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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제개편안 논란에 대하여 (3/끝) 무엇을 할 것인가

4. 세금과 임금: 현실에서는 모든 세금을 자본이 부담하진 않는다

앞에서 모든 세금은 원칙상, 그리고 이론적으로 자본으로부터 나온다고 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다.

모든 세금이 자본으로부터 나온다는 명제의 근저엔 임금에 대한 더욱 근본적인 논의가 전제되어 있다. 바로, ‘임금=노동력의 재생산비용=노동자의 생존비용’ 등식이 그것이다.

일단, 자본으로부터 직접 징수되는 법인세가 자본에서 나온다는 것은 쉽다. 문제는 노동자 각자의 임금으로부터 공제되는 소득세인데, 정의상 임금은 노동자의 사회적 생존비용이므로, 여기에서 한푼이라도 세금으로 나간다면 노동자의 재생산에 차질이 생길 것이고, 이는 결국 자본이 (임금인상이라는 형태로) 보충해줄 수밖에 없다.

그러나 바로 그 노동자의 재생산비용, 또는 ‘사회적 생존비용’이라는 것이 가변적이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일정한 사회적 평균값일 수밖에 없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그러한 평균은 변화하지 않을 수 없고, 나라마다, 그리고 한 나라 안에서도 지역이나 계층마다 다를 수 있다. 결국 ‘임금=재생산비용’이라는 명제는, 이런 모든 차이들을 사상한 매우 추상적인 규정인 셈이다. 마르크스는 임금을 결정하는 이런 모든 요소들을 ‘임금의 역사적, 도덕적 요소’라고 불렀다.

뿐만 아니라, 임금은 적어도 일시적으로 그러한 평균값을 상회하거나 하회할 수도 있다. 갑작스럽게 물가가 올랐을 때, 임금은 명목크기가 유지된다 해도 실질적으로는 하락한 것이며, 이는 곧 노동자들의 생활수준 저하로 나타난다. 즉 정상적인 재생산이 안 되는 것이다. 가장 추상적인 이론의 차원에서 봤을 때, 이러한 상황은 곧 임금인상을 통한 노동자의 투쟁을 통해 해소될 것이기에 그저 일시적인 교란상황에 그친다. 그러나 문제는, 실제 현실에선 노동-자본 간의 계급관계에 따라 그러한 임금인상이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 그리하여 만약 저하된 실질임금 수준이 장기화되면, 그것이 새로운 사회적 평균으로 자리잡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세금의 경우도 다르지 않다. 원칙상으로는, 노동자로부터 걷어가는 소득세가 많아지면, 그 차액만큼을 노동자가 자본가로부터 임금인상을 통해 받아낼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못할 경우엔 정상적인 노동력 재생산에 차질이 생기며, 나아가 그러한 비정상적인 상황이 새로운 ‘정상’으로 자리잡을 수도 있다. 이럴 경우, 세금은 자본가가 낸 것이 아니고, 노동자의 생활수준 저하를 통해 지불된 게 된다. 바로 이러한 까닭에 나는 앞서 소개한 ‘경제위기와 복지국가’라는 글에서 현대적 조세제도“치열한 계급투쟁의 결과 얻어낸 임금인상이라는 ‘전리품’을 자본가계급이 은밀하게 회수해가는 교묘한 방식”이라고 부른 것이다.

5. 세금, 복지, 임금: 증세의 조건?

간단히 정리해보자. 한편으로 세금은 (자본이 직접 지불하지 않더라도) 궁극적으로는 자본으로부터 나온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세금은 (특히 자본이 직접 지불하지 않는 경우에) 노동자 서민대중의 삶의 질 저하를 대가로 하기도 한다.

이것은 하나의 모순인데, 이러한 모순이 집약되어 나타나는 것이 바로 ‘임금’이라는 범주다. 증세 자체는 중요한 게 아니고, 증세의 결과 줄어든 소득을 노동자들이 임금인상을 통해 보상받아낼 수 있는지 여부가 핵심이란 얘기다. 그리하여 현재의 논쟁이나 투쟁도 바로 여기로 집중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 현재 정부의 세제개편안이 포함하고 있는 ‘보편증세’의 문제는, 현재 논쟁의 양 당사자들이 주장하는 대로 저소득 노동자를 털 것이냐 고소득 노동자를 털 것이냐의 문제가 아니라, 증세를 임금인상으로 성공적으로 연결시켜 내느냐 여부의 문제다. 좀 더 평이하게 말하면, 증세의 결과 노동자 서민대중의 삶의 질이 저하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어쩌면 누군가는 이렇게 물을지도 모른다. 지금은 세금을 걷어서 전투기 사자는 것도 아니고 복지를 하자는 것이니, 어차피 노동자가 세금을 내더라도 더욱 큰 복지로 돌려받을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러니 여기에서 임금인상은 별개의 문제 아닌가? 한편으론 맞는 말이다. 이를테면, 정부가 노동자/대중으로부터 세금으로 거둬들인 재원으로 복지정책을 시행하고, 그러한 복지정책이 노동자의 재생산비용을 낮춰 세금인상분을 정확히 상쇄하고도 남는다면, 이러한 증세를 통해 노동자들의 삶이 더 나아질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은 바로 이것이 ‘내가 만드는 복지국가’류의 프로젝트들의 근간을 (명시적으로든 암묵적으로든) 이루는 아이디어가 아닌가 한다.

하지만 이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소리다. 첫째, 현재로서는 노동자와 서민대중으로부터 거둬들인 추가세수가 그들을 위한 복지에 쓰일지, 아니면 자본이 내지 않은 세금을 보충하고 나아가 자본을 위해 쓰일지, 심지어 전투기 구입하는 데 쓰일지조차 확실치 않다. 올초부터 정부에서는 ‘세수부족’을 입버릇처럼 말하곤 하는데, 지금 논의되는 증세규모는 적극적인 복지는커녕 세수부족을 메우는 데도 모자란 수준이다.

둘째, 추가세수가 복지에 쓰이더라도 문제다. 왜냐하면 현재 우리나라의 노동자와 서민대중에게 필요한 것은 현재 삶의 수준의 유지가 아니라 그 대폭적인 상승이기 때문이다. 사실 이것은 자본주의 하에서 모든 계급투쟁이 지향해야 할 바다. 왜냐하면 여기에서 모든 경제적 가치는 노동자와 서민대중이 만들어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많은 세금을 내고, 아무리 많은 복지를 해도, 일하지 않는 자본가가 단 한푼이라도 챙겨간다면 착취는 철폐된 것이 아니고, 따라서 노동자계급은 승리한 것이 아니다.

6. 다시 복지로: ‘어떤’ 복지냐의 문제

여기서 잠시 현재 한국사회에서 복지가 이슈로 떠오르는 배경이 무엇인지를 떠올려보자. 왜 보수정권조차도 복지를 하려고 하는가? 바로 대중의 활력이 극도로 저하돼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신자유주의 때문인지, 경제위기 때문인지는 여기서 따지지 말자. 여하튼 그러한 대중의 활력 저하가 단순히 (일부) 노동자들의 삶을 피폐하게 만드는 것을 넘어 경제의, 그리하여 자본의 원활한 재생산을 방해하고 있고, 이를 보기좋게(?) 해소할 수 있는 가장 유력한 대안이 바로 현재 한국에서 제기되고 있는 복지인 것이다.

현재 우리 사회에서 복지란 자본(주의) 재생산의 위기를 타개해주는 수단으로 제시되는 것이다. 이를테면 비정규직 문제를 보라. 너무 심각하다. 사회의 응집력과 재생산을 크게 방해할 정도다. 어떻게 해결할까? 정규직화? 임금인상? 그렇게 되면 얼마나 좋겠나. 이러한 명확한 해결책을 취하지 않고도 비정규직 문제의 폐해를 피하기 위해 그들은 ‘복지’를 선택한 것이라고 보면 된다. 즉 그들은 비정규직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관리를 위해 복지확대를 추구한다.

이 대목에서 ‘어떤 복지냐’가 중요한 질문으로 떠오른다. ‘체제의 유지와 관리’ 차원에서, 즉 대중의 삶의 수준을 현재의 상태에서 안정적으로 관리하고자 복지를 추구하는 저들과 달리, 노동자계급과 서민대중의 이익을 옹호하는 우리는 어떤 복지를 원하는가? 적어도 현재의 한국사회에서 진보진영의 복지에 대한 태도는, 그것을 바닥에 처박힌 대중의 삶의 질을 높이고 극단으로 치달은 경제적/사회적 불평등을 축소하는 계기로 만드는 것이어야 한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이러한 복지에 대한 인식, 그리고 그를 향한 투쟁은 복지(국가)와 세금이란 것이 그 자체로 계급투쟁의 표현임을 명확히 하는 데서 출발한다. 자본가에 대한 투쟁은 임금을 가지고 하는 것이 보통이다. 어쩌면 그러한 투쟁을 통해 충분한 임금을 확보해낸다면 복지도 필요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오늘 한국의 현실에서 이는 불가능에 가깝다. 최근 최저임금 결정에서 극명히 드러났듯이, 현재 한국사회에서 자본과 노동 간의 힘관계는 현저한 임금인상을 낳을 수 있을 정도가 아니다. 노동은 더없이 취약할 뿐만 아니라 사회의 다양한 주체들로부터 점점 더 고립되고 있다.

바로 이런 현실에서 복지의 확대는 자본가에 대항한 노동자계급의 주요한 투쟁을 되살릴 수 있는 좋은 계기다. 임금 올려달라고 회사를 상대로 투쟁하는 것보다 더 많은 복지를 달라고 국가를 상대로 요구하는 것이 훨씬 더 많은 정당성을 갖는 게 요즘 한국의 현실이다. 이것이 바람직한 현상은 아닐지라도, 노동자와 서민대중의 이익을 옹호하는 좌파는 그러한 복지에의 열망을 대중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한 계기로, 나아가 계급투쟁의 정당성을 새롭게 정의하는 적극적인 계기로 끌어올릴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어떠한 일이 있어도 이제껏 논의되고 있던 복지가 후퇴되는 일은 막아야 하며, 나아가 더 많은 복지를 요구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만약 증세가 필요하다면, 이에 대해서도 적극적인 태도가 필요하다. 중요한 것은 노동자와 서민대중이 제 살을 깎아 복지비용을 대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것이 종국에 그들의 삶을 ‘조금’ 낫게 해준다 해도 말이다. 따라서 증세의 최우선순위에는 자본가, 그리고 그간 제대로 세금을 내지도 않았던 대자산가에 대한 법인세나 재산세, 자본이득세가 올라야 할 것이다.

또한 전술적인 이유에서든, 아니면 위와 같은 증세로는 충분한 복지재원이 마련되지 않아서든, 만약 노동자와 서민대중에 대한 보편증세(소득세/소비세 인상, 그리고 사실상의 보편증세인 사회보험료 인상 등)가 필요하다면, 이것을 받아들일 수도 있어야 한다. 단, 이럴 경우, 엄청난 대중의 저항이 있을 것인데, 좌파들은 그러한 저항이 복지에 대한 저항이 되지 않으면서 자본가와 대자산가 집단을 향하도록, 그리하여 궁극적으로 임금인상에의 대중적 요구로 전환될 수 있도록 유도할 수 있어야 한다. 요컨대, 좌파들은 현재 일어나고 있는 ‘복지’ 국면, ‘증세’ 국면을, 현재의 미약한 계급역관계를 뒤집는 기회로 사용해야 한다.

(※ 사족: 복지비용을 실질적으로 자본가가 부담케 하는 데 있어 핵심이 보편증세와 더불어 임금인상을 관철시키는 것이다. 많은 부동산을 소유한 대자산가들과 관련해서도 마찬가지다. 단순히 그들에게 엄격하게 과세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러한 과세의 결과가 이를테면 세입자에게 전가되지 않도록 전월세상한제 등이 보조적으로 필요하다.)

(끝)

세제개편안 논란에 대하여 (2) 세금의 본질과 계급투쟁

2. 복지재원? 모름지기 모든 세금은 자본으로부터 나온다

어쨌든 복지를 위한 재원이 쟁점으로 되고 있으니, 그에 대해 한번 생각해보자. 결론부터 말하면, 모든 복지재원은, 나아가 모든 세금은 자본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이다. 이것을 깨닫는 것이 가장 중요한 포인트다.

당연히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게 뭔 소리냐, 하실 것. 아니, 내가 열심히 일해서 받은 피같은 임금에서 세금이 나가는데 그게 무슨 개소리냐고! (-_-) 근데 그렇지가 않다.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정치경제학의 대답}이라는 책에 실린 나의 글 ‘경제위기와 복지국가’를 보시면 된다(링크). 책을 구하기가 번거로우신 분은, 이 블로그에 있는 ‘공공요금의 정치경제학’ 씨리즈를 보셔도 되겠고(링크1, 2, 3), 원하시면 앞의 글을 파일로 보내드릴 수도 있다(저 EM의 이메일주소는 우측상단에 있슴다). 핵심을 요약하면 이렇다. ▲자본주의 경제에서 임금이란 본질적으로 노동력의 재생산비용이다(물론 이것은, ‘이론적으로’, ‘평균적으로’ 그렇다는 얘기. 현실에선 당연히 개인적인 차이와 다양한 교란요인이 있다). ▲임금이 그러한 재생산비용에 못 미치면 노동자의 정상적인 재생산은 위협받기 때문에, 원리상 노동자의 임금에서는 세금이든 뭐든 자신의 (사회적) 생존과 관계없는 비용이 지출될 수는 없다. ▲그런데도 현실에서 노동자들은 세금을 내는데, 이는 곧 자신의 생존비용 이상으로 사전적으로 임금상승이 있었음을 의미할 따름이다. ▲따라서 모든 세금은 궁극적으로는 자본에서 나올 수밖에 없다. (다시 말씀이지만, 이러한 사항을 지금 이 글에서 상술할 수는 없다. 더 자세한 논의가 궁금하신 분은 위에서 언급된 글들을 보세요^^)

모든 세금은, 따라서 현재 논란이 되고 있는 추가적인 복지재원도 결국은 자본으로부터 나올 수밖에 없다는 것. 바로 그것이 핵심이다. 이를테면 이번 세제개편안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소득세의 (사실상의) 증세도, 겉보기엔 노동자의 주머니를 터는 것이지만 본질적으로 그러한 재원은 자본가의 금고에서 나오는 것이란 얘기.

말할 것도 없이, 이 경우 증세가 궁극적으로 임금상승으로 이어진다는 가정이 있어야만 한다. 이론적으로는 당연히 그래야 한다. 왜냐하면 기존에 노동자의 세후 임금이 그의 재생산비용(즉 생존비용)이라면, 소득세 증세 이후의 임금은 그러한 재생산비용에 못미칠 것이므로 원활한 재생산을 위해서는 임금인상이 필수적인 것이다. (하지만 이 경우 임금인상분과 소득세 인상분이 일치할 필요는 없다. 소득세 증세의 일부는 노동자에게 혜택으로 돌아올 것이므로, 임금인상은 소득세 인상분보다 작을 것이다.) 이 얘긴 잠시 뒤에 더 하자.

3. 자본으로부터 어떻게 재원을 빼낼 것인가?

이렇게 보면, (‘어떤 복지인가’의 문제는 차치하고) 복지를 위한 재원마련의 방법론은 결국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자본으로부터 복지재원을 빼낼 것인가’의 문제로 귀결된다.

이를테면 법인세를 더 걷는 것은 자본으로부터 직접 수금을 하는 것이겠고, 소득세를 올리는 것은 간접적인 방식이다. 부가세도 마찬가지. 흔히 사람들은 자본이 법인세 인상에는 반대하지만 소득세 인상에는 찬성할 것이라고 짐작할텐데, 전혀 그렇지 않다. 정도야 덜하겠지만 자본은 소득세나 부가세 인상에도 반대한다. 그것은 곧 임금인상으로 자신에게 돌아올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일반적으로 복지나 사회기반시설이 잘 갖춰지면 자본에도 이롭다. 먼저 자본 자신이 여러모로 이득을 보고, 노동력 재생산을 위한 직접적 비용도 줄어들 것. 따라서 자본은 국가지출의 증가에 대해, 이 모든 사항들을 고려해 입장결정을 할 것이다.)

대체로 자본으로부터의 직접적 세금징수인 법인세 인상은 자본이 가진 현실적인 힘을 고려하면 매우 어렵고, 소득세 인상은 자본의 저항은 상대적으로 덜 받지만 정치적 부담이 상당하다. 등등.

그렇다면 이번 세제개편안에 대해 자본이 격렬히 반응하지 않는 까닭은? 정답은,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대중이 알아서 반대하고 있으니 말이다. 사실 이것이, 모든 세금을 자본이 직접 내지 않고 노동자/대중을 통해 간접적으로도 냈을 때 거둘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정치적 효과다. 어떤 의미에서 국가의 지출을 늘리고 복지를 늘리는 것은 계급투쟁의 성과이고, 따라서 노동-자본 간의 투쟁의 표현인데, 노동자 대중을 통해 간접적으로 조세를 납부함으로써 자본은 그러한 계급투쟁을 노동자들 내부의 갈등, 또는 실체도 모호한 ‘국민적 갈등’으로 치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늘날 세금의 문제를 둘러싼 논란에서 노동자 계급을 옹호하는 이들은 기본적으로 거기에 깃든 계급투쟁적인 측면을 복원하는 데서 출발해야 할 것이다. 부연하자면, 바로 이 지점에, 일종의 사회변혁론으로서의 ‘시민증세론’의 가장 핵심적인 허점이 있다. 본질에 있는 계급투쟁을 보지 못하고, 지극히 피상적으로, 즉 복지를 ‘시민적 합의’의 문제로 제시한다는 것이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한가.

(계속)

세제개편안 논란에 대하여 (1) 문제는 복지다

이제는 지겨울 만도 한 세제개편안. 꽤 뜨거운 논쟁이 진행됐는데, 모름지기 이런 데는 뒷북을 쳐야 제맛. 모른척 지나가기 아쉬우니 몇 마디 거들자.

1. 문제는 복지다

이번 논란에서 재밌는 것은, 박근혜나 새누리당은 쏙 빠져있고 민주당과 기타 시민사회진영이 서로 싸운다는 점. 한쪽에선 중간소득계층의 세부담을 높이는 이번 세제개편안을 ‘세금폭탄’이라고 규정하고, 다른 한쪽에선 그 정도의 세부담은 복지국가를 위해 필수적이라면서 ‘시민증세’를 옹호한다. 특히 후자를 주장하는 이른바 ‘진보진영’의 꽤많은 인사들은 이번 세법개정안의 ‘방향’은 옳다면서 그에 대한 지지를 밝히는 ‘신앙고백’을 마다하지 않고 있다. 참으로 기가막힐 노릇.

사실 위와 같은 논쟁은 매우 저열한 것이다. 어차피 복지를 위해 증세가 필요하다는 데는, 그러한 복지체제를 바라건 바라지 않건 누구나 동의할 것. 그래서 보수층에서는 증세에 대한 혐오를 조장해 복지국가 실현을 방해하는 것이고, 진보진영에서는 증세란 복지를 위해 필요한 것이라고 설득한다. 그래서 핵심적인 문제는 ‘복지국가를 만들 것이냐, 말 것이냐’, 그리고 만든다면 ‘어떤 복지를 만들 것이냐’인 것이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나는, 이번 세제개편으로 이뤄질 증세는 매우 미미한데, 사실은 그런 점을 들어서 박근혜 정부의 복지에 대한 비전의 부재를 공략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본다. 스스로 지갑을 열어 ‘옛다, 돈!’ 이러지 말고, 복지 요구나 제대로 하란 말이다…)

그런데 현재 논쟁을 벌이는 양측 사이에서 위와 같은 측면은 전혀 부각되지 않고 있다. 그것은 그저 복지를 위한 재원마련을 ‘선 부자증세, 후 시민증세’로 할 것이냐, 아니면 ‘선 시민증세, 후 부자증세’로 할 것이냐의 문제로 귀결될 뿐인데, 솔직히 그것이 그렇게 중요한가? 복지에 대한 구체적인 비전 없이, 또는 자신이 가진 그러한 비전의 차별점을 부각시키지 않은 채로 증세의 방법론만 물고 늘어지는 것은, 오히려 증세에 대한 일반적인 거부감만 키워 우리를 복지(국가)로부터 더욱 멀리 떨어지게 할 뿐이다. 어쩌면 그것이 청와대와 새누리당이 (처음부터 의도한 것은 아닐지라도) 바라는 것일지 모른다.

(계속)

지하경제양성화, 재벌이 선택한(!) 증세 방식

◯ 주지하다시피 박근혜와 그 동료들은 ‘증세 없는 복지’를 추구한다. 이것이 그 자체로 ‘형용모순’임은 이미 인수위원회 내부에서도 인정되고 있는 분위기이며, 요새 솔솔 흘러나오고 있는 ‘복지 축소론’이란 사실상 그러한 인식의 필연적 결론이다. 어쩌면 그들은 애초부터 자신들의 복지 공약을 지킬 의도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위와 같은 ‘마술’이 가능하다고 믿는 이들이 있으니, 그들이 기대고 있는 가장 중요한 근거가 바로 ‘지하경제양성화’다. 즉 현재 약 1,300조원인 국민소득(GDP)의 20~30%에 달할 것으로 추정되는 지하경제 중 일부만 양성화해도 매년 적게는 1.6조, 많게는 5조의 추가 세수를 확보할 수 있다는 것(링크).

그런데 ‘지하경제양성화’도 엄연한 ‘증세’의 한 방식이다. 따라서 엄밀히 말하면 박근혜가 ‘증세 없는 복지’를 추구한다는 것은 잘못된 표현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지하경제양성화’가 의미하는 ‘증세’의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점인데, 지금 그 얘길 좀 풀어보겠다. 미리 말하자면, 내 결론은 지하경제양성화란 ‘재벌증세 없는 부자증세’, 나아가 ‘재벌증세 없는 보편증세’라는 것이다.

 

◯ 가장 먼저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원칙상 지하경제가 양성화되는 것은 대자본에게 아무런 해를 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복지재원조달수단’으로서 (민주당에서 제안된) 부자증세와 (새누리당에서 제안된) 지하경제양성화의 차이도, 바로 이런 차원에서 평가할 수 있다. 즉 전자는 대자본을 포함한 ‘부자 일반’에 대한 반발이지만 후자는 대자본을 뺀 부자에 대한 반발이다. 이는 매우 중요한 포인트인데, 흥미롭게도 아직까지는 이런 사항은 어떠한 언론매체에서도 다뤄지지 않고 있는 것 같다. 앞으로 어떨지 주목된다.

대충 말하면 이런 거다. 일반적으로 부자에 들어가는 사람들, 그러니까 의사나 변호사, 동네 주유소 사장 등을 포함하는 고소득 자영업자, 건물 몇 채씩 소유하면서 월세 받아서 먹고 사는 지주들과 같은 부자들과 (대)자본은 많은 경우에 이해관계가 일치한다. 적어도 ‘부자증세’라는 문제제기와 관련해서는 그렇다. 그러나 ‘지하경제양성화’와 관련해서는? 일단 재벌도 다양한 방식으로 탈세를 하고, 또 그들이 관여하고 있는 ‘지하경제’의 규모도 상당할 것이다. 그러나 엄청난 금권을 앞세워 행해지는 그러한 행위들이 매우 교묘할 것임은 물론이거니와 국세청이 재벌에 일정 정도 종속된 상황에서 그러한 재벌의 관행에까지 손을 대지는 못할 것이다. 따라서 ‘지하경제양성화’는—만약 그것이 성공한다면—필연적으로 재벌을 제외한 다양한 크고 작은 부자들을 타겟으로 할 것이다. 이를테면 다음 기사를 보라.

국세청이 차명계좌를 이용해 탈세를 저지른 성형외과 의사, 변호사 등 고소득 자영업자 수십 명의 정보를 확보해 정밀 조사에 착수했다. 지하경제 양성화를 위한 첫 단계 조치로 올해부터 ‘차명계좌 신고포상금제’를 도입한 덕이다. [. . .] 국세청은 이 제도의 타깃이 변호사, 세무사, 회계사, 공인중개사, 학원, 병·의원, 치과, 한의원, 골프장, 예식장, 유흥주점 등 이른바 탈세 가능성이 큰 30개 현금영수증 발급의무화 업종이 될 것으로 본다. (링크)

바로 그런 의미에서 ‘지하경제양성화’란 ‘재벌증세 없는 부자증세’라고 부를 만하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박근혜를 찍은 ‘부자들’은 재벌을 위해 살신성인을 했다고도 볼 수 있다. 가히 대단한 희생정신의 소유자들이시다.

그런데 아직까지는 국세청이 정말로 위와 같은 부자들—의사, 변호사, 각종 ‘준재벌’들—에게까지 총구를 겨눌지는 확실치 않다. 그들보다는 좀 더 쉬운 상대가 최초의 타겟이 될 가능성이 크단 얘기다. 그게 누구냐면, 바로 ‘(고소득 말고 그냥) 자영업자’, 예를 들면 이번 대선에서 ‘역적’으로 지목된 ‘50대 자영업자’ 말이다.

“국세청에서는 고소득 전문직에 세금 징수가 쉽지 않기 때문에 영세 자영업자한테 세금을 더 거두려고 강하게 세무 조사를 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출처)

어떤 이들은 ‘부동산시장 부양’ 문제를 들어 50대가 합리적인 선택을 했다고 말하는데, 내가 보기엔 적어도 그들 중 상당수를 차지하는 ‘50대 자영업자’는 박근헤를 당선시킴으로써 자신의 소득원이었던 ‘지하경제’를 대놓고 포기한 셈이고 나아가 재벌 좋은 일만 해준 격이며, 그런 의미에서 그들은 자기 발등을 찍은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지하경제양성화’가 ‘(고소득 말고 그냥) 자영업자’까지 포괄하는 것임을 고려하면, 그것은 단순한 ‘재벌증세 없는 부자증세’가 아니라 ‘재벌증세 없는 보편증세’라고까지 할 만하다.

아, 이런 아이러니를 어쩔 것인가?! 이 정도면, ‘지하경제양성화’를 (적어도 결과적으로는) ‘재벌이 선택한 증세 방식’이라고 불러도 되지 않을까? 그런데 ‘지하경제양성화’는 간접적으로도 대자본에 이익이 된다. 만약 위에서와 같이 지하경제양성화 정책이 특히 의사와 변호사, 동네 음식점 사장님 등을 타겟으로 한다면, 이들 중 상당수는 대자본 아래 편입되는 길을 선택하도록 강요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마르크스 식으로 말하면, 자본의 활동영역, 착취영역이 커지는 것이다.

여담이지만, 바로 이런 성격 때문에 나는 전부터 ‘지하경제양성화’를 진보세력이 재벌과 타협할 수 있는 매우 유력한 협상수단이라고 보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 이번에 문재인이 당선되었다고 해도 박근혜가 내세운 ‘지하경제양성화’는 받아들일만 했다. 재벌에 일정한 양보를 요구하고 그 반대급부로 법인세 인상을 보류해주는 것인데, 이때 모자라는 세수를 ‘지하경제양성화’로 조달한다면 재벌도 이에 기쁘게 동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박근혜도 ‘지하경제양성화’를 재벌에 대한 협상카드로 사용할 것인가? 아무런 압력이 없다면 당연히 그러지 않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지하경제양성화’가 재벌을 위한 정책임을 분명히 드러내고, 이를 근거로 재벌로부터 뭔가를 얻어낼 것을 압박하는 것, 그것은 향후 (범)진보세력의 중요한 의제의 하나가 될 수도 있다.

 

◯ 말이 나왔으니, ‘지하경제양성화’와 대자본(=재벌)의 관계에 대해 한 가지만 더. 말할 것도 없이 지하경제 양성화는 장기적으로 한국경제가 추구해야 할 바이지만, 그것이 현재와 같이 특정한 목적 아래 ‘정치적으로’ 추구된다면 걷잡을 수 없는 결과가 나타날 수 있다. 그 중 특히 우려되는 부분은 국세청과 관련된 것인데, 크게 두 가지 포인트에 주목할 수 있다.

첫째, 국세청 권력의 비대화 문제다. 연예인 강호동을 최고의 자리에서 곧장 은퇴시킨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이미 국세청은 막강한 권한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곧 들어설 차기 정부는 지하경제를 양성화한다는 명목으로 그러한 국세청에 더 많은 권한을 주려 하고 있다. 특히 금융정보분석원(FIU)의 자료에 대한 접근권 확대의 경우엔 단순히 부처 간 기싸움의 차원의 문제로 치부할 것은 아니다.

둘째, (국세청 권력의 비대화의 결과로서) 국세청의 중립화/독립화 문제다. 국세청이 권한이 막강해지면 막강해질 수록 국세청의 중립성이 화제로 떠오를 것이다. 이것은 우리나라 정치사에서 매우 흔한 일인데, 예컨대 기존의 관치금융의 폐해에 반대하면서 1990년대 들어서는 ‘금융의 독립’이 이슈였고, 노무현 정권기에는 ‘검찰의 독립’을 통해 기존 정치검찰이라는 오명을 씼고자 했다.

그러나 금융이든 검찰이든 정치권력의 ‘도구’인 것이 문제라고 해서 곧장 ‘독립화’가 해답은 아니다. 실제로 위의 두 사례에서 정치권력으로부터 독립된 금융과 검찰이 이후 ‘거대자본(=재벌)’에 종속되는 길을 걸었음은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바다. 사유화된 금융은 오늘날 한국경제는 물론 세계경제를 파탄낸 주범이 되었고, 사유화된 검찰은 전직 대통령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이렇게 금융과 검찰을 손에 쥔 대자본에 정치권이 종속되는 것은 시간문제 아니겠는가?

달리 말해, 금융과 검찰의 경우 문제는 그것들을 통제하던 정치권력이 몇몇 개인들의 ‘사유물’로 존재했다는 것—그리하여 금융과 검찰이 몇몇 개인/집단의 사유물로 존재했다는 것—이지, 그것들이 정치권의 통제를 받았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었다. 이 경우 금융과 검찰을 진정으로 개혁하고자 했다면, 사유화된 정치권력을 민주적 방식으로 개편한 뒤 금융과 검찰에 대해서도 그러한 민주성에 기반한 통제가 가해지는 방식으로 방향이 설정되었어야 했다.

이러한 사례는 현재 국세청의 변화 행로에 대해서도 많은 시사점을 준다. 단적으로 말해, 현재 그 권한이 막강해지고 있는 국세청은 향후 ‘독립성 강화’를 명목으로 오히려 자본에 더욱 강하게 종속되는 길을 걸을 수 있다는 얘기다. 이것은 쉽게 가늠할 수 없는 재앙적인 결과를 한국경제에 가져올 수 있지만, 앞서 밝힌 ‘지하경제양성화’의 진정한 의미 등을 보면 그리 비현실적인 공상도 아니다. 이에 대해 좌파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 것인가. 어려운 문제다.

 

Shiller의 매경 인터뷰: 미국경제에 대해

약 일년 전쯤에 미국 예일대의 로버트 실러 교수의 글을 소개한 적이 있다. 그때 그는 미국 정부가 적극적인, 그리고 “제대로 된” 제정정책을 써야만 위기에서 탈출할 수 있다고 말했는데, 최근 이와 비슷한 얘기를, 그러나 더욱 높은 수위로 국내의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했다.

그런데 여기에, 몇 가지 재밌는 점들이 있다. 꼽아보자.

 

1. 제목이 참으로 웃긴다.

이 인터뷰가 실린 {매일경제} 홈페이지를 보면 세 개의 기사가 검색되는데, 사람마다 의견이 다를 수야 있겠지만 내가 보기엔 어느 것 하나 내용을 제대로 반영하질 못하고 있다. 이 세 기사를 입력된 시간순서로 보면 다음과 같다:

(1) “美 증시 여전히 고평가 상태…일본식 장기불황에 빠질수도” (기사입력 2011.09.14 17:18:34)
(2) 로버트 실러 교수 “美집값 5~10년 더 빠질수도” (기사입력 2011.09.14 17:52:01)
(3) 로버트 실러 교수, “美경제, 장기침체로 갈수도” (기사입력 2011.09.14 17:59:59)

첫 번째 것은 인터뷰를 그대로 번역한 것 같고, 두 번째 것은 인터뷰를 요약/정리한 것이며, 세 번째 것은 둘을 짬뽕한 거다. 결국 지면엔 (1)이 나간 것 같은데… 그래도 이건 좀 낫다. 하지만 어찌보면 신문사의 “의지”와 “논조”가 가장 적극적으로 개입하게 될 (2)를 보라. 욕도 안 나온다. 그저 천박(친박?)하단 생각뿐…

 

2. 인터뷰 질문이 정말 웃긴다.

처음엔 괜찮았다. 하지만 중간 이후부터 완전 지멋대로다. 그래도 명색이 “대학 교수”다. 그런 사람한테 물어볼 게 따로 있는 거다. “어떤 자산배분을 권고하는가”냐니!! 그런데 난 대답이 더 웃기다. “… 농장이나 토지 투자도 검토할 만하다”!!! ㅋㅋㅋ 뭐 {매경} 즐겨보는 한국의 투자자들이 실러교수의 충고를 그다지 귀담아 듣지는 않을 것 같지만… 농장이라… ㅎㅎ

 

3. 그래도 이 인터뷰에서 건질만한 게 없는 건 아니다.

내가 보기에 이 인터뷰의 핵심은 다음 대목에 있다. 아마도 실러 교수도 여기에 가장 힘을 주었을 것 같다. 어차피 다른 부분은 누구나 하는 얘기이기도 하고.

-글로벌 침체를 막을 대책은.

▶미국은 여전히 정책수단을 갖고 있다. 바로 재정정책이다. 많은 사람들이 부채위기와 재정지출 증가는 양립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증세와 지출 증가를 병행하면 가능하다. 선거를 앞두고 증세가 어려울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 미국인들은 재정지출을 통한 경기 부양을 원할 것이다. 특히 지금이 미국도 중국처럼 고속도로나 지하철 등 사회간접자본에 투자할 적기라는 데 동의할 것이다. 하지만 통화정책은 한계에 달했다. 9월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에서 예상되는 ‘오퍼레이션 트위스트’의 실효성은 의문이다. 이미 단기금리는 초저금리이고, 10년 만기 장기 국채 금리도 3% 미만이다. 통화정책은 이미 `약발`이 다했다. 지금 재정정책이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사실 앞에서 기사 제목이 웃기다고 한 것도 이런 것을 두고 한 말이었다. 이 글 맨앞에서 링크한 예전 포스트에서도 내가 소개한 바 있듯이, 실러 교수는 꽤 일관되게 증세와 재정정책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있는 대표적인 학자 중 하나다. 그런데 위 대목에선 좀 더 과감하게 “지른다”. 고속도로나 지하철이라니…! 오우, 멋지다(진심).

위 대목에서 드러나듯, 그는 재정정책을 옹호하기만 하는 게 아니라, 현재 미국 정부에 의해 일관되고 적극적으로 추진되고 있는 금융통화정책에 강한 불신을 나타내고 있기도 하다. 특히 위에서 그는, 현재 전세계가 주시하고 있는 ‘operation twist’의 실효성에 대해서도 회의를 나타내고 있다는 점은 꽤 흥미롭다.

하여간에… 위 인터뷰에서 실러 교수는 이런 엄청나게 중요한 말을 했다는 거고(뭐 어차피 그래봐야 일개 학자의 ‘말’일 뿐이긴 하지만), 그걸 보도한 {매경}은 멍청한 건지 교활한 건지… 그런 부분을 전혀 부각하지 않았다는 거다. 물론!! 이것은 단지 기사의 제목을 잘못 지었다는 게 아니다. 앞서 링크된 셋 중에서 신문사가 자체제작한 (2)를 아무리 들여다봐도, 이상과 같은 사항은 일언반구도 없는 것이다.

 

4. 끝으로 미국 빈곤율 상승에 대해

위 인터뷰에서 실러 교수도 이를 언급했고, (그나마 친절하게도) 링크된 (2)나 (3)을 보면 이에 대한 좀 더 상세한 설명이 나온다.

일단 재밌는 게 4인가족의 연소득이 2만2천달러 이하면 미국에선 빈곤층이 된다는 것. 단순비교하긴 좀 그렇지만, 우리의 두배쯤 되는 것 같다(정확히 확인은 안 해봤다).

어쨌거나 최근에 발표된 빈곤층이 늘었다는 센서스 자료가 미국에서 화제가 되는 모양이다. 이를 좀 더 이해하는 데 이런 글을 보는 것도 도움이 될 것 같다. (인종과 관련된 건 그렇다 치고… 의료보험 가입되지 않은 사람이 거의 5천만.. 남한의 인구에 달한다는 것은 좀 충격적이다…)

 

Krugman, depression, 4대강 그리고, 세금을 거둬!

[글을 이동시켰더니 꼴이 말이 아니게 되어, 제목을 고쳐 다시 올린다.]

Recessions are common; depressions are rare. As far as I can tell, there were only two eras in economic history that were widely described as “depressions” at the time: the years of deflation and instability that followed the Panic of 1873 and the years of mass unemployment that followed the financial crisis of 1929-31. (Paul Krugman, “The Third Depression“, The New York Times, June 27, 2010.)

[번역] Recession은 흔하지만 Depression은 드믈다. 내가 아는 한, 경제사에서 그 당대에 “depression”이라고 널리 묘사되었던 시기는 딱 둘이 있다. 1873년의 Panic에 뒤이은 디플레이션/불안정의 시기와 1929-31년의 financial crisis에 뒤이은 대량실업의 시기가 그것이다.

크루그만이 현재 선진국들을 중심으로 형성되고 있는, 범지구적 경기침체에 대한 대응방침에 대한 우려를 나타냈다. 이 ‘대응방침’이란 한마디로 요약하면 ‘긴축(재정)’ 즉 ‘세금을 늘리고 정부지출을 줄인다’는 것이며, 크루그만은 이런 대응은 현재 어느정도 잦아든 위기에 다시 불을 붙일 뿐이며,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적극적이고 과감한 정부의 역할, 즉 ‘재정지출’이라는 거다.

뭐… 크루그만이 구체적인 방안들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 한, 큰 틀에서는 동의할 수밖에 없다. 다만, 그가 자신의 그런 주장을 펼치기 위해 내놓는 근거, 특히 현재의 위기의 심각성을 강조하기 위해 내놓은 위 인용구절과 같은 근거에는 쉽게 동의할 수가 없다.

크루그만의 주장과는 달리, “그 당대에 ‘depression’이라고 … 묘사되었던 시기”는 그가 들고 있는 두 가지 예보다 더 많다(여기 등장하는 “널리”라는 부사는, 지식인들이 자신의 진술에 대한 ‘자신감 결여’를 숨기기 위해 종종 쓰는 표현으로, 실제로는 별 의미가 없다). 그는 recession과 depression을 구별하고 있는데, 실제로 recession이라는 표현은 오늘날 우리가 ‘대불황'(the Great Depression)이라고 부르는 시기 이후에 와서야–대체로 ‘대불황’과 같은 ‘엄청난’ 불황과 구별되는 ‘자잘한’ 불황을 일컫기 위해–널리 쓰이게 되었다고 한다.

1930년대의 ‘대불황’ 이전에 ‘불황’ 즉 ‘depression’이라는 표현이 쓰이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19세기 문헌을 보면panic이나 crash, crisis와 같은 표현들이 주로 쓰였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이를테면 (다시, 크루그만의 주장과는 달리) 1819년 미국에서 벌어진 ‘Panic’을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먼로(James Monroe)는 특이하게도 ‘depression’이라고 불렀다. 이런 사례가 말해주는 것이 무엇인가? 바로 자본주의 체제의 최고 위정자들은, 자본주의 체제가 가진 모순의 필연적인 표현인 panic/crash/crisis라는 현상을 인정하려고 하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런 표현을 쓰는 것 자체도 꺼렸다는 것이다. 실은 바로 이것이 panic/crash/crisis 대신 depression이라는 다소 애매모호한 표현–미국의 경제통계국(NBER)도 이에 대한 명확한 규정을 내놓지 않고 있다–이 “널리” 쓰이게 된 중요한 배경이다. (아, 그렇다고 depression을 쓰지 말아야 한다는 건 아니고… 크루그만이 뭘 좀 모르고 말하고 있단 얘기다.) 다음 설명을 보라.

In the beginning stages of the Great Depression, Hoover remained in a state of denial over worsening economic conditions. Shortly following Black Tuesday, Hoover remarked that the “conditions are fundamentally sound.” Even as late as December 1930, Hoover maintained that “the fundamental strength of the economy is unimpaired.” It was not until 1931, when it became impossible to deny the economic train wreck transpiring, that Hoover began to refer to the economic situation of his own time as a “great depression.” (출처: When Did the Great Depression Receive Its Name? (And Who Named It?))

‘말’ 얘기는 이쯤에서 그치고… 다시 크루그만의 칼럼으로 돌아와보자. 칼럼을 다 읽기 어렵거나 귀찮은 분은 다음 기사들을 참조하시면 되겠다.

크루그먼 “제3의 불황은 이미 시작됐다” (<프레시안>, 2010년 6월 29일)
폴 크루그만 “긴축정책 때문에 ‘3차 불황’에 빠지고 있다” (<참세상>, 2010년 6월 29일)
(<참세상> 기사가 좀 더 충실하게 칼럼의 내용을 전하고 있지만 한 군데 오역이 있고, <프레시안> 기사는 좀 더 간결하고 정확하지만 몇 가지–상대적으로 덜 중요한 대목–빠진 내용이 있다.)

현재의 세계적 추세(긴축재정)와 이에 반대해 크루그만이 내놓는 처방(팽창재정)의 차이는 곧 문제인식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전자가 “재정건전성 회복”을 제1의 문제로 꼽고 있다면 전자는 “경제 전체의 활력 회복”을 가장 중요한 문제로 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어떤가? 4대강 사업이나 세종시 사업 등 “대규모 국책사업”을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것을 보면, 우리는 어쩌면 크루그만의 처방 쪽에 더 가까이 있는 것은 아닌가?

꼭 그렇지는 않다. 가장 중요한 차이는… 현재 정부가 추진하는 위와 같은 사업들은 (그 적절성에 대한 문제는 별도로 하고) 대체로 민간기업에 의해 이뤄지고 있기 때문이다. 크루그만도 위 칼럼에서 시사하고 있듯이, 이런 대규모 사업의 직접적인 목표는 바로 “실업 해소”에 있다. 바로 실업자들을 대규모로 고용해서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는다는 것이다(고용->소비->산출증대->투자…와 같은 선순환virtuous cycle의 회복). 이런 시각에서 보면, 현재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세종시 수정안의 경우엔 국회표결에서 기각되었으므로 한동안 더 질질 끌리겠지만–대규모 사업들은, 그런 사업들이 당연히 목표로 해야 할 사항들과 별로 관계없이 진행되고 있다고 여겨진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기사를 보라.

낙동강 달성보 일부 공사중단 (<한겨레> 2010년 6월 27일)
4대강 상용직 고작 130개 (<한겨레> 2010년 6월 29일)

위 기사들이 지적하고 있는 현재 사태의 면면들을 보면, 4대강 사업이란 (환경에 대한 영향 같은 것은 관두고라도) 그것이 애초부터 겨냥하고 또 자랑해 왔던 “경제적 효과”를 달성하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다시 <‘세계적 추세’ vs ‘크루그만 처방’>의 문제로 돌아가면… 비록 우리나라가 4대강 사업과 같은 것들을 추진하고는 있지만, 그것이 크루그만이 제안하는 “정부의 적극적인 역할”론과 거리가 있음은 이미 지적한 바다. 그런데 사태가 이렇게 돌아가는 데는, 우리나라 정부의 입장에서 봤을 때, 한편으로는 크루그만이 말하는 것과 같은 정부의 과감한 역할을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긴축’, ‘작은 정부’, ‘건전한 정부’를 추구해야 하는 절박함이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즉… 침체해 있는 경기를 살리기 위해 뭔가 일을 벌이긴 해야 하는데, 그렇다고 그것을 정부 돈으로 할 수는 없고… 정부는 그런 사업에 돈을 쓰기보다는 오히려 허리띠를 더 졸라매야 할 상황이고… 뭐 이런 거다.

미국이나 영국, 또는 현재의 그리스와 같이, 이번참에 크게 한방 얻어맞은 나라들은, 어쩌면, ‘긴축’과 ‘팽창’ 사이에서 (큰 틀에서) 양자택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실제로 이를테면 영국의 경우엔, 이번 총선에서 드러났듯이, ‘긴축’ 쪽으로 완전히 기조를 잡고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아니, 적어도 우리나라 ‘정부’는, 아직 쓴맛을 덜봐서 그런지, ‘세계적 추세’대로 긴축재정을 펼치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크루그만 처방’대로 정부의 과감한 역할론도 옹호하고 있는 셈이다. 말하자면… 서로 다른 방향을 뛰어 도망가고 있는 ‘두 마리 토끼'(경기부활+재정건전성 강화)를 한꺼번에 잡겠다는 속셈인데… 위 기사들에서 보듯이, 이미 그런 전략–아니, 그런 ‘방침’ 자체가 문제라기보다는 현재 정부가 택하고 있는 ‘방식’의 ‘구태의연함’이 문제일 거다–은 곳곳에서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더구나 재정 건전성 문제는, 아직은 우리나라에서 심각하게 떠오르고 있지는 않지만, 이는 경제 전체의 다양한 측면에서의 취약성과 더불어 두고두고 문제가 될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크게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는 게 있다. ‘긴축’을 택하든 ‘팽창’을 택하든, 또는 ‘세계적 추세’를 따르든 ‘크루그만 처방’에 모험을 걸든, 어떤 경우에도 공통적으로 전제되어야 하는 조건이 있다. 바로 ‘증세’다. 우리나라의 가장 기본적인 문제가 바로 여기에 있다. 실업자는 늘어나고, (그에 따라) 경기는 침체해 있고, (그나마 믿고 있던) 부동산도 안 되고, 중앙 및 지방의 정부재정은 날이 갈수록 취약해지는데… 이 거지 같은 정부는, 세금을 더 걷을 생각을 안 하는 것이다… 어렵게 볼 것 없다. 부자에게서 세금을 거둬들이란 말이다… 이 씨방새들아…

전세계 ‘부자 증세’ 기조 속 한국만 ‘부자 감세’ 고집하면… (<경향신문>, 2010년 6월 29일)
외국선 부자 증세, 한국은 감세 (<경향신문>, 2010년 6월 29일)

♨♨♨ “부자에게서 세금을 거둬들여라”… 좋은 말이다. 이 좋은 말이 노래에 들어가 있으면 더 좋다. 그런 노래가 있다. Ten Years After의 “I’d Love to Change the World”다. 영화 <중앙역>에 삽입되어 한동안 때늦은 인기를 끌기도 했다.

글을 쓰고 보니 문득 이 노래가 생각나 붙여둔다. “Tax the rich / Feed the poor / Till there are no rich, no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