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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케티(Piketty) 비판의 지점들과 그의 {자본론}의 이론적 의의

피케티(앞서 어떤 분께서 지적도 하셨고, 이번 글은 좀 진지하게 쓰겠다는 의미에서, 그간의 ‘피꿰띠-‘ 대신 ‘피케티’라고 표기하겠다. 엄숙 엄숙 -_-) 열풍이 좀 잦아드나 싶더니 최근 {매일경제}에서 ‘한국의 피케티 보고서’라는 제목의 기획을 내놓았고(링크), 그 사이 영미권에서는 피케티의 ‘강점’으로 꼽히던 데이터 및 그 분석에 이의가 제기되고 있다(링크).

다른 한편, 현재 자타가 공인하는 세계 최고의 마르크스주의 학자인 캘리니코스(Alex Callinicos)나 하비(David Harvey) 같은 이들이 피케티에 대한 서평들을 내놓으면서, 마르크스식 정치경제학의 입장에서 일정 정도 그를 비판하고 있다. 마침 두 글 모두 국내에 번역되기도 했는데(링크1링크2), 내가 보기엔 이들의 비판은 매우 부적절하다. 이걸로는 피케티가 내놓고 있는 마르크스에 대한 ‘불경’을 꾸짖는 건 어림도 없다. 좀 더 그럴싸한 게 필요하다..

‘급진적 독자노선’이냐, ‘전술적 연합노선’이냐

피케티의 데이터와 그에 대한 분석방식을 둘러싼 논란에서 시작해 보자. 이는 우리같은 ‘급진적’ 자본주의 비판가들에게 매우 곤혹스러운 상황을 만들어 놓았다. 왜냐하면 피케티의 분석은 그 자체로 흠결이 많아 아주 혹독한 비판을 받아야 마땅하나, 현재 {파이낸셜 타임스}를 중심으로(국내에선 {한국경제}가 이를 매우 꼴사납게 흉내내고 있다. 링크) 벌어지고 있는 ‘피케티 때리기’가 우파들의 역공이라는 의미도 있어서 피케티 측과 일종의 ‘연합전선’을 펴야 할 필요성도 있기 때문이다.

어떻게 해야 할까? 결국 둘 다 필요할 것이다. 어차피 우리들의 목소리가 사태에 큰 영향을 주기는 어려울테니, ‘연합’에 목을 맬 필요는 없으리라. 뭐, 대충 이런 생각을 가지고… 이번엔 피케티를 좀 진지하고 비판적으로 다뤄보겠다.

피케티의 분석과 주장: 무엇이 핵심이고 무엇이 새로운가

먼저 피케티의 논의를 간략하게 요약해보자. 대체 그가 700쪽에 육박하는 이 ‘대작’에서 어떤 분석과 주장을 내놓은 것인가? 그의 핵심 논리는 크게 다음과 같이 요약 가능하다:

    1. 1970년대 이후 두드러진 소득불평등 심화는 자산소유의 불평등과 관련되어 있다.
    2. 이렇게 되는 원인은 자산수익률(r)이 경제성장률(g)보다 크기 때문인데,
    3. r>g이면 경제가 성장함에 따라 GDP 대비 자산의 크기가 점차 증가할 것이며, 자산을 소유한 소수의 부자들에게 부가 집중될 것이다.
    4. 이러한 경제체제는 가히 ‘세습 자본주의(patrimonial capitalism)’라 부를 만하며, 이렇게 가다간—특히 경제성장률이 낮을 때는—해마다 새로 생산되는 국민소득의 대부분을 극소수의 자산가가 취득하게 되어 자본주의는 종말을 고할 수도 있다.
    5. 그러나 만약 우리가 누진세나 자산세 등을 통하여 제도적으로 자산수익률(r)을 낮출 수 있다면—역사적으로 1913년 이후에 그랬듯—불평등은 완화되면서 자본주의도 좀 더 살만한 곳이 될 것이다.

많은 이들이 피케티가 방대한 자료를 모아서 불평등의 현실을 실증적으로 보여줬다는 데서 그의 가장 큰 업적을 찾는데, 내 생각은 다르다. 피케티 책의 핵심은 자료에 있지 않다. 사실 그런 식의 자료라면 이미 예전에도 많이 나왔었고, 최근 피케티에게 극찬을 아끼지 않은 크루그만이나 스티글리츠 같은 이들도 수차례 그런 자료들을 인용하면서 글을 쓴적이 있다(나도 이 블로그에 한번 쓴 적이 있다. 링크).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피케티를 ‘방대한 자료를 모아 불평등의 현실을 실증했다’라는 식으로 칭찬하는 것은 그야말로 ‘주례사 비평’의 전형 같다.

게다가, 그가 내놓는 ‘자료’라는 것의 상당 부분이 그다지 믿을만하지가 않다(부분적으로는 {FT}에서도 지적되었던 바다). 몇몇 선진국의 자료들은 그렇다 쳐도 중앙아시아—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중동이나 이름에 ‘스탄’ 들어가는 나라들—의 19세기 소득 및 자산 자료가 과연 믿을만하겠냐는 거다. 선진국들 자료라고 나을 게 없다. 피케티는 주로 개인 과세자료를 이용하고 있는데, 이것으로 경제적 불평등을 말하는 데는—특히나 장기적인 추세를 볼 때는—상당한 무리가 따른다. 이를테면, 개인 과세자료에 의거할 경우, 맞벌이 하는 부부가 거기에 각각 따로 등장할 것이므로 이들이 불평등하다는 implication이 나온다. 그러나 사실상 이들은 하나의 가계를 이룰 것이며, 아닌 게 아니라 불평등은 가계 단위에서 보는 것이 실질적으로 타당하다. 더구나 맞벌이의 사회적 존재양태가 나라마다 문화마다 다르고, 역사적으로도 다양하게 변천해왔음을 고려하면, 개인 과세자료로 불평등을 말하는 것의 의의는 더더욱 줄어들 수밖에 없다.

[주: 이를테면 이런거다. (1) 우리나라에서 맞벌이가 상당히 광범위하게 퍼져있기도 하지만, 상위 1%나 0.1%의 부자들은 맞벌이 잘 안한다. 따라서 최상위에 속한 개인의 소득은 그대로 가계소득일 가능성이 높지만, 중간층에 속한 개인의 소득은 가계소득보다 적을 확률이 높다. 따라서 우리가 개인소득보다 가계소득이 불평등의 좀 더 유의미한 지표라는 데 동의한다면, 국세청 소득세자료에 나타나는 불평등은 실제보다 과장된 것일 가능성이 있다. (2) 한편 역사적으로 봤을 때, 맞벌이는 점점 일반화되어왔을 것이다. 따라서 중간층에 속했다 하더라도 개인소득=가계소득일 가능성이 오늘날보다 과거에 더욱 컸으리라. 등등.]

그보다, 피케티 분석의 핵심은 ‘r>g’라는 부등식에 있다. 그 스스로도 이를 ‘자본주의의 핵심 모순(the central contradiction of capitalism)’이라 부르고 있지 않은가? 그의 논의가 만약 fancy해 보인다면, 그것은 바로 이 부등식 덕분이다. ‘유사이래 자본수익률(r)이 언제나 경제성장률(g)보다 컸다. 따라서 경제적 수입이 자본(=부)을 소유한 소수의 자산가에게 몰릴 수밖에 없고, 결과적으로 불평등은 계속해서 커질 것이다.’ 이러한 명제를 바로 이 간결한 부등식은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 하나면 모든 것이 명쾌해 보인다. 피케티의 핵심은 바로 이것을 정식화했다는 데 있다.

또 하나. 피케티는 이러한 부등식을 ‘자본주의의 핵심 모순’이라고 하면서, 이를 제어하지 못한다면 우리가 사는 체제는 ‘세습 자본주의’로 전락할 것이라고 경고한다. 이것이 피케티의 말하자면 ‘자본주의론’의 핵심이다.

피케티 비판의 지점들

이제 피케티에 대한 몇 가지 기본적인 비판지점들을 짚어보겠다.

(1) 피케티에겐 ‘자본주의’가 무엇인지 불분명하다

피케티에 대하여 다양한 비판이 가능하다. 가장 기본적으로는, 도무지 피케티의 논의 속에서는 우리 시대를 ‘자본주의’라고 부르는 이유가 무엇인지가 불분명하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그가 스스로 자신에게 핵심적이라고 하는 r>g라는 부등식도, 서기 시대(AD) 내내 성립하는 것으로 제시되고 있지 않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를 ‘자본주의의 핵심 모순’이라고 명명하고 있다. 자본주의 역사가 2000년이 넘었다는 뜻일까?

내가 봤을 때 이것은 매우 치명적인 약점이다. 그러나 뒤에 쓰겠지만, 어차피 피케티는 분배영역에서의 ‘불평등’에만 관심이 있으므로 자본주의가 무엇이고 언제부터 시작됐는지에 대해선 아무래도 상관 없으리라.

(2) 피케티가 쓰는 핵심 데이터로는 ‘세습’ 자본주의를 주장하긴 어렵다

위의 것은 매우 치명적인 비판이긴 하지만, 이런 비판으로는 피케티를 아프게 할 수 없다. 좀 더 내재적이고도 ‘너 이놈, 꼼짝마!’ 할 수 있는 ‘원펀치’ 없을까? 글쎄, 이런건 어떨까: 피케티의 주장대로 r이 g보다 크고, 그래서 부가 소수의 자산가에게 몰리고 있으며, 결과적으로 GDP 중에서 상위 1% 부자들의 몫이 점점 늘어난다고 해서, 오늘날의 자본주의를 저절로 ‘세습 자본주의’라고 단정짓는 게 정당화되진 않는다는 사실이다.

왜 그러한가? 바로 ‘최상위 1%’의 소득이나 자산의 몫이 점점 증가한다고 해도, 거기 속한 사람들이 계속해서 바뀔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만약 최상위 1%의 인적구성이 끊임없이 바뀌면서 그 소득비중이 커지고 있다면, 우리는 ‘불평등이 커지고 있다’라고는 할 수 있을지라도 ‘세습 자본주의가 도래하고 있다’라고 결론내릴 수는 없다.

그런데 문제는, 그러한 결론은 그가 그렇게도 자랑스러워 하는 그의 데이터를 가지고서는 결코 도출될 수 없다는 점이다. 주지하다시피 그가 주로 사용하는 데이터는 개인들의 과세자료이긴 하지만 이는 각 개인들 수준에서의 자료가 아니라 총량 수준의 것이다. 이를 통해서는 ‘상위 1%의 소득비중의 변화추이’를 보는 것은 가능하지만, 거기에 누가 들어가 있는지, 얼마나 많은 이들이 들고 나는지 등은 볼 수 없다. 소득세 자료가 아닌 상속세 자료를 봐도 마찬가지다. 부(wealth)가 증가하면 세습도 많이 되는 건 당연하다. 그러나 이것 자체를 가지고 ‘세습 자본주의’라고 할 순 없다. 예컨대, 명동에 있는 커다란 건물에 대하여 4번의 상속세가 부과되었다고 해도, 그 4번의 상속이 모두 상이한 가족들에서 벌어졌다면 말이다. 결국 좀 더 적극적인 결론(‘세습’)을 얻기 위해서는 더 많은 정보(개인정보!)가 필요한데, 피케티에겐 그것이 없다.

요컨대 피케티는 방대한 데이터를 모아 야심찬 작업을 했지만, 그가 주로 의존한 데이터를 가지고는 ‘세습 자본주의’를 증명할 수 없다. 이를 위해선 더 많은 자료가 필요한데도, 그것 없이 ‘세습 자본주의’라는 결론을 성급하게 내렸다. 치명적인 논리적 모순이다. 그런데 만약 ‘세습 자본주의’를 증명하지 못한다면, 피케티 주장은 ‘불평등’에 관한 수많은 다른 논의들과 다를 바가 없어진다. 대체 그 많은 사람들이 피케티를 두고 호들갑을 떠는 이유가 무엇인가?

(3) 오늘날의 자본주의는 ‘세습 자본주의’가 아니다

그런데 피케티가 적절한 자료를 가지고 충분하게 증명하질 못해서 그렇지 오늘의 세상이 실제로 ‘세습 자본주의’일 수도 있지 않은가? 말은 된다. 그렇다면 실상은? 안타깝게도, 아니다.

이 대목에서 재밌는 사실 한 가지. 최고 부자들이 계속해서 바뀐다는 것을 피케티 스스로도 모르진 않으리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책 제12장에서 {포브스}나 {포춘} 같은 잡지에서 내놓는 억만장자 리스트를 인용하면서, “이 목록에서는 1987년부터 1995년까지는 일본인 억만장자, 그 뒤 1995~2009년까지는 미국인 억만장자, 끝으로 2010년 이후엔 멕시코인 억만장자가 수위를 차지했다”라고 쓰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이로부터 ‘인적구성 변화’에 관한 생각을 전혀 발전시키지 못하고 있는데, 이는 피케티가 이 구절을 쓰면서조차 얼마나 ‘세습 자본주의’라는 망상(?)에 사로잡혀 있었는지를 방증하는 것처럼 보인다.

한 가지 더. 피케티가 좋아하는 과세자료를 좀 보자. 미국 국세청은 매년 개인소득세 상위 400명에 대한 통계를 낸다. 피케티 말대로 자본주의가 세습 형태로 발달하고 있다면, 이 목록에 있는 사람들이 오랜 기간 거의 변동이 없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1992~2009년까지 18년간 무려 3,869명이 이 목록에 이름을 올리고 있으며, 그 중 27%만이 2번 이상이다. 10번 이상 올라간 사람은 고작 2% 조금 넘을 뿐이다(링크). 범위를 좀 더 넓혀, ‘상위 1%’라고 하면 어떨까? 내 생각엔, 10번 이상 1%에 든 사람들의 비중이 2%보다야 훨씬 크겠지만, 여전히 이를 두고 ’세습 자본주의’라고 부르기엔 좀 민망하다.

(4) 중요한 것은 세습이냐 아니냐가 아니다—‘경쟁’이다

반드시 {포브스}나 {포춘}의 목록, 미국 국세청의 ‘400명’ 목록에 올라야만 최고 부자는 아니다. 목록 바깥에 있더라도, 어쨌든 거기 한번쯤 오른 사람은 여전히 부자일 가능성이 높으며, 이들의 부가 다음 세대로 세습될 가능성도 높다. 그러나 만약 이런 정도의 사항을 가지고 피케티가 ‘세습 자본주의’라고 했다면, 그는 세제개편보다는 아예 부의 세습을 폐지하자고, 나아가 사유재산제도 자체를 없애자고 하는 편이 나았으리라.

좀 더 적극적으로 따지면, 세습은 그렇게—오늘날의 자본주의를 ‘세습 자본주의’라고 이름붙일 정도로—중요한 문제도 아니다. 말하자면, 18년간 국세청의 400명 목록에 오른 3,869명 중에서 2%에 불과한 70~80명의 사람들보다는 그 나머지 사람들에 대하여 말하는 편이, 오늘날 우리가 사는 자본주의의 본질에 더욱 다가갈 수 있는 방법이 아니겠냐는 것이다. 자, 이들은 어쩌다가 저 목록에 오르게 되었는가? 또 어쩌다가 거기에서 끌어내려졌는가?

어떻게 누군가가 저런 목록에 새롭게 이름을 올릴 수 있을까? 부지런해서? 장가를 잘 가서? 정부의 개발사업으로 갑자기 떼돈을 벌어서? 가능하다. 반면 어떤 이들은 왜 떨어져 나가는 것일까? 방탕해서? 자식을 잘못 둬서? 주식시장에서 실수해서? 그럴 수도 있다. 실제로 피케티가 오스틴이나 발자크의 19세기 소설을 들먹이는 것도, 이런 요인들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적어도 자본주의 하에서라면 우리는 여기서 ‘경쟁’을 떠올려야 한다. 사실 경쟁이야말로 자본주의의 역동성 그 자체다. ‘최상위 1%’의 소득비중이 커지는 것도 결국엔 치열한 경쟁의 결과다.

(5) ‘경쟁’의 부재: 피케티의 또 하나의 치명적 약점

피케티가 경쟁에 대하여 언급을 전혀 안하는 것은 아니다. 글의 “서문”에서 그는 자본주의가 발달함에 따라 경쟁에 의해 불평등이 줄어들 것이라는 쿠즈네츠(Simon Kuznetz) 가설을 비판한다. 주류 경제학자들은 이 가설에 입각해 자본주의의 ‘진보성’을 주장해온 한편, 만약 현실에서 불평등이 증가한다면 그것은 자유로운 경쟁이 방해받기 때문이라고 말하곤 한다. 그들에겐 독점이나 지대수입의 증가 등도 경쟁 메커니즘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은 결과이자 완전경쟁을 방해하는 요소다.

기본적으로 피케티는 이러한 주류적 생각에 반기를 든다. 그는 “제한 없는 경쟁(unrestricted competition)이 세습을 끝장내고 좀 더 능력 본위의 세계로 이끌리라는 것은 위험한 환상”(424쪽)이라고 경고한다. 그에 따르면 불평등은 자유로운 경쟁 하에서도 커지는데, 이는 바로 (최소한 그의 논리 안에서는) r>g라는 부등식 때문이다. 그에게 이는 신고전파가 가정하는 매우 이상적인 상황(=완전경쟁)에서도 성립하는 ‘근본 법칙’이다.

여기까지만 보면 피케티는 경쟁과 독점을 상호 배제적으로 간주하는 주류적인 단순성을 극복하고 현실의 모순들을 경쟁의 제한이 아니라 관철의 결과로 본다는 점에서 훨씬 세련된 시각의 소유자 같다. 그러나 그는 위와 같은 소극적인 차원 이상으로 경쟁에 관한 논의를 전개시키지 않는다. 만약 그가 자신의 논의를 좀 더 발전시켰다면, 소수에 의한 부의 독점이 다름아닌 경쟁의 결과라는 것, 또한 그러한 경쟁과정은 ‘최상위 1%’의 구성을 끊임없이 변경시킬 것이라는 것, 그리하여 오늘날의 자본주의를 ‘세습 자본주의’라고 규정하는 것—제아무리 겉보기에 세습이 성행하고 있다 하더라도—은 부적절하다는 것도 깨달을 수 있었을 것이다.

(6) 분배에서 생산으로: ‘경쟁’을 제대로 다루기 위하여

피케티의 논의는 분배 영역에 머물고 있다. 이는 분명 그의 이론이 포괄적인 경제이론이 되지 못하게 하지만, 이 한계는 그의 의도적인 선택으로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그의 옹호자도 이를 애써 부정할 필요는 없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 제기된 마르크스주의자 하비(David Harvey)의 피케티 비판은 다소 엇나갔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피케티의 주장에는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그가 자본에 대한 잘못된 개념 규정에 기대어 생기는 문제다. (중략) 그러나 피케티는 자본을 개인ㆍ기업ㆍ정부가 보유한 자산 일체로 규정하며 그 자산이 사용되든 말든 시장에서 거래될 수 있는 것으로 본다. 그의 자본 개념에는 토지, 부동산, 지적재산권은 물론이고 개인의 예술 작품과 귀금속도 포함된다. (출처)

분명코 하비가 말하는 대로 피케티는 전통적인 개념과는 다른 의미로 ‘자본’을 쓰지만, 적어도 분배의 영역에서만큼은 피케티의 용어법도 나름의 타당성을 갖는다. 대체 여기에서, 생산적 자본이 얻는 이윤과 농촌의 지주가 얻는 지대의 경제적 성격이 다름을 따져 무엇하겠는가? 다만 그 ‘수익률’만이 중요하지 않겠는가! 따라서 그가 분배영역에만 머무는 한, 피케티가 잘못된 자본 개념을 구사한다는 비판은 그다지 타당해 보이진 않는다. 진정한 문제는, 이상의 논의에서 드러나듯, 피케티가 분배영역에만 머무는 것은 그의 논의가 적절한 분배이론이 되는 것조차 불가능하게 만들었고, 그로 하여금 ‘세습 자본주의’라는 잘못된 결론으로 나아가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핵심적인 오류는, ‘경쟁’이라는, 자본주의 동학의 핵심적인 요소에 적절한 이론적 지위를 부여하지 못한 데 있다. 그리고 이 경쟁이라는 것을 제대로 다루기 위해서는 우리는 ‘생산’이라는 영역, 곧 마르크스가 ‘관계자 외 출입금지’라는 팻말이 붙은 ‘은밀한 장소’라고 부른 곳으로 본격적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 나아가 생산과 분배 모두를 포괄하는 경제적 총과정을 시야에 두어야만 한다.

물론 분배영역 내에서도 경쟁을 다룰 수 있다. 거기에서도 경쟁은 존재한다. 같은 자산계급 내에서, 예컨대 주식보유자와 채권 보유자는 경쟁한다. 산업자본가와 잉여화폐소유자도 경쟁한다. 실제로 신자유주의는 산업자본가들을 밀쳐내고 잉여화폐소유자(금융자본가)들과 그 관리자들을 소득랭킹 선두에 올려 놓았다. 이러한 경쟁들이 비록 그 자체로는 분배영역에 속한다고 할 수 있지만, 그것을 과학적으로 다루기 위해서는 우리는 생산 영역을 동시에 참조하지 않을 수 없다. 예컨대, 만약 이런 현상들을 분배영역 안에서만 고찰한다면, 피케티가 ‘자본주의의 핵심 모순’이라고 부른 r>g 부등식에 대하여 그랬듯, 모든 것이 그저 그때그때의 상황에 의해 결정되는 우연적이고 통계적인 현상으로 치부될 수밖에 없다. 크루그만이나 스티글리츠 등 노벨상 수상자들을 포함한 최근 일련의 ‘불평등’ 논자—경제학자!—들이 ‘정치가 문제다’, ‘정치가 우선한다’라는 식의 모토를 내세우는 것도 결국은 그런 까닭이다. 사실은 바로 이것이, 이러한 초현대 논자들에 비하여 ‘생산과 분배’라는 틀 안에서 논의를 전개했던 스미스나 리카도, 마르크스 등 ‘과학적’ 고전정치경제학이 우월한 까닭이다.

결론에 대신하여: 피케티의 이론적 의의?

그렇다면 결국, 피케티는 ‘무엇’인가? 먼저 지적할 점은, 현재 국내외의 대중미디어에서 피케티가 ‘불평등’을 이론적/실증적으로 증명한 ‘록스타’ 경제학자로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제껏 내가 강조한 대로, 그에겐 ‘불평등’ 이상의 그 무엇이 있고, 바로 그것이 그를 여타의 불평등 경제학자들로부터 두드러지게 만든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가 뭣때문에 그렇게도 장기간에 걸친 자료를—상당한 ‘억지’를 감수해가며—동원했겠는가? 뭣때문에 오스틴이나 발자크를 들먹였고, 19세기로의 ‘회귀’를 역설했겠는가? 따라서 현재 피케티를 둘러싸고 벌어지고 있는 열풍은, 조금 넘겨짚자면, 그로선 그다지 달갑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아무렴 뭐 어떻겠는가. 덕분에 그는 ‘록스타’가 되었는데! — 실은 나, 나도 록스타가 되고싶다! 아니, 그냥 ‘록’을 하고싶다! ‘록’이 되고프다! I am a ROCK! 바위처럼 살아가보자~~ ㅠㅠㅠㅠㅠ)

자, 피케티에게만 있던 ‘특별한 것’이 무엇이었던가? 그는 (1) 방대한 데이터 작업을 통해 r>g라는 자본주의의 핵심 동학을 발견하고, (2) 이로부터 불평등이란 자본주의 발달의 필연적 결과일 뿐만 아니라 다른 교란요인이 없다면 오늘날의 자본주의는 19세기의 ‘세습 자본주의’로 돌아갈 것이기 때문에, (3) 초고소득자에게 80%의 세율을 적용시키는 등의 급진적인 누진세와 글로벌 자산세 부과 등을 통하여 자본주의를 좀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피케티는 얼마나 성공적이었는가? (1) 그는 그토록 r>g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도 이를 데이터 속에서 관찰만 했을 뿐 논리적으로 도출하지도 못했고, (2) 사실상 그의 자료는 ‘세습’을 밝혀주지 못할 뿐 아니라 실제 오늘날의 자본주의를 ‘세습’으로 묘사하는 것은 적절치 않으며, (3) 이상의 결과 그가 내세우는 대응책들의 정당성도 심하게 훼손된다.

이것은 물론 누진세나 글로벌 자산세가 바람직하지 않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피케티의 논의틀 안에서 그것이 갖는 것처럼 보였던 필연성과 설득력—스티글리츠나 크루그만 같은 뛰어난 경제학자들까지도 매혹시켰던(!)—이 크게 훼손된다는 것일 뿐이다. 그러나 그럼으로써 그는 결과적으로 여타의 ‘불평등’ 논자들과 구별되는 입지점을 만드는 데 궁극적으로 실패한 것 같다.

뿐만 아니라 그는 기껏해야 분배 영역에만 머물고 있으면서도 ‘생산과 분배’에 관한 통합적 이론구성을 시도했던 리카도나 마르크스를 넘어서겠다는 야망을 품기도 했다. 앞서 본문에서는, ‘경쟁’이라는 개념을 실마리로 해서 이 점을 드러내고자 했다. 피케티가 ‘세습’이라는 신기루를 본 곳에 사실은 ‘경쟁’이라는 실제적인 동학이 자리하며, 이 ‘경쟁’을 분석하기 위해서는 분배영역을 넘어, 생산과 분배를 포괄하는 경제의 전과정을 조망해야 함을 강조하였다. 만약 이러한 비판이 타당하다면, 피케티가 ‘자본주의’란 무엇인지, 그것이 여타의 역사적 경제체제와 어떻게 다른지를 명확하게 규정하지 않은 것, (하비가 비판한 대로) ‘생산영역의’ 자본과 여타 자산들을 구분하지 않은 것, 현대경제에서 (가치창조자로서의) 노동의 의의를 무시한 것, 금융(화)의 역할을 분석에서 제외한 것 등등이, 단순히 그의 선택에 따라 자연스럽게 형성된 논의경계의 문제가 아니라 그의 분석과 주장을 형편없게 만든 핵심적 요인들이었다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 (그러니까, 이제까지의 논의들이 추가되어야만 하비의 비판도 타당해진다.)

[주: 피케티는 마르크스를 매우 혹독하게 비판하지만, 실은 그러한 혹독함은 부분적으로는 마르크스에 대한 그의 오독 내지는 과독(寡讀)에, 그리고 부분적으로는 (마르크스가 아니라) 피케티 자신의 위와 같은 제한적인 입장에 기인한 것이다.]

자,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작금의 피케티의 유행은 우리 시대 경제학의 심각한 퇴행을 상징한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 오호, 애재라!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