브리지 경제학자 고 존 로빈슨(Joan Robinson)이 언젠가 썼듯이, “자본가에게 착취당하는 비참함이란 착취당하지조차 못하는 비참함에 비할 바가 아니다”. 1962년에 씌인 이 재치있는 구절은 동남아시아의 과소고용(underemployment) 현실에서 자극받은 것이었다. 그때로부터, 자본은 그 지역과 그 북쪽의 거대한 이웃[중국]에서 노동자들을 분주히도 “착취”해왔으며, 이는 그들에게 크게 이익이 되었다. 이제 자본이 그들에게 투자할 때가 됐다.

1. 한 가지 재밌는 것은, “착취”라는 말에 따옴표를 침으로써 끝끝내 그 용어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는 것. 하지만 이건 뭐 아무래도 좋다. 나는 솔직히 저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아직까지 존재한다는 사실이 그저 경악스러울 따름이다. 멀쩡한 사람들이 굶어죽는 것을 보며 비탄에 가득차서, “차라리 저들이 자본에 착취라도 당했더라면 저보단 나았을텐데”라고 읊조리는 것이 곧장 “자본에 착취당하는 것은 좋은 것이다”라는 명제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2. “이제 자본이 그들에게 투자할 때가 됐다”란 또 무슨 소린가? 기사 전체를 보면 이는, 중국 노동자들도 이제는 “소비”를 해야 한다는 얘기다. 그러려면 그들의 소득수준도 높아져야 하고,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선 현재 불거지고 있는 노사갈등이란 필요악이라는 뉘앙스도 풍기고 있다. 이것이 위 기사가 말하는 자본이 노동자에게 하는 “투자”인가? 넌센스다. 이게 왜 “투자”인가? 노동자들이 투쟁을 통해 얻어낸 것이지!

자본은 그저, 주어진 상황의 (그 결과가 어떨지는 미리 정해지지 않은) 우연한 전개를, 즉 그런 사태의 추이에 따른 외적 강제를, 그 자신 내적 필연성으로 끌어안을 뿐이다. 위 경우, 애초 자본은 미래의 소비자인 노동자에게 “투자”한다는 의미에서 그들에게 “자발적으로 양보”한 것이 절대 아니다. 노동자들의 투쟁에 의한 강제, 또는 자본이 결코 의식적으로 지킬 필요가 없는 모종의 경제적/사회적 논리에 의한 강제(이를테면 노예라 하더라도 계속 굶긴 채 일을 시킬 수는 없다는 식의)를, 어쩔 수 없이, 그러나 동시에 그것이 마치 애초부터 거기에 있었고 또 따라서 자신은 그것을 자발적으로 받아안는다는 듯이 받아들일 뿐이다.

3. 사실은, 위 기사에서도 시사되는 바와 같이, 자본이 정작 어떤 “투자”를 하라고 요구하고 있는 대상은 바로 “중국 국가”다. 즉 그들은 자신들이 값싼 노동력을 안정적으로 공급받는 데 걸림돌이 되는 제반 사회제도들을 중국 정부가 재정비하길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엔 현재 시행되고 있는 중국의 이주에 대한 규제를 완화하는 것은 물론, 위 기사엔 나오지 않았지만 도시를 중심으로 한 제반 사회적 인프라 정비까지 포함될 것이다.

바로 이런 대목에서 끝끝내 드러나고야 마는 것은, 결국 “자본의 본성”이다. 즉 자본은 애초부터 노동자의 “복지”나 그들의 “소비수준” 내지는 “삶의 질”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값싸고 순응적인 노동력의 안정적인 공급“일 뿐. 그들은 오직 그것을 위해 중국 정부를 들볶고, 필요하면 이동도 하고 그러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사항들이 매우 잘 드러나 있다는 점에서, 아이러니컬하게도, 위 기사는 매우 좋은 기사, 한번쯤 읽어볼만한 기사다.

주주 자본주의 vs 이해당사자 자본주의

‘A new idolatry’, The Economist, Apr 22nd, 2010. [링크]
다시 말해, 주주가치를 강조하는 게 문제가 아니라 기업주가의 단기적 증가를 주주가치의 척도로 쓰는 게 진짜 문제다. 역설적이게도, 주주들 자신이 이와 같은 혼란을 퍼뜨리는 데 일조했다. 헤지펀드는 말할 것도 없고 많은 기관투자자들이, 말안듣는 기업메니저들을 기업 거버넌스와 임원봉급에 대한 논의의 장으로 끌어들이기보다는 단기이윤과 주가상승을 숭배했던 것이다.

(특히 미국에서) 경영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더 많은 권한을 주주에게 주고 또한 그들로 하여금 이런 권한을 행사하도록 북돋는다면, 그들은 물론 그들이 고용한 경영자들도 좀 더 장기적인 관점을 갖게 될 것이다. [. . .] “주주자본주의와 이해당사자 자본주의 사이의 전쟁이란 그저 말뿐인 전쟁에 지나지 않아요. 우린 실제로는 주주자본주의를 시도해보지도 않았기 때문이죠.” 미국 최대의 공공연금기금인 캘퍼스(CalPERS)의 기업 거버넌스 감시책임자 앤 심슨(Anne Simpson)은 말한다. “주주가치[라는 패러다임]을 포기하기보다는, 주주 자본주의를 제대로 한 번 해볼 기회를 줘보자는 거죠.”

주간지 이코노미스트에 재밌는 기사가 났다. 아마도 앞으로 한국경제를 어떻게 만들어나갈 것이냐, 다시 말해 한국경제의 ‘모델’에 대한 논의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주주 자본주의(shareholder capitalism)’니 ‘이해당사자 자본주의(stakeholder capitalism)’니 하는 말들이 전혀 낯설지는 않을 터.

대통령까지 나서서 “권력은 시장에 넘어갔다”라고 토로할 정도로 거대기업의 영향력이 막강한 오늘날, 기업의 주인이 누구냐는 물음에 대한 가장 교과서적인 대답은 바로 ‘주주’일 것이다. 재밌는 것은 현대사회에서 한 개인은 직간접적으로, 즉 직접적으로 주식을 구입하여 보유함으로써 또는 은행에 예치해둔 돈이 주식에 투자되는 등의 간접적인 방식을 통해 (때때로 자기도 모르게) ‘주주’가 되어있을 확률이 적지 않다. 주주 자본주의란 바로 이와 같은 현대사회의 변화를 반영해 나타난 개념으로, 주주가치를 극대화하는 게 곧 대중에 봉사하는 것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하지만 뭐, 말이 그렇다는 거고… 주주 자본주의의 현실은 우리가 이제껏 목격한 대로 그다지 명랑하지만은않았다. 명목상으로야 기업의 주인이라고 떠받들리던 개별주주들이 기업의 의사결정에 이렇다할 영향력을 미칠 수단은 실질적으로 전무했고, 주로 몇 년 단위의 계약으로 고용되는 이른바 전문경영자(CEO)들은 주주가치를 극대화한다는 명목으로 사실상은 단기적인 주가를 높이는 데만 혈안이 되어 결과적으로는 스스로 엄청난 액수의 스톡옵션을 챙기는 데만 관심이 있었다. 물론 이 과정에서 기업의 재무구조는 엄청나게 손상을 받았고, 그 결과가 바로 오늘날 우리가 겪고있는 경제대란의 전조였던 엔론(Enron)의 파산 등이었다.

거품이 터지고 위기가 현실화되기 전까진, 어쩌면 주주들은 결과적으로 이익을 봤다고도 할 수 있을 거다. 그러나 그런 과정에서 기업을 둘러싼 다른 이해당사자들, 즉 기업에 고용된 직원, 부품 공급처, 도매상, 소비자,이 기업이 위치한 지역 커뮤니티, 나아가 해당 사회 자체… 이 모두가 ‘주주가치’를 위해 희생되어야 했다. 이를테면 ‘주주가치’—여기선 ‘단기적 주가 극대화’라고 읽혀야 한다—라는 이상을 위해, 기업은 노동유연화를 단행했고 따라서 직원들은 고용불안정에 시달려야 했다. ‘이해당사자 자본주의’란, 바로 이렇게, 기업이란 단순히 주주의 것만이 아니라 그것을 둘러싼 이해당사자들의 공동체임을 인식하고, 기업이 극대화해야 하는 것은 따라서 주주가치가 아니라 이해당사자들의 공동의 이익이라고 보는 시각을 일컫는다.

‘주주 자본주의’와 ‘이해당사자 자본주의’는 흔히 영미형 자본주의와 독일형 자본주의라고 각각 불리기도 한다. 돌이켜보면 이 둘의 대립은 레닌(V.I. Lenin)이나 심지어 그 이전의 리스트(F. List)에까지 소급시킬 수 있겠지만, 우리나라에서 이 대립이 특히 학자들과 정책가들 사이에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1997년 이후의 IMF의 주도로 이뤄진 경제재편과 관련해서가 아닌가 싶다.

아… 나름 엄청난 논쟁이 있었다. 그렇다면 결과는? 뭐 대충 평행선을 달리다 끝난 것 같다. (-_-) 따지고 보면 우리가 흔히 ‘진보적’이니 ‘좌파적’이니 하는 입장들은 ‘주주 자본주의 vs 이해당사자 자본주의’라는 구도로는 포착되지 않는 게 일반적이지만, 굳이 이런 구도를 고수하자면 ‘이해당사자’ 쪽이 더 그럴싸해 보일 것이다. 그러나 이른바 ‘소액주주운동’도 ‘진보적’ 운동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현실을 두고 보면, ‘주주 vs 이해당사자’ 논쟁은 말하자면 크게 봐서 ‘진보 내부의’ 논쟁이었다고 보는 게 맞는 평가가 아닐까 싶다. 그러니까 결국 자기들끼리 치고받다가 끝났단 건데…… 물론 그러는 사이에, ‘주주 자본주의’를 통해 진정으로 이득을 보는 사람들, 이를테면 재벌들이 실속은 다 챙겼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 쳇.

아… 그러니까 주주냐 이해당사자냐 하는 논쟁과는 별개로… 세상은 ‘주주 자본주의’쪽으로 의연하게 흘러갔고, 그러다가 롱텀 케피탈 메니지먼트(LTCM)와 엔론이 넘어졌고, 각종 기업회계비리가 터졌으며, 그리고…… 공포의 2007년 왔다. 그리고 그로부터 2년반 뒤, 지난 주 위와 같은 《이코노미스트》 기사가 났다!

내용? 뭐 보시는대로. 저 ‘주주 자본주의’ 옹호자들의 기만적인 ‘눈가리고 아웅’을 보라. “주주가치를 강조하는 게 문제가 아니라 기업주가의 단기적 증가를 주주가치의 척도로 쓰는 게 진짜 문제다“라고? 너네 반대하는 쪽에서 그런 얘길 여태 안 했냐? 그걸 이제 알았어?

한편 여기서 재밌는 것은 캘퍼스(CalPERS)라는 곳이 ‘주주 자본주의’를 옹호하고 있다는 것. 캘퍼스는 미국에서 가장 큰 공적연금기금으로, 일부 진보적인 사람들은 바로 이런 대규모 공적연금 즉 결국엔 대중들의 푼돈(?)이 모여 이뤄진 큰 기금에 대한 통제권을 손에 넣음으로써 그것으로 기업의 주식을 사 궁극적으로 기업들을 통제하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바로 이런 생각에 의한 자본주의 재편 비전을 ‘수탁자 자본주의(fiduciary capitalism)’라고 부른다.

이쯤 되면 대충 위 기사를 둘러싼 배경그림이 그려진 듯? 에고 그만쓰고 집에 가야지… 총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