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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3] 인지자본주의론의 가치이론 이해 비판 (2)

{마르크스주의 연구} 제9권 제1호(2012년 봄)에, 나의 논문 “인지자본주의론의 가치이론 이해 비판: ‘비물질노동’의 개념화와 측정을 중심으로”가 실렸었다. 앞서 밝혔듯, 이번에 토론회를 준비하면서 이 논문을 간단하게 요약했는데, 다음과 같다(한글초록 및 기타 추가적 정보는 여기를 참조하시길).

[※ 추가(2014년 2월 12일): 원하는 분이 있어서… 전문링크]

먼저 이 글은 다음과 같은 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1. 인지자본주의론의 현재
2. 소극적 비판: 인지자본주의론의 가치이론 인식에 대하여
_(1) 인지자본주의론의 가치이론 비판의 개요
_(2) 인지자본주의론이 보는 가치이론: 모호하거나 단순하거나
3. 적극적 비판: ‘비물질노동’을 가치이론적으로 다루기 위한 메모
_(1) ‘비물질성’, 노동의 특정 유형의 성격인가 노동 자체의 성격인가
_(2) 단순 비교 대 역사적 형성
_(3) 가치이론의 기반: 측정가능성 대 비교/동등화
4. 맺음말

보시다시피 이 글에서 핵심은 2절과 3절이다. 따라서 아래 요약은 이 두 절에 집중되어 있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 1절에 대해 간략히 언급하는 것도 괜찮을 듯하다.

언뜻 보면 1절은 그냥 구색 맞추기 위해 들어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이 부분을 읽은 독자들은 아마도 조정환이 어떤 종류의 연구자인지를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으리라. 왜냐? 그는 (자신의 저서에서 밝히고 있듯이) 자신이 마치 ‘인지자본주의’에 대한 기존의 논의를 집대성하고 나아가 그것을 한걸음 더 진전시키고 있다는 듯이 묘사하지만, 실상 그는 자신의 저서에서 이제껏 관련 논의를 국내에 소개해온 선구자들을 단한번도 언급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이건 적어도 ‘예의’의 문제다), 관련된 세계적 논의들을 충분히 검토하지도 않았다(이건 적어도 ‘성실성’의 문제다). 이러한 행태로부터 드러나는 조정환의 ‘의지’는 무엇인가? 자신을 인지자본주의론의 대표주자로 내세움으로써 자신이 가진 기존의 지적 권력을 유지하려는 추악한 의지, 자신의 책을 팔아줄 독자들을 잃을지 모른다는 가련한 두려움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로써 나는, 조정환이 어떤 글에서 전희상에 대해 했던 부당하고 모욕적인 표현을 그에게 되돌려준다. 더구나 특히 이 후자의 경우엔, 조정환이 그리도 혐오하는, ‘경제적’ 내지는 ‘가치이론적’ 고려(!)가 개입되었으리라(자, 이렇게 경제학 또는 가치이론은 여러분들의 실생활 어디에나 있는 것이다. 부디 두려워 말길). 따라서 나의 비판은, 조정환에 대한 것이 아니라 조정환이 아주 작은 일부로서 포함되어 있는 ‘인지자본주의론’ 일반에 대한 것이었다.

(그러니까 조정환은 (당연한 얘기겠지만) 인지자본주의론의 전부도 아니고 대표주자도 아니다. 그렇다고 그가 한국의 (현실적 또는 이론적) 특수성을 상당히 반영한 논의를 내놓는 것도 아닌 것 같다. 나는 오히려 그가 인지자본주의론을 어떤 면에선 왜곡시키는 것 같기도 하다. 따라서 그가 인지자본주의론과 관련해서 특별히 주목받을 필요는 없다. 이건 그러니까… 김수행 교수가 공황론을 주로 소개했다고 해서 김교수의 입장이 공황론의 전부는 아닌 것과 같은 이치다. 당연하지 않은가? 실제로 과거엔 김교수가 공황론의 대표자라고 생각했던 사람은 별로 없었던 듯하다. 내가 알기론 김교수 자신도 그렇게 자신을 내세운 적은 없다. 그런데 요샌 조정환이 인지자본주의론의 대표주자인 것처럼 이야기되고 있다. 사람들이 그만큼 게을러졌거나, 조정환의 간이 배밖으로 나왔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이제 본격적인 비판을 보자. 애초 나의 주장은 두 부분으로 나눠어 있었지만, 다음에서는 이 둘을 뭉뚱그려 모두 네 개의 주장으로 요약했다.

1. 가치이론에 대한 지나친 단순화/오해. 이것은 마치 {자본론} 제1권 제1장을 읽으면서, “터무니없이 높은 명품가격”을 반박근거로 내놓는 것과 비슷한 것이다. 즉 여기서 상품가치는 매우 단순하게도 “그 상품을 만드는 데 드는 (사회적 평균) 노동시간”으로 규정되는데, 이른바 명품의 터무니없이 높은 가격은 이런 원칙을 거스르는 것 같기 때문. 이에 대해 가장 적절한 반응은, “제3권까지 한번 가봐라”라는 것이다. 무슨 말이냐면, {자본론}에서 제시된 이론은 매우 복잡한 구조를 가지고 있고 특히 가장 단순하고 추상적인 최소한의 규정에서 출발해서 점차 복잡하고 구체적인 영역으로 나아가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말해 가치와 가격의 괴리 문제는 계속해서 구체적 규정들이 덧붙여짐에 따라 점진적으로 고려된다는 것이다.

결국 인지자본주의론의 가치이론 기각은 마르크스의 가치개념/규정을 제1권 제1장 수준, 즉 매우 단순하고 추상적인 차원에서 파악한 채로 이뤄진다. 그러나 정작 그들이 이 기각의 근거로 삼는 현상들은 상당히 구체적이다. 이것은 그 자체로 부당할 뿐만 아니라, 그런 논리를 받아들이더라도 인지자본주의론자들은 그렇다면 가치이론의 기각이 왜 포드주의 시대(=노동과 자본 간의 “협약”에 기초해 종전보다 현저히 높은 임금수준이 실현된 시대)에 일어나지 않고 지금 일어난다는 것인지 대답해야 할 것이다.

2. 비물질성의 지위. 인지자본주의론에서는 비물질노동을 노동의 새로운 유형이라고 보는 경향이 있는데, 사실 비물질성은 노동의 일반적인 특성이라고 보는 게 타당하다. 다만 이제까지 가치이론에서는 그런 성격이 크게 부각되지 않았을 뿐이다. 앞서 밝혔듯 가치이론은 단순/추상에서 복잡/구체로 나아가는 열린 구조를 가지고 있고, 따라서 비물질성 문제도 논의의 어떤 단계들에서 차차 고려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사항에 주의를 기울일 계기를 줬다는 점에서 인지자본주의라는 문제설정은 긍정적으로 볼 수 있다.

3. 그렇다면 노동의 비물질성, 나아가 그러한 비물질성이 특히 두드러져 보이는 노동유형들을 가치이론적으로 어떻게 파악할 것인가, 라는 문제가 당연히 제기될 것. 인지자본주의론에서는 예컨대 과학기술종사자나 간병인의 노동과 전통적으로 상정되는 이미지를 가진 노동, 이를테면 볼트와 너트를 맞춰 조이는 기계공의 노동을 대비시키면서, 오늘날 자본주의에서는 전자가 두드러진다고 주장함(비물질노동의 헤게모니).

그러나 이런 식의 단순 병치/비교는 마르크스의 방법과 배치된다. 즉 특정 노동들의 병치/비교보다는 “역사적 형성”을 보는 것이 더 유의미한 파악법이다. 과학기술종사자나 간병인을 기계공과 대비시키면 누구라도 그 “인지적 아우라”에 취하기 쉽겠지만, 역사적 형성의 관점에서 보면 오늘날의 과학기술종사자나 간병인은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기계공의 모습에 가깝다(즉 자본에 고용되어 있다는 것). 이로부터 제기되는 이론적 문제는, 특히 현대자본주의에서 두드러져 보이는 과학기술노동의 그와 같은 역사적 형성—즉 자본주의화—이 현대자본주의의 재생산에서 어떤 역할을 하느냐는 것이지, 그것을 근거로 기존 이론을 폐기하는 것이 아니다.

4. 마지막으로, 어쩌면 가장 핵심적인 문제라고 할 수 있는 “측정” 자체에 대해. 인지자본주의론은 오늘날 노동을 둘러싼 여러 환경의 변화 때문에 상품의 생산에 드는 사회적평균노동시간을 측정하는 게 불가능함을 근거로 가치이론의 기반이 사라졌다고 본다. 두 측면에서 반론이 가능하다.

(1) 마르크스 자신도 오늘날 인지자본주의론자들이 제기하는 측정의 어려움에 대해 인지하고 있었다. 대표적으로 ‘노동일’을 다루는 {자본론} 제8장(불어/영어판 제10장)을 보면, 정해진 노동시간을 야금야금 늘리려는 자본가들의 작태들이 자세히 묘사되고 있다. 이를 마르크스는 “분 뜯어내기”라고 부른다. 물론 이런 작태들은 한 상품에 들어간 노동시간이 얼마인지를 애매모호하게 만들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를 자신이 방금 전에(=즉 제1장에서) 내놓은 “직접노동시간에 의한 가치규정” 명제를 철회하는 근거로 삼지 않았는데, 이는 인지자본주의론자들이 상상하듯 그러한 행태들이 마르크스 시대엔 별로 두드러지지 않아서가 아니라(실제로 매우 일반적인 현상이었다는 게 “노동일” 장에서 마르크스의 요지다), 자신의 가치이론의 체계상(마르크스의 가치이론의 ‘개방성’을 떠올릴 것!) 그것은 고려되더라도 뒤에 가서야 고려될 문제이기 때문이다. 실제 현실에서는 “초과착취”가 매우 일반적으로 이뤄지고 있지만, {자본론} 제1권(부터 제3권까지)에서는 “정상착취”만 전제되는 것과 같은 이치.

(2) 측정 자체에 대해 말하자면, 그것은 역사적, 정치적, 특히 기술적 사정과 복잡하게 얽혀있다. 기본적으로 그것은 시간에 대한 관념과 관련되어 있다. 이는 “노동일”이라는 표현 하나만 봐도 금새 드러난다. 마르크스는 이를 “하루 동안의 노동시간”이라는 의미로 쓰지만, 원래 노동일(working day)이란 노동하는 날, 그러니까 “휴일”의 반대말이었다(참조). 즉 노동의 단위가 “하루”였던 시대로부터 “시간”으로 바뀌어가는 사정을 “노동일”이라는 애매한 표현은 반영하는 것인데, 물론 이러한 변화가 기술적 뒷받침 없이 진행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즉 “노동일”이 아니라 “노동시간”이라는 개념이 유의미하려면 실제로 그것을 측정할 수 있어야 하며, 이는 손목시계의 광범위한 생산을 전제한다(물론 “(자동장치로서의) 시계”의 출현의 의의는 단순히 노동시간의 측정 이상이지만). 이렇게 보면, 오늘날의 “노동시간”이 19세기의 시계, 또는 시간관념으로는 측정이 불가능할지 몰라도, 오늘날의 정밀화된 시계, 시간관념으로는 측정 가능하고, 또 끊임없이 측정되고 있다.

다른 한편, 인지자본주의론은 직접적인 노동시간뿐 아니라 다양한 사회적 교류작용들도 오늘날엔 상품가치 형성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 또한 측정 불가능성 주장의 근거로 삼고 있다. 물론 오늘날 예컨대 블로그를 통한 광고가 상품가치 형성에 커다란 기여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일은 언제나 있어 왔다. 마르크스가 그것을 몰랐을까? 그가 살았던 중기 빅토리아 시대는 그야말로 “유행과 평판의 시대”였다. 그런데도 그가 그런 측면을 고려하지 않은 것은, 기본적으로 그의 이론의 미완결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부분적으로는 상품의 평판을 측정할 수단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니 구글 애드센스의 등장은, 인지자본주의론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오늘날엔 상품가치 형성에 평판이 주되게 참여한다는 뜻으로 읽기보다는, 드디어 “평판”이라는 것을 측정할 수 있는 수단이 등장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제 비로소, 말하자면 “평판의 정치경제학”을 본격적으로 제기할 기회를 얻게 된 것이다.

사실은 “측정”이 갖는 이러한 가변적인 성격 때문에 De Angelis and Harvie는 “측정이란 정치적 범주”라고 말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측정 문제의 본질은, 그것의 기술적 가능성이 아니라 상이한 노동들이 끊임없이 비교되고 또 그럼으로써 동등화된다는 사실 자체에 있다. 그리고 이 후자는, 사실 아담 스미스나 헤겔, 마르크스가 공통적으로 주목했던 근대사회의 구성원리이기도 하다.

5. 맺음말. 나의 글이 인지자본주의론에 대한 포괄적인 비판은 아니다. 그러나 인지자본주의론이 기존의 가치이론에 대한 비판, 특히 노동시간의 ‘측정 불가능성’을 주요 근거 중 하나로 해서 세워져있는 만큼, 이상의 비판이 인지자본주의론에 일정한 타격은 가하리라 본다. 나아가 이를 바탕으로, 가치이론적으로 좀 더 유의미한 방식으로 인지자본주의론이 제기하는 문제들에 개입하는 노력도 필요하다. (끝)

[※ 추가(2014년 2월 12일): 원하는 분이 있어서… 전문링크]

[후기/토론회] 인지자본주의에서 ‘가치’와 ‘주체’의 문제

계간지 {문화/과학}에서 주최하는, “제1회 문화과학 ‘북 클럽’ 논쟁: 인지자본주의에서 ‘가치’와 ‘주체’의 문제”라는 제목의 토론회에 토론자로 참여했다. 토론자는 나와 조정환 선생, 심광현 선생, 이렇게 셋이었다. (웹자보)

그러니까 애초 기획은, 조정환의 책 {인지자본주의}에 대해 나와 심광현이 ‘가치’와 ‘주체’라는 두 측면에 각각 주목해서 토론을 펼치는 것이었고, 내가 이해하기로는 그 책을 대상으로 두 명의 토론자가 주로 ‘공격’을 하고 저자인 조정환이 ‘방어’를 하는 형식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결과는? 일단, 심광현 선생께서 개인적인 사정으로 토론회에 못 나오시는 ‘사고’가 났다. 그래서 불가피하게 나와 조정환, 이렇게 양자구도로 갈 수밖에 없었는데, 전체적인 느낌은 그곳이 ‘토론회장’이었다기보다는 조정환의 ‘정견발표장’ 같다는 거였다. 물론 그렇게 된 데는, 토론자인 내 책임도 일정하게 있었음을 부인하진 않겠다.

다음은 나의 간단한 후기다. (물론, 매우 주관적일 수 있는 후기이며, 다른 사람들은 다르게 생각할 수 있겠다.)

*                      *                      *

예전에 무슨 토론회 자리(아마도 ‘맑스 꼬뮤날레’였던 것 같다)에서 한번인가 본 것 빼고는 조정환 선생이 말하는 것을 직접 본 적이 없다. 그만큼 그에겐 관심도 별로 없었고, 내가 그에 대해 가진거라곤 몇몇 이미지뿐이었다. 그 이미지, 그러니까 조정환 하면 평소에 떠오르던 이미지는 이런 거였다. 뻔뻔스러움, 무지, 무시, 열등감, 그리고—이게 백미인데—이상의 모든 악덕들을 커버해주기에 부족함이 없는 그 어떤 ‘영성적’ 아우라. (특히 이 마지막 것은 토론회에 왔던 누군가도 얘기했던 것이기도.)

이번 토론회를 거치면서 나는 위 이미지들을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그래서 내겐, 이번 이벤트가 (지루하긴 했지만) 무엇보다 ‘lots of fun’이었다. 하지만 그는 실질적으로 나의 문제제기에 단 하나의 제대로 된 답변도 내놓질 않고, 이리저리 피해다니길 일삼았을 뿐이다. 아니, 그는 자신의 답변을, 지금 자신이 집필중이라는 책에서 길게 내놓을 것이라는, 상당히 ‘민망한’ 책광고로 대신했을 뿐이다. 물론 나는 이 답변을 그다지 읽어볼 필요는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이번 토론 덕분에 더더욱.

하여튼 이번 이벤트는 결코 ‘논쟁적’이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이게 조정환 선생의 잘못이라 생각하진 않는다(그는 그냥 ‘그’였을 따름이다). 다름아닌 행사를 주최한 {문화/과학}쪽의 문제였다. 그들은 그 자리를 ‘토론회’로 만드는 데 완전히 실패했고, 특히 내겐 엉뚱한 질문을 내놓기도 했다(도대체 조정환이 말하는 ‘명령(가치)’가 뭐냐는 설명을 왜 나한테 요구하냐고! 저도 사실은 그게 뭔지 잘 모르겠어요.. 엉엉). 그들은 조정환 선생의 지루하기 그지없는 하나마나한 발언을 전혀 제지하지 않았고, 결과적으로 5시에 마치기로 예정되었던 토론회는 토론자 중 한 명이 빠진 데다가 ‘토론자들 간의 토론’이 거의 없었는데도 무려 6시 반이 되어서야 끝이났다. 덕분에 난 오줌보 터지는 줄 알았고. ㅎㅎ 그밖에 개인적으로 상당히 기분나쁜 일이 있었는데, 당시엔 바쁜일이 있어 그냥 나왔지만 이에 대해선 공식적으로 문제제기를 할 예정이다.

청중은 어땠는가? 사실 이번 토론회에 나선 유일한 이유는 바로 청중 때문이었다. 즉 그 자리에 직접 와주신 좁은 의미의 청중은 물론이고, 나중에 다른 어떤 형태로 그 토론회를 간접경험할 넓은 의미의 청중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그러나 플로어에서 나오는 질문들은 실망스럽기 짝이 없었다. 그 질문들을 내놓은 이들이 ‘가치’보다는 ‘주체’에 더 관심이 많았다는 것은 전혀 문젯거리가 아니었다. 문제는, 그들이 ‘가치’에 대해, 좀 더 일반적으로는 ‘경제’나 ‘경제학’에 대해 매우 단순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면서도, 그에 대해 전혀 거리낌이 없어 보였다는 것이다(예컨대, 조정환은 현재의 부동산거품을 ‘인지적 요소’에 따른 고평가라고 불렀다ㅋ). 이건 그러니까, ‘나는 경제(학)에 대해 관심이 없다’라는 정도가 아니라(이건 괜찮다), ‘경제(학)이란 게 결국 이렇지 않냐’라는, 경제학에 대한, 그리고 현재 전개되고 있는 세계경제/한국경제의 상태에 대한 매우 ‘강력한 판단’이었던 거다. 결국 마무리 발언에서 나는 다음과 같이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경제학을 공부하는 저로서는, 몇 안 되는 여러분들 앞에서조차 철학이니 정치니 하는, 제가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들에 대해 발언하는 게 정말 부담스러운데, 여러분들은 경제에 대해 너무도 쉽게 이야기하시는군요.” 물론 모든 청중이 다 이랬다는 건 결코(!) 아니다. 그러나 전체적인 분위기는 그랬다.

끝으로, 조정환이 내 질문에 답변을 아주 안 한 것은 아니라는 점은 밝혀야겠다. 내가 기억하기로는 그는 두 가지 답변을 했다. 답변의 적절성에 대해선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께서 판단해주시리라 믿는다.

(1) 인지자본주의론자들은 마르크스의 가치이론이 갖는 복합적인 성격, 복잡한 구조를 오해하고, ‘가치’의 문제를 모조리 {자본론} 제1권 제1장의 수준에서 이해하고 부당하게 기각한다는 내 질문에 대해: “나 {자본론} 열심히 읽었다. 옛날에 도망다니면서 얼마나 열심히 읽었나 모른다. 아마 내가 웬만한 경제학자들보다 {자본론}에 대해 잘 알껄?” (그렇게 잘 아는 사람이 왜 그러냐고요 ㅠㅠ 물론 이 얘길 그는 어려웠던 지난날의 감상에 젖어 매우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2) 인지자본주의론이 내놓는 인지/삶정치/비물질/정동 등의 노동들은, 처음엔 그저 고도로 복잡한 과학기술노동 정도를, 그러니까 ‘지식노동’을 의미했을 뿐이지만 점차 간병인, 가사도우미, 전화교환원 등도 포괄할 수 있도록 의미확장을 했다. 이와 같은 확장 자체가 상당히 심각한 이론적 무리수이기도 했지만, 그것을 통해 예컨대 ‘대졸/남성/20대 컴퓨터 프로그래머’와 ‘중졸/여성/50대 간병인’을 하나의 범주로 두는 것이 경제적으로 무슨 의미가 있는가? 또한 정치적/주체적 차원에서 보더라도, 중요한 것은 이런 식으로 ‘간병인’을 (무슨 꼭두각시 내세우듯이) ‘이론적 주체’로 만드는 게 아니라 ‘현실적 주체’로 만드는 일이지 않은가? 라는 내 질문에 대해: “무슨 소리냐! 나는 결코 간병인이 프로그래머보다 못난 사람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어떤 의미에선 그렇게 사회적으로 낮은 지위에 있는 분들이 더 훌륭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전형적인 논점흐리기! 졸지에 난, 근20년간 청소부, 가사도우미였던 내 어머니, 현재 간병인 일을 하시며 간밤에 환자들 똥오줌 치우는 내 가장 친한 친구의 어머니의 잠재력을 깔본 패악무도한 놈이 되었다ㅎㅎ)

이 정도면 코미디감도 못 된다. 요새 ‘개콘’, ‘코미디 빅리그’가 얼마나 재밌는데! (끝)

p.s. 내가 올초에 인지자본주의론에 대한 비판 논문을 {마르크스주의 연구}에 냈기 때문에, 내가 이번 토론회에 불려나간 것이다. 이번 토론회 때문에 그 글을 간단히 정리해봤는데, 조만간 그걸 여기 올릴까 한다..

마르크스: 경제학자인가 혁명가인가? (a reply to Amelano)

웹서핑 중에 요런 글을 방금 봤다. http://amelano.net/99306

(이 분, 재밌다. 마르크스의 작업은 ‘(정치)경제학’이 아니라 ‘(정치)경제학 비판’이라고 강변하면서도, 정작 자신의 블로그 해당 메뉴의 이름은 ‘정치경제학’으로 해놓고 있다. 본인도 헷깔리나보다.. 뭐한다고 그런 중요하지 않은 구별을 그리도 물고늘어지는지…)

 

허~~ 어처구니없구만. “맑스는 프롤레타리아 혁명가가 아니라 ‘노동가치론’을 전개한 경제학자로 안치되었다”라고 하는데, 누가 요새 마르크스를 경제학자라고 진지하게 생각하나? 오히려 요즘 그가 불려나오는 방식을 보라. 혁명가, 사상가, 철학자, 변태 등등.

Amelano Joe님께선 마르크스가 ‘경제학자’가 아니라 ‘혁명가’라고 하는데… 정작 나 같은 ‘좌파 경제학자’는 마르크스를 굳이 ‘경제학자’라고 규정하고픈 마음도 애초에 없다. 대체 누가 마르크스를 ‘굳이’ 경제학자라고 강변하는지 그 이름 좀 알려주셨으면 좋겠다. 그러나 정말 재밌는 것은, 마르크스의 경제학적 사상(그것을 ‘정치경제학’이라고 부르든 ‘정치경제학 비판’이라고 부르든)에 착안해 현대경제(학)을 비판하는 작업을 하는 ‘경제학자’들 중에는, 적어도 내가 아는 한에선, 그가 ‘혁명가’이기도 하다는 점을 부인하는 이가 없다는 점이다. 실상이 이런데도 왜 우리의 Amelano님께선 저다지도 편협하실까.

반면, 마르크스를 혁명가라고 부르는 것이야말로 (더구나 ‘굳이’ 경제학자가 아니라고 우겨대면서) 요즘엔 특히 반동적여 보이기까지 한다. 따지고 보면, 혁명이라는 말만큼 우리 시대에 남용되고 있는 용어가 있을까? ‘혁명’은 더이상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안타깝게도 그렇게 되었다. 요새는 말이다, 박원순도 혁명을 일으키고시골의사도 (심지어 전국의 대학을 순회하면서!) 혁명을 말하며, 아기들이 먹는 이유식에도 혁명이 벌어지는 세상이다. 이런 상황에서 마르크스가 19세기의 다른 ‘혁명가’들인 마치니나 쇼팽, 러스킨 같은 이들과 동류로 취급된대도 이상할 게 없는 거다(뭐, 이런 이들을 얕잡아보는 건 결코 아니다).

그러니 Amelano님들은 애꿎은 경제학자들 욕하지 마시고, 자신들과 똑같이 ‘혁명’을 말하는, 그러나 누가 봐도 Amelano님들의 ‘혁명’보단 훨씬 더 많은 인기를 끌고 있는 시골의사나 이유식 만드는 소아과 전문의하고 ‘혁명’에 대해 논쟁을 하는 게 낫지 않을까?

사실 우리 ‘좌파 경제학자들’도 할일 많다. Amelano님이 그렇게 부르짖는 ‘경제학 비판’—‘경제학’이 아니라—하느라고 말이다. (아실랑가 모르겠는데) {The Economist}라는 영어로 된 잡지가 있는데, 때때로 기분 나빠도 우린 이런 것도 읽어야 한다. 물론 이런 ‘할일’에는 Amelano님 같은 분들이 내놓는 ‘(경제학적 또는 정치경제학적 또는 정치경제학 비판적) 무개념’들을 시정하는 것도 있는데, 이런 일이 제일 맥빠지고 제일 고된 일이다. 까놓고 말해, 경제(학)에 대해 잘 모르잖아요? 나름 노력하는 거 알겠는데, 존중좀 해주면 안 되겠니?

생각해보면… 그렇다. Amelano님께서 왜 저리도 ‘경제학자’들을 싫어하는지 알만도 하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앞에서 내비쳤듯이, 이봐요, 그건 선생님 세대의 문제입니다. 스탈린주의 정치경제학 교과서… 뭐 이런거 생각하시며 치를 떠시는 것 같은데요, 요샌 그런 거 아무도 안 본다니까요. 네?! 그러니까 그런 책만 안 보는 게 아니라, 아예 경제학 공부를 안 해요. 맨날 ‘혁명’만 부르짖죠!

그리고요, 세상 그렇게 만만한 거 아니잖아요? 선생님께서 {인지자본주의}인가 뭔가 하는 ‘잉크와 종이 낭비적’ 책(뭐 그리 글자가 크고 행간/자간이 넓은가요?)을 쓰시고, 그것도 모자라 일곡 유인호 선생—선생님께서 그렇게도 경멸하는 ‘경제학자’셨죠!!—을 기리는 학술상(이랑 돈)도 받고(사진이… 기분 많이 좋으신듯.. ㄱ-;;) 하는 동안에, 어떤 사람들은 열심히 경제학 공부해서 정부정책 비판도 하고 더러는 그 정부 안에 들어가서 좋은 정책도 만들고 그러는 겁니다. 예를 들자면, 우리나라의 좋은 의료보험제도도—물론 이게 ‘경제학자’의 작품은 아니지만—그렇게 만들어진거예요.

끝으로… 제목에 있는 질문에 대답은 이제, 아니 이런 시답잖은 글이 아니라도 누구나 다 알 거다. 마르크스는, 굳이 따진다면 둘 다다. 하지만 요즘 세상에 저런 질문은 Amelano님이나 제기하는 것이다. 좀 구리다.

잡다구리 (20111115) 정신차리기, 독서, 겨울의 문턱

– 며칠전 약간 긴 글을 나름 공들여 쓴 것에서 드러나듯, 요새 드디어(!) 정신을 좀 차리고 있다. 한동안 그간 챙기지 못했던 일들(이메일 정리 등등)도 정리했고, 해야하지만 눈감고 있었던 일들도 처리했다. 좀 더 분발할려고 한다.

 

– 그런 ‘분발’을 위해 —꼭 그래서만은 아니지만— 책을 하나 새로 읽어볼라고 한다. 제목은 {인지자본주의}. 시간이 많진 않지만, 그래도 열심히 읽을거다. 뭐… 저자로부터 작은 “굴욕”을 당하기도 해서 좀 창피하기도 하고…;;; ㅎㅎㅎ (“정작 {인지 자본주의}를 읽어보지 않았다는 사람(‘EM’)조차“. 이에 대한 나의 소심한 해명(?)은 여기)

아무리 시간이 없다 해도…!! 그래도 밥은 먹고 똥은 싸지 않는가. 따라서 주로 밥먹으면서………는 좀 힘들거 같고 똥싸면서 책을 읽게될 것 같다. 여기다가 종종 정리해둘까도 생각중이다.

 

– 오늘은 좀 으슬으슬하다. 간간히 불어오는 찬바람을 맞고 있자니, 시기가 좀 이르긴 하지만, 오늘따라 Janis Ian의 노래 ‘In the Winter’가 생각난다.


(위 영상을 유튜브에서 열면 게시자의 설명란에서 가사도 볼 수 있다.)

연인과의 이별을 배경으로 하는 상당히 슬픈 노래이지만, 절정부분에서 “겨울이 되었으니 / 추위에 대비해 여분의 담요를 준비하고 / 낡아가는 난로를 손봐야지” 하는 대목에서는, 불행 중에도 약간은 기운을 차리는 모습이 엿보여, 들을적마다 살며시 미소가 나오는 곡이다.

이따가 집에 가서 밤에 다시 들어봐야겠다..

 

조정환 선생의 ‘인지자본주의’ 출간에 부쳐

조정환 선생께서 『인지자본주의』라는 책을 내셨다고 한다. 네그리•하트의 『제국』이 나온 것이 2000년이니까, 그로부터만 쳐도 10년이 넘는 기간에 걸친 연구와 논쟁의 성과라고 할 수 있겠다.

책을 안 읽어봤지만 그간 알고 있던 그의 주장들로 미뤄 내충 무슨 얘길 하려는지는 짐작이 간다. 다른건 관두고, 나는 이 분이 자신의 주장을 마르크스와 관련짓는 것이 심히 못마땅스러울 뿐이다. 만약 그러지만 않았다면, 그는 전혀 나의 관심 바깥에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특이한 것은 그가 ‘인지자본주의’라는 테마를 마르크스와 관련시키기 때문이지, 만약 ‘인지자본주의’ 자체에 대해 말한다면 이론적으로나 실증적으로나 조정환 선생보다 훨씬 정치하고 앞선 논의들을 내놓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말해, 널리고 널렸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가 마르크스를 올바르게 제시하고 있는가? 절대 그렇지 않다. 마르크스의 가치론을 그는 전면 부정하기 때문이다. 《경향신문》의 표현을 빌면, 그는 “노동자를 더 고용해 그들이 창출하는 ‘잉여가치’에서 자본을 축적한다는 마르크스적 해석이 통하지 않는다”라고 보기 때문이다(링크). 이런 해석에 대해, 그간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수많은 반론들을 내놓았고, 그 대표적인 논자가 경상대의 정성진 교수다. 지금은 이미 오래전 일이지만, 그의 노력은 눈물겨울 정도였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하다. 어째서 조정환 선생은 마르크스의 핵심 명제를 부정하면서도 스스로 마르크스주의 진영에 이름을 올리는 것을 허용하는 것일까? 기본적으로 조정환 선생께서 위와 같은 ‘과감한’ 해석을 내놓는 것은, ‘세상이 바뀌었다’라는 판단 때문이다. 이를, 《한겨레》의 기사는 “상업자본주의, 산업자본주의에 이은 제3기 자본주의로서의 ‘인지자본주의’”라고 표현했다(링크). 무슨 얘기냐면, ‘어차피 이런 것에 대해 마르크스는 전혀 몰랐을 테니까’라는 ‘알리바이’를 조정환 선생은 자의적으로 마르크스에게 부여한 뒤, 그는 점잖게 ‘그래도 나는 마르크스주의자’라고 선언하는 결연함을 보이는 것이다. 음, 멋지다…

하지만… 마르크스가 그런 것을 몰랐다고 식의 발언은 매우 조심스럽게 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우리는 역사를 다룰 때 지극히 신중해야 하는 것이다. 당연히 마르크스는 iPhone에 대해 몰랐을 것이다. 하지만 iPhone은 8년 전 돌아가신 우리 아버지도 몰랐다. 그러나 ‘iPhone을 몰랐다’라는 말과 이를테면 ‘잉여가치가 더 이상 노동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지식에서 나오는 세상에 대해 몰랐다’라는 말은 전혀 다른 것이다. 과연, 마르크스가, 지식이 가치의 생산에서 행하는 중요한 역할에 대해 몰랐을까? 이것은 마르크스만에 대한 얘기는 아니다. 즉 19세기 중반 빅토리아 시대 영국의 선진적인 지식인들이 ‘지식’이라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었을까? 이에 대해 지금으로선 다음과 같은 당시 《The Economist》의 한 구절을 인용하는 것으로 족하다.

“물질세계에 대한 지식과, 그것을 노동에 의해 적용시키는 기술부의 원천이다” (The Economist, August 30, 1851). (강조는 나의 것. 여기서는 ‘노동’이 아니라 ‘지식knowledge’과 ‘기술skill’이라는 단어가 핵심이다.)

혹시 조정환 선생은, 위와 같은 구절에 대해 마르크스가 동의했다고 생각하시진 않겠지? 참고로, 《The Economist》는 마르크스가 그렇게도 혐오했던 당시의 경제학자들, 즉 이미 자본가들의 하수인으로 전락한, 과학자라기보다는 이데올로그에 지나지 않는 집단에 의해 ‘자유무역을 증진시키기 위해’ 창간된 잡지다.

(물론 내 얘긴, 마르크스가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었다는 게 절대 아니다. 세상이 바뀌었다면서 ‘가치론’이 유효성을 잃었다고 하는 것은 매우 성급한 태도라는 것이다. 이미 이 블로그에서도 ‘가치론’의 중요성에 대해선 몇 차례 말한 바 있다. 조정환 선생이 말하는 것과 같은 ‘세상의 바뀜’은 가치론에 대해 새로운 과제를 제기하는 것이지—물론 위에서 말한 대로 흔히 사람들이 ‘새로운 과제’라고 여기는 것들이 실제로는 그다지 새로운 게 아니다—결코 가치론을 부정하는 근거는 되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