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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를 마치며]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 비판의 개요

다음은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 비판의 핵심을 내 나름대로 개요식으로 간추린 것이다. 특히, 이번 겨울에 내가 했던 두 번의 강의, 진보신당 청년학생위원회가 주최했던 강의와 자유인문캠프에서 마련해준 강의를 수강했던 분들을 생각하면서 썼다. 변변치못한 강사를 잘 따라준 그분들께 감사드린다.

아마 글을 조금 써본 사람은 알 것이다. 아래와 같은 글은, 잘쓰고 못쓰고를 떠나서, 쉽게 나오는 게 아니다. 뭔가 커다란, 매우 인상적인 어떤 영감이 있어야만 하는데, 그러니까 우리 수강생들께서 내게 그런 영감을 주신 셈이다. 이에 대해서도 마음 깊이,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자캠 게시판엔 링크해뒀고.. 제가 싸이월드는 들어가지 않는 관계로.. 청학위 분들은 이 글을 청학위 게시판에 링크해 주시거나 트윗이나 기타 방식으로 공유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또한 특히 강의 끝나고 인사도 제대로 못 나눈 분들, 강의 끝날 때까지 말한번 제대로 못 나눈 분들은, 여기에 덧글이라도 달아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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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자본주의 경제는 다양한 인간집단으로 구성되어 있고, 물질적인 차원에서 봤을 때 이들은 각자 자신이 가진 자산(property)을 근거로, 그에 비례해 수입을 거두는 것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이들은 그러한 수입을 얻기 위해 다양한 방식으로 생산활동에 기여하고, 그 대가로 얻는 수입으로 각자의 삶을 유지하는 등 소비활동을 영위한다.

이러한 인간집단 중 대표적인 게 바로 자본가, 임노동자, 지주다. 이들을 ‘계급'(class)이라 부르는데, 그것은 지금과 달리 정치경제학이 막 발달하고 있던 19세기 전반기/중반기엔 정치경제학자라면 누구나 받아들이는 통상적인 범주였다. 이들은 각각 이윤, 임금, 지대를 수입으로 얻고, 이 수입들은 그들이 지닌 자본, 토지, 노동(력)이라는 자산에 비례해 그들 각자에게 주어지는 것으로 그려진다.

2. 마르크스 당대의 부르주아 정치경제학은 이들 수입이 그 자체로 정당하며, 그것들은 일정한 법칙에 의해 규제되지만 이들 각각을 규제하는 법칙들은 서로 독립적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정치경제학의 제1과제는 그러한 법칙들을 찾아내는 것이었다.

한편 이러한 법칙에 의해 각 계급의 수입이 결정되더라도, 그 수입들의 분배가 늘 바람직한 결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이를테면, 노동자에게 돌아가는 임금은 노동자 가계의 정상적인 재생산을 어렵게 할 정도로 형편없을 수도 있었는데, 이를 방지하거나 해결하기 위해 몇몇 정치경제학자들은 공동체 전체–이를테면 국가–가 일정한 역할을 수행하는 것을 허용하고, 나아가 적극 장려하기도 했다.

3. 이와 같은 당대의 정치경제학의 가르침에 대해 마르크스는 크게 두 가지 비판을 내놓는다. 첫째, 이윤, 임금, 지대 등은 상이한 법칙들에 의해서 각각 독립적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며, 이들의 결정은 서로 내적으로 끈끈하게 연결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둘째, 모든 것은 궁극적으로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관계, 즉 전자가 후자를 착취하는 관계에서 비롯된다.

다시 말해, 직접적 생산의 영역에서 자본가가 노동자를 착취하고(즉 노동자가 행하는 잉여노동을 공짜로 가져가고), 이 산업자본가들은 그 착취분을 생산에 간접적으로 참여한 다른 사회계급들–상품의 보관, 관리 등에 종사하는 상업자본가, 지주, 잉여화폐소유자 등–에게 나눠준다는 것이다. 물론, 첫째, 착취가 어느 정도의 비율로 이뤄질 것이냐, 둘째, 착취된 것이 여러 자본분파들 및 지주계급에게 어떤 비율로 배분될 것이냐 등은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법칙적으로 결정된다. 따라서 이 법칙을 찾아내고, 그 사회적 의미를 밝혀내는 것은 마르크스 정치경제학의 중요한 과제다.

4. 여기서 보듯, 위와 같은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 비판, 또는 정치경제학의 비판적 재구성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착취라는 개념을 확립시키는 것이다. 그런데 착취 개념을 세우기 위해서는, 그 이전에 먼저 해결되어야 하는 문제들이 있다. 이를 하나로 요약하면, 상품의 가치는 어떻게 결정되는가, 다시 말해, 상품의 가치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다.

사실 이에 대해서는 고전정치경제학자들이 대부분 밝혀놓았다. 즉 가치의 실체는 인간노동에 다름 아니며, 따라서 그 양은 주어진 상품에 들어간 노동시간에 다름 아니다. 마르크스는 다만 이 두 사항을 좀 더 명확하게–이를테면 ‘사회적 평균’, 복잡노동의 단순노동으로의 환원 등과 같은 개념적 도구들을 명시적으로 도입함으로써–규정했을 뿐이다.

5. 가치 개념의 확립과 관련된 마르크스의 진정한 업적은, 가치란 인간노동이 자본주의 하에서 취하는 특수한 형태임을 밝혔다는 데 있다. 자본주의는 하나의 거대한 사회적 생산 체계이며, 그 안에서 한 개인은 특정 분야에 속해 특정한 상품을 생산하는 노동을 행한다. 그럼으로써 그는 전체 체계의 재생산에 기여하고 또한 타인들과 관계를 맺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관계는 직접적으로 맺어지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노동의 산물인 물건들 사이의 관계로, 간접적으로 나타난다. 다시 말해 가치란, 바로 이러한 간접적으로 사회적인 관계 속에서 인간노동이 뒤집어쓰는 형식인 것이며, 이는 궁극적으로 화폐형태로 굳어진다.

6. 자본주의 하에서 사람들은 화폐에 관한 온갖 환상, 그릇된 관념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위와 같은 사정과 연관되어 있다. 먼저, 마르크스가 말하는 화폐의 수수께끼 또는 환상이란, “화폐 그 자체에 무슨 대단한 힘이 있어서 그것이 모든 물건의 가치를 표현해준다”라는 생각을 의미한다. 이런 환상은 한편으로는 화폐에 대한 말 그대로의 ‘숭배’를 낳기도 했고, 또 한편으로는 화폐만 없애면 자본주의를 갈아엎을 수 있다는 그릇된 희망을 심어주기도 했다.

그러나 위 생각은 마르크스에겐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만약 화폐에 무슨 대단한 힘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면, 우리는 당연히 화폐에 그러한 힘이 부여된 까닭을 살펴야할 것이다. 마르크스에 있어 그 까닭이란, 자본주의 하에서는 특이하게도 인간의 노동이 가치–상품가치–로, 그리하여 노동을 매개로 한 인간들 사이의 사회적 관계가 사물들 사이의 (사회적) 관계로 나타난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결국 화폐란 바로 이러한 상품들 중에서 모종의 사회적 과정을 거쳐 선발된 것일 따름이며, 그것이 화폐일 수 있는 것은 이미 그 이전에 그것이 상품, 즉 인간노동의 체현물이었기 때문일 따름이다. 그러므로 노동을 통한 인간들 간의 사회적 관계가 맺어지는 방식을 실질적으로 건드리지 않은 채 화폐만 없애려 한다면, (1) 현재의 자본주의 질서를 없앨 수 없을 것이며, (2) 궁극적으로 화폐가–과거와는 다른 형태를 취하긴 하겠지만–재도입될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우리는 얻을 수 있다.

7. 대체로 이상과 같은 내용을 마르크스는 {자본론}에서 ‘정치경제학 비판’이라는 표제 아래 내놓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보듯이 그 순서는 이상에서 설명한 것과 조금은 다르다. 대체로 말해, 정반대다. 그는 먼저 가치라는 개념을 정립한 뒤, 이로부터 화폐를 거쳐 자본으로 나아간다. 그리고 나서 자본의 생산 및 재생산을 생산과 유통이라는 양측면에서 살핀 뒤, 이상의 논의를 경제 전체적인 차원에서, 즉 생산에 직접 관여하진 않지만 다양한 방식으로 거기 기여하는 사회의 각 분파들을 고려함으로써 풍부화한다.

이와 같은 마르크스의 작업이 각별한 것은, 그것이 경제의 각 부문에서 벌어지는 현상들을 전체적인 맥락 속에서 파악할 수 있는 시각을 우리에게 부여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시장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가격현상을 부르주아 경제학에서는 그 자체로서만 파악하곤 하는데, 마르크스는 그것을 생산의 가장 밑바닥과의 연관 속에서, 즉 그러한 밑바닥 매커니즘의 필연적인 현상형태로 파악한다. 이것이 바로 부르주아 경제학은 가격이라는 개념만으로도 자신이 제기하는 모든 문제를 다룰 수 있는 반면 마르크스 경제학은 가격의 근거로서의 가치라는 개념을 ‘굳이’ 내세우는 것이다(이렇기 때문에 전자는 가치 개념이 불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것이며, 그러한 불필요성이 제기되는 바로 그 영역과 바로 그 문제틀 안에서 가치 개념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도 바로 그래서다). 거꾸로 말하면, 가치라는 개념을 통해 우리는 부르주아 경제학이 제기하지도 못하는 문제를 제기하고자 하는 것이며, 무능한 부르주아 경제학은 그런 문제로부터 야기되는 현상들을 그저 ‘불가해한 그 무엇’으로 받아들일 뿐이다. 이리하여 부르주아 경제학은 그 ‘의도’와 무관하게 현상유지적, 현상옹호적으로 흐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부르주아 경제학은 크게 두 부류다. ‘불가해한 그 무엇’의 존재를 솔직하게 인정하는 쪽과 그것을 개념파악에 실패한 것을 그것의 존재 자체를 무시함으로써 극복하는 쪽. 후자가 통상적인 부르주아 주류경제학이라면, 전자는 비마르크스주의적 비주류경제학–이를테면 포스트케인시언–이다.)

이리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마르크스주의 정치경제학의 진정한 힘은 그것이 다른 무엇으로 대체될 수 없는 바로 그 곳에 있다, 라고. 그리고 바로 ‘그 곳’에 자본주의 경제의 비밀이 있다, 라고. (끝)

 

[진보신당 청학위 강좌] 제1강의 요약과 보충

지난번 강의를 간단히 요약해보려 합니다. 나중에 돌이켜보니 강의록도 지나치게 길었고 강의도 좀 두서 없이 진행된 것 같아, 관련 내용에 익숙하지 않으신 분들은 좀 혼란스러웠을 것도 같아서요. (하지만 거듭 말씀드리지만, 강의안에서도 소개해드린 글들, 특히 맨아래 다시 열거해놓은 제가 쓴 글들은 반드시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 글을 보시는 수강생께서는 동료들에게도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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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강: 정치경제학이란 무엇인가

1. 경제위기: 2007년 이후부터 세계경제가 위기 상태에 빠져있다. 이번 위기는 특히 세계경제의 중심부에서, 그리고 현대경제의 꽃인 금융을 중심으로 벌어졌다는 점에서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자본주의 경제의 위기’라고 할만하다. 이에 따라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관점과 입장에서 현재의 위기를 진단하고 또 그에 따른 처방을 내놓고 있다. 미디어를 통해 위기의 다양한 징후들이 고발되고, 사람들은 길거리로 나와 경제위기를 부르고 자신들의 삶을 파탄낸 주범들을 규탄하고 있다.

2. 경제학의 위기: 경제의 위기는 필연적으로 경제학의 위기이기도 하다. 왜 경제학은 경제위기를 사전에 예측하고 적절한 대책을 내놓지 못했는가? 경제위기가 불거진 이래 이 질문은 전문적인 경제학자들뿐 아니라 경제학에 완전히 문외한인 보통 사람들에 의해서도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 요컨대 경제위기는 먼저 경제가 운영되는 방식에 대한, 그리고 나아가 경제가 사고되고 이론화되는 방식에 대한 반성의 필요성도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3. 경제와 경제학: 이렇듯 경제와 경제학은 서로 떼어낼 수 없는 관계에 있다. 특히 이것은 근대사회 특유의 조건을 반영한다. 즉 근대사회란 그야말로 인간들 사이의 경제적 관계, 즉 물질적 이해관계를 근간으로 형성되어 있는 역사적 구성체이고, 바로 그러한 물질적 이해관계를 주된 탐구대상으로 삼는 경제학이야말로 근대사회의 ‘자기이해’ 또는 근대사회의 ‘해부학’이라고 할 수 있다는 얘기다.

4. (정치)경제학의 역사성: 오늘날 경제학을 일컫는 단어엔 두 가지, 즉 ‘경제학’과 ‘정치경제학’이 있다. 그러나 흔히 ‘경제학economics=주류경제학’, ‘정치경제학political economy=비주류경제학’이라는 등식이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사실 political economy는 economics의 옛 이름으로,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더 일반적으로 쓰이고 있었다. 원래 ‘political economy’는 ‘economy’라는 말에서 왔으며, 이는 다시 ‘가정의 관리’라는 의미를 갖는 고대 그리스어에 기원을 두고 있다. 이때 ‘가정’의 관리란 ‘국가polis’ 또는 ‘전체 공동체’의 관리로 곧장 확장-적용될 수 있었으나, 17세기 정도에 이르면 규모나 복잡성 면에서 국가 또는 전체 공동체를 가정과 직접 대응시키는 게 불가능해져 전자의 관리를 일컫기 위해 이제는 단순한 ‘economy’ 대신 ‘political economy’가 필요해진 것이다. 이와 같은 political economy는 처음엔 단순히 국왕의 금고를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유지-증대시킬 수 있겠느냐는 문제에 집중했지만, 사회가 복잡해지면서 점차 그것이 다뤄야 할 문제의 범위와 깊이는 더해 갔다. 이리하여 political economy는 근대사회를 구성하는 상이한 이해관계를 갖는 집단들(‘계급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생산, 교환, 유통, 분배, 소비 등과 관련된 다양한 이슈들을 다양한 추상수준에서 논의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으며, 이런 의미의 political economy를 집대성한 게 바로 아담 스미스(Adam Smith)다. 그러니까 마르크스가 ‘political economy란 근대시민사회의 해부학이다’라고 했을 때, 그는 바로 이러한 내용을 염두에 두었던 것이다.

5.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 비판’: 마르크스는 당대의 정치경제학이 갖는 위와 같은 역사적 의의를 그 누구보다도 명확하게 깨닫고 있었지만, 동시에 그것이 가지고 있는 한계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앞서 밝혔듯 그런 한계는 다름 아닌 경제위기의 시기에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리하여 그는 스스로 ‘정치경제(학) 비판'(Kritik der politischen Ökonomie)이라고 명명한 지적 기획을 출범시키는데, 여기서 ‘비판’의 정확한 의미를 파악하는 게 매우 중요하다. 즉 그것은 흔히 여겨지는 대로 어떤 대상을 단순히 ‘파괴’하거나 ‘부정’하는 것이 아니며, 혹시 이를 그렇게 이해하더라도 강조점은 파괴나 부정이라는 ‘결과’ 자체보다는 그런 목적에 이르는 ‘과정’에 두어진다. 요컨대 마르크스가 속해 있던 서양의 지적 전통 속에서 비판이란, 무엇보다도, 대상에 대한 면밀한 분석과 총체적 종합이라는 사고과정을 통해 대상에 대한 온전한 이해를 확보하는 것을 의미했던 것이다. 곧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 비판’이란, 첫째로 근대사회의 경제적 운동법칙에 관한 근본적이고 면밀한 이해를 꾀하고, 둘째로 이러한 이해를 달성하지 못한 당대의 경제학 논의들에 대한 통렬한 일격을 날리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 그런데 이때 마르크스가 발견해낸 ‘근대사회의 경제적 운동법칙’이란 상이한 이해관계를 갖는 사회계급들 사이의 갈등과 투쟁에 기초해 있으므로 스스로 자신을 부정하고 나아가 파괴하는 성격을 갖는다. 즉 근대사회는 그 파괴의 싹을 그 내부에 가지고 있다.

6. 경제학의 현대적 발달과 마르크스의 비판의 유효성: 근대적인 경제학 즉 정치경제학은 대략 17세기에 중상주의라는 형태로 출범한 뒤, 아담 스미스에 의해 집대성되고(1776년), 데이비드 리카도(David Ricardo)에 의해 최상의 발전을 이룬다(1817년). 그러나 마르크스에 따르면 이후 정치경제학은 ‘속류화'(vulgarisation)의 나락으로 떨어지는데, 그가 그것의 ‘비판’에 나선 것은 바로 이런 배경에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경제학은 이후 계속해서 타락해 나가며,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경제학’은 그 (잠정적인) 최종 결과물이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가 (그 자체로 경제학의 위기이기도 한) 새로운 경제위기를 맞아 경제학을 비판하고 재구성하려고 할 때, 마르크스의 논의는 여전히 중요한 참조점이 된다.

7. 오늘날의 ‘경제학 비판’ (1) 경제학을 경제학답게: 그렇다면 우리가 오늘날 경제학을 비판한다면, 그 대체적인 모습은 어떻게 될까? 첫째, 현대의 (주류) 경제학과 달리 진정한 의미의 경제학은 ‘근대사회에 특유하게 발생하는’ 문제, 그것도 ‘경제적’ 문제에 천착해야만 한다. 1870년대의 한계혁명(marginal revolution)의 결과로 본격적으로 형성된 오늘날의 경제학은 이기심과 합리성이라는 개별경제주체의 행동동기를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리하여 모든 경제문제는 곧 그러한 주체의 합리적 선택과 행동으로 환원되는데, ‘개별주체의 합리적 선택’이란 언제 어디서나, 어떤 사안을 두고도 벌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결코 근대사회에 특유한 것도 아니고 경제적인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오늘날의 많은 경제학 비판자들이 그러하듯, 이기심이나 합리성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답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기심/합리성은 경제학이 전통적으로 이해해왔던 근대사회의 근간이기 때문이고, 그런 의미에서 그것을 부정하는 것은 경제학을 근대 이전의 단계로 되돌리는 시도에 다름 아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이기심/합리성을 어떻게 자리매김시킬 것이냐이며, 그것이 적절히 되었을 때 경제학은 ‘근대사회에 특유한 경제문제’를 제기하는 방향으로 한 걸음 더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8. 오늘날의 ‘경제학 비판’ (2) 마르크스를 발전시키기: 문제가 위와 같다면 우리가 마르크스에 주목하는 것은 더없이 적절하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정치경제(학) 비판’을 수행할 때 정치경제학이 근대사회라는 역사 특수적인 시공간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인간관계들을 규정하는 근원적인 물적 힘에 대한 것임을 그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르크스를 단순히 ‘복원’하는 것만으로는 오늘날의 세계에 대처하는 데 충분치 못하다. 기본적으로 그것은 불행히도 마르크스가 자신의 이론을 만족스러운 수준으로 완성시켜놓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가 명시적으로 남겨놓은 이론은 대체로 상당히 추상적인 차원에서 자본주의 경제의 동학의 핵심과 관련해 제시되고 있을 따름이다. 물론 이것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지만, 거기에서 멈춰서는 우리가 실제 현실에서 맞닥뜨리는 구체적인 문제들을 충분히 다룰 수 없다. 우리는 그가 염두에 두었지만 끝내 적극 고려하지는 못했던 영역으로 그의 논의를 발전시키고 구체화시켜야만 한다. 물론 이와 같은 구체화는, 마르크스 이후 벌어진 현대 자본주의의 다양한 변모와 관련해서도 행해져야만 한다.

[이 블로그에서 읽어볼 글들]

1. 자본주의 질서를 둘러싼 정당성 전쟁(http://socialandmaterial.net/?p=592)

2. 경제학이 나아갈 길(http://socialandmaterial.net/?p=599)

3. “사회” 관점의 지성사적 의의(http://socialandmaterial.net/?p=12)

4. 경제학의 ‘원리’엔 ‘경제학’이 없다(http://socialandmaterial.net/?p=1287)

5. 나꼼수와 마르크스: 우리의 ‘가치이론’은 당신의 ‘말빨’보다 강하다
(http://socialandmaterial.net/?p=1474)

[알림2] 정치경제학 강좌

아래 글에서도 언급된대로, 이번 겨울중에 정치경제학 강좌도 하나 더 하게 되었습니다. 진보신당 청년학생위원회에서 준비한 것입니다. 좋은 자리를 제게 허락해주셔서 거듭 고맙습니다. 웹자보가 여기 있습니다.

이 웹자보, 개인적으로 매우 맘에 듭니다. 만드신 분께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더구나 저로서는 제가 공동으로 운영하는 이 블로그의 부제목을 저렇게 큼지막하게 넣어주셔서 더더욱 기쁩니다(어.. 그러고 보니, 현재 이 블로그 포맷에서는 부제목이 안 뜨네요;;).

이 강좌는 1월5일(목)부터 시작입니다. 날짜가 얼마 남지 않았군요. 매주 1회씩 6주간 이뤄지니까, 아래 글에서 먼저 소개한 “읽기” 강좌와 약간은 중첩되겠군요. 저 나름대로는 이 둘을 상호보완적으로 운영하려고 합니다. 즉 보시다시피… 아래 자캠 강좌는 말그대로 {자본론}을 현장에서 함께 읽는 것이고, 지금 청학위 강좌는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 체계 전반을 개괄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전자보다는 후자가 좀 더 완결성은 있다고 해야겠죠.

지금 소개하는 청학위 강좌는 원래 지난 여름에 자캠에서 했던 것(링크)과 많이 다르진 않을 것입니다. 차이가 있다면 크게 두 가지인데… 하나는 좀 더 압축적이라는 점(지난 여름 자캠 강좌는 8회였죠), 그리고 다른 하나는 마르크스의 가치이론의 현대적 발전/적용의 문제를 좀 더 강조할 것이라는 점. 하지만 시간의 제약 때문에 특히 후자의 목표가 얼마나 실현될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그런 의도로 진행할 것입니다.

하여튼.. 관심있는 분들의 많은 참여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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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올렸다가… 저의 음악 포스팅을 싫어하시는 kosaja님을 위해 노래 한 곡 붙임.;;;

어저께부터 계속 흥얼거리고 있는 곡… 바로 The House of the Rising Sun!

물론, 여러분들이 알고 계시는 바로 그 매우 유명한 노래다. 미국 민요(?)라고 할 수 있을텐데, 정작 이게 가장 크게 히트한 것은 영국 밴드인 The Animals의 연주와 노래를 통해서였던 게 아닌가 싶다(링크–> 아.. 곡의 내용대로, 정말 인생을 잘못 살(았을)것 같은 Eric Burdon의 저 반항적인 눈빛을 보라). 그러나 오래된 곡인 만큼 많은 음악인들이 불러제꼈는데… 내가 지금 소개하는 것은 블루스/록 기타리스트인 Leslie West의 버전이다. 바로 그의 1975년도 앨범 The Great Fatsby에 들어있다.

이건 그러니까… The Animals의 것과 더불어 내가 가장 좋아하는 버전이다. 들으면 대번에 알겠지만, 이런 멋진 연주는 Dana Valery의 보컬이 곁들여지지 않았으면 현재와 같이 완성되지 못했을 것… 멋지다 정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