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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 지식, 판단력, 의지의 상실과 지식의 저질화의 시대

야만인이 모든 전쟁기술을 개인의 책략을 발휘한 것과 마찬가지로, 비록 작은 규모에서이기는 하나 독립적인 농민 또는 수공업자도 지식과 판단력과 의지를 발휘했다. – 자본론 1권 14장, 487; MEW 23; 382

지식, 판단력 (또는 이해력 혹은 통찰력), 의지라는 세 단어에 주목하자. 노동에는 이 세 가지가 반드시 필요하다. 자신의 것이건, 혹은 타인의 것이건.

그러나 매뉴팩쳐에서는 그러한 능력은 다만 작업장 전체를 위해서만 요구될 뿐이다. 생산상의 정신적(geistig) 능력이 한 방면에서는 확대되면서 다른 여러 방면에서는 완전히 소멸된다. 부분노동자들이 잃어버리는 것은 [그들과 대립하고 있는] 자본에 집적된다. 부분노동자들이 물질적 생산과정의 정신적 능력을 타인의 소유물로 또 자기를 지배하는 힘으로 상대하게 되는 것은 매뉴팩쳐적 분업의 결과다 – 487-8; 382

1. 물질적 생산과정의 정신적 능력 (die geistigen Potenzen des materiellen Produktionsprozesses) – 물질적 생산과정에는 물리적 능력뿐만 아니라 정신적 능력도 필요하다.

2. 자본주의의 논리적, 역사적 발전과정은 지식, 판단력, 의지 – 물질적 생산과정의 정신적 능력 – 을 개별노동자들로부터 자본으로 이전시키는 과정이기도 했다.

이 분리과정은, 개개의 노동자에 대해 자본가가 집단적 노동유기체의 통일성과 의지를 대표하게 되는 단순협업에서 시작된다. – 488; 382

1. 단순협업의 경우에는 ‘의지’ 정도만 자본가의 몫이다. 매뉴팩쳐에서는 ‘의지’에 더해 ‘지식’과 ‘판단력’마저 자본에 이전된다. 물론 부분노동자의 작업을 위한 ‘의지’, ‘지식’, ‘판단력’은 노동자에게 남지만.

2. 집단적 노동유기체 대신 사회적 노동유기체라고 번역해야 한다. 물론 의미상 차이는 없다. 자세한 내용은 (111) 집단적 노동, 사회적 노동, 결합노동, 공동노동, 공동체적 노동 참조.

그리고 이 분리과정은 노동자를 부분노동자로 전락시켜 불구자로 만드는 매뉴팩쳐에서 더욱 발전한다. 끝으로, 이 분리과정은 [과학을 노동과는 별개인 생산잠재력으로 만들고, 과학을 자본에 봉사하게 만드는] 대공업에서 완성된다.

1. 단순협업에서 의지를, 매뉴팩쳐에서 지식과 판단력을 자본으로 이전시켰다면, 대공업에서는 자본에 이전된 지식이 과학적 지식으로 된다. 매뉴팩쳐에서는 과학이 그래도 자본의 통제 바깥에 있었다면, 대공업에서 과학은 자본에 복속된다.

2. ‘별개인’으로 번역된 selbständige는 ‘독자적인’ 혹은 ‘자립적인’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기계제 대공업에서의 과학의 독자성을 더 강조하는 것이 더 좋겠다.

그렇다면 오늘날에는? 단순협업 -> 매뉴팩쳐 -> 기계제 대공업 이후의 새로운 단계를 상정할 수 있을까? 인지자본주의론자들은 우리는 이미 새로운 단계에 진입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특징적으로 이 단계에서 노동자들은 (과학적) 지식, 판단력, 의지를 다시 자본으로 빼앗아오고 있다고 한다. 인지자본주의론자들은 기계제 대공업의 시기까지 자본이 이윤을 획득할 수 있었던 이유를 (생산수단을 독점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지식, 판단력, 의지를 통제했었기 때문이라고 잘못 이해한다. 그래서 이들이 다시 노동의 손으로 되돌아오고 있는 자본주의의 새로운 단계에서는 자본에게 돌아갈 이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잘못된 주장을 한다. 이제 자본가에 남은 카드는 지적재산권뿐. 자본가는 이윤 대신 지대를 수취하는 지주로 변신하는 중이다. 더 할말 없다. 콩 심은데 콩나고 팥 심은데 팥 나는 법. 논증은 올바른 대전제에서 출발해야 할뿐.

이유는 다르지만 나도 우리가 새로운 단계에 진입했다고 생각한다. 이 새로운 단계의 특징은 (과학적) 지식의 자립화를 넘어선 지식의 상품화다. 지식은 상품이 아니므로 결코 상품이 될 수 없지만, 상품을 닮아갈 순 있다. 팔기 위해 지식을 생산하고, 표준화된 방식으로 지식을 생산하고, 자본의 통제 하에 지식을 생산할 때, 지식은 상품화된다. 지식은 본질적으로 상품과 다르므로 지식의 상품화는 지식의 저질화다. 사람이 개를 닮아가면 사람이 저질화되고, 개가 사람을 닮아가면 개가 저질화되는 것처럼.

관심있는 분은 주류경제학과 신자유주의 비판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필립 미로스키(Philip Mirowski)의 [과학마트 – 미국 과학 민영화하기(Science-Mart – Privatizing American Science)]를 참조. 미로스키에 따르면 지식경제니 창조경제니 하는 중립적인 척하는 용어들 모두 신자유주의의 소산이다. 이 책에 대한 괜찮은 리뷰 아티클은 여기 참조.

조정환 선생의 ‘인지자본주의’ 출간에 부쳐

조정환 선생께서 『인지자본주의』라는 책을 내셨다고 한다. 네그리•하트의 『제국』이 나온 것이 2000년이니까, 그로부터만 쳐도 10년이 넘는 기간에 걸친 연구와 논쟁의 성과라고 할 수 있겠다.

책을 안 읽어봤지만 그간 알고 있던 그의 주장들로 미뤄 내충 무슨 얘길 하려는지는 짐작이 간다. 다른건 관두고, 나는 이 분이 자신의 주장을 마르크스와 관련짓는 것이 심히 못마땅스러울 뿐이다. 만약 그러지만 않았다면, 그는 전혀 나의 관심 바깥에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특이한 것은 그가 ‘인지자본주의’라는 테마를 마르크스와 관련시키기 때문이지, 만약 ‘인지자본주의’ 자체에 대해 말한다면 이론적으로나 실증적으로나 조정환 선생보다 훨씬 정치하고 앞선 논의들을 내놓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말해, 널리고 널렸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가 마르크스를 올바르게 제시하고 있는가? 절대 그렇지 않다. 마르크스의 가치론을 그는 전면 부정하기 때문이다. 《경향신문》의 표현을 빌면, 그는 “노동자를 더 고용해 그들이 창출하는 ‘잉여가치’에서 자본을 축적한다는 마르크스적 해석이 통하지 않는다”라고 보기 때문이다(링크). 이런 해석에 대해, 그간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수많은 반론들을 내놓았고, 그 대표적인 논자가 경상대의 정성진 교수다. 지금은 이미 오래전 일이지만, 그의 노력은 눈물겨울 정도였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하다. 어째서 조정환 선생은 마르크스의 핵심 명제를 부정하면서도 스스로 마르크스주의 진영에 이름을 올리는 것을 허용하는 것일까? 기본적으로 조정환 선생께서 위와 같은 ‘과감한’ 해석을 내놓는 것은, ‘세상이 바뀌었다’라는 판단 때문이다. 이를, 《한겨레》의 기사는 “상업자본주의, 산업자본주의에 이은 제3기 자본주의로서의 ‘인지자본주의’”라고 표현했다(링크). 무슨 얘기냐면, ‘어차피 이런 것에 대해 마르크스는 전혀 몰랐을 테니까’라는 ‘알리바이’를 조정환 선생은 자의적으로 마르크스에게 부여한 뒤, 그는 점잖게 ‘그래도 나는 마르크스주의자’라고 선언하는 결연함을 보이는 것이다. 음, 멋지다…

하지만… 마르크스가 그런 것을 몰랐다고 식의 발언은 매우 조심스럽게 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우리는 역사를 다룰 때 지극히 신중해야 하는 것이다. 당연히 마르크스는 iPhone에 대해 몰랐을 것이다. 하지만 iPhone은 8년 전 돌아가신 우리 아버지도 몰랐다. 그러나 ‘iPhone을 몰랐다’라는 말과 이를테면 ‘잉여가치가 더 이상 노동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지식에서 나오는 세상에 대해 몰랐다’라는 말은 전혀 다른 것이다. 과연, 마르크스가, 지식이 가치의 생산에서 행하는 중요한 역할에 대해 몰랐을까? 이것은 마르크스만에 대한 얘기는 아니다. 즉 19세기 중반 빅토리아 시대 영국의 선진적인 지식인들이 ‘지식’이라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었을까? 이에 대해 지금으로선 다음과 같은 당시 《The Economist》의 한 구절을 인용하는 것으로 족하다.

“물질세계에 대한 지식과, 그것을 노동에 의해 적용시키는 기술부의 원천이다” (The Economist, August 30, 1851). (강조는 나의 것. 여기서는 ‘노동’이 아니라 ‘지식knowledge’과 ‘기술skill’이라는 단어가 핵심이다.)

혹시 조정환 선생은, 위와 같은 구절에 대해 마르크스가 동의했다고 생각하시진 않겠지? 참고로, 《The Economist》는 마르크스가 그렇게도 혐오했던 당시의 경제학자들, 즉 이미 자본가들의 하수인으로 전락한, 과학자라기보다는 이데올로그에 지나지 않는 집단에 의해 ‘자유무역을 증진시키기 위해’ 창간된 잡지다.

(물론 내 얘긴, 마르크스가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었다는 게 절대 아니다. 세상이 바뀌었다면서 ‘가치론’이 유효성을 잃었다고 하는 것은 매우 성급한 태도라는 것이다. 이미 이 블로그에서도 ‘가치론’의 중요성에 대해선 몇 차례 말한 바 있다. 조정환 선생이 말하는 것과 같은 ‘세상의 바뀜’은 가치론에 대해 새로운 과제를 제기하는 것이지—물론 위에서 말한 대로 흔히 사람들이 ‘새로운 과제’라고 여기는 것들이 실제로는 그다지 새로운 게 아니다—결코 가치론을 부정하는 근거는 되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