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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at’s in a name? 자본론 vs 자본: ‘비판’의 의미에 대하여

1. 머리말

Karl Marx의 《Das Kapital》이라는 책이 있다. 내 블로그의 주된 테마 중 하나인 저작이다. 그런데 이 책의 제목을 우리말로 어떻게 옮기는 것이 좋을까? 현재 우리나라엔 번역자가 다른 《자본론》과 《자본》이 함께 존재하고 있다. 그런데 얼마 전 이 블로그의 다른 글에 달린 덧글에서 누군가도 말했듯이, 이 둘의 차이는 단순히 ‘론’자 하나가 더 붙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국한되는 게 아닌 것 같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보다시피 아래 덧글은 냉커피님이 쓴 것이지만, 아래 논의에서 나는 그를 특정하지는 않는다).

맑스가 자본의 부제로 정치경제학 비판이라는 타이틀을 건 것은 새로운 정치경제학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말그대로 그들의 [sic] 방식으로 정치경제학을 반박하기 위해서는 아닐까요…그래서 우리는 자본론이 아니라 자본이라고 부르는 것이구요.. [출처링크]


예전에 진보넷 시절에 이런 문제를 가지고 네이버 블로거인 청수님과도 논쟁을 벌인 바가 있다(내 글은 나의 진보넷 블로그가 닫혀있으므로 링크를 걸 수 없지만, 청수님의 관련글은 걸 수 있다. 다음과 같다: 자본 음미 2자본 음미 2-1). 사실 청수님은 나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유명하신 분이다. 그분은 나를 안 지가 얼마 안 됐을지 몰라도 나는 그분을 꽤 오래 알아왔다. 따라서 나는 그분이 ‘자본론’이 아니라 굳이 ‘자본’을 고수하는 이유를 안다. 위 링크된 글의 버터 발라놓은 듯한 부드러움과는 거리가 먼 매우 강경한 어조로 ‘자본론’을 쓰는 이들을 완전히 바보 취급하는 것을, 적어도 김수행 교수가 자신의 번역판 제목을 《자본론》이라고 했다는 이유로 그를 비아냥대는 것을 본 일이 있다. 증거? 대라면 어디든 뒤져서 댈 수 있겠지만, 귀찮아서 관두련다.

어쨌거나 내가 하고픈 얘기는, 위에서 인용한 냉커피님의 ‘자본론 vs 자본’에 대한 말씀은, ‘자본’을 고수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꽤 일반적으로 관찰되는 주장이라는 거다. 물론 여기엔 청수님도 포함되며, 그의 ‘명성’ 등을 고려해볼 때 그는 이런 생각을 퍼뜨리는 데 나름 큰 역할을 한 인물 중 하나라고 나는 믿는다.

그러나 위와 같이 ‘분석’과 ‘비판’을 대비시킴으로써 ‘자본론’과 ‘자본’을 구별하는 시도는 크게 두 가지 의미에서 잘못된 것이다. 첫째, ‘비판’의 의미를 잘못 이해하고 있다는 점에서, 둘째, ‘론’의 의미를 잘못 이해하고 있다는 점에서.

2. 사태(?)의 전개

마르크스의 문제의 책의 정식 제목은 다음과 같다: Das Kapital. Kritik der politischen Ökonomie. 우리말로 직역하면, ‘자본. 정치경제학 비판’이 된다. 마르크스주의의 역사에서 봤을 때, 이 세 단어 중에서 가장 많은 곡절을 겪은 건 아마도 ‘비판’일 것이다. 당연한 얘기일 지도 모르지만, ‘비판’이 겪은 곡절은 곧 《Das Kapital》이 이제까지 받아들여져 온 방식과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 거칠게 말하면, 20세기 초 러시아혁명 이후 특히 스탈린의 지도 아래 이른바 공산주의 세계가 제 발로 서는 과정에서 《Das Kapital》로 대표되는 마르크스의 경제학과 역사유물론은 하나의 ‘체계’로 교조화됐고, 이와 관련해서 나중에 흔히 ‘경제결정론’ 또는 ‘경제주의’라고 호된 비판을 받게 된 일정한 경향이 고착화되기에 이른다. 앞서 언급한 ‘자본’ 고수자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는, ‘자본. 정치경제학 비판’이 ‘자본론’으로 굳어지는 과정이었다고 묘사할 수도 있겠다.

이런 상황에서, 《Das Kapital》의 원제목에 덧붙여진 ‘비판’이라는 표현에 주목하는 사람들이 나타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이들은 그 자체로 하나의 ‘정치경제학’이 되어버린 《Das Kapital》이 사실은 ‘정치경제학 비판’임을, 즉 자본(주의 경제)를 ‘설명’ 또는 ‘분석’하는 게 아니라 ‘비판’하는 저작임을 상기시킴으로써, 위에서 묘사한 사태에 경종을 울리려고 한다. 이런 사람들을 하나하나 거명할 수는 없지만, ‘열린 마르크스주의’(Open Marxism)라는 깃발 아래 모인 일군의 학자들도 그들 중 하나다(이들에 대해서는 박승호, 《좌파 현대자본주의론의 재구성》 참고).

이렇게 사태가 흘러가는 동안 하나의 대립구도가 형성되는 것은 필연적인데, 그 대립구도란 바로 다름아닌 “‘분석’ 대 ‘비판’”이다. 대표적인 열린 마르크스주의 논자인 워너 본펠드(Werner Bonefeld)나 존 홀로웨이(John Holloway) 같은 이들의 논의를 참조하면, 결국 이들이 제기하는 문제란, 대체로 1970년대 후반을 기준으로 삼았을 때, 이른바 ‘마르크스주의 정치경제학’이 20세기를 거치며 독점자본주의론, 국가독점자본주의론, 심지어 조절이론 등과 같은 형태로 발전을 거듭하는 과정에서 그 특유의 혁명성 및 비판성을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즉 ‘마르크스주의 정치경제학’이 자본주의의 변모를 설명하려고 애쓰는 동안 그것은 부르주아적 의미에서의 과학, 즉 현실의 겉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설명하고자 하는 일종의 변호론이 되어버렸다는 얘기다.

이와 같은 사태인식과 문제제기 자체는 좋다. 타당한 측면, 있다. 그러니까 지나치게 ‘분석적’으로 흐르는 마르크스주의 정치경제학에 대해 ‘비판’이라는 카드를 꺼내 제동을 거는 것까지는 좋았다. 그러나 위의 열린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그랬듯, 이렇게 ‘비판’을 강조하는 이들은 지나치게 많이 나가는 경향이 있다. 즉 그들은 ‘비판’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분석’을 거의 무시하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얘기다. 덧붙이자면, 이런 경향은 비단 ‘분석’과 ‘비판’을 대립시키는 사람들에만 한정되는 게 아니다. 그것은 ‘경제학 대 정치학 (또는 사회학, 철학 . . .)’와 같은 구도를 가진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그러니까 한마디로, 여전히 정치학이니 철학이니 하는 것들을 강조하면서 ‘경제결정론’이라는 흘러간 옛 노래를 즐기는 이들 모두에게 대체로 해당된다. 이 모든 사람들이, 경제학의 분석적 측면을, 나아가 경제학 자체를 무시하고 있다는 얘기다.

3. ‘비판’의 의미

‘경제학’의 의의에 대해서는 앞서 한차례 글을 쓴 일이 있으므로 여기선 ‘경제학 대 정치학 (또는 사회학, 철학 . . .)’에 대해선 얘긴 접고(이에 대해선 [링크] 참조), ‘분석 대 비판’에만 논의를 제한하겠다. 결국, 물과 기름과도 같이 섞일 수 없어 보이는 ‘분석’과 ‘비판’을 어떻게 하면 ‘변증법적으로’(!) 이해할 것이냐가 핵심일 것이다. 실제로 ‘비판’을 강조하는 사람들이 ‘분석’ 측면을 대놓고 무시하지는 않는다. 문제는 그들이, 애초 그들의 의도와는 달리, ‘분석’과 ‘변증법적으로’ 엮일 수 있는 ‘비판’ 개념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는 데 있다. 일반화하자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말하는 ‘비판’의 의미는 지나치게 단순하다는 거다(물론, 그동안 등한시되어오던 ‘비판’이라는 개념을 새롭게 살린다는 그들의 의도에 비춰볼 때, 이와 같은 단순함은 그들에게 매우 치명적인 결점이다).

내 주장은 무척 간단하다. 비판이라는 말, 마르크스가 ‘비판’이라는 말을 입밖에 냈을 때 그가 의미했던 것이 무엇인지를 조금만 생각해본다면 그것을 ‘분석’과 대립시키는 따위의 일은 헛되다는 게 쉽게 드러난다는 거다.

그렇다면 ‘비판’ 이란 무엇인가? 흔히 분석을 긍정적인 것으로, 비판을 부정적인 것으로 여기는데, 어원적으로 보든 아니면 그 개념이 실제 지성사에서 쓰인 방식으로 보든 ‘비판’이란 부정적이기보다는 긍정적인 개념이라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다. 어원적으로 ‘비판’(critique)이라는 단어는 고대 그리스어로까지 소급되는데, 이때 그것은 ‘위기’(crisis)와 같은 뿌리를 가지고 있다. 기본적으로 crisis란 일종의 의학용어라고 할 수 있는데, 환자의 병세가 하나의 국면에서 다른 하나의 국면으로 넘어가는 어떤 고비 같은 것을 뜻했다고 한다. 당연하게도, 이런 의미에서 crisis는 사태에 대한 면밀한 ‘분석’은 물론 그에 기반해서 내려질 냉철한 ‘판단’까지도 포괄하게 되는데, 이후 이런 ‘분석’이나 ‘판단’의 문제는 대체로 critique이라는 단어로 독립되었다. 나아가 critique은 코젤렉(Reinhart Koselleck)이 밝힌 바 있듯이 근대 서유럽 지성계에서 심지어 ‘이성(reason)의 사용’ 일반을 가리키는 용어로까지 발전하기에 이른다.

물론 그렇다고 ‘비판’에 부정적인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다시 이 말의 어원을 보자. 그것은 crisis와 맥을 같이 한다고 했고, 그런 의미에서 ‘비판’이란 비판 대상이 일정한 ‘위기’ 상황에 있다는 판단을, 나아가 그런 판단을 가능케 하는 그 대상에 대한 합리적인 ‘분석’을 전제한다고 했다. 예컨대 마르크스가 ‘정치경제학을 비판하겠다’라고 말했을 때, 그는 현재 정치경제학이 위기에 처했다고 판단하는 것이며, 이런 판단을 설득력 있게 내어놓으려면 정치경제학을 면밀히 파헤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후자의 작업은 필연적으로, 그 자신 하나의 정치경제학 체계를 결과로서 내놓을 텐데, 우리는 그 결과를 《Das Kapital》이라는 형태로 가지고 있다. 그렇다고 이 《Das Kapital》에 대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기존 정치경제학을 지양하기 위한 것이지 그 자체로 또 다른 정치경제학이기를 지향하지는 않는다”라고 말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반대로, 비판적이지 않은 경제학, 과학적이지 않은 경제학이 현실적으로 힘을 가지고 있는 동안에는, 이렇게 진정으로 비판적이고 과학적인 경제학을 내놓고 증진시키며 예의 그 잘못된 경제학에 그것을 대비시키는 것이야말로 진정으로 ‘비판적’인—‘부정적’ 의미에서의—기획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상의 논의에 비춰보면, 마르크스의 《Das Kapital》은—‘분석 대 비판’이라는 속류적인 대립에 입각해 말한다면—‘자본에 대한 비판’이라기보다는 ‘자본에 대한 분석’이라고 하는 편이 차라리 더 타당한 셈이다. 이와 같은 단순하고 속류적인 의미의 ‘비판’ 개념을 옹호하는 사람들은—물론 그 자신들은 그것이 그다지도 단순하고 속류적인 것인지도 몰랐겠지만—그럼에도 불구하고 《Das Kapital》의 ‘최종’ 목표는 자본을 ‘비판’하고 ‘지양’하는 것 아니냐고 항변할지 모르겠다. 나는 대답하겠다. 그게 그렇게 중요하다고 생각하면 끝까지 그렇게 항변하시라. Nobody cares.

4. ‘론’에 대하여

사실 마르크스의 비판 개념을 제대로 제시하려면 위에서보다 훨씬 더 많은 분량의 논의가 요구된다(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런 논의를 충분히 발전시킨 예를 나는 거의 본적이 없다). 그러나 위에 내놓은 이야기만으로도, ‘흔히 말하는 분석’이란 ‘진정한 비판 개념’을 구성하는 하나의 계기임이 분명해졌으리라 믿는다. 가장 단순히 말해도 그렇다는 얘기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서 예의 그 ‘제목’을 둘러싼 논란을 다시 보자. 글의 첫머리에서 인용한 ‘자본’ 옹호자는 자신의 ‘자본’ 옹호의 근거를, 마르크스는 《Das Kapital》을 “새로운 정치경제학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말그대로 그들의 [sic] 방식으로 정치경제학을 반박하기 위해” 썼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는 적어도 내가 직/간접적으로 본 한에서는 ‘자본’ 옹호자들이 거의 공통적으로 내세우는 근거인데, 이를 달리 표현하면 “《Das Kapital》은 자본을 분석/설명하는 게 아니라 비판/반박하기 위한 저작이다” 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다. 일단, 이상의 논의를 참조했을 때 이런 주장은 전혀 근거가 없다는 것을 확인해 두자. 그러고 난 다음, 하지만 더 재밌는 것은, 설령 이와 같은 (‘분석 대 비판’이라는) 이분법을 받아들이더라도, 그것이 ‘자본론’에서 ‘론’을 빼야 한다는 근거는 될 수 없다는 거다. 가장 단순히 말해도 ‘론’이란 ‘논하는 글’, ‘정당한 근거를 밝혀 주장하는 글’을 일컫는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이는 고전한문 문체의 하나로서(자세한 설명은 예컨대 [링크] 참조), 근대에 와서는 서양의 영향을 받아—단순히 말하면—‘논설문’으로 자리잡았다(배수찬, 《근대적 글쓰기의 형성 과정 연구》).

그러니까 《Das Kapital》을 ‘론’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것의 성격을 어떻게 보더라도—즉 그것을 ‘분석’이라고 보든 ‘비판’이라고 보든—지극히 정당하다. ‘자본’ 옹호자들은 《Das Kapital》의 자본에 대한 (‘분석’이나 ‘설명’이 아닌) ‘비판’으로서의 성격을 살리기 위해 그것을 ‘자본’으로 부른다고 하는데, 내가 사고방식이 특이해서 그런지 내가 보기엔 오히려 ‘자본’이라고 하는 게 더 ‘설명문’스럽다.

5. 진짜 중요한 문제는. . .

《Das Kapital》을 우리말로 번역할 때 ‘론’자를 붙이느냐 마느냐는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제목’과 관련해서 진짜 중요한 문제는, 그리고 실제 그것을 처음 번역했던 사람들이 고민했던 문제는 따로 있다. 바로 ‘Kapital’(또는 영어의 ‘capital’)을 ‘자본’으로 옮겼다는 거다.

지금 이 글을 읽는분께서는 ‘자본’을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가? 아마도 십중팔구는 가장 즉각적으로 ‘사업 밑천’ 같은 것을 떠올리지 않을까 한다. 무리는 아니다. 실제로 우리는 “자본이 딸려서 일을 시작을 못 하고 있어”라는 식의 표현에 매우 익숙하며, 국어사전을 찾아봐도 그것이 첫째 의미로 종종 나와있다([링크] 참조). 그러나 원래 ‘자본’은 ‘(사람의) 자태’를 가리키는 말이었고, 그것이 ‘사업 밑천’이라는 의미를 갖게 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서양적 의미에서의 ‘자본’(=capital)이 일본의 국어사전에 공공연히 등재된 것도 대정시대(1912-26년)나 되어서의 일로 보인다.

그렇다면 서양적 의미에서의 ‘자본’이란 무엇을 뜻하는가. 앞서 링크한 daum.net의 국어사전에도 나와있듯이 그것은 기본적으로 ‘생산을 위한 도구’를 뜻한다. 마르크스의 저작을 읽다보면 우리는 “자본이란 단순한 생산용구들의 총합이 아니다. 그것은 사람들 사이의 관계다”와 같은 표현을 종종 마주친다. 이 표현은 거꾸로, 일반적으로 ‘capital’이란 ‘생산용구’를 의미했음을 시사한다. 마르크스 자신도 자신의 경제학적 저작들에서 서술하고 있듯이, 원래 ‘capital’의 어원도 ‘가축의 머리(머릿수)’와 관련이 있다. 당연히 가축은 가장 전통적인 ‘생산용구’다.

그렇다면 이렇게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던 두 표현이 ‘랑데부’한 까닭은 뭘까? 즉 대체로 ‘생산용구’를 뜻하는 ‘capital’이, 도대체 어떤 경과를 거쳐 ‘자태’, ‘사업 밑천’ 등의 의미를 이미 가지고 있던 ‘자본’으로 번역된 것일까? 관련 문헌을 조금 찾아보면 틀림없이 이에 대한 설명을 구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은 하면서도 나는 아직 본격적으로 그런 작업을 실행해보진 않았다. 누군가 관심있는 분께서 찾아내신다면 알려주시면 좋겠다. 다만 여기서 다시 드러나는 것은, ‘제목’ 문제와 관련해서 왈가왈부하길 좋아하는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사소한 ‘론’에 대해 트집잡기를 일삼으면서도 정작 더 중요한 ‘자본’에 대해서는 문제제기조차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가소(可笑)롭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자본론 vs 자본

다음은 2008년 12월, 국내에 시판중인 《Das Kapital》의 두 가지 버전, 즉 김수행 번역의 《자본론》과 강신준 번역의 《자본》의 일부분을 재미 삼아 대조해본 뒤에 쓴 글이다. 최근 방명록에서 ‘너구리’님의 부탁도 있고 해서 약간 수정/가필해 다시 올린다.




1. 일단 먼저 말해둘 것은, 적어도 《자본(론)》에는 ‘독일어의 심오함’ 따위는 없다는 게 내 판단이다. 독일어의 심오함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놀랍게도) 《자본(론)》을 제대로 안 읽어본 사람이거나 또는 힘들여 독일어로 읽은 데 따른 일종의 보상심리를 가진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자본(론)》에 특정 언어만이 가지고 있는 이른바 ‘심오함’이 없는 가장 기본적인 이유는 단순하게도 마르크스 자신이 그런 성격을 최대한 배제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철학자들이나 정치학자들은 반대할지도 모르지만, 《자본(론)》은 뭣보다 경제학적 저작이고 그런 의도로 저자에 의해 씌었다. 그래서 예컨대 ‘대상성’(Gegenständlichkeit)이라는 다분히 철학적인 용어조차도 《자본(론)》에서는 이를테면 《경철수고》에서 만큼 커다란 울림을 자아내지 않는다. 또는 그런 울림이 있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자본(론)》을 이해하는 데 있어 그 울림은 그다지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울림’에 지나치게 집중하게 되면, 《자본(론)》을 그릇된 방식으로 이해하기 쉽다.


2. ‘독일어의 심오함’에 대한 언급으로 글을 여는 까닭은, 실제로 그 동안 김수행판이 그런 심오함을 살리지 못하기 때문에 나쁜 번역이라는 식의 주장이 매우 널리 퍼져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런 판단에 반대하며, 거기엔 어떠한 근거도 없다고 생각한다.

김수행판이 갖는 기본적인 한계는, 매우 당연하게도 그것이 중복번역이라는 데 있다. 원래의 의미들이 그런 과정에서 단순화되기도 했고, 어떤 경우엔 현저하게 바뀌기도 했으며, 또 구절 자체가 빠지기도 했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그런 모든 문제들은 대체로 중복번역이라는 데서 오거나, 그저 번역이라는 것 일반이 갖는 문제점 때문이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단순히 번역자 또는 편집자(출판사)의 서투름 때문이지, 결코 ‘독일어의 심오함’을 살려내지 못한 ‘영어의 경박함’ 때문이 아니다. (따라서 앞으로 ‘독일어의 심오함’ 운운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들은 모든 각국어로 나온 책들도 독일어로 번역된 것으로 보고, 모든 외국책들의 한글번역도 그 원전의 심오한 독일어 번역판에 기반해서 할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단순화나 변형은 대체로 전체 내용을 이해하는 데 커다란 문제를 제기하지는 않는다. 사실은 바로 그것이 지금까지 김수행판이 그다지 크게 문제되지 않았던 까닭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어떤 면에서 보면 영어판을 참조한 것, 나아가 독일보다는 영국에 더 익숙한 사람(김수행)이 번역한 것이 여러모로 장점이기도 했다. 이를 두고 김수행은 자신이 번역한 《자본론》 제1권의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기도 했다.

《자본론》의 이론적 토대는 주로 영국의 고전파 경제학에 대한 비판이며 그것의 현실적 예증은 주로 영국사회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영역판이 번역에 훨씬 유리하다고 생각했으며, 번역자 자신이 영국에서 10년 이상 살면서 연구했다는 사실도 번역에 큰 도움을 주었다.

글쎄. “영역판이 번역에 훨씬 유리하다”고까지 하는 데는 쉽게 동의할 수 없지만, 그 앞부분은 타당한 평가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럼에도, 《자본(론)》은 독일어로 씌었다. 따라서 그 언어를 기반으로 번역하는 것이 당연한 이치다. ‘유/불리’를 따질 문제가 아닌 것이다.


3. 이렇게 본다면, 독일어를 기반으로 하되, 영국의 역사와 사회, 그리고 영국을 중심으로 하는 고전파 정치경제학에 대한 이해도가 높은 사람이 번역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것인가? ‘이상’을 따지자면 나는 그런 개인 또는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는 집단이 번역하는 것이 가장 좋다고 본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현실이 얼마나 거기 따라줄지는 의문이다. 이렇게 보면, 아예 몇몇 전문가들의 자문 아래 능력 있는 전문번역가가 나서는 것도 생각해봄 직하다.

이 얘긴 그러니까, 나는 이번에 《자본》과 《자본론》을 함께 보면서, 두 교수들의 학자로서의 자질보다는 번역가로서의 자질에 새삼 의심을 품게 되었다는 뜻이다. 즉 두 번역에서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것은 많은 경우 그들의 번역가로서의 자질 부족에서 비롯됨을 발견했다. 뿐만 아니라 이런 문제는 번역가 개인의 문제이기만 한 게 아니라 그 편집을 책임지는 출판사의 책임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김수행 번역판의 경우엔 언어구사가 자연스럽지 못한 대목이 많다. 내가 보기엔 이는 거의 전적으로 출판사의 문제다. 왜 자연스럽게 다듬지 않는가? 내가 알기론 비봉출판사는 거의 사장 한 사람에 의해 운영되는 회사로, 《자본론》에 대해서도 매우 소극적인 의미의 편집 이외에는 관여하지 않았다. 이는 결코 ‘번역자를 존중’하는 게 아니다. 맞춤법이나 띄어쓰기에조차 오류가 많다면, 그게 과연 누구의 잘못이겠는가? 반면 강신준판의 경우엔 자연스런 언어구사가 읽는이를 편하게 해준다. 정확한 사정은 모르지만, 이건 아무래도 출판사에서 나름의 방침을 가지고 정성껏 손을 봤기 때문이리라. (조교 시켜서는 이렇게 나오기 어렵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강신준-도서출판 길’이 환상적인 팀이었다는 건 절대 아니다. 실은 그 반대다. 나는 기본적으로 번역서의 질을 볼 때, 그 옮긴이가 인명, 지명, 책제목 등을 어떻게 처리했는가를 본다. 아마 많은 이들이 그러리라 짐작한다. 그런 기본적인 사항을 제대로 번역했다는 것은 적어도 번역이 상당한 성실성을 가지고 진행되었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자본(론)》의 경우 이런 것이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예컨대 인명의 경우, 인용되는 저자들이 영국인, 프랑스인, 독일인, 이탈리아인 등으로 매우 다양하기 때문이다. 같은 Michael도 경우에 따라 ‘마이클’이라 하거나 ‘미하엘’로 해야 한다. 바로 이런 점에서 강교수의 번역은 크게 만족스럽지는 않다. 생각해보면 이는 영어 이외의 언어로 된 책의 번역서에서 발견되는 공통된 문제이기도 하다. 그런 책들을 보면, 영어권 사람의 이름조차도 독일어식/프랑스어식 등으로 표기하는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이 무지 때문인지, 아니면 알량한 자존심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다.

인명표기와 관련, 강신준판 《자본》은 강신준 교수의 독일어 구사능력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니냐는 의심까지도 불러 일으킨다. 무슨 말인가? 이를테면 이런 거다. 영어에서는 사람이름이 소유격으로 쓰일 때 Michael’s와 같은 식으로 ‘어포스트로피 s’가 붙지만, 독일어에서는 다짜고짜 ‘s’만 붙고는 한다. 그런데 강교수는 설마 이것을 모르지는 않을 텐데도, 그런 이름들을 s와 구분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예컨대 《꿀벌의 우화》로 유명한 맨더빌을 ‘Mandevilles’로 표기하는 식이다. (설마 이것이 강교수의 문제일까! 출판사 잘못이 크리라 본다. 하지만 욕은 옮긴이가 주로 먹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밖에도 강교수의 번역엔 저서 등을 표기하는 방식, 옮긴이 주를 다는 맥락 등등에 있어서도 적지 않은 문제들을 품고 있다. 예컨대 〈제2판 후기〉 부분인 56-7쪽을 보자. 56쪽의 각주(4번)에 《Saturday Review》라는 저널이 인용된다. 강교수는 이를 《새터데이 리뷰》라고 해놓고, 아주 친절하게도 “’토요평론’이라는 뜻”이라는 옮긴이 주를 달아놓음으로써 지나친 친절을 과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친절함이 무색하게도 이후 이런 식의 옮긴이 주는 내가 본 범위에서는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심지어 그는 바로 다음 페이지에서는 《Journal du économistes》라는 저널을 《이코노미스트》라고 옮기고 있다. 여기엔 예의 그 ‘친절한’ 옮긴이 주도 안 달렸을 뿐만 아니라, 잘 모르는 사람이 보면 영국의 경제지 《이코노미스트》랑 혼동하기 딱 좋게 번역된 것이다. 실제로 마르크스는 바로 이 《이코노미스트》를 매우 많이 인용한다. 따라서 내가 보기엔 《경제학자 저널》이라고 했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공교롭게도 지금 보고 있는 56-7쪽엔 완전한 오역도 있다. 56쪽에 지베르(Sieber)의 저작이 인용되는데, 그 제목이 잘못 옮겨진 것이다. 《리카도의 가치 및 화폐 이론》으로 되어 있는데, 여기서 ‘화폐’는 ‘자본’이 되어야 옳다.


4. 이상의 언급들이 지나치게 사소한 것처럼 보이는가? 하지만 나는 지금 번역의 ‘기본’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며, 그런 측면에서 위와 같은 문제들은 결코 사소한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내가 괜한 트집을 잡는다고 생각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들에게는 두 가지 예를 보여주면 충분할 것 같다.

(1) 역시 위와 같은 〈제2판 후기〉의 한 대목이다. 54쪽 윗단락 마지막 부분:

… [계급투쟁이 격화됨에 따라] 사심없는 연구 대신 돈벌이를 위한 논쟁이 자리를 잡았고, 편견없는 연구 대신 비양심적이고 불순한 의도를 가진 변론들이 자리를 차지하였다. 그러나 공장주 코브던(Cobden)과 브라이트(Bright)가 선봉에 섰던 곡물법 반대동맹이 날림으로 만들어 시중에 배포한 조잡한 소책자까지만 해도 토지소유귀족들에 대한 그들의 반론 속에는 비록 전혀 과학적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적어도 역사적인 흥미 정도는 불러일으키는 구석이 아직 남아 있었다. 그러나 로버트 필 이후의 자유무역입법은 이런 마지막 양념조차도 속류경제학에서 완전히 지워버리고 있다.

별 생각 없이 읽으면 위 내용은 아무 문제가 없는 것 같다. 그러나 마지막 문장의 “양념”이라는 단어를 보라. 문맥을 고려했을 때, 과연 그것이 적절한 어휘인가? 위 대목은 그나마 과거엔 경제학이 나름 괜찮았고 비판적인 측면이 조금은 있었는데 계급투쟁이 격화됨에 따라 점점 더 부르주아지들의 이익에 봉사하는 도구로 전락했다는 내용을 품고 있으며, “양념”이란 바로 그 종전까지만 해도 얼마간 남아있었던 바로 그 비판적 요소를 일컫는다. 그러나 “양념”이 뭔가? 그것은 오히려 전체 음식의 맛을 돋워주는 역할을 하지 않는가? 따라서 여기서 “마지막 양념”이란 표현은 어울리지 않는다. “양념”에 해당하는 독일어는 Stachel인데, 여기엔 “양념” 말고도 “일침(=sting)”이란 뜻도 있다. 이 대목에서는 후자로 번역해야 하는 것이다. (실은 바로 이 “일침”에 해당하는 것들, 즉 경제학의 역사 속에서 “적어도 역사적인 흥미 정도는 불러일으키는 구석”들을 재구성해서, 마르크스는 《잉여가치학설사》를 내놓으려고 했다.)

(2) 마음을 조금 관대하게 먹는다면, “일침”을 “양념”으로 쓴대도 큰 문제가 없다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럴까? 엥겔스가 쓴 〈제3판에 부쳐〉의 한 구절을 보자. 69쪽 마지막 부분:

… [마르크스가 인용하는 방식의 특징과 그렇게 하는 까닭을 설명한 뒤] 그래서 독자들은 이제 제2판의 후기에서 볼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왜 마르크스가 거의 전적으로 독일의 경제학자들만 인용하고 있는지 그 이유를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역시 별 생각 없이 읽으면 위 구절도 그럴싸해 보인다. 하지만 나는 저 대목에서 깜짝 놀랐는데, ‘과연 강신준 교수는 《자본(론)》을 읽어나 보았는가!?’하는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가 “독일의 경제학자들만”, 그것도 “거의 전적으로” 인용하고 있다고?!!! 더 길게 말할 필요 없다. 위 대목은 다음과 같이 바뀌어야 한다: “…왜 마르크스가 예외적으로만 독일의 경제학자들을 인용하고 있는지…” 어쩌다 이런 오역이 나왔을까? 그저 한숨이 나올 따름이다.

이상과 같은 어처구니없는 오류들이 강교수 번역의 신뢰도를 매우 심각하게 떨어뜨릴 뿐만 아니라, 맨 처음 트랙백해 둔 글에서 밝혔듯이 〈해제〉와 〈옮긴이의 말〉에 나오는 그의 자신만만한 표현들을 공허하게 만드는 것이다. 특히 마지막 두 개의 예는, 강교수의 독일어실력이나 번역가로서의 자질, 또는 출판사의 편집솜씨 등이 아니라, 강교수의 텍스트 이해 자체를, 나아가 그의 경제학자로서의 자질 자체를 의심케 하는 데 충분하리라 본다.

(나중에 발견한 것인데, 강교수의 내용이해가 완전히 실패했음을 보여주는 가장 명백한 예가 바로 제1장 제2절에 있다. 관심 있으신 분들은 거기서 헤겔을 언급하는 대목에서 강교수가 붙여놓은 옮긴이 주를 찾아보시기 바란다.)


5. 내가 지나치게 강교수판에 회의적인 것으로 보일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그것은 당연한 것이며, 그렇다고 해서 내가 김수행판에 특별한 애착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다. 김수행판에 대해 말하자면, 강교수판의 등장으로 중복번역이라는 그 기본적인 한계가 이제는 더 이상 지탱되기 어려울 정도로 되었지 않느냐는 것이 내 판단이다. 그러나 그런 한계가 곧 강신준판으로 사람들이 몰릴 것임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왜? 위에서 몇 가지 예를 들면서 얘기했듯, 강신준판이 ‘원어번역’이라는 이점을 그다지 잘 살려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거기에 덧붙여 두 번역자가 드러낸 학문적 자질 부분에서도, 강교수 쪽이 몇 수 아래인 것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김교수의 번역엔 적어도 위 (2)와 같은 오역, 핵심적인 내용 이해를 해치는 심각한 오역은 거의 없다. 물론 이는 오랜 세월에 걸쳐 번역자 자신은 물론 여러 후학들에 의한 교정 덕분이기도 하다).

따라서 결국 장기적으로는, 둘의 공동작업, 또는 제3자에 의한 둘의 ‘비판적 지양’을 통해 사태가 해결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그러나 그 기간이 지체되는 데 따르는 피해는 독자들과 후학들이 고스란히 떠안을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현재 사태에 대해 좀 더 정확하게 얘기하면, 강신준판의 등장으로 김수행판의 한계는 전보다 훨씬 더 크게 느껴지겠지만 앞으로 한동안 사람들은 그 한계에 맞춰 자신의 인내심을 더 키워내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인 셈이다.


6. 그렇다면 최종적인 질문. 과연 어떤 것을 볼 것인가? 당연한 얘기지만, 독자 각자가 처한 입장에 따라 다를 것이다. 내가 보기엔, 기존에 김수행 번역판을 통해 《자본(론)》을 봤던 사람은 굳이 강신준판을 살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아무래도 ‘익숙함’이라는 미덕을 대체할 만한 확실한 그 무엇을 제공해주기에 강교수판은 좀 부족하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이제 막 마르크스의 이 걸작에 입문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강신준 교수의 번역이 ‘표현’ 등의 면에서 좀 더 친근하게 다가올 수 있을 것 같다.

그렇다면 《자본(론)》에 좀 깊이 있게 접근하고자 하는 사람은? 에, 결국 둘 다 봐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엔, 강교수 번역판을 ‘기본’으로 삼는 것도 (기존 김수행 판의 ‘익숙함’의 미덕을 버리더라도) 나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왜냐하면 그럴 경우 ‘영어판’을 좀 더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국내의 대부분의 독자들이 독일어보다는 영어에 훨씬 더 익숙하다는 (심지어 독일어를 할 줄 아는 사람조차도) 사실을 고려하면 매우 큰 장점이다. 무슨 말이냐 하면, 김수행판은 원래 영어판을 대본으로 삼았으므로, 읽다가 원문을 대조하려면 부득이 독일어 원전을 봐야만 했다. 독일어 못해서 한글로 보는 건데, 내용의 정확한 이해를 위해 독일어를 참조한다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닌 것. 그러나 강신준판을 보게 되면, 굳이 독일어 원전을 보지 않고 영어판만 봐도 cross-checking이 가능하게 된단 말씀이다. 물론 이것은 강교수의 위에서 언급된 것과 같은 치명적인 오역을 가려낼 수 있는 사람한테 해당되는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