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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가치이론의 한계와 가능성: 왜 가치이론은 늘 승리하면서도 변화하지 않는가? (A personal note)

어찌어찌해서 제6회 맑스코뮤날레에서 발표를 하나 했다. 이번 행사는 (몇 개의 전체회의에 더해) 참여하는 각 단체에서 독립적으로 세션을 꾸리는 형식이었는데, 나는 사회경제학회 세션에서 발표를 맡았다(링크).

링크된 페이지에서 보다시피 내 발표의 제목은 ‘가치와 현대자본주의’. 제목만 봐서는 뭘 하려는지 드러나지 않을텐데, 사실 그건 나 스스로 뭘 말해야 할지 잘 몰랐기 때문이다. 다른 두 개의 발표들이 나도 최근에 쓴 바 있는 ‘인지자본주의론’에 대한 것이어서, 나도 거기에 숟가락을 얹을까 하고 잠시 생각도 했으나 그냥 접었다. 어쨌든 애초 주어진 제목에 맞게 결국 발표는 했고, 지금와서 돌이켜보면 나름 잘됐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언제고 하고픈 얘기였고, ‘맑스코뮤날레’는 그러기에 적당한 자리였다는 얘기다. 물론 이것은 끝이 아니고 시작일 뿐이다.

다음은 발표에 앞서 준비한 메모를, 당일 발표장의 분위기와 토론내용을 참조해 업데이트시킨 것이다.

*                                 *                                 *

1.
마르크스(주의) 정치경제학은 가치이론으로 자본주의 경제를 설명하고자 한다. 그런데 무엇보다 이 문장 자체의 의미를 올바로 이해하는 게 중요하다. 가치이론(value theory)이란 기본적으로 자본주의 경제에 대한 이론으로서, 스미스나 리카도의 이론도 가치이론이라고 부를 수 있다. 한편 마르크스는 그 특유의 방법을 통해 그들 이론의 불충분함을 밝혀냈고, 이를 통해 그것이 근거해 있는 자본주의 경제의 모순을 드러냈다. 따라서 그는 가치이론의 비판자라고 불리는 게 타당하다. 하지만 오늘날 경제학은 마르크스의 표현대로 지극히 ‘속류화’되었으며 주류경제학에서는 누구도 자본주의 경제를 다룸에 있어 ‘가치’에 기반을 두지 않는다. 이러한 상황에서 마르크스에 근거한 경제논의를 ‘가치이론 비판’이라고 부르는 것은 적절치 않으며, 오히려 현재의 주류경제학 및 그와 방법론적 기초를 공유하는 비주류경제학들에 대해 자신을 차별화한다는 의미에서 나는 마르크스적 경제이론을 일컫기 위해 ‘가치이론’, ‘가치분석’, ‘마르크스(주의) 정치경제학’ 등의 용어를 쓴다. 바로 이것이, ‘마르크스(주의) 정치경제학은 가치이론으로 자본주의 경제를 설명하고자 한다’라는 문장의 의미다. 그러니 이를 두고, ‘마르크스는 경제(학)을 비판하려고 했지, 또 하나의 경제학을 만들려고 한 것이 아니다’라는 식으로 비아냥대는 것(한국에서 대표적으로 조정환, 이진경 등이 있다)은 아무 쓸 데 없는 것으로, 경제학의 그간의 발달사와 현재상태에 대해 완전히 무지함을 드러내는, 누워 침 뱉기일 뿐이다.

2.
‘가치이론의 위기’가 회자된 것이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다. 특히 최근엔 그것이 디지털화된 현대사회를 다루는 데 무력하다는 측면에서 제기되는 것 같다. 디지털/정보상품을 다루는 데도, 그러한 상품이 만연한 사회에서 성행하는 새로운 노동형태들을 해명하는 데도 무력하다는 거다. ‘인지자본주의론’은 그러한 문제제기 중에서 최근 떠오르고 있는 유력한 대안이다. 어쨌든 그런 비판, 일견 타당한 면 있다. 하지만 기존의 이론이 새로운 현상을 다루는 데 어려움을 갖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그러한 어려움을 들어 기존의 이론을 비판하고 오직 자신만이 새로운 상황을 설명해낸다고 주장하는 이론들도 언제나 있어 왔고. 그러나 이런 경우, 논의가 진행되다 보면, 새로운 주장들은 설익은 채 제출된 것이었음이 드러나곤 한다. 실제로 최근 다수의 연구들이 보여주고 있듯이, 가치이론은 오히려 오늘날 새로운 현상들을 다루는 데 있어서도 분석적으로나 비판적으로나 탁월함을 입증하고 있다.

내가 보기에, 그러한 탁월함의 매우 중요한 한 근거는, 가치이론이 예의 그 ‘새로운 현상들’을 반성적으로 다룬다는 데서 나온다. 그런 과정에서 ‘새로움’들은 침잠되고 다져져 ‘낡음’ 속으로 젖어들어가고, 동시에 전에는 자각되지 못한 채 잠들어있던 새로움의 싹들이 낡음 속에서 눈을 뜬다. 즉 기존 이론의 막다른 골목으로 여겨졌던 새로운 현상들이 사실은 그러한 이론에 의해 별 문제없이 설명되더라는 것이다. 물론 이때 동시에 기존의 이론도 일정한 발전을 이룬다. 왜냐하면 ‘새로운 현상들’이 새로운 것은 대체로 기존의 이론이 포착은 했으나 본격적으로 다루지 않았던 그 대상의 면모들이기 마련이어서, 이제 그 면모들을 다룸으로써 이론이 더욱 세심해지기 때문이다. (참조: 김공회, 「인지자본주의론의 가치이론 이해 비판: ‘비물질노동’의 개념화와 측정을 중심으로」, {마르크스주의 연구} 제9권 제1호, 2012. 링크)

이와 같은 ‘이론의 반성’은 사람들이 일상생활에서 행하는 반성과 별로 다를 바가 없다. 이를테면 이성, 즉 반성하는 능력을 가졌다고 해서 모두가 반성을 (의식적으로) 하는 건 아니다. 이론도 그렇다. 반성을 잘 하는 이론, 반성하는 것이 이론 그 자체의 논리에 의식적으로 각인된 이론, 그런 이론이 좋은 이론이다. 마르크스적 가치이론은 바로 그러한 이론이며, 이런 성격은 마르크스 특유의 방법에서 유래한다.

3.
여기에서 한 가지 재미있는 논점이 나타난다. 즉 사정이 위와 같다면, ‘새로운 현상들’과 관련해서 높게 평가돼야 마땅한 가치이론의 힘은, 그것이 몇 가지 올바른 방법론적/원칙론적 기반들을 확보하고 있다고 저절로 생기는 게 아니고, 그것이 기존의 것들을 충분히 다뤄주고 있을 때에만 나오는 것이 아니겠냐는 것이다. 원래 있었던 것들, 예를 들면 ‘노동’에 대한 만족스러운 논의(최소한의 ‘컨센서스’)도 갖춰지지 않는 상황에서 ‘새로운’ 노동형태를 다루겠다고 나서는 것, 또는 다루지 못한다고 비난하는 것은 어불성설 아니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이렇게 물을 수 있겠다. 과연 가치이론은 국가, 노동, 소비 등과 같은 자본주의 경제의 기본적인 범주들에 대한 충분한 이론들을 갖춰놓고 있는가?

이러한 고찰은 왜 이제껏 가치이론에 대한 (조절이론, 네그리/하트의 ‘제국’론, 최근의 인지자본주의론 등과 같은) 문제제기들이 그렇게 성공적이지 못했는지, 그리고 동시에 그러한 문제제기들이 가치이론의 발전을 낳는 데 왜 그렇게 무기력했는지에 대한 (부분적인) 대답을 우리에게 제공한다. 한편으로 그러한 문제제기들은 가치이론이 가지고 있는 것과 같은 이론적 수준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것들의 실패는 처음부터 예정돼 있었다고 볼 수 있지만, 다른 한편으론 가치이론 내부엔 그들의 도전을 ‘생산적으로’ 받아안아낼 만한 ‘컨텐츠’가 없었던 것이다. 이를테면, 어떤 의미에서 인지자본주의론을 노동이 파편화되고 불안정화된 현대의 상황에 대한 문제제기—비록 ‘노동’이나 ‘가치’와 같은 개념들을 그릇되게 이해하고는 있지만—로 볼 수 있을텐데, 가치이론은 그러한 개념들을 적어도 추상적인 차원에서는 올바르게 견지하고 있지만 이를 막상 인지자본주의론이 주목하는 현대의 특수한 상황에서 포착해내는 데 필요한 구체성 내지는 매개개념들은 갖추고 있지 못하다는 얘기다.

바로 그래서, 인지자본주의론과 같은 문제제기들이 가치이론과 관련해서는 언제나 매우 추상적인 개념의 영역에서만 의미있는 논쟁지점을 형성할 수 있었던 것이고, 반대로 가치이론이 그러한 이론들을 격퇴할 수 있었던 것도 언제나 그러한 극히 추상적이고 단순한 영역에서였던 것이다. 이러한 싸움의 결과는 언제나 가치이론의 승리—이것이 대다수의 관객에게도 ‘승리’로 받아들여졌느냐는 또 다른 문제겠지만—였지만, 그런 싸움들 이후 가치이론은 자신의 영역을 넓히기보다는 오히려 기존의 성벽을 더욱 공고하게 쌓는 쪽으로 나아갔다. 그런 의미에서 이것은 진정한 승리가 아닌 것이다. 최근 인지자본주의론과의 싸움에서도 가치이론은, 전자가 틀렸음을 입증한 것 외에 어떠한 성과를 스스로 거두었는가?

처음에 가치이론, 즉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 비판은 ‘주류 가치이론’에 대한 비판에서 출발했다. 그리고 그 비판의 근거를 가치이론은 현실에서 찾았다. 다시 말해 초기에 가치이론은 그 발전의 자양분을 현실로부터도 얻었고 이론 세계에서의 논쟁을 통해서도 얻을 수 있었단 얘기다. 그러나 글의 서두에 지적한 대로, 오늘날 가치이론은 이론의 세계에서 섬처럼 고립돼 있다. 주류경제학이 가치이론에 말을 걸지도 않지만, 후자도 전자에게 더이상 시비를 걸지 않는다. 이는 어쩌면 둘 사이에 공유되는 이론적 지반의 축소에 따른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더욱 애석한 일은 가치이론이 현실로부터 자신의 발전 근거를 취하는 데에도 점차 소홀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 파괴적인 결과를 우리는 오늘날 목격하고 있다. 재벌, 비정규직, 복지(국가), 공공부문・요금, 자영업 등에 대한 가치이론의 이야기를 거의 들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이러한 것들에 대한 개념화 없이 어떻게 한국의 신자유주의를, 나아가 세계 자본주의를 논할 수 있겠는가?

4.
요컨대, 가치이론은 그 비상한 방법론적 원칙 덕분에 엄청난 이론적 가능성을 확보하고 있지만, 그 가능성을 실현시키려는 노력에는 상대적으로 소홀했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받아들이기에 따라선 ‘건전한 문제제기’일 수 있는 것들조차 수용해낼 포용력도 가치이론에는 남아있지 않게 되었다.

그럼 어떻게 하면 가치이론이 그러한 포용력을 회복하고 자신의 가능성을 최대한 실현시킬 수 있을까? 나는 당장 현실과의 치열한 대결에 나서는 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다고 본다. 물론 이 말이, 가치이론에 종사하는 모든 이들이 실증주의자가 되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보다는, (인지자본주의론과 같은 문제제기에 수동적으로만 반응할 것이 아니라) 현실의 운동으로부터 동력을 부여받아 이론 발전의 계기들을 스스로 만들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한동안은 자신과의 고독한 싸움일 수도 있다. 어쩌면 이는 그간의 (절반은 외부에서 강요됐고 절반은 스스로 자초한) 고립의 필연적 결과다.

한편 이론적 고립의 결과 가치이론은 그 비판적 성격을 상당 정도 상실할 수밖에 없었다. 비판의 ‘대상’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에의 개입적 연구가 어느 정도 쌓이고 나면, 가치이론은 오히려 바로 그 현실의 장에서 여타 이론들과의 대결—진검승부(!)—의 기회들을 얻을 수도 있을 것이며, 동시에 그것이 애초에 가졌던 비판적 성격을 회복할 수도 있을 것이다. (끝)

문화/과학 편집위원회의 ‘입장’에 대한 입장

나는 지난 6월 20일 {문화/과학} 측의 요청을 받고 한 토론회에 패널로 참석했던 적이 있고, 이미 이에 대해서는 이 블로그에도 다음과 같이 일종의 ‘후기’를 남기기도 했다.

[후기/토론회] 인지자본주의에서 ‘가치’와 ‘주체’의 문제
(참조) ‘날파리’ 친구들에게

위 ‘후기’에서 예고했듯이, 나는 토론회에 대해 {문화/과학} 측에 이메일을 통해 ‘공식적인’ 문제제기를 했고, 얼마 전에 그에 대한 답변을 받았다. 결론부터 말하면, 토론회가 부실했다는 것을 제외한 나의 문제제기는 거의 수용되지 않았고, 나는 내가 판단하기에 온당하지 않을 뿐 아니라 {문화/과학}과 같은 잡지의 편집위원회의 ‘공식적인’ 의견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반응을 받았다. 이에 나는, ‘사건’의 경위를 이 블로그를 통해 간단히 공유하고자 한다.

1. 토론회

토론회가 어땠는지는 앞서 ‘후기’에서 대충 밝혀놓았다. 다음은 ‘후기’의 일부다.

하여튼 이번 이벤트는 결코 ‘논쟁적’이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이게 조정환 선생의 잘못이라 생각하진 않는다(그는 그냥 ‘그’였을 따름이다). 다름아닌 행사를 주최한 {문화/과학}쪽의 문제였다. 그들은 그 자리를 ‘토론회’로 만드는 데 완전히 실패했고, 특히 내겐 엉뚱한 질문을 내놓기도 했다(도대체 조정환이 말하는 ‘명령(가치)’가 뭐냐는 설명을 왜 나한테 요구하냐고! 저도 사실은 그게 뭔지 잘 모르겠어요.. 엉엉). 그들은 조정환 선생의 지루하기 그지없는 하나마나한 발언을 전혀 제지하지 않았고, 결과적으로 5시에 마치기로 예정되었던 토론회는 토론자 중 한 명이 빠진 데다가 ‘토론자들 간의 토론’이 거의 없었는데도 무려 6시 반이 되어서야 끝이났다.

사실 토론회 전에, 정확히 말하면 하루인가 이틀 전에 토론회 대본이 내게 전해졌다. 그러나 토론회는 전혀 그 대본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물론 이것이 그 자체로는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대본에서 벗어난 것이, 참가자들 사이의 열띤 토론 때문이 아니라, 특정 참가자의 부적절한 발언 등에 의한 것이라면 얘기가 다르지 않을까? 그런 경우라면, 당연히 사회자나 주최측에서 통제력을 발휘해 토론을 제 궤도에 올려놓아야 하는데, 내가 보기엔 전혀 그런 노력이 나타나질 않았다. 사회자나 {문화/과학} 편집진들은 조정환 선생의 길고 지루할 뿐 아니라 핀트에 어긋난 발언들을 전혀 제지하거나 일말의 통제 의지도 보이지 않았던 것으로 나는 판단한다.

2. 문제제기

위와 같은 토론회 자체의 운영과 별도로, 이메일을 통해 나는 또 다른 문제제기를 내놓은 바 있다. 바로 다음과 같은 한 청중의 발언 때문이다.

물질, 비물질이 맑스가 포괄적으로 보고 있다라고 가정을 한다면, 잉여가치론을 폐기할 이유는 전혀 없[고,] 그것이 새로운 국면으로 가고 있다고 봐야 하는 것 [아니냐] … 조정환 선생님은 … 소위 맑스주의 정치경제학, 영국에서 유학을 하신 분들하고 논쟁을 하시면 안된다 라는 생각이 들어요. 오히려 부르주아 경영학을 하는 사람들과 … 경험론적인 방식[으로] … (음성파일로부터 녹취)

위 발언자의 전체적인 취지는 조정환 선생께, 자신이 생각하는 올바른 연구/토론방향을 제시하는 것이다. 사실은 나 자신도 상당히 공감하는 내용일 뿐 아니라, 위 발언이 있기 직전에 나 자신도 그런 취지의 언급을 이미 했다.

내가 문제삼는 것은 그와 같은 발언의 전체 취지가 아니다. 바로 밑줄 부분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그것이 왜 문제가 되느냐고 내게 되물을지 모른다. 맞다. 말 자체만 놓고 보면, 사실 토론자로서 나는 위와 같은 청중의 의견을 겸허히 받아들여야 마땅하다. 그러나 이 발언이, 이번 행사를 준비한 주체, 즉 {문화/과학}의 편집위원 중 한 명의 것이라면 얘기가 좀 다르다.

첫째, ‘소위’, ‘영국에서 유학을 하신 분들’과 같은 인신공격성 발언은 어떻게 보더라도 불필요하다.

둘째, 그런 부분을 빼놓고 보더라도, 위 발언은 문제가 된다. 싫다는 사람을 굳이 불러들여놓고서 고작 ‘저런 애들이랑 토론하지 마세요’라고 한 것이 아닌가? 그럴려면 애초에 뭣하러 나를, 즉 ‘영국에서 유학’하면서 ‘맑스주의 정치경제학’을 공부하는 나를 불렀는가? 혹시 {문화/과학}의 편집진은 내가 ‘영국에서 유학’한 ‘맑스주의 정치경제학’ 공부하는 사람인지 몰랐는가?

3. {문화/과학}의 ‘입장’

이상의 사항에 대해, 나는 {문화/과학} 측에 공식적인 해명 내지는 사과를 요구했다. 그러니까 정확히 말하면, 1번에서 묘사한 것에 대해서는 사과 요구 없이 일종의 ‘항의’를 한 셈이고, 2번의 문제에 대해서는 해당 발언자의 사과와 {문화/과학} 편집위원회 명의의 해명을 요구했다.

그렇다면 결과는? 일단 나는 다음과 같은 {문화/과학} 측의 ‘입장’을 이메일로 전달받았다. (읽기 귀찮으신 분들은 그냥 건너뛰어도 되심. 내 이름을 제외한 모든 실명은 땡땡이 처리 함.)

『문화/과학』제1회 북클럽 행사 김공회 선생의 문제제기에 대한 편집위원회의 입장

안녕하십니까? 계간『문화/과학』편집위원회는 6월 20일에 있었던 『문화/과학』제1회 북클럽 행사에 패널 로 참가했던 김공회 선생의 문제제기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입장을 알려드립니다.

1. 먼저『문화/과학』제1회 북클럽 행사에 참석해 주신 김공회 선생님에게 감사드립니다. 당일 행사와 관련해 당초 패널 참가자였던 ○○○ 선생이 갑작스런 개인적인 사정으로 부득이하게 참석하지 못하게 된 점을 포함해 전체 진행이 매끄럽지 못한 점에 대해 유감을 표명합니다. 아무래도 첫 번째 행사를 치르다보니, 준비가 충분치 않았던 것 같습니다. 지적하신 사항 잘 감안해서 다음 북클럽 행사부터는 잘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다만 김공회 선생님이 문제제기한 대로, 토론회 준비에 있어서 패널들이 논의를 전개하기 어려울 정도로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토론회 준비에 대한 패널들의 문제제기는 충분히 가능하지만, 편집위원회는 지면 게재 철회를 심각하게 고민할 정도로 진행 상 문제가 정말 심각한 지에 대해서는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물론 진행 상황에 대해 서로 다른 시각차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이것은 문제제기 수준으로 마무리 할 수 있는 문제라고 판단됩니다.

2. 패널 토론 후에 플로어에서 질의한 ××× 편집위원에 대한 문제제기에 관해서는 결론적으로 말씀드리자면, 김공회 선생에게 공식 사과를 할 수 없습니다. ××× 편집위원은 분명『문화/과학』편집위원이지만, 개인적 차원에서 질문을 한 것이고, 김공회 선생이 생각한 것과는 다르게 개인을 인식 공격하려 한 것이 아니라, 토론 진행 과정을 지켜보면서 제기한 문제제기에 불과한 것입니다. ××× 편집위원의 질의가 분명 김공회 선생 본인에게는 불편하게 느낄 수 있겠지만, 맑스주의 경제학자로서 김공회 선생의 학문적 정체성에 대한 비판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 선생의 질의 안에는 당일 날 토론회에 임한 김공회 선생의 냉소적인 토론 태도에 대한 개인적인 문제제기가 포함된 것은 분명합니다. ××× 선생의 질의는 다른 한편으로는 김공회 선생의 이론적 입장과는 무관한 인지자본주의의 이론적 경향에 대한 문제제기였습니다. 물론 본인이 지적했듯이 토론회의 매끄럽지 못한 진행에 대해 불만을 제기할 수 있겠지만, 아무리 토론회의 진행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고 해서, 토론회에 소극적으로 참여하거나 상대방의 발언을 경청하지 않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신 것은『문화/과학』편집위원으로서도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마이크 배치에 대해서도 문제제기 할 수도 있지만, 당일 토론회 중간에 의사 진행 발언을 할 수 있는 충분한 기회가 있었고, 비록 후반부이긴 하지만 실제로 사회자였던 △△△ 선생은 김공회 선생에게 마이크를 전해주면서 발언할 기회를 드리기도 했습니다. 토론회 현장에서 본인의 발언을 통해서 이 문제에 대해 이야기 할 수 있었으면 좀 더 원활한 진행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을 생각해봅니다. ××× 선생의 문제제기는 평상 토론회에서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고, 현장에서 적극적인 반론을 통해 충분히 논쟁이 가능했던 사안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 선생의 발언은 개인적인 인식공격이 아니고, 맑스주의 경제학자로서 김공회 선생의 학문적 정체성을 공격한 것도 아님을 다시 한 번 밝히는 바입니다.

3. 『문화/과학』편집위원회는 제 1회 북클럽 행사의 원고를 『문화/과학』에 게재하는 과정에서 패널 참가자의 의견을 적극 수용하여 자신의 의견을 추가로 수정할 수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사실을 왜곡하지 않는다면, 패널 모두 토론 내용을 보완하고 자신의 의견을 추가로 반영할 수 있음을 다시 한 번 알려드리며, 하고 싶은 이야기는 지면을 통해서 전달해주셨으면 합니다. 다만 김공회 선생님께서 요구한 사항을 전제로 게재를 원하시는 점에 대해서는『문화/과학』편집위원회에서는 수용할 수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4. 『문화/과학』편집위원회는 가급적 이번 제1회 북클럽 행사 토론 결과를 『문화/과학』 지면에 싣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패널 토론자 선생님들이 종합적으로 판단해 게재를 원하지 않는다면, 토론회 원고를 싣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다만 이번 논란이 생산적으로 논의되고 좋은 결론을 맺었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러니까 결론은, 토론회가 제대로 진행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유감을 표명하면서도, 나의 좀 더 적극적인 ‘요구’에는 응하지 않은 거다.

4. ‘입장’에 대한 나의 입장

그럼 이제 마지막으로, 위 ‘입장’에 대한 나 자신의 소회 내지는 반응. 어쩌면 이게 이 포스팅의 핵심인지도 모르겠다.

(1) 플로어에서 발언을 했던 편집위원에 대한 문제제기가 단편적으로만 받아들여졌다는 게 납득할 수 없다. 앞서의 ‘입장’에서 {문화/과학} 편집위원회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 공식 사과를 할 수 없습니다. … 개인을 인식 공격하려 한 것이 아니라 … ××× 편집위원의 질의가 분명 김공회 선생 본인에게는 불편하게 느낄 수 있겠지만, 맑스주의 경제학자로서 김공회 선생의 학문적 정체성에 대한 비판은 아니었습니다. … ××× 선생의 질의는 다른 한편으로는 김공회 선생의 이론적 입장과는 무관한 인지자본주의의 이론적 경향에 대한 문제제기였습니다.

참으로 답답하다. 왜 나에게 ×××의 ‘진심’을 설명해주려 하는가? 그것은 내 관심사가 아니다. 나는 그의 ‘표현’을 문제삼는 것이다. 대체 왜 ‘영국에서 유학을 하신 분’이라는 표현이 필요하냐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조정환 선생이 ‘영국에서 유학을 하지 않은’ 마르크스경제학자랑은 토론해도 괜찮다는 것 아닌가? 흔히 ‘인신공격성 발언’이란 이런 것을 가리키는 거 아닌가??

(2) ‘인신공격’ 문제에 대해선 이쯤 해두자.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다. 사과/해명을 요구하는 이메일에서 나는 분명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인신공격성 표현을 포함, 위 발언에 대해 ××× 선생님께서 제게 개인적으로 사과하시기를 원합니다.” 그러니까 내가 제기한 문제는 ‘인신공격’만이 아니라, 결과적으로 ‘왜 저런 애를 저기 앉혀놓고 토론을 하고 있느냐’라는 발언을 다름 아닌 나를 초대한 {문화/과학} 편집위원회의 일원이 했다는 사실이다. 아무래 개인적으로 그렇게 생각하더라도, 그리고 아무리 토론회에서 내가 개떡같이 굴었다손 쳐도, 나를 초대하기로 했다면 이런 말을 하면 안 되지 않나? 다른 사람도 아닌, ‘편집위원’께서 말이다. 사람 가지고 노나???

(3) {문화/과학} 편집위원회는 ‘해명’에서 나의 요구에 응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도리어 나를 비난하고 훈계까지 하고 있다. 이건 좀 웃긴데, 다음을 보라.

… 다만 ××× 선생의 질의 안에는 당일 날 토론회에 임한 김공회 선생의 냉소적인 토론 태도에 대한 개인적인 문제제기가 포함된 것은 분명합니다. … 본인이 지적했듯이 토론회의 매끄럽지 못한 진행에 대해 불만을 제기할 수 있겠지만, 아무리 토론회의 진행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고 해서, 토론회에 소극적으로 참여하거나 상대방의 발언을 경청하지 않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신 것은『문화/과학』편집위원으로서도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마이크 배치에 대해서도 문제제기 할 수도 있지만, 당일 토론회 중간에 의사 진행 발언을 할 수 있는 충분한 기회가 있었고, 비록 후반부이긴 하지만 실제로 사회자였던 △△△ 선생은 김공회 선생에게 마이크를 전해주면서 발언할 기회를 드리기도 했습니다. 토론회 현장에서 본인의 발언을 통해서 이 문제에 대해 이야기 할 수 있었으면 좀 더 원활한 진행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을 생각해봅니다.

‘냉소적인 토론 태도’, ‘상대방의 발언을 경청하지 않는 듯한 모습’. 내가 그날 정말 그랬는가와는 별도로, 나는 다른 데도 아니고 자그마치 {문화/과학} 편집위원회에서 이런 사항들을 근거로 사람을 비난한다는 게 놀랍고 놀랍다.

길게 갈 것 없이, 두 가지만 말하고 끝맺겠다. 첫째, 위에서 지적되고 있는 ‘태도’와는 별개로, 나는 시종일관 나름대로 ‘겸손한 마음가짐’으로 토론회에 임했다. 이것은 내 양심에 대한 문제다. 나 아닌 다른 사람이 왈가왈부할 문제가 아니란 소리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후기’의 한 구절을 보라.

… 사실 이번 토론회에 나선 유일한 이유는 바로 청중 때문이었다. 즉 그 자리에 직접 와주신 좁은 의미의 청중은 물론이고, 나중에 다른 어떤 형태로 그 토론회를 간접경험할 넓은 의미의 청중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그러나 플로어에서 나오는 질문들은 실망스럽기 짝이 없었다. … 그들이 ‘가치’에 대해, 좀 더 일반적으로는 ‘경제’나 ‘경제학’에 대해 매우 단순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면서도, 그에 대해 전혀 거리낌이 없어 보였다 … 결국 마무리 발언에서 나는 다음과 같이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경제학을 공부하는 저로서는, 몇 안 되는 여러분들 앞에서조차 철학이니 정치니 하는, 제가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들에 대해 발언하는 게 정말 부담스러운데, 여러분들은 경제에 대해 너무도 쉽게 이야기하시는군요.”

여기서 큰따옴표로 묶인 것은 내가 나중에 재구성한 내 발언인데, 녹취록을 보니 현장에서 했던 것과 대충 비슷했다. 암튼, 만약 이 말조차 싸가지없어 보인다면 나는 더 할 말이 없다.

(4) 둘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때때로 ‘냉소적인 토론 태도’와 ‘상대방의 발언을 경청하지 않는 듯한 모습’을 보인 것은, 그러니까 나 나름의 ‘계산’에 따른 철저하게 ‘정치적인 행위’였다. 내가 거짓말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혹시 있다면, 그날 촬영된 영상을 보여드릴 수도 있겠다. {문화/과학} 편집위원회가 말하는 그 싸가지없는 모습을 내가 처음부터 보였던 건 아니다. 토론회가 진행되면서, 어느 순간부터 내 앞에는 다음과 같은 상황이 펼쳐졌다: 애초부터 나에게 호의적일 것 전혀 없는 분위기, 청중석엔 날파리들 난입, 이제 막 입문한 초짜가 ‘업계’의 고수와 겨뤄야 하는 난감한 상황, 그러나 그 ‘고수’는 주어진 토론 주제에 적절치 않아 보이는 헛소리를 일삼고 있고, 사회자는 고개 푹 숙이고 전혀 진행의지를 보이지 않고 있고, 나를 초대하는 과정에서 이메일과 전화로 직접 나를 응대했던 편집위원은 앞줄에 앉아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안절부절 못하고 있고, 하지만 마이크는 하나뿐이어서 내가 끊고 들어갈 수도 없고, 그래도 그냥 끊고 들어가자니 토론회의 규칙을 어기는 것 같아 안 되겠고… 이런 나름 ‘사면초가’의 상황에서 내가 마지막으로 선택할 수 있는 ‘행위’가 바로 그 ‘냉소적인 토론 태도’와 ‘상대방의 발언을 경청하지 않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래서 그것은 ‘정치적’인 것이었던 거다.

앞서 ‘입장’에서 {문화/과학} 편집위원회는 내게 토론회에 좀 더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은 것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했던데, 나의 위와 같은 ‘태도’가 내 ‘개입의 방식’이었다. 그걸 이해 못한 것은 내 책임이 아니다.

5. 끝

바로 이 마지막 문제와 관련, 나는 ‘아, {문화/과학}도 이제 끝이구나’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떤 행위의 이면에 있는 정치적 맥락을 읽어내는 것은 좌파적인 지향의 문화이론이 갖는 기본적인 입장 중 하나라고 나는 알고 있다. 또한, 그러한 행위들의 의미를 판단함에 있어 낡은 관습이나 도덕률과 같은 통념에 의존하는 태도에 비판적인 것도 그러한 기본입장에 포함된다고 나는 믿는다. 그런데도 {문화/과학} 편집위원회의 위 ‘입장’은, 적어도 내가 보기엔, 바로 그 구태의연한 ‘통념’에 입각해서, ‘맥락’을 완전히 제거한 채, 내 ‘행위’의 겉면만을 두고 판단하고 있지 않은가? 과연 이 꼰대님들, ‘쥐벽서’의 제작자들을 준엄한 ‘법’의 이름으로 심판했던 검사들과 무엇이 다른가?

해서 나는 ‘아, {문화/과학}도 이제 끝이구나’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 나도 이쯤에서 관두려 한다. 이미 끝인 잡지와 싸워 무엇 하겠는가. 즐겁게 이별을 고하면 그만이다. (끝)

[201203] 인지자본주의론의 가치이론 이해 비판 (2)

{마르크스주의 연구} 제9권 제1호(2012년 봄)에, 나의 논문 “인지자본주의론의 가치이론 이해 비판: ‘비물질노동’의 개념화와 측정을 중심으로”가 실렸었다. 앞서 밝혔듯, 이번에 토론회를 준비하면서 이 논문을 간단하게 요약했는데, 다음과 같다(한글초록 및 기타 추가적 정보는 여기를 참조하시길).

[※ 추가(2014년 2월 12일): 원하는 분이 있어서… 전문링크]

먼저 이 글은 다음과 같은 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1. 인지자본주의론의 현재
2. 소극적 비판: 인지자본주의론의 가치이론 인식에 대하여
_(1) 인지자본주의론의 가치이론 비판의 개요
_(2) 인지자본주의론이 보는 가치이론: 모호하거나 단순하거나
3. 적극적 비판: ‘비물질노동’을 가치이론적으로 다루기 위한 메모
_(1) ‘비물질성’, 노동의 특정 유형의 성격인가 노동 자체의 성격인가
_(2) 단순 비교 대 역사적 형성
_(3) 가치이론의 기반: 측정가능성 대 비교/동등화
4. 맺음말

보시다시피 이 글에서 핵심은 2절과 3절이다. 따라서 아래 요약은 이 두 절에 집중되어 있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 1절에 대해 간략히 언급하는 것도 괜찮을 듯하다.

언뜻 보면 1절은 그냥 구색 맞추기 위해 들어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이 부분을 읽은 독자들은 아마도 조정환이 어떤 종류의 연구자인지를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으리라. 왜냐? 그는 (자신의 저서에서 밝히고 있듯이) 자신이 마치 ‘인지자본주의’에 대한 기존의 논의를 집대성하고 나아가 그것을 한걸음 더 진전시키고 있다는 듯이 묘사하지만, 실상 그는 자신의 저서에서 이제껏 관련 논의를 국내에 소개해온 선구자들을 단한번도 언급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이건 적어도 ‘예의’의 문제다), 관련된 세계적 논의들을 충분히 검토하지도 않았다(이건 적어도 ‘성실성’의 문제다). 이러한 행태로부터 드러나는 조정환의 ‘의지’는 무엇인가? 자신을 인지자본주의론의 대표주자로 내세움으로써 자신이 가진 기존의 지적 권력을 유지하려는 추악한 의지, 자신의 책을 팔아줄 독자들을 잃을지 모른다는 가련한 두려움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로써 나는, 조정환이 어떤 글에서 전희상에 대해 했던 부당하고 모욕적인 표현을 그에게 되돌려준다. 더구나 특히 이 후자의 경우엔, 조정환이 그리도 혐오하는, ‘경제적’ 내지는 ‘가치이론적’ 고려(!)가 개입되었으리라(자, 이렇게 경제학 또는 가치이론은 여러분들의 실생활 어디에나 있는 것이다. 부디 두려워 말길). 따라서 나의 비판은, 조정환에 대한 것이 아니라 조정환이 아주 작은 일부로서 포함되어 있는 ‘인지자본주의론’ 일반에 대한 것이었다.

(그러니까 조정환은 (당연한 얘기겠지만) 인지자본주의론의 전부도 아니고 대표주자도 아니다. 그렇다고 그가 한국의 (현실적 또는 이론적) 특수성을 상당히 반영한 논의를 내놓는 것도 아닌 것 같다. 나는 오히려 그가 인지자본주의론을 어떤 면에선 왜곡시키는 것 같기도 하다. 따라서 그가 인지자본주의론과 관련해서 특별히 주목받을 필요는 없다. 이건 그러니까… 김수행 교수가 공황론을 주로 소개했다고 해서 김교수의 입장이 공황론의 전부는 아닌 것과 같은 이치다. 당연하지 않은가? 실제로 과거엔 김교수가 공황론의 대표자라고 생각했던 사람은 별로 없었던 듯하다. 내가 알기론 김교수 자신도 그렇게 자신을 내세운 적은 없다. 그런데 요샌 조정환이 인지자본주의론의 대표주자인 것처럼 이야기되고 있다. 사람들이 그만큼 게을러졌거나, 조정환의 간이 배밖으로 나왔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이제 본격적인 비판을 보자. 애초 나의 주장은 두 부분으로 나눠어 있었지만, 다음에서는 이 둘을 뭉뚱그려 모두 네 개의 주장으로 요약했다.

1. 가치이론에 대한 지나친 단순화/오해. 이것은 마치 {자본론} 제1권 제1장을 읽으면서, “터무니없이 높은 명품가격”을 반박근거로 내놓는 것과 비슷한 것이다. 즉 여기서 상품가치는 매우 단순하게도 “그 상품을 만드는 데 드는 (사회적 평균) 노동시간”으로 규정되는데, 이른바 명품의 터무니없이 높은 가격은 이런 원칙을 거스르는 것 같기 때문. 이에 대해 가장 적절한 반응은, “제3권까지 한번 가봐라”라는 것이다. 무슨 말이냐면, {자본론}에서 제시된 이론은 매우 복잡한 구조를 가지고 있고 특히 가장 단순하고 추상적인 최소한의 규정에서 출발해서 점차 복잡하고 구체적인 영역으로 나아가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말해 가치와 가격의 괴리 문제는 계속해서 구체적 규정들이 덧붙여짐에 따라 점진적으로 고려된다는 것이다.

결국 인지자본주의론의 가치이론 기각은 마르크스의 가치개념/규정을 제1권 제1장 수준, 즉 매우 단순하고 추상적인 차원에서 파악한 채로 이뤄진다. 그러나 정작 그들이 이 기각의 근거로 삼는 현상들은 상당히 구체적이다. 이것은 그 자체로 부당할 뿐만 아니라, 그런 논리를 받아들이더라도 인지자본주의론자들은 그렇다면 가치이론의 기각이 왜 포드주의 시대(=노동과 자본 간의 “협약”에 기초해 종전보다 현저히 높은 임금수준이 실현된 시대)에 일어나지 않고 지금 일어난다는 것인지 대답해야 할 것이다.

2. 비물질성의 지위. 인지자본주의론에서는 비물질노동을 노동의 새로운 유형이라고 보는 경향이 있는데, 사실 비물질성은 노동의 일반적인 특성이라고 보는 게 타당하다. 다만 이제까지 가치이론에서는 그런 성격이 크게 부각되지 않았을 뿐이다. 앞서 밝혔듯 가치이론은 단순/추상에서 복잡/구체로 나아가는 열린 구조를 가지고 있고, 따라서 비물질성 문제도 논의의 어떤 단계들에서 차차 고려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사항에 주의를 기울일 계기를 줬다는 점에서 인지자본주의라는 문제설정은 긍정적으로 볼 수 있다.

3. 그렇다면 노동의 비물질성, 나아가 그러한 비물질성이 특히 두드러져 보이는 노동유형들을 가치이론적으로 어떻게 파악할 것인가, 라는 문제가 당연히 제기될 것. 인지자본주의론에서는 예컨대 과학기술종사자나 간병인의 노동과 전통적으로 상정되는 이미지를 가진 노동, 이를테면 볼트와 너트를 맞춰 조이는 기계공의 노동을 대비시키면서, 오늘날 자본주의에서는 전자가 두드러진다고 주장함(비물질노동의 헤게모니).

그러나 이런 식의 단순 병치/비교는 마르크스의 방법과 배치된다. 즉 특정 노동들의 병치/비교보다는 “역사적 형성”을 보는 것이 더 유의미한 파악법이다. 과학기술종사자나 간병인을 기계공과 대비시키면 누구라도 그 “인지적 아우라”에 취하기 쉽겠지만, 역사적 형성의 관점에서 보면 오늘날의 과학기술종사자나 간병인은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기계공의 모습에 가깝다(즉 자본에 고용되어 있다는 것). 이로부터 제기되는 이론적 문제는, 특히 현대자본주의에서 두드러져 보이는 과학기술노동의 그와 같은 역사적 형성—즉 자본주의화—이 현대자본주의의 재생산에서 어떤 역할을 하느냐는 것이지, 그것을 근거로 기존 이론을 폐기하는 것이 아니다.

4. 마지막으로, 어쩌면 가장 핵심적인 문제라고 할 수 있는 “측정” 자체에 대해. 인지자본주의론은 오늘날 노동을 둘러싼 여러 환경의 변화 때문에 상품의 생산에 드는 사회적평균노동시간을 측정하는 게 불가능함을 근거로 가치이론의 기반이 사라졌다고 본다. 두 측면에서 반론이 가능하다.

(1) 마르크스 자신도 오늘날 인지자본주의론자들이 제기하는 측정의 어려움에 대해 인지하고 있었다. 대표적으로 ‘노동일’을 다루는 {자본론} 제8장(불어/영어판 제10장)을 보면, 정해진 노동시간을 야금야금 늘리려는 자본가들의 작태들이 자세히 묘사되고 있다. 이를 마르크스는 “분 뜯어내기”라고 부른다. 물론 이런 작태들은 한 상품에 들어간 노동시간이 얼마인지를 애매모호하게 만들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를 자신이 방금 전에(=즉 제1장에서) 내놓은 “직접노동시간에 의한 가치규정” 명제를 철회하는 근거로 삼지 않았는데, 이는 인지자본주의론자들이 상상하듯 그러한 행태들이 마르크스 시대엔 별로 두드러지지 않아서가 아니라(실제로 매우 일반적인 현상이었다는 게 “노동일” 장에서 마르크스의 요지다), 자신의 가치이론의 체계상(마르크스의 가치이론의 ‘개방성’을 떠올릴 것!) 그것은 고려되더라도 뒤에 가서야 고려될 문제이기 때문이다. 실제 현실에서는 “초과착취”가 매우 일반적으로 이뤄지고 있지만, {자본론} 제1권(부터 제3권까지)에서는 “정상착취”만 전제되는 것과 같은 이치.

(2) 측정 자체에 대해 말하자면, 그것은 역사적, 정치적, 특히 기술적 사정과 복잡하게 얽혀있다. 기본적으로 그것은 시간에 대한 관념과 관련되어 있다. 이는 “노동일”이라는 표현 하나만 봐도 금새 드러난다. 마르크스는 이를 “하루 동안의 노동시간”이라는 의미로 쓰지만, 원래 노동일(working day)이란 노동하는 날, 그러니까 “휴일”의 반대말이었다(참조). 즉 노동의 단위가 “하루”였던 시대로부터 “시간”으로 바뀌어가는 사정을 “노동일”이라는 애매한 표현은 반영하는 것인데, 물론 이러한 변화가 기술적 뒷받침 없이 진행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즉 “노동일”이 아니라 “노동시간”이라는 개념이 유의미하려면 실제로 그것을 측정할 수 있어야 하며, 이는 손목시계의 광범위한 생산을 전제한다(물론 “(자동장치로서의) 시계”의 출현의 의의는 단순히 노동시간의 측정 이상이지만). 이렇게 보면, 오늘날의 “노동시간”이 19세기의 시계, 또는 시간관념으로는 측정이 불가능할지 몰라도, 오늘날의 정밀화된 시계, 시간관념으로는 측정 가능하고, 또 끊임없이 측정되고 있다.

다른 한편, 인지자본주의론은 직접적인 노동시간뿐 아니라 다양한 사회적 교류작용들도 오늘날엔 상품가치 형성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 또한 측정 불가능성 주장의 근거로 삼고 있다. 물론 오늘날 예컨대 블로그를 통한 광고가 상품가치 형성에 커다란 기여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일은 언제나 있어 왔다. 마르크스가 그것을 몰랐을까? 그가 살았던 중기 빅토리아 시대는 그야말로 “유행과 평판의 시대”였다. 그런데도 그가 그런 측면을 고려하지 않은 것은, 기본적으로 그의 이론의 미완결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부분적으로는 상품의 평판을 측정할 수단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니 구글 애드센스의 등장은, 인지자본주의론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오늘날엔 상품가치 형성에 평판이 주되게 참여한다는 뜻으로 읽기보다는, 드디어 “평판”이라는 것을 측정할 수 있는 수단이 등장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제 비로소, 말하자면 “평판의 정치경제학”을 본격적으로 제기할 기회를 얻게 된 것이다.

사실은 “측정”이 갖는 이러한 가변적인 성격 때문에 De Angelis and Harvie는 “측정이란 정치적 범주”라고 말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측정 문제의 본질은, 그것의 기술적 가능성이 아니라 상이한 노동들이 끊임없이 비교되고 또 그럼으로써 동등화된다는 사실 자체에 있다. 그리고 이 후자는, 사실 아담 스미스나 헤겔, 마르크스가 공통적으로 주목했던 근대사회의 구성원리이기도 하다.

5. 맺음말. 나의 글이 인지자본주의론에 대한 포괄적인 비판은 아니다. 그러나 인지자본주의론이 기존의 가치이론에 대한 비판, 특히 노동시간의 ‘측정 불가능성’을 주요 근거 중 하나로 해서 세워져있는 만큼, 이상의 비판이 인지자본주의론에 일정한 타격은 가하리라 본다. 나아가 이를 바탕으로, 가치이론적으로 좀 더 유의미한 방식으로 인지자본주의론이 제기하는 문제들에 개입하는 노력도 필요하다. (끝)

[※ 추가(2014년 2월 12일): 원하는 분이 있어서… 전문링크]

[201203] 인지자본주의론의 가치이론 이해 비판

[제목] 인지자본주의론의 가치이론 이해 비판: ‘비물질노동’의 개념화와 측정을 중심으로
[실린 곳] {마르크스주의 연구} 제9권 제1호 (2012년 봄) (링크)

드디어 저널이 출간됐다. 개인적으론 편집자를 좀 많이 괴롭혀서 그에게 미안하다. 하지만 글을 보기좋게 뽑아주어 정말 고맙다. 다음은 위 글의 한글초록이다.

이 글은 인지자본주의론이 제기하는 가치이론 비판을 검토함으로써 그것이 제기하는 문제를 가치이론의 관점에서 어떻게 흡수할 수 있을지를 모색하는 성격을 갖는다. 이를 위해 먼저 우리는 인지자본주의론자들의 가치이론 이해가 단순함을 들어 가치이론을 소극적으로 방어한 다음, 좀 더 적극적으로 가치이론이 그들의 문제의식을 어떻게 껴안을 수 있을지를 논하겠다. 여기서 핵심 주장은, 인지자본주의론자들이 ‘비물질노동’이라고 부르는 형태의 노동은 그 역사적 형성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했을 때에만 가치이론적으로 유의미하게 포착해낼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의 ‘측정’ 또한 주어진 것이 아니라 변화하는 역사적 조건 속에서 미결정된 채로 존재하는 문제이기 때문에 단순히 가능-불가능의 차원에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주요 용어] 인지자본주의, 비물질노동, 가치이론, 가치법칙, 역사적 형성, 측정.

마음 같아서는 원문을 여기에 올려놓고 싶지만, ‘도의상’ 그러면 안 될 것 같고… 암튼, 위 글과 함께 이번 저널에 실린 다른 논문들(이번호는 ‘인지자본주의론의 쟁점’이라는 특집으로 꾸며졌다)을 통해 논의가 한층 고양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궁금하신 분들은… 도서관이나 서점으로 고고씽! ㅋ

(참고로 {마르크스주의 연구} 이번호엔 H님의 글도 함께 실려있다.)

나 개인적으로 봤을 때, {마르크스주의 연구}의 이번호는 상당히 기념비적인 성격을 갖는다. 물론 이런 성격이 당장부터 두드러지진 않겠지만 말이다. 왜 그러냐?! 특집을 채운 논자들의 면면을 보면 금새 그 까닭이 드러난다. 일반논문이나 서평 외에, ‘특집’ 꼭지에 총6개의 논문이 실려있고, 조정환 자신의 논문을 빼면 모두 다섯 명의 논자가 인지자본주의론을 비평하고 있는데, 여기서 주목할 점은 이 다섯 명 중에서 자그마치 세 명(나와 H님을 포함해)이, 그간 별로 알려지지 않았던 ‘젊은’ 연구자라는 거다!

적어도 지난 20년 정도 한국의 마르크스주의 정치경제학 연구동향을 떠올려볼 수 있는 사람이라면, 이것이 얼마나 이례적인 일인지 대번에 알 수 있을 것이다. 문화연구분야 정도만 빼면, 내 생각엔 다른 사회과학 분야에서 마르크스주의 계열의 연구가 대개 이렇다. 한마디로 말해, 그간 이 동네는 대가 끊겨있었던 셈인데… 이번에, 그러니까 내가 지금 언뜻 생각하기론 약15년만에 거의 처음으로 ‘우리 여기 살아있다고!’라고, 그것도 ‘집단적으로’ 외친 것이다!!

물론 그간에 사람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대체로 몇몇 개인의 산발적인 연구였고(나 자신도 좀 뒤늦게 합류하긴 했지만 그 중 하나였다), 그렇다 보니 그런 연구들이 어떤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키는 정도까지는 못 되었다. 아니, ‘바람’을 일으키기는커녕 기존의 선배 연구자들의 정당한 주목 내지는 건전한 개입을 받지 못한 채 잊혔던 게 아니었나 싶다(물론 어느정도는 ‘함량미달’이어서도 그랬겠지만ㅋ).

바로 이런 의미에서, 나는 이번 특집호에서 ‘젊은’ 연구자 셋이 한꺼번에 목소리를 냈다는 사실 자체에 주목하는 것이다. 따라서 조정환 선생께서도 지금까지처럼 무슨 ‘선지자’처럼 굴지 마시고 이번엔 비판에 귀 좀 기울였으면 좋겠다. ‘우리’는 그가 이제껏 상대해야 했던 ‘논적들’과는 전혀 다르다. 그와 ‘구원'(舊怨)도 없고, (그가 맨날 욕하는) ‘스탈린주의’도 모른다. ‘낡은’ 틀로, 거기에 잘 들어맞지도 않는 우리를 재단하려고 한다면, 그는 이미 구린내 풍기는 ‘꼰대’일 뿐이다(실은 이미 어느정도는 그러고 있다).

암튼, 기분 좋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