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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곤”과 “과대망상”: 알튀세르 심포지엄에 다녀와서

“알튀세르 효과”라는 제목의 심포지엄에 다녀왔다. 원래는 갈 생각이 별로 없었는데, 어쩌다 보니 가게됐고, 지금 생각해보면 가기 참 잘했다. 결국 나는 세 개의 발표를 들었고 몇몇 사람들을 만났는데,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심포지엄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여기 참조.)

개인적으로는 이번 심포지엄을 통해 많은 것들을 “배웠다”. 특히 나는 알튀세르에 대해서도 잘 모르지만 요새 유행하는 바디우나 랑시에르 등에 대해선 더 몰라서 어디 갔을 때 이런 이들에 대한 얘기가 나오면 왠지 작아지곤 했는데, 특히 제1부의 두 발표 덕분에 뭔가 좀 감이 잡히는 느낌을 갖게 됐다. 물론 그것만으로는 어디 가서 아는 척 하기엔 부족하겠지만 말이다. ㅎㅎ 하지만 이번 심포지엄에서 이와 같은 “소득”을 얻은 것은 어쩌면 내가 거의 유일하지 않을까 싶다. 그 자리에 온 사람들이라면 적어도 바디우나 랑시에르 책 두세권 쯤은 다 읽어봤을 것이기 때문이다. (-_-)

개인적인 “소득”에 대한 잡소리는 이쯤 해두고… 내가 보기에 이번 심포지엄은, 한국의 진보적 인문사회과학, 기획자인 진태원 교수의 표현을 빌자면 전세계적으로 “오늘날의 사상계를 주름잡는 여러 이론가들”을 다루는 대한민국의 인문사회과학의 분파들의 현주소를 매우 단적으로 보여줬다고 여겨진다. 그렇다면 그 “현주소”란 무엇인가? 그것은 곧 “빈곤”과 “과대망상”에 다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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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왜 별안간 지금 알튀세르(Louis Althusser)인가?”라는 문제에서 얘길 시작해보자. (심포지엄 제목에 있는 대로) “사망 20주년이니까”라는 답은 불충분하다. 솔직히 “20”이라는 숫자, 기념하기엔 좀 거시기하다. 그런데도 그것을, 더구나 그의 조국도 아닌 곳에서 기념한다는 것은 분명 설명이 필요한 사항이다. (하지만 어떤 의미에선, 프랑스가 아니기 때문에 그의 사망 20주년을 기념하기에 좀 더 자유로울 수도 있겠다.) 올해는 (프랑스 사람으로만 치더라도) 가타리(Félix Guattari) 탄생 80주년이며 카뮈(Albert Camus)와 사르트르(Jean-Paul Sartre) 사망 30주년이기도 하다. 프랑스 사람은 아니지만 트로츠키(Leon Trotsky)가 한많은 생을 본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마친지도 70주년 되는 해가 또 올해다.

가타리나 카뮈는 그렇다 쳐도, 사르트르나 트로츠키는 “좌파진영에서” 각각 30주년 및 70주년이 되는 그 죽음을 기릴만도 한데, 그다지 요란한 행사 없이 지나가는 분위기다(트로츠키에 대해선 이 기사가 거의 유일한 추모글이 아니었나 싶다). 사실 알튀세르로 말하자면, 인기로 보나 영향력으로 보나 이 둘에 훨씬 밀리지 않는가? 그런데도 그의 (기리기도 애매한) “20주기”를 기념한다는 것엔, 어딘지 미심쩍음이 있단 얘기다.

이 미심쩍음, 즉 굳이 안해도 될 것 같은 이벤트가 굳이 열리고 있는 것 같다는 이 미심쩍음의 정체는 무엇인가? 결론부터 말한다면, 그것은 이번 심포지엄은 알튀세르 자체와는 별로 상관이 없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자, 다음과 같은 기획자(고려대의 진태원 교수)의 말을 일단 보자.

이번 심포지엄은 [1] 단순히 알튀세르 사망 20주년을 기리기 위한 것이 아니고, 그의 사상의 위대함, 그의 마르크스주의의 독창성을 찬양하기 위한 것도 아닙니다. 그보다 이번 심포지엄의 목표는, [2] 그의 사상의 여러 요소들 가운데 오늘날에도 여전히 가치를 지니고 있고 여전히 현실적인 효과들을 생산해낼 수 있는 주제들을 살펴보고, 알튀세르 사상과의 비판적 대결을 통해 독자적인 이론의 세계를 구축한 현대 사상가들의 작업 속에서 알튀세르 사상이 그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고 또 어떤 식으로 지양되고 있는지 검토해 보는 것입니다. (자료집 7쪽. 번호는 내가 매김.)

언뜻 보면 별 내용없는, 그저 이번과 같은 행사에서 “기획자의 말”로써 으레 쓰일법한 통상적인 구절이지만, 위 내용은 사실 이번 심포지엄의 핵심을 매우 단적으로, 그러나 매우 은밀하게 짚어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기본적으로, 이번과 같은 심포지엄에서 [1]과 [2]가 함께 다뤄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사실은 [2]에 방점에 더 찍혀 있다고 해서 그다지 이상할 것도 없다. 프로그램을 보면 대번에 알 수 있듯이, 이번 심포지엄에서 [1]에 해당한다고 할만한 것이 둘(제3부에 속한 두 논문)이고 나머지 여섯은 모두 [2]의 범주에 든다. 어차피 하나의 사상가란 다른 여러 사상가들 속에서 존재하는 것이므로, 이것 자체가 이상할 건 없다. 그렇다면?

알튀세르를 다른 사상가들과 함께 배치해 놓았다는 사실 때문에 이번 심포지엄이 그 “다른 사상가들”에 대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분명 부당한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깊게 봐야 할 것은 그 “다른 사상가들”이 누구냐다. 그게 누구냐에 따라 그렇게 말할 수도 있단 얘기다. 실로 알튀세르와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주고받은 사상가들의 목록을 꼽자면 아마도 끝도 없을 것이다. 이 점을 인정한다면, 예의 그 6편의 논문에서 누가 “간택”되었느냐는 그 자체로 어떤 일련의 질문들과 그에 대한 특정한 답변들을 은밀하게 전제하고 있다고 봄이 타당하다. 그렇다면 누가 간택되었는가. 그의 동시대인이자 여러모로 그보다 훨씬 더 영향력이 크다고 할 수 있는 푸코(Michel Foucault), 그의 애제자이자 오랜 동료였던 발리바르(Etienne Balibar), 그와는 대척점에 서 있었으나 아이러니컬하게도 닮은 점도 많은 바디우(Alain Badiou), 한때 제자였지만 그를 등진 뒤에 비로소 본격적인 발전을 이뤄 오늘에 이른 랑시에르(Jacques Ranciere), 그리고 여기에 더해 라클라우(Ernesto Laclau)와 무페(Chantal Mouffe), 구하(Ranajit Guha) 등이 그들이다.

곧 나는, 알튀세르를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위와 같은 사상가들과 연결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이번 심포지엄은 알튀세르에 대한 것이 아니라 바로 위 사상가들에 대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하지만 알튀세르를 위 사상가들과 연결시키는 것은 오히려 알튀세르의 면모들(그 중 몇몇은 그 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면모들)을 조명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 면에서 이번 이벤트는 “알튀세르에 대한 것”이라고 하는 것이 마땅한 것이 아닌가? 실제로 거기엔 “전적으로” 알튀세르에 대한 논문도 두 편이나 발표되지 않았는가? 이런 질문들을 적절히 다루는 데 다음과 같은 기획자의 말이 매우 유용한 시사점을 준다.

구세대 독자에게 알튀세르가 한때 우리나라에서 잠깐 지적으로 유행했으나 이제는 잊힌, 추억 속의 철학자라면, 신세대 독자에게 그는 오늘날의 지적 담론을 이해하기 위한 먼 배경 중 하나, 이를테면 ‘기타 등등’ 속에 포함될 만한 나열의 대상 중 하나가 된 셈입니다.

위 구절이 명확히 확인해주고 있듯이, 알튀세르가 “오늘”, “한국에서”, “위에서 거명된 현대의 사상가들과 함께” 배치되었을 때, 그는 이 “오늘 한국에서의 수퍼스타들” 사이에선 그저 “먼 배경 중 하나”일 뿐이므로, 이번 심포지엄은 알튀세르에 대한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내 생각이기만 한 게 아니라 기획자인 진태원 교수의 말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런 구도 속에선, 전적으로 알튀세르에 대한 두 개의 논문들은 오히려 “들러리”에 그칠 가능성이 크다. 오히려 그것들은, 약간의 과장을 보태자면, 이번 심포지엄이 “알튀세르 심포지엄”이라고 불리는 것을 정당화하는 근거를 제공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제1부의 말미 질의응답 시간에 청중석에 있던 백승욱 교수가 던진 질문은 역설적인 의미에서 매우 부적절했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그의 질문은, 발표자들이 결코 건드리지 않았던 이슈, 즉 “마르크스-알튀세르-바디우/랑시에르”의 관계에 대해 것이었는데, 내게는 아주 훌륭한 질문이었지만 적어도 발표자들의 흥미를 끌지는 못했던 것 같다. 그들은 여기에 이렇다할 답변을 내놓지 않았던 것이다. 실은 청중들도 별로 관심이 없었던 것 같다.)

재밌게도 이는 거꾸로 말하면, 알튀세르가 “먼 배경”이 아닌 “주인공”이 될 수도 있는 특정한 “배치들”이 있을 수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우리는 여기서, 그가 직접적으로 개입하려고 했던 마르크스(Karl Marx), 그람시(Antonio Gramsci), 레닌(V.I. Lenin), 사르트르, 캉귈렘(Georges Canguilhem) 등을 떠올려볼 수 있겠다. 또는 레비-스트로스(Claude Levi-Strauss)나 톰슨(E.P. Thompson) 등과 같은 이름을 떠올리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무슨 얘기냐면, 이번 심포지엄이 “알튀세르에 대한 것”이려면, 적어도 위와 같은 이름들이 (또는 그 중 일부가) 핵심적으로 거론되었어야 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알튀세르의 (어쩌면 그 자신과는 그다지 상관도 없을 수 있는) “의미”나 “의의”가 아닌, “살아있는 알튀세르 그 자체”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그리고 그를 정말 “추모”하려 했다면, 바로 이 후자의 측면을 살렸어야 했다). 예컨대 우리가 마르크스에 대한 심포지엄을 연다고 했을 때, 헤겔(G.W.F. Hegel)이나 리카도(David Ricardo)를 거론하지 않는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다. 그러나 강조하건대 그것은 “기본”이고 “최소한”이다. 이를테면 우리는 이 “기본” 위에 앞서 거론된 “현대 사상가들”을 덧붙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배치 속에서는, 즉 이를테면 “마르크스-알튀세르-바디우”와 같은 구도 속에서는 알튀세르는 “먼 배경”이기보단 “주인공” 노릇을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2. 그러나 불행히도 이번 심포지엄에서 “마르크스-알튀세르-바디우”와 같은 식의 구도는 성립되지 않았다. 이것이 불행인 까닭은, 첫째로, 바로 그런 덕분에 이번 심포지엄은 일종의 “형용모순”(알튀세르 없는 알튀세르 심포지엄)이 되었기 때문이고, 둘째로, 그런 사실은 한국의 진보적 인문사회과학의 불행한 현주소를 반영하기 때문이다. 맨앞에서 말한대로, 이 현주소란 “빈곤”과 “과대망상”이라는 단어로 특징지을 수 있다.

“빈곤”인가? 간단하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자. 누군들 이번과 같은 이벤트를 “마르크스-알튀세르-바디우”와 같은 구도로 열고싶지 않았겠는가. 단순하게도 그것이 불가능했다는 게 문제고, 반대로 말하면 현재와 같이 이번 심포지엄이 열린 것은 그 나름의 “최선”이었을 거다. 이것을 “빈곤”이 아닌 다른 말로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여기엔 일종의 “과대망상”도 포함되어 있다. 이 부분은 좀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는데… 여기서 과대망상이란 말하자면, 위에서 말한 “기본”을 빼먹어도 문제가 없다는, 다시 말해, 예의 그 “수퍼스타들”만으로도 충분하며 실은 그게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을 말한다. 사실 이 블로그에서 난 이런 과대망상에 대해 (현재와는 조금 다른, 그러나 본질적으로는 같은 관점에서) 이미 한번 지적한 바 있는데(링크), 기획자인 진교수는 여전히 “오늘날의 사상계를 주름잡는 여러 이론가들” 타령을 하고 있다. 그러니까 이 “과대망상”은 자기가 “빈곤”하다는 것을 못 느끼게 해주는, 일종의 마약과도 같은 것이다. 그렇게 둘은 서로 되먹임질한다…

물론 진교수가 “오늘날의 사상계를 주름잡는 여러 이론가들”로 꼽는 이들은 이번 심포지엄의 주인공들(“랑시에르, 바디우, 발리바르, 지젝, 네그리, 라클라우와 무페 등”)이다. 그러나 대체 이들이 “어디서”, “무엇을” 주름잡는단 말인가? 이번 심포지엄에 잠시라도 얼굴을 비친, 아무리 많이 잡아도 200명도 안 될 사람들 사이에서? 아니면 그들 배후에 있는, 그 10배, 20배쯤 되는 사람들 사이에서?

이상과 같은 빈곤과 과대망상은 그러나 심포지엄을 주최한 그린비 출판사나 기획한 진태원 교수의 책임으로 몰아붙여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것은 (다시 말하지만) 오늘날 대한민국의 “진보적 인문사회학계”의 (일부의) 현주소를 반영하며,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기획/운영상의 단순한 오류가 아니라 어떤 현실의 징후로서) 심각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있을 뿐만 아니라, 좀 더 폭넓은 시야에서 바라봐야 한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여러 가지 다양한 이야기들을 풀어낼 수 있을 것이다. 작게는 진태원 교수의 번역으로 조만간 재출간 된다는 알튀세르 및 그 제자들의 역작 『『자본』을 읽자』의 의의 같은 것도 생각해볼 수 있겠고, 크게는 위와 같은 빈곤과 과대망상을 유지/존속시키고 재생산시켜주는, 즉 알튀세르를 “마르크스-알튀세르-바디우”가 아닌 “(알튀세르-)바디우”로밖에 존재할 수 없게 만들어주고 또 그것을 정당한 것으로 승인해주는, 어떤 물적/사회적 메커니즘에 대해서도 이야기할 수 있겠다.

(말이 나왔으니 『『자본』을 읽자』에 대해 한마디 덧붙여보면… 기본적으로 난 이게, 진태원 교수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알튀세르와는 거의 무관한 방식으로 소비되고 유통되지 않을까 하는 예상을 조심스레 하고 있다. 그러니까 이를테면 사람들이 이 저작 때문에 『자본』을 읽게되는 일은 없을 거란 얘기다. 이 책의 재변역은 알튀세르 때문이라기보단 기존의 번역에서는 완전 개무시된 “오늘날의 수퍼스타들”을 복권시키는 데 그 가장 큰 의의가 있을 거라 본다. 진교수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말이다. 하지만 진교수 자신도, 이 책을 일컬어 “『자본』에 관한 가장 깊이 있는 연구 중 하나”라고 하는 걸 보면, 그 또한 『자본』에 대해선 그다지 관심이 없어 보인다. 이 저작은 그 출간시기 등을 고려했을 때 “획기적”이라고는 할 수 있어도 “가장 깊이 있”다고는 할 수 없다. 더구나 현재의 관점에서는.)

이 모든 것을 이 자리에서 다 논할 수는 없고, 다만 난 이 대목에서, 소박하게(?), 자신이 이른바 “진보적 인문사회과학”에 속한다고 여기는 사람들의 각성을 촉구하고 싶을 따름이다. 이와 관련, 위에서 링크한 내 글의 마지막 부분을 인용해보고자 한다.

아, 진정 나는 궁금하다. 마르크스주의의 “종언”을 선언하고 있는 분께서 어찌도 저렇게 현실진단을 하고 계신지. 나아가, 진교수와 그 동료들께서는, 자신들이 “21세기 진보 지식인”으로 특별히 공들여 선정한 분들이 위와 같은 문제를 다루는 데 있어 어떤 묘안을 내어놓을 수 있다고 여기는지. 대체 여기 인용된 분들께서 “카지노 자본주의”에 대해 어떤 정치한 분석과 대안을 내놓고 있는지. 그리고 ‘카지노’, ‘도박’, ‘피눈물’, ‘공안통치’, ‘칼날’, ‘광기’ 등과 같은 지극히 자극적이고 감정적이며 의미없는 표현이 아니고서는 ‘현실’을 묘사할 적당한 수사조차 갖지 못한 사람(들)이 “21세기 진보 지식인 지도”를 그리는 게 정상적인 상황인 건지…

3. 이번 심포지엄은, 이 글의 맨앞에서 밝힌대로 나 개인적으론 매우 유익한 자리였지만, 여러모로 껄끄러운 뒷맛을 남겼다. (역시 다시 강조하건대) 그러나 그것은 결코 주최측이나 기획자에 대한 사적인 유감은 아니었다. (약간은 “돌출발언” 같지만, 적어도 운영 등의 면에서는, 나는 이번 심포지엄이 내가 국내에서 참석했던 이와 비슷한 자리들 중에서 단연 최고였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이 그린비 출판사엔 내 친구들도 몇 있는데, 이들에게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는 바다.)

글을 마치는 마당에 한 가지 밝히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이 껄끄러움 중에는 이미 20년 전에 세상과 불행하게 작별한 한 사람의 이름을 빌려, 그만 그가 아닌 다른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들을 풀어내는 계기로 삼고 말았다는, 일종의 “윤리적인” 것도 포함된다는 점이다. 알튀세르의 치열한 삶, 그러나 불행했던 말년을 떠올리면, 그에게 너무도 미안해진다. 그에 대한 특별한 애정도 없는 나조차도 말이다. (사족을 하나 덧붙이면, 아마 알튀세르에 가장 열광했던 게 내가 속한 세대가 아닐까 싶다. 나때야말로 알튀세르 모르면 바보취급 받았다. 물론 매우 소수의 사람들 사이에서 그랬단 얘기다.)

앞에서 사르트르의 30주기와 트로츠키의 70주기에 대해 얘기했는데, 실은 올해는 전태일이 자신의 몸에 불을 붙여 산화한지 4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엉뚱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사망 20주년 알튀세르를 다시 생각한다”라는 부제를 단 심포지엄에 참석해 알튀세르에 대해선 그다지 이야기를 나눴다고 볼 수 없는 그 사람들은, “전태일 40주기”에 대해선 뭐라 할 것인지 문득 궁금해진다. 더 엉뚱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그들이 “전태일 40주기”에 대해 취하는 태도야말로 어쩌면 그들의 “진보적 진정성”을 가르는 시금석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만약 그들이 “카지노 자본주의”에 정말로 관심이 있고 또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고 다뤄보고자 한다면 말이다.

[추가: 써놓고 보니, 오늘날 알튀세르가 재현되는 방식에 대해서도 한번 문제를 제기해봄직 하다. 하고픈 말은, 그가 현재 재현되는 대체적인 방식은, 그가 “지성의 역사”에서 진정으로 평가받아야 하는 부분들을 부각시키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 나중에 좀 더 생각해보기로. . .]

[학회참관기] MEGA 작업의 새로운 새로운 접근과 맑스의 재해석

앞서 이곳에 “광고”하기도 했던 학술대회에 다녀왔다. [링크] 원래 학회 제목은 “MEGA 작업의 새로운 접근과 맑스의 재해석”이었는데, 학회장소에서 배포된 자료집엔 (이 포스트의 제목과 같이) “MEGA 작업의 새로운 새로운 접근과 맑스의 재해석”으로 나와 있었다. 아… 대체 얼마나 ‘새로운’ 접근을 보여주려고 하길래 그냥 ‘새로운’도 아니고 ‘새로운 새로운’일까… 아… 대체 그 ‘새로운 새로운’ 것을 보여주려고 얼마나 노력을 했으면 그다지도 홍보도 못할 정도였을까…

그렇다. 나는 앞서 포스트에서 ‘홍보’ 문제를 꼬집었다. 하지만 이는 나만 느낀 문제는 아니었다. 학회 끝나고 거기 참석했던 사람들 18명–그 중 2/3는 발표자 또는 토론자였다–이 모여 저녁 먹는 자리에서, 주최한 ‘교수님’들끼리 “이 정도면 성공적이죠?”라는 ‘자화자찬’격의 멘트를 날리면서 껄껄 웃길래, 한 마디 던졌다. “성공요? 홍보 제대로 했으면, 두배 세배는 왔을껄요?”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고 보니, 진짜 문제는 홍보가 아니었다. [위 포스트에서 링크된 웹홍보물을 보라. 링크] “내용”이었다. 일단 제목을 보자. 무엇이 연상되는가? “음… MEGA 작업을 통해 현재 탄력을 받고 있는 ‘맑스의 재해석’ 문제의 면면들을 엿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겠군!”하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하지만 개뿔… 오전 세션은 ‘MEGA 작업’은 물론이요 ‘맑스의 재해석’과도 거의 아무런 상관도 없었다. (굳이 말한다면, 심광현 교수의 발표는 일정한 ‘재해석’을 담고는 있다. 하지만, 그의 ‘재해석’은 MEGA하고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더구나 <자본론>을 ‘복잡계 과학’과 연결시키는 ‘새로운’ 시도를 하는 한편 경제/경제학에 대해선 거의 언급도 하지 않으면서, <자본론>의 ‘본질’이니 ‘(진정한) 이해’니 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이것도 ‘재해석’이라고 봐야 하나? 아주 ‘MEGA톤급’ 재해석이다.)

발표는 발표대로… 그리고 토론은 토론대로 가관이었다. 특히 신광영 교수의 발표 ‘맑스와 그람시’에 대한 코멘트는 정말 압권이었다. 질문이 뭐였는줄 아나? 바로 그 토론자께서는 “그람시는 (유기적) 지식인을 강조하는데, 과연 지식인이 얼마나 자기가 속한 ‘계급적 이해관계’를 벗어나 ‘보편적 이해관계’를 옹호할 수 있겠느냐?”라는… 아… 요새 같으면 대학 신입생도 안 물어볼 법한 질문을 날리신 거다! 다른 토론자는 코멘트는 거의 만담 수준에 지나지 않아서 도대체 그가 무슨 얘길 하려 했는지도 애매모호했고, 또 다른 토론자는 발표문을 읽지 않았다고 ‘솔직히’ 고백하기도 했다. (실은 이 맨마지막의 경우, 토론자보단 주최측에 잘못이 있는 것이다. 토론자가 발표문을 읽고 숙고할 충분한 시간을 주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면… 저 멀리 독일에서 모셔온 두 분의 학자들과 일본의 센다이에서 모셔한 또 다른 한 분의 학자들의 발표가 있었던 오후 세션은 어땠을까? 총평하자면… 독일에서 온 두 사람의 발표는 매우 실망스러웠던 반면, 일본에서 온 오무라 교수의 발표는 꽤 좋았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진정한 ‘진상’은 토론이었다.

독일 사람들의 발표가 실망스러웠던 까닭은, 별로 새로울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Rolf Hecker와 Beatrix Bouvier는 MEGA 작업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맡고 있는 사람들로서, 이들이 MEGA 작업이 그간 걸어온 역사와 현황을 보고하는 것은 그 자체로는 그다지 이상할 게 없다. 그러나 문제는, 가장 대표적으로는 정문길 교수의 노력 덕분에, 적어도 그런 정도에 대해서는 우리도 이미 잘 알고 있다는 데 있다.

물론, MEGA 작업에 대한 국내 유일의 연구서인 정문길 교수의 <니벨룽의 보물>을 읽지도 않고 이번 학술대회와 같은 행사를 여는 박사님들, 20-30년 전에 더듬더듬 읽은 마르크스가 세상에 존재할 수 있는 ‘유일한’ 마르크스라고 생각하는 교수님들은 당연히 예외겠다. 그분들의 ‘진상’이 어떤 식이었는지 예를 들어볼까? 프로그램에서 볼 수 있듯이 Bouvier 교수는 MEGA 작업의 ‘탈정치화’에 대해 발표를 했다. 그에 대해 한 교수님께서 물으셨다. “당신은 진짜로 그 프로젝트가 ‘비정치적’으로 수행될 수 있다고 보는가?”라고. 제정신인 사람은, Bouvier 교수가 말하는 ‘탈정치화’라는 것이, MEGA와 같은 학술작업이 동구권의 구 공산당의 입김으로부터 벗어난 것을 일컫는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대해… “이런 작업이 과연 (가장 일반적인 의미에서) ‘정치적’이지 않을 수 있는가?”라고 묻는 것은, 결국 “저는 당신의 얘길 이해 못했어요. 다시 한 번 쉽게 말해 주세요”라고 부탁하는 거나 마찬가지다. 애냐?

아… 더 쓰기 귀찮다. 학술대회, 대충 이랬다. 참석 못한 분들, 아쉬워할 필요 절대 없다. 결국 문제는… MEGA에 대해 평소에 잘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는 사람들이 이런 행사를 열었다는 데 있다. 자기들이 잘 모르고 관심이 없었다면, 자기들보다 더 잘 알고 관심도 많은 사람들을 불러모았어야 했다. ‘홍보’가 아쉬운 건 바로 이래서다. 적어도 “언제쯤 이 프로젝트가 완성될 것 같은가?”와 같은 질문을, 발표자가 대답이 곤란하다는 표시를 계속 내는데도, 어린애 떼쓰듯이 하는 것은 정말 아니다. 대체 어떻게 대답하라는 거야? 대체 언제 완성되는지… 발표자도 알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MEGA에 관심 있고 잘 아는 사람들에겐 홍보가 안 됐는지 몰라도, 언론에는 기사를 내기도 했다. 역시… 외화내빈이 따로 없다. [링크] 여기서 한 가지 재밌는 거. 이 기사의 링크주소를 보라. religion. 뭐냐?? (-_-) 이 인터뷰를 강신준 교수가 했다는 것도 재밌다. 왜 재밌냐!? 다음 언급을 보면 된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서로의 머릿속을 바꾸어 앉아도 될 만큼’ 각자의 분신 역할을 수행하였다. (<자본 I-1> 중에서 옮긴이 ‘해제’, 12쪽)


☞ 특히 <자본> 및 그와 관련된 마르크스의 경제적 저작들과 관련해서, MEGA 작업이 이뤄낸 핵심적인 성과 중 하나가 바로 마르크스와 엥겔스 사이의 ‘차이’를 매우 구체적인 수준에서 드러냈다는 점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서로의 머릿속을 바꾸어 앉아도 될 만큼’의 사이였다면(어떻게 이런 사이가 가능하겠나?), 애초 MEGA 작업 같은 것도 필요가 없었을 거다. MEGA의 의의는 그 편집자의 한 사람으로서 MEGA에 많은 노력을 기울인 Carl-Erich Vollgraf의 표현 ‘Marx im Marx’ Worten’에 압축적으로 담겨있다.

MEGA판은 애초부터 학술적인 연구 목적 때문에 <자본>의 모든 초판과 중판은 물론 미발간 초고와 발췌 노트 그리고 부속자료까지를 모두 수록하고 있다. 그래서 <자본>에만 총 24권의 간행을 목표로 할 만큼 분량이 방대하고 현재도 출판이 진행되고 있는데, 지금까지는 모두 20권이 간행된 상태이다. 학술적으로 훨씬 엄격하게 편집된 MEGA판은 원본의 주석 외에는 주석이 없으며, 무엇보다 아직 전부 간행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24권 가운데 어떤 책을 번역할 것인지의 문제도 함께 존재한다. 당연히 마르크스 전문 연구자에게는 의미가 있겠지만 일반 독자들에게는 무엇보다 부족한 주석 때문에 매우 불친절한 책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자본>에 대한 연구는 말할 것도 없고 일반에 대한 보급조차 매우 빈약한 우리나라에서는 연구용에 가까운 MEGA판보다는 보급 목적을 함께 안고 있는 MEW판을 대본으로 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하였다. (<자본 I-1> 중에서 ‘옮긴이의 말’, 33쪽)


☞ 위 구절엔 MEGA에 대한 완전한 무지가 드러나있다. 바로 그 무지가, 지식인 특유의 문제 속에 숨겨져 있을 따름이다. MEGA는 크게 4개의 ‘부’로 구성되며 <자본(론)>과 그 초고들은 제2부에 속한다. 제2부는 강교수 말대로 24권으로 이뤄진 게 맞지만, 강교수의 설명과는 달리 이 모두가 <자본>의 판본들은 아니고, 거기엔 <자본>의 초고들–<요강>이나 <잉여가치학설사>와 같은–도 포함된다. 따라서 엄밀한 의미에서의 <자본>은 그 24권 중 절반도 안 된다.

그뿐만이 아니다. MEGA 판에 주석이 없다는 말도 틀렸다. 물론 여기서 ‘주석’이란 ‘편집자 주석’을 일컫는데, MEGA 판에는 이런 주석이 없는 게 아니라, 아예 따로 한 권의 책으로 딸려있을 정도로 엄청나게 많다. 즉 각권에 한 권씩의 주석서가 있는 것이고, 어떤 경우엔 이 주석서가 본서보다 더 두껍기도 하다.

결국 위 언급들에 비춰보면, 강교수는 MEGA의 의의를 그다지 높게 평가하는 것 같지도 않고, 사실은 MEGA 자체에 별로 관심도 없어 보인다. 그랬던 강교수께서 이제와서 MEGA의 의의를 새롭게 깨달으셨다면, 그야말로 환영할 일이지만, 그래도 학술대회를 이번처럼 열면 안 된다. 다른 많은 ‘거창한’ 이유들이 있지만, 하나만 굳이 언급하면… 결국 이런 행사를 하는 데 드는 돈, 모두 국민–이 말이 싫으면 ‘민중’–의 호주머니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BK21이니 뭐니 하는 거… 그게 다 뭐겠는가?

이런 생각은 다시, 정말 웃기게도, 앞서 소개한 한 교수님의 ‘대학 신입생 수준도 안 되는 코멘트’를 떠올린다. 바로 ‘자신의 이해관계를 초월한 유기적 지식인’?! 이런 거창한 ‘지식인 상’을 무려 ‘국제학술대회’ 같은 자리에서 근엄한 어조로 입에 담는 이분들은 대체, 누구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