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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경제학? or 경제학? – 다시 한 번 ‘꼼수’에 대하여

경향신문이 사정이 진짜 어렵긴 어려운가보다. 이런 글까지 다 실어주니까 말이다.

[경제와 세상] ‘경제학’ 용어에 숨겨진 꼼수 (강신준, 2012년 2월 15일)

1. 이 글은 단순한 ‘무개념’뿐 아니라 경제학 교수가 범했다고는 상상하기 어려운 ‘사실관계상의 오류’로 점철되어 있다. 몇 가지 간단히 지적하겠다.

우선 사실관계를 얘기하자면 후자의 용어[economics]는 알프레드 마셜이란 사람이 1890년에 임의로 만들어낸 것이다.

여기서 ‘사실관계’라는 표현은 지나치게 대담한 것이다. 이유는 두 가지. 첫째, 기본적으로, 위와 같은 종류의 용어변천은 누구 한 사람의 작품이라고 할 수 없는, 어떤 집단적인 과정의 결과라고 보아야 하기 때문에 그렇다. 이에 따르면, 우리는 예컨대 ‘economics라는 표현을 저서의 제목에 처음 쓴 사람은 xxx이다’라고는 할 수 있을지언정, 강교수와 같이 ‘xxx가 만들었다’라고 하긴 매우 어렵다. 일반적으로 그렇단 얘기다.

하지만 두 번째 이유가 더 심각하다. 왜냐하면 어떤 기준으로 보든 위 진술은 참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마샬의 1890년 저작이란 말할 것도 없이 그의 {Principles of Economics}일 것이다. 분명 이 책에 ‘economics’라는 표현이 나오고, 또 이 책이 ‘political economy’가 ‘economics’로 대체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을 것임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지만, 불행히도 그것을 ‘만들어낸’ 것은 마샬도 아니고, 또 그의 저 1890년 저작에서 그 용어가 처음 쓰인 것도 아니다. 일단 ‘economics’라는 용어는 다름아닌 마샬 자신이 그의 부인과 함께 쓴 이전 저작 {The Economics of Industry}(1879)에도 쓰인 적이 있다. 그러나 이것이 ‘economics’가 출현한 첫 사례는 아니다. 그 전에 이미 1877년, 1878년에 각각 J. M. Sturtevant 및 H. D. Macleod의 저작의 제목으로 쓰인 바 있다. 특히 Macleod는 이에 앞서 1875년에 발표된 한 논문에서 ‘political economy’를 ‘economics’라고 바꿔부를 것을 제안하면서, economics를 “교환가능한 양들 간의 관계를 지배하는 법칙들을 다루는 과학”이라고 규정하기까지 했다.

(사실 이에 대해선 이미 나 자신이 몇 번 밝혔다. 나는 심지어 강교수가 그에 대해 무려 ‘반론’을 내놓기까지 한 글에서도 이에 대해 언급하면서, 내가 아는 한 현재 우리나라에 나와있는 관련논문 중 가장 훌륭한 이헌창 교수의 글을 소개하기까지 했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강교수께서 위와 같은 오류를 견지하고 계신다니..)

 

2. 다음으로, ‘정치경제학’과 ‘경제학’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보자. 둘은 같은 것도 아니고, 둘의 차이는 단순히 앞에 ‘정치’가 붙었는가 아닌가의 문제로 환원될 수도 없다. 강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경제학과 정치경제학을 구별하는 것은 ‘꼼수’를 진실과 혼동하게 만드는 결과가 되지 않을까? 두 경제학은 서로 독립적인 별개의 과학이 아니라 단지 ‘진실’과 ‘꼼수’의 차이일 뿐인데 이를 서로 달리 부르는 것은 곧 ‘꼼수’의 의도처럼 진실을 외면하게 만드는 일이 아닐까? [. . .] 두 경제학은 서로 다른 것인가?

기본적으로 나는 위 말이 무슨 뜻인지 도통 이해가 가지 않는다. 전혀 논리적으로 말이 안 된다. “‘진실’과 ‘꼼수’를 달리 부르는 것”이 왜 문제가 되는 걸까? 전혀 설득력이 없지만, 그래도 최대한의 아량을 발휘해 그의 의도를 읽어보면, 대충… [‘political economy’와 ‘economics’가 서로 다른 것도 아니고, 나아가 ‘경제학'(=economics)이라는 용어는 마샬을 위시한 경제학자들의 ‘꼼수’의 산물이므로, ‘진실’을 수호하는 우리가 굳이 물러서서 ‘정치경제학’이라는 불편한 용어를 쓸 까닭이 없다]라는 것 같다.

그런데 강교수가 말하는 것과 달리, ‘political economy’와 ‘economics’는 단순히 앞에 형용사 하나가 더 붙었느냐의 차이로 환원될 수 없다. 전자가 후자로 바뀌면서, 이름만 바뀌었으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바보일 것이다. ‘political economy’에서 ‘economics’로의 변화는, 단순히 이름에 대한 게 아니며, 이 과정에서 ‘economics’는 기존의 ‘political economy’에 대해 그 대상과 거기에 접근하는 방법론 자체를 차별화함으로써 자신을 부각시켰다. 물론 이 과정은 누구 한 사람에 의해 이뤄진 게 아니고, 꽤 오랜 기간에 걸쳐 그리고 개개인의 의지와는 어느 정도 별도로 이뤄졌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모든 얘기를 풀어낼 수는 없고, 관심 있으신 분들은 이 블로그에 있는 나의 글(‘IIPPE: 경제학을 넘어 사회과학의 재편으로‘, 특히 두 번째 글)을 참조하시기 바란다.

다행히도 강교수도 둘의 차이가 단순히 이름의 문제라고 보지는 않는 것 같다. 그러나 실망스럽게도 그는 이 대목에서 ‘꼼수’ 드립을 치고 있다. 세상에! 그러니까 강교수에 따르면, 마샬은 뻔뻔스러운 ‘꼼수쟁이’가 된 것인데… 세상에… 왜곡도 이런 왜곡이 없다. 두 가지를 간단히 언급만 하겠다. 첫째, 마샬은 (마르크스 식으로 말하면) 그 부르주아적 한계 안에 갇혀있긴 해도 그 나름대로 노동이나 산업의 다양한 문제들을 두루 시야에 넣으려고 노력했던 인물이다. 둘째, 마샬 부부가 그들의 1879년 저작에서 말하듯(p. 2), 그들이 ‘political’을 뺀 데는 그 용어의 의미가 과거와 크게 변화했다는 사정도 무시할 수 없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가 ‘정치경제학’이라고 했을 때, 이는 ‘정치적인 경제학’이라기보다는 ‘사회적인 경제학’ 또는 ‘사회경제학’이라고 해야 원래의 ‘political economy’와 의미상으로는 통하는 게 된다.)

 

3.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교수는 아마도 그 자신은 의식도 하지 못한 채 하나의 중요한 ‘진실’을 말하고 있다. 즉 그는 스미스와 마르크스를 비롯한 이들이 했던 연구, 즉 ‘political economy’를 ‘경제학’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실제로 한국을 포함한 동아시아에서 ‘경제학’은 원래 ‘political economy’의 역어였던 것이다.

이헌창 교수가 밝혀주는 바에 따르면, 19세기 중엽 서양의 ‘political economy’가 번역될 때 ‘경제학’이 선택되었고, 이에 대응해 이후의 ‘economics’에 대해서는 한때 ‘이재학’과 같은 역어가 부상하기도 했다. 그러나 우여곡절끝에, 서양에서 ‘political economy’가 ‘economics’에 압도되는 것에 발맞춰, 점차 ‘economics’도 ‘경제학’으로 일괄 번역되게 된 것이고, 결과적으로 ‘political economy’는 ‘정치경제학’이라는 다소 괴상한(?) 이름으로 번역되게 된 것이다. 주객전도라는 말이 제격인 상황이다.

 

4. 사정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몇몇 학자들이 굳이 ‘political economy’라는 용어를 살려쓰고, 또 (비록 좀 껄끄럽기는 해도) ‘정치경제학’이라는 단어를 고집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바로, 그러한 이름으로, 오늘날 그야말로 막나가고 있는 ‘경제학’을 견제하고 나아가 비판적 사회과학의 전통을 다시 세우기 위함이다.

어떤 의미에서 오늘날 경제학은 상당히 ‘political’해지고 있다. 원래 마샬 등이 ‘political economy’였던 것을 ‘economics’로 바꾸고자 했던 데는, ‘경제학’이라는 것을 매우 좁게 설정하고자 하는 의도가 깔려있었다. 이것이 바로 그들이 말하는 ‘순수경제학’인 것이다. 이로써 기존의 ‘political economy’는 순수이론과 각종 응용분야들로 나뉘게 되는데, 말하자면 과거에 ‘political economy’가 관심을 두고 있었던 다양한 사회적 이슈들(이를테면 J. S. Mill 같은 이가 열정적으로 다뤘던 분배의 문제)은 ‘순수이론’이 아닌 ‘응용’분야로 밀려나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경제학이 최소한으로 정의되자마자(‘제약 하에서의 선택에 관한 과학’이라는 식으로), 그것은 역설적이게도 일반화할 수 있는 계기를 얻게 되는 것이다(인간사에서 ‘제약 하에서의 선택’이 아닌 것이 무엇인가)! 이리하여 경제학은 그것이 마샬 등에 의해 제안된 ‘협소한 한계’를 넘어, 그리고 과거 ‘political economy’ 시절에 그것을 규정했던 한계도 훌~~쩍 넘어, 경제학이라는 틀로는 쉽게 다룰 수 없는 여타 사회과학들의 영역을 마구 짓밟고 있는 것이다. 이를 일컬어 ‘경제학 제국주의’라고 한다(관련글).

요컨대 오늘날, 영어로 치면 ‘political economy’, 우리말로는 ‘정치경제학’이라는 표제로 우리가 꾀하는 것은, 위와 같은 막나가는 경제학(economics)을 비판하기 위함이다. 그럼으로써, 경제학 내부로 치면 ‘economics’가 ‘political economy’였던 시절에 가졌던 사회적(the social)이고 물질적(the material)인 관심(바로 이 블로그의 이름이다!)을 복원하고, 나아가 그러한 ‘political economy’라는 관점을 다른 사회과학 분과들과 한편으론 공유함으로써 또 다른 한편으론 ‘정치경제학’을 그것이 미처 담아내지 못하는 현대사회에서 인간삶의 단면들에 관한 여타 사회과학 분과들의 성과들과 결합함으로써 ‘비판적 사회과학’의 전통을 새롭게 확립하는 것!! 바로 그것이 우리의 목표다.

 

5. 사태가 이러하기에, 사실 마르크스의 주저 {Das Kapital. Kritik der politischen Ökonomie}를 ‘자본’이라고 할 거냐 ‘자본론’이라고 할 거냐, ‘경제학비판’이라고 할 거냐 ‘정치경제학비판’이라고 할 거냐 등등은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이상에서 지적한 사항을 생각하면, 위 문제, 적어도 ‘정치경제학’이냐 ‘경제학’이냐라는 문제는 중요하기도 한데, 지금까지 대충 밝혀졌듯이, 강교수는 이것이 ‘왜!!’ 중요한지조차 제대로 감지하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오히려 그는 사태를 ‘꼼수’라는 지극히 애매모호한 ‘말’로 뭉뚱그리고 있다. 이 대목에서, 괴테를 차용한 마르크스의 저 구절, ‘개념이 빠진 곳에는 말이 들어선다’라는 구절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나꼼수에 대해서 내가 일전에 주장했듯이(‘나꼼수와 마르크스‘), 사태를 (가카의, 또는 경제학자들의) ‘꼼수’라는 식으로 파악하는 것만큼 단순하고도 그릇된 것도 없다.

마르크스는 그 이전 및 당대의 ‘정치경제학’을 ‘비판’할 목적으로 그의 주저를 썼다. 강교수는 바로 그 저작, 그것도 독일어 원저작의 한국 최초의 완역자다. 바로 그런 분께서 꼼수 운운하는 것이 딱하고, 그분이 번역한 것을 읽게될 선량한 독자들이 딱하다. 그가 보이는 것과 같은 인식으로 (마르크스가 겨냥했던) ‘경제학 비판’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성희롱 발언이나 일삼는 나꼼수 4인방이 비열한 착취를 철폐하고 새세상을 열 거라고 생각하는 거랑 뭐가 다른가 모르겠다. (끝)

 

On the way “The Economist” expresses their respect to the Master upon his death

If a picture paints a thousand words . . .” (Bread, “If”)

Paul Samuelson died last December, which of course was covered by, amongst others, the Economist, the world’s most influential economic journal [link]. This article was full of his “achievements” in the science of economics, describing him as one of the creators of modern economics, and of its teaching. But, while reading it, I wondered why there was no mention about his fight against Marxist political economy which cannot by any means be said to have been a trivial event in his life. Does, then, it mean the editors of the journal judge that that fight is not suitable to mention in this article which must be filled only with glorious victories?

But then I looked at the picture in the article, obviously taken in Samuelson’s office. This picture is found to be clearer in the printed edition but, even in the web version, you can see a whole lot of “Marx” titles (including the Grundrisse) right next to him! What is it that this picture says (or “paints”)? Doesn’t it appear to help create an (illusory) image of Samuelson as a general intellect, “the last of the great economists” as the author of the article put it, simply leaving what had actually happened unaddressed or forgotten…?

Well, it seems a picture does sometimes paint a thousand words, perhaps with more subtlet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