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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고] 자본론, 어디까지 읽었니? (자본론 제2권 읽기 개시!!)

나는 지난 1년반 동안 몇몇 사람들과 함께 매주 모여앉아 {자본론}을 읽었다. 이제 1권을 다 읽었고, 우리는 이제 2권에 들어가려 한다. 혹시 이런 일에 관심있으신 분들이 계실까 해서 여기에 광고를 한다.

자본론2권광고2

아시다시피 {자본론}은 모두 3권까지 있다.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자본주의적 생산과정’이라는 부제목이 붙은 제1권이다. 사람들이 “나는 {자본론}을 읽었다”라고 할 때, 대체로 이는 1권을 읽었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우리가 제2권을, 그리고 나아가 제3권을 읽으려고 하는 것은 왜인가? 말할 것도 없이 그것은, 1권만으로는 {자본론}의 전모를 알수없기 때문이다. {자본론}은 자본주의 경제의 가장 본질적이고 추상적인 차원에서 출발해, 우리 눈에 실감나게 다가오는 가장 구체적이고 피상적인 차원으로 나아간다. 때문에 {자본론}의 논의들을 현실에 적용하고자 할 경우, 또는 {자본론}의 시각으로 현실을 해석하려 할 경우, 1권만으로는 크게 부족하다. 언제나 우리 눈앞의 현실은 구체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누군가가 {자본론} 1권만의 지식을 가지고 현실을 해석하려 한다면, 이는 필연적으로 ‘환원론’이 될 가능성도 크다.

어쨌든 ‘고전’을 읽고, 이를 바탕으로 오늘의 우리를 반성해보는 일은 크게 권장할만한 일이다. 특히 {자본론} 1권만을 주마간산 격으로 훑고서 마음한켠에 아쉬움이 있으셨던 분들께는 좋은 기회가 아닐까 싶다. 물론 이 사회에는 그 1권마저도 제대로 영접하지 못하신 분들이 훨씬 더 많은데, 이분들도 의지만 있다면 참여를 망설이실 필요가 없다. 숙련된 조교(-_-)와 선학들(^_^)이 도움을 줄 수 있으니 말이다.

참고로 우리 모임에 대해 간단히 정리해보겠다.

애초 우리는 자유인문캠프(링크)의 2011/12년 겨울강좌에서 출발했다. 여기서 나는 ‘자본론 읽기 입문’이라는 제목으로 {자본론} 제1권 제1장과 제2장을 강독 형식으로 읽으면서 해설했다(링크). 8회에 걸친 강좌에서 아쉬움을 느낀 수강생 중 몇몇분들의 제안으로 ‘읽기’를 정례화하기로 하고(링크), 결국 2012년 3월부터 지난주까지 약 1년반에 걸쳐 우리는 거의 매주 만나 책을 읽은 결과 한글판 기준 1000쪽이 넘는 {자본론}을 읽어냈다(링크). (※참고: 관심 있으신 분들은 여기 링크들을 모두 보시는 게 좋습니다^^)

우리 모임은 다른 {자본론} 팀들과 몇 가지 점에서 다르다. 첫째, 보통은 일정한 분량을 각자 읽고 매번 정해진 사람들이 발제를 해 그에 대해 토론하는 식인데 반해, 우리는 직접 현장에서 책을 읽는다. 이는 속도도 느리고 구성원들이 다소 수동화된다는 단점이 있지만, 참여에 부담이 적을뿐만 아니라 의지를 가진 이들에겐 ‘행간을 읽어내는’ 즐거움까지 준다는 점에서 커다란 매력이 있다. 둘째, 대개 {자본론} 학습이 특정한 단체에서 제공되는 데 반해서 우리는 순수한 사적 모임에 가깝다. 이것이 특별히 자랑할만한 일은 아니지만… 뭐, 그렇다고ㅎㅎ

셋째, 우리가 책만 읽는 것은 아니다. 계절이 바뀌면 놀러 다니기도 했고 책읽기가 지겨우면 그냥 영화보고 술먹으며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것과는 별개로… 우리가 그간 2회에 걸친 ‘부정기 포럼’을 열었다는 점은 각별히 알리고 싶다. 뿐만 아니라, 최근엔 영어로 된 간단한 논문—물론 우리가 읽는 {자본론}과 관련된—을 선택해 함께 읽고 번역을 하기도 했다(번역문은 조만간 공개될 것임). 부정기포럼에 대해선 다음 포스팅을 참조하시고, 앞으로도 이는 쭈욱~~ 계속될 것이다(현재 2~3회분은 이미 기획된 상태).

  • [제1회 부정기포럼/2013.2.23] 불효자는 울지않고 자본론을 읽습니다 (링크1, 2)
  • [제2회 부정기포럼/2013.7.27] 아시아로 간 삼성, 서울로 온 장대업 (링크)

넷째, 특이한 사람들이 많다. 에… 이상에서 열거한 것 말고도 우리 모임만이 갖는 특징과 매력은 많다. 나머지는 직접 참여하면서 확인하시길. 여하튼,

{자본론} 2권을 곧 시작합니다. {자본론} 1권만 읽으신 분들, 읽고는 싶은데 아직 1권도 제대로 안 읽으신 분들, 모두 환영입니다. {자본론} 2권을 읽읍시다!!!

자본론2권광고1

* 참고로… 우리는 어떤 판본을 정해놓고 읽지는 않습니다. 아무거나 가져오셔요. 한글판뿐 아니라 영어판, 독어판, 일어판, 불어판 등등. 모두 환영입니다! (얼터너티브 호객글/링크)

** 위 글에 몇몇 링크들이 있습니다. 관심 있으신 분께선, 그 링크들을 하나씩 살펴보시면 도움이 되실 겁니다.

(136) 마르크스와 특허

와트의 위대한 천재성은 그가 1784년 4월에 얻은 특허권의 명세서에 나타나 있는데, 거기에는 그의 증기기관이 어떤 특수한 목적을 위한 발명이 아니라 대공업의 보편적 동력기로 서술되어 있다. – 자본론 1권 15장, 508, MEW 23, 398

자본론 1권에서 마르크스는 “특허”라는 단어를  세번 언급하는데, 두번은 남을 조롱하기 위해 일종의 비유로 사용하고 나머지 한번은 바로 위에 인용한 구절에서 기술의 보편성에 주목한 “와트의 위대한 천재성”의 근거를 제시하는데 활용한다. 2, 3권이나 잉여가치학설사의 경우도 별로 다르지 않다. 특허에 대한 마르크스의 분석은 전무하다고 할 수 있다.

지적재산권의 경제적, 정치적, 이론적 중요성이 점점 강조되고 있는 오늘날의 시각에 보면 이해가 되면서도 의아하고, 안타까운 측면이 많다.

1. 이해가 된다

마르크스 시대의 특허와 오늘날의 특허, 좀더 일반적으로 지적재산권을 동일선상에서 분석하기는 어렵다. 영국의 특허 통계를 살펴보면 마르크스가 자본론 1권을 출판한 1867년 특허출원건수는 3,723건이었으며, 이는 점진적으로 증가하여 마르크스가 사망한 1883년에는 대략 6,000건에 이른다. 그런데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1884년에 특허출원건수는 17,110건으로 급속도로 늘어나고 1900년대 초에는 연간 출원건수가 30,000건을 돌파한다.

양적팽창 이외에도 특허제도는 질적인 변화를 겪었다. 과거에는 특허가 주로 새로운 기술이나 발명에 부여되었지만, 우리 시대에는 새로운 생명체와 인간유전자도 특허의 범위에 포함된다. 게다가 특허 이외에도 저작권이나 디자인, 상표권 등의 적용 범위 역시 넓어졌음을 감안해야한다.

2. 그렇지만 의아하다

마르크스는 와트의 1784년 특허명세서를 자본론에 언급할만큼 기술에 커다란 관심이 있었다. 그런 그가 볼턴앤와트(Boulton and Watt)사가 특허를 통해 상당한 라이센스 수입을 올렸고, 특허권을 침해한 이들과 송사를 벌였던 일을 몰랐을리가 없다. 자본주의적 경쟁에서 혁신과 신기술개발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강조했던 마르크스가 왜 특허에 별 관심을 갖지 않았는지는 그 자체로 하나의 연구과제가 될 수 있겠다.

3. 안타깝다

주류경제학에서는 특허 등의 지적재산권을 경제성장의 한 필수적인 조건으로 본다. 지식은 그 비경합성과 비배제성 때문에 양의 외부효과를 갖는 ‘생산요소’이고 따라서 별도의 보호장치가 없다면 사회전체적으로 지식이 과소생산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내생적 성장이론의 대표적인 모형인 폴 로머의 1990년 모형 역시 지적재산권을 통한 지식의 영구적 독점을 전제한다.

특허가 일종의 인센티브로 작용하여 혁신에 긍정적인 역할을 하면서도, 기술의 사회적 전파를 방해한다는 부정적인 면도 갖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여 전자는 극대화하고 후자는 극소화하기 위한 절묘한 제도를 설계하는 것에 관심을 갖고 있는 실용적인 사람들도 많다.

좌파적인 시각을 갖고 있는 이들은 보통 특허나 지적재산권을 싫어한다. 이해도 되고 공감도 하지만, 나는 아무래도 제도의 기원과 역할과 의의를 학적으로 정리하는 것에 더 관심이 간다. 문제는 그런 일을 하는 사람들이 별로 없다는 것. 그래서 마르크스가 약간의 단초가 될만한 언급이라도 남겨주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자본론 3권의 농업지대에 대한 분석을 지적재산권 분석에 원용하는 경우가 많지만, 마르크스의 지대론은 잉여가치 중 일부가 토지의 독점으로 인해 지대로 전유된다는 단순한 이론이 아니다. 오히려 핵심적인 것은 이 지대가 표현하고 있는 자본주의 경제의 물적 현실 (예: 지주 계급의 존재로 인한 농업의 상대적으로 느린 기술발전)을 드러내는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마르크스의 지대론은 기본적으로 자본주의적 농업에 대한 이론이다.

라이센스나 로열티 같은 것들이 잉여가치 중 일부를 특허권자나 저작권자가 전유하는 것이라는 주장에 반대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론이 그 지점에서 그친다면 거기에 큰 의미가 있을까. 오늘날 지적재산권의 적용범위는 계속해서 확장되고 있고, 각국의 제도는 점점 동질화되어 가고 있다. 이제 기술개발은 경쟁우위를 확보하고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기 위한 수단이기도 하지만 기업의 시장가치를 높이고 때로는 즉각적으로 상품화되어 판매될 수 있는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기술개발과 지식의 생산만을 목적으로 창업되는 기업들도 점점 많아지고 있다. 기업간 기술의 거래규모는 경제성장률보다 빠른 속도로 증가하고 있고, 국가 간 기술거래 규모 역시 확장되고 있다. 아마도 이것은 금융화의 영향일 것이며, 금융화를 더 촉발시키고 있을 것이다. 이런 경향을 놓고 오늘날 우리는 지식경제시대 혹은 창조경제시대를 살아가고 있다는 주장도 있고, 그것은 표피의 변화를 과대평가한 것일뿐 근본적으로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라는 주장도 있다. 등등등. 이러한 현대적인 현상들을 과연 어떻게 가치론의 구체적인 적용들을 통해 해명할 것인가. 이런 것에 소용이 없다면 가치론에는 대체 또 어떤 소용이 있겠는가.

[공지] 자본론을 읽는 불효자녀들이여!

2월23일 토요일 오후3시 ‘공중캠프’로 모입시다!

(웹자보는 위대하신 뎡야핑님께서 만들어주셨습니다. http://blog.jinbo.net/taiji0920/2680)

  • 무엇을 하는가?

세 가지 목적이 있습니다. (1) 이 블로그의 공동운영자로서 이곳에 “자본론 함께 읽기”를 연재중이신 heesang님의 귀국을 환영하자. (2) heesang님을 중심으로 여러 사람들이 돌아가며 “내가 자본론을 읽는 이유”에 대해 야부리를 까보자. (3) 놀자(본행사+뒤풀이).

특히 (2)와 관련해서는, 몇 가지 파생되는 주제들이 있을 것입니다. 다시 쓰기 귀찮으니 요 앞의 포스팅을 참조해주세용 :)

  • 공중캠프라는 곳은 뭐하는 곳이고 어디 붙어있는가?

뭐, 긴 설명보다는 여기를 보세요: http://kuchu-camp.net/xe/page_cafe

  • 무엇을 준비해가나? 참가비는 없는가?

돈얘기부터 하면, 딱 정해진 회비같은 것은 없습니다. 일단 장소를 대여하는 데 돈이 좀 들었으나 그것은 주최측(자본론 읽기모임)에서 부담하기로 했고요, 간단한 다과(?)도 준비될 예정입니다.

하지만 이 이상은 각자 부담입니다. 아마도 공중캠프에서 각종 음료 등을 구매하실 수 있을 거고요, 특히 저희가 준비하는 것들이 맘에 안드시는 분들은 그러셔야겠죠?ㅋ 사정이 이러하니, 드시고 싶으신 것, 또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눠드시고 싶으신 것을 직접 가져오셔도 되겠습니다. 또한 즐거운 행사 뒤에 더 즐거운 뒤풀이가 있을텐데요, 이또한 십시일반으로 부담해야겠지요.

끝으로, 각자들 하실말씀 준비해 오셔도 좋습니다. 사실 저, 그리고 저랑 같이 매주 모여서 자본론을 읽는 우리 친구들도 별다른 계획 같은 건 없습니다. 그러니 부담없이 오세요 :)

 

(아참, 한국은 물론 세계 블루스계의 거성, 김대중 선생의 전번을 따는 데는 성공했으나, 요새 바쁘셔서 행사에 참여하시긴 어렵지 않을까…하는 아쉬움을 전해드립니다..;;)

 

[공지] 2월23일 토요일, 잔치를 엽니다!

안녕하세요. 블로그 운영하는 EM입니다.

저의 소중한 친구이자 이 블로그의 공동운영자인 heesang님께서 소금성 짤쯔부르크에서 잠시 귀국을 합니다. 다음주 토요일에 그를 환영하는 잔치를 엽니다.

그냥 놀기만 하면 좀 그러니까 약간의 프로그램을 준비중인데요, heesang님께서 이 블로그를 통해 자본론 읽기를 연재하고 계신만큼, “내가 자본론을 읽는 이유”, “나는 왜 자본론 읽기를 연재하나”, “자본론이 뒤바꾼 내 삶”, “자본론에 집도 팔고 가족도 팔고”, “불효자는 울지않고 자본론을 읽습니다, 뭐 이런 등등의 주제로 블로그 상에서 미처 못한 얘기를 우리에게 들려주실 것입니다.

물론 주제가 주제이니만큼, heesang님뿐만 아니라 참석하시는 모든 분께 발언의 기회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일종의 신앙간증대회 같은 것이 되겠네요 ㅎㅎㅎ

그런데 아직 구체적인 시간과 장소는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대략 말씀드리면, 시간은 다음주 토요일 오후에 시작해 뒤풀이까지 자연스럽게 이어질 것 같고요, 장소는 홍대쪽 모처가 될 것 같은데 아직 확정은 못 지은상태입니다. 혹시 어디 좋은 장소 있으시면 추천!!! 바랍니다.

현재까지는 참석 확정자는 저(EM)와 heesang님, 그리고 저와 함께 매주 offline에서 모여서 자본론을 읽고 있는 분들입니다. 이 블로그를 들러주시는 분들, 특히 heesang님의 자본론 읽기를 애독하시는 분들, 각자의 자리에서 자본론을 열심히 혹은 술렁술렁 읽고 계시는 분들, 읽지는 못해도 자본론을 늘 가까이 두고파서 라면받침으로 쓰고계신 분들, 저를 좋아하시는 분들 또 싫어하시는 분들, 언제 한번 보면 제 얼굴에 침뱉고 싶으셨던 분들, (불)효자/효녀, 그냥 심심하신 분들! 모두 환영합니다.

댓글 많이 부탁드립니다. 참석여부를 밝혀주셔도 좋고, 참석이 어려우신 분들은 heesang님께 축하와 격려의 메시지를 남겨주셔도 좋아요. :)

아 그리고, 어느새 제가 함께하는 자본론 읽기모임의 아이콘으로 급부상하신 블루스맨 김대중 선생을 아시는 분께선 연락 부탁드려요. 꼭 이번 자리에 모시고 싶습니다!!! (-_-)

(86) 복잡한 노동에 얽힌 복잡한 사정

자본가가 취득하는 노동이 사회적 평균 수준의 단순한 노동인가 아니면 더 복잡한 노동인가는 가치증식과정에서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사회적 평균노동보다 고도의, 복잡한 노동은 [단순한 미숙련 노동력보다 많은 양성비가 소요되며 그것의 생산에 더 많은 시간과 노동이 드는] 노동력의 지출이다. 이러한 노동력은 가치가 더 크기 때문에 고급 노동으로 나타나며, 따라서 동일한 시간 안에 상대적으로 더 큰 가치로 대상화된다. 그러나 방적노동과 보석세공노동 사이의 숙련 차이가 어떻든, [보석세공 노동자가 자기 자신의 노동력의 가치를 보상할 뿐인] 노동부분은 그가 잉여가치를 창조하는 추가적 노동부분과 질적으로는 조금도 구별되지 않는다 … 우리는 자본가가 고용하는 노동자는 단순한 사회적 평균노동을 수행한다는 가정에 의해 불필요한 조작을 생략하고 분석을 단순화시키는 것이다. – 자본론 1권 7장, 261-2

1. 복잡한 노동 혹은 고급 노동에 대한 마르크스의 세 번째 언급이다. 그는 1장 1절의 초반부에서 복잡한 노동의 단순 노동으로의 환원의 문제를 다루면서 “이하에서는 각종 노동력을 단순노동력으로 간주할 것인데, 이것은 오직 환산의 수고를 덜기 위해서이다”라고 언급했고, 6장에서는 교육과 훈련 비용이 노동력 가치에 더해진다고 주장하면서, “이 비용은 노동력이 어느 정도로 복잡한 훈련과 교육을 받느냐에 따라 달라진다”고 했다 (강조 추가). 마르크스에게 있어서는 단순한 사회적 평균 노동에 비해 (단위 시간 당) 더 많은 가치를 생산하는 복잡한 노동은 언제나 복잡한 노동력의 지출이며, 복잡한 노동력은 복잡한 훈련과 교육의 산물이다.

2. 그런데 사정은 이것보다는 복잡하다. 마르크스는 1장에서 한번, 7장에서 한번 이렇게 두번씩이나 노동(력)을 항상 단순 노동(력)으로 취급하겠다고 언급했는데 대체 그 이유는 무엇일까? 사실 1장이나 7장에서 제기하는 복잡한 노동(력)의 문제는 전체 논의의 맥락과는 다소 동떨어져 있고, 마르크스는 복잡한 노동(력)의 단순 노동(력)으로의 환원에 대해서 큰 관심을 두고 있지 않았던 것 같다. 가령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에서 그는 “[복잡노동의 단순노동으로의] 환원을 규율하는 법칙들은 여기에서 논하지 않겠다. 그러나 환원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분명하다”라고 쓴다.

3. 복잡한 노동(력)이 실재한다는 것을 마르크스는 전혀 의심하지 않는다. 그는 환원이 이루어지는 것이 분명하다고 주장한 까닭에 대해서 이어서 다음과 같이 쓴다. “왜냐하면 교환가치로서 복잡노동의 생산물은 단순평균노동의 생산물에 대해 일정한 비율로 등가물이고 그러므로 이 단순노동의 일정량과 등치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매일매일의 상품들 사이의 (양적) 교환관계가 복잡노동이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복잡노동이 단순노동으로 환원된다는 사실을 증명한다는 것이다. 가령 어떤 노동의 산물이 거기에 일반적으로 소요되는 노동시간의 세 배나 네 배의 교환가치를 갖는다면, 이 노동은 한 시간의 노동이 네 시간의 단순노동으로 환원되는 복잡노동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설명에는 두 가지 비판이 있을 수 있다. 첫째, 노동가치론의 위배의 문제다. 마르크스의 노동가치론의 본령은 상품의 가치와 가격이 우선적으로 상품의 생산에 필요한 노동시간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것인데, 서로 다른 노동들 사이에 그 가치생산능력에 있어 일종의 위계가 존재한다면, 노동 뿐만 아니라 이 위계를 규정하는 요소들 역시 가치결정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다. 가령 훌륭한 교육을 받은 사람의 노동의 복잡도가 일반적인 수준보다 높다면, 노동뿐만 아니라 교육 역시 가치를 생산하는 요소라고 볼 수 있는 것 아닌가? 둘째, 순환논법의 문제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가치생산능력의 위계를 결정하는 것은 노동의 복잡도인데, 노동의 복잡도 사이의 차이는 결국 상품들 사이의 교환비율을 통해서만 나타난다. 복잡한 노동이기 때문에 가치를 더 많이 생산한다는 것은 결국, 가치를 더 많이 생산하는 노동을 그냥 복잡한 노동이라고 부르자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4. 첫번째 비판, 그러니까 노동 이외에 다른 요소가 가치를 규정하게 된다는 비판은 베일리가 리카도의 가치론에 대해 제기한 비판과 유사하다. 마르크스는 ‘잉여가치학설사’에서 베일리의 리카도 비판을 다룬다. 베일리는 두 종류의 서로 다른 노동(일)이 동일한 시간 동안 서로 다른 가치를 생산한다면, 둘 중 하나를 단일한 가치의 척도로서의 노동(일)을 확정할 수 없으며 따라서 노동가치론이 성립하지 않는다고 리카도를 비판한다. 모든 노동은 그 질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시간에 동일한 가치를 생산해야 하고 오직 그 경우에만 노동가치론이 성립한다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이에 대해 리카도가 이 둘 사이의 양적 관계가 (비록 리카도가 그 관계의 내용을 해명하지는 않았지만) 주어져 있다면, 다시 말해 두 개의 서로 다른 질적 노동시간이 하나의 단일한 노동시간을 환원되는 비율이 주어져 있다면 노동시간에 의한 가치측정에는 전혀 문제가 없다고 주장한 바가 있다고 지적한다. 재미있게도 베일리 류의 노동가치론에 대한 해석, 그러니까 동일한 시간 동안의 노동은 그 질적 차이와 무관하게 양적으로 동일한 가치를 생산한다는 해석은 지금도 대단한 영향력을 갖고 있다.

마르크스의 노동가치론은 물론 오직 노동만이 가치를 생산한다는 이론이다. 하지만, 그것은 인간 안의 에너지가 노동 중에 소모되어 그것이 생산물 안에 결정화 되었다는 식의 에너지 보존법칙과 같은 이론은 아니다. 노동가치론은 오직 노동만이 가치를 생산한다는 이론이며, 동시에 기술, 숙련도, 교육수준, 토지의 비옥도 등이 노동만이 생산하는 가치의 양을 규정한다는 이론이다.

5. 두번째 비판, 즉 순환논법에 대한 비판은 결국 마르크스가 복잡한 노동(력)을 정의한 후에 그 결과(더 많은 가치생산)를 논하는 것이 아니라, 결과에서 출발해서 그 근원을 ‘복잡함’으로 규정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류의 설명은 생각하는 것보다 꽤 일반적이다. 어떠한 타자가 훌륭한 타자인가 (원인)? 타율이 높은 타자다 (결과). 어떠한 투수가 훌륭한 투수인가 (원인)? 방어율과 피안타율이 낮은 투수다 (결과). 어떤 노동이 생산성이 높은  노동인가 (원인)? 동일한 시간에 더 많은 생산물을 생산하는 노동이다 (결과).

복잡한 노동(력)과 단순한 노동(력)의 문제의 경우 복잡함의 척도는 노동 그 내부가 아니라 그 결과에 있다. 자본주의 경제에서 노동은 우선 (질적으로 단일한) 가치를 생산한다. 따라서 자본주의 경제에서는 동일한 시간에 더 많은 가치를 생산하는 노동(력)이 복잡한 노동(력)이며, 복잡한 노동(력)은 동일한 시간에 더 많은 가치를 생산하는 노동(력)이다. 의사의 노동이 용접공의 노동보다 더 복잡한 노동인 것은 의사의 노동이 용접공의 노동에 비해 본질적으로 복잡한 노동이어서가 아니라, 동일한 시간 동안 더 많은 가치를 생산하기 때문이다. 왜 더 많은 가치를 생산하는가? 마르크스가 얘기했듯이 그것은 “생산자들의 배후에서 진행되는 하나의 사회적 과정에 의해 결정”(자본론 1권, 56)된다. 다만, 그는 이 사회적 과정, 환원비율을 “규율하는 법칙을 논하지는” (비판, 15-16) 않는다.

6. 노동(력)의 복잡도의 차이는 이것이 노동(력)의 가치 혹은 임금의 차이를 규정하는 결정적인 요소라는 점에서 중요하다. 잉여가치학설사의 같은 부분에서 마르크스는 이렇게 쓴다. “[리카도]는 이 [양적 환원]관계가 어떻게 발전하며 규정되는지를 기술하지는 않았다. 이것은 임금의 정의에 속하며, 종국적으로는 노동력 가치의 차이, 다시 말해 노동력의 상이한 생산비용으로 환원될 수 있다” (강조 추가). 직종 간 임금의 격차는 상이한 직종에 필요한 상이한 노동(력)의 복잡도의 차이에 의해서 규정된다. 이것은 동어반복적이고 그다지 큰 의미가 없는 얘기일 수 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노동(력)의 복잡도의 차이가 단지 기술, 교육, 훈련의 차이뿐만 아니라 면허, 노동허가제와 같은 제도적 장치의 결과라는 측면을 고려한다면, 노동의 복잡도의 문제는 노동시장에 대한 마르크스적 연구의 기초가 되어야 한다.

7. 마르크스의 자본론의 형성 2권 (로스돌스키 지음, 정성진 옮김)에는 복잡한 노동(력)에 대한 훌륭한 글이 있다 – 31장 숙련노동의 문제. 하지만 일반적으로 복잡한 노동(력)에 대한 연구는 대단히 미진한 것 같다. 마르크스가 사용한 대부분의 개념이 그런 것처럼 복잡한 노동(력) 역시 그가 창안한 개념이 아니다. 스미스와 리카도, 그리고 본문의 주에 소개된 캐즈노브 등은 모두 ‘환원’의 문제에 관심이 많았다. 고전파 정치경제학에서 복잡한 노동(력)이 어떻게 이론화 되었으며, 마르크스의 이론은 이와는 어떻게 다르고 이것이 오늘날의 자본주의 경제에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연구한다면 매우 훌륭한 석사/박사 논문이 나올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84) 자본가의 항변과 쾌활한 웃음

상황은 이렇다.

  • 10 파운드 면사의 가격= 15원
  • 10 파운드 면사의 생산에 필요한 생산수단 (면화, 방추) = 12원
  • 10파운드 면사의 생산에 필요한 노동력 = 3원
  • 자본가에게 남는 돈 = 0원. 이윤 없음!!!

그래서 자본가는 다음과 같이 항변을 시작한다.

(항변 1): 돈 벌려고 시작한 사업이다!

속류경제학에 정통하고 있는 자본가는 아마 말할 것이다. “나는 나의 화폐를 더 많은 화폐로 만들려는 의도에서 투하했던 것이다”라고. 지옥으로 가는 길이 여러 가지 선량한 의도로 포장되어 있듯이, 그는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으면서 돈벌이를 하려고 했을 수도 있다. – 자본론 1권 7장, 253

다소 번역에 문제가 있다. 올바른 번역은 다음과 같다 – 지옥으로 가는 길은 여러 가지 선량한 의도로 포장되어 있다. 그리고 [자본가는]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으면서도 돈벌이를 할 수도 있다. 다시 말해 마르크스는 (1) 의도가 좋다고 결과도 좋아야 하는 것은 아니며, (2) 돈벌이를 하려면 꼭 생산 말고도 다른 방법이 있다라고 반박하고 있는 셈이다. 비봉판의 번역은 (1)과 (2)가 연결되어 있다는 인상을 준다는 문제를 갖고 있다.

(항변 2): 돈도 못 벌 바에라면 생산은 포기하고 구매만 하겠다!

그는 위협적으로 말한다. 두 번 다시는 이와 같이 속지 않겠다고. 앞으로는 자신이 직접 상품을 제조하지 않고 시장에서 기성품을 사겠다고 그러나 만약 그의 동료 자본가들이 모두 그렇게 한다면 그는 어느 시장에서 상품을 발견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고 화폐를 먹을 수는 없다. – 253-4

아무도 생산하지 않고 구매만 하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사회 -> 불가능하다.

(항변 3): 나의 절제를 보상해다오!

그는 호소한다. “나의 절제를 고려해 주어야 할 것이 아닌가. 나는 나의 15원을 아무렇게나 써버릴 수도 있었다. 그렇게 하지 않고 나는 그것을 생산적으로 소비해 그것을 면사를 만들어낸 것이 아닌가.” 옳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그 대가로 이제는 나쁜 양심 대신 좋은 면사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화폐퇴장자가 한 일을 되풀이하는 것은 그에게 결코 좋은 일이 되지 못한다. 그러한 금욕이 초래하는 나쁜 영향을 화폐퇴장자가 우리에게 보여준 바이다. 더구나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는 황제도 그 권력을 상실하는 법이다. 그의 금욕의 장점이 무엇이든, 생산과정에서 나온 생산물의 가치는 이 과정에 투입된 상품가치의 총액과 같을 뿐이기 때문에 그의 금욕을 특별히 보상해 줄 만한 아무것도 없다. 그러므로 그는 덕행의 보수는 덕행이라고 생각하고 자신을 위로하는 수밖에 없다. – 254

첫번째 반박은 15원을 아무렇게나 낭비하지 않은 대가로 자본가는 이제 면화와 방추 대신 면사를 갖게 되었다는 것. 두번째 반박은 생산하지 않고 꼬불쳐 놓아봐야 좋을 것 하나 없다는 것 (화폐퇴장은 아무것도 만들어내지 못하고, 항변2에 대해 지적한 것처럼 화폐를 먹을 수는 없으니까). 세번째 반박은 어차피 상품의 가치는 이 과정에 투입된 상품가치의 총액과 같으니 절제를 보상하고 싶어도 (설령 황제에게 주고 싶어도) 줄 것이 없다는 것.

(항변 4): 아, 나는 팔기 위해 생산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고 자본가는 더욱 집요하게 주장한다. “면사는 나에게는 쓸모가 없다. 나는 그것을 판매하기 위해 생산했던 것이다”라고. 그렇다면 그는 그것을 팔면 될 것이다. 또는 더욱 간단하게, 이제부터는 자기 자신에게 필요한 물건만을 생산하면 될 것이다 – 254

팔려고 만들었으면 파시오. 아니면 안 팔고 당신이 쓸 물건을 만들던가. 팔려고 만들었으니까 이윤까지 챙겨야 겠다는 것은 무슨 심보요.

(항변 5): 나는 노동자를 위해 봉사했다!

“과연 노동자는 아무것도 없는 데서 자기의 손발만으로 상품을 생산해 낼 수 있는가? 내가 노동자에게 재료를 대주었기 때문에 노동자는 그것을 가지고 그것에다가 자기의 노동을 대상화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또한 사회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와 같은 빈털털이이기 때문에 나는 나의 생산수단, 나의 면화와 나의 방추로 사회를 위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봉사를 하지 않았던가 …” 그러나 노동자도 또한 그를 위해 면화와 방추를 면사로 전환시킴으로써 답례를 하지 않았던가? 어쨌든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봉사가 아니다. 봉사라는 것은 상품에 의한 봉사건 노동에 의한 봉사건 어떤 사용가치의 유용한 효과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교환가치이다. 자본가는 노동자에게 3원의 가치를 지불했다. 노동자는 그에게 면화에 첨가된 3원의 가치로 정확한 등가를, 즉 가치에 대해 가치를 반환했다 – 254-5

물적 부의 생산은 노동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 당연한 상식. 그래서 노동도 (물적 부의) 생산에서 (방추나 면화 만큼이나)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지 않았는가? 노동자에게 생활수단을 주었다는 얘기는 맞다. 그래서 노동자도 그 생활수단의 가치만큼의 새로 생산된 가치를 반환하지 않았는가?

(항변 6) 나 자신도 (감독)노동을 했다!

우리의 친구는 이제 갑자기 [그가 고용하고 있는] 노동자처럼 겸손한 태도를 취하면서 말한다. “나 자신도 노동하지 않았는가? 방적공을 감시하는 노동을, 총감독이라는 노동을 하지 않았는가? 나의 이러한 노동도 역시 가치를 형성하지 않는가?”라고. 그가 고용하고 있는 감독과 관리인은 어이없다는 태도로 어깨를 으쓱한다.

감시, 감독 등의 노동은 여러 가지 상황에 따라 가치를 생산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리고 여기서 감독노동의 가치생산여부는 중요한 쟁점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자본가가 말은 그렇게 하지만, 사실은 이러한 노동이 자본가가 고용한 감독과 관리인에 의해 수행된다는 사실에 있다.

그러나 그러는 동안 자본가는 쾌할하게 웃으면서 본래의 표정을 되살린다. 그가 지금까지 장황하게 말한 것은 모두 우리를 속이려는 것이었다. 그 자신도 그런 말에는 조금도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따위 핑계와 속임수는 고용된 경제학 교수들에게 맡겨두고 있다. 그 자신은 실무적인 사람이므로 사업 이외의 일에 대해 말하는 것은 반드시 깊이 생각하지는 않지만, 사업에 관한 일에 대해서는 언제나 잘 알고 있다. – 256

TV토론에 기업주가 나와 토론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신문에 재벌총수나 대기업 대주주가 친기업정책을 옹호하는 칼럼을 쓴 것을 본 적이 없다. 그들은 “그런 말에는 조금도 관심을 두지 않”기 때문이다.  “그 따위 핑계와 속임수”는 그런 일을 하라고 돈을 받는 경제학 (혹은 당시에는 정치경제학) 교수들에게 맡겨두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자본가의 항변들에 대해 생각해본다. 법인세율이 높아 사업을 하기 어렵다; 국내임금수준이 높아 곧 중국에 따라잡힐 것이다; 기업이 국민을 먹여 살린다는 것을 왜 모르는가 등등. 생각해보니 이런 말, 기업주들이 직접 나서서 하는 경우 별로 없다. 대부분은 XXX 박사, 교수, 연구원 등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다. 하지만, 자본가의 격은 다르다. 세계 최고의 자본가 워렌 버핏은 (이익에 대한) 세율이 높아 투자를 주저하는 자본가를 본적이 없다고 했다. 우리의 실무적인 자본가는 “사업 이외의 일에 대해 … 깊이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는 자신을 위해 봉사하는 이들이 TV토론에 나와 이런저런 말들을 하며 사람들을 헷갈리게 해놓는 사이, 홀로 사태의 본질을 떠올리며 쾌할하고 호탕하게 웃을 뿐이다.

(83) 노동과정론

우리가 지금까지 그것의 단순하고 추상적인 요소들에 대해 설명해 온 노동과정은 사용가치를 생산하기 위한 합목적적 활동이며,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자연에 존재하는 것을 사용하는것이고, 인간과 자연 사이의 신진대사의 일반적 조건이며, 인간생활의 영원한 자연적 조건이다. 따라서 그것은 인간생활의 어떤 형태로부터도 독립하고 있으며, 오히려 인간생활의 모든 사회적 형태에 공통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노동자를 다른 노동자들과의 관계에서 설명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한편에는 인간과 그의 노동, 다른 편에는 자연과 그 소재 – 이것만으로 충분했다. – 자본론 1권 7장, 244

사회형태와 무관한 노동과정의 요소들을 반복하여 설명하고 있다.

노동과정의 일반적 성격은, 노동자가 노동과정을 자기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본가를 위해서 수행한다는 사실에 의해서는 물론 변하지 않는다. 그리고 또 장화를 만들거나 실을 뽑는 특정한 방식도 자본가가 개입했다고 해서 당장 변하는 것은 아니다. 자본가는 우선 그가 시장에서 발견하는 그대로의 노동력을 고용하지 않으면 안 되며, 따라서 [자본가가 아직 존재하지 않았던 시대에 행해졌던 종류의] 노동에 만족하지 않으면 안된다. – 245

이렇게 자본이 있는 그대로의 노동력을 고용할 때, 자본에 대한 노동의 형식적 종속 혹은 포섭이 일어난다. 자본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는다.

노동이 자본에 종속됨으로써 생기는 생산방식 그 자체의 변화는 나중에 비로소 일어날 수 있으며, 따라서 그것은 나중에 고찰할 것이다. – 245

자본은 노동과정 그 자체를 변화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다. 이에 따라 자본에 대한 노동의 실질적 종속이 일어난다. 16장에서 마르크스는 이렇게 쓴다.

상대적 잉여가치의 생산은 진정한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을 요구하게 되는데, 이 생산방식은 자본에 대한 노동의 형식적 종속 (formellen Subsumtion; formal subsumption)의 토대 위에서 그 자신의 방법, 수단, 조건을 만들어 내면서 자연발생적으로 발전한다. 이 발전의 과정에서 형식적 종속은 자본에 대한 노동의 실질적 종속 (reelle Subsumtion; real subsumption)으로 대체된다. – 16장, 685-6

노동과정의 “단순하고 추상적인 요소들” (244)에 주목할 때 노동과정은 시대와 장소를 막론하고 동일하다. 하지만, 특수한 생산양식은 특수한 노동과정을 만들어낸다. 그러므로 노동과정 일반, 생산 일반은 공허한 추상이다.

노동과정론(labour process theory)은 자본주의적 노동과정, 자본에 대한 노동의 실질적 종속의 구체적 측면을 분석한다. 노동과정론은 1974년 출판된 해리 브레이버만의 노동과 독점자본(Labor and Monopoly Capital) – 그의 유일한 저서다 – 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이후 이 책의 성과를 능가할 만한 연구는 없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시각이다. 애초에는 자본주의에서의 노동의 비숙련화(de-skilling) 경향에 주목하였지만, 최근에는 푸코의 권력관계 개념을 적극 차용하면서 노동의 자율성을 강조하는 흐름이 다수를 이루고 있다. 그러면서 안타깝게도 노동가치론의 폐기를 주장하는 학자들이 많아졌다.

아래 노동과정론에 대한 논문들 참조:

난파선에서 기어나오기 – 노동과정과 생산의 정치 (폴 톰슨)

브레이버만(H. Braverman) 이후 최근까지 노동과정이론의 전개과정에 대한 비판적 고찰 (박상언)

(82) 무엇이 아니라 어떻게, 그리고 슬픈 가치론

멸종한 동물 종족을 결정하는 데 화석유골이 중요한 것처럼, 멸망한 경제적 사회구성체를 탐구하는 데 노동수단의 유물이 중요하다. 경제적 시대를 구별하는 것은 무엇이 생산되는가가 아니고 어떻게 생산되는가이다. 노동수단은 인간의 노동력 발달의 척도일 뿐 아니라 [사람들이 그 속에서 노동하는] 사회적 관계의 지표이기도 하다. 노동수단 중 역학적인 종류의 노동수단 [그 전체를 생산의 골격, 근육계통이라고 부를 수 있다]은, 예컨대 [관, 통, 바구니, 항아리 등과 같이] 노동대상의 용기로 쓰일 뿐이고 따라서 생산의 혈관계통이라고 부를 수 있는 노동수단에 비해, 하나의 사회적 생산시대를 더 결정적으로 특징짓는다. 용기로서의 노동수단은 화학공업에서 비로소 중요한 역할을 한다. (각주 6)

(각주 6) 지금까지의 역사 기술은 [모든 사회생활의 토대이며 따라서 모든 현실적 역사의 토대인] 물질적 생산의 발달에 거의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러나 적어도 선사 시대는 이른바 역사연구가 아니라 자연과학적 연구에 입각하여 도구나 무기의 재료에 따라 석기시대, 청동기시대, 철기시대로 구분되고 있다. – 자본론 1권 7장, 238-9

1. 역사적 시대의 구분에 있어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물질적 생산의 방식이며, 물질적 생산의 방식에 그 시대에 고유한 사회적 관계가 반영되어 있다는 역사적 유물론 (historical materialism)을 깔끔히 설명해 주는 구절이다.

2. 기술의 발전이 새로운 역사를 열어간다는 식의 기술 결정론 (technological determinism)은 곤란하다. 노동수단은 사회적 관계를 규정(determine)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의 지표(Anzeiger; indicators)”일 뿐이다. 노동수단, 즉 기술은 하나의 화석과 같아서 한 시대의 영화의 흔적을 보여주기는 하지만, 그 시대의 사회적 관계가 특수한 기술로 환원될 수는 없다.

3. 1962년부터 지식경제라는 말이 떠돌기 시작한 이래 정보사회, 정보경제, 신경제 같은 엄청난 용어들이 세상에 나타났다. 대부분 정보통신 기술이 가져다준 새로운 변화를 강조하는 용어들이다. 이러한 조류에 대응하는 좌파적 이론으로는 네그리, 하트 등의 자율주의, 인지자본주의론을 들 수 있겠다. 이들은 물질적 생산이 더 이상 중요하지 않은 현대자본주의에서는 노동가치론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나는 제조업의 비중이 낮아져 경제 내에서 제조업이 주변화되고 있다는 현실분석에 동의하지도 않으며, 정보통신 기술의 가장 큰 경제적 기여는 주로 제조업에 가져다준 혁신에 있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노동가치론은 제조업에 국한된 이론이 아닐뿐더러 컨베이어 벨트를 이용한 대량생산과 같은 매우 특수한 생산방식에만 적용되는 이론은 더더욱 아니다.

4. 노동가치론은 무엇보다 상품생산 – 그 안에서 인간도 상품이 된다 – 을 매개로 한 인간과 인간 사이의 (착취)관계에 대한 이론이다. 이 이론은 생각하는 것보다 매우 매우 강력하다. 새로운 기술이 나타나 세상이 조금 달라졌다 하여 사정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노동가치론은 왜 자본주의에서 계속해서 새로운 기술이 나오고, 마치 세상이 달라진 것처럼 보일 수밖에 없는지를 설명하는 이론이다.

현실은 구체적이고 복잡다단하다. 그래서 노동가치론에 대한 초보적인 수준의 이해와 모순되어 보이는 현상들을 도처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현상들은 겉보기와는 달리 노동가치론에 대한 큰 위협이 되지 못한다. 오히려 이들이야말로 바로 노동가치론의 존재 이유라고 할 수 있다. 역설적으로, 이러한 겉보기에 위협적으로 보이는 현상들과의 대면울 통해서만 노동가치론의 유효성이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다.

노동가치론은 현실이 거꾸로 서 있다는 것을 폭로하는 이론이며, 동시에 현실이 필연적으로 거꾸로 서 있을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는 이론이다 (현실을 바로 세우려는 이론이 아니다). 본모습이 필연적으로 전도되어 나타난다는, 진정한 미가 추함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고, 타살이 자살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는, 슬픈 이론이다. 가치론은 전도된 현상의 영역과 그 본모습의 영역을 종횡무진 왔다갔다 한다. 그래서 사람을 헷갈리게 한다. 현상의 영역이 폭로된 본모습과 다르다고 해서 노동가치론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고 주장하면, 노동가치론은 쓸쓸하다. 왜냐하면 노동가치론은 현상이 그 본모습과 필연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자신이 필요하다고 호소하는 이론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치론 공부에 필요한 것은 일종의 믿음과 신뢰다. “온갖 교훈의 풍조에 흔들리거나, 이리저리 밀려다니지 말아야” 한다.

 

(81) 오로지 인간에게서만 볼 수 있는 형태의 노동

우리가 상정하는 노동은 오로지 인간에게서만 볼 수 있는 형태의 노동이다. 거미는 직포공들이 하는 일과 비슷한 일을 하며, 꿀벌의 집은 인간 건축가들을 부끄럽게 한다. 그러나 가장 서투른 건축가를 가장 훌륭한 꿀벌과 구별하는 점은, 사람은 집을 짓기 전에 미리 자기의 머리 속에 그것을 짓는다는 것이다. 노동과정의 끝에 가서는 그 시초에 이미 노동자의 머리 속에 존재하고 있던 [즉,관념적으로 이미 존재하고 있던] 결과가 나오는 것이다. 노동자는 자연물의 형태를 변화시킬 뿐 아니라 자기 자신의 목적을 자연물에 실현시킨다. – 7장, 236

내 연구주제는 자본주의에서의 기술발전과 지식의 생산에 대한 것이다. 마르크스는 상품의 생산에 대한 연구에 집중했고, (상품의 생산에 필요한) 지식의 생산에 대해서는 별다른 관심이 없었던 것 같다. 이 주제로 공부를 시작한 계기는 정보재 가치논쟁 때문이었다. 이 논쟁은 소프트웨어의 소스코드를 생산하는 노동을 어떻게 이론화해야 할 것이냐에 대한 논쟁이었는데, 이 노동이 가치를 생산하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중요한 쟁점 중 하나였다. 나는 소스코드, 더 넓게는 (한번 생산되면 영원무궁토록 재사용될 수 있는) 지식을 생산하는 노동은 가치를 직간접적으로 생산하지는 않지만, 이 지식을 이용하여 상품을 생산하는 상품생산노동을 강화된 노동으로 작용하게 하는 방식으로 가치생산에 기여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의 출발점은 지식의 생산과 상품의 생산이 분리되어 있고 그 성격이 현저히 다르다는 것이다. 물론 learning by doing이라는 개념이 포착하는 것처럼 상품의 생산이 동시에 지식의 생산으로 이어질 수 있지만, 나는 이 둘 사이의 구분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고 보았다. 그리고 마르크스가 지식에 관한 연구를 상세히 수행하지는 않았지만, 아마 내 생각에 동의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서 이 구절을 종종 애용하곤 한다. 마르크스는 “노동과정의 끝에 가서는 그 시초에 이미 노동자의 머리 속에 존재하고 있던 [즉, 관념적으로 이미 존재하고 있던] 결과“가 나온다고 언급했다. 바로 노동자의 머리 속에 존재하고 있던 것, 이것이 지식이다. 그리고 지식은 노동과정의 시초에 이미 존재한다.

물론 여기서 지식노동과 상품생산노동 사이의 구분은 사회형태와 무관한 것이다. 사회형태와 무관한 어떤 것, 마르크스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래서 마르크스 정치경제학을 공부하는 나는 자본주의에서 지식의 생산과 유통과 소비가 어떻게 이루어지며, 이것이 자본주의의 내적법칙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연구하고 있다.

그런데, 이 구절을 다른 맥락에서 살펴볼 수도 있다. 지식노동과 상품생산노동의 구분은 마르크스에 따르면 “오로지 인간에서만 볼 수 있는 형태”이다. 그리고 이 부분을 쓰기 20여년 전 그는 경제학-철학 수고에서 비슷한 주장을 펼친 바가 있다.

동물은 자신의 생활 활동과 직접적으로 하나이다. 동물은 자신의 생활 활동과 구별되지 않는다. 동물은 자신의 생활 활동인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생활 활동 자체를 자신의 의지와 의식의 대상으로 삼는다. 인간은 의식적 생활 활동을 가진다. 인간이 직접적으로 그것에 융합되는 규정성이란 없다. 의식적 생활 활동은 인간을 동물적 생활 활동으로부터 직접적으로 구별짓는다. 바로 이 때문에 인간은 하나의 유적 존재인 것이다. 혹은 인간이 바로 유적 존재이기 때문에, 그는 의식적 존재이며, 다시 말해서 그 자신의 생활이 그에게 있어 대상인 것이다. 바로 이 때문에 그의 활동은 자유로운 활동인 것이다. 소외된 노동은 이 관계를 전도시켜서 급기야 인간은 자신의 생활 활동, 자신의 본질을 단순히 자신의 생존을 위한 수단으로 만들어 버리는데, 이는 바로 인간이 의식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 1844년의 경제학 철학 초고, 78

그가 만 26세에 쓴, 이 책을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는 말자. 물론 매우 훌륭한 책이고, 마르크스의 생각이 이 책으로부터 크게 바뀐 것은 아니다.

다만, 이 구절을 그의 완성된 생각으로 볼 수는 없다. 여기서 마르크스는 인간의 의식적 생활 활동이 인간의 본질이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이러한 생각은 자본론의 마르크스에게 있어서는 폐기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의식적 생활활동이 인간을 동물로부터 구분지으며, 그를 유적 존재로 만든다. 지식을 생산하는 인간, 그 지식을 토대로 자연을 가공하는 인간, 그가 바로 동물과 구분되는 인간이다.

(80) 별로 안 중요한 마르크스의 인간관 – 자연 속에서 자연과 부딪히며 자연을 인간화하는 자연력으로서의 인간

사용가치 또는 재화의 생산이 자본가를 위해 자본가의 감독 하에 수행된다고 해서 그 생산의 일반적 성질이 달라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러므로 노동과정은 우선 첫째로 어떤 특정 사회형태와 관계없이 고찰되어야 한다. – 자본론 1권 7장, 235

사람은 흙에서 태어나 흙으로 돌아간다고 한다. 엄연한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공통성이 사람과 흙 각각에 과연 얼마나 중요한가? 사람과 흙은 아마도 백 수십여가지의 원소들로 환원될 수 있을 것이므로, 이들 사이의 공통성은 환상이 아니다. 하지만, 이 공통성은 사람과 흙의 본질에 대해서 무엇을 알려주는가? 그것이 하나의 추상에 불과한 이상, 공통성은 무의미하다.

사회형태와 무관한 노동과정 역시 마찬가지다. 노동과정 그 자체, 사회형태와 무관한 노동과정 그 자체가 존재한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존재하건 존재하지 않건 별반 중요하지 않다. 이러한 추상으로부터 특수한 생산양식, 사회형태로 나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마르크스가 그륀트리세에서 “생산일반”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 까닭이다.

노동은 무엇보다도 먼저 인간과 자연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하나의 과정이다. 이 과정에서 인간은자신과 자연 사이의 신진대사를 자기 자신의 행위에 의해 매개하고 규제하고 통제한다. 인간은 하나의 자연력으로서 자연의 소재를 상대한다. 인간은 자연의 소재를 자기 자신의 생활에 적합한형태로 획득하기 위해 [자기의 신체에 속하는 자연력인] 팔과 다리, 머리와 손을 운동시킨다. 그는이 운동을 통해 외부의 자연에 영향을 미치고, 그것을 변화시키며, 그렇게 함으로써 동시에 자기 자신의 자연을 변화시킨다. 그는 자기 자신의 잠재력을 개발하며, 이 힘의 작용을 자기 자신의 통제 밑에 둔다. – 235-6

1844년 경제학-철학 수고의 ‘소외’에 관한 장을 연상시키는 구절이다. 25년 여가 지난 후에도 마르크스는 젊은 시절의 생각을 간직하고 있다 – 비록 그 의의가 달라지기는 했지만.

마르크스는 노동을 통해 인간이 자연을 변화시키며, 또한 자신을 변화시킨다고 했다. 뒤에 나오지만 특히 노동수단은 인간의 “자연적 모습의 연장” (238) 이기도 하다. 그는 인간을 자연과 분리된 존재로 보지 않았다. 자연 속에서, 자연과 부딪히며, 자연을 그 자신으로 끊임없이 변형시키는 존재, 그것이 인간이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관은, 사회형태와 무관한 인간관이라는 점에서 불충분하다. 자본론 1권의 3편을 쓰고 있는 마르크스는 이러한 인간상에 별다른 관심이 없다. 이것이 이상적 인간관인 것도 아니다. 사회형태와 관계 없이 인간과 자연 사이의 관계는 언제나 이러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가 나쁜 것은 인간을 어떠한 이상적 상태로부터 소외시키기 때문이 아니다. 자본주의는 그냥 자본주의라서 나쁘다. 한 계급의 다른 계급의 지배가 지배 그 자체에 머무르지 않고, 나쁜 결과들을 만들어내기 때문에 더 나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