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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제개편안 논란에 대하여 (3/끝) 무엇을 할 것인가

4. 세금과 임금: 현실에서는 모든 세금을 자본이 부담하진 않는다

앞에서 모든 세금은 원칙상, 그리고 이론적으로 자본으로부터 나온다고 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다.

모든 세금이 자본으로부터 나온다는 명제의 근저엔 임금에 대한 더욱 근본적인 논의가 전제되어 있다. 바로, ‘임금=노동력의 재생산비용=노동자의 생존비용’ 등식이 그것이다.

일단, 자본으로부터 직접 징수되는 법인세가 자본에서 나온다는 것은 쉽다. 문제는 노동자 각자의 임금으로부터 공제되는 소득세인데, 정의상 임금은 노동자의 사회적 생존비용이므로, 여기에서 한푼이라도 세금으로 나간다면 노동자의 재생산에 차질이 생길 것이고, 이는 결국 자본이 (임금인상이라는 형태로) 보충해줄 수밖에 없다.

그러나 바로 그 노동자의 재생산비용, 또는 ‘사회적 생존비용’이라는 것이 가변적이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일정한 사회적 평균값일 수밖에 없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그러한 평균은 변화하지 않을 수 없고, 나라마다, 그리고 한 나라 안에서도 지역이나 계층마다 다를 수 있다. 결국 ‘임금=재생산비용’이라는 명제는, 이런 모든 차이들을 사상한 매우 추상적인 규정인 셈이다. 마르크스는 임금을 결정하는 이런 모든 요소들을 ‘임금의 역사적, 도덕적 요소’라고 불렀다.

뿐만 아니라, 임금은 적어도 일시적으로 그러한 평균값을 상회하거나 하회할 수도 있다. 갑작스럽게 물가가 올랐을 때, 임금은 명목크기가 유지된다 해도 실질적으로는 하락한 것이며, 이는 곧 노동자들의 생활수준 저하로 나타난다. 즉 정상적인 재생산이 안 되는 것이다. 가장 추상적인 이론의 차원에서 봤을 때, 이러한 상황은 곧 임금인상을 통한 노동자의 투쟁을 통해 해소될 것이기에 그저 일시적인 교란상황에 그친다. 그러나 문제는, 실제 현실에선 노동-자본 간의 계급관계에 따라 그러한 임금인상이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 그리하여 만약 저하된 실질임금 수준이 장기화되면, 그것이 새로운 사회적 평균으로 자리잡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세금의 경우도 다르지 않다. 원칙상으로는, 노동자로부터 걷어가는 소득세가 많아지면, 그 차액만큼을 노동자가 자본가로부터 임금인상을 통해 받아낼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못할 경우엔 정상적인 노동력 재생산에 차질이 생기며, 나아가 그러한 비정상적인 상황이 새로운 ‘정상’으로 자리잡을 수도 있다. 이럴 경우, 세금은 자본가가 낸 것이 아니고, 노동자의 생활수준 저하를 통해 지불된 게 된다. 바로 이러한 까닭에 나는 앞서 소개한 ‘경제위기와 복지국가’라는 글에서 현대적 조세제도“치열한 계급투쟁의 결과 얻어낸 임금인상이라는 ‘전리품’을 자본가계급이 은밀하게 회수해가는 교묘한 방식”이라고 부른 것이다.

5. 세금, 복지, 임금: 증세의 조건?

간단히 정리해보자. 한편으로 세금은 (자본이 직접 지불하지 않더라도) 궁극적으로는 자본으로부터 나온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세금은 (특히 자본이 직접 지불하지 않는 경우에) 노동자 서민대중의 삶의 질 저하를 대가로 하기도 한다.

이것은 하나의 모순인데, 이러한 모순이 집약되어 나타나는 것이 바로 ‘임금’이라는 범주다. 증세 자체는 중요한 게 아니고, 증세의 결과 줄어든 소득을 노동자들이 임금인상을 통해 보상받아낼 수 있는지 여부가 핵심이란 얘기다. 그리하여 현재의 논쟁이나 투쟁도 바로 여기로 집중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 현재 정부의 세제개편안이 포함하고 있는 ‘보편증세’의 문제는, 현재 논쟁의 양 당사자들이 주장하는 대로 저소득 노동자를 털 것이냐 고소득 노동자를 털 것이냐의 문제가 아니라, 증세를 임금인상으로 성공적으로 연결시켜 내느냐 여부의 문제다. 좀 더 평이하게 말하면, 증세의 결과 노동자 서민대중의 삶의 질이 저하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어쩌면 누군가는 이렇게 물을지도 모른다. 지금은 세금을 걷어서 전투기 사자는 것도 아니고 복지를 하자는 것이니, 어차피 노동자가 세금을 내더라도 더욱 큰 복지로 돌려받을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러니 여기에서 임금인상은 별개의 문제 아닌가? 한편으론 맞는 말이다. 이를테면, 정부가 노동자/대중으로부터 세금으로 거둬들인 재원으로 복지정책을 시행하고, 그러한 복지정책이 노동자의 재생산비용을 낮춰 세금인상분을 정확히 상쇄하고도 남는다면, 이러한 증세를 통해 노동자들의 삶이 더 나아질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은 바로 이것이 ‘내가 만드는 복지국가’류의 프로젝트들의 근간을 (명시적으로든 암묵적으로든) 이루는 아이디어가 아닌가 한다.

하지만 이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소리다. 첫째, 현재로서는 노동자와 서민대중으로부터 거둬들인 추가세수가 그들을 위한 복지에 쓰일지, 아니면 자본이 내지 않은 세금을 보충하고 나아가 자본을 위해 쓰일지, 심지어 전투기 구입하는 데 쓰일지조차 확실치 않다. 올초부터 정부에서는 ‘세수부족’을 입버릇처럼 말하곤 하는데, 지금 논의되는 증세규모는 적극적인 복지는커녕 세수부족을 메우는 데도 모자란 수준이다.

둘째, 추가세수가 복지에 쓰이더라도 문제다. 왜냐하면 현재 우리나라의 노동자와 서민대중에게 필요한 것은 현재 삶의 수준의 유지가 아니라 그 대폭적인 상승이기 때문이다. 사실 이것은 자본주의 하에서 모든 계급투쟁이 지향해야 할 바다. 왜냐하면 여기에서 모든 경제적 가치는 노동자와 서민대중이 만들어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많은 세금을 내고, 아무리 많은 복지를 해도, 일하지 않는 자본가가 단 한푼이라도 챙겨간다면 착취는 철폐된 것이 아니고, 따라서 노동자계급은 승리한 것이 아니다.

6. 다시 복지로: ‘어떤’ 복지냐의 문제

여기서 잠시 현재 한국사회에서 복지가 이슈로 떠오르는 배경이 무엇인지를 떠올려보자. 왜 보수정권조차도 복지를 하려고 하는가? 바로 대중의 활력이 극도로 저하돼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신자유주의 때문인지, 경제위기 때문인지는 여기서 따지지 말자. 여하튼 그러한 대중의 활력 저하가 단순히 (일부) 노동자들의 삶을 피폐하게 만드는 것을 넘어 경제의, 그리하여 자본의 원활한 재생산을 방해하고 있고, 이를 보기좋게(?) 해소할 수 있는 가장 유력한 대안이 바로 현재 한국에서 제기되고 있는 복지인 것이다.

현재 우리 사회에서 복지란 자본(주의) 재생산의 위기를 타개해주는 수단으로 제시되는 것이다. 이를테면 비정규직 문제를 보라. 너무 심각하다. 사회의 응집력과 재생산을 크게 방해할 정도다. 어떻게 해결할까? 정규직화? 임금인상? 그렇게 되면 얼마나 좋겠나. 이러한 명확한 해결책을 취하지 않고도 비정규직 문제의 폐해를 피하기 위해 그들은 ‘복지’를 선택한 것이라고 보면 된다. 즉 그들은 비정규직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관리를 위해 복지확대를 추구한다.

이 대목에서 ‘어떤 복지냐’가 중요한 질문으로 떠오른다. ‘체제의 유지와 관리’ 차원에서, 즉 대중의 삶의 수준을 현재의 상태에서 안정적으로 관리하고자 복지를 추구하는 저들과 달리, 노동자계급과 서민대중의 이익을 옹호하는 우리는 어떤 복지를 원하는가? 적어도 현재의 한국사회에서 진보진영의 복지에 대한 태도는, 그것을 바닥에 처박힌 대중의 삶의 질을 높이고 극단으로 치달은 경제적/사회적 불평등을 축소하는 계기로 만드는 것이어야 한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이러한 복지에 대한 인식, 그리고 그를 향한 투쟁은 복지(국가)와 세금이란 것이 그 자체로 계급투쟁의 표현임을 명확히 하는 데서 출발한다. 자본가에 대한 투쟁은 임금을 가지고 하는 것이 보통이다. 어쩌면 그러한 투쟁을 통해 충분한 임금을 확보해낸다면 복지도 필요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오늘 한국의 현실에서 이는 불가능에 가깝다. 최근 최저임금 결정에서 극명히 드러났듯이, 현재 한국사회에서 자본과 노동 간의 힘관계는 현저한 임금인상을 낳을 수 있을 정도가 아니다. 노동은 더없이 취약할 뿐만 아니라 사회의 다양한 주체들로부터 점점 더 고립되고 있다.

바로 이런 현실에서 복지의 확대는 자본가에 대항한 노동자계급의 주요한 투쟁을 되살릴 수 있는 좋은 계기다. 임금 올려달라고 회사를 상대로 투쟁하는 것보다 더 많은 복지를 달라고 국가를 상대로 요구하는 것이 훨씬 더 많은 정당성을 갖는 게 요즘 한국의 현실이다. 이것이 바람직한 현상은 아닐지라도, 노동자와 서민대중의 이익을 옹호하는 좌파는 그러한 복지에의 열망을 대중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한 계기로, 나아가 계급투쟁의 정당성을 새롭게 정의하는 적극적인 계기로 끌어올릴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어떠한 일이 있어도 이제껏 논의되고 있던 복지가 후퇴되는 일은 막아야 하며, 나아가 더 많은 복지를 요구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만약 증세가 필요하다면, 이에 대해서도 적극적인 태도가 필요하다. 중요한 것은 노동자와 서민대중이 제 살을 깎아 복지비용을 대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것이 종국에 그들의 삶을 ‘조금’ 낫게 해준다 해도 말이다. 따라서 증세의 최우선순위에는 자본가, 그리고 그간 제대로 세금을 내지도 않았던 대자산가에 대한 법인세나 재산세, 자본이득세가 올라야 할 것이다.

또한 전술적인 이유에서든, 아니면 위와 같은 증세로는 충분한 복지재원이 마련되지 않아서든, 만약 노동자와 서민대중에 대한 보편증세(소득세/소비세 인상, 그리고 사실상의 보편증세인 사회보험료 인상 등)가 필요하다면, 이것을 받아들일 수도 있어야 한다. 단, 이럴 경우, 엄청난 대중의 저항이 있을 것인데, 좌파들은 그러한 저항이 복지에 대한 저항이 되지 않으면서 자본가와 대자산가 집단을 향하도록, 그리하여 궁극적으로 임금인상에의 대중적 요구로 전환될 수 있도록 유도할 수 있어야 한다. 요컨대, 좌파들은 현재 일어나고 있는 ‘복지’ 국면, ‘증세’ 국면을, 현재의 미약한 계급역관계를 뒤집는 기회로 사용해야 한다.

(※ 사족: 복지비용을 실질적으로 자본가가 부담케 하는 데 있어 핵심이 보편증세와 더불어 임금인상을 관철시키는 것이다. 많은 부동산을 소유한 대자산가들과 관련해서도 마찬가지다. 단순히 그들에게 엄격하게 과세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러한 과세의 결과가 이를테면 세입자에게 전가되지 않도록 전월세상한제 등이 보조적으로 필요하다.)

(끝)

세제개편안 논란에 대하여 (2) 세금의 본질과 계급투쟁

2. 복지재원? 모름지기 모든 세금은 자본으로부터 나온다

어쨌든 복지를 위한 재원이 쟁점으로 되고 있으니, 그에 대해 한번 생각해보자. 결론부터 말하면, 모든 복지재원은, 나아가 모든 세금은 자본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이다. 이것을 깨닫는 것이 가장 중요한 포인트다.

당연히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게 뭔 소리냐, 하실 것. 아니, 내가 열심히 일해서 받은 피같은 임금에서 세금이 나가는데 그게 무슨 개소리냐고! (-_-) 근데 그렇지가 않다.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정치경제학의 대답}이라는 책에 실린 나의 글 ‘경제위기와 복지국가’를 보시면 된다(링크). 책을 구하기가 번거로우신 분은, 이 블로그에 있는 ‘공공요금의 정치경제학’ 씨리즈를 보셔도 되겠고(링크1, 2, 3), 원하시면 앞의 글을 파일로 보내드릴 수도 있다(저 EM의 이메일주소는 우측상단에 있슴다). 핵심을 요약하면 이렇다. ▲자본주의 경제에서 임금이란 본질적으로 노동력의 재생산비용이다(물론 이것은, ‘이론적으로’, ‘평균적으로’ 그렇다는 얘기. 현실에선 당연히 개인적인 차이와 다양한 교란요인이 있다). ▲임금이 그러한 재생산비용에 못 미치면 노동자의 정상적인 재생산은 위협받기 때문에, 원리상 노동자의 임금에서는 세금이든 뭐든 자신의 (사회적) 생존과 관계없는 비용이 지출될 수는 없다. ▲그런데도 현실에서 노동자들은 세금을 내는데, 이는 곧 자신의 생존비용 이상으로 사전적으로 임금상승이 있었음을 의미할 따름이다. ▲따라서 모든 세금은 궁극적으로는 자본에서 나올 수밖에 없다. (다시 말씀이지만, 이러한 사항을 지금 이 글에서 상술할 수는 없다. 더 자세한 논의가 궁금하신 분은 위에서 언급된 글들을 보세요^^)

모든 세금은, 따라서 현재 논란이 되고 있는 추가적인 복지재원도 결국은 자본으로부터 나올 수밖에 없다는 것. 바로 그것이 핵심이다. 이를테면 이번 세제개편안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소득세의 (사실상의) 증세도, 겉보기엔 노동자의 주머니를 터는 것이지만 본질적으로 그러한 재원은 자본가의 금고에서 나오는 것이란 얘기.

말할 것도 없이, 이 경우 증세가 궁극적으로 임금상승으로 이어진다는 가정이 있어야만 한다. 이론적으로는 당연히 그래야 한다. 왜냐하면 기존에 노동자의 세후 임금이 그의 재생산비용(즉 생존비용)이라면, 소득세 증세 이후의 임금은 그러한 재생산비용에 못미칠 것이므로 원활한 재생산을 위해서는 임금인상이 필수적인 것이다. (하지만 이 경우 임금인상분과 소득세 인상분이 일치할 필요는 없다. 소득세 증세의 일부는 노동자에게 혜택으로 돌아올 것이므로, 임금인상은 소득세 인상분보다 작을 것이다.) 이 얘긴 잠시 뒤에 더 하자.

3. 자본으로부터 어떻게 재원을 빼낼 것인가?

이렇게 보면, (‘어떤 복지인가’의 문제는 차치하고) 복지를 위한 재원마련의 방법론은 결국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자본으로부터 복지재원을 빼낼 것인가’의 문제로 귀결된다.

이를테면 법인세를 더 걷는 것은 자본으로부터 직접 수금을 하는 것이겠고, 소득세를 올리는 것은 간접적인 방식이다. 부가세도 마찬가지. 흔히 사람들은 자본이 법인세 인상에는 반대하지만 소득세 인상에는 찬성할 것이라고 짐작할텐데, 전혀 그렇지 않다. 정도야 덜하겠지만 자본은 소득세나 부가세 인상에도 반대한다. 그것은 곧 임금인상으로 자신에게 돌아올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일반적으로 복지나 사회기반시설이 잘 갖춰지면 자본에도 이롭다. 먼저 자본 자신이 여러모로 이득을 보고, 노동력 재생산을 위한 직접적 비용도 줄어들 것. 따라서 자본은 국가지출의 증가에 대해, 이 모든 사항들을 고려해 입장결정을 할 것이다.)

대체로 자본으로부터의 직접적 세금징수인 법인세 인상은 자본이 가진 현실적인 힘을 고려하면 매우 어렵고, 소득세 인상은 자본의 저항은 상대적으로 덜 받지만 정치적 부담이 상당하다. 등등.

그렇다면 이번 세제개편안에 대해 자본이 격렬히 반응하지 않는 까닭은? 정답은,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대중이 알아서 반대하고 있으니 말이다. 사실 이것이, 모든 세금을 자본이 직접 내지 않고 노동자/대중을 통해 간접적으로도 냈을 때 거둘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정치적 효과다. 어떤 의미에서 국가의 지출을 늘리고 복지를 늘리는 것은 계급투쟁의 성과이고, 따라서 노동-자본 간의 투쟁의 표현인데, 노동자 대중을 통해 간접적으로 조세를 납부함으로써 자본은 그러한 계급투쟁을 노동자들 내부의 갈등, 또는 실체도 모호한 ‘국민적 갈등’으로 치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늘날 세금의 문제를 둘러싼 논란에서 노동자 계급을 옹호하는 이들은 기본적으로 거기에 깃든 계급투쟁적인 측면을 복원하는 데서 출발해야 할 것이다. 부연하자면, 바로 이 지점에, 일종의 사회변혁론으로서의 ‘시민증세론’의 가장 핵심적인 허점이 있다. 본질에 있는 계급투쟁을 보지 못하고, 지극히 피상적으로, 즉 복지를 ‘시민적 합의’의 문제로 제시한다는 것이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한가.

(계속)

성매매/성노동의 정치경제학적 의의, 또는 그에 대해 생각을 전개한다는 것의 의의

성매매와 관련된 질문이 또 하나 나왔다. 이를 계기로 뒤져보니, 지난 약3개월 사이에 그것과 조금이라도 관련된 글을 4개정도 쓴 것 같고, 그 중 직접적인 관련글은 다음 둘이다.

(a) 성매매 또는 성노동의 경제학적 이해?
(b) 임노동자와 자영업자—그리고 경제학

일단 앞서 내놓았던 나의 논지를 정리해보자. (1)에서는, 일반적으로 섹스산업은 영세하고 낙후되어 있어서 즉 자본주의화의 정도가 낮아서 이 산업 자체는 물론 거기 종사하는 사람들의 사회적 성격을 규정하기가 까다롭다는 것이 내 요지였다. 그리고 (2)에서는 자본주의 하에서 행해지는 어떤 경제활동에 대한 형태상의 규정은 종종 그런 규정을 통해 기대되는 내용과 괴리될 수 있음을 지적했다. 그리하여 오늘날 한국의 농촌에서 농사짓는 노부부를 형식상 “자영업자”라고, 심지어 “자본가”라고 분류하고 또 이런 분류가 그 나름의 타당성을 갖는다 하더라도, 그 노부부의 실제 삶의 내용에 대한 (일종의) 규범적 내지는 정치적 판단은 별도의 기준을 가지고 행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는다면, 즉 “자영업자”니 “임노동자”니 하는 규정들을 아주 형식적인 차원에서만 본다면, 마르크스는 이를 “경제적 범주의 물신적 이해”라고 비꼬았을 것이다.

이상의 내용을 좀 더 일반적으로, 그러나 “성매매”와 관련해서 풀어보면 이렇다. (1) 성매매의 현실적인 존재 형태가 엄밀한 의미에서의 임노동이 아니라 해도, 그것이 임노동이라고 주장하는 쪽에서 실망할 필요는 없다. (2) 따라서 성매매가 (형식적으로든 실질적으로든) 임노동이냐 아니냐는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 (3) 그렇다면, 우리가 성매매를 임노동이라고 규정하는 것이 갖는 의의를 좀 더 진지하게 따질 필요가 있다.

이런 사항들을 염두에 두면서, 앞서 내놓았던 얘기들을 좀 더 발전시켜 보겠다. 일부분은 앞서 글들을 쓸 때 생략했던 것이기도 하지만, 다른 일부분은 위 글들을 쓴 뒤에 생각을 좀 더 발전시킨 결과이기도 하다. 그래서 아래 내용 중에는 앞서 글들과 상반되어 보이는 대목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미리 밝히건대, 이 글에서 어떤 “명확한 결론”을 기대하긴 어려울 것이다. 오히려 “문제” 자체를 좀 더 세공한다는 데 의의가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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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매매 얘기는 좀 민감하기도 하고, 어떤 면에선 지나치게 구체적이어서 직접 다루기가 어렵다. 먼저 후자에 대해 말하자면, 만약 “성매매”가 생산적이냐 아니냐, 또는 임노동이냐 아니냐를 결정하는 것이 까다로운 문제라면, 그런 질문을 (예를 들어) “버스운전”이나 “자동차엔진제작”에 대해 제기하더라도 까다롭긴 마찬가지다. 까닭은 이런 문제들은 이론적으로 다루기엔 지나치게 구체적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것을 인정해야 하며, 따지고 보면 이런 무능은 모든 이론에 공통적이다. 이를테면, 우리는 흔히 현대자동차 노동자를 전형적인 임노동자라고 간주하기 쉽지만, 혹시 그가 행하는 노동은 우리가 흔히 상정하는 “자본주의 하에서의 임노동”이라고 하기엔 너무 복잡하고 지나치게 노동수행자 당사자의 재량이 개입할 여지가 큰 것은 아닌가?

“성매매”라는 규정이 지나치게 구체적이라면, 그것을 이론적으로 다루기 위해선 일정한 추상화 내지는 단순화가 필요하다. 그렇다면 “성매매”를 포괄할 수 있는 좀 더 추상적인 개념, 말하자면 상위개념이 무엇일까? 흔히 “서비스업”이라고 하고, 나 자신도 앞의 글에서 이런 논리를 차용했다. 뭐… 나쁘지 않다. 많은 측면에서 “성매매 여성”은 (같은 서비스업에 속해 있는) 예컨대 “미용사”나 “안마사”, “식당 웨이트리스” 등과 유사하다.

하지만 논의를 좀 더 깊게 진행시키려면, 위와 같은 일반화는 그다지 만족스럽지 않음이 드러난다. 이를테면 앞서 글 (a)에서 나는 “무엇이 ‘섹스워커’를 그와 유사한 성격의 다른 [서비스업] 노동자들과 다르게 보이도록 만드느냐”라고 물었는데, 이 질문이 바로 위의 불만족을 반영하는 것이다. 같은 글에서 나는 “섹스산업은 다른 서비스산업에 비해 자본주의화의 정도가 현저히 낮다는 사실”을 중요한 차이로 들면서도, 정작 이 점을 충분히 발전시키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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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차이점을, “자본에의 고용 여부”라는 문제를 중심으로 풀어낼 수도 있겠다. 만약 성매매를 임노동이라 한다면 거기엔 자본가와 노동자가 있어야 할텐데, 하다못해 동네식당만 봐도 자본가와 노동자가 명확하고 누가 누구에게 고용되어 있는지가 분명한데, 성매매 여성의 경우엔 그렇지가 않다는 것이다. 사실 성매매가 임노동이라고 주장하는 쪽에서조차도 “성매매자의 자본에의 고용 여부”에 대해선 대답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 오히려 내가 보기엔, 성매매가 임노동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쪽에서 워낙 강력하게 “성매매자는 자영업자다”라고 주장을 해대니까 성매매가 임노동이라고 주장하는 쪽에선 “성매매자는 자영업자가 아니다”라고 반박하는 수준에서조차도 (매우 불충분하게) 성매매자의 “임노동자성”을 근거지을 수 있게 되는 것도 같다(꼭 그렇진 않겠지만). 즉 “자영업자가 아니니까 임노동자”라는 식으로. 요컨대, “성매매자의 자본에의 고용 여부” 문제엔 크게 두 가지 문제가 결부되어 있다는 얘기다: (1) 성매매자는 자영업자인가, 아니면 어딘가에 고용되어 있는가? (2) 만약 성매매자가 고용되어 있다면, 그를 고용한 주체는 자본인가? 여기서 우리는 (1)에 대해선 매우 자신있게 “어딘가에 고용되어 있다”라고 대답할 수도 있겠지만, (2)에 대해선 머뭇거리지 않을 수 없다. 즉 성매매 여성을 고용한 포주를 과연 자본가라고 할 수 있는가?!

이 대목에서, “생산수단을 독점해 노동자를 고용하는 게 자본”이라는 교과서적인 대답을 내놓는 것은 큰 도움이 안 된다. 이렇게만 보면, 포주는 자본가 맞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이것을 안다. 사실은, 이것을 “앎에도 불구하고” 의심을 떨칠 수 없는 것이다. 왜일까? 내가 보기에, 그 “의심”의 근원은 바로 성매매업이 (1) 실정법에 위반되고 (2) 도덕적으로도 구리며 (3) 이상의 이유로 “사회적 주권”을 얻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앞에서 성매매가 “서비스업”에 속한다고 했는데, 이제와 다시 보면 성매매는 “블랙마켓“에 속하는 것 같지 않은가(결국 둘 다일지라도)? 그래서 이를테면 성매매는 마약매매나 불법도박과 더 비슷해 보이지 않은가? 그렇다면 포주나 마약밀매조직 보스를 “자본가”라고 부르는 게 타당한가? “블랙마켓”이라는 명칭이 가리키는대로, 오히려 이들은 그저 “경제 바깥에” 있는 것은 아닐까?

점점 더 혼란스러워지기만 하는 것 같다. 이렇게 정리해보면 어떨까? 성매매를 서비스업에 속한다고 보는 것은 성매매에 대한 “노동 형태/수행과 관련된 규정”이고, 성매매를 블랙마켓에 속한다고 보는 것은 성매매에 대한 “사회적 관계와 관련된 규정”이라고. {자본론} 1장을 읽어본 사람들(!)에게 좀 더 익숙한 방식으로 말하면, 전자는 “사용가치”와 관련된 규정, 후자는 “가치”와 관련된 규정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이렇게 구분하면, 성매매를 임노동으로 보느냐 여부는 전자보다는 후자에 입각한 문제가 아닌가 한다. 즉 우리가 어떤 노동을 임노동으로 보느냐의 기준으로 전자만을 삼는다면, “가사도우미가 임노동자이므로 주부도 임노동자다”라고 말하는 것도 가능하겠지만, 보다시피 이건 전혀 엉뚱한 진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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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쯤되면, 성매매 말고 블랙마켓에 대해 얘기해도 될 것이다. 즉 현재의 사회적 관계라는 맥락에서 보면, 성매매자가 임노동자냐는 질문은 미용사가 임노동자냐는 질문보다는 마약거래상이 임노동자냐는 질문과 훨씬 더 가깝다. 그리고 성매매는 우리에게 매우 민감한 사안이므로(대표적인 이유는 “몸” 내지는 “성”이라는 것이 개입되어 있어서), 성매매 대신 마약거래에 대해 말하는 편이 더 자유로울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질문은: “먀악거래상은 (또는 불법도박장에 고용된(!) 딜러는) 임노동자인가?”가 되겠다(마찬가지로, “마약밀매조직 보스는 자본가인가?”라는 질문도 가능하겠다). 여기에 먼저 답변을 내린 다음 성매매에 대해 얘기해도 늦진 않을 것이다.

(성매매자와 마찬가지로) 마약거래상 중에는 자영업자처럼 보이는 이들도 없진 않지만 그들은 대체로 거대한 마약밀매조직에 고용된 끄나풀일 가능성이 크다(그냥 영화에 나오는 거 상상해도 상관없다—그게 실제 현실과 일정한 거리가 있다는 건 여기선 별로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성매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마약밀거래는 우리사회에 매우 뿌리깊게 박혀있지만 실정법에 위배되고 도덕적으로 구리며 사회적 주권도 없다. 그리고 성매매와 마찬가지로 그것을 합법화해야 한다는 주장도 상당히 크게 존재한다.

바로 이와 같은 마약거래에 종사하는 이들, 좀 더 일반적으로 “블랙마켓”에 속하면서 누군가에 고용되어있는 이들은 “임노동자”인가? 그들을 임노동자라고 규정하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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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과 같은 논의들을 깔고서 보면, 성매매의 임노동성에 대한 질문, 즉 좀 더 일반적으로는 어떤 노동이 임노동이냐는 질문은 단순히 그 노동이 자본에 고용되어 있느냐는 형식적인 문제 이상의 것임이 명확해진다. 이 질문은, 자본주의 경제/사회에서 “임노동”이라는 것이 갖는 사회적 의미 전반을 염두에 두고서 접근될 필요가 있다. 여기에서 소외(된 노동), 사회적 분업, 노동을 통한 개인들의 상호의존 등등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돌이켜보면, 이런 식의 문제제기가 그동안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다. 대표적으로 가사노동을 둘러싼 논쟁을 들 수 있겠다. 가사노동이란 사회전체의 재생산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없어서는 안 될 필수불가결한 것이지만, 통상적인 의미의 경제에는 속하지 않는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가사노동이 생산적이냐 비생산적이냐를 두고 실제로 벌어진 숱한 논쟁들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생산성 여부를 따지는 것—그러니까 이런 문제를 “따지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일일 수도 있다(왜냐하면 이런 논의 자체가 실은 경제 내부에서나 가능한 것이므로. 예컨대 제조업은 생산적, 유통업은 비생산적 따위).

물론 그렇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된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가사노동은 경제 바깥에 있는 것이라고 규정하는 순간, 우리에겐 통상적인 의미의 “경제”와 “경제 외부” 사이의 관계, 또는 “경제”의 재생산에 대해 “경제 외부”가 행하는 기여 또는 미치는 영향, 또는 “경제”의 재생산과 “사회”의 재생산 사이의 관계, 또는 (앞서의 구분을 원용하면) “가치”가 생산/유통/분배되는 “경제”에 대해 그저 “사용가치”만을 생산할뿐이면서도 가치의 일부분이 소비되는 “비경제”가 맺는 관계라는 새로운 문제들이 제기될 뿐이다. 그리고 이런 새로운 문제들은, 통상적인 경제의 영역만을 기반으로 하는 정치경제학 이론에 대해 새로운 도전을 제기하고 새로운 발전의 계기를 제공하며, 궁극적으로는 “경제”라는 것 자체를 다시금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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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다시 애초의 질문으로 돌아가보자. 성매매는 (형식적으로든 실질적으로든) 임노동인가? 그렇다고도 할 수 있겠고, 아니라고도 할 수 있겠다. 또는 성매매에 대해 그런 질문을 제기하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대답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어떤 근거로 그런 대답을 내놓느냐이고, 더 중요한 것은—만약 우리가 이런 질문/대답에 일정한 이론적 의의를 부여하고자 한다면—그런 대답이 기존의 이론에 어떤 발전계기를 제공하는지를 밝히는 일이다. 한편, 앞서 질문해주셨던 whee님은 성매매가 서비스업에 속하느냐고 물으셨는데, 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덧붙여 말하면, 이 글에서 나는 일정한 정도까지는 서비스업에 속한다고 봐도 좋겠지만, 논의를 더 깊게 진전시키는 데에는 그런 시각이 한계를 갖는다고 말했다).

끝으로, 이 자리를 빌어 일종의 “세태 비평”을 좀 하고자 한다. 이 글에 앞서 H님께서 최근 세계경제의 동향과 그에 대한 해석에 대한 글을 연달아 두 편을 써주셨는데, 나는 모름지기 마르크스주의자라면 성매매보다는 그런 문제들을 먼저 볼 줄 알아야 한다고 진심으로 생각하는 바다. 물론 내가 “성매매”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 개개인을 나무라는 것은 결코 아니다. 누군가에겐 그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일 수도 있다. 하지만 마르크스주의자 또는 좌파라고 불릴만한 집단 안에서 “세계경제위기”보다 “성매매”에 전반적으로 더 관심이 많다는 것은 상당히 큰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글은, “성매매” 또는 “성노동”의 정치경제학적 이해를 위한 하나의 해설이기도 하지만, 그런 시도는 이쯤에서 그만두라는 (그러니까 “성매매” 또는 “성노동”에 관심을 갖지 말라는 게 아니라 그에 대한 “이론적” 이해 시도를 적당히들 해달라는) 정중한 부탁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