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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고] 자본론, 어디까지 읽었니? (자본론 제2권 읽기 개시!!)

나는 지난 1년반 동안 몇몇 사람들과 함께 매주 모여앉아 {자본론}을 읽었다. 이제 1권을 다 읽었고, 우리는 이제 2권에 들어가려 한다. 혹시 이런 일에 관심있으신 분들이 계실까 해서 여기에 광고를 한다.

자본론2권광고2

아시다시피 {자본론}은 모두 3권까지 있다.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자본주의적 생산과정’이라는 부제목이 붙은 제1권이다. 사람들이 “나는 {자본론}을 읽었다”라고 할 때, 대체로 이는 1권을 읽었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우리가 제2권을, 그리고 나아가 제3권을 읽으려고 하는 것은 왜인가? 말할 것도 없이 그것은, 1권만으로는 {자본론}의 전모를 알수없기 때문이다. {자본론}은 자본주의 경제의 가장 본질적이고 추상적인 차원에서 출발해, 우리 눈에 실감나게 다가오는 가장 구체적이고 피상적인 차원으로 나아간다. 때문에 {자본론}의 논의들을 현실에 적용하고자 할 경우, 또는 {자본론}의 시각으로 현실을 해석하려 할 경우, 1권만으로는 크게 부족하다. 언제나 우리 눈앞의 현실은 구체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누군가가 {자본론} 1권만의 지식을 가지고 현실을 해석하려 한다면, 이는 필연적으로 ‘환원론’이 될 가능성도 크다.

어쨌든 ‘고전’을 읽고, 이를 바탕으로 오늘의 우리를 반성해보는 일은 크게 권장할만한 일이다. 특히 {자본론} 1권만을 주마간산 격으로 훑고서 마음한켠에 아쉬움이 있으셨던 분들께는 좋은 기회가 아닐까 싶다. 물론 이 사회에는 그 1권마저도 제대로 영접하지 못하신 분들이 훨씬 더 많은데, 이분들도 의지만 있다면 참여를 망설이실 필요가 없다. 숙련된 조교(-_-)와 선학들(^_^)이 도움을 줄 수 있으니 말이다.

참고로 우리 모임에 대해 간단히 정리해보겠다.

애초 우리는 자유인문캠프(링크)의 2011/12년 겨울강좌에서 출발했다. 여기서 나는 ‘자본론 읽기 입문’이라는 제목으로 {자본론} 제1권 제1장과 제2장을 강독 형식으로 읽으면서 해설했다(링크). 8회에 걸친 강좌에서 아쉬움을 느낀 수강생 중 몇몇분들의 제안으로 ‘읽기’를 정례화하기로 하고(링크), 결국 2012년 3월부터 지난주까지 약 1년반에 걸쳐 우리는 거의 매주 만나 책을 읽은 결과 한글판 기준 1000쪽이 넘는 {자본론}을 읽어냈다(링크). (※참고: 관심 있으신 분들은 여기 링크들을 모두 보시는 게 좋습니다^^)

우리 모임은 다른 {자본론} 팀들과 몇 가지 점에서 다르다. 첫째, 보통은 일정한 분량을 각자 읽고 매번 정해진 사람들이 발제를 해 그에 대해 토론하는 식인데 반해, 우리는 직접 현장에서 책을 읽는다. 이는 속도도 느리고 구성원들이 다소 수동화된다는 단점이 있지만, 참여에 부담이 적을뿐만 아니라 의지를 가진 이들에겐 ‘행간을 읽어내는’ 즐거움까지 준다는 점에서 커다란 매력이 있다. 둘째, 대개 {자본론} 학습이 특정한 단체에서 제공되는 데 반해서 우리는 순수한 사적 모임에 가깝다. 이것이 특별히 자랑할만한 일은 아니지만… 뭐, 그렇다고ㅎㅎ

셋째, 우리가 책만 읽는 것은 아니다. 계절이 바뀌면 놀러 다니기도 했고 책읽기가 지겨우면 그냥 영화보고 술먹으며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것과는 별개로… 우리가 그간 2회에 걸친 ‘부정기 포럼’을 열었다는 점은 각별히 알리고 싶다. 뿐만 아니라, 최근엔 영어로 된 간단한 논문—물론 우리가 읽는 {자본론}과 관련된—을 선택해 함께 읽고 번역을 하기도 했다(번역문은 조만간 공개될 것임). 부정기포럼에 대해선 다음 포스팅을 참조하시고, 앞으로도 이는 쭈욱~~ 계속될 것이다(현재 2~3회분은 이미 기획된 상태).

  • [제1회 부정기포럼/2013.2.23] 불효자는 울지않고 자본론을 읽습니다 (링크1, 2)
  • [제2회 부정기포럼/2013.7.27] 아시아로 간 삼성, 서울로 온 장대업 (링크)

넷째, 특이한 사람들이 많다. 에… 이상에서 열거한 것 말고도 우리 모임만이 갖는 특징과 매력은 많다. 나머지는 직접 참여하면서 확인하시길. 여하튼,

{자본론} 2권을 곧 시작합니다. {자본론} 1권만 읽으신 분들, 읽고는 싶은데 아직 1권도 제대로 안 읽으신 분들, 모두 환영입니다. {자본론} 2권을 읽읍시다!!!

자본론2권광고1

* 참고로… 우리는 어떤 판본을 정해놓고 읽지는 않습니다. 아무거나 가져오셔요. 한글판뿐 아니라 영어판, 독어판, 일어판, 불어판 등등. 모두 환영입니다! (얼터너티브 호객글/링크)

** 위 글에 몇몇 링크들이 있습니다. 관심 있으신 분께선, 그 링크들을 하나씩 살펴보시면 도움이 되실 겁니다.

[201012] Das Kapital의 성격과 그 번역에 대한 몇 가지 이슈

[제목] Das Kapital의 성격과 그 번역에 대한 몇 가지 이슈 – 새로 완역 출판된 <자본> 서평을 겸하여
[출처] 《마르크스주의 연구》 제7권 제4호 (2010년 겨울호)
[원문] 여기를 누르면 연결됩니다!

위와 같은 글을 얼마전 써서 저널에 냈다. 참고로 위 논문이 실린 《마르크스주의 연구》의 최근호는 ‘신MEGA 출판의 역사와 의의’라는 주제의 특집으로 꾸며졌다. 내 글도 그 특집의 일환으로 마르크스문헌학(Marxology)에서는 국내 유일의 학자라 할 수 있는 정문길 선생과 MEGA 편집에도 적극 참여하고 있는 일본의 오무라 이즈미 교수의 글과 함께 실려있고.

내 글의 <초록>을 옮겨오면 다음과 같다.

이 글은 마르크스의 Das Kapital이 최근 우리말로 새롭게 완역 출판된 것을 계기로 Das Kapital의 성격 및 그것의 번역과 관련된 몇 가지 이슈들을 고찰한다. 또한 이는 이 새로운 『자본』(강신준 옮김, 도서출판 길, 2008-10)의 서평을 겸한다. 옮긴이에따르면 이번 판본의 가장 중요한 의의는 그것이 ‘원전 번역’이라는 것인데, 실제번역과 관련된 주요한 사항들을 살펴본 뒤 이 글은 이번 판본에서 ‘원전 번역’의묘가 만족스러운 수준으로 살아나지는 않았다고 주장할 것이다. 다음으로 우리는이번 길판의 성격을 규정하는 데 결코 작지 않은 역할을 하는 옮긴이 자신의 ‘해제’를 검토한 뒤, 그것이 독자들의 『자본』이해를 돕기보다는 어떤 점에서는 심각하게방해함을 보일 것이다. 끝으로 우리는 번역 대본의 선택은 적절했는지를 살펴봄으로써, 『자본』에서 ‘원전’ 또는 ‘정본’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물을 것이다. 이를 통해우리는, 마르크스의 경제이론에 대한 연구의 최근 성과들로 미뤄봤을 때 Das Kapital을 이해하는 방식이 ― 그 ‘해석’의 다양성과는 별도로 ― 복합적으로 될 필요가 있음을 주장할 것이다.

물론 이 글은 이 블로그를 통해 공개했던 기존의 글들을 그 모태로 하고 있다. 그 중 첫 번째 글을 (강신준 교수의 번역본 제1권이 나온) 2008년 상반기에 썼으니, 말하자면 위 논문은 약 2년 반 동안의 잉태기를 거친 셈이다. 그러나 제2-3권의 번역본이 나온 것이 작년 9월 초였고, 당시 내 개인적인 사정도 있어서, 정작 논문을 쓰는 데 충분한 시간을 가질 수 없었다. 그 결과 아쉽게도 몇 가지 세부적인 부분에서 불만족스러운 부분이 있다.

그런 불만사항들 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이, 위 글을 쓰면서는 MEGA를 참조하질 못했다는 사실이다. 이는, 위 글에서 MEGA에 대한 언급이 적지 않다는 사실에 비춰보면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다. 앞으로 다른 누군가에 의해 개선되면 좋을 것이다.

끝으로, 내 글과 거의 동시에 위 『자본』의 서평이 다른 매체에 실리기도 했다. 《황해문화》 2010년 겨울호에 실린 이재현 선생의 <자본가의 머리로 던져진 솜방망이>가 그것이다(링크). 제목에서 볼 수 있듯이 이 글은 이번 강신준 교수의 번역본을 매우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재밌는 것은, 이 비판은 나의 비판과는 조금은 다른 방향에서 이뤄지고 있다는 점이다. 내가 미처 보지 못했던 것, 깨닫지 못했던 것들을 몇 가지 배울 수 있기도 했다. 관심 있으신 분들께 강력히 일독을 권한다.

MEGA 중에서 ‘Das Kapital’ 및 그 수고들과 관련된 부분 (링크모음)

MEGA(Marx-Engels-Gesamtausgabe) 중에서 제2부, 즉 ‘Das Kapital 및 관련 수고들’의 링크모음이다. 계속해서 업데이트할 예정. 이와 관련해서 좋은 정보 있으신 분은 지체말고 공유해주시기 바랍니다 :)

II/1.11.2: 경제학 수고, 1857/58년 (초판: 1976 및 1981년. 완결판: 2006년. 29+1182쪽). [구글(본책+부록)]

II/2: 경제학 수고, 1858-61년 (1980년. 32+507쪽).

II/3: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 수고, 1861-63년. (6분권)

3.1: 1976년. 26+499쪽.
3.2: 1977년. 38+472쪽.
3.3: 1978년. 12+684쪽.
3.4: 1979년. 12+471쪽.
3.5: 1980년. 38+476쪽.
3.6: 1982년. 12+1331쪽.

II/4: 경제학 수고, 1863-67년. (3분권)

4.1: 1988년. 40+770쪽.
4.2: 1993년. 17+1471쪽.
4.3: 작업중.

II/5: 자본 제1권. 함부르크 1867년 (1983년. 60+1092쪽). [원본 pdf 읽기]

II/6: 자본 제1권. 제2판. 함부르크 1872년 (1987년. 51+1741쪽).

II/7: Le Capital. 파리 1872–1875년 (1989년. 37+1441쪽). [구글(본책+부록)] [원본 pdf 읽기] [MIA에서 읽기]

II/8: 자본 제1권. 제3판. 함부르크 1883년 (1989년. 46+1519쪽). [원본 pdf 읽기]

II/9: Capital. 런던 1887년 (1990년. 28+1183쪽).

II/10: 자본 제1권. 제4판. 함부르크 1890년 (1991년. 40+1288쪽) [읽기(1890년판)]

II/11: 자본 제2권을 위한 수고, 1868-81년 (2008년. 13+1850쪽). [구글(본책+부록)] [목차 및 편집자 해제(pdf)]

II/12: 자본 제2권을 위한 엥겔스의 편집본, 1884/1885년 (2005년. 9+1329쪽). [구글(본책+부록)] [목차 및 편집자 해제(pdf)]

II/13: 자본 제2권. 엥겔스 편집. 함부르크 1885년 (2008년. 9+800쪽). [목차 및 편집자 해제(pdf)] [읽기(1885년판)]

II/14: 자본 제3권을 위한 수고 및 편집본, 1871-95년 (2003년. 11+1138쪽). [구글(본책+부록)] [목차 및 편집자 해제(pdf)]

II/15: 자본 제3권. 엥겔스 편집. 함부르크 1894년 (2004년. 9+1420쪽) [구글(본책+부록)] [목차 및 편집자 해제(pdf)]

이상.

강신준 교수의 <자본> 완역출판에 부쳐

0. 여기 두 개의 미디어 기사가 있다.

[1] 왜 오늘 다시 ‘자본’을 들춰야 할까요 (<한겨레>, 2010년 9월 3일)
[2] ‘대박’ 꿈에 취해 벼랑 끝에 선 개미들아, ‘무기’를 들자! (<프레시안>, 2010년 9월 3일)
(이하에서 이 둘은 각각 [1]과 [2]로 부른다.)

두 기사가 넷상에 뜬 것이 9월3일이니, 벌써 2주나 지났다. 기사들이 올라왔을 때는 일이 너무 많고 바빠서 읽지도 못하고 있다가 며칠 전에서야 대충 훑어볼 수 있었다.

재밌는 것은, 정작 나는 기사를 보지도 못하고 있는데, 어디선가 내 과거 글들(1 이것, 2 저것)이 강교수의 『자본』 완역과 이에 뒤따른 그의 인터뷰 기사들과 엮여 링크가 되어 많이 읽혔다는 사실이다. 나야 고맙고 영광스러운 일이지만, 동시에, 그런 글들을 과거에 쓴 이상, 이번 완역 및 인터뷰에 대해서도 간단한 소회를 밝혀야 한다는 일종의 “의무감”도 드는 게 사실이다. 그래서 이 포스트를 쓴다.

혹, 어떤 이들은, 이렇게 비공식적인 블로그에 뒷담화 식으로 까대지 말고 좀 더 공식적으로 대응해보라고 할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너무 뭐라 마시길. 안 그래도, 조만간에 그럴 기회가 있을 것이다. 그러니 이 글은, 좀 더 엄밀하게 작성될 이후 글을 위한 서곡이자 예행연습이기도 하다. :)

1. 강교수의 (심오한) 깨달음

일단 강신준 교수께 존경과 감사의 뜻을 표하고 싶다. 하지만 이 얘긴, 여기서 그만 둔다. 어차피 나의 이런 ‘뜻’에 대해선 아무도 관심이 없을 테니까.

이번 기사와 인터뷰. 한마디로 이건, 무지와 오해, 억측과 아집의 종합선물세트다. 그나마 건질 거라고는, 장장 23년에 걸친 강교수의 “『자본』 번역의 오디세이”라고 할만한 “뒷이야기”뿐이다. 그마저도, 강금실도 한물 간 이제는, 그다지 재밌지도 않다.

위 기사와 인터뷰를 찾기 위해 google로 검색을 해보니 많은 이들이 강교수의 집념과 의지, 진심어린 노력에 감동한 모양이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대목에서, “감동”은 극에 달했을 줄로 본다:

초심을 버리지 않고, 시류에 흔들리지 않고 마르크스를 연구하다 보면 언젠가는 광맥에 닿는다. 내가 그렇다. 20년 동안 동아대학교에서 마르크스를 강의하면서 <자본>을 읽었다. 또 해설서를 펴내느라 꼼꼼히 본 것도 여러 번이다. 그런데 한 15년이 지난 2004~5년에야 <자본>에 대한 깨달음이 오더라. ‘아, 이 책의 구조가 이렇구나.’ 그 때야 어렴풋이 감이 왔다. ([2]에서)

깨달음… 번역만 따져도 23년이고 그 “첫 만남”부터 치면 30년이 넘으니,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 그 “깨달음”과 “감”이라는 것이 얼마나 심오하고 또 뿌리 깊겠는가… 라고 사람들은 보통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이번 인터뷰와 기사만 보더라도, 그의 “깨달음”과 “감”이 어떤 종류의 것인지가 꽤 명확하게 드러난다. 그리고 그것은 “심오함” 등등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1]의 대부분의 내용이 [2]에 더 자세히 나오므로 이제부턴 거의 [2]의 인터뷰만을 참조해서 글을 진행하겠다.)

2. “지금” 『자본』 번역본이 나온 것의 의의

강교수는 1987년에 『자본』 번역에 처음 연루되어 무려 23년만에 그것을 완전한 모습으로 세상에 내놓았다. 이에 대한 소회가 남다를 터. 개인적 소회도 소회지만, 그는 이 번역의 의의를 어떻게 평가할지가 무엇보다 관심거리다.

그의 인터뷰와 기사의 내용을 종합해봤을 때 그가 이번 번역에 부여하고 있는 가장 큰 의의는 아마도 “원전번역”이라는 것이 아닐까 싶다. 이를 강조하기 위해 그는 『자본』과 같은 중요한 저작의 원전 번역본이 하나도 존재하지 않고 있는 대한민국의 학계, 나아가 지식계의 척박함을 비판한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강교수, 연세가 몇이신가? 56세라고 한다. 그리고 이번에 나온 『자본』의 완역에 무려 23년을 쏟으셨다고 한다. 사정이 이렇다면, 그는 이번에 자신의 『자본』 완역을 자랑하고 그에 의기양양해 하실 것이 아니라, 부끄러움을 느끼셔야 한다. 즉 지금까지 대한민국 학계를 척박하게 한 장본인 중 하나가 실은 당신이심을 왜 보지 못하시는가? 이번 번역, 어떤 면에선 23년 걸린 노작이라고 평가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중요한 책의 번역을 맡으신 분께서 무려 23년이나 그 책임을 방기하고 계셨다면 이는 상찬보다는 질타의 대상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지금”의 의미를 새삼 되새길 수 있다. 왜 “지금”인가? 인터뷰 내용으로 보건대 아마도 강교수는 “지금이야 말로 『자본』이 무엇보다 필요하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좀 더 명확한 대답을 내놓아야 한다. 그는, 우리가 다른 때도 아니고, 즉 지난 23년의 세월 중 다른 그 어느 때도 아니고 바로 “지금”, 2010년에 『자본』의 새로운 번역을 필요로 하는 까닭이 무엇인가를 명확히 밝힐 필요가 있다.

과연 그 사이에 우리는 『자본』이 특별히 필요로 했던 시기를 겪지 않았던가? 간단히 말해 이런 거다. 왜 강교수는 지난 1997년의 대란이 벌어졌을 때 『자본』을 완역해 내놓지 않았는가? 그때는 “제대로 된 『자본』 번역본”이 (아직은) 필요없었단 말씀이신가? 바로 이 질문에 답하지 못한다면, 그는 이번 번역이 “23년에 걸친 노력의 산물”이 아니라 “23년에 걸친 게으름과 책임방기의 산물”임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여기서 “게으름”이란 강교수가 지난 23년을 게으르게 사셨다는 뜻이 아니다. 나는 이런 것을 평가할 위치에 있지 않다).

이런 의미에서, “부족한 부분은 앞으로 계속해서 보완해 나가자고 다짐하면서 일단 책을 내놓았다”라는 강교수의 언급은, 저자나 역자가 흔히 하는 겸손의 발언이라기보단 그의 무책임함의 발로–그의 의도와 상관없이–라고 보는 게 더 타당하다. 1987년에 첫 번역본을 내놓았을 때나 할 법한 얘길 이렇게 지금까지 되뇌고 있으면 곤란하다.

3. “원전 번역”이라는 “신화”

강교수의 이번 번역이 갖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의의는 그것이 한글로 나온 “최초의 원전 완역본”이라는 데 있다. 그러나 “최초의 원전 완역본”이라는 것은, 상식적으로 봤을 때, “가장 정확한 번역”도, “가장 충실한 번역”도, “가장 학술적인 번역”도 아니다. 이런 상식과는 정반대로, 강교수는 이 모든 것이 일치한다고 보는 듯하다. 이를테면 김수행 교수의 기존 번역본을 비판하면서, 그것이 “영어 중역”이라는 것뿐만 아니라, 그것의 “충실성”과 “학술성”까지 걸고 넘어진다. 이를테면 그는, “충실성”과 관련, 다음과 같이 말한다:

독일어 원본과 영어판은 그 자체로 많이 다르다. 게다가 김수행 교수의 <자본>은 원전에 충실한 번역이 아니다. 예를 들자면, 독자의 이해를 넓히기 위해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원전의 화폐 단위를 전부 다 한국식으로 옮겨 놓았다. 독일 사람이 썼는데 ‘근’이 나오고, ‘필’이 나오고. ([2]에서)

이건 정말 쪼잔한 비판이다. 기본적으로 번역에 원문을 어느정도로 살릴 것인지는 늘 논란거리다. 원문을 살리는 것이 좋은 번역일 수도 있고, 우리 실정에 맞게 조정하는 게 좋은 번역일 수도 있다. 번역의 좋고 나쁨을 가르는 기준은 “원문 그대로” 했느냐와는 크게 관계가 없다.

그리고 김수행 교수가 화폐나 도량단위를 바꾼 것은, 사실은 노동자들을 포함해 일반 독자들이 읽기 쉽게 하기 위함이었다. 물론 이런 판단에 반대할 수는 있다. 그러나 적어도 그런 반대와 비판은, 기본적으로 그가 왜 그런 선택을 했는가에 대한 “이해”(understanding)의 바탕 위에서 행해져야 한다. 난 지금도, 김교수가 일반 독자들을 위해 화폐나 도량단위를 바꿨으며, 또 번역 과정에서 그를 가장 많이 애먹인 것 중 하나가 바로 그런 변환과정이었다는 이야기를 어딘가에서 처음으로 읽었을 때의 그 가슴 뭉클함을 간직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강교수는 “원전 번역”이라는 것을 “학술성”과 거의 동격으로 보고 있는 것도 같다. 그러나 전자는 후자를 구성하는 일부, 그것도 기본적이긴 하지만 그렇게 크지 않은 일부를 구성할 뿐이다. 이에 대해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할까? 하여튼 정확성, 충실성, 학술성 등을 평가하기 위해 우리는 별도의 기준들이 필요할 따름이다.

연구자로서 말하건대, 강교수의 이번 번역의 의의는 “최초의 원전 완역본”이라는 것이고, 또 그게 전부다. 정확성, 충실성, 학술성 등으로 보자면, 적어도 2년 전에 출판된 제1권만 놓고 본다면 김수행 교수의 기존 번역본(즉 영어 중역본)이 낫다는 게 내 판단이다. 물론 이는 상대적으로 그렇다는 얘기다. 둘 다 사실은 개선의 여지가 많다. 이 얘긴 더 길게 할 순 없다. 기본적으로는 내가 아직 이번에 나온 제2권과 제3권을 읽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제1권에 대한 내 개략적인 평가는 앞서 링크해둔 나의 기존 글들을 참조하면 된다.

4. MEW? MEGA?

강교수의 이번 번역이 “최초의 원전 완역본”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것도 그다지 정확한 표현은 아니다. 왜냐하면 오늘 우리에게 『자본』의 “원전”이라는 것이 매우 복합적인 의미를 가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서 그는 MEW와 MEGA를 구분하고 있는데, 여기에서부터 얘기를 시작해보자. 그는 2년전 출판된 『자본』 제1권의 옮긴이 글에서 전자를 대중용, 후자를 학술용이라고 구분한 바 있고, 이번 인터뷰를 보니 여전히 그런 구분을 대체로 유지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앞서 포스트들에 이어 거듭 말하지만, 이런 구분은 틀렸다. 굳이 “대중용”과 “학술용”을 구별하려 한다면, MEW와 MEGA 모두 “학술용”의 범주에 든다고 봐야 한다. 이때 영어로 치면 Penguin판과 같은 각종 문고판들, 그리고 이것과 같은 발췌판들 등이 “대중용”에 대응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대중용”과 “학술용” 따위의 구분은 중요한 게 아니다. 물론 강교수는 자신의 번역을 “대중용”으로 여길 수도 있고 “학술용”으로 여길 수도 있다. 그러나 그가 어느 쪽으로 방향을 잡든 상관없이, “번역 그 자체”는 매우 학술적인 행위임에 틀림없다. 따라서 어떤 번역자라도–특히나 강교수가 그렇게도 그 중요성과 학술적 의의를 강조하는 『자본』과 같은 경우라면 더더욱–번역을 할 때에는 원전의 “대중용” 버전과 “학술용” 버전 모두를 참조함이 타당하다. 이렇게 본다면, 무려 “2010년”에, 즉 MEGA 중에서도 『자본』과 관련된 부(제2부)가 거의 완성된 현재  새삼 번역본을 내면서, 스스로 대중용이라고 칭하는 MEW판만을 대본으로 했다는 사실을 아무런 거리낌없이 말할 수 있다는 것, 더군다나 그 과정에서 MEGA판에 대한 악의적인 왜곡까지도 서슴지않는다는 것은 참으로 뻔뻔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현재 우리에게 MEW와 MEGA가 모두 이용 가능하게 되었다는 사실은 매우 특수한 문제를 우리에게 제기한다. 즉 『자본』의 “원전”이라는 것의 의미가 매우 복잡해졌다는 것이다. 『자본』의 진정한 원전은 무엇일까? 제1권만을 대상으로 했을 때, 현재 “정본”으로 두루 간주되고 있는 독일어 제4판(1890년)일까? 아니면 마르크스가 직접 출판을 한 제1판(1867년) 또는 제2판(1873년)일까? “원전”이라는 문제를 잠시 접어둔다면, 혹시, 번역본이긴 하지만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각별하게 손을 봤던 프랑스어판(1872-75년)이나 영어판(1887년)도 그 나름의 “고유한 가치”가 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만약 우리가 제2권과 제3권까지도 고려에 넣는다면 문제는 더 복잡해진다. 과연 엥겔스의 손을 거쳐 현재 출판되고 있는 제2권과 제3권은 엄밀한 의미에서 “원전”이라고 할 수 있을까? 혹시 마르크스의 수고를 가다듬고 나아가 그 스스로 부족한 부분을 채워넣기도 할 때, 그는 마르크스의 취지와 의도를 어느 정도는 왜곡하지는 않았을까? 만약 그렇다면, 우리가 진정한 의미에서 “원전”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마르크스 자신이 직접 쓴 수고뿐은 아닐까?

바로 이런 모든 문제들, 질문들은 “원전”이라는 것이 지극히 불안정한 개념임을 암시한다. 사실은 바로 그렇기 때문에 MEGA라는 판본이–이미 MEW라는 전집이 있는데도–우리에게 필요했던 것이고, 또 사람들은 그것을 아직까지 만들고 있는 것이다. 만약 사정이 이렇다면, 이 모든 것들을 다 가지고 있는 우리는, 『자본』의 “새로운” 번역을 낸다고 했을 때, 어떤 태도로 거기에 임하는 것이 옳을까? 인터뷰 등에서 보이는 강신준 교수의 입장은 그런 면에서 얼마나 정당화될 수 있는가? 이런 질문들을 음미하다 보면 다음과 같은 문제에까지 생각이 미치지 않을 수 없다. 즉 과연 “그의” 번역은 그가 묘사하는 식대로 “시대”가 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아니면 그저 한 개인이 23년이라는 오랜 세월 동안 그 어깨 위에 지고 있었던 짐을 내려놓은 정도의 의미라고 보는 게 좀 더 아귀가 맞는 해석이 아닐까? 사실은 바로 그것이야말로, 우리 한국의 인문사회학계가 가진 한계요, 문제점임을 인정하는 태도가,  강교수에겐 안타까운 일이지만, 우리에겐 필요하지 않을까?

강교수의 번역이 완성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자본』의 원전 번역”이 여전히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신화”로만 남을 수밖에 없는 것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다.

5. “마르크스가 『자본』을 쓴 진짜 이유”?

강교수는 이번 인터뷰에서 “마르크스가 『자본』을 쓴 진짜 이유”를 강조하기도 했다. 보통 “진심”을 강조하는 것은, 그 “진심”이 왜곡된 채 알려져 있을 때 하는 일이다. 그렇다면 강신준 교수는 마르크스의 “진짜 이유”가 어떻게 왜곡된 채 알려져 있다고 보기에, 유독 그것을 강조하는 것일까? 다음 대목을 보자:

그렇다면, 마르크스가 <자본>을 쓴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자본주의 체제의 임금 노동자라면 누구나 자본주의 체제가 잘못돼 있다는 걸 알고 있는데, 왜 그는 번역을 해보면 3000쪽이나 되는 어렵고 방대한 책을 썼을까? 단지본주의를 비판하기 위해서 이런 책을 썼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2]에서. 나의 강조)

간단히 말하면 다음과 같은 스토리다: (1) 흔히들 마르크스가 “자본주의를 비판하기 위해” 『자본』을 썼다고 알고 있다. (2) 그러나 자본주의 “이후에 등장할 사회, 즉 자본주의 이후의 새로운 사회의 모습”을 그리는 것이야말로 『자본』에서 마르크스가 꾀했던 진정한 기획이었다. (3)  이런 『자본』의 진정한 의의를 제대로 읽어낸 사람은 대한민국에 “한 다섯 명 정도”밖에 안 된다. (4) 대한민국의 진보의 수준이 낮은 것도 그래서다. 대충 위와 같은 생각에 입각해서, 강교수는 크게 “생산”과 “소비”라는 두 가지 측면에서 “마르크스가 꿈꿨던 사회”의 개요를 묘사하기도 한다.

글쎄… 위 항목들 중 (2)~(4)에 대해서는 너무 대책없는 얘기들이라서 뭐라고 코멘트를 해야 할지 모르겠다. (1)에서 시작해보자. 기본적으로 『자본』은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게 아니다. 그것은 그 부제(“정치경제학 비판”)에서 명명백백하게 드러나듯이 자본주의에 대한 여러 부르주아적 및 사회주의적 이론들을 비판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사실 『자본』의 의의가 “자본주의 현실 비판”에 있느냐 “자본주의 이론 비판”에 있느냐는 하나의 논쟁거리이기도 했다. 그러나 좀 더 성숙된 논자라면 둘이 어느 선에서는 일치하는 것임을 알아볼 것이다(이를테면 국내에선 곽노완 교수의 글 참조. 다만 나는 그의 논지에 100% 동의하진 않는다).

그것이 “이론 비판”이든 “현실 비판”이든 간에… 강교수에겐 그것이 “단지”라는 수식어를 동반할 정도로 하찮은 것인지 몰라도, 적어도 마르크스에겐 그렇지 않았다. 사실 마르크스의 “비판” 개념이 정확하게 (“현실”이 아닌) “이론”을 겨냥하게 된 것은, 그의 지적 발달이 어느 정도 수준에 이른 다음의 일이며, 『자본』에서는 거의 일관되게 “이론 비판”으로 의식적으로 쓰이게 된다. 그리고 마르크스는 바로 그 자본주의의 이론 또는 현실을 제대로 “비판”하는 것이 보기보다 쉽지 않고 많은 지적 노력을 필요로 하는 일임을 시간이 가면 갈수록 더 절실하게 깨닫게 된다. 그것이 바로 그의 『자본』이 그토록 오랜 세월에 걸친 각고의 노력을 요구했던 까닭이다.

어쨌거나 “자본주의의 이론 비판”을 위한 책에다가 자본주의 이후의 새로운 사회의 모습들을 적극적으로 그려놓는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따라서 그런 모습들이 『자본』에 없다고 해서 우리는 놀랄 필요도 없다. 이런 의미에서, (2)번 이후의 이야기들은 말이 안 된다. 우리가 “자본주의 이후의 새로운 사회의 모습을 그리는 것”이 마르크스의 “일생일대의 기획”이었다고는 얘기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강교수에겐 불행하게도, 『자본』은 그런 기획을 직접적으로 실현시키기 위한 저작은 아니다. 따라서 (3), 즉 강교수가 말하는 바와 같은 “진정한 의의”를 제대로 읽어낸 사람들이 대한민국에 “한 다섯 명 정도”뿐이라고 해도, 그것은 결코 놀랄 일이 아니다!! 끝으로 (4): 나도 강교수와 마찬가지로 대한민국의 진보의 수준이 그다지 높다고 보진 않지만, 그 까닭이 적어도 진보에 속하는 사람들이 『자본』을 안 읽어서라고 생각지는 않는다.

생산과 소비를 중심으로 간략하게 펼쳐놓은, 강교수가 이해한 “마르크스의 새로운 사회의 상”에 대해선 별도의 언급을 생략하련다.

6. 마르크스의 “이론”에 대한 오해

이상과 같이 강신준 교수는 『자본』에서 마르크스의 “의도”에 대해서 심각한 오해를 하고 있는데, 그는 마르크스의 “이론”에 대해서도 그 이상의 오해를 하고 있다. 어떤 면에서 그것은 “오해”라기보단 “얕은 이해”라고 불러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 정도는 정말이지 내가 다 아찔하고 민망할 정도다. 예컨대 강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런데 노동자가 그런 자본가 사이의 경쟁에 참여해 돈을 벌 수 있는 확률이 얼마나 될까? 마르크스가 <자본> 3권에서 개별 자본가가 자본가 사이의 경쟁에서 이길 수 있는 확률은 지배할 수 있는 자본의 크기에 비례한다고 써놓았다. 워런 버핏이나 조지 소로스가 대자본을 이용해서 버는 돈과 이른바 ‘개미’가 버는 돈은 비교할 수가 없다. ([2]에서. 나의 강조)

위 대목은 강교수의 『자본』 이해의 실상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구절이다. 특히 밑줄친 부분을 보라.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될 뿐만 아니라, 마르크스는 제3권에서 위와 같은 진술을 한 적이 없다. 일단 위 밑줄 부분은 말이 안 된다. 강교수가 예로 드는 대로, “개미”와 “소로스”가 경쟁을 한다는 게 무슨 의미이며, 더구나 전자가 후자를 그 경쟁에서 “이긴다”는 것은 또 무슨 뜻인가? 마르크스는 『자본』 제3권에서는 물론이고 그 어디에서도 이런 말도 안 되는 방식으로 “경쟁”에 대해 논한 적이 없다. 모종의 짐작이 가는 바가 없지는 않지만, 왜 저런 말도 안 되는 내용을 무슨 대단한 것인 양 풀어놓는지 알 수가 없다. 정녕 오늘날 금융투기판에서 “개미”들의 운명을, 그것도 강교수가 하듯이 매우 비참하게 캐리커처하기 위해 우리가 “굳이” 마르크스에 기대야 하는 걸까?

이번에 제3권을 번역해서인지, 강교수는 특히 거기 등장하는 논의들에 크게 매혹된 듯 싶다. 이를테면:

<자본> 3권을 읽다보면 깜짝 놀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예를 들자면, 현대 금융의 특징을 얘기할 때 빼놓지 않고 언급되는 게 ‘레버리지(leverage, 지렛대) 효과’다. 개인이나 기업이 차입금 등 타인의 자본을 지렛대처럼 이용해 이익을 올리려다 결국은 금융 위기와 같은 일이 발생한다.

그런데 바로 이 레버리지 효과가 <자본> 3권에 등장한다. 마르크스는 이 레버리지 효과가 결국에는 공황을 낳는 중요한 원인이라고 보았다. 얼마나 놀라운가? 140년 전의 마르크스가 오늘날 금융 위기의 본질을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다. ([2]에서)

참으로 딱하다. 저렇게 따지면, 18세기 금융투기로 유명한 스코틀랜드인 John Law는 금융사기의 현대적인 첨단기법으로 무장한, 거의 뭐 “Back to the Future”라고 해도 되겠다. 혹시 어떤 독자들은, 대중적인 인터뷰니까 강교수가 좀 오바한 거 아니겠냐며 각별한 아량을 그에게 베풀려고 할지도 모르겠다. 글쎄, 과연 그럴까? 다음을 보자.

<자본>은 앞부분이 어렵다. [. . . . . .] 이렇게 1권도 앞이 아니라 뒤부터 읽다 보면 <자본>에 익숙해질 수 있다.

2권은 경제학 공부를 하지 않은 독자라면 따라가기가 쉽지 않다. 반면에 아까 언급했듯이 자본주의 이후의 새로운 사회를 고민할 때 자극이 될 만한 부분이 많은 3권은 읽어볼 만하다. 특히 공황이 일어나는 메커니즘을 설명한 부분이 중요한데, 한국 사람들은 요즘 화폐 금융 쪽에 상식이 많아서 어려움 없이 읽을 수 있을 것이다.

3권을 읽다 보면 재테크에 눈을 뜰 수도 있다. 나 같으면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 같은 책을 읽을 게 아니라 자본주의의 핵심 비밀을 파헤친 <자본>을 읽겠다. ([2]에서)

“재테크” 부분은 농담이라고 치더라도, (제2권이 어려운 반면) 제3권을 두고 “어려움 없이 읽을 수 있을 것“이라고 하다니,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하긴, 제3권에서 “레버리지” 운운이나 하며 그 이상의 얘길 하지 않으니, 그것이 쉽다고 보는 것도 무리가 아닐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강교수가 직접 밝히고 있는, 제3권이 쉽다고 하는 근거가 무엇인지도 눈여겨볼만 하다. 그는 “한국 사람들은 요즘 화폐 금융 쪽에 상식이 많아서 어려움 없이 읽을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마르크스의 『자본』(제3권)은, 바로 그와 같은 주류 경제학이 주입한 “상식”을 뒤엎고 거기 도전하는, 바로 “노동가치이론”에 근거를 둔 전혀 다른 금융이론을 펼치고 있는 저작이다.

그밖에도 강교수는, (1) 맨큐(N. Gregory Mankiw)나 스티글리츠(Joseph Stiglitz)와 같은 경제학자들이 “생산”을 경시하고 “교환(시장)”을 강조하기 때문에 공황을 제대로 볼 수 없다고 비판하면서, “마르크스가 정확히 지적했듯이 공황은 생산 영역에서 시작된다”라는 사실과 다른 단정적 언급을 내놓기도 했고, (2) “소비”와 “분배”를 혼동하기도 했다.

그리고 “<자본>을 읽을 때 같이 보면 좋을 만한 책이 또 있는가?”라는 기자의 질문에 엉뚱하게도 “폴 말러 스위지의 <자본주의 발전의 이론>”이라고 대답함으로써, “나 지난 23년 동안 『자본』과 관련된 공부 하나도 안 했어요”라는 말을 남다르게 표현하기도 했다.

7. 맺음말

대중미디어를 상대로 한 인터뷰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상에서 지적한 모든 사항들을 조금은 관대하게 대할 수도 있겠지만, 이것들은 『자본』에 대한, 그리고 나아가 마르크스의 이론 전반에 대한 강교수의 이해가 어떠한지를 보여주는 일종의 징후들로 읽을 수 있다는 게 내 판단이다. 그리고 그것들이 무엇의 징후인지는, 앞으로 좀 더 면밀하게 강교수의 번역을 검토하는 과정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날 것이다(이미 제1권에서는 그것이 어느 정도 드러났다).

바로 그랬을 때, 이 글의 1절에서 인용한 강교수의 “깨달음” 내지는 “감”이 어떤 것인지도 이 엉성한 포스트에서 나타난 것보다 훨씬 더 명확하게 나타날 것이고, 더불어 이런 사항들에 대한 판단들이 서로 인정하고 토론해야 할 “견해”의 문제라기보다는 그 옳고 그름이 꽤 명백히 갈리는 원문에 대한 “이해”의 문제임도 밝혀질 것이다. 그리고 그런 과정에서, 『자본』을 둘러싼 논의도 한걸음 더 진전할 수 있으리라고 나는 믿는다.

What’s in a name? 자본론 vs 자본: ‘비판’의 의미에 대하여

1. 머리말

Karl Marx의 《Das Kapital》이라는 책이 있다. 내 블로그의 주된 테마 중 하나인 저작이다. 그런데 이 책의 제목을 우리말로 어떻게 옮기는 것이 좋을까? 현재 우리나라엔 번역자가 다른 《자본론》과 《자본》이 함께 존재하고 있다. 그런데 얼마 전 이 블로그의 다른 글에 달린 덧글에서 누군가도 말했듯이, 이 둘의 차이는 단순히 ‘론’자 하나가 더 붙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국한되는 게 아닌 것 같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보다시피 아래 덧글은 냉커피님이 쓴 것이지만, 아래 논의에서 나는 그를 특정하지는 않는다).

맑스가 자본의 부제로 정치경제학 비판이라는 타이틀을 건 것은 새로운 정치경제학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말그대로 그들의 [sic] 방식으로 정치경제학을 반박하기 위해서는 아닐까요…그래서 우리는 자본론이 아니라 자본이라고 부르는 것이구요.. [출처링크]


예전에 진보넷 시절에 이런 문제를 가지고 네이버 블로거인 청수님과도 논쟁을 벌인 바가 있다(내 글은 나의 진보넷 블로그가 닫혀있으므로 링크를 걸 수 없지만, 청수님의 관련글은 걸 수 있다. 다음과 같다: 자본 음미 2자본 음미 2-1). 사실 청수님은 나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유명하신 분이다. 그분은 나를 안 지가 얼마 안 됐을지 몰라도 나는 그분을 꽤 오래 알아왔다. 따라서 나는 그분이 ‘자본론’이 아니라 굳이 ‘자본’을 고수하는 이유를 안다. 위 링크된 글의 버터 발라놓은 듯한 부드러움과는 거리가 먼 매우 강경한 어조로 ‘자본론’을 쓰는 이들을 완전히 바보 취급하는 것을, 적어도 김수행 교수가 자신의 번역판 제목을 《자본론》이라고 했다는 이유로 그를 비아냥대는 것을 본 일이 있다. 증거? 대라면 어디든 뒤져서 댈 수 있겠지만, 귀찮아서 관두련다.

어쨌거나 내가 하고픈 얘기는, 위에서 인용한 냉커피님의 ‘자본론 vs 자본’에 대한 말씀은, ‘자본’을 고수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꽤 일반적으로 관찰되는 주장이라는 거다. 물론 여기엔 청수님도 포함되며, 그의 ‘명성’ 등을 고려해볼 때 그는 이런 생각을 퍼뜨리는 데 나름 큰 역할을 한 인물 중 하나라고 나는 믿는다.

그러나 위와 같이 ‘분석’과 ‘비판’을 대비시킴으로써 ‘자본론’과 ‘자본’을 구별하는 시도는 크게 두 가지 의미에서 잘못된 것이다. 첫째, ‘비판’의 의미를 잘못 이해하고 있다는 점에서, 둘째, ‘론’의 의미를 잘못 이해하고 있다는 점에서.

2. 사태(?)의 전개

마르크스의 문제의 책의 정식 제목은 다음과 같다: Das Kapital. Kritik der politischen Ökonomie. 우리말로 직역하면, ‘자본. 정치경제학 비판’이 된다. 마르크스주의의 역사에서 봤을 때, 이 세 단어 중에서 가장 많은 곡절을 겪은 건 아마도 ‘비판’일 것이다. 당연한 얘기일 지도 모르지만, ‘비판’이 겪은 곡절은 곧 《Das Kapital》이 이제까지 받아들여져 온 방식과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 거칠게 말하면, 20세기 초 러시아혁명 이후 특히 스탈린의 지도 아래 이른바 공산주의 세계가 제 발로 서는 과정에서 《Das Kapital》로 대표되는 마르크스의 경제학과 역사유물론은 하나의 ‘체계’로 교조화됐고, 이와 관련해서 나중에 흔히 ‘경제결정론’ 또는 ‘경제주의’라고 호된 비판을 받게 된 일정한 경향이 고착화되기에 이른다. 앞서 언급한 ‘자본’ 고수자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는, ‘자본. 정치경제학 비판’이 ‘자본론’으로 굳어지는 과정이었다고 묘사할 수도 있겠다.

이런 상황에서, 《Das Kapital》의 원제목에 덧붙여진 ‘비판’이라는 표현에 주목하는 사람들이 나타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이들은 그 자체로 하나의 ‘정치경제학’이 되어버린 《Das Kapital》이 사실은 ‘정치경제학 비판’임을, 즉 자본(주의 경제)를 ‘설명’ 또는 ‘분석’하는 게 아니라 ‘비판’하는 저작임을 상기시킴으로써, 위에서 묘사한 사태에 경종을 울리려고 한다. 이런 사람들을 하나하나 거명할 수는 없지만, ‘열린 마르크스주의’(Open Marxism)라는 깃발 아래 모인 일군의 학자들도 그들 중 하나다(이들에 대해서는 박승호, 《좌파 현대자본주의론의 재구성》 참고).

이렇게 사태가 흘러가는 동안 하나의 대립구도가 형성되는 것은 필연적인데, 그 대립구도란 바로 다름아닌 “‘분석’ 대 ‘비판’”이다. 대표적인 열린 마르크스주의 논자인 워너 본펠드(Werner Bonefeld)나 존 홀로웨이(John Holloway) 같은 이들의 논의를 참조하면, 결국 이들이 제기하는 문제란, 대체로 1970년대 후반을 기준으로 삼았을 때, 이른바 ‘마르크스주의 정치경제학’이 20세기를 거치며 독점자본주의론, 국가독점자본주의론, 심지어 조절이론 등과 같은 형태로 발전을 거듭하는 과정에서 그 특유의 혁명성 및 비판성을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즉 ‘마르크스주의 정치경제학’이 자본주의의 변모를 설명하려고 애쓰는 동안 그것은 부르주아적 의미에서의 과학, 즉 현실의 겉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설명하고자 하는 일종의 변호론이 되어버렸다는 얘기다.

이와 같은 사태인식과 문제제기 자체는 좋다. 타당한 측면, 있다. 그러니까 지나치게 ‘분석적’으로 흐르는 마르크스주의 정치경제학에 대해 ‘비판’이라는 카드를 꺼내 제동을 거는 것까지는 좋았다. 그러나 위의 열린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그랬듯, 이렇게 ‘비판’을 강조하는 이들은 지나치게 많이 나가는 경향이 있다. 즉 그들은 ‘비판’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분석’을 거의 무시하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얘기다. 덧붙이자면, 이런 경향은 비단 ‘분석’과 ‘비판’을 대립시키는 사람들에만 한정되는 게 아니다. 그것은 ‘경제학 대 정치학 (또는 사회학, 철학 . . .)’와 같은 구도를 가진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그러니까 한마디로, 여전히 정치학이니 철학이니 하는 것들을 강조하면서 ‘경제결정론’이라는 흘러간 옛 노래를 즐기는 이들 모두에게 대체로 해당된다. 이 모든 사람들이, 경제학의 분석적 측면을, 나아가 경제학 자체를 무시하고 있다는 얘기다.

3. ‘비판’의 의미

‘경제학’의 의의에 대해서는 앞서 한차례 글을 쓴 일이 있으므로 여기선 ‘경제학 대 정치학 (또는 사회학, 철학 . . .)’에 대해선 얘긴 접고(이에 대해선 [링크] 참조), ‘분석 대 비판’에만 논의를 제한하겠다. 결국, 물과 기름과도 같이 섞일 수 없어 보이는 ‘분석’과 ‘비판’을 어떻게 하면 ‘변증법적으로’(!) 이해할 것이냐가 핵심일 것이다. 실제로 ‘비판’을 강조하는 사람들이 ‘분석’ 측면을 대놓고 무시하지는 않는다. 문제는 그들이, 애초 그들의 의도와는 달리, ‘분석’과 ‘변증법적으로’ 엮일 수 있는 ‘비판’ 개념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는 데 있다. 일반화하자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말하는 ‘비판’의 의미는 지나치게 단순하다는 거다(물론, 그동안 등한시되어오던 ‘비판’이라는 개념을 새롭게 살린다는 그들의 의도에 비춰볼 때, 이와 같은 단순함은 그들에게 매우 치명적인 결점이다).

내 주장은 무척 간단하다. 비판이라는 말, 마르크스가 ‘비판’이라는 말을 입밖에 냈을 때 그가 의미했던 것이 무엇인지를 조금만 생각해본다면 그것을 ‘분석’과 대립시키는 따위의 일은 헛되다는 게 쉽게 드러난다는 거다.

그렇다면 ‘비판’ 이란 무엇인가? 흔히 분석을 긍정적인 것으로, 비판을 부정적인 것으로 여기는데, 어원적으로 보든 아니면 그 개념이 실제 지성사에서 쓰인 방식으로 보든 ‘비판’이란 부정적이기보다는 긍정적인 개념이라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다. 어원적으로 ‘비판’(critique)이라는 단어는 고대 그리스어로까지 소급되는데, 이때 그것은 ‘위기’(crisis)와 같은 뿌리를 가지고 있다. 기본적으로 crisis란 일종의 의학용어라고 할 수 있는데, 환자의 병세가 하나의 국면에서 다른 하나의 국면으로 넘어가는 어떤 고비 같은 것을 뜻했다고 한다. 당연하게도, 이런 의미에서 crisis는 사태에 대한 면밀한 ‘분석’은 물론 그에 기반해서 내려질 냉철한 ‘판단’까지도 포괄하게 되는데, 이후 이런 ‘분석’이나 ‘판단’의 문제는 대체로 critique이라는 단어로 독립되었다. 나아가 critique은 코젤렉(Reinhart Koselleck)이 밝힌 바 있듯이 근대 서유럽 지성계에서 심지어 ‘이성(reason)의 사용’ 일반을 가리키는 용어로까지 발전하기에 이른다.

물론 그렇다고 ‘비판’에 부정적인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다시 이 말의 어원을 보자. 그것은 crisis와 맥을 같이 한다고 했고, 그런 의미에서 ‘비판’이란 비판 대상이 일정한 ‘위기’ 상황에 있다는 판단을, 나아가 그런 판단을 가능케 하는 그 대상에 대한 합리적인 ‘분석’을 전제한다고 했다. 예컨대 마르크스가 ‘정치경제학을 비판하겠다’라고 말했을 때, 그는 현재 정치경제학이 위기에 처했다고 판단하는 것이며, 이런 판단을 설득력 있게 내어놓으려면 정치경제학을 면밀히 파헤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후자의 작업은 필연적으로, 그 자신 하나의 정치경제학 체계를 결과로서 내놓을 텐데, 우리는 그 결과를 《Das Kapital》이라는 형태로 가지고 있다. 그렇다고 이 《Das Kapital》에 대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기존 정치경제학을 지양하기 위한 것이지 그 자체로 또 다른 정치경제학이기를 지향하지는 않는다”라고 말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반대로, 비판적이지 않은 경제학, 과학적이지 않은 경제학이 현실적으로 힘을 가지고 있는 동안에는, 이렇게 진정으로 비판적이고 과학적인 경제학을 내놓고 증진시키며 예의 그 잘못된 경제학에 그것을 대비시키는 것이야말로 진정으로 ‘비판적’인—‘부정적’ 의미에서의—기획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상의 논의에 비춰보면, 마르크스의 《Das Kapital》은—‘분석 대 비판’이라는 속류적인 대립에 입각해 말한다면—‘자본에 대한 비판’이라기보다는 ‘자본에 대한 분석’이라고 하는 편이 차라리 더 타당한 셈이다. 이와 같은 단순하고 속류적인 의미의 ‘비판’ 개념을 옹호하는 사람들은—물론 그 자신들은 그것이 그다지도 단순하고 속류적인 것인지도 몰랐겠지만—그럼에도 불구하고 《Das Kapital》의 ‘최종’ 목표는 자본을 ‘비판’하고 ‘지양’하는 것 아니냐고 항변할지 모르겠다. 나는 대답하겠다. 그게 그렇게 중요하다고 생각하면 끝까지 그렇게 항변하시라. Nobody cares.

4. ‘론’에 대하여

사실 마르크스의 비판 개념을 제대로 제시하려면 위에서보다 훨씬 더 많은 분량의 논의가 요구된다(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런 논의를 충분히 발전시킨 예를 나는 거의 본적이 없다). 그러나 위에 내놓은 이야기만으로도, ‘흔히 말하는 분석’이란 ‘진정한 비판 개념’을 구성하는 하나의 계기임이 분명해졌으리라 믿는다. 가장 단순히 말해도 그렇다는 얘기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서 예의 그 ‘제목’을 둘러싼 논란을 다시 보자. 글의 첫머리에서 인용한 ‘자본’ 옹호자는 자신의 ‘자본’ 옹호의 근거를, 마르크스는 《Das Kapital》을 “새로운 정치경제학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말그대로 그들의 [sic] 방식으로 정치경제학을 반박하기 위해” 썼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는 적어도 내가 직/간접적으로 본 한에서는 ‘자본’ 옹호자들이 거의 공통적으로 내세우는 근거인데, 이를 달리 표현하면 “《Das Kapital》은 자본을 분석/설명하는 게 아니라 비판/반박하기 위한 저작이다” 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다. 일단, 이상의 논의를 참조했을 때 이런 주장은 전혀 근거가 없다는 것을 확인해 두자. 그러고 난 다음, 하지만 더 재밌는 것은, 설령 이와 같은 (‘분석 대 비판’이라는) 이분법을 받아들이더라도, 그것이 ‘자본론’에서 ‘론’을 빼야 한다는 근거는 될 수 없다는 거다. 가장 단순히 말해도 ‘론’이란 ‘논하는 글’, ‘정당한 근거를 밝혀 주장하는 글’을 일컫는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이는 고전한문 문체의 하나로서(자세한 설명은 예컨대 [링크] 참조), 근대에 와서는 서양의 영향을 받아—단순히 말하면—‘논설문’으로 자리잡았다(배수찬, 《근대적 글쓰기의 형성 과정 연구》).

그러니까 《Das Kapital》을 ‘론’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것의 성격을 어떻게 보더라도—즉 그것을 ‘분석’이라고 보든 ‘비판’이라고 보든—지극히 정당하다. ‘자본’ 옹호자들은 《Das Kapital》의 자본에 대한 (‘분석’이나 ‘설명’이 아닌) ‘비판’으로서의 성격을 살리기 위해 그것을 ‘자본’으로 부른다고 하는데, 내가 사고방식이 특이해서 그런지 내가 보기엔 오히려 ‘자본’이라고 하는 게 더 ‘설명문’스럽다.

5. 진짜 중요한 문제는. . .

《Das Kapital》을 우리말로 번역할 때 ‘론’자를 붙이느냐 마느냐는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제목’과 관련해서 진짜 중요한 문제는, 그리고 실제 그것을 처음 번역했던 사람들이 고민했던 문제는 따로 있다. 바로 ‘Kapital’(또는 영어의 ‘capital’)을 ‘자본’으로 옮겼다는 거다.

지금 이 글을 읽는분께서는 ‘자본’을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가? 아마도 십중팔구는 가장 즉각적으로 ‘사업 밑천’ 같은 것을 떠올리지 않을까 한다. 무리는 아니다. 실제로 우리는 “자본이 딸려서 일을 시작을 못 하고 있어”라는 식의 표현에 매우 익숙하며, 국어사전을 찾아봐도 그것이 첫째 의미로 종종 나와있다([링크] 참조). 그러나 원래 ‘자본’은 ‘(사람의) 자태’를 가리키는 말이었고, 그것이 ‘사업 밑천’이라는 의미를 갖게 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서양적 의미에서의 ‘자본’(=capital)이 일본의 국어사전에 공공연히 등재된 것도 대정시대(1912-26년)나 되어서의 일로 보인다.

그렇다면 서양적 의미에서의 ‘자본’이란 무엇을 뜻하는가. 앞서 링크한 daum.net의 국어사전에도 나와있듯이 그것은 기본적으로 ‘생산을 위한 도구’를 뜻한다. 마르크스의 저작을 읽다보면 우리는 “자본이란 단순한 생산용구들의 총합이 아니다. 그것은 사람들 사이의 관계다”와 같은 표현을 종종 마주친다. 이 표현은 거꾸로, 일반적으로 ‘capital’이란 ‘생산용구’를 의미했음을 시사한다. 마르크스 자신도 자신의 경제학적 저작들에서 서술하고 있듯이, 원래 ‘capital’의 어원도 ‘가축의 머리(머릿수)’와 관련이 있다. 당연히 가축은 가장 전통적인 ‘생산용구’다.

그렇다면 이렇게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던 두 표현이 ‘랑데부’한 까닭은 뭘까? 즉 대체로 ‘생산용구’를 뜻하는 ‘capital’이, 도대체 어떤 경과를 거쳐 ‘자태’, ‘사업 밑천’ 등의 의미를 이미 가지고 있던 ‘자본’으로 번역된 것일까? 관련 문헌을 조금 찾아보면 틀림없이 이에 대한 설명을 구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은 하면서도 나는 아직 본격적으로 그런 작업을 실행해보진 않았다. 누군가 관심있는 분께서 찾아내신다면 알려주시면 좋겠다. 다만 여기서 다시 드러나는 것은, ‘제목’ 문제와 관련해서 왈가왈부하길 좋아하는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사소한 ‘론’에 대해 트집잡기를 일삼으면서도 정작 더 중요한 ‘자본’에 대해서는 문제제기조차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가소(可笑)롭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