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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선물] 당신이 신자유주의에 관해 알아야 할 13가지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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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당신이 신자유주의에 관해 알아야 할 13가지 것들

으악, 안 돼. 또 신자유주의에 대한 글이라고? 이미 나온 것도 많은데, 그걸 다 종합하는 데다가 그 나름의 시각에서 새로운 것을 덧붙이고, 결국 예전 것을 명확히 하는 만큼 혼란도 더 키울 게 뻔한데? 하, 그것도 모자라, 장하준의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2011) 류의 대중적인 제목을 달았다니!

하지만 겉모습은 으레 사람을 속이기 쉽다. 이제부터 우리가 상당히 대중적이고 명확한 형태로 내놓을 이야기는 기존에 나온 것들을 반복연습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세 가지 점에서 깊이를 지닌다. 무엇보다 이것은 신자유주의에 대한 나름대로 장기간에 걸친 학문적 천착의 결과라는 것이다. 또 하나는, 신자유주의를 글로벌 위기(global crisis)의 견지에서 파악하고 또 제시한다는 점이다. 셋째로, 주거(housing)와 식수(water)라는 두 가지 주제에 대한 비교연구를 통해 신자유주의의 본질을 예증한다는 것을 들 수 있다. 이 둘은 경제와 사회의 작동에 대한 금융화의 영향에 관한 좀 더 폭넓은 연구의 맥락에서 접근될 것이다.

재미있나요? 재미있나요?? 재미있으면 500원! ㅎㅎ

위 글은 다음 링크에 있는 하나의 글의 첫 단락을 번역한 것입니다. 직접 링크를 타고 들어가셔서 논문을 찾아보세요. 그리고 읽어보세요. 영어로 되어 있는데, 총46쪽(본문 35쪽)입니다. 설연휴 기간에 각잡고 읽어볼만하죠? ㅎㅎ

링크: http://www.ideaswebsite.org

(이곳은 작년에 <한겨레>가 주최하는 아시아미래포럼에 기조연설자로 한국에 오기도 했던 Jayati Ghosh가 이끄는 전세계 정치경제학 연구자들의 네트워크입니다. 오는 2월 22~24일에 저를 포함한 몇몇 한국사람들이 이 모임에서 여는 컨퍼런스에 참가합니다. IDEAs에 관심 있으신 분들은 저한테 연락주세요!)

위 글은 제 지도교수이기도 한 영국 런던의 Ben Fine 선생께서 동료들과 쓰신 것입니다. 제 스승이라서가 아니라, 이분이 신자유주의에 관한 한 이론적으로 가장 높은 수준의 논의를 지금까지 보여주고 계신 분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냥 읽지만 마시고, 제가 첫 단락을 번역했으니, 누가 마저 이어서 번역해봐도 좋겠네요. :)

아 그리고, 위 글에 붙어있는 방대한 주석과 참고문헌들을 고려하면, 위 글이 신자유주의에 대한 다양한 연구로 들어가는 하나의 좋은 ‘입구’가 될 것임을 알 수 있을 겁니다. 그러니 위 글은 두고두고 참고하심 좋을 것 같네요!

근대사회, 공황, 경제학: 마르크스가 리카도에 가한 하나의 비판

오늘날까지도 경제학자들은 공황을 부정한다. 그들은 심지어, ‘공황’이라는 말 자체를 일부러 안 쓰려고 안간힘을 쓰기까지 했다. 이에 대해선 이 블로그에서 한번 지적한 바 있다(링크).

하지만 눈을 가린다고 어지러운 광경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며, ‘말’을 없앤다고 그 말이 가리키는 ‘현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경제학자들이 그러듯, 어떤 사태를 미봉적으로 부정하려 하면 할 수록 그 사태는 점점 더 걷잡을 수 없이 타오르는 법이다. 그러다가 어떤 국면에 이르면, 누구도 그 사태를 부정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겪고 있는 경제위기도 마찬가지다. 이에 대해 일전에 나는 다음과 같이 썼다.

실제로 세계경제는 적어도 최근 40여 년만 놓고 봐도 끊임없이 공황에 시달려왔지만, 그때마다 이 공황들은 때로는 중동 산유국들의 자원이기주의의 탓으로, 때로는 중남미 포퓰리즘적 정부들의 방만한 재정운영이나 동(남)아시아 나라들의 유교적 잔재의 탓으로 얼버무려지곤 했다. 그러나 세계자본주의의 핵심부에서, 그것도 현대 경제의 꽃이라 할 수 있는 금융분야에서 불거진 이번 공황은 마르크스 따위엔 관심도 없던 대중들에게조차 체제 자체의 문제로 다가가고 있는 것이다. (출처)

그런데 돌이켜보면, 위와 같은 태도, 그러니까 자본주의 경제의 내재적 모순에서 유래하는 공황을, 즉 한편으로는 공황의 이와 같은 본질적 성격을, (그리하여) 다른 한편으로는 공황 자체를 부정하는 태도는,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에겐 꽤 오래된 습관이다. 다음 구절을 보라.

리카도는 공황에 대해, 즉 생산과정 그 자체로부터 발생하는 세계시장의 일반적 공황에 대해 실제로는 아는 바가 없었다. 그는 1800년에서 1815년 사이에 벌어진 공황들을, [나폴레옹의] 대륙봉쇄의 결과 시장이 경제적이 아닌 정치적인 이유로 억지로 축소되었기 때문에, 그것들이 흉작 때문에 일어났다고, 지폐의 감가, 식민지 작물의 감가 등에 의해 일어났다고 설명할 수 있었다. 또한 그는 1815년 이후의 공황들에 대해서는, 그것들이 일부는 흉작 때문에, 그리고 일부는 곡물가격 하락 때문에 벌어졌다고 설명할 수 있었다. 그 자신의 이론에 따르면 잉글랜드가 유럽대륙으로부터 격리되었던 전쟁 동안에 곡물가격에 상승압력을 가했던 앞서의 원인들은 작동을 멈추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 시기의 공황들은 부분적으로는 전쟁으로부터 평화로의 이행이 ‘무역 채널의 갑작스런 변경’을 가져와서 빚어졌다고 설명되기도 했다. 이후에 벌어진 역사적 현상들, 특히 세계시장에서 거의 정기적인 주기를 가지고 일어나는 공황들은, 더이상 리카도의 후계자들로 하여금 사실을 부정하거나 이를 우연에 돌리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 . .] (강조는 EM의 것. 출처: Karl Marx Frederick Engels Collected Works, Vol. 32, pp. 128-29)

그렇다면, 이후 경제학자들이 공황의 주기성, 그것의 본성을 인정하게 되었는가? 마르크스에 따르면, 전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이를테면 ‘자본의 과다'(plethora of capital)와 ‘과잉생산'(overproduction)의 구별(이 사항들에 대해 설명하는 것은 생략)을 도입함으로써, 교묘히 본질적인 물음을 회피해갔다.

이상으로부터 우리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1. 과거 리카도주의 경제학자들이 그랬듯, 오늘날의 경제학자들도 공황의 본질, 자본주의 경제의 모순적 성격을 인정하는 척, 그럴싸한 제스처를 취하다가 끝내는 자신들의 기존 입장을 더욱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말 것이라는 점. (이런 경제학의 성격을 가리켜 Ben Fine은 ‘낡은 경제학 제국주의에서 새로운 경제학 제국주의로의 이행’이라는 표현을 썼다.)

2. 마르크스가 리카도에 대해, 그가 불충분하게나마 19세기 초의 공황들은 설명할 수 있었음을 인정했다는 것이 매우 시사적이다. 이것은, 크게 보면 마르크스(와 그의 훌륭한 선배였던 아담 스미스나 헤겔)이 파악하고 있던 근대사회의 본질, 좀 더 직접적으로는 정치경제학의 본질적 성격에 대해 말해주고 있다. 곧 근대사회란 그 물질적 차원의 운동이 정치나 자연과 같은 경제외적 요인들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경제 그 자체의 내재적인 법칙에 의해 규제되는 사회라는 것, 그리고 정치경제학이란 바로 그러한 경제법칙, 따라서 경제법칙에 의해 규제되는 근대사회의 물적 동향에 대한 학문이라는 것! 이런 생각에 따른다면, 정의상 경제학은 (경제외적 강제에 의해 물적 차원의 운동이 결정적으로 규정되는) 봉건제 사회에 있어서는 온전하게 성립할 수 없다.

[201110] 경제학, ‘제국적’ 학문?

중앙대학교 {대학원신문}에 글을 하나 썼다. 제목은 위와 같다. “시대의 경제학”이라는 제목의 기획에서 한꼭지를 차지하는 글이다.

할당된 분량에 맞게 글을 쓰는 것도 기술인데… 아직 그런 데까진 멀었나보다. 줄이느라 혼났다. 덕분에 좀 설명이 조금 불충분한 곳도 있는 것 같다. 이를테면 사람 이름 같은 것은 가급적 원어표현을 함께 써두고 싶었는데, 그러질 못했다. 중간중간에 소제목도 넣었지만 결국 뺄 수밖에 없었다. 고육지책. 절대로 이것은 {대학원신문}의 잘못이 아니다. 다 내가 모자란 때문이다.

출판본은 맨앞에 링크를 해두기도 했지만, 위와 같은 이유 때문에, 이곳에 초고와 출판본을 참조해 글을 좀 더 가다듬어 올려둔다. 사실은 제목도 “경제학의 ‘원리’엔 ‘경제학’이 없다”였는데, 위와 같이 바뀌었다. 뭐 크게 상관은 없다. 어차피 저것도 나 스스로 고려했던 것이기도 하고.

경제학의 ‘원리’엔 ‘경제학’이 없다

하버드 경제학자 맨큐(N.G. Mankiw)의 {경제학 원리}(Principles of Economics)는 현재 세계적으로 가장 잘 팔리는 경제학 교과서로, 1997년 이래 지금까지 다섯 번의 개정을 거치며 경제학 교육의 표준으로 굳건히 자리잡고 있다.

저자가 제목에 ‘원리’라는 단어를 넣은 것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그것은 리카도(D. Ricardo), 밀(J.S. Mill), 마샬(A. Marshall)을 관통하는, 물리학의 뉴턴(I. Newton)에 필적하는‘권위’의 상징—그의 {프린키피아}를 떠올리라—이었지만 20세기 들어서는 그 어떠한 주요한 교과서 저자도 쓰기를 주저했던 일종의 ‘금기어’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여기서 맨큐의 ‘오만함’을 꼬집을 필요는 없다. 그가 위 책에서 내놓은 ‘경제학의 열 가지 기본 원리’는 이제 크리스트교의‘십계명’과 같은 권위로 자리를 잡아, 경제학의 신봉자든 비판자든 누구라도 참조하지 않으면 안 될 중요한 가이드라인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위 책의 한글판 제목 {맨큐의 경제학}은 이런 의의을 적절히 반영하지 못한다).

경제학의 ‘원리’

그런데 오늘날 경제학도들이 금과옥조처럼 떠받드는 맨큐의‘원리’는 그의 선배들이 내놓았던 것들과는 사뭇 다르다. 리카도나 밀에게 가장 중요한 원리는 자본주의 경제에서 물질적 부, 즉 가치(value)의 본질/크기 및 생산/분배에 관한 것이었으며, 이를 적절히 다루기 위해 경제학은 필연적으로 역사와 사회, 그리고 그 안에서 인간들이 상호작용하는 다양한 방식들을 두루 참조해야 했다.

반면 그런 원리들은 맨큐의 십계명엔 모습을 직접 드러내지 않는다. 대신 그것은 대체로 ‘모든 선택엔 대가가 따른다’, ‘교환은 교환당사자들을 이롭게 한다’ 따위의 인간의 사고와 행동 일반에 관한 매우 추상적인 성격의 명제들로 채워져 있다. 과연 이런 것들을 ‘경제학의 기본 원리’라고 할 수 있을까? 그것들은 우리가 경제를 이해하는 데, 하다못해 주식시장에서 돈을 버는 데 어떤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을까? 아니, 까놓고 말해, 대체 경제학은 무엇인가?

현재 이런 질문들은 ‘경제학 제국주의’(economics imperialism)라는 표제 아래 가장 심각하게 제기되고 있다. 이는 현실의 제국주의와 같이 경제학이 여타 사회과학의 고유영역들을 침범하고 나아가 자신의 식민지로 삼는 것을 일컫는다. 이를 통해 경제학은 그 영역을 넓혀나갈 뿐 아니라 사회과학 전체를 아우르는 하나의 ‘제국’ 건설을 꾀한다.

경제학: ‘제국적’ 학문?

경제학이 처음부터 제국주의적이진 않았다. 원래 그것은 사회의 특정한 성격의 문제들에 집중했다. 그것의 궁극적인 관심은 근대사회의 물적 동향을 밝히고, 나아가 ‘정치가나 입법자’에게 통치와 관련된 지식을 제공하는 데 있었다(A. Smith, {국부론} 참조). 훌륭한 경제학사가이기도 했던 마르크스(K. Marx)가 근대적인 과학적 경제학의 선구자로 꼽았던 페티(W. Petty) 이래 로크(J. Locke), 흄(D. Hume), 스미스, 리카도, 밀 등은 모두 이런 의미에서의 ‘경제학’(political economy)을 하고 있었다. 이 대목에서 어떤 이들은, ‘어? 로크가 경제학자야?’라며 의아해할지도 모르겠다. 그를 ‘경제학자’라고 부르는 게 적절한가는 생각해볼 문제겠지만, 그가 꽤 심각한 경제학적 저작을 남긴 것은 사실이다. 어쨌든 만약 이들 중 몇몇이 경제학자보다는 역사가나 철학자 또는 포괄적 의미의 사상가라는 자격으로 우리에게 더 알려져 있다면, 이는 경제학이 원래 어떠했는가를 잘 나타내주는 사례일 따름이다.

그리하여 경제학은 사회의 특정한 문제에 집중하면서도, 자신의 대상인 근대 자본주의 경제를 제대로 다루기 위해 그것의 역사와 지리적 불균등 발전에 관한 이용 가능한 모든 자료를 참조했고 온갖 사회적 결정인자들을 고려했다. 그러나 경제학이 당시 막 태동하던 여러 사회과학들의 성과를 존중심을 가지고 참조하기는 했어도 다른 사회과학들의 고유영역을 침해하는 일은 없었다.

따라서 사태를 반전시켜 경제학이 제국주의적으로 탈바꿈하는 데는 일정한 계기가 필요했는데, 그러한 변화의 추이를 최근 파인과 밀로나키스는 그들의 {경제학 제국주의에서 괴짜경제학으로}(B. Fine and D. Milonakis, From Economics Imperialism to Freakonomics, 2009)에서 ‘축소에서 팽창으로’(from reductionism to expansionism)라는 모토로 적절히 요약한 바 있다.

‘축소에서 팽창으로’

사회가 복잡해짐에 따라 경제학이 다룰 문제도 늘어났지만, 다른 한편에선 경제학을 연역적 방법론과 현실의 추상을 통한 모형화에 입각한 하나의 ‘과학’으로 정립시키려는 시도도 맹렬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특히 후자와 관련해서는 경제학이 기존의 역사적/사회적 관심을 점차 내려놓는 방향으로 발달한 것은 차라리 자연스러웠으며, 이런 움직임은 1870년대 ‘한계혁명’(marginal revolution)에서 정점에 달한다. 이제 사회적 생산과 분배에 상이한 방식으로 참여하는 인간집단들을 칭했던 ‘계급’은 ‘최적화하는 개인’(the optimising individual)으로 대체되고, 여러 역사적/사회적 요인들에 의해 복잡하게 규정된다고 여겨졌던 ‘경제’는 ‘수요와 공급이라는 상반되는 힘으로 구성되는 시장’으로 축소된다.

물론 이런 재편과정은 많은 반대와 유보조항들을 낳기도 했지만, 마침내 1930년대에 이르면 하이에크(F.A. Hayek)의 런던정경대(LSE) 동료 로빈스(L. Robbins)는 “경제학이란 인간행동을 목적과 다양한 용처가 있는 희소한 수단 사이의 관계로서 연구하는 학문이다”라는 선언을 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정의 아래, 이제 경제학의 고전적인 주제들은 ‘경제사’, ‘경제철학’, ‘방법론’, ‘산업경제학’ 등의 이름을 갖는 여러 응용분야로 밀려난다.

그러나 일단 경제학이 추상적이고 일반적인 방식으로 그리하여 매우 제한적으로 정의된 이상, 그 응용분야가 경제학의 전통적 영역에 한정될 필요는 없었다. 즉 역설적이게도 경제학을 최소한도로 축소시키는 노력으로부터 ‘팽창주의’의 싹이 생겨난 것이다. 이러한 팽창에 가장 열정적이었던 인물이 베커(G. Becker)였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제 ‘선택’이 있는 곳엔 늘 ‘경제학’이 있으며, 일상의 그 어떤 사소한 행위들도 ‘경제학적으로’ 설명해내는 것이 경제학의 본령이라는 듯한 분위기가 팽배해진다.

폐허를 걷어내고

결국 맨큐의 십계명은 이와 같은 경제학의 변천사의 산물이다. 그것이 일러주는 대로 만약 경제학이 ‘선택’과 ‘교환’에 관한 학문이라면, 과연 그 범위를 벗어날 수 있는 사회적 이슈가 무엇이겠는가? 그러나 현대사회에서 인간들이 창출하는 모든 사회적 관계들을 ‘선택’과 ‘교환’의 문제로 환원했을 때, 우리는 그들의 사회적 삶에 대해 무엇을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다시 말해 경제학이 사회과학에 하나의 제국을 건설했다면, 그것은 오로지 사회과학을, 우리가 사회과학에 대해 기대하는 모든 실질적 내용을 파괴함으로써만 가능했던 셈이다. 하지만 이는 당연하게도 경제학 그 자체를 파괴하는 것이기도 하며, 맨큐의 원리들은 그 파괴상의 클라이막스를 이룬다. 바로 이것이야말로 오늘날 범지구적 경제위기를 설명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데 경제학이 무능한 근원적인 이유다. [사족: 맨큐의 원리, 좀 더 일반적으로는 오늘날의 경제학을 비판할 때, 그것이 가정하는 ‘경제인homo economicus’, ‘합리성rationality‘ 등을 주된 과녁으로 삼곤 한다. 즉 인간은 합리적이지도, 이기적이지도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식의 비판은 그것이 비판하는 경제학만큼이나 자폐적이고 회의적으로 흐르거나(인간이 합리적이지 않다면, 그래서 뭐 어쩌자는 건가?) 또는 그 반대의 극단 즉 지나친 낙관주의 내지는 주의주의로 흐르기 쉽다(인간은 생각보다 이타적이니 인간을 너무 얕보지 말자?). 진화/행동/신경/정보 등등이 붙은 다양한 ‘경제학들’이 그러하다. 하여간 이 얘긴 나중에 따로 한번 ‘제대로’ 해야 한다..]

요새 위와 같은 경제학의 무능 때문에, 나아가 그런 무능에도 불구하고 기세를 누그러뜨리지 않는 경제학의 뻔뻔함 때문에, 많은 이들이 특히 학계에서조차도 反경제학적인 분위기가 크게 번지고 있는 것 같다. 경제학의 그간의 제국주의적 행태를 생각하면 이러한 ‘주변부’에서의 ‘반제국주의 투쟁’을 이해 못할 일도 아니다. 하지만 바로 그러한 제국주의적 현실을 좀 더 냉정하게 바라본다면, ‘중심부의 노동자/민중과의 옹골찬 연대’도 그만큼 중요하다는 게 곧장 드러난다.

다시 말해, 현재 여러 사회과학 영역들에서 경제학의 파괴적인 영향들을 걷어내는 것뿐만 아니라 경제학이 제 구실을 하도록 비판하고 독려하는 일도 긴요하단 얘기다. 즉 경제학은 그것이 응당 품어야 할 ‘진정한’ 원리들을 중심으로 재구성되어야 한다. (끝)

[201010] ‘경제학 제국주의의 첨병, 사회자본론’

한 대학 매체에 글을 하나 썼다. 원래 청탁받은 제목은 ‘경제학 제국주의의 첨병, 사회자본론’이었는데, 인터넷으로 확인해보니 ‘사회적이지도 경제적이지도 않은 사회자본론’이라는 제목이 더 큰 활자체로 덧붙어 있다. 나쁘지 않다.

원래 저쪽에 보낸 파일엔 각 내용단락 앞에 로마자 대문자로 수자를 붙여두었는데, 인터넷에 올라온 글을 보니 그게 빠져 있다. 어떻게 인쇄되어 나갔는지는 모르겠다. 하여간 인터넷에 있는 것은 조금 산만한 느낌이다. 물론 그건 애초에 내 잘못이기도 하다.

이 글은 <중대신문>에서 기획한, ‘사회적인 것’이 현재 사회과학에서 다뤄지고 있는 현황과 그에 대한 비판에 대한 시리즈물 중 하나다. 여튼 사회학자도 아닌 내게 좋은 기회를 허락해 줘서 고맙다.

(참고로, 글 맨마지막에, 내가 이 블로그를 통해 수차례 소개하기도 했던 IIPPE에 대해 쓰고 싶었지만, 그냥 슬며시 암시를 주는 것에 그쳤다. 소심했나…)

*                         *                         *

I. 최근 영국에서는 보수당 출신의 데이빗 카메론 총리의 주도로 ‘big society’라는 것이―우리로 치면 ‘공정사회’와 같이―커다란 화두로 등장하고 있다. 이는 카메론의 같은 당 대선배 마가렛 대처 전총리의 저 유명한 선언, 즉 “사회 따위는 없다”라는 선언과 재밌는 대비를 이룬다. 후자가 줄잡아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사회’의 ‘과잉’에 대한 반작용이었다고 한다면, 카메론의 최근 기획은 대처의 선언 이후 땅에 떨어졌던 ‘사회’의 권위를 적정 수준에서 바로 세워줄 것으로 기대할 수 있을까?

그런데 우리는 위와 유사한 사태 전개를 지성의 영역에서도 볼 수 있다. 대처의 선언과 궤를 같이 해서 사회의 불가능성을 핵심 테제 중 하나로 삼는 포트스모던적 경향이 지성계를 휩쓸고 지나간 뒤, 오늘날 우리는 다시금 ‘사회’의 과잉을 보고 있는 것이다. 바로 ‘사회자본’이라는 개념을 통해서.

그러나 실제 내용을 들여다보면 카메론의 ‘big society’라는 것이 결국은 개인들의 자조(自助)와 이웃 간의 친목 강화 등을 강조하는, 낡은 대처리즘에 새 옷을 입힌 것에 지나지 않다는 게 드러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회자본’이라는 개념도 그간 특히 여러 사회과학의 분과들이 경제학화(化)하는 과정에서 실추되었던 ‘사회적인 것’의 의의와 권위를 회복시키기보다는 바로 그 경제학화의 새로운 방식으로 채용되고 있을 따름이다. 요컨대, 경제학이 그 특유의 방법론을 가지고 여타 사회과학 분과들의 영역을 침범하고 나아가 이를 자신의 발아래 복속시켜 나가는 현상을 ‘경제학 제국주의'(economics imperialism)라고 부른다면, 특히 최근 20-30년 사이에 그 제국주의의 전위대 노릇을 하고 있는 게 사회자본 개념이라는 얘기다.

II. 최근 사회과학은 그 분야를 막론하고 다양하게 정의되는 사회자본‘들’의 각축장으로 변모하고 있다. 다양한 정의들에서 공통으로 강조되는 것은 바로 ‘인간관계’ 자체다. 즉 “중요한 것은 당신이 무엇을 아느냐가 아니라 누구를 아느냐다.” 더 많은 양질의 인간관계를 맺을수록 당신의 삶은 개선될 것이며, 따라서 이를테면 미국의 백인이 고도비만에 시달리는 것도 수많은 아프리카 흑인이 굶주림에 죽어가는 것도 모두 사회자본이 부족한 때문이다!

바로 이렇게 사회자본 개념의 문제는 그것이 마치 모든 사회적 이슈들의 해결책인 듯이 제시되고 있으면서도 내용상으로는 충분히 ‘사회적’이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자본’도 아니라는 데 있다. 즉 이 개념은 여타 사회과학들의 경제학화를 표상하지만 충분히 ‘경제(학)적’이지도 않고, 다양한 사회과학 분야들에 걸쳐있지만 충분히 ‘사회(학)적’이지도 않다. 뿐만 아니라, 사회자본 개념은 특히 연구자들에게 묘한 안락함을 주곤 한다. 이것이 바로, 사회자본 개념이 지금처럼 많이 쓰이기 전부터 꾸준히 그것을 비판해온 벤 파인(Ben Fine)이 자신의 최근 저작, <사회자본의 이론들>(Theories of Social Capital: Researchers Behaving Badly, 2010)의 부제목을 ‘불량하게 행동하는 연구자들’이라고 지은 까닭이다. 이제 그들은 역사, 계급, 전통, 관습, 사회구조, 그리고 경제적 토대(!)를 참조하지 않고도, 단지 ‘사회자본과 xx’라는 식으로 얼마든지 손쉽게 새로운 연구분야를 개척해나갈 수 있게 되었다. [벤 파인의 이 책은 내년 중에 나의 번역으로 국내에 나올 예정이다. 기대하시라! ;;;]

결국 만약 우리가 ‘사회적인 것’으로써 단순한 ‘인간관계’보다는 역사, 계급, 구조, 경제적 토대 등을 의미한다면, 사회자본 개념이 사회과학들에서 두루 융성하고 있다는 것은 사회과학이 타락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한 징후로 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III. 사회자본은 비록 전통적으로 경제(학)적 의미의 자본이 쓰이기에 적합하지 않은 사항들을 묘사하기 위해 도입되었지만, 여전히 그것은 소비되고 축적될 수 있다는 점에서 ‘자본’이다. 따라서 그것은 태생적으로 사회과학들의 경제학화에 봉사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 가능성이 현실성으로 실현된 것은, 현대적 사회자본 논의의 원조로 꼽히는 부르디외(Pierre Bourdieu)보다는 코울만(James Coleman)이나 퍼트남(Robert Putnam) 등을 거치면서였다. 특히 코울만은 원래 경제학에서 발달된 ‘합리적 선택’ 이론을 사회학에 적용시키는 데 열정적이었던 사회학자, 말하자면 경제학 제국주의의 영역에서 ‘일제의 조선인 앞잡이’에 해당하는 인물인 것이다.

원래 경제학 제국주의란 사회과학의 분과체계가 형성되는 과정(1930년대 초)에서부터 이미 제기되었던 문제였다. 현실의 제국주의와 마찬가지로 여기에도 그 열렬한 옹호자가 있었는가하면 단호한 반대자도 있었다. 그 옹호논리라는 것도, 경제학 제국주의가 ‘계몽적이고 민주적으로’ 이뤄지기만 한다면 이는 억제되기보다는 장려되어야 한다는, 현실의 제국주의의 그것과 꼭 닮아있었다. 그 반대편에는 이를테면 파슨스(Talcott Parsons) 같은 인물이 있는데, 1930년대 경제학에 대해 사회학의 고유의 영역을 확립하려던 그의 노력을 최근 저프 호지슨(Jeoff Hodgson)은 <어쩌다 경제학은 역사를 잊어버렸는가>(How Economics Forgot History: The Problem of Historical Specificity in Social Science, 2001)에서 ‘경제학 제국주의에 맞선 해방투쟁’이라고 묘사하기도 했다.

그러나 경제학 제국주의가 진정으로 융성하기 시작한 것은 1950년대 이후 개리 베커(Gary Becker)를 통해서였다. 기본적으로 그는 사회의 모든 문제들을 개인의 합리적 선택에 관한 것으로, 즉 합리적 개인의 효용극대화라는 문제로 변환시켜 경제학에서 적용된 수리적 방법에 따라 그것에 접근한다는 전략을 취했다. 최근 공전의 히트를 친 <괴짜경제학> 저자들의 “그 어떤 주제도 경제학의 범위 너머에 위치할 필요가 없다”라는 선언도 이런 태도와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괴짜경제학>의 무분별한 유행은 경계심을 가지고 봐야 할 필요가 있다. 특히 이 책이 심지어 진보적인 성향의 사람들 사이에서도 꽤 인기를 모으고 있다는 점은 크게 걱정스럽다. 언젠가 본격적인 비판을 내놓아야 하는데…]

이와 같은 베커의 경제학 제국주의는 우리가 흔히 ‘신자유주의’라고 부르는 것과 더없이 잘 어울린다. 우리도 지난 1997-98년에 겪었듯이, 신자유주의란 세계 모든 나라에 시장만능주의적인 단일 모델에 입각한 경제 및 사회 전반에 걸친 재구조화 프로젝트였음을 떠올려보라.

IV. 그렇다면 경제학 제국주의 또는 신자유주의가 어떻게 사회자본과 연결되는가? 이는 1990년대 중반 이후 이른바 ‘시장의 실패’ 사례가 빈번해짐에 따라 경제학 제국주의가 자체변모를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처한 것과 관계가 깊다. 요컨대, 경제학 제국주의가 지금까지는 경제학의 방법으로 여타 사회과학들을 무지막지하게 식민화해왔다면, 이제 그것은 자신의 한계(‘시장 실패’)를 인정하고 그런 한계가 드러나는 곳, 말하자면 시장이나 가격이 아니라 역사, 전통, 관습, 계급, 경제적 토대 등의 고찰이 필연적으로 요구되는 지점들을 ‘사회자본’이라는 ‘전가의 보도’로 채워버렸다는 것이다.

V. 기실 경제학은 그 자신의 편협한 방법론과 시야로 사회과학 전체에 걸친 하나의 제국을 형성한다는 야심을 가지고 있다. 사회자본 개념은 최근 그런 야심이 드러나는 가장 중요한 통로 중 하나다.

만약 경제학 제국주의와 사회자본이 사회과학 전체를 타락시키고 있다면 이에 대한 저항도 필연적으로 생겨나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 저항이란, 현실의 제국주의에 대한 투쟁이 그렇듯 단순히 민족주의에 그쳐서는 성공할 수 없을 것이다. 즉 그것은 단 하나의 분과학문에만 머물러서는 안 되며, 만약 이 저항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이 ‘사회적인 것’의 복원이라면 더욱 그렇다. 다양한 사회과학 분과들을 아우를 수 있는 지적 기획이 필요한 시점이다. (끝)

[기사] Stiglitz on Keynes

Stiglitz, J., 2010. The Non-Existent Hand. Review of Keynes: The Return of the Master by Skidelsky, R. London Review of Books [Online] vol. 32 no. 8 pp. 17-18. Available from http://www.lrb.co.uk/v32/n08/joseph-stiglitz/the-non-existent-hand [Accessed 19 April 2010].


스티글리츠는 흔히 “정보경제학”의 대가로 알려져 있고 (내 기억엔) 그가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것도 그에 대한 기여 덕분이었다. 그러나 요즘 같은 전세계적인 경제대란 속에서, 그리고 특히 그에 대한 처방을 논하는 자리에서, 그는 종종 “케인스주의자”로 여겨지곤 한다.

위에서 링크한 글은 최근에 한국에도 번역된 케인스 전기의 저자인(스티글리츠가 표현하듯이 “Keynes’s great biographer”인) Robert Skidelsky 경의 최근작 《Keynes: The Return of the Master》(2009)에 대한 스티글리츠의 서평이다. 여기서 그는 (스키델스키의 손을 거친) 케인스에 대해 코멘트하면서, 그와 자신 사이의 차이점을 부각시킨다.

The present crisis should lay to rest any belief in ‘rational’ markets. The irrationalities evident in mortgage markets, in securitisation, in derivatives and in banking are mind-boggling [. . .] If we are to design policies to prevent crises or to deal with them when they occur, it is essential to understand the critical flaws in the standard paradigm. It is here that Skidelsky goes astray.

오늘날 케인스주의자로 자의든 타의든 규정되는 사람들에는 여러 부류가 있다. 그 중 스키델스키는 “케인스로 돌아가야 한다”라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말하자면 ‘강경파’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지금 리뷰되고 있는 책에서 그는 (스티글리츠는 언급하지 않지만) 심지어 (케인스가 창안했다고 할 수도 있는) 거시경제학이 (‘미시적 기반micro-foundation’이라는 이름으로) 사라지고 있는 현상을 보면서, 거시경제에 대한 진정한 안목을 기르기 위해 “거시경제학자에겐 미시경제학을 가르칠 필요가 없다”는 매우 과감한 주장까지 내놓기도 했다.

이에 대해 스티글리츠는 현재의 공황에는 금융적인 측면이 많이 개입되어 있으며 케인스의 기본 문제의식은 실업(과 유효수요)에 있었으므로, 오늘날 문제가 되는 금융시장의 운영이나 규제에 대해선 별로 할 말이 없다고 반박한다. 대신 그는 케인스 이후 여러 케인스주의자들에 의해 여러 유용한 시각들이 발달했음을 상기시키는데, 그럼으로써 그는 스키델스키가 그런 성과에 정당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채 “다시 케인스로!”라는 급진적인 모토를 내세운다고 비판하는 셈이다.

그러나 결국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티글리츠는 케인스 및 케인스주의가 이룬 업적에 대해 호의적인 입장임은 물론이다.

Keynes’s great contribution was to save capitalism from the capitalists: if they had had their way, they would have imposed policies that weakened the economy and undermined political support for capitalism. The regulations and reform adopted in the aftermath of the Great Depression worked. Capitalism took on a more human face, and market economies became more stable. But these lessons were forgotten. Thatcher and Reagan ushered in a new era of deregulation, growing inequality and weakening social protection. We are now seeing the consequences, and not just in greater instability. Keynes’s insights are needed now if we’re to save capitalism once again from the capitalists.

위에서도 드러나듯이, 스티글리츠가 힘줘 강조하는 것은, 케인스의 통찰을 이어받아 케인스 이후에 많은 이론적 진전들이 있었다는 것이고, 따라서 우리가 이어받고 복원해야 할 것은 케인스뿐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나아가 그는, 이런 과정을 거쳐 경제학을 재편한다면 그것은, “기본적으로 자본주의 경제 및 시장이란 불완전하고 비효율적인 요소들을 늘 품고 있다”라는, 주로 케인스 이후에 지각되고 발전된 사고에 기반해서 이뤄져야 한다고 은밀히 (또는 노골적으로?) 주장하고 있다.

특히 이와 같은 재편은, 스티글리츠를 대표로 하는 이른바 ‘post-Washington consensus’론자들에 의해 특수한 방향으로 실현되고 있다. 물론 여기에 대한 좀 더 급진적인 비판도 존재한다. 그런 비판을 내세우는 대표적인 논자인 Ben Fine의 글 중 하나(〈지구화와 발전 개념의 비판적 검토: 정치경제학의 역할은 무엇인가?〉)가 국내에도 번역/소개된 바 있으며, 이런 비판은 ‘정치경제학 진흥을 위한 국제 발의(IIPPE)‘라는 이름으로 좀 더 지속적이고 조직적으로 전개되고 있기도 하다. IIPPE에 대해서는 이 블로그의 다른 글도 참조할 수 있다.

마르크스주의 정치경제학의 전망

Ben Fine, ‘Prospects for Marxist Political Economy’, 《마르크스주의 연구》 제7권 제1호, 2010년, 234-45쪽. [전문링크]

나는 마르크스주의 정치경제학을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처음으로 배웠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붐이 끝나가고, 급진주의, 노동조합주의 및 각종 진보적 운동들이 특히 베트남전쟁 반대분위기 속에서 최고조에 달했던 당시, 마르크스주의 정치경제학도 그 최고조기에 있었다. 이는 또한 마르크스주의 가치이론을 둘러싸고 엄청난 토론이 벌어지던 때이기도 했다. 이는 《자본》을 읽고 또 읽던 때였으며, [그에 기반해서] 전후의 붐과 위기를 설명하려고 하던 때였다. 그로부터, 마르크스주의 정치경제학의 오랜 내리막길이 이어졌다. 이와 같은 쇠퇴가 일어난 까닭은 무엇인가? 그에 비해—내가 이후 주장할 것이듯이—왜 오늘날 전망은 이다지도 밝아지게 된 것인가? (236-7쪽)



이것이 오늘날 마르크스주의 정치경제학의 전망이 잠재적으로 밝은 까닭이다. [……] 우리가 개별적으로 그리고 집단적으로 행하는 것이 유의미한 충격파를 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와 같은 기회와 도전을 무시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고는 편협한 기존 학제의 관행 안에서 복지부동할 수 있을 것이며, 새로 열린 평야를 폭넓은 시각을 갖지 않고서 그것을 경작할 사람들에게 양보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는 반대로 우리는 스스로 선빵을 날릴 수도 있다. 나는 내가 어느 쪽을 선택할지를 안다. 그리고 나는 그 선택이 당신의 것이기도 했으면 좋겠다. (244쪽)

벤 파인은 현재 영국 런던 SOAS(School of Oriental and African Studies)대학의 경제학 교수다. 작년 가을 서울대의 한 연구소에서 주최한 국제학술대회에 초청을 받아 한국을 방문했는데, 그때 그는 덤으로 몇 번의 강연 및 토론을 행했다. 위 글은 그 중 경상대 정치경제학 대학원에서 주최한 토론회 발표문을 손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