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장관의 재량에 따라 (in the Secretary’s discretion)
2010년 중간선거 이후 하원을 장악한 공화당의 벼랑 끝 협상 전술은 북한을 무색케할 정도다. 균형재정 근본주의자들, 감세 근본주의자들은 자신들의 뜻을 관철시킬 수 있다면 국가 부도도 감수할 태세다. 이들은 이미 핵실험도 여러번 했다. 부시 시절인 2008년 말에는 구제금융법안을 부결시킨 전례가 있고, 지난해 말 재정절벽 협상에서는 초고소득자에 한정된 감세철회조차 수용하지 않아 권력 서열 3위 하원의장이 협상권을 상원 원내대표에게 넘기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티파티 초선의원들 관리 제대로 안되면 2월이나 3월에 미국 정부 부도라는 핵폭발 사태가 벌어질 수 있다.
솔로몬 법정의 진짜 엄마 역할을 벗어날 수 없는 오바마는 아이를 살리기 위해 공화당의 요구사항을 상당 부분 수용할 수밖에 없어 보인다. 유일한 대안은 재무부에 명령하여 고액동전을 주조하는 것이다. 2010년 5월 처음 제시된 (여기) 이 아이디어는 최근 미 언론과 정치권에서 진지하게 논의되면서 관심을 끌고 있다. 관련 법률 조항은 이렇다.
(k) The Secretary may mint and issue platinum bullion coins and proof platinum coins in accordance with such specifications, designs, varieties, quantities, denominations, and inscriptions as the Secretary, in the Secretary’s discretion, may prescribe from time to time. {31 USC § 5112 – Denominations, specifications, and design of coins}
(k) 재무부 장관은 백금 혹은 백금 프루프 주화를 주조, 발행할 수 있다. 재무부 장관은 이 주화의 규격과 디자인, 종류, 양, 표시금액, 글귀를 재량에 따라 정할 수 있다. {주화의 표시금액, 글귀와 디자인에 관한 법률}
우리나라에서는 한국은행이 지폐와 주화 발행을 독점하지만, 미국의 경우 주화는 재무부에서 지폐는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에서 발행한다. 다만 현재 유통 중인 지폐가 1조 달러를 상회함에 반해 유통 중인 주화는 400억 달러 정도 수준임을 감안하면 (자세한 내용은 여기), 재무부의 화폐발행 권한은 거의 완전히 무시할 만하다. 하지만 저 무시무시한 (k)조항은 – 지금까지 거의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지만 – 미국 재무부에 FRB에 버금가는 화폐발행권을 부여하고 있다. 단지 발동된 적이 없을 뿐이다.
같은 법률에는 이런 조항도 있다.
(h) The coins issued under this title shall be legal tender …
(h) 이 법률에 의거하여 발행된 주화는 … 법정 통화다.
재무부가 1조 달러 짜리 백금동전을 주조해서 FRB에 넘기면 (혹은 판매하면) FRB는 재무부 계좌잔고를 1조 달러만큼 늘려야 한다 (법정 통화이므로 FRB는 동전 매수 요청을 거부할 수 없다). 재무부는 이 돈을 채권 이자와 원금의 지불, 그리고 정부지출에 활용할 수 있다. 의회에서 부채한도를 증액하지 않더라도 부도 사태를 피할 수 있는 것이다.
2. 백금동전, 양적완화, 인플레이션
백금동전 아이디어는 처음에는 일종의 농담으로 치부됐지만 갈수록 논쟁이 치열해지는 양상이다. 반대하는 측에서는 백금동전 발행은 화폐가치를 떨어뜨려 물가와 시중금리를 상승시켜 경제에 악영향을 끼치게 된다고 비판한다.
이런 우려는 이미 양적완화와 관련한 논쟁에서 별 근거 없는 것으로 판명이 났다. 백금동전의 발행과정은 양적완화의 메카니즘과 크게 다르지 않다. 양적완화의 경우 FRB가 새로 발행한 화폐로 민간이 보유한 정부채권과 모기지담보부채권을 구매한다면 (실제로는 화폐를 찍지 않고 판매자의 예치금 계좌잔고를 높여준다), 백금동전의 경우에는 새로 발행한 화폐로 재무부가 주조한 백금동전을 구매한다. 양적완화 후 (대부분 대형금융기관인) 채권 판매자들이 판매대금의 재투자 대신 중앙은행 예치를 선택했기 때문에 물가나 시중 금리에는 별다른 변동이 없었다. 경제 내에 유통 중인 화폐의 총량이 안정적으로 유지되었기 때문이다.
좀더 자세히 살펴보자. 경제위기가 시작된 2008년부터 2012년 사이 본원통화(유통 중 화폐 + 중앙은행 예치금)는 8천억 달러에서 2조 8천억 달러로 늘었지만, 유통현금은 8천억 달러에서 1조 2천억 달러로 4천억 달러 상승하는데 그쳤다 (유통 현금은 경제성장에 따라 지속적으로 증가하게 되어 있고, 이 기간 유통화폐량은 이전보다 빠른 속도로 증가하기는 했지만 트렌드를 크게 벗어나지는 않았다). 반면 민간의 중앙은행 예치금(reserve balances with Federal Reserve Banks)은 0에서 1조 6천억 달러로 큰 폭으로 늘어났다.
미국의 연방준비법(Federal Reserve Act)은 FRB가 발행한 화폐가 “미국의 채무 (obligations of the United States)”라고 규정한다. 중앙은행 예치금이 언제나 인출 가능하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 기간 행정부가 아닌 나라로서의 미국의 채무는 거의 2조달러만큼 늘어난 셈이다. 하지만, 2조 달러 중 거의 80%에 해당하는 금액은 마르크스의 표현을 따르면 퇴장되어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물가와 금리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않았고, 일상적인 경제활동에 끼치는 부정적 영향도 미미했다. 마찬가지로 미 재무부가 백금동전 발행을 통해 조달한 1조달러를 적극적으로 유통시키지 않는 이상, 백금동전 발행이 물가와 금리의 상승으로 이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3. 근본적인 문제 – 부채의 화폐화
백금동전 주조와 관련된 좀더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 생각해보자. 대부분의 나라에서 (화폐발행을 포함하는) 통화정책을 수행하는 중앙은행은 재정정책을 수행하는 행정부로부터 독립되어 있고, 행정부가 발행하는 정부채권을 사고 파는 방식으로 통화정책을 수행한다 (FRB는 이 글을 쓰는 현재 무려 1조 6,700억 달러 어치의 미국 정부채권을 보유하고 있다. 그리고 한국의 경우는 국채시장이 발달하지 않아 한국은행에서 발행한 통화안정증권을 이용한다). 이러한 분리 없이는 정부부채라는 개념이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가령 FRB가 재무부와의 협의 하에 민간이 보유한 미국 정부채권을 (새로 발행한 화폐로) 무제한 구매하고, 만기된 채권은 새로 발행한 채권으로 역시 무제한 교환한다면 미국 정부는 부채 문제로 더 이상 고민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FRB가 정부에 화폐를 길어올릴 수 있는 마르지 않는 샘을 제공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정부채권이라는 일종의 매개를 활용하는 것은 짜고 치는 고스톱에 정상거래라는 외관을 씌우기 위한 것일 뿐이다. 물론 부작용은 명백하다. 지금과 같은 경제적 비상상황이 아니라면 채권 판매대금은 곧장 시중에 풀릴 것이고, 물가와 금리가 급등해 경제활동이 대단히 위축될 것이다. 이런 노골적인 부채의 화폐화(monetization of debt)를 방지하기 위해 중앙은행은 보통 행정부로부터 독립된 국가기관으로 운영된다.
다시 말해 백금동전 주조 권한을 이용하면 미국 정부는 정부부채로부터 합법적으로 완전히 해방될 수 있지만, 동시에 중앙은행과 정부 사이의 경계는 실질적으로 허물어지고 만다. 미 정부가 발행하는 채권의 수익률이 급등하거나 아니면 더 이상 채권으로 인식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현대의 (불환)지폐 화폐시스템은 그 뿌리부터 흔들릴 것이다. 다시 금화폐의 시대로 돌아가야 한다는 주장이 득세할 것이다. 1조달러 백금동전 주조가 나쁜 아이디어라는 것은 아니다. 뭐 한번 정도는 사용할 수 있을 것이고, 의회에 대한 압박용도로도 훌륭하다.
[어쨌든 이런 이유 때문인지 아닌지는 몰라도 미국 재무부는 백금 동전 주조 권한을 활용하지 않겠다고 1월 13일 발표했다]
소위 양적완화의 경우는 사정이 다르다. 양적완화는 장기금리를 안정화시켜 경기를 부양시키는 것을 목적으로하는 통화정책인데, 양적완화를 통해서 실질적으로 탕감되는 채무는 전혀 없고 민간 부문으로부터 FRB로 정부채권이 대량으로 이동할 뿐이다. 따라서 미국의 한 국가기관이 또다른 국가기관에 대한 주채권자로 되는데, 이것은 그냥 그렇다고 하고 넘어갈 수도 있지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신비로운 사태다 (참고로 FRB는 2012년 770억 달러, 우리돈으로 77조원의 이익을 냈는데, 대부분 채권에 대한 이자 소득이다. 애플 이익의 두 배라고 한다. 자세한 내용은 여기).
정리하는 차원에서 지금까지의 논의를 FRB 대차대조표에 미치는 영향을 중심으로 간단히 요약해보자 (FRB의 최신 대차대조표는 여기 참조).
- 현재 유통 중인 화폐의 총액이 1조달러, 재무부의 FRB 계좌 잔액이 3천억달러 (합계 1조 3천억달러는 FRB의 부채), FRB의 자산은 전액 금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가정하자.
- 경기부양을 위해 FRB는 새로 발행한 화폐로 1조달러 어치의 미국 정부채권을 민간부문으로부터 구입한다. 정부채권 1조달러 어치는 FRB의 대변에, 민간부문의 FRB 예치금 1조 달러는 차변에 더해지며, 총자산은 2조 3천억달러로 늘어난다.
- 예치금을 인출할 때 FRB는 실물 화폐를 제공해야 한다. 민간부문에서 예치금 천억 달러를 인출하면, 유통화폐가 그만큼 증가한다. 경제에 인플레이션 압력이 늘어날 수 있다.
- 재무부가 만기 도래한 2천억달러 어치의 정부채권의 원금을 상환한다. 차변의 재무부 계좌 항목, 대변의 정부채권 항목이 각각 2천억달러씩 줄어들고, FRB의 자산 총액도 그만큼 감소한다.
- 부채한도 증액이 어려워지자 재무부는 1조달러 백금 동전을 주조해서 FRB에 예치한다. 동전은 FRB의 자산항목으로 기입되며, 재무부 계좌 잔액이 1조달러 만큼 증가한다.
- 재무부는 부채 규모와 채권 이자 부담을 줄이기 위해 FRB가 보유한 정부채권 전액을 되사들여 소각한다.
4. 화폐는 부채가 아니다
이 정도로 백금동전 주조와 관련된 논의를 정리할 수 있겠지만, (불환)지폐의 신비로운 정체(?)에 대한 의문은 좀처럼 풀리지 않는다. 양적완화를 통해 창출된 (그리고 백금동전 주조를 통해 새롭게 창출될) 저 엄청난 금액의 화폐 혹은 부채의 정체는 대체 무엇인가? 양적완화를 통해 무려 2조 달러의 부채가 새롭게 발생했지만 사람들은 기껏해야 물가와 금리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만 걱정할 뿐이다. 물론 담보가 있는 부채이고, 이 담보는 대부분 미국 정부채권이다. 하지만, 금리상승으로 정부채권 가격이 떨어지면 FRB는 막대한 손실을 감수해야 한다. 새롭게 창출된 화폐가 대차대조표에 부채로 기입된다면 그것을 부채로 취급해야 하는 것이 온당하다. 그런데 명시적인 부채를 실질적으로 부채로 취급하는 것 같지는 않다.
재무부의 부채와 FRB의 부채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 재무부의 부채는 정부지출을 위한 부채다. 그래서 재무부가 1조달러 동전을 주조한다면 그 이유는 이 돈을 사용하기 위해서다 (100% 확신할 수는 없지만 재무부가 발행한 동전은 회계 상으로도 미국 정부의 부채로 간주되지 않는 것 같다. 미 정부 대차대조표에서 동전 관련 부채 항목을 찾아볼 수 없었다). 반대로 금욕주의자 FRB는 자신이 생산한 지폐를 완전히 무가치한 것으로 대한다 (그래서 한국은행법은 “한국은행이 보유하는 한국은행권은 한국은행의 자산 또는 부채가 되지 아니한다”고 명시한다). FRB는 윤전기를 돌려 돈을 찍어낼 수 있는 엄청난 초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그 돈으로 구매할 수 있는 대상은 법으로 엄격히 제한되어 있기도 하다 (주로 정부채권, 금, 모기지담보부증권 등). FRB는 화폐를 탄생시킨 “사회의 행동”(자본론 1권 2장, 111)의 일종의 대리자로 기능할 뿐, 자기 이익을 구하지 않고 진실로 지폐 보기를 돌같이 한다. (‘(33) 태초에 행함이 있었다’ 참조). 마치 예수의 대리자인 교황의 권한이 교황 그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예수의 지상의 몸인 가톨릭 교회를 위해서 행사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FRB가 발행한 지폐가 FRB의 부채라는 규정은 얼마나 황당한가? 1달러 짜리 지폐를 들고 FRB 사무실에 가서 ‘내가 당신들이 발행한 1달러 짜리 지폐를 가지고 왔으니 당신들 대차대조표의 자산항목에서 1달러에 해당하는 실물자산으로 부채를 갚으시오’라고 요구하면 아마도 미친놈 취급을 당할거다. 혹시 당혹스러워 할지도 모를 일이다. 화폐는 분명히 국가의 부채라고 법에 규정되어 있는 반면, 실질적으로는 부채라고 볼 구석이 전혀 없으니까 말이다. 우선 부채에는 상환조건이 명시되어 있어야 하는데, 지폐에 그런 조건이 부가되어 있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또한 부채는 법정화폐로 상환해야 한다고 규정되어 있으니 1달러 짜리 지폐라는 빚은 1달러 짜리 지폐로 갚을 수밖에 없다. 이것은 피로 피를 씻는 것보다 더 부질 없는 일이다. 게다가 부채가 부채일 수 있기 위해서는 채무자가 상환불능상태에 빠졌을 때 그 자산을 정리해주는 파산절차와 제도가 구비되어 있어야 한다. 하지만, 화폐가 더이상 통용될 수 없는 비상 상황이라면 정부와 사회제도가 거의 붕괴 상태에 놓여 있을텐데 그때 누가 FRB의 파산과 자산정리 절차를 책임지고 진행할 것인가.
나는 오늘날 화폐로 통용되는 (불환)지폐는 절대 부채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중앙은행은 어떤 경우에도 중앙은행권 보유자에게 어떤 지급 의무도 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불환지폐는 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상품이다!
마찬가지 이유로 FRB와 같은 중앙은행이 보유한 막대한 자산은 화폐라는 부채에 대한 담보가 아니다. 그것은 그냥 중앙은행의 자산일 뿐이다. 중앙은행은 그 나라 최고의 부자다. 그렇다면 중앙은행은 어떻게 그렇게 막대한 재산을 축적할 수 있었는가? 그것은 상품사회의 구성원들이 사회적 부의 일반적 형태인 (상품으로서의) 화폐의 독점적 생산권한을 중앙은행에 사회적 행동을 통해 부여했기 때문이다.
5. 지폐와 마르크스 정치경제학계의 화폐론
자. 이제 마르크스로.
주지하다시피 마르크스의 화폐론은 상품화폐론이다. 많고 많은 상품들 중 하나인 금이 화폐가 된다는 것이다 (물론 마르크스가 (불환)지폐를 다루기는 하지만 그것은 지폐가 진정한 화폐인 금을 대신하여 유통수단으로 기능함에 한해서이다).
그런데 적어도 1971년의 금태환 정지 이후에는 (불환)지폐가 명백히 유일무이한 화폐로 기능하고 있다. 문제는 (액면가에 비해 생산에 필요한 노동시간이 현저히 낮은 지폐가) 마르크스 정치경제학에서 일반적으로 무가치물로 받아들여진다는 점에 있다. 액면가에 비해 현저히 낮은 가치를 갖는 지폐가 통용될 수 있는 까닭에 대해서는, 국가가 지폐를 법정 화폐로 지정해 통용을 강제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이런 관점에 따르면 무가치물인 지폐는 화폐가 될 수 없다. 화폐는 가치척도로서 기능해야 하는데 무가치물로 다른 상품의 가치를 표현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현대의 불환지폐가 상품화폐가 아니라는 전제 하에 마르크스 정치경제학자들은 지폐를 1) 신용화폐(부채)로, 2) 상징화폐로, 3) 혹은 (여전히 화폐인) 금의 대리물로 이론화해왔다. 내가 보기에는 셋 모두 만족스럽지 않다.
먼저 신용화폐론의 문제점은 이미 살펴본 바 있다. 부채가 아닌 것을 부채로 이론화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비슷한 시각의 글로는 김수행의 “자본론의 금화와 현재의 중앙은행권“을 참조).
금이 여전히 화폐이며 지폐는 금의 대리물에 불과하다는 주장은 현실성이 없다 (이러한 시각에 대해서는 채만수의 “금폐화론의 비과학성에 대하여” 참조). 불환지폐, 특히 미국의 달러화는 가치척도로, 유통수단으로, 지불수단으로, 세계화폐로, 퇴장화폐로, 전면적으로 활용되고 있다. 이런 달러화가 화폐가 아니라면 화폐의 정의 자체를 바꿔야 한다.
마지막으로 지폐가 상징화폐라는 주장은 상품화폐론이 아닌 새로운 화폐론을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마르크스의 상품화폐론에서 화폐는 그 자체로 사회적 부이지 화폐와 별도로 존재하는 사회적 부의 상징이 아니다. 가치척도의 기능은 화폐의 상상적 존재에 의해, 유통수단으로서의 기능은 대리물을 통해 수행될 수 있다. 하지만, 화폐가 그 몸체 그대로 나타나야 하는 경우가 있다. 특히 부의 축적을 위한 화폐 퇴장, 부채의 상환을 위한 ‘지불’의 경우에 그렇다. 그 자체로서 가치를 갖지 않는 상징물은 결코 이런 기능을 수행할 수 없다 (여기에 대해서는 “(57) 금이 화폐로 기능한다는 것의 의미” 참조). 따라서 지폐가 상품화폐가 아니라 상징화폐라면, 마르크스의 상품화폐론을 폐기하고 마르크스의 이론에 입각해서 상징화폐론을 새로 만들어내는 수밖에 없다. 그런 시도 없이 지폐가 상징화폐라고 주장하는 것에는 별 의미가 없다.
6. 지폐와 마르크스 상품화폐론
나는 심플하게 (불환)지폐가 떳떳한(?) 상품이고 따라서 마르크스 상품화폐론은 불환지폐에도 적용된다고 생각한다. 일단 예전에 살펴본 것처럼 노동은 특수한 조건 하에서는 고능력 노동(potenzierte Arbeit)으로 작용할 수 있다 (여기에 대해서는 “(109) 강화된 노동, 아니 고도화된 노동” 참조). 따라서 지폐의 생산에 매우 적은 노동시간이 소요되기 때문에 지폐는 무가치물에 해당하고, 상품화폐가 될 수 없다는 주장에는 별다른 근거가 없다. 다시 말해 사회가 중앙은행에 지폐의 독점적 생산권한이라는 고도의 초능력을 부과했기 때문에 조폐노동자의 노동은 엄청난 고능력노동으로 작용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이 노동이 얼마만큼의 고능력노동으로 작용하는가라는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구체적으로 깊이 생각해 보지는 않았지만 아래와 같이 대답할 수 있을 것 같다.
첫째, 1달러 짜리 지폐의 가치는 가격으로 표현되는 경우 언제나 1달러다. 1달러 지폐로 콜라 한 캔을 사먹을 수 있다면 (생산가격으로 전형을 배제할 때) 1달러 지폐의 가치와 콜라 한 캔의 가치는 동일하다. 물론 콜라 한 캔의 가치는 여러가지 이유로 (예: 콜라 생산 노동자의 노동생산성의 변화) 변동하고 있을 것이고, 마찬가지로 콜라 한 캔과 교환되는 1달러 지폐의 가치도 변동하고 있을 것이다.
둘째, 노동의 복잡한 노동(혹은 고능력노동)으로의 환원은 현실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지, 이러한 환원의 어떤 구체적인 사례를 이론적으로 분해해서 해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가령 단순노동에 비해 두배로 복잡한 노동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이 노동이 왜 복잡한 노동으로 작용하는지에 대해서는 이론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 (예: 노동력의 양성비 등). 하지만, 그것이 왜 꼭 두 배인지를 완전히 해명하는 것은 엄청난 노력을 필요로 할뿐더러 별다른 이론적 가치를 갖지도 않는다.
셋째, 유통화폐량은 불환지폐상품의 가치 결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모든 상품이 가치를 갖는 것은 아니다. 상품은 사회적 필요를 충족시킬 때에만 가치며, 사회적 필요는 양적으로 질적으로 제한되어 있다. 아무도 안 사는 쓸모 없는 상품은 가치를 갖지 않고, 사회적 필요를 초과하여 생산된 상품 역시 가치를 갖지 않는다 (혹은 모든 개별 상품의 가치가 하락한다). 화폐도 상품이기 때문에 동일한 원리를 따른다. 유통에 필요한 화폐가치의 총량은 특정 시점에는 정해져 있기 때문에, 이것보다 많은 화폐가 유통되는 경우 화폐가치가 하락하고 반대의 경우 화폐가치는 상승한다. FRB에서 양적완화가 화폐가치에 미치는 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해 유통화폐량을 신중히 관리하는 이유다. 중앙은행 예치금은 화폐가치에 영향을 끼치지 않으며, 유통화폐량에 의해 결정되는 화폐가치에 의해 평가될 뿐이다.
이렇게 중앙은행이 발행하는 화폐를 상품으로 간주하는 경우 중앙은행은 오직 자산만을 갖는다. 무려 2조 8천억달러의 자산을 보유한 FRB는 세계최고의 부자이고, 원하는 만큼 이 부의 크기를 늘릴 수 있다. 이것은 물론 마르크스가 말한 “허위의 [하지만 실재하는] 사회적 가치”를 토대로 한 것이다 (이른바 시뇨리지 – [지폐의 액면가 빼기 지폐의 생산비용] – 가 허위의 사회적 가치에 해당한다). 달리 표현하면 FRB가 보유한 엄청난 부는 사회 구성원의 사회적 행동이 만들어낸 불환지폐 화폐시스템의 부산물이다.
상품의 생산자로서 중앙은행은 자본주의 상품경제의 내부에 있다. 그는 화폐라는 상품을 생산하고, 이 상품을 가치대로 판매한다 (화폐로 정부채권이나 금을 구매). 이렇게 축적된 엄청난 부는 중앙은행 자신의 것이다. 동시에 중앙은행은 이윤을 목적으로 화폐를 생산하지 않으며 따라서 자본주의 상품경제의 외부에 있다. 중앙은행이 보유한 엄청난 초능력인 화폐발행권은 이 화폐가 통용되는 상품경제권 전체를 위한 것이다.
등가교환의 논리에 종속되어 있는 중앙은행의 자산은 사회 공동의 자산이 아니다. 등가교환은 여타의 경제주체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경제주체의 존재, 그리고 이 경제주체의 배타적 재산처분권을 토대로 하기 때문이다. 정부기관의 자산이니 결국 모두의 자산이 아니냐고? 그렇지 않다. 오늘날의 불환지폐 화폐시스템은 중앙은행의 자산을 여타의 사회구성원의 자산으로부터 완전히 분리하는 방식으로만 존립가능하다. 이 경계를 허물면 불환지폐 화폐시스템 역시 허물어질 것이다. 중앙은행의 자산을 사회 전체의 자산으로 되돌리기 위해서는 불환지폐 화폐시스템을 그리고 이 화폐시스템이 그 일부인 자본주의 상품경제를 철폐해야 한다. 그 전에는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의 것으로 남는다.
일단은 이 정도. 더 깊이 있는 얘기를 하고 싶었지만 아직 연구와 지식이 부족하다.
마르크스주의적 불환지폐론, 마르크스주의적 중앙은행론은 아직 멀리 나아가지 못했다. 중요한 것은 올바른 출발점을 택하는 것이다. 그것은 마르크스의 상품화폐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