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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유물론의 기본 태도: {월간 좌파}에 실린 김태호 선생의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 ‘서문’ 번역과 해설에 대하여

{월간 좌파}라는 잡지가 창간됐다. 일정한 준비기간을 거쳐, 5월호를 창간호로 냈다. (홍페이지 링크) 앞으로 크게 번성하길 바란다.

친구가 소개해줘 조금 봤는데, 내용이 매우 알차다. 앞으로 기대해도 좋을 것 같다. 특히 나는 ‘탐구’ 섹션에 있는 ‘{자본} 읽기’에 주의가 쏠릴 수밖에. 박종철출판사의 김태호 대표께서 야심찬 연재를 기획하고 계신 것같다. 이번 창간호에선 그 ‘서장’격으로 마르크스가 1859년에 쓴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의 ‘서문’이 다뤄지고 있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김태호 선생께서 ‘서문’의 전문을 새로 번역해서 내놓으셨다는 점이다. 한 문단씩 번역문을 제시해놓고, 그에 대해 설명을 다는 식이다. 새로운 번역문은 무엇보다 쉽게 읽힌다. {맑스 엥겔스 저작선집}(제2권)에 실린 기존의 번역이 다소 딱딱했던 것과 비교된다.

그런데 내가보기에 크게 두 군데 오류가 있는 것 같다. 하나는 번역에, 또 하나는 해설에. 지금부터 그것을 지적해보겠다. 아무도 말을 거들지 않으면 연재하는 사람도 힘이 빠질밖에. 힘 내시고, 앞으로 좋은 연재 부탁드린다는 뜻에서 조금 거들겠다. 아래 보듯이, 번역 오류는 매우 심각하지만, 해설의 오류는 단순한 ‘부실’이라고만 봐도 괜찮을 듯 싶다.

 

1. ‘서문’의 네 번째 문단 중에 나오는 다음 구절을 보자(148쪽).

“어떤 개인이 어떠한지를 그 개인이 자부하는 것에 따라 판단하지 않듯이, 그러한 전복의 시기는 그 시기의 의식으로 판단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물질적 생활의 모순에서 나오는 의식, 즉 사회적 생산력과 생산관계 사이의 현존하는 갈등에서 나오는 의식으로 설명해야 한다.”

위 문장은 애초 번역문인 {저작선집}에는 다음과 같이 번역돼 있다(제2권: 478쪽).

“한 개인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그 개인이 자신을 무엇이라고 여기는가에 따라 판단하지 않듯이, 그러한 변혁의 시기가 그 시기의 의식으로부터 판단될 수는 없으며, 오히려 이러한 의식을 물질적 생활의 모순들로부터, 사회적 생산력들과 생산 관계들 사이의 현존하는 충돌로부터 설명해야만 한다.”

위 문장은 역사유물론의 기본원칙을 담고 있는데, 보다시피 위 두 번역은 (사소한 표현의 차이를 논외로 하더라도) 크게 다르다. 새로운 번역자인 김태호 선생께서 기존의 번역문을 모르는 것도 아닌 이상, 그러한 차이는 의도된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즉 옮긴이(김태호)는 거의 명백하게 기존의 번역이 틀렸다고 생각해 번역을 수정한 것이리라.

그러나 내가 보기엔 위 문장에 있어서만큼은 기존의 번역이 옳다. 무엇을 덧붙이겠는가? 원문확인의 구구한 과정은 생략하고… 또한 이는 원문해석의 문제는 아니다. 내용의 이해, 즉 역사유물론의 해석, 다시 말해 마르크스의 기본생각의 이해 문제인 것이다.

자… 김태호 선생의 새로운 번역을 보면, ‘그 시기의 의식’과 ‘물질적 생활의 모순에서 나오는 의식’이 대비된다. 그는 이 둘이 다르다고 생각하며, 그렇기 때문에 ‘전복의 시기’는 전자가 아니라 후자에 의해서 설명되어야 한다고 본다. 아니, 마르크스가 그렇게 본다고 번역했다.

하지만 ‘그 시기의 의식’과 ‘물질적 생활의 모순에서 나오는 의식’은 다른 것이 아니다. 둘은 같은 것이다. 이것을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의식들은 언제나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물질적 생활의 모순에서’ 나온다. 사실은 이런 점을 인정하는 것이 바로 (위 인용문장이 속한 단락에서 소개되고 있는) 역사유물론적 태도이며, 이런 태도에 따른다면 ‘의식’을 설명함에 있어 그것이 도대체 어떻게 해서 ‘물질적 생활의 모순’의 필연적인 표현형태인지를 밝히는 것이 핵심적인 관심사가 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이러한 연관을 밝히는 가장 중요한 도구가 정치경제학임은 말할 것도 없고.

이제 이상의 내용을 염두에 두면서 위의 두 번역문을 비교해보자. 이제 독자분들도 {저작선집}의 원래 번역문이 더 정확함을 어렵지 않게 감지하실 수 있으리라 믿는다. :)

혹시 아직 아리까리하신 분들을 위해 예제 하나. 자, 여기, 우리 시대에 관한 어떤 ‘의식’이 있다. 이를테면 ‘신자유주의는 끝났다’라는 의식이 있다고 치자. 명백히 이것은 유일하다고는 볼 수 없어도 오늘 우리 시대를 묘사하는 하나의 ‘의식’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것은 ‘그 시기의 의식’이다. 그런데 이것은 ‘물질적 생활의 모순에서 나오는 의식’인가? 당연히 그러하다. 어떤 의식이 하늘에서 그냥 떨어질리가 없잖은가.

그런데 사람들은 이런 의식에 대해 뭐라 말하는가?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대중들의 신자유주의에 대한 환멸이 이제 극에 달했다. 따라서 신자유주의가 설 곳은 이제 없다.” 물론 이런 식의 동어반복(!) 끝에 다음과 같이 덧붙이곤 한다. “우리 모두 거리로 뛰쳐나가 신자유주의의 종말을 축하하자. 꼬뮨주의 만세!”

그러나 불행히도, 이런 식의 서술에서는 “여기 ‘신자유주의는 끝났다’라는 의식이 있다”라는 명제 이상을 이끌어낼 수 없다. 분명 이런 의식은 현실에 존재하는 ‘물질적 생활의 모순’으로부터 나오리라. 그러나 위 서술에는 그러한 ‘물질적 생활의 모순’의 detail에 대한 설명은 전무하며, 또한 이는 그러한 모순이 어떻게 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신자유주의는 끝났다’라는 (집단)의식을 갖게 만들었는지를 말해주지도 않는다. 이쯤 되면, ‘이러한 의식을 물질적 생활의 모순들로부터, 사회적 생산력들과 생산 관계들 사이의 현존하는 충돌로부터 설명’하는 것이야말로 핵심적인 과제임이 명백하지 않은가. 바로 이런 사항을 위 인용문장은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2. 한편 위에서 인용한 문장이 들어있는 긴 문단을 두고 김태호 선생은 다음과 같은 해설을 내놓는다(149쪽).

맑스는 신문 편집장으로서 물질적 이해관계에 대해 한마디 하는 것도 곤란이고 프랑스의 사회주의 및 공산주의에 대해 “어떤 판단도 내리지 못하겠다”더니, 그러한 “밀려들던 의문의 해결”을 위해 “헤겔의 법철학”을 검토했다고 한다. 사람들의 살림살이를 공부하거나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공부한 것이 아니라 헤겔을 공부했다는 것이다. 맑스는 헤겔을 읽으면 그런 문제들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다고 본 모양이다.

여기서는 마지막 문장이 문제다. 내가 아는 한, 적어도 {라인신문} 이후엔, 마르크스가 헤겔을 읽음으로써 ‘내게 밀려들던 의문’을 해명할 수 있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 그는 그저, 당시 자신이 속한 (헤겔주의라는) 지적 배경 속에서, 그리고 그러한 배경에 의해 부여된 자신의 지적 한계 속에서, 헤겔의 법철학 비판을 ‘내게 밀려들던 의문’의 해결을 위한 ‘절차’이자 ‘수단’으로 삼았을 뿐이다.

물론 우리가 알듯, 얼마 가지 않아서 그는 이런 식의 철학비판도—아무리 그것이 ‘비판’이라 할지라도—부족함을 깨닫게 된다. 그것이 바로 그가 ‘정치경제학 비판’으로 옮겨간 이유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