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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라덴의 죽음과 미국, 파키스탄

빈 라덴의 죽음에 대해 여기저기 기웃거리면서, 이렇게 저렇게 생각해봤다.

– 오사마 빈 라덴의 죽음. 그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가 사살되고 얼마 후, “미군에 사살된 것이 빈 라덴 최후의 승리”라는 제목의 기사를 봤다. 그때는 이 기사가 참 좋다고 생각했다(링크: 프레시안). 분명 좋은 포인트를 잡아내고 있는데, 어딘지 좀 부족했다.

– 아무래도 그를 죽인 주체, 즉 미국이라는 국가는 그를 죽임으로써 무엇을 노렸던 것인가를 먼저 물어야 할 것이다. 오사마 빈 라덴을 만약 누군가가 죽인다면, 그게 누구여야 할까? 음, 주관식은 너무 뜬금없나. 객관식으로… 오바마와 부시 중에서 누가 죽이는 게 더 ‘자연스러워’ 보일까? 아마도 열명에 아홉은 부시라고 대답할 것. 따라서 이번 ‘작전’을 두고, (우리로 치면 노무현이 집권하는 동안 노동자들에게 보인 태도와 비슷하게) 오바마의 (부시와 별반 다를 게 없는) ‘진짜 정체’가 드러났다고 흥분하는 것도 지나친 게 아니다(링크: 레프트21).

– 뭐, 좋다. 오바마 행정부의 제국주의적 본질, 다 좋다. 근데, 왜 ‘굳이’ 죽였을까? 부시도 후세인을 죽이지 않았는데. 죽이지 않고 재판에 부쳤는데… 처음엔 이런 의문이 꽤 컸는데, 생각해보니까, 일단 빈 라덴의 은신처를 덮치는 작전을 수행하기로 한 이상 죽이는 것은 불가피했던 게 아닐까 싶다. 이렇게 보면, ‘생포할 수 있었는데, 왜 죽였느냐’는 일종의 ‘생트집’ 같아 보인다. (생각해보면, 빈 라덴이 생포당하는 것은, 미국으로서도 골치아픈 일이겠지만, 알카에다 입장에서도 그다지 좋을 게 없어 보인다. 만약 그를 미군이 생포하려 했다면, 다른 조직원이나 빈 라덴 자신이 이를테면 그 은신처를 폭파시켜 자폭하지 않았을까.)

– 따라서 문제는 다시: 왜 그럼 미국은 빈 라덴의 은신처를 덮치는 작전을 수행했는가. 아무래도 여기서 미국 내부 사정을 떼놓고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돈’에 대한 고려가 단연 핵심. 예산 문제인데, 2007년 이후 국민경제 전체적으로는 물론이고 특히 국가재정이 심각한 위기에 처했음이 드러나고 있는 미국 국가로서는 국방비 감축 없이는 현재의 위기를 타개할 수 없겠다는 판단이 크게 작용했을 것. 마침 아프간/파키스탄에서 발을 어느정도 빼고 싶었는데, 이번 빈 라덴의 사살은 그것을 위한 좋은 구실이 되었을 게다. “자, 이제, 테러의 원흉이 죽었으니, 우리 이제 발을 (조금은) 빼자!” (링크: 레프트21)

– 그런데 재밌는 건, 이렇게 생각하기 시작하면, 오바마가 아주 그냥 ‘현자’로 보이기도 한다는 점(링크: 프레시안). 그리고 이 링크된 이 기사에서도 시사되듯이, 아프간/파키스탄/이라크 주둔군 감축에 대한 현재의 논란은 곧, 미국의 전반적인 군사전략의 변화 필요성에 대한 목소리까지도 키우고 있는 실정임(링크: POLITICO).

– 다른 한편, 현재의 사태를 파키스탄의 입장에서 보는 것도 중요하다. 여기서 우리는 파키스탄 민중과 정권을 잡고 있는 세력을 구분해야 함. 기본적으로 파키스탄의 집권세력들에게 빈 라덴은 엄청난 ‘경제적’ 의미를 갖는다.

[출처: 여기 (근데 이렇게 pdf 파일의 일부를 내맘대로 복사해 붙여도 되나 몰라;;)]

보다시피, 파키스탄은 미국으로부터 현재 엄청난 원조를 받고 있는데, 9/11 이전에는 한동안 원조가 끊기다시피 한 상태였다는 것. 그 전에도 한동안 원조가 꽤 있었다는 것도 재밌다. 바로 구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과 관련이 없다고 할 수는 없을 것. 말하자면, 파키스탄의 권력자들 입장에서는, 자기들 지역을 소란스럽게 만드는 것이 그들 자신에게는 엄청난 이익을 챙길 수 있는 기회를 준다는 것. 이쯤 되면, 9/11 직후 파키스탄 입장에선 빈 라덴한테 “와우~ 여기 은신처가 있습니다. 어서옵쇼!”라고 하는 게 합리적인 게 아니었을까? ㅎㅎ (링크: 프레시안) 결국 미국과 파키스탄 사이에서 현재 벌어지고 있는 줄다리기는 이런 관점에서 봐야 한다(링크: 프레시안).

– 여기서 다시, 그런 집권세력들의 이해관계가 해당 지역의 민중들의 이해관계와 얼마나 배치되는가가 여실히 드러난다. 오히려 이 집권세력들은, 어떤 면에서는 그와 반대편에 서있는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과 짝짝꿍이 맞아, 실체도 불분명한 종교적 ‘대의’와 관련된 거창한 레토릭이나 민족주의적 감정 등을 민중들 사이에 만발하도록 많은 역량을 쏟아붓고 있는 것.

– 이런 상황은 서방의 ‘제국주의’적일 뿐 아니라 ‘오리엔탈리즘’적인 언론의 먹잇감이 되기가 당연히 매우 쉽다. 이런 데서는, 평소 고상한 논조를 자랑하는 The Economist도 예외가 아니다(링크: The Economist). 하… 그러니까 니들 눈에는 파키스탄 사람들은 음모이론에나 휘둘리는 덜떨어지고 한심한 존재로 보인다는 거잖아!!!

– 여기까지 읽었다면, 대충 빈 라덴, 미국, 파키스탄과 관련해서 지금 돌아가는 상황이 어느 정도는 이해되리라 봄. :) 어쨌거나… 이제 얼마 있으면 알라스카에서 빈 라덴 봤다는 사람도 생기겠구만. 즉 그도 이제, Elvis Presley나 Jimmy Hoffa 급의 ‘레전드’가 되는 것도 시간문제겠다 ㅋ (링크)

[코멘트] ‘혁신적 이론이 혁신적 복지국가를 만든다'(프레시안)

<프레시안>에 오늘 아침에 난 기사, ‘복지국가SOCIETY’에서 낸 ‘혁신적 이론이 혁신적 복지국가를 만든다’를 읽었다[기사 링크]. 몇 가지 감상.

1. 워낙에 잘 모르는 내용들이 있어서, 일단 이것저것 잡다한 것들을 많이 배웠다.

2. 글쓴이의 성향은 무엇인가? 언뜻 봐서는 ‘사회민주주의자’인 것 같지만 잘 보면 유독 ‘스웨덴식’ 사회민주주의에만 호의적인 것 같다. 무슨 말이냐면, 글쓴이는 스웨덴식 사회민주주의를 옹호하면서, 이를 구공산주의하고만 대비시키는 것이 아니라 카우츠키가 이끌던 독일식 모델과도 대비시킨다. 구공산주의야 망했다 쳐도, 독일이 망했는가? 이런 대비가 대체 무슨 소용인가.

3. 구공산주의에 비판적이라면 당연히 그 뿌리인 레닌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어야 할텐데, 기사의 제목은 또 레닌 스타일이다. 실제로 글도 레닌의 언급을 인용하는 것으로 시작하고 있다. 이게 뭔가? 뭐 그래봐야 일부이겠지만… ‘사회민주주의자’를 자처하는 이들 중에 ‘빨갱이’는 싫어하면서도 ‘레닌’은 숭배하는 이들이 좀 있는 것 같다. 이해가 안 가는 바는 아니지만, 하여튼 그런 이들이 ‘굳이’ 자신의 분열상을 드러내는 것은 재밌다.

4. 내가 하는 일이 하는 일인지라, 글쓴이의 마르크스에 대한 언급을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그의 다음 언급은 좀 재미있을 뿐만 아니라, 왜 지금과 같은 글에 이런 언급이 들어가야 하는지 모르겠다. 글쓴이 나름 뭔가 ‘심오함’을 담아내고자 했던 것 같은데, 내겐 그저 그렇고 그런 흔해빠진 잘못된 해석들 중 하나로 보인다.

“그런데 이러한 칼레비의 마르크스 해석은 현대적으로 해석할 때, 탁월한 분석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맑스의 주저 <자본>은 상품 ⇒ 화폐 ⇒ 자본의 순서로 전개되는데 이에 대해 각각 상품관계, 화폐관계, 자본관계로 표현된다. 상품관계와 화폐관계는 ‘아직’ 자본이 아닌 것이다. 자본관계의 개념적 성립은 ‘노동력의 구매’가 이뤄지는 시점인데, 이것은 마르크스 자신이 상품과 화폐가 아닌, ‘지배관계’를 중심으로 자본주의를 해석했기 때문이다.”

5. 글쓴이는 때에 따라서는 정당들 사이의 연합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물론 ‘스웨덴’에서 그렇게 해서 성공했기 때문이란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연합 자체가 아니라 그런 연합이 이뤄지는 ‘배경’ 아닐까? 단적으로 말해, 스웨덴에서도 정당들이 현재의 우리나라에서처럼 계급 대표성이 없었는가? 뒤집어 말해, 현재의 우리나라 정당들–특히 민주당–과 같이 대표성 없는 정당(민주당은 이제 ‘지역’ 대표성도 매우 약해 보인다)과의 연합이란 그저 정치권력 획득을 위한 ‘야합’에 다름 아닌 게 아닐까?

6.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머리 아프게 잘 알지도 못하는 ‘모델’만 자꾸 가져오지 말고, 그냥 말하는 게 낫지 않을까 싶다. 복지가 필요하면 복지가 필요하다고 말하고, 나아가 어떻게 그 복지를 실현할지를 말하면 그만이다. 남의 나라 경험은 참조만 해도 그만이다. 아, 하지만 이 말은 이 글에 대해 하는 비판이 아니라, 전체적인 논의 지형을 두고 하는 말이다.

7. 과연 우리에게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 다시 말해, 특히 위 사항과 관련해서, 어느 특정한 나라의 복지국가 경험을 도그마화한 ‘모델’들을 여기저기서 강조하는데, 정작 우리는 ‘복지’가 뭔지, 좀 더 근본적으로는 ‘사회’가 뭔지, 그것을 구성하는 주요 세력들 간의 관계가 어떻게 짜여져 있는지, 그리고 그런 것들이 현대사회에서 취하는 ‘특수성’이 무엇이며, 그 안에서 그런 것들이 제기하는 ‘특수한 문제들’이 무엇인지 등등에 관한 ‘근본적인’ 사고를 결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8. 하여간에 (독일식이든 스웨덴식이든) ‘사회민주주의’를 ‘공산주의’와 대비시킬 때는, 단순히 그 둘이 오늘날 어떻게 귀결되었는지만 봐서는 안 된다. 더구나 전자의 ‘성공’을 후자의 ‘실패’와 대비시키는 것은 정말 저열하기 짝이 없는 짓이다. 아니, 이는 저열할 뿐만 아니라 무지의 소치일 따름이다. 역사적으로, ‘사회민주주의’의 성공은 ‘공산주의’의 실패에 많은 빚을 지고 있다. 글쓴이가 강조하는 바와 같은 ‘연합’의 성공 이면에는, 그들이 연합을 통해 왕따시킬 성가신 ‘공통의 적’ 즉 ‘공산주의’가 있었다는 사정이 있다.

저 부르주아 돼지들의 온갖 공격을 ‘공산주의’가 받아내지 않았다면 ‘사회민주주의’의 성공을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바로 그런 점에서, (‘공산주의’와 대비되는 의미에서의) ‘사회민주주의’의 진정한 가치는 공산주의가 사라진 다음에야, 즉 시기적으로는 1990년대 이후에야 나타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럴 때에도, 즉 ‘1990년대 이후의 사회민주주의’란, ‘공산주의’의 (‘폐허’는 물론) 온갖 ‘성과들’ 위에 세워져 있는 것임을 잊으면 안 된다. 이런 것들을 무시한 채 행해지는 ‘사회민주주의’ 찬양은 공허하기 짝이 없다.

강신준 교수의 <자본> 완역출판에 부쳐

0. 여기 두 개의 미디어 기사가 있다.

[1] 왜 오늘 다시 ‘자본’을 들춰야 할까요 (<한겨레>, 2010년 9월 3일)
[2] ‘대박’ 꿈에 취해 벼랑 끝에 선 개미들아, ‘무기’를 들자! (<프레시안>, 2010년 9월 3일)
(이하에서 이 둘은 각각 [1]과 [2]로 부른다.)

두 기사가 넷상에 뜬 것이 9월3일이니, 벌써 2주나 지났다. 기사들이 올라왔을 때는 일이 너무 많고 바빠서 읽지도 못하고 있다가 며칠 전에서야 대충 훑어볼 수 있었다.

재밌는 것은, 정작 나는 기사를 보지도 못하고 있는데, 어디선가 내 과거 글들(1 이것, 2 저것)이 강교수의 『자본』 완역과 이에 뒤따른 그의 인터뷰 기사들과 엮여 링크가 되어 많이 읽혔다는 사실이다. 나야 고맙고 영광스러운 일이지만, 동시에, 그런 글들을 과거에 쓴 이상, 이번 완역 및 인터뷰에 대해서도 간단한 소회를 밝혀야 한다는 일종의 “의무감”도 드는 게 사실이다. 그래서 이 포스트를 쓴다.

혹, 어떤 이들은, 이렇게 비공식적인 블로그에 뒷담화 식으로 까대지 말고 좀 더 공식적으로 대응해보라고 할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너무 뭐라 마시길. 안 그래도, 조만간에 그럴 기회가 있을 것이다. 그러니 이 글은, 좀 더 엄밀하게 작성될 이후 글을 위한 서곡이자 예행연습이기도 하다. :)

1. 강교수의 (심오한) 깨달음

일단 강신준 교수께 존경과 감사의 뜻을 표하고 싶다. 하지만 이 얘긴, 여기서 그만 둔다. 어차피 나의 이런 ‘뜻’에 대해선 아무도 관심이 없을 테니까.

이번 기사와 인터뷰. 한마디로 이건, 무지와 오해, 억측과 아집의 종합선물세트다. 그나마 건질 거라고는, 장장 23년에 걸친 강교수의 “『자본』 번역의 오디세이”라고 할만한 “뒷이야기”뿐이다. 그마저도, 강금실도 한물 간 이제는, 그다지 재밌지도 않다.

위 기사와 인터뷰를 찾기 위해 google로 검색을 해보니 많은 이들이 강교수의 집념과 의지, 진심어린 노력에 감동한 모양이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대목에서, “감동”은 극에 달했을 줄로 본다:

초심을 버리지 않고, 시류에 흔들리지 않고 마르크스를 연구하다 보면 언젠가는 광맥에 닿는다. 내가 그렇다. 20년 동안 동아대학교에서 마르크스를 강의하면서 <자본>을 읽었다. 또 해설서를 펴내느라 꼼꼼히 본 것도 여러 번이다. 그런데 한 15년이 지난 2004~5년에야 <자본>에 대한 깨달음이 오더라. ‘아, 이 책의 구조가 이렇구나.’ 그 때야 어렴풋이 감이 왔다. ([2]에서)

깨달음… 번역만 따져도 23년이고 그 “첫 만남”부터 치면 30년이 넘으니,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 그 “깨달음”과 “감”이라는 것이 얼마나 심오하고 또 뿌리 깊겠는가… 라고 사람들은 보통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이번 인터뷰와 기사만 보더라도, 그의 “깨달음”과 “감”이 어떤 종류의 것인지가 꽤 명확하게 드러난다. 그리고 그것은 “심오함” 등등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1]의 대부분의 내용이 [2]에 더 자세히 나오므로 이제부턴 거의 [2]의 인터뷰만을 참조해서 글을 진행하겠다.)

2. “지금” 『자본』 번역본이 나온 것의 의의

강교수는 1987년에 『자본』 번역에 처음 연루되어 무려 23년만에 그것을 완전한 모습으로 세상에 내놓았다. 이에 대한 소회가 남다를 터. 개인적 소회도 소회지만, 그는 이 번역의 의의를 어떻게 평가할지가 무엇보다 관심거리다.

그의 인터뷰와 기사의 내용을 종합해봤을 때 그가 이번 번역에 부여하고 있는 가장 큰 의의는 아마도 “원전번역”이라는 것이 아닐까 싶다. 이를 강조하기 위해 그는 『자본』과 같은 중요한 저작의 원전 번역본이 하나도 존재하지 않고 있는 대한민국의 학계, 나아가 지식계의 척박함을 비판한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강교수, 연세가 몇이신가? 56세라고 한다. 그리고 이번에 나온 『자본』의 완역에 무려 23년을 쏟으셨다고 한다. 사정이 이렇다면, 그는 이번에 자신의 『자본』 완역을 자랑하고 그에 의기양양해 하실 것이 아니라, 부끄러움을 느끼셔야 한다. 즉 지금까지 대한민국 학계를 척박하게 한 장본인 중 하나가 실은 당신이심을 왜 보지 못하시는가? 이번 번역, 어떤 면에선 23년 걸린 노작이라고 평가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중요한 책의 번역을 맡으신 분께서 무려 23년이나 그 책임을 방기하고 계셨다면 이는 상찬보다는 질타의 대상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지금”의 의미를 새삼 되새길 수 있다. 왜 “지금”인가? 인터뷰 내용으로 보건대 아마도 강교수는 “지금이야 말로 『자본』이 무엇보다 필요하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좀 더 명확한 대답을 내놓아야 한다. 그는, 우리가 다른 때도 아니고, 즉 지난 23년의 세월 중 다른 그 어느 때도 아니고 바로 “지금”, 2010년에 『자본』의 새로운 번역을 필요로 하는 까닭이 무엇인가를 명확히 밝힐 필요가 있다.

과연 그 사이에 우리는 『자본』이 특별히 필요로 했던 시기를 겪지 않았던가? 간단히 말해 이런 거다. 왜 강교수는 지난 1997년의 대란이 벌어졌을 때 『자본』을 완역해 내놓지 않았는가? 그때는 “제대로 된 『자본』 번역본”이 (아직은) 필요없었단 말씀이신가? 바로 이 질문에 답하지 못한다면, 그는 이번 번역이 “23년에 걸친 노력의 산물”이 아니라 “23년에 걸친 게으름과 책임방기의 산물”임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여기서 “게으름”이란 강교수가 지난 23년을 게으르게 사셨다는 뜻이 아니다. 나는 이런 것을 평가할 위치에 있지 않다).

이런 의미에서, “부족한 부분은 앞으로 계속해서 보완해 나가자고 다짐하면서 일단 책을 내놓았다”라는 강교수의 언급은, 저자나 역자가 흔히 하는 겸손의 발언이라기보단 그의 무책임함의 발로–그의 의도와 상관없이–라고 보는 게 더 타당하다. 1987년에 첫 번역본을 내놓았을 때나 할 법한 얘길 이렇게 지금까지 되뇌고 있으면 곤란하다.

3. “원전 번역”이라는 “신화”

강교수의 이번 번역이 갖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의의는 그것이 한글로 나온 “최초의 원전 완역본”이라는 데 있다. 그러나 “최초의 원전 완역본”이라는 것은, 상식적으로 봤을 때, “가장 정확한 번역”도, “가장 충실한 번역”도, “가장 학술적인 번역”도 아니다. 이런 상식과는 정반대로, 강교수는 이 모든 것이 일치한다고 보는 듯하다. 이를테면 김수행 교수의 기존 번역본을 비판하면서, 그것이 “영어 중역”이라는 것뿐만 아니라, 그것의 “충실성”과 “학술성”까지 걸고 넘어진다. 이를테면 그는, “충실성”과 관련, 다음과 같이 말한다:

독일어 원본과 영어판은 그 자체로 많이 다르다. 게다가 김수행 교수의 <자본>은 원전에 충실한 번역이 아니다. 예를 들자면, 독자의 이해를 넓히기 위해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원전의 화폐 단위를 전부 다 한국식으로 옮겨 놓았다. 독일 사람이 썼는데 ‘근’이 나오고, ‘필’이 나오고. ([2]에서)

이건 정말 쪼잔한 비판이다. 기본적으로 번역에 원문을 어느정도로 살릴 것인지는 늘 논란거리다. 원문을 살리는 것이 좋은 번역일 수도 있고, 우리 실정에 맞게 조정하는 게 좋은 번역일 수도 있다. 번역의 좋고 나쁨을 가르는 기준은 “원문 그대로” 했느냐와는 크게 관계가 없다.

그리고 김수행 교수가 화폐나 도량단위를 바꾼 것은, 사실은 노동자들을 포함해 일반 독자들이 읽기 쉽게 하기 위함이었다. 물론 이런 판단에 반대할 수는 있다. 그러나 적어도 그런 반대와 비판은, 기본적으로 그가 왜 그런 선택을 했는가에 대한 “이해”(understanding)의 바탕 위에서 행해져야 한다. 난 지금도, 김교수가 일반 독자들을 위해 화폐나 도량단위를 바꿨으며, 또 번역 과정에서 그를 가장 많이 애먹인 것 중 하나가 바로 그런 변환과정이었다는 이야기를 어딘가에서 처음으로 읽었을 때의 그 가슴 뭉클함을 간직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강교수는 “원전 번역”이라는 것을 “학술성”과 거의 동격으로 보고 있는 것도 같다. 그러나 전자는 후자를 구성하는 일부, 그것도 기본적이긴 하지만 그렇게 크지 않은 일부를 구성할 뿐이다. 이에 대해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할까? 하여튼 정확성, 충실성, 학술성 등을 평가하기 위해 우리는 별도의 기준들이 필요할 따름이다.

연구자로서 말하건대, 강교수의 이번 번역의 의의는 “최초의 원전 완역본”이라는 것이고, 또 그게 전부다. 정확성, 충실성, 학술성 등으로 보자면, 적어도 2년 전에 출판된 제1권만 놓고 본다면 김수행 교수의 기존 번역본(즉 영어 중역본)이 낫다는 게 내 판단이다. 물론 이는 상대적으로 그렇다는 얘기다. 둘 다 사실은 개선의 여지가 많다. 이 얘긴 더 길게 할 순 없다. 기본적으로는 내가 아직 이번에 나온 제2권과 제3권을 읽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제1권에 대한 내 개략적인 평가는 앞서 링크해둔 나의 기존 글들을 참조하면 된다.

4. MEW? MEGA?

강교수의 이번 번역이 “최초의 원전 완역본”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것도 그다지 정확한 표현은 아니다. 왜냐하면 오늘 우리에게 『자본』의 “원전”이라는 것이 매우 복합적인 의미를 가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서 그는 MEW와 MEGA를 구분하고 있는데, 여기에서부터 얘기를 시작해보자. 그는 2년전 출판된 『자본』 제1권의 옮긴이 글에서 전자를 대중용, 후자를 학술용이라고 구분한 바 있고, 이번 인터뷰를 보니 여전히 그런 구분을 대체로 유지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앞서 포스트들에 이어 거듭 말하지만, 이런 구분은 틀렸다. 굳이 “대중용”과 “학술용”을 구별하려 한다면, MEW와 MEGA 모두 “학술용”의 범주에 든다고 봐야 한다. 이때 영어로 치면 Penguin판과 같은 각종 문고판들, 그리고 이것과 같은 발췌판들 등이 “대중용”에 대응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대중용”과 “학술용” 따위의 구분은 중요한 게 아니다. 물론 강교수는 자신의 번역을 “대중용”으로 여길 수도 있고 “학술용”으로 여길 수도 있다. 그러나 그가 어느 쪽으로 방향을 잡든 상관없이, “번역 그 자체”는 매우 학술적인 행위임에 틀림없다. 따라서 어떤 번역자라도–특히나 강교수가 그렇게도 그 중요성과 학술적 의의를 강조하는 『자본』과 같은 경우라면 더더욱–번역을 할 때에는 원전의 “대중용” 버전과 “학술용” 버전 모두를 참조함이 타당하다. 이렇게 본다면, 무려 “2010년”에, 즉 MEGA 중에서도 『자본』과 관련된 부(제2부)가 거의 완성된 현재  새삼 번역본을 내면서, 스스로 대중용이라고 칭하는 MEW판만을 대본으로 했다는 사실을 아무런 거리낌없이 말할 수 있다는 것, 더군다나 그 과정에서 MEGA판에 대한 악의적인 왜곡까지도 서슴지않는다는 것은 참으로 뻔뻔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현재 우리에게 MEW와 MEGA가 모두 이용 가능하게 되었다는 사실은 매우 특수한 문제를 우리에게 제기한다. 즉 『자본』의 “원전”이라는 것의 의미가 매우 복잡해졌다는 것이다. 『자본』의 진정한 원전은 무엇일까? 제1권만을 대상으로 했을 때, 현재 “정본”으로 두루 간주되고 있는 독일어 제4판(1890년)일까? 아니면 마르크스가 직접 출판을 한 제1판(1867년) 또는 제2판(1873년)일까? “원전”이라는 문제를 잠시 접어둔다면, 혹시, 번역본이긴 하지만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각별하게 손을 봤던 프랑스어판(1872-75년)이나 영어판(1887년)도 그 나름의 “고유한 가치”가 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만약 우리가 제2권과 제3권까지도 고려에 넣는다면 문제는 더 복잡해진다. 과연 엥겔스의 손을 거쳐 현재 출판되고 있는 제2권과 제3권은 엄밀한 의미에서 “원전”이라고 할 수 있을까? 혹시 마르크스의 수고를 가다듬고 나아가 그 스스로 부족한 부분을 채워넣기도 할 때, 그는 마르크스의 취지와 의도를 어느 정도는 왜곡하지는 않았을까? 만약 그렇다면, 우리가 진정한 의미에서 “원전”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마르크스 자신이 직접 쓴 수고뿐은 아닐까?

바로 이런 모든 문제들, 질문들은 “원전”이라는 것이 지극히 불안정한 개념임을 암시한다. 사실은 바로 그렇기 때문에 MEGA라는 판본이–이미 MEW라는 전집이 있는데도–우리에게 필요했던 것이고, 또 사람들은 그것을 아직까지 만들고 있는 것이다. 만약 사정이 이렇다면, 이 모든 것들을 다 가지고 있는 우리는, 『자본』의 “새로운” 번역을 낸다고 했을 때, 어떤 태도로 거기에 임하는 것이 옳을까? 인터뷰 등에서 보이는 강신준 교수의 입장은 그런 면에서 얼마나 정당화될 수 있는가? 이런 질문들을 음미하다 보면 다음과 같은 문제에까지 생각이 미치지 않을 수 없다. 즉 과연 “그의” 번역은 그가 묘사하는 식대로 “시대”가 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아니면 그저 한 개인이 23년이라는 오랜 세월 동안 그 어깨 위에 지고 있었던 짐을 내려놓은 정도의 의미라고 보는 게 좀 더 아귀가 맞는 해석이 아닐까? 사실은 바로 그것이야말로, 우리 한국의 인문사회학계가 가진 한계요, 문제점임을 인정하는 태도가,  강교수에겐 안타까운 일이지만, 우리에겐 필요하지 않을까?

강교수의 번역이 완성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자본』의 원전 번역”이 여전히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신화”로만 남을 수밖에 없는 것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다.

5. “마르크스가 『자본』을 쓴 진짜 이유”?

강교수는 이번 인터뷰에서 “마르크스가 『자본』을 쓴 진짜 이유”를 강조하기도 했다. 보통 “진심”을 강조하는 것은, 그 “진심”이 왜곡된 채 알려져 있을 때 하는 일이다. 그렇다면 강신준 교수는 마르크스의 “진짜 이유”가 어떻게 왜곡된 채 알려져 있다고 보기에, 유독 그것을 강조하는 것일까? 다음 대목을 보자:

그렇다면, 마르크스가 <자본>을 쓴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자본주의 체제의 임금 노동자라면 누구나 자본주의 체제가 잘못돼 있다는 걸 알고 있는데, 왜 그는 번역을 해보면 3000쪽이나 되는 어렵고 방대한 책을 썼을까? 단지본주의를 비판하기 위해서 이런 책을 썼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2]에서. 나의 강조)

간단히 말하면 다음과 같은 스토리다: (1) 흔히들 마르크스가 “자본주의를 비판하기 위해” 『자본』을 썼다고 알고 있다. (2) 그러나 자본주의 “이후에 등장할 사회, 즉 자본주의 이후의 새로운 사회의 모습”을 그리는 것이야말로 『자본』에서 마르크스가 꾀했던 진정한 기획이었다. (3)  이런 『자본』의 진정한 의의를 제대로 읽어낸 사람은 대한민국에 “한 다섯 명 정도”밖에 안 된다. (4) 대한민국의 진보의 수준이 낮은 것도 그래서다. 대충 위와 같은 생각에 입각해서, 강교수는 크게 “생산”과 “소비”라는 두 가지 측면에서 “마르크스가 꿈꿨던 사회”의 개요를 묘사하기도 한다.

글쎄… 위 항목들 중 (2)~(4)에 대해서는 너무 대책없는 얘기들이라서 뭐라고 코멘트를 해야 할지 모르겠다. (1)에서 시작해보자. 기본적으로 『자본』은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게 아니다. 그것은 그 부제(“정치경제학 비판”)에서 명명백백하게 드러나듯이 자본주의에 대한 여러 부르주아적 및 사회주의적 이론들을 비판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사실 『자본』의 의의가 “자본주의 현실 비판”에 있느냐 “자본주의 이론 비판”에 있느냐는 하나의 논쟁거리이기도 했다. 그러나 좀 더 성숙된 논자라면 둘이 어느 선에서는 일치하는 것임을 알아볼 것이다(이를테면 국내에선 곽노완 교수의 글 참조. 다만 나는 그의 논지에 100% 동의하진 않는다).

그것이 “이론 비판”이든 “현실 비판”이든 간에… 강교수에겐 그것이 “단지”라는 수식어를 동반할 정도로 하찮은 것인지 몰라도, 적어도 마르크스에겐 그렇지 않았다. 사실 마르크스의 “비판” 개념이 정확하게 (“현실”이 아닌) “이론”을 겨냥하게 된 것은, 그의 지적 발달이 어느 정도 수준에 이른 다음의 일이며, 『자본』에서는 거의 일관되게 “이론 비판”으로 의식적으로 쓰이게 된다. 그리고 마르크스는 바로 그 자본주의의 이론 또는 현실을 제대로 “비판”하는 것이 보기보다 쉽지 않고 많은 지적 노력을 필요로 하는 일임을 시간이 가면 갈수록 더 절실하게 깨닫게 된다. 그것이 바로 그의 『자본』이 그토록 오랜 세월에 걸친 각고의 노력을 요구했던 까닭이다.

어쨌거나 “자본주의의 이론 비판”을 위한 책에다가 자본주의 이후의 새로운 사회의 모습들을 적극적으로 그려놓는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따라서 그런 모습들이 『자본』에 없다고 해서 우리는 놀랄 필요도 없다. 이런 의미에서, (2)번 이후의 이야기들은 말이 안 된다. 우리가 “자본주의 이후의 새로운 사회의 모습을 그리는 것”이 마르크스의 “일생일대의 기획”이었다고는 얘기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강교수에겐 불행하게도, 『자본』은 그런 기획을 직접적으로 실현시키기 위한 저작은 아니다. 따라서 (3), 즉 강교수가 말하는 바와 같은 “진정한 의의”를 제대로 읽어낸 사람들이 대한민국에 “한 다섯 명 정도”뿐이라고 해도, 그것은 결코 놀랄 일이 아니다!! 끝으로 (4): 나도 강교수와 마찬가지로 대한민국의 진보의 수준이 그다지 높다고 보진 않지만, 그 까닭이 적어도 진보에 속하는 사람들이 『자본』을 안 읽어서라고 생각지는 않는다.

생산과 소비를 중심으로 간략하게 펼쳐놓은, 강교수가 이해한 “마르크스의 새로운 사회의 상”에 대해선 별도의 언급을 생략하련다.

6. 마르크스의 “이론”에 대한 오해

이상과 같이 강신준 교수는 『자본』에서 마르크스의 “의도”에 대해서 심각한 오해를 하고 있는데, 그는 마르크스의 “이론”에 대해서도 그 이상의 오해를 하고 있다. 어떤 면에서 그것은 “오해”라기보단 “얕은 이해”라고 불러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 정도는 정말이지 내가 다 아찔하고 민망할 정도다. 예컨대 강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런데 노동자가 그런 자본가 사이의 경쟁에 참여해 돈을 벌 수 있는 확률이 얼마나 될까? 마르크스가 <자본> 3권에서 개별 자본가가 자본가 사이의 경쟁에서 이길 수 있는 확률은 지배할 수 있는 자본의 크기에 비례한다고 써놓았다. 워런 버핏이나 조지 소로스가 대자본을 이용해서 버는 돈과 이른바 ‘개미’가 버는 돈은 비교할 수가 없다. ([2]에서. 나의 강조)

위 대목은 강교수의 『자본』 이해의 실상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구절이다. 특히 밑줄친 부분을 보라.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될 뿐만 아니라, 마르크스는 제3권에서 위와 같은 진술을 한 적이 없다. 일단 위 밑줄 부분은 말이 안 된다. 강교수가 예로 드는 대로, “개미”와 “소로스”가 경쟁을 한다는 게 무슨 의미이며, 더구나 전자가 후자를 그 경쟁에서 “이긴다”는 것은 또 무슨 뜻인가? 마르크스는 『자본』 제3권에서는 물론이고 그 어디에서도 이런 말도 안 되는 방식으로 “경쟁”에 대해 논한 적이 없다. 모종의 짐작이 가는 바가 없지는 않지만, 왜 저런 말도 안 되는 내용을 무슨 대단한 것인 양 풀어놓는지 알 수가 없다. 정녕 오늘날 금융투기판에서 “개미”들의 운명을, 그것도 강교수가 하듯이 매우 비참하게 캐리커처하기 위해 우리가 “굳이” 마르크스에 기대야 하는 걸까?

이번에 제3권을 번역해서인지, 강교수는 특히 거기 등장하는 논의들에 크게 매혹된 듯 싶다. 이를테면:

<자본> 3권을 읽다보면 깜짝 놀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예를 들자면, 현대 금융의 특징을 얘기할 때 빼놓지 않고 언급되는 게 ‘레버리지(leverage, 지렛대) 효과’다. 개인이나 기업이 차입금 등 타인의 자본을 지렛대처럼 이용해 이익을 올리려다 결국은 금융 위기와 같은 일이 발생한다.

그런데 바로 이 레버리지 효과가 <자본> 3권에 등장한다. 마르크스는 이 레버리지 효과가 결국에는 공황을 낳는 중요한 원인이라고 보았다. 얼마나 놀라운가? 140년 전의 마르크스가 오늘날 금융 위기의 본질을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다. ([2]에서)

참으로 딱하다. 저렇게 따지면, 18세기 금융투기로 유명한 스코틀랜드인 John Law는 금융사기의 현대적인 첨단기법으로 무장한, 거의 뭐 “Back to the Future”라고 해도 되겠다. 혹시 어떤 독자들은, 대중적인 인터뷰니까 강교수가 좀 오바한 거 아니겠냐며 각별한 아량을 그에게 베풀려고 할지도 모르겠다. 글쎄, 과연 그럴까? 다음을 보자.

<자본>은 앞부분이 어렵다. [. . . . . .] 이렇게 1권도 앞이 아니라 뒤부터 읽다 보면 <자본>에 익숙해질 수 있다.

2권은 경제학 공부를 하지 않은 독자라면 따라가기가 쉽지 않다. 반면에 아까 언급했듯이 자본주의 이후의 새로운 사회를 고민할 때 자극이 될 만한 부분이 많은 3권은 읽어볼 만하다. 특히 공황이 일어나는 메커니즘을 설명한 부분이 중요한데, 한국 사람들은 요즘 화폐 금융 쪽에 상식이 많아서 어려움 없이 읽을 수 있을 것이다.

3권을 읽다 보면 재테크에 눈을 뜰 수도 있다. 나 같으면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 같은 책을 읽을 게 아니라 자본주의의 핵심 비밀을 파헤친 <자본>을 읽겠다. ([2]에서)

“재테크” 부분은 농담이라고 치더라도, (제2권이 어려운 반면) 제3권을 두고 “어려움 없이 읽을 수 있을 것“이라고 하다니,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하긴, 제3권에서 “레버리지” 운운이나 하며 그 이상의 얘길 하지 않으니, 그것이 쉽다고 보는 것도 무리가 아닐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강교수가 직접 밝히고 있는, 제3권이 쉽다고 하는 근거가 무엇인지도 눈여겨볼만 하다. 그는 “한국 사람들은 요즘 화폐 금융 쪽에 상식이 많아서 어려움 없이 읽을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마르크스의 『자본』(제3권)은, 바로 그와 같은 주류 경제학이 주입한 “상식”을 뒤엎고 거기 도전하는, 바로 “노동가치이론”에 근거를 둔 전혀 다른 금융이론을 펼치고 있는 저작이다.

그밖에도 강교수는, (1) 맨큐(N. Gregory Mankiw)나 스티글리츠(Joseph Stiglitz)와 같은 경제학자들이 “생산”을 경시하고 “교환(시장)”을 강조하기 때문에 공황을 제대로 볼 수 없다고 비판하면서, “마르크스가 정확히 지적했듯이 공황은 생산 영역에서 시작된다”라는 사실과 다른 단정적 언급을 내놓기도 했고, (2) “소비”와 “분배”를 혼동하기도 했다.

그리고 “<자본>을 읽을 때 같이 보면 좋을 만한 책이 또 있는가?”라는 기자의 질문에 엉뚱하게도 “폴 말러 스위지의 <자본주의 발전의 이론>”이라고 대답함으로써, “나 지난 23년 동안 『자본』과 관련된 공부 하나도 안 했어요”라는 말을 남다르게 표현하기도 했다.

7. 맺음말

대중미디어를 상대로 한 인터뷰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상에서 지적한 모든 사항들을 조금은 관대하게 대할 수도 있겠지만, 이것들은 『자본』에 대한, 그리고 나아가 마르크스의 이론 전반에 대한 강교수의 이해가 어떠한지를 보여주는 일종의 징후들로 읽을 수 있다는 게 내 판단이다. 그리고 그것들이 무엇의 징후인지는, 앞으로 좀 더 면밀하게 강교수의 번역을 검토하는 과정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날 것이다(이미 제1권에서는 그것이 어느 정도 드러났다).

바로 그랬을 때, 이 글의 1절에서 인용한 강교수의 “깨달음” 내지는 “감”이 어떤 것인지도 이 엉성한 포스트에서 나타난 것보다 훨씬 더 명확하게 나타날 것이고, 더불어 이런 사항들에 대한 판단들이 서로 인정하고 토론해야 할 “견해”의 문제라기보다는 그 옳고 그름이 꽤 명백히 갈리는 원문에 대한 “이해”의 문제임도 밝혀질 것이다. 그리고 그런 과정에서, 『자본』을 둘러싼 논의도 한걸음 더 진전할 수 있으리라고 나는 믿는다.

[이거 하나만 읽어봐] 검사와 스폰서

한상희, ‘검사와 스폰서’ 그리고 거짓말의 발명, <프레시안>, 2010년 6월 11일.

위 글에서 인용되고 있는 영화 <거짓말의 발명>을 보지 않아 위 글을 100% 즐기기엔 무리가 있었지만, 하여튼 이번 ‘검사와 스폰서’ 문제를 매우 잘 분석하고 있다. 이 문제에 대한 엄청나게 많은 글들의 홍수 속에서 허우적대지 마시고, 위 글 하나만 읽어보시면 될 것임. ㅎㅎ

1. 한 교수가 짚는 이번 사건의 ‘본질’은 다음과 같다.


실제 이 사건의 본질은 두 가지다. 미시적 차원 즉, 검사 개인의 비리와 관련하여서는 스폰서로부터 받은 향응이나 현금들이 뇌물수수에 해당하는 것인지 그리고 성접대의 문제는 성매매의 범죄를 구성하는 것인지의 문제가 그것이다. 부산지검장이나 대검 감찰부장의 경우에는 이 수뢰죄와 성매매죄 외에 직무유기 내지는 직권남용의 혐의가 더 추가된다. 거시적 차원에서는 이런 스폰서문화가 검찰의 조직에 너무도 깊이 뿌리 박혀 있어 더 이상 범법이라든가 혹은 불법이라는 의식 조차도 없어질 만큼 검찰의 관행 내지는 아비투스로 고착되었는가, 그리고 만약 그렇다면 그 관행의 본질은 무엇이며, 그 치유를 위한 처방은 어떠해야 하는가라는 점이다.


본질을 위와 같이 본다면, 이번 조사위원회의 발표는 사태의 본질을 한참 벗어났다는 것. 오히려 이번 발표는, 스폰서 정씨의 고발에 대한 반박으로 일관하고 있다는 것.

2. 조사 결과가 아무리 실망스럽더라도, 이번 일이 좀 더 거시적인 차원에서 갖는 의의가 있을 터. 그것은 무엇인가?

하지만, 우리 검찰이 명심하여야 할 일이 있다. 과거 조폐공사사건이 터지고 민간인경영진단보고서에서 검찰의 문제점이 드러났을 때에는 사법개혁추진위원회라는 방편을 통해 법원개혁을 맞물고 들어감으로써 그 격랑을 버텨나갈 수 있었다. 참여정부 때에는 평검사의 저항을 타고 검찰개혁의 파고를 넘어갔다. 이번의 파동은 검찰 역사상 최초라고 하는 외부의 진상규명위원회라는 방파제를 둘러 피해나가고 있다. 하지만, 이런 역사 진행의 과정을 가만히 살펴보면 조금씩 조금씩 힘든 싸움이 되고 있음을 느끼게 될 것이다. 1999년의 사법개혁과정은 국민적 관심이 거의 없는 상황에서 새 정권의 개혁열정만 피해 나가면 충분했었다. 하지만, 참여정부 때의 검찰개혁파동은 법원과 대립각을 세우는 한편으로 TV공개토론이라는 국면까지도 겪어야 했다. 이번은 더욱 힘겹다. 속이야 어떻든 겉으로는 민간기구인 진상규명위원회라는 외피를 둘러야 했을 뿐 아니라, 격분하는 국민감정들을 어떻게든 무마하여야 한다는 험난한 고비는 아직 채 넘기지도 못 하고 있다. 그리고 그 다음은?


물론 그렇다고, ‘역사의 점진적인 발전’만 믿고, 조사 결과에는 냉소하자는 것은 아니고..

(김상봉 교수의) 삼성 불매운동

많은 이들이 ‘생활 진보’를 강조한다. 좋은 말이지만, 이런 주장이 ‘총체성을 포기한 구체성’이라면 나는 동의할 수 없다. 현실 속의 구체적인 악(惡)과 맞설 수 없는 논리이기 때문이다. 악은 구체적으로 발현되지만, 뿌리는 총체적이다. 따라서 총체성을 포기해서는 이런 악과 맞설 수 없다. 그리고 악과 싸우지 않는 진보는 결국 보수에게 전용되기 마련이다. 물론, 총체성에 대한 집착이 구체적 현실을 외면하는 핑계가 돼서도 곤란하다. (김상봉, 《프레시안》 인터뷰 중에서.)

원래는 제목만 보고서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지나쳤는데, 며칠전 친구가 좋다고 소개해줘서 제대로 한번 읽어봤다. 과연 비슷한 성격의 다른 글들과 차별점이 보인다. 마침 그가 지난 3월에 쓴 삼성불매운동을 제안한 글도 함께 봤다. (미리 밝혀두지만, 아래 내용은 김상봉 교수의 입장에 대한 상당한 공감 위에서 작성된 것이다. 그리고 아래 글을 읽기 전에, 링크된 그의 글들을 미리 보는 것이 좋다.)

지금 당장 ‘삼성 불매 운동’을 제안합니다! (《프레시안》, 2010년 3월 10일)

1.기본적으로 위 글과 인터뷰는 “왜 삼성이고, 왜 불매운동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보인다. 평소 이런 문제로 고민하던 이들에게는 매우 좋은 참고자료가 될 것 같다. 첫째, 왜 ‘삼성’인가? 바꿔 말하면, 왜 다른 나쁜 기업들은 놔두고 삼성만 가지고 뭐라 하는가? 김교수의 대답은 간단하다. 삼성이 그런 ‘악’의 구조의 정점에 서 있기 때문이다. ‘학벌’에 관한 문제를 제기하면서 서울대를 집중적으로 까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둘째, 왜 ‘불매운동’인가? 여러가지 답을 내놓을 수 있겠지만, 삼성엔 ‘노조’가 없기 때문이라는 게 김교수의 설명에서 핵심인 것 같다. 즉 (법이나 기타 공식적인 수단에 의한 외부적인 제제를 가하는 것도 불가능할 뿐 아니라) 내부적으로 문제제기를 할 수 있는 메커니즘이 없단 얘기. 따라서 바깥에서 문제제기를 해줘야 하는데, 이 경우 ‘불매운동’은 효과적인 방법이 될 수 있겠다는 것. 여기까지는 별로 새로울 것 없는 얘기지만, 김교수의 주장에서 핵심은 불매운동이란 하나의 형식일 뿐이므로 그 형식에 지나치게 매달릴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아닐까 한다. 삼성을 상대로 불매운동을 하는 많은 이들이 실제로 삼성의 이윤의 상당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반도체와 같은… 일반 소비자로서는 직접적인 불매운동을 벌이기 어려운 대상이라는 사실 앞에서 절망하곤 하는데(다른 기업에 대한 불매운동에서도 마찬가지다), 김교수의 위와 같은 주장은 이런 이들에게 의미있게 다가올 것 같다.

결국 불매운동이란 하나의 형식이고 방식이므로, 우리는 그것을 수행할 때, 그것이 속한 더욱 큰 맥락을 늘 염두에 둬야 한다는 게 김교수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아니었나 싶다. 바로 맨앞의 인용문에서 보이는 바와 같은… ‘총체성’의 강조.

2. 그럼에도, 김상봉 교수의 위 글에는 동의할 수 없는 내용도 많다. 이를테면 ‘우리 안의 이건희’에 대한 부분에서 얘기를 시작해볼 수도 있겠다. 김교수는 “삼성을 비난하는 많은 이들 역시 마음 한 구석에서는 이건희 회장을 닮고 싶어 한다”라고 하는데, 난 도무지 누가 그런 희망/욕망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겠다. 물론 이 맥락에서 김교수가 말하는 ‘이건희’란 곧 ‘더러운 족벌 재벌’이다. 그러나 일반인들이 이건희로부터 닮고자 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그가 가졌다고 종종 ‘광고’되는 진취적인 비전, 넓은 시야, 깊은 안목, 추진력 등이지, 결코 그의 재벌로서의 지위가 아니다. 그와 같은 특수한 재벌로서의 위상을 닮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바보가 우리 사회에 과연 있을까(있다 해도 그것이 허황된 꿈이라는 것은 제정신인 사람이라면 다 안다)? 물론 이건희의 그와 같은 미덕들은 대체로 ‘만들어진 신화’일 것이고, 또 상당부분 그가 어쩌다가 갖게 된 ‘금권’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그러나 좋은 비전을 갖는 데 반드시 돈이 많을 필요는 없다. 바로 그래서 사람들이 ‘이건희’–그것이 실제 이건희이든, 아니면 허구의/광고된 이건희이든–를 닮으려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면, ‘이건희’라는 현상이 전혀 터무니없는 것만은 아니다. 이건희와 같은 지위가 있을 수 있는 것, 즉 “1퍼센트 수준의 지분만 갖고 삼성 그룹 안에서 황제처럼 지배하는 일”이 적어도 대한민국이 발전해온 특수한 역사적 상황들 안에서는, 그리고 그 안에서만은 이해될 수 있는 일이다. 이것을 인정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일이다. 이런 사정을, 김교수가 그러하듯, 문명사회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치부하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 이건 요새 유행하는 말로 하면 ‘서양중심적 사고’의 일단이다. (내가 알기론 김교수는 이런 사고방식에 분명 반대할 것이다.)

실은 이 대목에서 김교수는 서로 모순되는 두 가지 입장을 동시에 주장하고 있다. 한편으로 그는 ‘불매운동’에 반대하는 논리, 이건희는 나쁘지만 삼성이 나쁜 것은 아니라는 논리, 즉 “삼성과 이건희를 분리하자”는 주장을 비판하면서 “그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한지 모르겠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는, 현대사회에서 기업은 “사회적 삶이 일어나는 지평”이며 일종의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라면서, 결과적으로 삼성은 살리되 그런 중요한 기업을 턱없이 부족한 지분으로 떡주무르듯 하는 이건희는 ‘기업 민주화'(=주주자본주의!)라는 이름으로 퇴출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과연 어찌된 일인가? 그래서 이건희와 삼성을 분리하자는 얘긴가, 말자는 얘긴가? 또는 분리할 수 있다는 얘긴가, 없다는 얘긴가?

그밖에도 김교수는 쉽게 납득할 수 없는 얘길 늘어놓고 있다. 우리나라엔 공화국 전통이 없어서 기업독재가 특히 심하다거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겐 ‘저항공동체’의 전통이 있기 때문에 희망이 있다거나 하는 얘기들. 말은 그럴싸한데… 글쎄… 서양에서 어림잡아 몇백년 된 ‘전통’을 대체한다면서 고작 30년짜리 ‘전통’을 내세우는 게 내겐 그저 초라해보일 뿐이다. (이건 내가 ’80년 광주’를 무시해서 하는 얘기가 아니다. 김교수가 앞뒤가 잘 맞지 않는 얘길 하고 있단 말이다.)

3. 김교수의 모순에서 잠시 주의를 돌려, ‘기업 민주화’에 대해 좀 더 말해보자. 단적으로 말해 나는, 우리나라에서 주주자본주의적인 논리(=1주1표)로는 우리나라에서 재벌체제를 종식시킬 수 없다고 본다. 재벌체제란 우리나라의 특수한 역사적 상황에서 그 나름의 논리를 가지고 출현한 것이다. 이런 ‘역사적 산물’을,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의 역사에는 전혀 낯선 ‘1주1표’라는 논리로 (말로써 ‘논파’하는 것이 가능할지는 몰라도) 물리적으로 ‘격파’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현재의 주식배분 상태가 어떻든, 우리사회엔 삼성이란 이건희의 선조가 만든 ‘개인기업’이라는 인식이 매우 두텁게 형성되어 있다. 이건희의 1퍼센트 남짓인 현재 지분을 근거로 삼성은 이건희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비록 틀린 말은 아니지만 애석하게도 그다지 힘이 실릴만한 주장은 아니다.

이 대목에서 우린 솔직해질 필요가 있다. 삼성은 하나의 기업이고, 또 이건희의 소유물이 아니다. 하지만 그것이 자본주의 기업인 이상 누군가에 의해 ‘경영’되어야 하고, 현재 그 경영인이 (삼성이 그의 소유물이냐 여부와 관계없이) 이건희인 것이다. 삼성이 이건희가 아닌, 이사회에서 선출된 다른 ‘전문경영인’에 의해 이끌린다고 해보자. 무엇이 달라질까? 적지않은 변화가 있기야 하겠지만, 이런 기업운영의 전범인 미국의 대기업들을 떠올리면(엔론 같은 거 말이다), 여전히 다방면의 로비나 회계부정, 분별없는 투자 등이 횡행할 것은 불보듯 뻔하다. 요새 ‘금융화’에 대해 말하면서, 기업들이 ‘생산적’ 투자는 뒷전으로 하고 단기이익에 급급한 ‘금융적’ 투자에만 열을 올린다는 비판이 많이 들린다. 실은 이는 단기적인 이익(주가동향)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전문경영인 체제가 갖는 태생적 한계이기도 하다. 이런 측면(글로벌한 맥락)에서 보면, 삼성 특유의 재벌체제는 장기적인 안목을 가지고 기업의 가치 극대화에 헌신할 수 있는 기업운영방식이기도 하다. (장하준 교수 같은 이들이 재벌체제를 사실상 옹호하는 것도 대체로 이런 맥락에서다.) 이건희가 언론에 나와 하는 얘길 들어보라. 세상에, 그만한 애국자가 없다. 삼성의, 나아가 대한민국의 앞날에 대해 걱정하는 것으로 치면, 그는 대통령 이상이다. 그리고 나는 그 말이 나름 그의 ‘진심’이라고 믿는다. 무슨 말인가 하면, 재벌체제에 대한 비판은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란 얘기다. 적어도 그것을 대체할 마땅한 대안이 있어야 하는데, 그게 뭐냐는 말이다. 적어도 ‘주주자본주의’는 적절한 대안이 될 수 없다는 게 내 생각이다.

그보단 이런 상황에서는, 비록 삼성이 이건희 선조의 가족기업으로 출발했을지라도 그 발달 과정에서 국가로부터의 엄청난 특혜와 수많은 노동자/대중의 희생을 수반했음을 밝히는 것이 훨씬 더 효과적일 것이다. (다시 장하준 교수 얘길 하자면, 그는 바로 이런 역사를 근거로 해서 삼성과 같은 재벌에 압박을 가하고 또 양보를 요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장교수를 비판하는 이들은, 삼성이 그런 근거를 인정하고 양보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결국 ‘1주1표’라는 논리도 이와 같은 삼성의 역사적 발달맥락 위에서만 (그나마 그것이 가지고 있는) 제 힘을 낼 수 있다고 본다.

4. 뿐만 아니라, 바로 이것이 중요한데, 김상봉 교수는 ‘삼성엔 노조가 없다’라는 식으로 눙치고, 또 그것을 당연시 하면서 지나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조를 만드는 것, 또는 삼성에서 일하고 있는 노동자들을 조직해내는 것은 삼성에 대적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일이다. 이것이 중요한 까닭은, 삼성이라는 기업에 의해 가장 많은 피해를 보는 것이 바로 거기에서 일하고 있는 노동자들이라는 아주 단순하고도 명명백백한 사실 때문이다.

사실 불매운동이라는 것도 이런 측면에서 바라볼 수 있다. 나는 기본적으로 운동이란 ‘희생’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보는데(운동이란 타인에게/불특정 다수에게 강요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하는데, 운동이 희생이라면 어떻게 강요할 수 있겠는가), 따라서 (삼성) 불매운동의 가장 치명적인 한계는 그것이 그 운동을 수행하는 측의 적지 않은 희생을 수반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물론 불매운동이 크게 효과적인 맥락들이 있다. 이를테면 모피 불매운동 같은 거. 쉽게 말해, 있어도 그만이고 없어도 그만인 물건에 대해 불매운동을 벌이는 것은 효과적이다. 그러나 미국산 쇠고기 불매운동 같은 것은 그 효과가 적을 수밖에 없다(포인트가 뭐냐는 거다. 쇠고기를 먹지 말라는 건가, 아니면 비싼 한우를 사먹으라는 건가?! 미국산 쇠고기 불매운동론자들이 나한테 한우 사먹을 돈 줄건가?). 삼성도 마찬가지다. 핸드폰을 생각해보자. 삼성핸드폰 안 쓰면 무엇을 쓸 것인가? 엘지? 아이폰? 둘 다 웃긴다. 아예 핸드폰을 안 쓰면 모를까… 이런 식의 불매운동은 난 기만적이라 본다. (하지만 내가 거창한 ‘운동’이 아닌 ‘개인의 생활지침으로서의 불매’의 의미까지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 누구나 그런 식의 사소한 지침들을 가지고 산다. 이를테면 별로 시답잖은 이유로 롯데에서 나온 과자를 안 먹는다거나, 지하철을 타지 않는다거나 하는 것들 말이다. 나도 요새 핸드폰을 바꿀 생각을 하고 있는데, 삼성 때문에 살짝 고민이다.)

다시 말해, 일반 소비자한테야 삼성 제품을 살 것인가 말 것인가가, 다시 말해 그 나름의 입장(=소비자라는 입장)에서 삼성에 투쟁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가… 하나의 ‘선택’의 문제요, (그런 투쟁을 하기로 마음먹었을 때엔) ‘희생’의 문제이지만(바로 이런 성격 때문에, 불매운동을 일컬어 중간계급운동, 개량주의적 운동이라고 하는 거다. 즉 이런 ‘희생’을 해도 사는 데 별 지장이 없는 사람들의 운동이란 얘기다. 물론 그렇다고 불매운동이 나쁘단 건 아니다. 그 한계라는 걸 알아야 한단 얘기다), 삼성에서 일하고 있는 노동자들의 입장에서는 삼성에 투쟁하는 것이 ‘생존’의 문제요, ‘필연’의 문제다. 바로 이런 가장 중요한 사항이 김상봉 교수의 논의에는 생략되어 있는 것이다.

김교수는 다음과 같은 예를 든다.

사람들은 더 좋은 제품을 사용하고 더 좋은 서비스를 제공받는 것을 소비자의 권리라 생각한다. 이 기준에서 보자면 삼성은 소비자들이 선호할 만한 기업임이 분명하다. 제품의 품질은 물론이고 저녁 시간에 냉장고 수리를 신청했더니 두 시간 반만에 고쳐줄 정도로(<한겨레> 3월 9일자 김선주 칼럼) 완벽한 애프터서비스를 제공한다지 않는가. 하지만 그런 완벽한 서비스의 이면에 그만큼 완벽하고 비인간적인 노동 통제가 감추어져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면 우리 모두 자본주의 사회의 톱니바퀴로서 도구화되는 운명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내가 아무 불편 없이 저녁을 준비할 수 있도록 나의 냉장고를 수리하러 온 노동자가 자기 가족과의 저녁 식사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으리라는 것을 헤아릴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의 비인간성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말은 좋지만, 과연 냉장고 고장나서 미치겠는데 저런 부처님 가운데 도막 같은 생각이 날까? (내가 경험한 바로는, 선진적인 영국 시민들도 이렇게는 생각 안 한다.) 사람들이 그런 생각을 하길 기대하는 것이 과연–‘윤리적으로'(!)–옳은 것일까? 위 대목에 이어 김교수는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경제와 소비에 대한 새로운 철학과 윤리이다”라고 말하는데, 과연 이런 “새로운 철학과 윤리”를 (다름아닌) ‘소비자’에게 기대하는 것이 쉬울까, 아니면 노동자들이 투쟁을 통해 위와 같은 어처구니없이 ‘친절한’ 서비스를 끝장내는 것이 쉬울까? 후자야말로 실제로 가능할 뿐만 아니라 이제껏 역사가 보여준 방식이 아닌가?!

5. 글이 늘어지려 한다. 나아가고자 하는 바도 흐릿해지고 있다. 내가 지금 많이 피곤한 것도 한 가지 이유다. 해서 여기서 끝맺어야겠다. 하나만 덧붙이자. 맨앞에서 인용한 인터뷰의 한 대목에서 김상봉 교수는 ‘총체성’을 강조했다. 결국 내가 보기에, 삼성 불매운동과 관련해서 결부되는 총체성이란, 김교수의 의도와 상관없이, 그런 운동의 의의와 한계를 정확히 인식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특히 그 ‘한계’라는 측면을 보면, 불매운동은 적어도 노동조합 건설 등을 통한 내부 노동자들의 투쟁, 그리고 이런 투쟁에 대한 외부로부터의 지원활동에 전적으로 부차적이다. 이와 관련, 몇 주 전에 링크해둔 장대업 교수의 글을 참조할 수 있겠다(링크). 김교수도 모르지는 않겠지만, 지금 이 시간에도, 삼성의 노동자들은 (나같은 인물이 이렇게 쓰는 것이 조금 부끄럽긴 하지만) 자신의 생존을 위해, 그리고 버젓한 노조의 건설을 위해 투쟁하면서 피눈물을 흘리고 있다. 이런 사정을 고려하지 않은 채 어떻게 ‘총체성‘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굳이 ‘옳음’에 대해 말한다면, ‘소비자’라는 이름으로 ‘불매운동’을 제안하는 것이 옳은가, 아니면 노동자들의 투쟁에 연대하는 것이 옳은가? (둘 다 옳다는, 공자님 말씀 같은 소리는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