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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무맹랑한 이야기(?): 자본주의의 위기와 변화

노조와 노동자의 힘을 찍어 누르는 것은 자본에 이로운가? 꼭 그렇지는 않음을 합리적인 사고를 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모르지 않을 것. 그러나 적어도 지난 30년, 정부와 자본은 노동자의 세력을 억누르는 데 온 힘을 기울여왔고, 여기엔 한치의 양보나 주저도 없었다.

그 결과를 우리는 눈앞에서 아주 생생하게 목격하고 있다. 지구상의 모든 나라에서 심화되고 있는 양극화, 노동의 불안정화와 비정규직화, 임금하락 등. 그러는 사이 노조 조직률은 뚝뚝 떨어져, 한국의 경우 이제 10%에도 못 미친다(2011년 들어서 10%대를 회복했다고는 하는데.. 거기서 거기).

그렇다면 이런 상황이 자본에 이로울까? 노무비용 하락, 노무 ‘관리비용’ 하락 등이 개별자본에게 이롭지 않을 까닭은 없다. 하지만 자본 전체에겐 그렇지 않을 수 있음이 최근 속속 드러나고 있다. 국가의 재정위기는 그 중요한 징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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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경제학이 분명히 가르치는 대로 임금이노동력의 재생산비용이며, 사회적으로 본다면 노동자 가족, 나아가 사회 자체의 재생산비용이다. 그러니 이 임금이 하락하면 사회의 재생산이 위협을 받을 것은 뻔한 이치. 물론 일정한 한도까지는 괜찮을 것이다. 고기반찬 대신 스팸을 먹는다고 해서 당장 큰 일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니까. 그러나 밥 대신 라면을 먹어야 하고, 나아가 세끼 대신 두끼만 먹어야 한다면 사정이 다를 것이다. 올초 우리나라에서 엥겔계수가 상승하고 있다는 기사가 나온 적이 있음을 떠올리면, 누구도 이런 일이 전혀 비현실적인 것이라고 치부하진 못하리라.

사태가 이렇게 치달으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역사적으로 보면 대중의 폭동이 일어나곤 했다. 사람에 따라선 최근 있었던 오큐파이 운동이나 그와 비슷한 시기에 지구촌 곳곳에서 벌어진 다양한 투쟁들을 그러한 폭동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어쨌거나 한편으로는 그러한 폭동을 잠재우기 위해, 다른 한편으론 자본주의 체제의 원활한 재생산을 위해, 국가가 나서지 않을 수 없다. 신자유주의 시기 내내 계속되었던 복지축소 움직임이 주춤하고, 한국을 포함해 동남아시아 신흥국들을 중심으로 복지체제가 정비/강화되는 현재의 사태는 그러한 국가의 노력의 일환이다.

하지만 그런 노력은 공짜가 아니다. 많은 돈이 들지만, 이를 충당할 자원은 점점 줄어들어 왔다. 즉 노동대중의 물질적 힘의 약화가 동시에 국가의 물적 기반의 약화를 초래했다는 얘기다. 임금의 저하는 소득세수의 감소를, 임금저하에 따른 소비감소는 각종 소비세수의 감소를, 소비감소에 따른 자본간경쟁의 격화는 각국에서 경쟁적인 법인세율 인하요구로 이어져 결과적으로 법인세수의 감소를 낳는다. 이렇게 국가의 세수는 줄어드는 데 반해, 향후 인구 노령화의 진전, 환경오염에 따른 비용의 급증 등에 대응하기 위해 국가는 점점 더 크고 적극적인 역할을 요구받고 있는 실정이다.

바로 이러한 배경에서, 오늘날 선진 자본주의권의 국가들이 맞이하고 있는 재정위기는 그 자체로도 문제이지만, 향후 더욱 심각한 문제들을 예비하고 있다는 점에서 모든 진영에 속한 사람들에게 엄청난 도전을 제기한다. 요새 선진국들을 중심으로 세수기반을 확충하려는 노력이 눈물겨울 정도로 힘겹게 진행되고는 있지만(대표적으로 다국적기업에 대한 과세 강화, 조세피난처에 대한 문제제기 심화), ‘기존의’ 세수기반이 매우 취약해진 상황에서 ‘확충’은 그 효과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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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앞으로 어떤 선택이 있을까? 크게 얼개를 그려보면… 첫째, 자본이 활력을 되찾아야 하고, 둘째, 노동도 활력을 되찾아야 하며, 셋째, 국가는 현재 자신에게만 오로지 지워지고 있는 짐의 일부를 ‘시장’에 떠넘길 수 있어야 한다. 내가 보기에는 이 세 가지를 동시에, 한큐에 해결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새로운 산업”의 창출이다. 우리나라에서 최근 가장 인기있는 주제로 떠오르고 있는 ‘창조경제’란 바로 그러한 필요성을—의식적이건 아니건—반영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물론 여기서 내가 ‘새로운 산업’이라고 부르는 것에서 키워드는 (이미 암시했듯이) ‘실버’와 ‘그린’이다. 무엇보다 이 둘을 성공적으로 산업화할 경우, 국가 입장에서는 이제껏 혼자서 짊어져야만 했던 짐의 상당부분을 덜 수 있게 된다(그러나 이것은—아직은 명확하게 설명할 수는 없지만—그간 이슈화되곤 했던 ‘의료민영화’와 같은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가 아닐까 한다). 한편 이렇게 새로운 활동영역을 부여받은 자본은 엄청난 활력을 얻게될 것인데, 이는 단순히 ‘새로운 산업’의 형성이라는 측면에서뿐 아니라 그에 따라 ‘기존 산업’의 재편이라는 점에서 보더라도 매우 매력적인 변화임에 틀림없다. 끝으로, 이러한 과정에서 노동도 재편되고 그 힘도 커질 것임에 틀림없다. 물론 그 과정은 ‘계급투쟁’에 의해 추동될 것이며, 이 투쟁은 한편으론 공공의 영역에 속해있다고 여겨졌던 것들이 상품화되는 과정에서, 다른 한편으론 그러한 상품화과정에서 자본의 노동에 대한 수요가 급증하면서 조직될 가능성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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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이 하나 있는데… 예컨대 노령화의 문제를 보자. 그러니까, 서유럽이나 일본, 한국 등과 같이 급속도로 인구의 노령화가 진행되고 있는 나라들에서는 경제가 새로운 활력을 얻는다 해도 그 활력을 흡수할 수 있는 충분한 노동력 저수지가 존재하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다. 과연 서유럽의 늙은 대중들을 누가 먹여살릴 것인가? 각국에서 은퇴연령을 늦추는 등의 움직임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이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함은 자명하다. 어쩌면 이런 측면에서 우리는 ‘새로운(?) 제국주의’의 가능성을 점쳐볼 수 있을지 모른다.

개인적으로는 최근에 급물살을 타고 있는 미국과 유럽연합의 FTA 협상이 심상치않아 보인다. 많은 이들이 지적하다시피(예컨대 링크), 이번 협상은 단순히 무역장벽을 없애자는 것이라기보다는 ‘규제일치’라는 성격이 강해 보인다. 물론 어떤 FTA에 그런 성격이 없었겠냐만.. 이번의 경우는 다르다. 당사자가 미국과 유럽이기 때문이다. 그들 사이에 일치된 규제체계가 다른 나라들에도 (부분적으로는 각자가 기존에 다양한 나라들과 맺고 있던 FTA들을 통하여) 그대로 강요될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여기에서 핵심적인 규제가 예의 그 ‘그린’과 ‘실버’와 관련된 것들이 아닐까 하는 것이 내 생각이다. 이미 말했듯이 이 둘은 아직까지 본격적으로 산업화되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두 분야가 현재의 선진국들에서 가장 발달해 있는 것도 사실이다. 특히 이 둘의 경우엔 ‘공공재’적인 성격이 강하기 때문에, 그것의 시장화/상품화는 결코 무분별하게 진행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국가의 역할이 중요하게 제기될 것이며, 그런 점에서 ‘규제’가 매우 중요해질 것이다. 요컨대 유럽과 북미의 선진국들은 바로 그러한 ‘규제체계’를 미리 자기들끼리 세팅해놓고, 이를 ‘기초자산’으로 삼아 그로부터 일종의 ‘지대’를 신흥국들로부터—정확히는 신흥국의 싱싱한 노동대중으로부터—뽑아내려 할 것이다. 이번 미국과 유럽연합 간의 FTA협상은 그러한 과정으로의 본격적인 진입을 알리는 신호탄이 아닐까 하는 것이 내 짐작이다(따라서 이를 미국/유럽의 구세력과 중국 등의 신세력 간의 대립으로 보는 것은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닐지라도 충분히 smart한 해석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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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껏 이야기한 것이 어쩌면 허무맹랑해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신자유주의 시대에 본격적으로 ‘산업화’한 금융의 예를 떠올리면 전혀 비현실적인 것도 아니다. 과연 30-40년 전, 오늘날과 같은 ‘금융’을 상상이나 했겠는가.

과연 이러한 사태 전개가 노동자계급에겐 어떠한 영향을 미칠 것인가. 특히 신자유주의 양극화, 노동의 불안정화/비정규직화 등이 극단화된 한국사회에서는 어떨 것인가. 이런 문제들에 대한 대답들을 한국의 좌파들은 이제 슬슬 내놓을 준비를 해야 할 것이다.

말할 필요도 없이, 적어도 대략 위와 같이 사태가 흘러간다고 했을 때, 진보진영 내의 전통적인 ‘적’이냐 ‘녹’이냐 등의 대립 내지는 연대 구도들은 매우 잘못된 것이라는 점이다. 단적으로 말해, 적-녹의 대립이든 연대든, 그러한 담론들에서 ‘적’과 ‘녹’은 일종의 ‘가치’로서 제시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적’과 ‘녹’의 대립을 논하는 것—특히 ‘녹’을 옹호하는 이들의 ‘적’에 대한 적대, 또는 어느 쪽이 ‘더’ 근본적이냐 하는 논쟁—이 유치한 것은 말할 것도 없으니 논외로 치고) 둘 간의 ‘연대’는 ‘현실의 힘’에 의해 강요되고 있는 것이다. 노동의 반대쪽에 있는 자본 측에서 둘의 융합이 전방위적으로 시도되고 있지 않은가. ‘적’이 없는 ‘녹’이 불가능하고 ‘녹’이 없는 ‘적’이 형용모순으로 되는 사태…

어렵다. (급… 끝ㅎㅎ)

“무상급식”은 (가난한) 애들 밥주는 문제만은 아니다

어제 “무상급식” 투표가 있었다. 누구 말대로, 투표 안하고서 이렇게 홀가분한 건 처음인 것 같다. 투표의 결과, 초등학교에선 이번 2학기부터 “무상급식”이 시행된다고 한다.

1.

개인적인 경험으로 미뤄 생각해보면 참으로 잘된 일이다. 다른건 관두고… 어린시절, 학교에서 도시락 먹던 것만 생각해봐도 그렇다. 난 그다지 풍족하지 못했던 처지라, 도시락을 못 싸가지고 다닌 적도 (자주는 아니어도) 있었고 도시락이 있어도 반찬이 거의 매일 형편없었다. 그러니 점심시간이 내겐 두 번째로 고통스러운 시간이었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첫 번째로 고통스러운 시간은 음악시간. 악기를 다뤄야 하는데, 못하면 얻어맞았으니까.. 그것땜에 학교에 가기 싫어 꾀병을 부린적도 몇 번 있다.) 분위기상 혼자 먹을 수는 없고 누군가와 함께 먹어야 하는데, 반찬을 꺼내는 것 자체가 친구들에게 죄를 짓는 느낌이 들기도 했고 또 어떤 (잘사는) 친구들과는 꿈에도 밥을 같이 먹을 엄두를 못냈다. 지금이야 그냥 가볍게 웃으며 회상할 수 있지만, 그땐 좀 서러웠던 것 같다.

2.

어쨌든 주민투표도 무산됐으니, 이제는 무상급식 문제를 좀 더 냉정하게 바라볼 필요가 있다.

내가 이번 무상급식 논쟁에서 가장 못마땅한 것은 찬성파나 반대파나 이 문제를 “애들 밥 먹이는 문제”로 본다는 점이다. 오세훈 파는 그렇다 쳐도 그 반대쪽에 서 있는 이른바 “진보파”도 문제인데, 이들이 오세훈 등의 보수파를 비난할 때 “애들 밥주는 것 가지고 째째하게 군다”는 식의 논리를 사용하곤 했는데, 이건 그야말로 “복지 포퓰리즘”이라는 비아냥이 딱 어울릴 정도로 엉터리다.

실제로 이번 투표의 선택지도 {모두에게 급식을 무상으로 제공할 것인가}, 아니면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에게만 선별적/단계적으로 제공할 것인가}였지 않은가. 후자를 지지하는 오세훈 등은 재원부족, 그리고 재정 집행의 효율성 등의 문제를 제기하는 반면, 전자를 지지하는 진보진영에서는 전면 무상급식만이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을 “제대로” 위하는 길이라고 맞받아치고 있다. 즉 무상급식의 시행의 포커스가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에게 어떻게 하면 밥을 잘 먹일 것인가)”에 맞춰져 있다는 거다. 내가 보기에 이건 코미디다.

적어도 현재 우리사회에서 고민되고 있는 무상급식은, 말하자면 집에 놀러온 우리애 친구에게 밥을 공짜로 퍼주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다. 그리고 앞서 소개한 나와 비슷한 경험을 하고 있는 아이들에게 베푸는 시혜도 아니다. 만약 “형편이 어려운 소수의 아이들”을 위하는 것이 무상급식의 진정한 목적이라면, 그러한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다른 방법도 많다. “낙인”이 문제라면, 그것을 방지하는 길도 많다. 따라서 만약 무상급식이 고작 그런 용도에만 그쳤다면, 오세훈 쪽의 주장에도 일리가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으며, 내가 보기엔 이번 투표에서 오세훈이 저렇게 허망하게 무너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즉 무상급식은 “애들 밥주는 문제”를 넘어서는 그 무엇인데, 냉정하게 말하면 그것은 “애들”의 문제라기보단 “어른”의 문제이며, 특히 “형편이 어려운 어른”보다는 “대충 그럭저럭 살만한 보통 어른”에게 가장 첨예하게 제기되는 문제다. 이런 상황에선 결국,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을 돕는다”라는 대의(cause)란 그런 “보통 어른들”(다른 말로 하면 여론 주도층)이 자신들의 이해관계가 얽힌 또다른 대의를 관철시키는 일종의 구실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그 “보통 어른들”이 무상급식을 옹호하는, 옹호할 수밖에 없는 까닭, 대의란 무엇인가. 간단히 말하면, 무상급식을 통해 애들 도시락 걱정이 사라질 것이라는 점이다. 물론 여기서 “도시락 걱정”이란 단순히 “돈”의 문제는 아니다. 애들 도시락 싸줄 돈이 있다고 해서, 이를테면 반찬거리를 결정하고 조리하는 문제까지 저절로 해결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대개 젊은 부부일 가능성이 높은 이런 “보통 어른들”은, 대체로 저마다 자기들 일(꼭 “직업”과 관련된 것은 아니더라도)로 바쁠 것이며 자기 아이들을 소중히 여기긴 하겠지만 아이들 때문에 자기 삶의 구석구석까지 방해받는 것을—결국 그렇게 되더라도—기꺼워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무상급식을 가장 필요로하는 것은 바로 이런 어른들인 것이다. (덧붙임: 아래 덧글 참조.)

3.

하지만 이렇게 “개인적” 차원에서 사태를 바라보는 것은 기껏해야 “절반”의 진실만을 전달해줄 뿐이다. 마르크스의 말대로, 이와 같은 사회적 이슈들은 다름아닌 사회적 차원에서 바라봐야 하며, 혹시 개인을 고려하더라도 이때의 개인은 일정한 사회적 성격들의 화신으로서만 간주되어야 한다.

이런 식으로 사고를 확장해 나갈 때, “무상급식”이라는 용어가 정확한 게 아니라는 사실이 극적으로 드러난다. 실제로 요새 어떤 이들은 “무상급식”이 아니라 “의무급식”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내가 보기엔 타당한 지적이다(“무상의무급식”이 더 타당한 것도 같은데, 이런 문제는 접어두자). “무상” 대신 “의무”를 선호하는 까닭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겠지만, 내 경우엔 후자가 사태를 훨씬 더 정확하게 묘사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무상급식”이 실질적으로는 “무상”이 아니기도 하지만, “의무”라고 표기했을 때 그것이 갖는 사회경제적 의미가 더 잘 드러난다는 얘기다.

바로 이 대목에서 “급식”을 “의무교육”의 일환으로 봐야하므로 “의무급식”이 정확한 표현이라는 주장을 떠올릴 수 있다. 요새 한창 주가를 높이고 있는 문재인 이사장도 그렇게 말했다고 한다(링크). 멋진 “레토릭”이긴 한데, 이것은 그저 “레토릭”일 뿐 그 이상의 의미를 갖는 것으로 받아들이긴 어렵다. 이를테면, 이런 명제는 “의무교육”을 절대화한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과연 의무교육은 절대선인가?

당연히 아니다. 적어도 현실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사람이라면 현대사회에서 행해지는 의무교육을 무조건, 아무런 유보조항 없이 옹호해서는 안 된다. 오늘날과 같은 보편적인 의무교육의 발달이—그 “실제” 역사적 기원에 대해선 여러 얘기를 할 수 있겠지만—자본주의 발달과 궤를 함께한다는 것은 이미 적지 않은 연구를 통해 밝혀진 바다. 무슨 얘기냐면, 교육이든 급식이든… 그것을 국가, 그것도 “자본주의적 국가”가 나서서 “책임”을 진다는 것은, 예컨대 단순한 “시혜” 이상의 그 무엇이라는 거다. 이 말을 조금 다르게 하면, (무상)(의무)교육이나 (무상)(의무)급식이라는 문제를 (가난한 이들을 위한?) (국가의) 시혜로만 보는 것—현재 무상급식을 둘러싼 논의에서 좌우를 막론하고 이런 시각이 지배적인 것 같다—은 오늘날의 국가를 전근대적 국가(신이나 마찬가지인 왕과 그 신하들이 불쌍한 백성에게 자비를 베푼다는 식)로 바라보는, 커다란 시대착오에 기반을 둔 견해라는 얘기다.

물론 국가, 정확히 말해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무상급식의 실시를 고민하는 국가는 바로 자본주의적 국가다. 이러한 국가가, 의무교육으로 지정되어 있어 국민의 절대다수가 가야만 하는 학교에서 그들이 “먹는 문제”를 완전히 책임진다는 것을, 자본주의 체제의 재생산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며, 따라서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사태의 핵심을 놓칠 수밖에 없다. 사실 이런 얘기는 비단 의무교육이나 무상급식(또는 의무급식)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며, 오늘날 커다란 화두가 되고 있는 “(보편적) 의료”, 나아가 “(보편적) 복지” 일반에도 해당된다. 그러니까 우리는 “복지”라는 것이 자본주의 현실에서 가질 수밖에 없는 두 가지 모순되는 측면들을 두루 봐야한다는 거다.

4.

그렇다면 급식의 전면화, 나아가 의무화 내지는 무상화가 갖는 사회경제적 의미, 즉 단적으로 말해 자본주의 체제의 재생산과 관련된 의미는 무엇인가? 얘기가 이정도 나왔으니, 이 글을 읽는 이라면 누구라도 곧장 두세가지 정도는 열거할 수 있으리라 본다: 아이들의 학교교육을 통한 (자본주의적) 사회화의 범위 확장, 양육부담으로부터 일부 해방시킴으로써 주어진 사회에서 가장 활동적인 계급인 부모들을 자본의 메커니즘에 좀 더 충실하게 함, 일반 국민의 일상생활/복지에서 국가의 담당영역을 넓힘으로써 국가의 계급성 희석, 등등.

사태를 이렇게 보게 되면, 지금까지 많은 논란이 무상(의무)급식의 “비용”을 둘러싸고 벌어지고 있다는 것도 코미디임이 드러난다. 이 문제는, 현재 논의되는 무상급식으로부터 혜택을 가장 크게 입을 주체들이 누구인지, 그리고 그 혜택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보면 저절로 답이 나온다. 내가 보기에 가장 큰 수혜자는 가난한 집 자식들이 아니라 (가난한 + 그만그만한) 어른들과 그들을 고용하고 있는 자본이다. 다시 말해 이번 무상급식은 돈 있는 사람들의 세금으로 가난한 사람들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애들 보는 것이 성가시거나(이는 개인의 무책임의 문제가 아니라 현대자본주의에서 개인의 발달상의 한 단면이다) 어려운 사람들이 이제까지 자신들이 어렵게 감당해야 했던 책임을 국가에 떠넘기고 그 대가로 일정한 금액을 세금의 형태로 지불하는 것이다. 물론 (역시 주요 수혜자인) 자본도 그런 비용의 상당부분을 지불해야 할 것이다(따라서 혹시 자본이 이번 문제를 철저히 개별 경제주체들의 것으로 돌리면서 자신들은 그냥 무임승차 하려고 하지는 않는지 엄중히 감시할 필요도 있다—아니, 이미 자본은 이 비용을 부담하지 않으려고 꼼수를 부리고 있다).

가난한 집 자식들로 말하자면, 무상급식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형편은 그다지 나아지진 않으리라는 게 내 솔직한 예상이다. 오히려 무상급식은 그들을 좀 더 이 사회에 순응적인 인간으로, 안전하게 관리/양육시키는 중요한 기제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이는 물론 복지 일반에 대해서도 대체로 타당한 진술일 것이다(물론 그렇다고 복지를 하면 안 된다는 게 아니다. 슬프지만, 이런 이중성이 있다는 얘기다).

다시 “비용” 얘기로 돌아가자. 무상급식의 수혜자가 바로 위와 같기 때문에, 그들은 결국 무상급식에 따르는 비용을 (일정한 한도 안에서는) 부담하기로 동의할 것이다. 다만 지금 문제는, 이와 같은 사태의 “실질적인 면모”가 언제쯤 제대로 수면 위로 떠오를 것이냐다.

5.

지금까지 쓴 얘기는 상당히 일반적인 수준에서 풀어놓은 것이다. 여기에다가 현재 한국사회의 특수한 사정들을 덧붙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런 일은 지금 나로서는 벅찬 일이다. 어쨌거나, 무상급식 문제를 “(가난한) 애들 밥주는 문제”로만 봐서는 논의를 의미있게 진전시키긴 어려워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