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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고] 자본론, 어디까지 읽었니? (자본론 제2권 읽기 개시!!)

나는 지난 1년반 동안 몇몇 사람들과 함께 매주 모여앉아 {자본론}을 읽었다. 이제 1권을 다 읽었고, 우리는 이제 2권에 들어가려 한다. 혹시 이런 일에 관심있으신 분들이 계실까 해서 여기에 광고를 한다.

자본론2권광고2

아시다시피 {자본론}은 모두 3권까지 있다.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자본주의적 생산과정’이라는 부제목이 붙은 제1권이다. 사람들이 “나는 {자본론}을 읽었다”라고 할 때, 대체로 이는 1권을 읽었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우리가 제2권을, 그리고 나아가 제3권을 읽으려고 하는 것은 왜인가? 말할 것도 없이 그것은, 1권만으로는 {자본론}의 전모를 알수없기 때문이다. {자본론}은 자본주의 경제의 가장 본질적이고 추상적인 차원에서 출발해, 우리 눈에 실감나게 다가오는 가장 구체적이고 피상적인 차원으로 나아간다. 때문에 {자본론}의 논의들을 현실에 적용하고자 할 경우, 또는 {자본론}의 시각으로 현실을 해석하려 할 경우, 1권만으로는 크게 부족하다. 언제나 우리 눈앞의 현실은 구체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누군가가 {자본론} 1권만의 지식을 가지고 현실을 해석하려 한다면, 이는 필연적으로 ‘환원론’이 될 가능성도 크다.

어쨌든 ‘고전’을 읽고, 이를 바탕으로 오늘의 우리를 반성해보는 일은 크게 권장할만한 일이다. 특히 {자본론} 1권만을 주마간산 격으로 훑고서 마음한켠에 아쉬움이 있으셨던 분들께는 좋은 기회가 아닐까 싶다. 물론 이 사회에는 그 1권마저도 제대로 영접하지 못하신 분들이 훨씬 더 많은데, 이분들도 의지만 있다면 참여를 망설이실 필요가 없다. 숙련된 조교(-_-)와 선학들(^_^)이 도움을 줄 수 있으니 말이다.

참고로 우리 모임에 대해 간단히 정리해보겠다.

애초 우리는 자유인문캠프(링크)의 2011/12년 겨울강좌에서 출발했다. 여기서 나는 ‘자본론 읽기 입문’이라는 제목으로 {자본론} 제1권 제1장과 제2장을 강독 형식으로 읽으면서 해설했다(링크). 8회에 걸친 강좌에서 아쉬움을 느낀 수강생 중 몇몇분들의 제안으로 ‘읽기’를 정례화하기로 하고(링크), 결국 2012년 3월부터 지난주까지 약 1년반에 걸쳐 우리는 거의 매주 만나 책을 읽은 결과 한글판 기준 1000쪽이 넘는 {자본론}을 읽어냈다(링크). (※참고: 관심 있으신 분들은 여기 링크들을 모두 보시는 게 좋습니다^^)

우리 모임은 다른 {자본론} 팀들과 몇 가지 점에서 다르다. 첫째, 보통은 일정한 분량을 각자 읽고 매번 정해진 사람들이 발제를 해 그에 대해 토론하는 식인데 반해, 우리는 직접 현장에서 책을 읽는다. 이는 속도도 느리고 구성원들이 다소 수동화된다는 단점이 있지만, 참여에 부담이 적을뿐만 아니라 의지를 가진 이들에겐 ‘행간을 읽어내는’ 즐거움까지 준다는 점에서 커다란 매력이 있다. 둘째, 대개 {자본론} 학습이 특정한 단체에서 제공되는 데 반해서 우리는 순수한 사적 모임에 가깝다. 이것이 특별히 자랑할만한 일은 아니지만… 뭐, 그렇다고ㅎㅎ

셋째, 우리가 책만 읽는 것은 아니다. 계절이 바뀌면 놀러 다니기도 했고 책읽기가 지겨우면 그냥 영화보고 술먹으며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것과는 별개로… 우리가 그간 2회에 걸친 ‘부정기 포럼’을 열었다는 점은 각별히 알리고 싶다. 뿐만 아니라, 최근엔 영어로 된 간단한 논문—물론 우리가 읽는 {자본론}과 관련된—을 선택해 함께 읽고 번역을 하기도 했다(번역문은 조만간 공개될 것임). 부정기포럼에 대해선 다음 포스팅을 참조하시고, 앞으로도 이는 쭈욱~~ 계속될 것이다(현재 2~3회분은 이미 기획된 상태).

  • [제1회 부정기포럼/2013.2.23] 불효자는 울지않고 자본론을 읽습니다 (링크1, 2)
  • [제2회 부정기포럼/2013.7.27] 아시아로 간 삼성, 서울로 온 장대업 (링크)

넷째, 특이한 사람들이 많다. 에… 이상에서 열거한 것 말고도 우리 모임만이 갖는 특징과 매력은 많다. 나머지는 직접 참여하면서 확인하시길. 여하튼,

{자본론} 2권을 곧 시작합니다. {자본론} 1권만 읽으신 분들, 읽고는 싶은데 아직 1권도 제대로 안 읽으신 분들, 모두 환영입니다. {자본론} 2권을 읽읍시다!!!

자본론2권광고1

* 참고로… 우리는 어떤 판본을 정해놓고 읽지는 않습니다. 아무거나 가져오셔요. 한글판뿐 아니라 영어판, 독어판, 일어판, 불어판 등등. 모두 환영입니다! (얼터너티브 호객글/링크)

** 위 글에 몇몇 링크들이 있습니다. 관심 있으신 분께선, 그 링크들을 하나씩 살펴보시면 도움이 되실 겁니다.

세제개편안 논란에 대하여 (3/끝) 무엇을 할 것인가

4. 세금과 임금: 현실에서는 모든 세금을 자본이 부담하진 않는다

앞에서 모든 세금은 원칙상, 그리고 이론적으로 자본으로부터 나온다고 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다.

모든 세금이 자본으로부터 나온다는 명제의 근저엔 임금에 대한 더욱 근본적인 논의가 전제되어 있다. 바로, ‘임금=노동력의 재생산비용=노동자의 생존비용’ 등식이 그것이다.

일단, 자본으로부터 직접 징수되는 법인세가 자본에서 나온다는 것은 쉽다. 문제는 노동자 각자의 임금으로부터 공제되는 소득세인데, 정의상 임금은 노동자의 사회적 생존비용이므로, 여기에서 한푼이라도 세금으로 나간다면 노동자의 재생산에 차질이 생길 것이고, 이는 결국 자본이 (임금인상이라는 형태로) 보충해줄 수밖에 없다.

그러나 바로 그 노동자의 재생산비용, 또는 ‘사회적 생존비용’이라는 것이 가변적이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일정한 사회적 평균값일 수밖에 없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그러한 평균은 변화하지 않을 수 없고, 나라마다, 그리고 한 나라 안에서도 지역이나 계층마다 다를 수 있다. 결국 ‘임금=재생산비용’이라는 명제는, 이런 모든 차이들을 사상한 매우 추상적인 규정인 셈이다. 마르크스는 임금을 결정하는 이런 모든 요소들을 ‘임금의 역사적, 도덕적 요소’라고 불렀다.

뿐만 아니라, 임금은 적어도 일시적으로 그러한 평균값을 상회하거나 하회할 수도 있다. 갑작스럽게 물가가 올랐을 때, 임금은 명목크기가 유지된다 해도 실질적으로는 하락한 것이며, 이는 곧 노동자들의 생활수준 저하로 나타난다. 즉 정상적인 재생산이 안 되는 것이다. 가장 추상적인 이론의 차원에서 봤을 때, 이러한 상황은 곧 임금인상을 통한 노동자의 투쟁을 통해 해소될 것이기에 그저 일시적인 교란상황에 그친다. 그러나 문제는, 실제 현실에선 노동-자본 간의 계급관계에 따라 그러한 임금인상이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 그리하여 만약 저하된 실질임금 수준이 장기화되면, 그것이 새로운 사회적 평균으로 자리잡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세금의 경우도 다르지 않다. 원칙상으로는, 노동자로부터 걷어가는 소득세가 많아지면, 그 차액만큼을 노동자가 자본가로부터 임금인상을 통해 받아낼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못할 경우엔 정상적인 노동력 재생산에 차질이 생기며, 나아가 그러한 비정상적인 상황이 새로운 ‘정상’으로 자리잡을 수도 있다. 이럴 경우, 세금은 자본가가 낸 것이 아니고, 노동자의 생활수준 저하를 통해 지불된 게 된다. 바로 이러한 까닭에 나는 앞서 소개한 ‘경제위기와 복지국가’라는 글에서 현대적 조세제도“치열한 계급투쟁의 결과 얻어낸 임금인상이라는 ‘전리품’을 자본가계급이 은밀하게 회수해가는 교묘한 방식”이라고 부른 것이다.

5. 세금, 복지, 임금: 증세의 조건?

간단히 정리해보자. 한편으로 세금은 (자본이 직접 지불하지 않더라도) 궁극적으로는 자본으로부터 나온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세금은 (특히 자본이 직접 지불하지 않는 경우에) 노동자 서민대중의 삶의 질 저하를 대가로 하기도 한다.

이것은 하나의 모순인데, 이러한 모순이 집약되어 나타나는 것이 바로 ‘임금’이라는 범주다. 증세 자체는 중요한 게 아니고, 증세의 결과 줄어든 소득을 노동자들이 임금인상을 통해 보상받아낼 수 있는지 여부가 핵심이란 얘기다. 그리하여 현재의 논쟁이나 투쟁도 바로 여기로 집중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 현재 정부의 세제개편안이 포함하고 있는 ‘보편증세’의 문제는, 현재 논쟁의 양 당사자들이 주장하는 대로 저소득 노동자를 털 것이냐 고소득 노동자를 털 것이냐의 문제가 아니라, 증세를 임금인상으로 성공적으로 연결시켜 내느냐 여부의 문제다. 좀 더 평이하게 말하면, 증세의 결과 노동자 서민대중의 삶의 질이 저하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어쩌면 누군가는 이렇게 물을지도 모른다. 지금은 세금을 걷어서 전투기 사자는 것도 아니고 복지를 하자는 것이니, 어차피 노동자가 세금을 내더라도 더욱 큰 복지로 돌려받을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러니 여기에서 임금인상은 별개의 문제 아닌가? 한편으론 맞는 말이다. 이를테면, 정부가 노동자/대중으로부터 세금으로 거둬들인 재원으로 복지정책을 시행하고, 그러한 복지정책이 노동자의 재생산비용을 낮춰 세금인상분을 정확히 상쇄하고도 남는다면, 이러한 증세를 통해 노동자들의 삶이 더 나아질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은 바로 이것이 ‘내가 만드는 복지국가’류의 프로젝트들의 근간을 (명시적으로든 암묵적으로든) 이루는 아이디어가 아닌가 한다.

하지만 이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소리다. 첫째, 현재로서는 노동자와 서민대중으로부터 거둬들인 추가세수가 그들을 위한 복지에 쓰일지, 아니면 자본이 내지 않은 세금을 보충하고 나아가 자본을 위해 쓰일지, 심지어 전투기 구입하는 데 쓰일지조차 확실치 않다. 올초부터 정부에서는 ‘세수부족’을 입버릇처럼 말하곤 하는데, 지금 논의되는 증세규모는 적극적인 복지는커녕 세수부족을 메우는 데도 모자란 수준이다.

둘째, 추가세수가 복지에 쓰이더라도 문제다. 왜냐하면 현재 우리나라의 노동자와 서민대중에게 필요한 것은 현재 삶의 수준의 유지가 아니라 그 대폭적인 상승이기 때문이다. 사실 이것은 자본주의 하에서 모든 계급투쟁이 지향해야 할 바다. 왜냐하면 여기에서 모든 경제적 가치는 노동자와 서민대중이 만들어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많은 세금을 내고, 아무리 많은 복지를 해도, 일하지 않는 자본가가 단 한푼이라도 챙겨간다면 착취는 철폐된 것이 아니고, 따라서 노동자계급은 승리한 것이 아니다.

6. 다시 복지로: ‘어떤’ 복지냐의 문제

여기서 잠시 현재 한국사회에서 복지가 이슈로 떠오르는 배경이 무엇인지를 떠올려보자. 왜 보수정권조차도 복지를 하려고 하는가? 바로 대중의 활력이 극도로 저하돼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신자유주의 때문인지, 경제위기 때문인지는 여기서 따지지 말자. 여하튼 그러한 대중의 활력 저하가 단순히 (일부) 노동자들의 삶을 피폐하게 만드는 것을 넘어 경제의, 그리하여 자본의 원활한 재생산을 방해하고 있고, 이를 보기좋게(?) 해소할 수 있는 가장 유력한 대안이 바로 현재 한국에서 제기되고 있는 복지인 것이다.

현재 우리 사회에서 복지란 자본(주의) 재생산의 위기를 타개해주는 수단으로 제시되는 것이다. 이를테면 비정규직 문제를 보라. 너무 심각하다. 사회의 응집력과 재생산을 크게 방해할 정도다. 어떻게 해결할까? 정규직화? 임금인상? 그렇게 되면 얼마나 좋겠나. 이러한 명확한 해결책을 취하지 않고도 비정규직 문제의 폐해를 피하기 위해 그들은 ‘복지’를 선택한 것이라고 보면 된다. 즉 그들은 비정규직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관리를 위해 복지확대를 추구한다.

이 대목에서 ‘어떤 복지냐’가 중요한 질문으로 떠오른다. ‘체제의 유지와 관리’ 차원에서, 즉 대중의 삶의 수준을 현재의 상태에서 안정적으로 관리하고자 복지를 추구하는 저들과 달리, 노동자계급과 서민대중의 이익을 옹호하는 우리는 어떤 복지를 원하는가? 적어도 현재의 한국사회에서 진보진영의 복지에 대한 태도는, 그것을 바닥에 처박힌 대중의 삶의 질을 높이고 극단으로 치달은 경제적/사회적 불평등을 축소하는 계기로 만드는 것이어야 한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이러한 복지에 대한 인식, 그리고 그를 향한 투쟁은 복지(국가)와 세금이란 것이 그 자체로 계급투쟁의 표현임을 명확히 하는 데서 출발한다. 자본가에 대한 투쟁은 임금을 가지고 하는 것이 보통이다. 어쩌면 그러한 투쟁을 통해 충분한 임금을 확보해낸다면 복지도 필요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오늘 한국의 현실에서 이는 불가능에 가깝다. 최근 최저임금 결정에서 극명히 드러났듯이, 현재 한국사회에서 자본과 노동 간의 힘관계는 현저한 임금인상을 낳을 수 있을 정도가 아니다. 노동은 더없이 취약할 뿐만 아니라 사회의 다양한 주체들로부터 점점 더 고립되고 있다.

바로 이런 현실에서 복지의 확대는 자본가에 대항한 노동자계급의 주요한 투쟁을 되살릴 수 있는 좋은 계기다. 임금 올려달라고 회사를 상대로 투쟁하는 것보다 더 많은 복지를 달라고 국가를 상대로 요구하는 것이 훨씬 더 많은 정당성을 갖는 게 요즘 한국의 현실이다. 이것이 바람직한 현상은 아닐지라도, 노동자와 서민대중의 이익을 옹호하는 좌파는 그러한 복지에의 열망을 대중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한 계기로, 나아가 계급투쟁의 정당성을 새롭게 정의하는 적극적인 계기로 끌어올릴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어떠한 일이 있어도 이제껏 논의되고 있던 복지가 후퇴되는 일은 막아야 하며, 나아가 더 많은 복지를 요구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만약 증세가 필요하다면, 이에 대해서도 적극적인 태도가 필요하다. 중요한 것은 노동자와 서민대중이 제 살을 깎아 복지비용을 대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것이 종국에 그들의 삶을 ‘조금’ 낫게 해준다 해도 말이다. 따라서 증세의 최우선순위에는 자본가, 그리고 그간 제대로 세금을 내지도 않았던 대자산가에 대한 법인세나 재산세, 자본이득세가 올라야 할 것이다.

또한 전술적인 이유에서든, 아니면 위와 같은 증세로는 충분한 복지재원이 마련되지 않아서든, 만약 노동자와 서민대중에 대한 보편증세(소득세/소비세 인상, 그리고 사실상의 보편증세인 사회보험료 인상 등)가 필요하다면, 이것을 받아들일 수도 있어야 한다. 단, 이럴 경우, 엄청난 대중의 저항이 있을 것인데, 좌파들은 그러한 저항이 복지에 대한 저항이 되지 않으면서 자본가와 대자산가 집단을 향하도록, 그리하여 궁극적으로 임금인상에의 대중적 요구로 전환될 수 있도록 유도할 수 있어야 한다. 요컨대, 좌파들은 현재 일어나고 있는 ‘복지’ 국면, ‘증세’ 국면을, 현재의 미약한 계급역관계를 뒤집는 기회로 사용해야 한다.

(※ 사족: 복지비용을 실질적으로 자본가가 부담케 하는 데 있어 핵심이 보편증세와 더불어 임금인상을 관철시키는 것이다. 많은 부동산을 소유한 대자산가들과 관련해서도 마찬가지다. 단순히 그들에게 엄격하게 과세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러한 과세의 결과가 이를테면 세입자에게 전가되지 않도록 전월세상한제 등이 보조적으로 필요하다.)

(끝)

세제개편안 논란에 대하여 (2) 세금의 본질과 계급투쟁

2. 복지재원? 모름지기 모든 세금은 자본으로부터 나온다

어쨌든 복지를 위한 재원이 쟁점으로 되고 있으니, 그에 대해 한번 생각해보자. 결론부터 말하면, 모든 복지재원은, 나아가 모든 세금은 자본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이다. 이것을 깨닫는 것이 가장 중요한 포인트다.

당연히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게 뭔 소리냐, 하실 것. 아니, 내가 열심히 일해서 받은 피같은 임금에서 세금이 나가는데 그게 무슨 개소리냐고! (-_-) 근데 그렇지가 않다.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정치경제학의 대답}이라는 책에 실린 나의 글 ‘경제위기와 복지국가’를 보시면 된다(링크). 책을 구하기가 번거로우신 분은, 이 블로그에 있는 ‘공공요금의 정치경제학’ 씨리즈를 보셔도 되겠고(링크1, 2, 3), 원하시면 앞의 글을 파일로 보내드릴 수도 있다(저 EM의 이메일주소는 우측상단에 있슴다). 핵심을 요약하면 이렇다. ▲자본주의 경제에서 임금이란 본질적으로 노동력의 재생산비용이다(물론 이것은, ‘이론적으로’, ‘평균적으로’ 그렇다는 얘기. 현실에선 당연히 개인적인 차이와 다양한 교란요인이 있다). ▲임금이 그러한 재생산비용에 못 미치면 노동자의 정상적인 재생산은 위협받기 때문에, 원리상 노동자의 임금에서는 세금이든 뭐든 자신의 (사회적) 생존과 관계없는 비용이 지출될 수는 없다. ▲그런데도 현실에서 노동자들은 세금을 내는데, 이는 곧 자신의 생존비용 이상으로 사전적으로 임금상승이 있었음을 의미할 따름이다. ▲따라서 모든 세금은 궁극적으로는 자본에서 나올 수밖에 없다. (다시 말씀이지만, 이러한 사항을 지금 이 글에서 상술할 수는 없다. 더 자세한 논의가 궁금하신 분은 위에서 언급된 글들을 보세요^^)

모든 세금은, 따라서 현재 논란이 되고 있는 추가적인 복지재원도 결국은 자본으로부터 나올 수밖에 없다는 것. 바로 그것이 핵심이다. 이를테면 이번 세제개편안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소득세의 (사실상의) 증세도, 겉보기엔 노동자의 주머니를 터는 것이지만 본질적으로 그러한 재원은 자본가의 금고에서 나오는 것이란 얘기.

말할 것도 없이, 이 경우 증세가 궁극적으로 임금상승으로 이어진다는 가정이 있어야만 한다. 이론적으로는 당연히 그래야 한다. 왜냐하면 기존에 노동자의 세후 임금이 그의 재생산비용(즉 생존비용)이라면, 소득세 증세 이후의 임금은 그러한 재생산비용에 못미칠 것이므로 원활한 재생산을 위해서는 임금인상이 필수적인 것이다. (하지만 이 경우 임금인상분과 소득세 인상분이 일치할 필요는 없다. 소득세 증세의 일부는 노동자에게 혜택으로 돌아올 것이므로, 임금인상은 소득세 인상분보다 작을 것이다.) 이 얘긴 잠시 뒤에 더 하자.

3. 자본으로부터 어떻게 재원을 빼낼 것인가?

이렇게 보면, (‘어떤 복지인가’의 문제는 차치하고) 복지를 위한 재원마련의 방법론은 결국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자본으로부터 복지재원을 빼낼 것인가’의 문제로 귀결된다.

이를테면 법인세를 더 걷는 것은 자본으로부터 직접 수금을 하는 것이겠고, 소득세를 올리는 것은 간접적인 방식이다. 부가세도 마찬가지. 흔히 사람들은 자본이 법인세 인상에는 반대하지만 소득세 인상에는 찬성할 것이라고 짐작할텐데, 전혀 그렇지 않다. 정도야 덜하겠지만 자본은 소득세나 부가세 인상에도 반대한다. 그것은 곧 임금인상으로 자신에게 돌아올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일반적으로 복지나 사회기반시설이 잘 갖춰지면 자본에도 이롭다. 먼저 자본 자신이 여러모로 이득을 보고, 노동력 재생산을 위한 직접적 비용도 줄어들 것. 따라서 자본은 국가지출의 증가에 대해, 이 모든 사항들을 고려해 입장결정을 할 것이다.)

대체로 자본으로부터의 직접적 세금징수인 법인세 인상은 자본이 가진 현실적인 힘을 고려하면 매우 어렵고, 소득세 인상은 자본의 저항은 상대적으로 덜 받지만 정치적 부담이 상당하다. 등등.

그렇다면 이번 세제개편안에 대해 자본이 격렬히 반응하지 않는 까닭은? 정답은,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대중이 알아서 반대하고 있으니 말이다. 사실 이것이, 모든 세금을 자본이 직접 내지 않고 노동자/대중을 통해 간접적으로도 냈을 때 거둘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정치적 효과다. 어떤 의미에서 국가의 지출을 늘리고 복지를 늘리는 것은 계급투쟁의 성과이고, 따라서 노동-자본 간의 투쟁의 표현인데, 노동자 대중을 통해 간접적으로 조세를 납부함으로써 자본은 그러한 계급투쟁을 노동자들 내부의 갈등, 또는 실체도 모호한 ‘국민적 갈등’으로 치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늘날 세금의 문제를 둘러싼 논란에서 노동자 계급을 옹호하는 이들은 기본적으로 거기에 깃든 계급투쟁적인 측면을 복원하는 데서 출발해야 할 것이다. 부연하자면, 바로 이 지점에, 일종의 사회변혁론으로서의 ‘시민증세론’의 가장 핵심적인 허점이 있다. 본질에 있는 계급투쟁을 보지 못하고, 지극히 피상적으로, 즉 복지를 ‘시민적 합의’의 문제로 제시한다는 것이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한가.

(계속)

[자캠 자본(론)읽기] 들어가기 전에

자유인문캠프 강의가 이제 한주만 지나면 시작이다. 사람이 좀 많아 부담이 되기도 하지만, 이렇게 수요가 많다는 데 조금 놀라기도 했다. 그러나 분명 관심있는 모든 사람들이 모인 것도 아닐 것이다. 따라서 자캠에 오지 않는 이들, 그리고 특히 (여러 사정상) 혼자 공부하는 이들을 위해, 자캠 강의에 함께할 이들을 위해 써둔 글, 일종의 오리엔테이션을 여기에도 옮겨 놓는다. (원문: 로그인 필요)

이번 강의는 잘 아시다시피, 통상적인 의미의 “강의”라기보다는 양방향의, 나아가 다방향의 소통을 필수요소로 하는 일종의 “집단적 대화”입니다. 따라서 여러분들의 참여가 무엇보다 절실합니다. 그러니 함께 책을 읽어나가는 중에, 적극적으로 개입해 주시기 바랍니다. 질서 잡힌 고요함보다는 왁자지껄한 무질서가 차라리 낫겠습니다. (뭐, 이렇게 바람을 잡아도, {자본론}이라는 아우라에 눌려 말한마디 보태기 어려우시리라는 거 잘 압니다. 하지만, 노력해 주세요!)

여러분들이 미리 준비해오실 것은 별로 없습니다. 다만 해당 회에 읽기로 된 분량을 미리 읽어오시는 정도의 노력만 해주시면 됩니다. 물론 그 “사전적 읽기”에는 다양한 정도가 있을 수 있겠죠. 여기엔 정답은 없고요, 각자 처지에 맞게 준비해오시면 되겠습니다.

아울러, 그래도 아직 시간이 좀 있으니 뭐라도 준비를 해보고 싶다, 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을 위해 몇 가지 읽을거리를 추천해 드릴게요. 대체로 제가 쓴 글들이지만, 다음 글들을 미리 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 정치경제학이라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

1-1. 이헌창, 「Political economy와 Economics의 개념과 번역」, 『개념과 소통』 제2 호, 2008 (주소: http://has.hallym.ac.kr/Upload/ades_study_data/개념과_소통 4.pdf).
1-2. 김공회, 「자본주의 질서를 둘러싼 정당성 전쟁」, 『미디어오늘』 2009년 7월 7일 자 (약간 업데이트된 버전의 주소: http://socialandmaterial.net/?p=592).
1-3. 김공회, 「경제학이 나아갈 길」, 『미디어오늘』 2009년 8월 26일자 (약간 업데이 트된 버전의 주소: http://socialandmaterial.net/?p=599).
1-4. EM, 「“사회” 관점의 지성사적 의의」, 2010년 2월 16일 (주소: http://socialandmaterial.net/?p=12).
1-5. 김공회, 「나꼼수와 마르크스: 우리의 ‘가치이론’은 당신의 ‘말빨’보다 강하다」, 『고대문화』 2011년 겨울호 (주소: http://socialandmaterial.net/?p=1474).
1-6. EM, 「[진보신당 청학위 강좌] 제1강의 요약과 보충」, 2011년 11월 29 일 (주소: http://socialandmaterial.net/?p=1525).

약간의 코멘트를 좀 달자면… 일단, 우리가 함께 읽게될 책의 제목은 {자본론}입니다. 여기엔 “정치경제학 비판”이라는 부제목이 달려있지요. 그러니, 무엇보다 이 책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정치경제학(political economy)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할 것이죠? 제가 쓴 2~6의 글들은 모두, 약간씩 포커스가 다르긴 하지만, “정치경제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글입니다. 모두 다 읽으시면 좋겠지만, 입맛에 맞게 골라서 읽으셔도 상관 없습니다(시간순으로, 즉 역순으로 읽으셔도 좋겠군요). 단, 마지막에 있는 것은 최근에 제가 했던 강의를 요약한 것인데, 특히 최근의 경제위기와 관련해서 우리가 {자본론}을 읽는 의미가 간략하게 요약되어 있으니, 참고하십시오. 끝으로… 1의 글은, 마르크스와는 거의 상관이 없지만, 그 나름대로 무지 재밌는 글입니다. 요즘 학계의 한쪽에서 유행하는, “번역어 성립사”에 대한 것인데… 비슷한 종류의 글들 중에서도 특히 잘 된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 비판에 대해 **

2-1. Karl Marx (1988),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김호균 옮김, 중원문화) 중에서 「서문」, 5-10 쪽.
2-2. Michael Heinrich (2000), 「정치경제학비판 관련 참고문헌 목록 및 해설」, 김만수 옮김, 『진보평론』 제5호, 305-48 쪽(특히 305-16쪽).
2-3. 김공회(2007), 「제13장 세계시장」, 김수행·신정완 엮음, 『자본주의 이후의 새로운 사회』, 서울대학교출판부, 355-91 쪽 (특히 제3절 및 제4절) (주소: http://socialandmaterial.net/?p=1139).
2-4. EM, 「경철수고, 또는 마르크스의 지적발달에서 정치경제학의 의의」, 2010 년 3 월 26 일 (주소: http://socialandmaterial.net/?p=29).
2-5. EM, 「What’s in a Name? 자본론 vs 자본: ‘비판’의 의미에 대하여」, 2010년 4월 10 일 (주소: http://socialandmaterial.net/?p=38).

먼저 첫 번째 글은, 마르크스 자신이, “정치경제학 비판”이라는 기획을 어느 정도 명확히 해 놓고 처음으로 공식적으로 발표한 일종의 “지적 회고록”입니다. 짤막하긴 하지만, 그의 지적 편력이 잘 드러난 글이니, 반드시 한번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다음으로 두 번째 글은, 위와 비슷한 회고를 후대의 학자가 한 것입니다. 마르크스/엥겔스 이후의 문헌목록을 다루는 후반부는 나중에 읽으시더라도, 전반부만큼은 미리 봐두시면 좋을 것입니다. 2-3은 2-2의 전반부와 비슷한 성격의 글을, 제 자신이 쓴 것입니다. 특히 3절과 4절을 보시면 되겠습니다. 다음으로 마지막에 있는 두 개의 글들도 시작 전에 꼭 한번씩 읽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

그런데 아마도 여러분들 중에는 아직 책을 사지 않으신 분들도 계시리라 여겨집니다. 또 이미 구입을 하셨더라도, 현재 시중에서 판매되고 있는 두 판본, 즉 김수행 교수님께서 번역하신 {자본론}(비봉출판사)과 강신준 교수님께서 번역하신 {자본}(길) 중에서 어떤 것을 보셔야 할지 고민중이신 분들도 계시겠죠. 이에 대해 제가 드릴 대답은, 그냥 알아서 하시라는 겁니다. 다만, 여러분들의 결정에 도움이 될만한 글을 제가 쓴 것이 있으니, 그걸 소개해 드리는 것으로 글을 마치겠습니다. 하지만 다음 글들이 두 판본을 본격적으로 “비교”한 것은 아닙니다. 그보다는 새로 나온 판본(강신준의 {자본})에 대한 제 소감을 쓴 것이니, 이 점 참조해 주세요.

** 자본? 자본론? **

3-1. 김공회(2010), 「Das Kapital의 성격과 그 번역에 대한 몇 가지 이슈 – 새로 완역 출판된 『자본』 서평을 겸하여」, 『마르크스주의 연구』 제7권 제4호 (2010년 겨울호). (주소: http://socialandmaterial.net/?p=835. 조만간 원문이 저널 홈페이지 http://nongae1.gsnu.ac.kr/~issmarx/html/main.php에 올라올 것임.)
3-2. EM, 「강신준 교수의 『자본』 완역출판에 부쳐」, 2010년 9월 17일 (주소: http://socialandmaterial.net/?p=434).
3-3. 이재현(2010), 「자본가의 머리로 던져진 솜방망이」, 『황해문화』 2010년 겨울호 (주소: http://www.saeul.org)
3-4. 강신준(2011), 「Das Kapital의 번역과 우리나라 마르크스 경제학의 현재와 미래: 김공회의 서평에 대한 답글」, 『마르크스주의 연구』 제8권 제1호 (2011년 봄호). (아직 웹에 없음. 수개월 후에 올라올 것임.)

3-1을 보시면 좋겠지만, 아직 웹에 없으므로 본문을 구하지 못하신 분들은 3-2를 보셔도 됩니다. 3-3은 3-1과 비슷한 시기에 나온 서평인데, 저와는 다른 관점에서 훨씬 더 재밌게 된 글입니다. 그러나 이 또한 아쉽게도 웹상에 공개가 안 되어 있군요. 끝으로 3-4는 3-1에 대한 강신준 교수의 답변입니다. 저의 재답변은 어디 있냐고요? 별로 답변할 만한 게 없어서 안 했습니다 ㅋㅋ 이상입니다! 혹시 질문이나 기타 덧붙이실 말씀 있으시면, 자유롭게 답글 또는 별도의 글을 달아주시기 바랍니다!

돈벌이로서의 자본(론) 강의

강신준 교수께서 “자본” 강의를 하신단다. http://nodong.org/bbs/717017

“강의 대상”을 보니, 딱 나다. ㅎㅎ 장소가 명시되어 있지 않은데… 대충 맞기만 하면 나도 수강하고 싶다. 질의응답시간으로 할당된 게 30분이니, 강의를 좀 더 풍부하게 만드는 데 나름 기여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

그런데 문제는 강의료다. 10만원. 총9회로 구성되어 있으니 한번에 1만1천원. 어떻게 보더라도 적은 것은 아니다. 몇 명이나 올까? 그래도 번역자인데다가 여러모로 “명망가”이시니, 나보단 많이 오시겠지? 지난 여름방학 중에 했던 내 강좌에 서른 몇 명이 왔으니 말이다. 이런데도 강의료를 저렇게 많이 잡은 것은 좀 놀랍다. 게다가 약 15만원 하는 책을 “대본”으로 삼고 있으니, 실질적으로 강의료는 (몇몇 부교재까지 합치면) 30만원에 육박!

문득 생각해본다. 저분은 한번 강의해서 얼마를 챙기실까? 강의료+인세… 뭐 좀 웃긴다. 개인적으로 나는 “자본(론) 강의”라고 해서 공짜로 제공되어야 한다고는 추호도 생각지 않는다. 내게 그것은 “밥줄”이기도 하기에 더 그렇다. 그러나 저건 좀 아니다. 저 강좌를 여는 주체 입장에서 저 강좌가 무슨 대단한 “수익사업”이 아니라면, 강의료가 10만원이나 될 까닭이 전혀 없을 것이기에 그렇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수유연구소 같은 데서 몇십만원씩 받고 강좌를 여는 것은 차라리 이해가 된다. 이런 강좌들은 그들 입장에선 일종의 “수익사업”이기 때문이고, 그들은 거기서 얻은 수익으로 일상적인 “운영”을 해야할 것이기 때문이다(“이해 못할 정도는 아니다”라는 것이지, 그들의 방식에 동의한다는 건 아니다). 비슷한 의미에서… 이것(http://blog.jinbo.net/nga_sf/64)도 (강교수의 강좌보다 “단가”가 더 높긴 해도) 이해가 된다.

하지만 강교수는 대학교수 아닌가? 동아대학교 정교수의 평균연봉이 1억쯤 되던데… 설마 돈이 없으셔서 저렇게 “무리수”를 두시는 건 아닐 거고… 배경이 참으로 궁금하다. 요새 사회적으로 다양한 형태의 “기부”, 특히 “재능 기부”가 유행인데, 강교수께서는 이런 세태에는 좀 둔감하신 것 같다.

하여튼… 내겐, “전공이나 학력 등 어떤 예비적인 조건도 요구되지 않음”이라는 저 강좌의 “강의 대상”이 매우 기만적여 보인다. 적어도 “어떠한 조건도”라는 문구를 붙이려면, 강의료를 저렇게 받아선 안 된다.

[201012] Das Kapital의 성격과 그 번역에 대한 몇 가지 이슈

[제목] Das Kapital의 성격과 그 번역에 대한 몇 가지 이슈 – 새로 완역 출판된 <자본> 서평을 겸하여
[출처] 《마르크스주의 연구》 제7권 제4호 (2010년 겨울호)
[원문] 여기를 누르면 연결됩니다!

위와 같은 글을 얼마전 써서 저널에 냈다. 참고로 위 논문이 실린 《마르크스주의 연구》의 최근호는 ‘신MEGA 출판의 역사와 의의’라는 주제의 특집으로 꾸며졌다. 내 글도 그 특집의 일환으로 마르크스문헌학(Marxology)에서는 국내 유일의 학자라 할 수 있는 정문길 선생과 MEGA 편집에도 적극 참여하고 있는 일본의 오무라 이즈미 교수의 글과 함께 실려있고.

내 글의 <초록>을 옮겨오면 다음과 같다.

이 글은 마르크스의 Das Kapital이 최근 우리말로 새롭게 완역 출판된 것을 계기로 Das Kapital의 성격 및 그것의 번역과 관련된 몇 가지 이슈들을 고찰한다. 또한 이는 이 새로운 『자본』(강신준 옮김, 도서출판 길, 2008-10)의 서평을 겸한다. 옮긴이에따르면 이번 판본의 가장 중요한 의의는 그것이 ‘원전 번역’이라는 것인데, 실제번역과 관련된 주요한 사항들을 살펴본 뒤 이 글은 이번 판본에서 ‘원전 번역’의묘가 만족스러운 수준으로 살아나지는 않았다고 주장할 것이다. 다음으로 우리는이번 길판의 성격을 규정하는 데 결코 작지 않은 역할을 하는 옮긴이 자신의 ‘해제’를 검토한 뒤, 그것이 독자들의 『자본』이해를 돕기보다는 어떤 점에서는 심각하게방해함을 보일 것이다. 끝으로 우리는 번역 대본의 선택은 적절했는지를 살펴봄으로써, 『자본』에서 ‘원전’ 또는 ‘정본’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물을 것이다. 이를 통해우리는, 마르크스의 경제이론에 대한 연구의 최근 성과들로 미뤄봤을 때 Das Kapital을 이해하는 방식이 ― 그 ‘해석’의 다양성과는 별도로 ― 복합적으로 될 필요가 있음을 주장할 것이다.

물론 이 글은 이 블로그를 통해 공개했던 기존의 글들을 그 모태로 하고 있다. 그 중 첫 번째 글을 (강신준 교수의 번역본 제1권이 나온) 2008년 상반기에 썼으니, 말하자면 위 논문은 약 2년 반 동안의 잉태기를 거친 셈이다. 그러나 제2-3권의 번역본이 나온 것이 작년 9월 초였고, 당시 내 개인적인 사정도 있어서, 정작 논문을 쓰는 데 충분한 시간을 가질 수 없었다. 그 결과 아쉽게도 몇 가지 세부적인 부분에서 불만족스러운 부분이 있다.

그런 불만사항들 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이, 위 글을 쓰면서는 MEGA를 참조하질 못했다는 사실이다. 이는, 위 글에서 MEGA에 대한 언급이 적지 않다는 사실에 비춰보면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다. 앞으로 다른 누군가에 의해 개선되면 좋을 것이다.

끝으로, 내 글과 거의 동시에 위 『자본』의 서평이 다른 매체에 실리기도 했다. 《황해문화》 2010년 겨울호에 실린 이재현 선생의 <자본가의 머리로 던져진 솜방망이>가 그것이다(링크). 제목에서 볼 수 있듯이 이 글은 이번 강신준 교수의 번역본을 매우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재밌는 것은, 이 비판은 나의 비판과는 조금은 다른 방향에서 이뤄지고 있다는 점이다. 내가 미처 보지 못했던 것, 깨닫지 못했던 것들을 몇 가지 배울 수 있기도 했다. 관심 있으신 분들께 강력히 일독을 권한다.

MEGA 중에서 ‘Das Kapital’ 및 그 수고들과 관련된 부분 (링크모음)

MEGA(Marx-Engels-Gesamtausgabe) 중에서 제2부, 즉 ‘Das Kapital 및 관련 수고들’의 링크모음이다. 계속해서 업데이트할 예정. 이와 관련해서 좋은 정보 있으신 분은 지체말고 공유해주시기 바랍니다 :)

II/1.11.2: 경제학 수고, 1857/58년 (초판: 1976 및 1981년. 완결판: 2006년. 29+1182쪽). [구글(본책+부록)]

II/2: 경제학 수고, 1858-61년 (1980년. 32+507쪽).

II/3: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 수고, 1861-63년. (6분권)

3.1: 1976년. 26+499쪽.
3.2: 1977년. 38+472쪽.
3.3: 1978년. 12+684쪽.
3.4: 1979년. 12+471쪽.
3.5: 1980년. 38+476쪽.
3.6: 1982년. 12+1331쪽.

II/4: 경제학 수고, 1863-67년. (3분권)

4.1: 1988년. 40+770쪽.
4.2: 1993년. 17+1471쪽.
4.3: 작업중.

II/5: 자본 제1권. 함부르크 1867년 (1983년. 60+1092쪽). [원본 pdf 읽기]

II/6: 자본 제1권. 제2판. 함부르크 1872년 (1987년. 51+1741쪽).

II/7: Le Capital. 파리 1872–1875년 (1989년. 37+1441쪽). [구글(본책+부록)] [원본 pdf 읽기] [MIA에서 읽기]

II/8: 자본 제1권. 제3판. 함부르크 1883년 (1989년. 46+1519쪽). [원본 pdf 읽기]

II/9: Capital. 런던 1887년 (1990년. 28+1183쪽).

II/10: 자본 제1권. 제4판. 함부르크 1890년 (1991년. 40+1288쪽) [읽기(1890년판)]

II/11: 자본 제2권을 위한 수고, 1868-81년 (2008년. 13+1850쪽). [구글(본책+부록)] [목차 및 편집자 해제(pdf)]

II/12: 자본 제2권을 위한 엥겔스의 편집본, 1884/1885년 (2005년. 9+1329쪽). [구글(본책+부록)] [목차 및 편집자 해제(pdf)]

II/13: 자본 제2권. 엥겔스 편집. 함부르크 1885년 (2008년. 9+800쪽). [목차 및 편집자 해제(pdf)] [읽기(1885년판)]

II/14: 자본 제3권을 위한 수고 및 편집본, 1871-95년 (2003년. 11+1138쪽). [구글(본책+부록)] [목차 및 편집자 해제(pdf)]

II/15: 자본 제3권. 엥겔스 편집. 함부르크 1894년 (2004년. 9+1420쪽) [구글(본책+부록)] [목차 및 편집자 해제(pdf)]

이상.

“불법 다운로드”의 정치경제학? (2/끝)

4. 여기서 잠시.. “문화발전”이라는 이슈에 대해 한마디. 불법 다운로드를 권장하는 위 링크한 글은 물론이고 그것에 반대하는 논지의 글들이 공통으로 자신의 근거로 삼고 있는 게 바로 “문화발전”이다. 즉 “문화발전”을 위해 불법 다운로드를 하(지말)자는 것.

그러나 내가 보기에 “문화발전”은 별로 중요한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 왜냐? 복잡한 이유를 댈 수 있겠지만, 가장 강력한 거 하나만 내놓자면, 불법 다운로드를 하든 말든 어차피 문화는 발전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MB가 대통령이 되고 유인촌이 문화부장관이 되었다고 문화가 발전하지 않는 게 아니다. 우파적인 문화? 돈이 몰리니 당연히 발전하겠지. 그렇다면 좌파적인 문화가 발전 못하냐? 그것도 아니다. 반체제적이고 좌파적인 문화예술인들에게 정부의 지원이 줄었다고 그런 경향의 문화가 발전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것 또한 “특정한” 방식으로 발전할 것이다. 그런 과정에서 피를 보는 것은 (안타깝지만) 그저 특정한 “문화예술인들”일 뿐이다. “문화예술”이 아니고 말이다.

5. 다시 앞서의 질문, 즉 “다운로드 불법화 움직임과 자본 내부의 동학의 관계”라는 질문으로 돌아가보자. 여기에 보통 어떤 답변이 던져질 수 있을까? 아마도 가장 흔하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이, 현재의 다운로드 불법화 움직임은 저간의 불법 다운로드로 인해 피해를 본 음반사들과 영화사들의 집단이기주의의 발로라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이런 답변이 얼마나 타당할까?

(1) 기본적으로 다운로드 불법화가 그에 의해 직접적인 피해를 본다고 여겨지는 음반사나 영화사(만)의 이익을 반영한다고 하는 것은 그다지 설득력이 없다. 앞서 2와 3에서 지적한 대로, 그런 일부 자본분파의 이익을 위해 국가가 나서서 법제를 정비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 그런 일부 자본의 손해는 곧 다른 자본의 이익을 의미할 수도 있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다(이 가능성에 대해선 2의 말미에서 지적했다).

다시, “국가가 자본을 대변한다는 것은 자본이 노동/대중에 대립되는 한에서”라는 앞서의 명제를 떠올려보면, 현재의 다운로드 불법화도 그런 차원에서 볼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기본적으로 그것은 점점 디지털화하고 있는 세상에서 노동자나 소비자로 드러나는 일반 대중들을 억압하고 규율함으로써 자본 일반의 이익에 봉사하려는 움직임이라고 우리는 이해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이는, 좀 더 큰 차원에서의 지적재산권 강화 움직임을 배경으로 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대중에 대한 이런 억압과 규율화는 가장 보편적으로 말하면 “사유재산제도”라는 근대사회를 이루는 가장 기본이 되는 원리를 통해 정당화되곤 한다. 즉 “다운로드는 도둑질”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한 가장 상식적이고도 보편적여 보이는 대응은, 저들이 규정하는 “불법 다운로드”라는 것이 근대적 사유재산제도를 침해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다(이런 대응은, 지적재산권 강화 움직임에 저항하는 이들에게서도 흔히 관찰되는 태도다). 그리고 바로 그럼으로써, 현재 국가가 추진하고 있는 정책이라는 것이 사실은 자기들이 기반하고 있는 사유재산제도와도 제대로 부합하지 못할 정도로 엉터리라는 것을 드러내고 그것을 비웃을 수 있게 된다. 사실은 바로 이것이 앞서 링크한 기사에서 취해지고 있는 논점이다.

하지만 불행히도 이런 대응에는 한계가 명확하다. 간단히 말해 그것은, 글쓴이의 의도와 무관하게(!) 근대적 사유재산제도를 인정하고 나아가 옹호하고 있다고까지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적어도 그런 대응이 근대적 사유재산제도를 문제삼지 않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마르크스가 잘 밝혔듯이, 사유재산제도란 그 자체로 옹호되어야 할 지고지선의 가치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역사적으로 보면 근대적 지배관계–유산자와 무산자 사이의–를 정당화하고 옹호하는 논리로 봉사해왔을 뿐이다. 같은 맥락에서 우리는, 현재의 “불법 다운로드”의 경우에서도, 사적소유제도란 그저 “다른 어떤 상황”을 정당화하기 위한 논리로 채용되고 있을 뿐임을 간파할 수 있다.

(2) 그렇다면 그 “다른 어떤 상황”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자본의 이윤추구와 관계가 깊다. 그러나 앞서 밝혔듯이 그것을, 음반/영화 자본의 이윤추구를 보장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지나치게 단순한 대답이다. 요새 다운로드 불법화에 앞장서고 있는 음반사들을 한번 떠올려보자. 국제적으로 보면 소니(Sony) 같은 회사가 있겠고, 국내에선 SM 엔터테인먼트 같은 회사가 있다. 우리가 주목할 점은, 이런 회사들은 음반회사이기만 할 뿐만 아니라 종합 엔터테인먼트 회사라는 것이고, 특히 소니의 경우엔 각종 전자기기의 세계적 제조회사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들이 거두는 전체 이윤/매출 중에서 음반 등과 같이, 우리가 다운로드 함으로써 유출될 수도 있을 만한 부분의 비중은 그리 크지 않거나 적어도 줄어들고 있다는 사실도 눈여겨봐둘만하다.

이렇게 음반판매로 거두는 이익/매출의 비중이 작아지는 것이, 저들의 주장대로 불법 다운로드 때문인지, 아니면 “불법 다운로드를 그 일부로 하는 어떤 거대한 변화” 때문인지에 대해선 좀 생각해볼 일이다. 물론 나는 그것이 대체로 후자와 관계가 깊다고 본다. 이렇게 생각해보자. 기본적으로, 음반 다운로드를 통해 한 개인은 물론 사회 전체가 음반 구입에 지출하는 돈의 액수가 줄어들었을 수는 있다. 구체적인 데이터를 봐야 정확히 말할 수 있겠지만, 내가 보기에 이건 거의 명백하게 현실과 부합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 한 개인이 일반적으로 말해 “엔터테인먼트”–애인이랑 커피숍 가서 라떼 마시는 따위의 행위들은 빼더라도–에 지출하는 돈의 액수까지 줄어들었다고 할 수 있을까? 과거엔 좋아하는 가수의 음반을 사서 집에서 흥얼거리며 듣는 것이 엔터테인먼트의 큰 부분을 차지했즐지 몰라도 이젠 더 이상 아니다. 음악 하나만 가지고 말하더라도, 이제 사람들은 그것을 “듣기 위해”서만 소비하지 않는다. 핸드폰 컬러링으로 깔기도 하고, 미니홈피 배경음악으로 쓰기도 한다. 물론 음악을 듣는 것은 이젠 더 이상 “주된” 취미활동도 아니다. 내가 보기엔 음악보단 차라리 게임이 더 인기가 좋다. 다른 한편, 상대적으로 소수이긴 하지만 자전거 등을 포함한 각종 레저활동, 디지털카메라의 보급을 통해 퍼진 사진찍기 등을 취미로 삼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이런 이들이 음악을 안 듣는 것은 아니지만, 과거와 같이 심각하게 듣는 것은 아니며, 결정적으로 이들에겐, 게임기나 자전거 또는 거액의 디카를 사고 나면 남는 돈이 별로 없다. 따라서 이들에겐 불법 다운로드한 음악이 제격인 것이며, 어떤 의미에선 “불법 다운로드한 음악”은 핸드폰에 딸린 부가기능이나 게임, 자전거나 디카 등을 제대로, 맘껏 즐기기 위한 “보완재”이자 “양념”이다.

이렇게 보면, 음반사나 영화사가 불법 다운로드 때문에 개피를 보고 있다는 주장은, 기껏해야 거대 언터테인먼트 자본의 엄살 섞인 우는 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은 나름대로 자신들을 살찌우고 있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가 추가적으로 한 가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음악이나 영화 정도만 빼면, 이를테면 핸드폰 벨소리용 음악이나 미니홈피 배경용 음악, 아니면 게임용 시디 등등은 점점 더 불법 다운로드가 (불가능하지는 않더라도) 매우 어려운 방향으로 발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따지고 보면 그냥 듣는 용도의 음악도 그렇다. 요새 누가 음악을 앨범 단위로 듣나? 기껏해야 한곡 두곡이고, 실은 앨범 자체가 싱글/미니앨범 위주로 나오고 있다. 이런 환경이라면, 더구나 모바일 환경이 점점 더 제대로 갖춰지고 있는 상황에서라면, 나 같으면 귀찮게 불법다운 받느니 500원 내고 내가 듣고싶은 곡 하나 합법적으로 다운 받겠다. 바로 이렇게, 불법 다운로드에는 이미 자본 스스로 잘 적응하고 있으며, 어떤 면에서는 자기들한테 유리한 방향으로–법 같은 거 필요 없이–상황을 만들어가고 있다(무슨 말이냐면, 싱글앨범 위주로 가는 것도 어떻게 보면 그런 한 예다).

6. 그렇다면 자본은 지들 나름대로 잘 하고 있는데 왜 굳이 국가를 통한 “법제화” 즉 “다운로드 불법화”를 추진하는 것일까? 가장 쉽게 답하자면, 걔들은 원래 그러기 때문이다.

그렇다. 걔들은 원래 그런다. 원래 그렇게 욕심이 많다, 걔들은. 하지만 좀 더 구체적인 차원에서도 답변할 꺼리들이 있다. 이를테면, 현재의 “불법화” 움직임은, 일반적으로는 산업 전체, 특수하게는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경쟁 격화를 반영한다고 우리는 이해할 수 있다. 왜 굳이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경쟁이 격화되는 것일까? 그야 사람들이 살만해지니까. 즉 그런 의미에서,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경쟁 격화, 나아가 현재의 “다운로드 불법화” 움직임은, 현대사회에서 보통 사람들의 삶의 양식에 이는 거대한 변화를 반영한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

7. 이제 글을 끝내야겠다. 지금 며칠째 일을 죽어라 했더니 머릿속이 잘 정리가 안 되지만… 그래도 하고 싶은 얘긴 대충 다 한 것 같다.

끝내는 마당에 하나 더 덧붙일 이야기. 앞서 5-(2)에서 논했듯이… 이미 자본은 “불법 다운로드”와 상관없이, 또는 그에 대응해서 자기들 나름대로의 대책을 강구하고 있고, 또 그렇게 세운 자기들 나름대로의 방향으로 척척 나아가고 있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다운로드 불법화”는 어떤 의미일까? 어쩌면 그것은, 자본을 위해 앞길을 닦아주기 위한 국가의 노력이기보다는, 이미 자본이 개고생하면서 닦아놓은 길을 국가가 사후 정비하고 확실하게 단도리하는 정도의 의미가 아닐까? 이 대목에서, (정상적인 상황에서) 법이란 모든 과정을 사후추인해주고 명문화해주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오랜 명제를 떠올리는 것이 적절해 보인다.

여기까지 쓰고 보니 생각이 나는 게… 이로부터 다음과 같은 실천적인 함의도 하나 건질 수 있지 않을까? (특히 이번 이슈와 같은 경우) 싸우려면 자본이랑 싸워야지, 국가랑 싸우려고 하면 이미 늦은 거라는? 이제 진짜 끝.

“불법 다운로드”의 정치경제학? (1)

1. 내 경우엔 영화보다는 음악을 미친듯이 다운로드해왔다. 처음엔 주된 소스가 pc통신 동호회였고, 나중엔 인터넷을 기반으로 한동안 화제였던 Napster 등을 이용하기도 했다. pc통신으로 말하자면, 나는 나우누리로 입문해서 나중엔 하이텔, 천리안, 유니텔 다 했다. 하지만 그 중 돈 내고 한 건 나우누리랑 유니텔뿐이고, 다른 둘은 이들이 pc통신에서 인터넷으로 옮겨오는 과정에서 더이상 유료회원제를 유지할 수 없게 되었을 때… 그 틈을 타서 (무료로) 조금 했을 뿐이다. 물론 순전히 음악파일 받으려고! (-_-)

요새 이와 같은 다운로드가 “불법”이냐 아니냐를 두고 말이 많다. 특히 최근엔 정부와 여당을 중심으로 “불법화” 움직임이 매우 강하고, 그러다 보니 당연히 반작용도 만만찮다. 아마도 그 “반작용”의 논리를 가장 재밌게 잘 담고 있는 것이 다음 기사가 아닐까 싶다. 이번 추석엔 ‘불법 다운로드’ 받으세요 (<참세상>, 2010. 9. 17).

하지만 과거 내가 거의 매일밤을 다운로드에 열올리고 있을 땐, 나는 내가 하는 짓이 불법인가 아닌가라는 생각조차 안 했다. 그러니까 완전히 그런 개념 자체가 없었던 거다.  뭐라 하는 사람도 없었고, 죄책감도 없었으며, 그저 파일 올려주는 사람에게 고마웠을 뿐이다. 여기서 다시 한 번 드러나는 것은,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영역, 일종의 “무주공산”이 점점 더 국가와 자본의 매커니즘 아래로 편입되어 가고 있다는 사실. 위에서 링크한 기사는, 단순하게 말하면, 한편으로는 이런 경향에 대한 저항을 담고 있다고 볼 수 있겠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이런 편입과정에서 국가/자본의 기존 질서와 새로운 영역을 지배하는 데 결부되는 질서 내지는 규칙이 서로 모순을 일으키기도 함을 보여준다. 사실은 바로 그렇기 때문에 특히 국가는 그 새로운 영역과 관련된 법제를 마련할 뿐만 아니라 기존의 법제를 그와 모순되지 않게 정비함으로써, 스스로 자신을 일정한 한도 안에서 재구성하게 되는 것이다.

2.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놓치지 말아야 할 부분–어떤 면에선 위의 사항보다 더 본질적인!–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자본”이라는 변수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위와 같은 국가의 재구성은 기본적으로 자본의 요구를 받아안은 것이다. 그러나 여기엔 크게 두 가지 좀 더 복잡한 문제가 결부되는데, 이는 다음과 같다. 첫째, 바로 이 “자본의 요구”라는 것이 그리 단순하지만은 않다는 것, 둘째, 변화하는 상황에 맞서 자본은 국가에 요구하기만 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 그 상황에 적응하기도 한다는 것.

일반적으로 말해 자본의 요구가 단순하지 않은 까닭은, 당연하게도 자본–사회적 총자본–이라는 것이 그 내부에 다양한 분파들을 담고 있으며, 그들은 특정 이슈들에 대해 서로 대립되는 이해관계를 갖기도 하기 때문이다. 우산장수와 밀짚모자장수 사이의 대립을 떠올리면 쉽다. 이럴 경우 정부의 특정 정책은 어느 한 자본에는 (더) 유리하고 다른 자본에는 (더) 불리할 것이다. 따라서 이런 사정을 두고서, 무조건 “국가는 자본의 이익에 봉사한다”라고 말하는 것은 좀 단순한 거다.

둘째로 자본은 그 스스로 변화하는 상황에 적응하기도 한다. 재밌는 예는, 과거 pc통신 중에서 특히 유니텔의 경우 그 운영주체가 삼성이었다는 사실이다. 무슨 말이냐면, 우리나라에서 “자본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는 저 삼성이라는 대재벌이, 한때는–그것도 그리 오래지 않은–현재 그들이 정부와 입을 맞춰 “불법 다운로드”라고 명명하고 있는 것을 단순히 방조한 게 아니라 적극적으로 조장했다는 얘기다. 아마도 그땐, 음악이나 영화 파일을 다운로드 받는 행위를 “불법”이라고 낙인찍는 것보다는 그런 행위를 조장함으로써 취할 수 있는 이득이 더 컸던 것일 수도 있고, 또는 다운로드를 감히–또는 자기들도 캥겨서–불법으로 낙인찍을 수 없었던 것일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간에, 이는 자본이 상황에 스스로 적응하고 활로를 개척해 나간다는 좋은 예다. (굳이 여기서 하나 상기해볼만한 사실은, 삼성은 그저 대재벌이기만 한 게 아니라 그 자신 음반사업과 영상사업도 했다는 것이다.)

3. 기본적으로 국가가 자본을 대변하는 것은, 자본이 노동에, 또는 좀 더 일반적으로 말해 “대중”에 대립되는 한에서다. 그런 의미에서 국가는 “자본 일반”을 대변한다고 할 수 있겠다. 이는 거꾸로 말하면, 자본 내부의 경쟁과 구조조정 등과 관련된 세세한 동학이 국가 그 자체 또는 국가의 행위를 통해 드러나는 데는 한계가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이 둘이 서로 관계가 없다는 것도 아니다! 결국 무슨 얘기냐면, “자본 내부의 경쟁과 구조조정 등과 관련된 세세한 동학”과 “국가” 사이의 관계는 “자본 일반”과 “국가” 사이의 관계처럼 (대체로)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으며, 바로 그런 까닭에 전자의 관계는 (대체로) 숨겨져 있으며 “과학”에 의해 파헤쳐지고 규명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앞에서 자본 내부에 다양한 이해관계가 있다고 했는데, 이 문제는 그것보다도 더 복잡한 성격의 것이다. 즉 여기서는, “국가의 특정 정책은 ‘어떤’ 자본에 이롭고 또 ‘어떤’ 자본에 해롭다는 것이냐”라는 질문보다는, “대체 ‘어떤 의미에서’ 국가의 행위가 자본–자본 일반–의 이익에 부합한다는 것이냐”라는 질문이 진정으로 중요하다. 다시 강조하자면, “현재 다운로드 불법화 움직임을 통해 드러나고 있는 자본 내부의 동학이란 과연 무엇인가?” 바로 이것이야말로 진정으로 답변되어야 할 질문이다.

(계속)

강신준 교수의 <자본> 완역출판에 부쳐

0. 여기 두 개의 미디어 기사가 있다.

[1] 왜 오늘 다시 ‘자본’을 들춰야 할까요 (<한겨레>, 2010년 9월 3일)
[2] ‘대박’ 꿈에 취해 벼랑 끝에 선 개미들아, ‘무기’를 들자! (<프레시안>, 2010년 9월 3일)
(이하에서 이 둘은 각각 [1]과 [2]로 부른다.)

두 기사가 넷상에 뜬 것이 9월3일이니, 벌써 2주나 지났다. 기사들이 올라왔을 때는 일이 너무 많고 바빠서 읽지도 못하고 있다가 며칠 전에서야 대충 훑어볼 수 있었다.

재밌는 것은, 정작 나는 기사를 보지도 못하고 있는데, 어디선가 내 과거 글들(1 이것, 2 저것)이 강교수의 『자본』 완역과 이에 뒤따른 그의 인터뷰 기사들과 엮여 링크가 되어 많이 읽혔다는 사실이다. 나야 고맙고 영광스러운 일이지만, 동시에, 그런 글들을 과거에 쓴 이상, 이번 완역 및 인터뷰에 대해서도 간단한 소회를 밝혀야 한다는 일종의 “의무감”도 드는 게 사실이다. 그래서 이 포스트를 쓴다.

혹, 어떤 이들은, 이렇게 비공식적인 블로그에 뒷담화 식으로 까대지 말고 좀 더 공식적으로 대응해보라고 할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너무 뭐라 마시길. 안 그래도, 조만간에 그럴 기회가 있을 것이다. 그러니 이 글은, 좀 더 엄밀하게 작성될 이후 글을 위한 서곡이자 예행연습이기도 하다. :)

1. 강교수의 (심오한) 깨달음

일단 강신준 교수께 존경과 감사의 뜻을 표하고 싶다. 하지만 이 얘긴, 여기서 그만 둔다. 어차피 나의 이런 ‘뜻’에 대해선 아무도 관심이 없을 테니까.

이번 기사와 인터뷰. 한마디로 이건, 무지와 오해, 억측과 아집의 종합선물세트다. 그나마 건질 거라고는, 장장 23년에 걸친 강교수의 “『자본』 번역의 오디세이”라고 할만한 “뒷이야기”뿐이다. 그마저도, 강금실도 한물 간 이제는, 그다지 재밌지도 않다.

위 기사와 인터뷰를 찾기 위해 google로 검색을 해보니 많은 이들이 강교수의 집념과 의지, 진심어린 노력에 감동한 모양이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대목에서, “감동”은 극에 달했을 줄로 본다:

초심을 버리지 않고, 시류에 흔들리지 않고 마르크스를 연구하다 보면 언젠가는 광맥에 닿는다. 내가 그렇다. 20년 동안 동아대학교에서 마르크스를 강의하면서 <자본>을 읽었다. 또 해설서를 펴내느라 꼼꼼히 본 것도 여러 번이다. 그런데 한 15년이 지난 2004~5년에야 <자본>에 대한 깨달음이 오더라. ‘아, 이 책의 구조가 이렇구나.’ 그 때야 어렴풋이 감이 왔다. ([2]에서)

깨달음… 번역만 따져도 23년이고 그 “첫 만남”부터 치면 30년이 넘으니,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 그 “깨달음”과 “감”이라는 것이 얼마나 심오하고 또 뿌리 깊겠는가… 라고 사람들은 보통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이번 인터뷰와 기사만 보더라도, 그의 “깨달음”과 “감”이 어떤 종류의 것인지가 꽤 명확하게 드러난다. 그리고 그것은 “심오함” 등등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1]의 대부분의 내용이 [2]에 더 자세히 나오므로 이제부턴 거의 [2]의 인터뷰만을 참조해서 글을 진행하겠다.)

2. “지금” 『자본』 번역본이 나온 것의 의의

강교수는 1987년에 『자본』 번역에 처음 연루되어 무려 23년만에 그것을 완전한 모습으로 세상에 내놓았다. 이에 대한 소회가 남다를 터. 개인적 소회도 소회지만, 그는 이 번역의 의의를 어떻게 평가할지가 무엇보다 관심거리다.

그의 인터뷰와 기사의 내용을 종합해봤을 때 그가 이번 번역에 부여하고 있는 가장 큰 의의는 아마도 “원전번역”이라는 것이 아닐까 싶다. 이를 강조하기 위해 그는 『자본』과 같은 중요한 저작의 원전 번역본이 하나도 존재하지 않고 있는 대한민국의 학계, 나아가 지식계의 척박함을 비판한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강교수, 연세가 몇이신가? 56세라고 한다. 그리고 이번에 나온 『자본』의 완역에 무려 23년을 쏟으셨다고 한다. 사정이 이렇다면, 그는 이번에 자신의 『자본』 완역을 자랑하고 그에 의기양양해 하실 것이 아니라, 부끄러움을 느끼셔야 한다. 즉 지금까지 대한민국 학계를 척박하게 한 장본인 중 하나가 실은 당신이심을 왜 보지 못하시는가? 이번 번역, 어떤 면에선 23년 걸린 노작이라고 평가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중요한 책의 번역을 맡으신 분께서 무려 23년이나 그 책임을 방기하고 계셨다면 이는 상찬보다는 질타의 대상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지금”의 의미를 새삼 되새길 수 있다. 왜 “지금”인가? 인터뷰 내용으로 보건대 아마도 강교수는 “지금이야 말로 『자본』이 무엇보다 필요하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좀 더 명확한 대답을 내놓아야 한다. 그는, 우리가 다른 때도 아니고, 즉 지난 23년의 세월 중 다른 그 어느 때도 아니고 바로 “지금”, 2010년에 『자본』의 새로운 번역을 필요로 하는 까닭이 무엇인가를 명확히 밝힐 필요가 있다.

과연 그 사이에 우리는 『자본』이 특별히 필요로 했던 시기를 겪지 않았던가? 간단히 말해 이런 거다. 왜 강교수는 지난 1997년의 대란이 벌어졌을 때 『자본』을 완역해 내놓지 않았는가? 그때는 “제대로 된 『자본』 번역본”이 (아직은) 필요없었단 말씀이신가? 바로 이 질문에 답하지 못한다면, 그는 이번 번역이 “23년에 걸친 노력의 산물”이 아니라 “23년에 걸친 게으름과 책임방기의 산물”임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여기서 “게으름”이란 강교수가 지난 23년을 게으르게 사셨다는 뜻이 아니다. 나는 이런 것을 평가할 위치에 있지 않다).

이런 의미에서, “부족한 부분은 앞으로 계속해서 보완해 나가자고 다짐하면서 일단 책을 내놓았다”라는 강교수의 언급은, 저자나 역자가 흔히 하는 겸손의 발언이라기보단 그의 무책임함의 발로–그의 의도와 상관없이–라고 보는 게 더 타당하다. 1987년에 첫 번역본을 내놓았을 때나 할 법한 얘길 이렇게 지금까지 되뇌고 있으면 곤란하다.

3. “원전 번역”이라는 “신화”

강교수의 이번 번역이 갖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의의는 그것이 한글로 나온 “최초의 원전 완역본”이라는 데 있다. 그러나 “최초의 원전 완역본”이라는 것은, 상식적으로 봤을 때, “가장 정확한 번역”도, “가장 충실한 번역”도, “가장 학술적인 번역”도 아니다. 이런 상식과는 정반대로, 강교수는 이 모든 것이 일치한다고 보는 듯하다. 이를테면 김수행 교수의 기존 번역본을 비판하면서, 그것이 “영어 중역”이라는 것뿐만 아니라, 그것의 “충실성”과 “학술성”까지 걸고 넘어진다. 이를테면 그는, “충실성”과 관련, 다음과 같이 말한다:

독일어 원본과 영어판은 그 자체로 많이 다르다. 게다가 김수행 교수의 <자본>은 원전에 충실한 번역이 아니다. 예를 들자면, 독자의 이해를 넓히기 위해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원전의 화폐 단위를 전부 다 한국식으로 옮겨 놓았다. 독일 사람이 썼는데 ‘근’이 나오고, ‘필’이 나오고. ([2]에서)

이건 정말 쪼잔한 비판이다. 기본적으로 번역에 원문을 어느정도로 살릴 것인지는 늘 논란거리다. 원문을 살리는 것이 좋은 번역일 수도 있고, 우리 실정에 맞게 조정하는 게 좋은 번역일 수도 있다. 번역의 좋고 나쁨을 가르는 기준은 “원문 그대로” 했느냐와는 크게 관계가 없다.

그리고 김수행 교수가 화폐나 도량단위를 바꾼 것은, 사실은 노동자들을 포함해 일반 독자들이 읽기 쉽게 하기 위함이었다. 물론 이런 판단에 반대할 수는 있다. 그러나 적어도 그런 반대와 비판은, 기본적으로 그가 왜 그런 선택을 했는가에 대한 “이해”(understanding)의 바탕 위에서 행해져야 한다. 난 지금도, 김교수가 일반 독자들을 위해 화폐나 도량단위를 바꿨으며, 또 번역 과정에서 그를 가장 많이 애먹인 것 중 하나가 바로 그런 변환과정이었다는 이야기를 어딘가에서 처음으로 읽었을 때의 그 가슴 뭉클함을 간직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강교수는 “원전 번역”이라는 것을 “학술성”과 거의 동격으로 보고 있는 것도 같다. 그러나 전자는 후자를 구성하는 일부, 그것도 기본적이긴 하지만 그렇게 크지 않은 일부를 구성할 뿐이다. 이에 대해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할까? 하여튼 정확성, 충실성, 학술성 등을 평가하기 위해 우리는 별도의 기준들이 필요할 따름이다.

연구자로서 말하건대, 강교수의 이번 번역의 의의는 “최초의 원전 완역본”이라는 것이고, 또 그게 전부다. 정확성, 충실성, 학술성 등으로 보자면, 적어도 2년 전에 출판된 제1권만 놓고 본다면 김수행 교수의 기존 번역본(즉 영어 중역본)이 낫다는 게 내 판단이다. 물론 이는 상대적으로 그렇다는 얘기다. 둘 다 사실은 개선의 여지가 많다. 이 얘긴 더 길게 할 순 없다. 기본적으로는 내가 아직 이번에 나온 제2권과 제3권을 읽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제1권에 대한 내 개략적인 평가는 앞서 링크해둔 나의 기존 글들을 참조하면 된다.

4. MEW? MEGA?

강교수의 이번 번역이 “최초의 원전 완역본”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것도 그다지 정확한 표현은 아니다. 왜냐하면 오늘 우리에게 『자본』의 “원전”이라는 것이 매우 복합적인 의미를 가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서 그는 MEW와 MEGA를 구분하고 있는데, 여기에서부터 얘기를 시작해보자. 그는 2년전 출판된 『자본』 제1권의 옮긴이 글에서 전자를 대중용, 후자를 학술용이라고 구분한 바 있고, 이번 인터뷰를 보니 여전히 그런 구분을 대체로 유지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앞서 포스트들에 이어 거듭 말하지만, 이런 구분은 틀렸다. 굳이 “대중용”과 “학술용”을 구별하려 한다면, MEW와 MEGA 모두 “학술용”의 범주에 든다고 봐야 한다. 이때 영어로 치면 Penguin판과 같은 각종 문고판들, 그리고 이것과 같은 발췌판들 등이 “대중용”에 대응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대중용”과 “학술용” 따위의 구분은 중요한 게 아니다. 물론 강교수는 자신의 번역을 “대중용”으로 여길 수도 있고 “학술용”으로 여길 수도 있다. 그러나 그가 어느 쪽으로 방향을 잡든 상관없이, “번역 그 자체”는 매우 학술적인 행위임에 틀림없다. 따라서 어떤 번역자라도–특히나 강교수가 그렇게도 그 중요성과 학술적 의의를 강조하는 『자본』과 같은 경우라면 더더욱–번역을 할 때에는 원전의 “대중용” 버전과 “학술용” 버전 모두를 참조함이 타당하다. 이렇게 본다면, 무려 “2010년”에, 즉 MEGA 중에서도 『자본』과 관련된 부(제2부)가 거의 완성된 현재  새삼 번역본을 내면서, 스스로 대중용이라고 칭하는 MEW판만을 대본으로 했다는 사실을 아무런 거리낌없이 말할 수 있다는 것, 더군다나 그 과정에서 MEGA판에 대한 악의적인 왜곡까지도 서슴지않는다는 것은 참으로 뻔뻔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현재 우리에게 MEW와 MEGA가 모두 이용 가능하게 되었다는 사실은 매우 특수한 문제를 우리에게 제기한다. 즉 『자본』의 “원전”이라는 것의 의미가 매우 복잡해졌다는 것이다. 『자본』의 진정한 원전은 무엇일까? 제1권만을 대상으로 했을 때, 현재 “정본”으로 두루 간주되고 있는 독일어 제4판(1890년)일까? 아니면 마르크스가 직접 출판을 한 제1판(1867년) 또는 제2판(1873년)일까? “원전”이라는 문제를 잠시 접어둔다면, 혹시, 번역본이긴 하지만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각별하게 손을 봤던 프랑스어판(1872-75년)이나 영어판(1887년)도 그 나름의 “고유한 가치”가 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만약 우리가 제2권과 제3권까지도 고려에 넣는다면 문제는 더 복잡해진다. 과연 엥겔스의 손을 거쳐 현재 출판되고 있는 제2권과 제3권은 엄밀한 의미에서 “원전”이라고 할 수 있을까? 혹시 마르크스의 수고를 가다듬고 나아가 그 스스로 부족한 부분을 채워넣기도 할 때, 그는 마르크스의 취지와 의도를 어느 정도는 왜곡하지는 않았을까? 만약 그렇다면, 우리가 진정한 의미에서 “원전”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마르크스 자신이 직접 쓴 수고뿐은 아닐까?

바로 이런 모든 문제들, 질문들은 “원전”이라는 것이 지극히 불안정한 개념임을 암시한다. 사실은 바로 그렇기 때문에 MEGA라는 판본이–이미 MEW라는 전집이 있는데도–우리에게 필요했던 것이고, 또 사람들은 그것을 아직까지 만들고 있는 것이다. 만약 사정이 이렇다면, 이 모든 것들을 다 가지고 있는 우리는, 『자본』의 “새로운” 번역을 낸다고 했을 때, 어떤 태도로 거기에 임하는 것이 옳을까? 인터뷰 등에서 보이는 강신준 교수의 입장은 그런 면에서 얼마나 정당화될 수 있는가? 이런 질문들을 음미하다 보면 다음과 같은 문제에까지 생각이 미치지 않을 수 없다. 즉 과연 “그의” 번역은 그가 묘사하는 식대로 “시대”가 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아니면 그저 한 개인이 23년이라는 오랜 세월 동안 그 어깨 위에 지고 있었던 짐을 내려놓은 정도의 의미라고 보는 게 좀 더 아귀가 맞는 해석이 아닐까? 사실은 바로 그것이야말로, 우리 한국의 인문사회학계가 가진 한계요, 문제점임을 인정하는 태도가,  강교수에겐 안타까운 일이지만, 우리에겐 필요하지 않을까?

강교수의 번역이 완성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자본』의 원전 번역”이 여전히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신화”로만 남을 수밖에 없는 것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다.

5. “마르크스가 『자본』을 쓴 진짜 이유”?

강교수는 이번 인터뷰에서 “마르크스가 『자본』을 쓴 진짜 이유”를 강조하기도 했다. 보통 “진심”을 강조하는 것은, 그 “진심”이 왜곡된 채 알려져 있을 때 하는 일이다. 그렇다면 강신준 교수는 마르크스의 “진짜 이유”가 어떻게 왜곡된 채 알려져 있다고 보기에, 유독 그것을 강조하는 것일까? 다음 대목을 보자:

그렇다면, 마르크스가 <자본>을 쓴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자본주의 체제의 임금 노동자라면 누구나 자본주의 체제가 잘못돼 있다는 걸 알고 있는데, 왜 그는 번역을 해보면 3000쪽이나 되는 어렵고 방대한 책을 썼을까? 단지본주의를 비판하기 위해서 이런 책을 썼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2]에서. 나의 강조)

간단히 말하면 다음과 같은 스토리다: (1) 흔히들 마르크스가 “자본주의를 비판하기 위해” 『자본』을 썼다고 알고 있다. (2) 그러나 자본주의 “이후에 등장할 사회, 즉 자본주의 이후의 새로운 사회의 모습”을 그리는 것이야말로 『자본』에서 마르크스가 꾀했던 진정한 기획이었다. (3)  이런 『자본』의 진정한 의의를 제대로 읽어낸 사람은 대한민국에 “한 다섯 명 정도”밖에 안 된다. (4) 대한민국의 진보의 수준이 낮은 것도 그래서다. 대충 위와 같은 생각에 입각해서, 강교수는 크게 “생산”과 “소비”라는 두 가지 측면에서 “마르크스가 꿈꿨던 사회”의 개요를 묘사하기도 한다.

글쎄… 위 항목들 중 (2)~(4)에 대해서는 너무 대책없는 얘기들이라서 뭐라고 코멘트를 해야 할지 모르겠다. (1)에서 시작해보자. 기본적으로 『자본』은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게 아니다. 그것은 그 부제(“정치경제학 비판”)에서 명명백백하게 드러나듯이 자본주의에 대한 여러 부르주아적 및 사회주의적 이론들을 비판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사실 『자본』의 의의가 “자본주의 현실 비판”에 있느냐 “자본주의 이론 비판”에 있느냐는 하나의 논쟁거리이기도 했다. 그러나 좀 더 성숙된 논자라면 둘이 어느 선에서는 일치하는 것임을 알아볼 것이다(이를테면 국내에선 곽노완 교수의 글 참조. 다만 나는 그의 논지에 100% 동의하진 않는다).

그것이 “이론 비판”이든 “현실 비판”이든 간에… 강교수에겐 그것이 “단지”라는 수식어를 동반할 정도로 하찮은 것인지 몰라도, 적어도 마르크스에겐 그렇지 않았다. 사실 마르크스의 “비판” 개념이 정확하게 (“현실”이 아닌) “이론”을 겨냥하게 된 것은, 그의 지적 발달이 어느 정도 수준에 이른 다음의 일이며, 『자본』에서는 거의 일관되게 “이론 비판”으로 의식적으로 쓰이게 된다. 그리고 마르크스는 바로 그 자본주의의 이론 또는 현실을 제대로 “비판”하는 것이 보기보다 쉽지 않고 많은 지적 노력을 필요로 하는 일임을 시간이 가면 갈수록 더 절실하게 깨닫게 된다. 그것이 바로 그의 『자본』이 그토록 오랜 세월에 걸친 각고의 노력을 요구했던 까닭이다.

어쨌거나 “자본주의의 이론 비판”을 위한 책에다가 자본주의 이후의 새로운 사회의 모습들을 적극적으로 그려놓는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따라서 그런 모습들이 『자본』에 없다고 해서 우리는 놀랄 필요도 없다. 이런 의미에서, (2)번 이후의 이야기들은 말이 안 된다. 우리가 “자본주의 이후의 새로운 사회의 모습을 그리는 것”이 마르크스의 “일생일대의 기획”이었다고는 얘기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강교수에겐 불행하게도, 『자본』은 그런 기획을 직접적으로 실현시키기 위한 저작은 아니다. 따라서 (3), 즉 강교수가 말하는 바와 같은 “진정한 의의”를 제대로 읽어낸 사람들이 대한민국에 “한 다섯 명 정도”뿐이라고 해도, 그것은 결코 놀랄 일이 아니다!! 끝으로 (4): 나도 강교수와 마찬가지로 대한민국의 진보의 수준이 그다지 높다고 보진 않지만, 그 까닭이 적어도 진보에 속하는 사람들이 『자본』을 안 읽어서라고 생각지는 않는다.

생산과 소비를 중심으로 간략하게 펼쳐놓은, 강교수가 이해한 “마르크스의 새로운 사회의 상”에 대해선 별도의 언급을 생략하련다.

6. 마르크스의 “이론”에 대한 오해

이상과 같이 강신준 교수는 『자본』에서 마르크스의 “의도”에 대해서 심각한 오해를 하고 있는데, 그는 마르크스의 “이론”에 대해서도 그 이상의 오해를 하고 있다. 어떤 면에서 그것은 “오해”라기보단 “얕은 이해”라고 불러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 정도는 정말이지 내가 다 아찔하고 민망할 정도다. 예컨대 강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런데 노동자가 그런 자본가 사이의 경쟁에 참여해 돈을 벌 수 있는 확률이 얼마나 될까? 마르크스가 <자본> 3권에서 개별 자본가가 자본가 사이의 경쟁에서 이길 수 있는 확률은 지배할 수 있는 자본의 크기에 비례한다고 써놓았다. 워런 버핏이나 조지 소로스가 대자본을 이용해서 버는 돈과 이른바 ‘개미’가 버는 돈은 비교할 수가 없다. ([2]에서. 나의 강조)

위 대목은 강교수의 『자본』 이해의 실상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구절이다. 특히 밑줄친 부분을 보라.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될 뿐만 아니라, 마르크스는 제3권에서 위와 같은 진술을 한 적이 없다. 일단 위 밑줄 부분은 말이 안 된다. 강교수가 예로 드는 대로, “개미”와 “소로스”가 경쟁을 한다는 게 무슨 의미이며, 더구나 전자가 후자를 그 경쟁에서 “이긴다”는 것은 또 무슨 뜻인가? 마르크스는 『자본』 제3권에서는 물론이고 그 어디에서도 이런 말도 안 되는 방식으로 “경쟁”에 대해 논한 적이 없다. 모종의 짐작이 가는 바가 없지는 않지만, 왜 저런 말도 안 되는 내용을 무슨 대단한 것인 양 풀어놓는지 알 수가 없다. 정녕 오늘날 금융투기판에서 “개미”들의 운명을, 그것도 강교수가 하듯이 매우 비참하게 캐리커처하기 위해 우리가 “굳이” 마르크스에 기대야 하는 걸까?

이번에 제3권을 번역해서인지, 강교수는 특히 거기 등장하는 논의들에 크게 매혹된 듯 싶다. 이를테면:

<자본> 3권을 읽다보면 깜짝 놀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예를 들자면, 현대 금융의 특징을 얘기할 때 빼놓지 않고 언급되는 게 ‘레버리지(leverage, 지렛대) 효과’다. 개인이나 기업이 차입금 등 타인의 자본을 지렛대처럼 이용해 이익을 올리려다 결국은 금융 위기와 같은 일이 발생한다.

그런데 바로 이 레버리지 효과가 <자본> 3권에 등장한다. 마르크스는 이 레버리지 효과가 결국에는 공황을 낳는 중요한 원인이라고 보았다. 얼마나 놀라운가? 140년 전의 마르크스가 오늘날 금융 위기의 본질을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다. ([2]에서)

참으로 딱하다. 저렇게 따지면, 18세기 금융투기로 유명한 스코틀랜드인 John Law는 금융사기의 현대적인 첨단기법으로 무장한, 거의 뭐 “Back to the Future”라고 해도 되겠다. 혹시 어떤 독자들은, 대중적인 인터뷰니까 강교수가 좀 오바한 거 아니겠냐며 각별한 아량을 그에게 베풀려고 할지도 모르겠다. 글쎄, 과연 그럴까? 다음을 보자.

<자본>은 앞부분이 어렵다. [. . . . . .] 이렇게 1권도 앞이 아니라 뒤부터 읽다 보면 <자본>에 익숙해질 수 있다.

2권은 경제학 공부를 하지 않은 독자라면 따라가기가 쉽지 않다. 반면에 아까 언급했듯이 자본주의 이후의 새로운 사회를 고민할 때 자극이 될 만한 부분이 많은 3권은 읽어볼 만하다. 특히 공황이 일어나는 메커니즘을 설명한 부분이 중요한데, 한국 사람들은 요즘 화폐 금융 쪽에 상식이 많아서 어려움 없이 읽을 수 있을 것이다.

3권을 읽다 보면 재테크에 눈을 뜰 수도 있다. 나 같으면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 같은 책을 읽을 게 아니라 자본주의의 핵심 비밀을 파헤친 <자본>을 읽겠다. ([2]에서)

“재테크” 부분은 농담이라고 치더라도, (제2권이 어려운 반면) 제3권을 두고 “어려움 없이 읽을 수 있을 것“이라고 하다니,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하긴, 제3권에서 “레버리지” 운운이나 하며 그 이상의 얘길 하지 않으니, 그것이 쉽다고 보는 것도 무리가 아닐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강교수가 직접 밝히고 있는, 제3권이 쉽다고 하는 근거가 무엇인지도 눈여겨볼만 하다. 그는 “한국 사람들은 요즘 화폐 금융 쪽에 상식이 많아서 어려움 없이 읽을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마르크스의 『자본』(제3권)은, 바로 그와 같은 주류 경제학이 주입한 “상식”을 뒤엎고 거기 도전하는, 바로 “노동가치이론”에 근거를 둔 전혀 다른 금융이론을 펼치고 있는 저작이다.

그밖에도 강교수는, (1) 맨큐(N. Gregory Mankiw)나 스티글리츠(Joseph Stiglitz)와 같은 경제학자들이 “생산”을 경시하고 “교환(시장)”을 강조하기 때문에 공황을 제대로 볼 수 없다고 비판하면서, “마르크스가 정확히 지적했듯이 공황은 생산 영역에서 시작된다”라는 사실과 다른 단정적 언급을 내놓기도 했고, (2) “소비”와 “분배”를 혼동하기도 했다.

그리고 “<자본>을 읽을 때 같이 보면 좋을 만한 책이 또 있는가?”라는 기자의 질문에 엉뚱하게도 “폴 말러 스위지의 <자본주의 발전의 이론>”이라고 대답함으로써, “나 지난 23년 동안 『자본』과 관련된 공부 하나도 안 했어요”라는 말을 남다르게 표현하기도 했다.

7. 맺음말

대중미디어를 상대로 한 인터뷰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상에서 지적한 모든 사항들을 조금은 관대하게 대할 수도 있겠지만, 이것들은 『자본』에 대한, 그리고 나아가 마르크스의 이론 전반에 대한 강교수의 이해가 어떠한지를 보여주는 일종의 징후들로 읽을 수 있다는 게 내 판단이다. 그리고 그것들이 무엇의 징후인지는, 앞으로 좀 더 면밀하게 강교수의 번역을 검토하는 과정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날 것이다(이미 제1권에서는 그것이 어느 정도 드러났다).

바로 그랬을 때, 이 글의 1절에서 인용한 강교수의 “깨달음” 내지는 “감”이 어떤 것인지도 이 엉성한 포스트에서 나타난 것보다 훨씬 더 명확하게 나타날 것이고, 더불어 이런 사항들에 대한 판단들이 서로 인정하고 토론해야 할 “견해”의 문제라기보다는 그 옳고 그름이 꽤 명백히 갈리는 원문에 대한 “이해”의 문제임도 밝혀질 것이다. 그리고 그런 과정에서, 『자본』을 둘러싼 논의도 한걸음 더 진전할 수 있으리라고 나는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