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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무맹랑한 이야기(?): 자본주의의 위기와 변화

노조와 노동자의 힘을 찍어 누르는 것은 자본에 이로운가? 꼭 그렇지는 않음을 합리적인 사고를 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모르지 않을 것. 그러나 적어도 지난 30년, 정부와 자본은 노동자의 세력을 억누르는 데 온 힘을 기울여왔고, 여기엔 한치의 양보나 주저도 없었다.

그 결과를 우리는 눈앞에서 아주 생생하게 목격하고 있다. 지구상의 모든 나라에서 심화되고 있는 양극화, 노동의 불안정화와 비정규직화, 임금하락 등. 그러는 사이 노조 조직률은 뚝뚝 떨어져, 한국의 경우 이제 10%에도 못 미친다(2011년 들어서 10%대를 회복했다고는 하는데.. 거기서 거기).

그렇다면 이런 상황이 자본에 이로울까? 노무비용 하락, 노무 ‘관리비용’ 하락 등이 개별자본에게 이롭지 않을 까닭은 없다. 하지만 자본 전체에겐 그렇지 않을 수 있음이 최근 속속 드러나고 있다. 국가의 재정위기는 그 중요한 징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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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경제학이 분명히 가르치는 대로 임금이노동력의 재생산비용이며, 사회적으로 본다면 노동자 가족, 나아가 사회 자체의 재생산비용이다. 그러니 이 임금이 하락하면 사회의 재생산이 위협을 받을 것은 뻔한 이치. 물론 일정한 한도까지는 괜찮을 것이다. 고기반찬 대신 스팸을 먹는다고 해서 당장 큰 일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니까. 그러나 밥 대신 라면을 먹어야 하고, 나아가 세끼 대신 두끼만 먹어야 한다면 사정이 다를 것이다. 올초 우리나라에서 엥겔계수가 상승하고 있다는 기사가 나온 적이 있음을 떠올리면, 누구도 이런 일이 전혀 비현실적인 것이라고 치부하진 못하리라.

사태가 이렇게 치달으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역사적으로 보면 대중의 폭동이 일어나곤 했다. 사람에 따라선 최근 있었던 오큐파이 운동이나 그와 비슷한 시기에 지구촌 곳곳에서 벌어진 다양한 투쟁들을 그러한 폭동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어쨌거나 한편으로는 그러한 폭동을 잠재우기 위해, 다른 한편으론 자본주의 체제의 원활한 재생산을 위해, 국가가 나서지 않을 수 없다. 신자유주의 시기 내내 계속되었던 복지축소 움직임이 주춤하고, 한국을 포함해 동남아시아 신흥국들을 중심으로 복지체제가 정비/강화되는 현재의 사태는 그러한 국가의 노력의 일환이다.

하지만 그런 노력은 공짜가 아니다. 많은 돈이 들지만, 이를 충당할 자원은 점점 줄어들어 왔다. 즉 노동대중의 물질적 힘의 약화가 동시에 국가의 물적 기반의 약화를 초래했다는 얘기다. 임금의 저하는 소득세수의 감소를, 임금저하에 따른 소비감소는 각종 소비세수의 감소를, 소비감소에 따른 자본간경쟁의 격화는 각국에서 경쟁적인 법인세율 인하요구로 이어져 결과적으로 법인세수의 감소를 낳는다. 이렇게 국가의 세수는 줄어드는 데 반해, 향후 인구 노령화의 진전, 환경오염에 따른 비용의 급증 등에 대응하기 위해 국가는 점점 더 크고 적극적인 역할을 요구받고 있는 실정이다.

바로 이러한 배경에서, 오늘날 선진 자본주의권의 국가들이 맞이하고 있는 재정위기는 그 자체로도 문제이지만, 향후 더욱 심각한 문제들을 예비하고 있다는 점에서 모든 진영에 속한 사람들에게 엄청난 도전을 제기한다. 요새 선진국들을 중심으로 세수기반을 확충하려는 노력이 눈물겨울 정도로 힘겹게 진행되고는 있지만(대표적으로 다국적기업에 대한 과세 강화, 조세피난처에 대한 문제제기 심화), ‘기존의’ 세수기반이 매우 취약해진 상황에서 ‘확충’은 그 효과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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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앞으로 어떤 선택이 있을까? 크게 얼개를 그려보면… 첫째, 자본이 활력을 되찾아야 하고, 둘째, 노동도 활력을 되찾아야 하며, 셋째, 국가는 현재 자신에게만 오로지 지워지고 있는 짐의 일부를 ‘시장’에 떠넘길 수 있어야 한다. 내가 보기에는 이 세 가지를 동시에, 한큐에 해결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새로운 산업”의 창출이다. 우리나라에서 최근 가장 인기있는 주제로 떠오르고 있는 ‘창조경제’란 바로 그러한 필요성을—의식적이건 아니건—반영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물론 여기서 내가 ‘새로운 산업’이라고 부르는 것에서 키워드는 (이미 암시했듯이) ‘실버’와 ‘그린’이다. 무엇보다 이 둘을 성공적으로 산업화할 경우, 국가 입장에서는 이제껏 혼자서 짊어져야만 했던 짐의 상당부분을 덜 수 있게 된다(그러나 이것은—아직은 명확하게 설명할 수는 없지만—그간 이슈화되곤 했던 ‘의료민영화’와 같은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가 아닐까 한다). 한편 이렇게 새로운 활동영역을 부여받은 자본은 엄청난 활력을 얻게될 것인데, 이는 단순히 ‘새로운 산업’의 형성이라는 측면에서뿐 아니라 그에 따라 ‘기존 산업’의 재편이라는 점에서 보더라도 매우 매력적인 변화임에 틀림없다. 끝으로, 이러한 과정에서 노동도 재편되고 그 힘도 커질 것임에 틀림없다. 물론 그 과정은 ‘계급투쟁’에 의해 추동될 것이며, 이 투쟁은 한편으론 공공의 영역에 속해있다고 여겨졌던 것들이 상품화되는 과정에서, 다른 한편으론 그러한 상품화과정에서 자본의 노동에 대한 수요가 급증하면서 조직될 가능성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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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이 하나 있는데… 예컨대 노령화의 문제를 보자. 그러니까, 서유럽이나 일본, 한국 등과 같이 급속도로 인구의 노령화가 진행되고 있는 나라들에서는 경제가 새로운 활력을 얻는다 해도 그 활력을 흡수할 수 있는 충분한 노동력 저수지가 존재하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다. 과연 서유럽의 늙은 대중들을 누가 먹여살릴 것인가? 각국에서 은퇴연령을 늦추는 등의 움직임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이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함은 자명하다. 어쩌면 이런 측면에서 우리는 ‘새로운(?) 제국주의’의 가능성을 점쳐볼 수 있을지 모른다.

개인적으로는 최근에 급물살을 타고 있는 미국과 유럽연합의 FTA 협상이 심상치않아 보인다. 많은 이들이 지적하다시피(예컨대 링크), 이번 협상은 단순히 무역장벽을 없애자는 것이라기보다는 ‘규제일치’라는 성격이 강해 보인다. 물론 어떤 FTA에 그런 성격이 없었겠냐만.. 이번의 경우는 다르다. 당사자가 미국과 유럽이기 때문이다. 그들 사이에 일치된 규제체계가 다른 나라들에도 (부분적으로는 각자가 기존에 다양한 나라들과 맺고 있던 FTA들을 통하여) 그대로 강요될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여기에서 핵심적인 규제가 예의 그 ‘그린’과 ‘실버’와 관련된 것들이 아닐까 하는 것이 내 생각이다. 이미 말했듯이 이 둘은 아직까지 본격적으로 산업화되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두 분야가 현재의 선진국들에서 가장 발달해 있는 것도 사실이다. 특히 이 둘의 경우엔 ‘공공재’적인 성격이 강하기 때문에, 그것의 시장화/상품화는 결코 무분별하게 진행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국가의 역할이 중요하게 제기될 것이며, 그런 점에서 ‘규제’가 매우 중요해질 것이다. 요컨대 유럽과 북미의 선진국들은 바로 그러한 ‘규제체계’를 미리 자기들끼리 세팅해놓고, 이를 ‘기초자산’으로 삼아 그로부터 일종의 ‘지대’를 신흥국들로부터—정확히는 신흥국의 싱싱한 노동대중으로부터—뽑아내려 할 것이다. 이번 미국과 유럽연합 간의 FTA협상은 그러한 과정으로의 본격적인 진입을 알리는 신호탄이 아닐까 하는 것이 내 짐작이다(따라서 이를 미국/유럽의 구세력과 중국 등의 신세력 간의 대립으로 보는 것은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닐지라도 충분히 smart한 해석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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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껏 이야기한 것이 어쩌면 허무맹랑해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신자유주의 시대에 본격적으로 ‘산업화’한 금융의 예를 떠올리면 전혀 비현실적인 것도 아니다. 과연 30-40년 전, 오늘날과 같은 ‘금융’을 상상이나 했겠는가.

과연 이러한 사태 전개가 노동자계급에겐 어떠한 영향을 미칠 것인가. 특히 신자유주의 양극화, 노동의 불안정화/비정규직화 등이 극단화된 한국사회에서는 어떨 것인가. 이런 문제들에 대한 대답들을 한국의 좌파들은 이제 슬슬 내놓을 준비를 해야 할 것이다.

말할 필요도 없이, 적어도 대략 위와 같이 사태가 흘러간다고 했을 때, 진보진영 내의 전통적인 ‘적’이냐 ‘녹’이냐 등의 대립 내지는 연대 구도들은 매우 잘못된 것이라는 점이다. 단적으로 말해, 적-녹의 대립이든 연대든, 그러한 담론들에서 ‘적’과 ‘녹’은 일종의 ‘가치’로서 제시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적’과 ‘녹’의 대립을 논하는 것—특히 ‘녹’을 옹호하는 이들의 ‘적’에 대한 적대, 또는 어느 쪽이 ‘더’ 근본적이냐 하는 논쟁—이 유치한 것은 말할 것도 없으니 논외로 치고) 둘 간의 ‘연대’는 ‘현실의 힘’에 의해 강요되고 있는 것이다. 노동의 반대쪽에 있는 자본 측에서 둘의 융합이 전방위적으로 시도되고 있지 않은가. ‘적’이 없는 ‘녹’이 불가능하고 ‘녹’이 없는 ‘적’이 형용모순으로 되는 사태…

어렵다. (급… 끝ㅎㅎ)

[200907] 자본주의 질서를 둘러싼 정당성 전쟁

앞서 글에 덧글을 쓰다가, 아래 글이 생각났다. 작년 여름에 그러니까 런던에 있을 때 국내의 한 매체에 썼던 것이다. 지면 관계상 하고픈 얘기를 매우 압축적으로 할 수밖에 없었지만, 나름대로 논지는 드러났다고 믿는다.

‘경제학의 개혁’이라는 문제에 대해 말하자면, 아래 글에서 보듯 작년 여름까지만 해도 나름 그 열기가 뜨거웠는데 지금은 좀 김이 빠진 느낌이다. 아마도 이는, 그 이후에 불어닥친 전지구적 (특히 선진국들을 중심으로 한) 보수화 물결과도 무관치 않으리라(이를테면 영국에서 보수당의 집권, 최근 오바마의 패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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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를 비판한 사상가를 들라면 마르크스(Karl Marx)를 첫 손에 꼽을 이들이 많을 것이다.

오랫동안 언론인이기도 했던 마르크스는 수많은 신문칼럼 등을 통해 자본가들과 그들을 공적으로 대표하는 정치인들에 대한 혐오를 숨기지 않았지만, <자본>과 같은 좀 더 진지한 저작에서는 자신의 진정한 비판대상은 ‘개인’보다는 그를 둘러싼 ‘사회관계’ 또는 ‘구조’였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마르크스의 이런 태도를 어떻게 보느냐를 두고 후대에 와서 주의주의니 구조주의니 하는 여러 입장들이 나왔지만, 정작 개인보단 사회에, 일반 통념에 비춘 가치판단보단 비인격적 물질적 과정에 초점을 두는 태도는 마르크스만의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꽤 오랜 기간에 걸쳐 서구 근대 지성사에서 달성된 하나의 보편적인 과학적 성취였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마르크스가 비판의 직접대상으로 삼았던 근대경제학은 그 궁극적인 응결체였다. 이는 곧, 이제 사회라는 것이 개인들의 총합으로 환원될 수 없을 정도로 여러모로 복잡해졌다는, 그리하여 이제는 원래 ‘가계의 운영’이라는 뜻을 담고 있었던 ‘경제학’ 대신 ‘정치’경제학이라는 새로운 과학이 사회를 탐구하기 위해 요구되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경제학의 발전을 폭넓은 서구지성사적 관점에서 탐구해온 도날드 윈치(Donald Winch)는 이런 사정을 가리켜, “경제학은 일반 통념에 입각한 고려와 결별하고 그것을 비인격적 경제제력에 복속시켰다”라고 표현한 바 있다.

위와 같은 배경을 떠올리면, 자본주의 경제를 대중들이 가지고 있는 통념이나 가치관에 입각해서 평가하거나 비판하는 것만큼 부적절한 것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후자와 같은 비판이 전혀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결국 그런 통념이나 가치관이야말로 인구의 대다수를 구성하는 사람들이 지키면서 살고자 하는 삶의 기준이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범지구적 금융공황이 특히 서구 선진국들에서 심각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살필 수 있다. 실제로 세계경제는 적어도 최근 40여 년만 놓고 봐도 끊임없이 공황에 시달려왔지만, 그때마다 이 공황들은 때로는 중동 산유국들의 자원이기주의의 탓으로, 때로는 중남미 포퓰리즘적 정부들의 방만한 재정운영이나 동(남)아시아 나라들의 유교적 잔재의 탓으로 얼버무려지곤 했다. 그러나 세계자본주의의 핵심부에서, 그것도 현대 경제의 꽃이라 할 수 있는 금융분야에서 불거진 이번 공황은 마르크스 따위엔 관심도 없던 대중들에게조차 체제 자체의 문제로 다가가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현사태의 주범임이 명백해 보이는 거대 금융회사의 CEO들이 세계경제를 파탄에 빠뜨려놓고 공황 이전에 미리 약정되어 있었다는 이유로 거액의 보너스를 챙기는 것―과연 이것만큼 대중들의 건전한 상식을 거스르는 현상이 또 있겠는가? [이렇게 보면, 이번 서울 G20 회의에서 각국의 주요 기업인들이 모여 새로운 글로벌 질서를 논했다는 것 자체가 아주 넌센스다.]

사정이 이쯤 되면 체제의 옹호자들도 좀 더 세련된(!) 논리를 내놓는 데 나서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 대열의 선두에 예일대의 로버트 쉴러(Robert Shiller)와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이기도 한 미국 UC버클리의 조지 애컬로프(George Akerlof)도 보인다. 그들은 올 초 내놓은 <야성적 충동>(Animal Spirits: How Human Psychology Drives the Economy, and Why It Matters for Global Capitalism)에서 그간 경제학이 인간이 본래 가지고 있는 비이성적 성격을 무시해왔다고 비판함으로써, 결과적으로 현재의 공황을 ‘우리 모두’의 탓으로 슬그머니 돌린 바 있다. 다른 한편 HSBC 지주회사의 그룹회장이자 영국국교회 목사이기도 한 스티븐 그린(Stephen Green)은 이달 초 <선한 가치>(Good Value: Reflections on Money, Morality and an Uncertain World)를 냄으로써 ‘맘몬’과 ‘신’ 사이에서 고뇌하는 이들을 위해 둘을 동시에 섬기는 자신만의 노하우(?)을 보여주기도 했다.

말하자면 현재 신문이고 방송이고 할 것 없이 영국 미디어의 경제 분야를 꿰뚫는 하나의 축이 바로 범지구적 금융공황의 와중에서 가치관과 정의관념을 훼손당한 사람들과 이를 고려해 현존질서를 안전하게 재편하려는 세력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는 소리 없는 ‘정당성 전쟁’이다. 이것이 어떻게 귀결되느냐에 따라 우리 미래의 모습도 얼마간은 결정될 것이리라. 한편 비판자의 입장에 선 사람이라면, 이 전쟁의 전선이 앞에서 말했던, 오랜 기간에 걸쳐 벼려져 온 현대사회의 본질적 성격에 대한 문제의식, 즉 ‘사회구조’ 자체에 대한 문제의식에서는 크게 비껴서 있음에 주목해둘 만도 하다. [즉 진정한 문제는 바로 이 ‘사회구조’를 어떻게 볼 것인지를 둘러싸고 형성되어 있는데, 현재 논쟁들은 대체로 엉뚱한 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 같다. 일년 반이 지난 지금은 물론 훨씬 더한다. 한편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 ‘사회구조’의 문제에 주의를 기울인 ‘최후의’ 주류경제학자로 케인스를 꼽는다면, 현재의 범지구적 위기를 계기로 한동안 경제학 담론에서 배제되었던 케인스가 최근 논쟁의 핵심으로 다시금 들어왔다는 점은 평가해줄만하다.] (끝)

자선자본주의? 선물경제?

Bill Gates나 Warren Buffett이 엄청난 액수의 재산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준다고 한다. 이를 두고 자선자본주의(philanthrocapitalism)라는 말도 생겨났다. 이를 인류학에서 꾀 오래 벼려진 선물경제(gift economy)라는 개념과 연결시키는 시도도 있는 것 같다.

선덕여왕 이요원의 말을 빌자면, 자본주의 경제에서 개인은 장기판의 말과 같다. 각자들 나름대로 ‘이상’과 ‘꿈’을 가지고 살겠지만, 그게 뜻대로 실현되지는 않는다. 그래서 억압받는 노동자(개인)를 특별히 불쌍하게 볼 것도 아니지만, 억압하는 자본가(개인)를 특별히 나쁘다고 할 필요도 없다. 오직 냉정함만이 사태를 올바르게 바라볼 수 있는 힘을 준다. 달리 말하면, 심지어 돈을 얼마나 버느냐도, 반드시 개인의 능력과 의지에 따른 것만은 아니란 얘기다. 더구나 빌게이츠나 워렌버핏쯤 되면, 그 엄청난 액수의 돈이 다 자기가 잘나서 벌었다고 생각하진 않을 것이다.

이런 사정은, 게이츠/버핏 같은 사람들에게 묘한 안락함을 준다. 이 안락함은, 게이츠나 버핏 같은 사람들이야말로, “자본주의 경제에서 개인은 장기판의 말과 같다”라는 점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다는 데서 나온다. 그러니까 무슨 말이냐면, 성서에,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라고 했는데(가만… 왼손, 오른손이 바뀐 건가.. 모르겠다-_-?)… 이들이 정말 그렇다. 이들은, 한 손으로는 이들이 자신의 의지와는 다소 무관하게 떠맡은 장기판의 말 역할을 매우 훌륭하게 행한다. 노동자를 억압하고 세금을 포탈하며 경쟁기업을 무너뜨리고 사회와 여론을 자기의 사업에 유리한 방향으로 이끌기 위해 온갖 추잡한 짓을 서슴지 않는다. 그러나 다른 한 손–그것이 오른손이든 왼손이든–으로는…… 아… ‘자선’을 베푼다. 나눠야 한다고 말한다. 언뜻 보기엔 현대의 분열된 자아상을 보는 것 같지만, 저들에겐 그렇지 않다는 게 중요하다. 반대로 저들에겐 이런 상황이 더 없이 안락하다. 왜? 게이츠나 버핏 같은 사람들은, 역설적이게도, 예의 그 ‘한 손’이 온갖 ‘악행’을 저지를 때, 자신은 철저히 장기판의 말일 뿐임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것을 잘 알기에, 결국엔 자신이 개인으로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선행은, 자신이 그렇게 장기판의 말 노릇을 하며 벌어들인 부를 나누는 것이라는 사실도 잘 안다.

따라서 게이츠나 버핏을 나무랄 필요는 없다. 한 손으로는 나쁜 짓하고 다른 한 손으로는 선행으로써 속죄한다고, 또는 그들이 행하는 ‘선행’이란 게 실은 더 큰 ‘악행’을 숨기기 위한 눈속임을 뿐이라고, 그들을 나무랄 필요는 없다… 계속 말했지만, 결국 그들의 ‘악행’은 그들이 행하는 게 아니다. 반대로 그들의 ‘선행’은 그들이 행하는 거다. 따라서 그들은 ‘좋은’ 사람들이다. 우리는 그들을 존경할 줄 알아야 한다.

좋은 사람들이 좋은 일을 하는 거다. 그런데 모든 좋은 동기가 좋은 결말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것이 중요하다. 게이츠나 버핏 같은 좋은 사람들이 개인의 선한 의지에 따라 기부를 했을지언정, 그렇게 기부된 부는 다시, 예의 그 ‘장기판의 말’들에 의해 ‘장기판’ 위의 말하자면 ‘비인격적 과정’을 거쳐 돌고돌게 될 것이다. 이런 것을 한 번 해보면 재밌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를테면, 버핏이 기부한 1달러가 아프리카 난민의 호주머니에 들어간 뒤의 행방을 좇는 거 말이다.

선량한 버핏과 게이츠는 결코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그리고 그들이 이런 사실을 알면 슬퍼할지도 모르지만, 이 난민은 그 1달러를 (우리로 치면) 대박을 꿈꾸며 주식시장으로 가져갔다가 이내 쪽박을 찰 수도 있다. 또는 직업이 없는 이 난민은 그 1달러로 3일간의 식량을 해결했지만, 이후 식량을 구할 수가 없어 굶어죽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는 사이 그 1달러는 다시 버핏과 게이츠의 호주머니 안으로 (일련의 마술적 과정을 거쳐 더러는 두배, 세배가 되어) 다시 들어가고…… 우리의 버핏과 게이츠는 다시 그 1달러로 앞서 죽어간 그 난민이 남겨둔 유일한 피붙이에게 우유를 사준다……

이른바 ‘자선자본주의’라는 게 이런 거다. 나눔? 좋은 거다. 자신이 가진 것을 나눠주는 사람? 좋은 사람이다. 그런데 그것만으로는 체제를 바꿀 수 없다. 안 바뀐다. 다만 당장 굶어죽는 사람을 살릴 수 있을 뿐이다. 실은 바로 이것만으로도, 자본주의 사회에서, 비록 체제를 바꿀 수는 없을지라도 우리가 나눠야만 하는 충분한 이유가 된다. 나눠야 한다. 그런데 우린 알아야 한다. 그렇게 해서 살아난 인도 어린이는, 아주 운이 좋아 계속 살아남는다 해도, 중동의 사막 한가운데에서 평생을 엄청난 착취에 시달리는 건설노동자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기껏해야’ 말이다. 이런 사정은, 그것을 깨닫는 자에겐, 자본주의가 지속되는 한 끝끝내 가지고 가야 할 서글픔이다. (물론 이 건설노동자를 착취하는 건, 결국 게이츠나 버핏 같은 사람들이다.)

자선자본주의! 이 용어는 한편으론 말이 되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론 말이 안 되기도 한다. 왜 말이 되느냐? ‘자선’은 자선이되 ‘자본주의’라는 점을 적시한다는 점에서 말이 된다. 그러나 말이 안 된다. 왜? ‘자선’이란 ‘체제’에 대한 것이 아니므로, 거기에 ‘자본주의’라는 거창한 용어를 붙이는 것은 격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적어도 그게 ‘체제’에 대한 것이려면, 이 ‘자선’은 그것이 경제를–즉 분배나 소비뿐만 아니라 생산까지도, 그리하여 생산/분배/소비 등의 이 모든 순환 전체를–어떻게 재구성하는지를, 곧 경제의 자기재생산방식을 어떻게 탈바꿈시키는지를 보여야 할 것이다. 말이 너무 어렵나? 쉽게 말하면 이거다: 어떻게 ‘자선’으로 지하철9호선을 만들고(계획하고 부지와 자재를 구매하고 노동자를 고용해 실제로 만들고), 실제 지하철을 안정적으로 운행시키며, 역 등에 관련 업체들을 입주시키고… 등등을 꾸준히 꾸려나갈 것인지를 보여야 한단 얘기다.

그렇지 않다면 ‘자선’은 그저 자선일 뿐이다. 같은 논리로, ‘선물’도 그저 선물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