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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선물] 당신이 신자유주의에 관해 알아야 할 13가지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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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당신이 신자유주의에 관해 알아야 할 13가지 것들

으악, 안 돼. 또 신자유주의에 대한 글이라고? 이미 나온 것도 많은데, 그걸 다 종합하는 데다가 그 나름의 시각에서 새로운 것을 덧붙이고, 결국 예전 것을 명확히 하는 만큼 혼란도 더 키울 게 뻔한데? 하, 그것도 모자라, 장하준의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2011) 류의 대중적인 제목을 달았다니!

하지만 겉모습은 으레 사람을 속이기 쉽다. 이제부터 우리가 상당히 대중적이고 명확한 형태로 내놓을 이야기는 기존에 나온 것들을 반복연습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세 가지 점에서 깊이를 지닌다. 무엇보다 이것은 신자유주의에 대한 나름대로 장기간에 걸친 학문적 천착의 결과라는 것이다. 또 하나는, 신자유주의를 글로벌 위기(global crisis)의 견지에서 파악하고 또 제시한다는 점이다. 셋째로, 주거(housing)와 식수(water)라는 두 가지 주제에 대한 비교연구를 통해 신자유주의의 본질을 예증한다는 것을 들 수 있다. 이 둘은 경제와 사회의 작동에 대한 금융화의 영향에 관한 좀 더 폭넓은 연구의 맥락에서 접근될 것이다.

재미있나요? 재미있나요?? 재미있으면 500원! ㅎㅎ

위 글은 다음 링크에 있는 하나의 글의 첫 단락을 번역한 것입니다. 직접 링크를 타고 들어가셔서 논문을 찾아보세요. 그리고 읽어보세요. 영어로 되어 있는데, 총46쪽(본문 35쪽)입니다. 설연휴 기간에 각잡고 읽어볼만하죠? ㅎㅎ

링크: http://www.ideaswebsite.org

(이곳은 작년에 <한겨레>가 주최하는 아시아미래포럼에 기조연설자로 한국에 오기도 했던 Jayati Ghosh가 이끄는 전세계 정치경제학 연구자들의 네트워크입니다. 오는 2월 22~24일에 저를 포함한 몇몇 한국사람들이 이 모임에서 여는 컨퍼런스에 참가합니다. IDEAs에 관심 있으신 분들은 저한테 연락주세요!)

위 글은 제 지도교수이기도 한 영국 런던의 Ben Fine 선생께서 동료들과 쓰신 것입니다. 제 스승이라서가 아니라, 이분이 신자유주의에 관한 한 이론적으로 가장 높은 수준의 논의를 지금까지 보여주고 계신 분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냥 읽지만 마시고, 제가 첫 단락을 번역했으니, 누가 마저 이어서 번역해봐도 좋겠네요. :)

아 그리고, 위 글에 붙어있는 방대한 주석과 참고문헌들을 고려하면, 위 글이 신자유주의에 대한 다양한 연구로 들어가는 하나의 좋은 ‘입구’가 될 것임을 알 수 있을 겁니다. 그러니 위 글은 두고두고 참고하심 좋을 것 같네요!

피케티(Piketty) 비판의 지점들과 그의 {자본론}의 이론적 의의

피케티(앞서 어떤 분께서 지적도 하셨고, 이번 글은 좀 진지하게 쓰겠다는 의미에서, 그간의 ‘피꿰띠-‘ 대신 ‘피케티’라고 표기하겠다. 엄숙 엄숙 -_-) 열풍이 좀 잦아드나 싶더니 최근 {매일경제}에서 ‘한국의 피케티 보고서’라는 제목의 기획을 내놓았고(링크), 그 사이 영미권에서는 피케티의 ‘강점’으로 꼽히던 데이터 및 그 분석에 이의가 제기되고 있다(링크).

다른 한편, 현재 자타가 공인하는 세계 최고의 마르크스주의 학자인 캘리니코스(Alex Callinicos)나 하비(David Harvey) 같은 이들이 피케티에 대한 서평들을 내놓으면서, 마르크스식 정치경제학의 입장에서 일정 정도 그를 비판하고 있다. 마침 두 글 모두 국내에 번역되기도 했는데(링크1링크2), 내가 보기엔 이들의 비판은 매우 부적절하다. 이걸로는 피케티가 내놓고 있는 마르크스에 대한 ‘불경’을 꾸짖는 건 어림도 없다. 좀 더 그럴싸한 게 필요하다..

‘급진적 독자노선’이냐, ‘전술적 연합노선’이냐

피케티의 데이터와 그에 대한 분석방식을 둘러싼 논란에서 시작해 보자. 이는 우리같은 ‘급진적’ 자본주의 비판가들에게 매우 곤혹스러운 상황을 만들어 놓았다. 왜냐하면 피케티의 분석은 그 자체로 흠결이 많아 아주 혹독한 비판을 받아야 마땅하나, 현재 {파이낸셜 타임스}를 중심으로(국내에선 {한국경제}가 이를 매우 꼴사납게 흉내내고 있다. 링크) 벌어지고 있는 ‘피케티 때리기’가 우파들의 역공이라는 의미도 있어서 피케티 측과 일종의 ‘연합전선’을 펴야 할 필요성도 있기 때문이다.

어떻게 해야 할까? 결국 둘 다 필요할 것이다. 어차피 우리들의 목소리가 사태에 큰 영향을 주기는 어려울테니, ‘연합’에 목을 맬 필요는 없으리라. 뭐, 대충 이런 생각을 가지고… 이번엔 피케티를 좀 진지하고 비판적으로 다뤄보겠다.

피케티의 분석과 주장: 무엇이 핵심이고 무엇이 새로운가

먼저 피케티의 논의를 간략하게 요약해보자. 대체 그가 700쪽에 육박하는 이 ‘대작’에서 어떤 분석과 주장을 내놓은 것인가? 그의 핵심 논리는 크게 다음과 같이 요약 가능하다:

    1. 1970년대 이후 두드러진 소득불평등 심화는 자산소유의 불평등과 관련되어 있다.
    2. 이렇게 되는 원인은 자산수익률(r)이 경제성장률(g)보다 크기 때문인데,
    3. r>g이면 경제가 성장함에 따라 GDP 대비 자산의 크기가 점차 증가할 것이며, 자산을 소유한 소수의 부자들에게 부가 집중될 것이다.
    4. 이러한 경제체제는 가히 ‘세습 자본주의(patrimonial capitalism)’라 부를 만하며, 이렇게 가다간—특히 경제성장률이 낮을 때는—해마다 새로 생산되는 국민소득의 대부분을 극소수의 자산가가 취득하게 되어 자본주의는 종말을 고할 수도 있다.
    5. 그러나 만약 우리가 누진세나 자산세 등을 통하여 제도적으로 자산수익률(r)을 낮출 수 있다면—역사적으로 1913년 이후에 그랬듯—불평등은 완화되면서 자본주의도 좀 더 살만한 곳이 될 것이다.

많은 이들이 피케티가 방대한 자료를 모아서 불평등의 현실을 실증적으로 보여줬다는 데서 그의 가장 큰 업적을 찾는데, 내 생각은 다르다. 피케티 책의 핵심은 자료에 있지 않다. 사실 그런 식의 자료라면 이미 예전에도 많이 나왔었고, 최근 피케티에게 극찬을 아끼지 않은 크루그만이나 스티글리츠 같은 이들도 수차례 그런 자료들을 인용하면서 글을 쓴적이 있다(나도 이 블로그에 한번 쓴 적이 있다. 링크).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피케티를 ‘방대한 자료를 모아 불평등의 현실을 실증했다’라는 식으로 칭찬하는 것은 그야말로 ‘주례사 비평’의 전형 같다.

게다가, 그가 내놓는 ‘자료’라는 것의 상당 부분이 그다지 믿을만하지가 않다(부분적으로는 {FT}에서도 지적되었던 바다). 몇몇 선진국의 자료들은 그렇다 쳐도 중앙아시아—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중동이나 이름에 ‘스탄’ 들어가는 나라들—의 19세기 소득 및 자산 자료가 과연 믿을만하겠냐는 거다. 선진국들 자료라고 나을 게 없다. 피케티는 주로 개인 과세자료를 이용하고 있는데, 이것으로 경제적 불평등을 말하는 데는—특히나 장기적인 추세를 볼 때는—상당한 무리가 따른다. 이를테면, 개인 과세자료에 의거할 경우, 맞벌이 하는 부부가 거기에 각각 따로 등장할 것이므로 이들이 불평등하다는 implication이 나온다. 그러나 사실상 이들은 하나의 가계를 이룰 것이며, 아닌 게 아니라 불평등은 가계 단위에서 보는 것이 실질적으로 타당하다. 더구나 맞벌이의 사회적 존재양태가 나라마다 문화마다 다르고, 역사적으로도 다양하게 변천해왔음을 고려하면, 개인 과세자료로 불평등을 말하는 것의 의의는 더더욱 줄어들 수밖에 없다.

[주: 이를테면 이런거다. (1) 우리나라에서 맞벌이가 상당히 광범위하게 퍼져있기도 하지만, 상위 1%나 0.1%의 부자들은 맞벌이 잘 안한다. 따라서 최상위에 속한 개인의 소득은 그대로 가계소득일 가능성이 높지만, 중간층에 속한 개인의 소득은 가계소득보다 적을 확률이 높다. 따라서 우리가 개인소득보다 가계소득이 불평등의 좀 더 유의미한 지표라는 데 동의한다면, 국세청 소득세자료에 나타나는 불평등은 실제보다 과장된 것일 가능성이 있다. (2) 한편 역사적으로 봤을 때, 맞벌이는 점점 일반화되어왔을 것이다. 따라서 중간층에 속했다 하더라도 개인소득=가계소득일 가능성이 오늘날보다 과거에 더욱 컸으리라. 등등.]

그보다, 피케티 분석의 핵심은 ‘r>g’라는 부등식에 있다. 그 스스로도 이를 ‘자본주의의 핵심 모순(the central contradiction of capitalism)’이라 부르고 있지 않은가? 그의 논의가 만약 fancy해 보인다면, 그것은 바로 이 부등식 덕분이다. ‘유사이래 자본수익률(r)이 언제나 경제성장률(g)보다 컸다. 따라서 경제적 수입이 자본(=부)을 소유한 소수의 자산가에게 몰릴 수밖에 없고, 결과적으로 불평등은 계속해서 커질 것이다.’ 이러한 명제를 바로 이 간결한 부등식은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 하나면 모든 것이 명쾌해 보인다. 피케티의 핵심은 바로 이것을 정식화했다는 데 있다.

또 하나. 피케티는 이러한 부등식을 ‘자본주의의 핵심 모순’이라고 하면서, 이를 제어하지 못한다면 우리가 사는 체제는 ‘세습 자본주의’로 전락할 것이라고 경고한다. 이것이 피케티의 말하자면 ‘자본주의론’의 핵심이다.

피케티 비판의 지점들

이제 피케티에 대한 몇 가지 기본적인 비판지점들을 짚어보겠다.

(1) 피케티에겐 ‘자본주의’가 무엇인지 불분명하다

피케티에 대하여 다양한 비판이 가능하다. 가장 기본적으로는, 도무지 피케티의 논의 속에서는 우리 시대를 ‘자본주의’라고 부르는 이유가 무엇인지가 불분명하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그가 스스로 자신에게 핵심적이라고 하는 r>g라는 부등식도, 서기 시대(AD) 내내 성립하는 것으로 제시되고 있지 않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를 ‘자본주의의 핵심 모순’이라고 명명하고 있다. 자본주의 역사가 2000년이 넘었다는 뜻일까?

내가 봤을 때 이것은 매우 치명적인 약점이다. 그러나 뒤에 쓰겠지만, 어차피 피케티는 분배영역에서의 ‘불평등’에만 관심이 있으므로 자본주의가 무엇이고 언제부터 시작됐는지에 대해선 아무래도 상관 없으리라.

(2) 피케티가 쓰는 핵심 데이터로는 ‘세습’ 자본주의를 주장하긴 어렵다

위의 것은 매우 치명적인 비판이긴 하지만, 이런 비판으로는 피케티를 아프게 할 수 없다. 좀 더 내재적이고도 ‘너 이놈, 꼼짝마!’ 할 수 있는 ‘원펀치’ 없을까? 글쎄, 이런건 어떨까: 피케티의 주장대로 r이 g보다 크고, 그래서 부가 소수의 자산가에게 몰리고 있으며, 결과적으로 GDP 중에서 상위 1% 부자들의 몫이 점점 늘어난다고 해서, 오늘날의 자본주의를 저절로 ‘세습 자본주의’라고 단정짓는 게 정당화되진 않는다는 사실이다.

왜 그러한가? 바로 ‘최상위 1%’의 소득이나 자산의 몫이 점점 증가한다고 해도, 거기 속한 사람들이 계속해서 바뀔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만약 최상위 1%의 인적구성이 끊임없이 바뀌면서 그 소득비중이 커지고 있다면, 우리는 ‘불평등이 커지고 있다’라고는 할 수 있을지라도 ‘세습 자본주의가 도래하고 있다’라고 결론내릴 수는 없다.

그런데 문제는, 그러한 결론은 그가 그렇게도 자랑스러워 하는 그의 데이터를 가지고서는 결코 도출될 수 없다는 점이다. 주지하다시피 그가 주로 사용하는 데이터는 개인들의 과세자료이긴 하지만 이는 각 개인들 수준에서의 자료가 아니라 총량 수준의 것이다. 이를 통해서는 ‘상위 1%의 소득비중의 변화추이’를 보는 것은 가능하지만, 거기에 누가 들어가 있는지, 얼마나 많은 이들이 들고 나는지 등은 볼 수 없다. 소득세 자료가 아닌 상속세 자료를 봐도 마찬가지다. 부(wealth)가 증가하면 세습도 많이 되는 건 당연하다. 그러나 이것 자체를 가지고 ‘세습 자본주의’라고 할 순 없다. 예컨대, 명동에 있는 커다란 건물에 대하여 4번의 상속세가 부과되었다고 해도, 그 4번의 상속이 모두 상이한 가족들에서 벌어졌다면 말이다. 결국 좀 더 적극적인 결론(‘세습’)을 얻기 위해서는 더 많은 정보(개인정보!)가 필요한데, 피케티에겐 그것이 없다.

요컨대 피케티는 방대한 데이터를 모아 야심찬 작업을 했지만, 그가 주로 의존한 데이터를 가지고는 ‘세습 자본주의’를 증명할 수 없다. 이를 위해선 더 많은 자료가 필요한데도, 그것 없이 ‘세습 자본주의’라는 결론을 성급하게 내렸다. 치명적인 논리적 모순이다. 그런데 만약 ‘세습 자본주의’를 증명하지 못한다면, 피케티 주장은 ‘불평등’에 관한 수많은 다른 논의들과 다를 바가 없어진다. 대체 그 많은 사람들이 피케티를 두고 호들갑을 떠는 이유가 무엇인가?

(3) 오늘날의 자본주의는 ‘세습 자본주의’가 아니다

그런데 피케티가 적절한 자료를 가지고 충분하게 증명하질 못해서 그렇지 오늘의 세상이 실제로 ‘세습 자본주의’일 수도 있지 않은가? 말은 된다. 그렇다면 실상은? 안타깝게도, 아니다.

이 대목에서 재밌는 사실 한 가지. 최고 부자들이 계속해서 바뀐다는 것을 피케티 스스로도 모르진 않으리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책 제12장에서 {포브스}나 {포춘} 같은 잡지에서 내놓는 억만장자 리스트를 인용하면서, “이 목록에서는 1987년부터 1995년까지는 일본인 억만장자, 그 뒤 1995~2009년까지는 미국인 억만장자, 끝으로 2010년 이후엔 멕시코인 억만장자가 수위를 차지했다”라고 쓰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이로부터 ‘인적구성 변화’에 관한 생각을 전혀 발전시키지 못하고 있는데, 이는 피케티가 이 구절을 쓰면서조차 얼마나 ‘세습 자본주의’라는 망상(?)에 사로잡혀 있었는지를 방증하는 것처럼 보인다.

한 가지 더. 피케티가 좋아하는 과세자료를 좀 보자. 미국 국세청은 매년 개인소득세 상위 400명에 대한 통계를 낸다. 피케티 말대로 자본주의가 세습 형태로 발달하고 있다면, 이 목록에 있는 사람들이 오랜 기간 거의 변동이 없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1992~2009년까지 18년간 무려 3,869명이 이 목록에 이름을 올리고 있으며, 그 중 27%만이 2번 이상이다. 10번 이상 올라간 사람은 고작 2% 조금 넘을 뿐이다(링크). 범위를 좀 더 넓혀, ‘상위 1%’라고 하면 어떨까? 내 생각엔, 10번 이상 1%에 든 사람들의 비중이 2%보다야 훨씬 크겠지만, 여전히 이를 두고 ’세습 자본주의’라고 부르기엔 좀 민망하다.

(4) 중요한 것은 세습이냐 아니냐가 아니다—‘경쟁’이다

반드시 {포브스}나 {포춘}의 목록, 미국 국세청의 ‘400명’ 목록에 올라야만 최고 부자는 아니다. 목록 바깥에 있더라도, 어쨌든 거기 한번쯤 오른 사람은 여전히 부자일 가능성이 높으며, 이들의 부가 다음 세대로 세습될 가능성도 높다. 그러나 만약 이런 정도의 사항을 가지고 피케티가 ‘세습 자본주의’라고 했다면, 그는 세제개편보다는 아예 부의 세습을 폐지하자고, 나아가 사유재산제도 자체를 없애자고 하는 편이 나았으리라.

좀 더 적극적으로 따지면, 세습은 그렇게—오늘날의 자본주의를 ‘세습 자본주의’라고 이름붙일 정도로—중요한 문제도 아니다. 말하자면, 18년간 국세청의 400명 목록에 오른 3,869명 중에서 2%에 불과한 70~80명의 사람들보다는 그 나머지 사람들에 대하여 말하는 편이, 오늘날 우리가 사는 자본주의의 본질에 더욱 다가갈 수 있는 방법이 아니겠냐는 것이다. 자, 이들은 어쩌다가 저 목록에 오르게 되었는가? 또 어쩌다가 거기에서 끌어내려졌는가?

어떻게 누군가가 저런 목록에 새롭게 이름을 올릴 수 있을까? 부지런해서? 장가를 잘 가서? 정부의 개발사업으로 갑자기 떼돈을 벌어서? 가능하다. 반면 어떤 이들은 왜 떨어져 나가는 것일까? 방탕해서? 자식을 잘못 둬서? 주식시장에서 실수해서? 그럴 수도 있다. 실제로 피케티가 오스틴이나 발자크의 19세기 소설을 들먹이는 것도, 이런 요인들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적어도 자본주의 하에서라면 우리는 여기서 ‘경쟁’을 떠올려야 한다. 사실 경쟁이야말로 자본주의의 역동성 그 자체다. ‘최상위 1%’의 소득비중이 커지는 것도 결국엔 치열한 경쟁의 결과다.

(5) ‘경쟁’의 부재: 피케티의 또 하나의 치명적 약점

피케티가 경쟁에 대하여 언급을 전혀 안하는 것은 아니다. 글의 “서문”에서 그는 자본주의가 발달함에 따라 경쟁에 의해 불평등이 줄어들 것이라는 쿠즈네츠(Simon Kuznetz) 가설을 비판한다. 주류 경제학자들은 이 가설에 입각해 자본주의의 ‘진보성’을 주장해온 한편, 만약 현실에서 불평등이 증가한다면 그것은 자유로운 경쟁이 방해받기 때문이라고 말하곤 한다. 그들에겐 독점이나 지대수입의 증가 등도 경쟁 메커니즘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은 결과이자 완전경쟁을 방해하는 요소다.

기본적으로 피케티는 이러한 주류적 생각에 반기를 든다. 그는 “제한 없는 경쟁(unrestricted competition)이 세습을 끝장내고 좀 더 능력 본위의 세계로 이끌리라는 것은 위험한 환상”(424쪽)이라고 경고한다. 그에 따르면 불평등은 자유로운 경쟁 하에서도 커지는데, 이는 바로 (최소한 그의 논리 안에서는) r>g라는 부등식 때문이다. 그에게 이는 신고전파가 가정하는 매우 이상적인 상황(=완전경쟁)에서도 성립하는 ‘근본 법칙’이다.

여기까지만 보면 피케티는 경쟁과 독점을 상호 배제적으로 간주하는 주류적인 단순성을 극복하고 현실의 모순들을 경쟁의 제한이 아니라 관철의 결과로 본다는 점에서 훨씬 세련된 시각의 소유자 같다. 그러나 그는 위와 같은 소극적인 차원 이상으로 경쟁에 관한 논의를 전개시키지 않는다. 만약 그가 자신의 논의를 좀 더 발전시켰다면, 소수에 의한 부의 독점이 다름아닌 경쟁의 결과라는 것, 또한 그러한 경쟁과정은 ‘최상위 1%’의 구성을 끊임없이 변경시킬 것이라는 것, 그리하여 오늘날의 자본주의를 ‘세습 자본주의’라고 규정하는 것—제아무리 겉보기에 세습이 성행하고 있다 하더라도—은 부적절하다는 것도 깨달을 수 있었을 것이다.

(6) 분배에서 생산으로: ‘경쟁’을 제대로 다루기 위하여

피케티의 논의는 분배 영역에 머물고 있다. 이는 분명 그의 이론이 포괄적인 경제이론이 되지 못하게 하지만, 이 한계는 그의 의도적인 선택으로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그의 옹호자도 이를 애써 부정할 필요는 없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 제기된 마르크스주의자 하비(David Harvey)의 피케티 비판은 다소 엇나갔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피케티의 주장에는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그가 자본에 대한 잘못된 개념 규정에 기대어 생기는 문제다. (중략) 그러나 피케티는 자본을 개인ㆍ기업ㆍ정부가 보유한 자산 일체로 규정하며 그 자산이 사용되든 말든 시장에서 거래될 수 있는 것으로 본다. 그의 자본 개념에는 토지, 부동산, 지적재산권은 물론이고 개인의 예술 작품과 귀금속도 포함된다. (출처)

분명코 하비가 말하는 대로 피케티는 전통적인 개념과는 다른 의미로 ‘자본’을 쓰지만, 적어도 분배의 영역에서만큼은 피케티의 용어법도 나름의 타당성을 갖는다. 대체 여기에서, 생산적 자본이 얻는 이윤과 농촌의 지주가 얻는 지대의 경제적 성격이 다름을 따져 무엇하겠는가? 다만 그 ‘수익률’만이 중요하지 않겠는가! 따라서 그가 분배영역에만 머무는 한, 피케티가 잘못된 자본 개념을 구사한다는 비판은 그다지 타당해 보이진 않는다. 진정한 문제는, 이상의 논의에서 드러나듯, 피케티가 분배영역에만 머무는 것은 그의 논의가 적절한 분배이론이 되는 것조차 불가능하게 만들었고, 그로 하여금 ‘세습 자본주의’라는 잘못된 결론으로 나아가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핵심적인 오류는, ‘경쟁’이라는, 자본주의 동학의 핵심적인 요소에 적절한 이론적 지위를 부여하지 못한 데 있다. 그리고 이 경쟁이라는 것을 제대로 다루기 위해서는 우리는 ‘생산’이라는 영역, 곧 마르크스가 ‘관계자 외 출입금지’라는 팻말이 붙은 ‘은밀한 장소’라고 부른 곳으로 본격적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 나아가 생산과 분배 모두를 포괄하는 경제적 총과정을 시야에 두어야만 한다.

물론 분배영역 내에서도 경쟁을 다룰 수 있다. 거기에서도 경쟁은 존재한다. 같은 자산계급 내에서, 예컨대 주식보유자와 채권 보유자는 경쟁한다. 산업자본가와 잉여화폐소유자도 경쟁한다. 실제로 신자유주의는 산업자본가들을 밀쳐내고 잉여화폐소유자(금융자본가)들과 그 관리자들을 소득랭킹 선두에 올려 놓았다. 이러한 경쟁들이 비록 그 자체로는 분배영역에 속한다고 할 수 있지만, 그것을 과학적으로 다루기 위해서는 우리는 생산 영역을 동시에 참조하지 않을 수 없다. 예컨대, 만약 이런 현상들을 분배영역 안에서만 고찰한다면, 피케티가 ‘자본주의의 핵심 모순’이라고 부른 r>g 부등식에 대하여 그랬듯, 모든 것이 그저 그때그때의 상황에 의해 결정되는 우연적이고 통계적인 현상으로 치부될 수밖에 없다. 크루그만이나 스티글리츠 등 노벨상 수상자들을 포함한 최근 일련의 ‘불평등’ 논자—경제학자!—들이 ‘정치가 문제다’, ‘정치가 우선한다’라는 식의 모토를 내세우는 것도 결국은 그런 까닭이다. 사실은 바로 이것이, 이러한 초현대 논자들에 비하여 ‘생산과 분배’라는 틀 안에서 논의를 전개했던 스미스나 리카도, 마르크스 등 ‘과학적’ 고전정치경제학이 우월한 까닭이다.

결론에 대신하여: 피케티의 이론적 의의?

그렇다면 결국, 피케티는 ‘무엇’인가? 먼저 지적할 점은, 현재 국내외의 대중미디어에서 피케티가 ‘불평등’을 이론적/실증적으로 증명한 ‘록스타’ 경제학자로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제껏 내가 강조한 대로, 그에겐 ‘불평등’ 이상의 그 무엇이 있고, 바로 그것이 그를 여타의 불평등 경제학자들로부터 두드러지게 만든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가 뭣때문에 그렇게도 장기간에 걸친 자료를—상당한 ‘억지’를 감수해가며—동원했겠는가? 뭣때문에 오스틴이나 발자크를 들먹였고, 19세기로의 ‘회귀’를 역설했겠는가? 따라서 현재 피케티를 둘러싸고 벌어지고 있는 열풍은, 조금 넘겨짚자면, 그로선 그다지 달갑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아무렴 뭐 어떻겠는가. 덕분에 그는 ‘록스타’가 되었는데! — 실은 나, 나도 록스타가 되고싶다! 아니, 그냥 ‘록’을 하고싶다! ‘록’이 되고프다! I am a ROCK! 바위처럼 살아가보자~~ ㅠㅠㅠㅠㅠ)

자, 피케티에게만 있던 ‘특별한 것’이 무엇이었던가? 그는 (1) 방대한 데이터 작업을 통해 r>g라는 자본주의의 핵심 동학을 발견하고, (2) 이로부터 불평등이란 자본주의 발달의 필연적 결과일 뿐만 아니라 다른 교란요인이 없다면 오늘날의 자본주의는 19세기의 ‘세습 자본주의’로 돌아갈 것이기 때문에, (3) 초고소득자에게 80%의 세율을 적용시키는 등의 급진적인 누진세와 글로벌 자산세 부과 등을 통하여 자본주의를 좀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피케티는 얼마나 성공적이었는가? (1) 그는 그토록 r>g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도 이를 데이터 속에서 관찰만 했을 뿐 논리적으로 도출하지도 못했고, (2) 사실상 그의 자료는 ‘세습’을 밝혀주지 못할 뿐 아니라 실제 오늘날의 자본주의를 ‘세습’으로 묘사하는 것은 적절치 않으며, (3) 이상의 결과 그가 내세우는 대응책들의 정당성도 심하게 훼손된다.

이것은 물론 누진세나 글로벌 자산세가 바람직하지 않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피케티의 논의틀 안에서 그것이 갖는 것처럼 보였던 필연성과 설득력—스티글리츠나 크루그만 같은 뛰어난 경제학자들까지도 매혹시켰던(!)—이 크게 훼손된다는 것일 뿐이다. 그러나 그럼으로써 그는 결과적으로 여타의 ‘불평등’ 논자들과 구별되는 입지점을 만드는 데 궁극적으로 실패한 것 같다.

뿐만 아니라 그는 기껏해야 분배 영역에만 머물고 있으면서도 ‘생산과 분배’에 관한 통합적 이론구성을 시도했던 리카도나 마르크스를 넘어서겠다는 야망을 품기도 했다. 앞서 본문에서는, ‘경쟁’이라는 개념을 실마리로 해서 이 점을 드러내고자 했다. 피케티가 ‘세습’이라는 신기루를 본 곳에 사실은 ‘경쟁’이라는 실제적인 동학이 자리하며, 이 ‘경쟁’을 분석하기 위해서는 분배영역을 넘어, 생산과 분배를 포괄하는 경제의 전과정을 조망해야 함을 강조하였다. 만약 이러한 비판이 타당하다면, 피케티가 ‘자본주의’란 무엇인지, 그것이 여타의 역사적 경제체제와 어떻게 다른지를 명확하게 규정하지 않은 것, (하비가 비판한 대로) ‘생산영역의’ 자본과 여타 자산들을 구분하지 않은 것, 현대경제에서 (가치창조자로서의) 노동의 의의를 무시한 것, 금융(화)의 역할을 분석에서 제외한 것 등등이, 단순히 그의 선택에 따라 자연스럽게 형성된 논의경계의 문제가 아니라 그의 분석과 주장을 형편없게 만든 핵심적 요인들이었다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 (그러니까, 이제까지의 논의들이 추가되어야만 하비의 비판도 타당해진다.)

[주: 피케티는 마르크스를 매우 혹독하게 비판하지만, 실은 그러한 혹독함은 부분적으로는 마르크스에 대한 그의 오독 내지는 과독(寡讀)에, 그리고 부분적으로는 (마르크스가 아니라) 피케티 자신의 위와 같은 제한적인 입장에 기인한 것이다.]

자,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작금의 피케티의 유행은 우리 시대 경제학의 심각한 퇴행을 상징한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 오호, 애재라! (끝)

‘중산층 70% 복원’의 정치경제학 : 왜 그것은 박근혜정부의 국정과제에서 빠지게 되었는가

주지하다시피 ‘중산층을 70%로 만들겠다’라는 것은 대선 후보시절 박근혜 대통령의 대표적인 공약 중 하나였다. 그는 당선인 시절만 해도 이를 ‘새 정부의 핵심 국정지표’로 내세웠다(링크).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중산층 70% 복원’은 2월말에 인수위 보고서에도, 5월 말 발표된 {박근혜정부 국정과제}에서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렇다면 박근혜 정부는 ‘중산층 70% 복원’을 포기한 것인가? 이 문제의 해명은, 특히나 최근 사태진행추이에 비춰보면, 박근혜 정부의 향후 (경제)정책방향, 나아가 이 정권의 본질에 대하여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중산층 정의를 둘러싼 저간의 논란

사실 ‘중산층 70% 복원’ 공약은 그것이 처음 나온뒤부터 야권과 진보진영으로부터 거센 비판을 받았다. ‘중산층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부터가 문제였다.

박근혜 쪽에서는 중산층을 ‘중위소득의 50~150%’로 정의했는데, 이에 따르면 4인가족이 월소득 180만원만 돼도 중산층으로 간주된다. 물론 이는 누가 봐도 터무니없이 낮은 기준이다. 박근혜와 그 무리들은 ‘국제기준’이라는 이유로 이 정의를 옹호했지만, 정작 그 어떠한 국제기구(IMF, World Bank, OECD 등)에서도 이를 중산층에 대한 정의로 쓰지 않으며, 이를 꾸준히 수집해 발표하는 국제기구도 내가 아는 한 없다. 다만 몇몇 연구들에서 중산층을 정의하는 가능한 ‘하나의’ 기준으로 매우 드물게 쓰일 따름이다.

더욱이 어떤 사람이 중산층인지 여부를 결정하는 데는 그러한 ‘소득수준’뿐 아니라 자산이나 교육수준과 같은 다양한 사회적 지표들이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예컨대 가난한 집 출신의 갑돌이가 대기업에 정규직으로 취직했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중산층’이 되는 것은 아니란 얘기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보면, 중산층을 판가름하는 ‘객관적인 지표’가 과연 있을 수 있겠느냐는 회의까지도 가능하다. 누군가가 중산층에 속하는가 여부는 결국엔 그가 스스로, 즉 ‘주관적으로’ 자신이 중산층임을 인정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따르면, 중산층을 늘리려면 스스로 중산층이라고 여기는 사람이 늘어나도록 공정하고 풍요로운 사회를 이뤄야만 한다.

그렇다면 후보시절의 ‘중산층 70% 복원’ 공약이 정권출범 이후의 ‘국정과제’에 포함되지 않은 것은 위와 같은 비판에 정부가 굴복한 결과라고 볼 수 있을까? 아니, 전혀 그렇게 보이진 않는다. 왜냐하면 박근혜는 지난 8월 29일에 있었던 제2차 국민경제자문회의(링크)에서도 창조경제 구현과 중산층 복원을 현정부 경제정책의 핵심으로 꼽으면서, 고용률 제고가 이를 위한 가장 중요한 수단임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도식화하자면, “창조경제 구현 → 고용률 70% 달성 → 중산층 70% 복원”이다(링크). 황우여 새누리당 대표도 최근 중산층 복원을 언급한 바 있다(링크).

이쯤 되니 머리가 더 복잡해진다. 중산층을 복원하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과제라면, 왜 박근혜 정부는 이를 국정과제에 넣지 않았을까?

왜 ‘중산층 70% 복원’은 국정과제에서 빠졌는가

먼저 ‘중산층 70% 복원’을 국정과제에 넣지 않은 것이 일정한 ‘포기’를 내포하는 것은 맞다. 다만 여기선 포기의 대상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은 ‘중산층’이 아니라 ‘70%’라는 숫자다. 다시 말해, 국정과제에 포함되지 않음으로써 ‘중산층 70% 복원’ 정책은 이제 ‘중산층을 두텁게 하겠다’라는 지극히 일반적인 당위명제로 추상화되었다는 얘기다. 그런데 ‘중산층을 두텁게 하겠다’라는 것은 모든 정부가 표방할만한 일반적인 정책목표이기 때문에, 그것을 굳이 ‘국정과제’에까지 올릴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렇게 ‘70’이라는 숫자가 구속력을 잃을 때, 중산층의 정의를 둘러싼 논란도 무의미해진다. 이제 정부는 중산층에 대한 특정한 정의를 고수하는 대신에 그것이 다양하게 정의될 수 있음을 인정할 수 있고, 그러한 기반 위에서 “우리는 이렇게 다양하게 정의될 수 있는 중산층을 두텁게 하는 데 모든 정책역량을 쏟겠다”라고 말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저들은 ‘중산층 70%’라는 표현을 쓴다. 그러나 국정과제에 등재되지 않은 이상 그것은 그저 수사적인 의미 이상을 갖기 어렵다. 그러니까 달성하면 좋지만 못해도 크게 상관없는, 그런 것이 된다. 나중에 정권말이 되었을 때 누군가가 저들더러 “너희들이 약속한 중산층 70%는 어떻게 된 거냐!?”라고 따져 물어도, 저들은 “노력했지만 유감스럽게 됐다. 하지만 우린 그런 약속 한적없다”라고 답할 수 있게 되었다.

‘중산층 70%’라는 수치의 허상

그런데 이상의 논의가 ‘중산층 70% 복원’이 국정과제에서 배제된 하나의 근거는 될 수 있지만, 그것만으로 모든 것이 설명되지는 않는 것 같다. 어떻게 봐도 ‘중산층 70% 복원’은 꽤 명확하고도 매력있는 구호이므로, 그것을 단순히 ‘중산층 정의’를 둘러싼 논란 때문에 포기한다는 것은 쉽게 납득되진 않는다. 혹시 거기엔 더 근본적인, 또는 더 치명적인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 내가 보기엔 그런 이유가 있다. 그것은 바로, ‘중산층 70% 복원’이라는 구호가 ‘고용률 70% 달성’이라는 목표와 상충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니, 적어도 현재 정부의 정책방향에서는 상충된다. 그리고 이러한 상충의 발생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정부의 중산층 정의 그 자체에서 기인한다. 이를 좀 더 들여다보자.

애초 박근혜 캠프에서는 대선공약에서 중산층을 ‘중위소득의 50~150%’로 정의했다. 앞서 이러한 정의에 대한 일반적인 비판들을 살펴봤는데, 그러한 비판들의 근간엔 공히 이러한 정의에 따르게 되면 중산층이 지나치게 많게 잡힌다는 ‘경험적인 직관’이 있었던 게 아닌가 한다. 즉 위 정의에 따르면, 2012년 현재 우리나라 중산층 규모는 세부적인 기준을 어떻게 잡느냐에 따라 60.3%(전가구, 시장소득 기준)에서 69.1%(도시 2인이상 가구, 가처분소득 기준)로 집계된다. 멀리 보면 1997년 외환금융위기에서부터 이후 벤처거품붕괴, 카드대란, 2007/08년 금융위기 등을 거치면서 한국경제의 활력은 완전히 소진되었고, 그 과정에서 신자유주의는 한국의 경제/사회를 양극화의 극단으로 몰고갔음은 주지의 사실. 그랬는데도 2012년 말, 즉 신자유주의가 극단에 치달았다는 이명박 정권 마지막 해에 우리나라 인구의 60% 이상이 중산층이라니! 누구도 이를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을까? (여기서 통계 자체가 잘못되었을 가능성은 배제하고 논의를 전개하자.) 그 까닭은, ‘중위소득 50~150%’는 ‘상대적인’ 정의이기 때문이다. 자, 이렇게 한번 질문을 던져보자. “신자유주의 양극화의 결과 중산층 비중은 늘었을까, 줄었을까?” 우리의 일반적인 감각은 이에 대해 ‘줄었다’라는 답변을 주저없이 내놓을 것이다. 신자유주의로 인해 덕을 본 사람도 없진 않지만 국민 대다수의 삶의 수준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양극화다). 그런데 조금만 생각해봐도, 이러한 답변에는 ‘중산층’에 대한 ‘절대적’ 기준, 즉 “이 정도는 돼야 중산층이지” 하는 기준이 전제되어 있음을 우리는 이해할 수 있다. 즉 신자유주의 양극화 진행에 따라, 그 (절대적) 기준에 못 미치는 사람들이 많아졌으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중산층을 박근혜 등이 그러듯 ‘중위소득의 50~150%’라는 식으로 정의하면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올 수도 있다. 즉 신자유주의 양극화로 인해 사람들의 소득이 하향평준화될 경우 중산층의 비중은 오히려 증가할 수도 있는 것이다. 바로 ‘중위’라는 개념 때문이다. 어떤 집단의 ‘중위소득(median income)’이란 그 집단에 속하는 사람들을 소득의 크기 순으로 늘어놓았을 때 정가운데 위치한 사람의 소득을 말한다. 즉 100명이 있다면 50번째로 가난한(=부유한) 사람의 소득이 이 집단의 중위소득이 된다. 이때, 소득이 적은 사람 49명이 모두 빈털털이가 되고 그들의 소득을 가장 부유한 10명이 나눠갖는다고 해도 50번째 사람의 소득만 불변이라면 이 집단의 중위소득은 유지된다. 또한 90명의 사람들의 소득이 모두 상위 10명에게 몰리는 식으로 양극화가 이뤄진다면, (이때 중위소득은 0이고 90명의 소득이 모두 0이므로) ‘중위소득의 50~150%’라는 정의에 입각한 이 집단의 중산층 비중은 무려 90%가 된다!

‘중산층 70%’와 ‘고용률 70%’의 관계 — ‘중산층 70% 복원’이 국정과제에서 빠진 진짜(?) 이유

자 그렇다면, 이상과 같은 성격을 갖는 ‘중산층 = 중위소득의 50~150%’라는 정의(definition)가 고용률 제고정책과 어떤 관련이 있는가?

보통 고용률 상승은 취업인구의 증가를 의미하고, 취업인구 증가는 가계소득 증가를 의미하므로, 만약 우리가 ‘절대적인’ 중산층 기준을 가지고 있다면, 이러한 가계소득 증가는 곧장 중산층 증대로 이어질 것이다(사실 지금까지 그냥 ‘소득’이라고 했던 것은 모두 ‘가계소득’을 의미한다. ‘중산층’이란 보통 개인이 아닌 가계/가구 단위에 붙이는 규정이기 때문이다). 즉 우리나라 사람들이 흔히 “연소득 5천만원은 돼야 중산층”이라고 생각한다면, 취업인구 증가에 따른 고용률 상승은 그러한 기준에 맞는 가구수를 늘릴 것이란 뜻이다.

‘중산층 = 중위소득의 50~150%’와 같은 (상대적인) 기준을 가지고 있을 땐 얘기가 달라진다. 즉 추가적인 취업(=추가적인 소득상승)이 어떤 가계에서 발생했느냐에 따라, 위 정의에 입각한 중산층 비중은 증가할 수도 있도 감소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1) 추가적인 취업이 중위소득 50%에 못 미치는 가구에서 발생한다면, 그리고 그 결과 해당 가구의 가구소득이 중위소득 50%를 넘어선다면, 이 집단의 중산층 비중은 증가한다. 그러나 (2) 추가적인 취업이 가구소득이 중위소득 150%에 미치지는 못하면서도 그에 근접한 가구에서 발생한다면, 그리하여 이 가구가 ‘중위소득의 50~150%’ 범위를 벗어난다면 중산층 비중은 감소할 것이다. 끝으로, (3) 추가적인 취업이 중위소득 언저리에 위치한 가구들에서 발생하는 경우에는, 결과적으로 중위소득 자체가 높아져 일부 가구가 저절로 중위소득 50% 미만으로 전락할 수도 있다. 물론 이때는, 중위소득 150% 선도 상승하게 돼 원래는 고소득층에 속했던 이들이 새로 중산층으로 들어올 수도 있어, 최종적으로는 ‘중산층 = 중위소득의 50~150%’의 비중이 늘지 줄지 알 수는 없다. 이상을 그림으로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median

위 그림에서 보듯, 고용률 상승이 어느 소득분위에서 주로 발생하느냐에 따라서 ‘중산층 = 중위소득의 50~150%’은 늘어날 수도 있지만 반대로 줄어들 수도 있다. 일반화시켜서 말하면, 고용률 상승이 소득분배를 더 불평등하게 만들 수도 있다는 얘기다. (물론 고용이 모든 소득계층에서 골고루 증가할 수도 있다. 그러나 현재의 논의에서는 이런 경우는 배제한다. 그 이유에 대해선 이하의 논의를 보라.)

저소득계층의 고용상태가 개선되고 그것이 그들 가계의 소득을 증대시켜야만 고용률 증가가 ‘중산층 복원’으로 이어질 수 있다. 만약 고용률 제고가 중간계층 언저리부터 그 이상에서 벌어진다면, 이를 통해 소득분배가 개선될 것인지는 장담할 수 없다. 혹여 이를 통해 ‘중산층 = 중위소득의 50~150%’의 비중이 증가한다 해도, 그것은 저소득층의 소득증가를 통한 것이 아니라 기존에 고소득층에 속하던 이들이 중위소득 150% 이하로 떨여진 결과일 뿐이므로, 이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따라서 만약 정부가 고용률 제고를 통해 중산층 복원을 꾀한다면, 정부의 고용정책은 반드시 저소득층에 초점이 맞춰져야만 하는 것이다.

바로 이렇게, 고용률 제고 정책이 중산층 비중을 오히려 줄어들게 만들 수 있다는 가능성 때문에, 이 둘을 함께 가져가기가 어렵다. 이러한 까닭에 결국 ‘중산층 70% 복원’이라는 매우 ‘섹시한’ 정책목표가 국정과제에서 누락된 것이 아닐까 나는 생각한다.

정부의 ‘양질의 시간선택제 일자리’ 정책 — 현 정권의 본질(!)

이제 현 정부의 고용정책, 또는 고용률 제고정책이 어떠한가를 보자. 이와 관련된 정부시책의 핵심은 바로 ‘양질의 시간선택제 일자리’를 늘리는 데 있다. 지난 달 말에는 공공기관 채용정보박람회를 열면서 이러한 유형의 일자리를 만드는 데 공공기관을 앞장세울 것임을 천명했고(링크), 삼성 등 대기업들도 잇따라 ‘시간선택제’ 채용계획을 내놓음으로써 정부 정책에 화답하는 모양을 연출했다(링크).

이상의 논의에 비춰볼 때,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 보아야 할 것은 과연 어떤 이들이 바로 그 ‘양질의 시간선택제 일자리’를 채워갈 것인가 하는 것이다. 이와 관련, 정부가 시종일관 강조하는 것이 ‘고학력 경력단절 여성’이다. 즉 출산과 보육, 또는 나이든 부모봉양 등의 이유로 본인의사와 상관없이 회사를 그만둔, 최소한 대학교를 졸업한 고급여성인력을 일터로 다시 불러들인다는 얘기다. 정부가 출산과 보육, 노인생활과 관련된 복지체제를 대폭확대 내지는 정비하겠다고 나서는 것도, 결국은 이를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다.

이는 그 자체로만 보면 당연히 권장할만한 일이다. 사실 그것은 기업도 원하는 일이다. 이제 대학을 막 졸업한 애송이보다야 자기 회사에서 10년쯤 잔뼈가 굵은 워킹맘이 능력만 놓고 본다면 백번 나을 것이기 때문이다. (말할 것도 없이, 시간선택제 일자리 자체에 대해서도 비판할 부분이 많다. 하지만 이 글에서는 생략하기로 한다.)

이렇게 고학력 경력단절 여성들이 ‘시간선택제’로 채용되면 고용률이 자연스럽게 높아질 것이다. 그렇다면 ‘중산층 = 중위소득의 50~150%’ 비중도 늘어날까? 이는 바로 그 ‘고학력 경력단절 여성들’이 어느 소득분위에 대체로 속해있을까를 생각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당연히 예외야 상당정도 존재하겠지만, 이들의 대다수는 ‘고학력 남성’과 결혼해 가정을 이루고 있을 것이고, 그들이 이루는 가계의 소득도 중위소득 이상일 확률이 높다. 그리하여, 현재와 같이 정부가 ‘고학력 경력단절 여성들’에 초점 맞춰진 ‘양질의 시간선택제 일자리’를 통해 고용률을 높이려고 하는 한, 향후 소득분배 상태는 개선되기보다는 악화되기가 쉬운 것이다!

거듭 말하지만, 모든 고용률 제고책이 소득분배를 악화시키는 것은 아니다. 고용정책의 주파수가 저소득층에 맞춰진다면 고용률 제고가 소득분배 개선으로 자연스레 연결될 것이다. 이때 가장 중요한 것이 기존의 비정규직의 처우를 개선하고(각종 사회보험 배제, 노동과정에서의 차별 등), 비인간적인 현재의 최저임금을 대폭적으로 인상하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저소득/빈곤층의 근로의욕을 고취시키는 한편 기존에 고용되어 있던 이들의 처우를 개선한다면, 사회는 지금보다 훨씬 더 활기를 띨 것이고 경제의 건전한 선순환이 복원될 조건도 마련될 것이며, 중산층 규모도—그것을 어떻게 정의하든—늘어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정부가 이러한 사실을 모르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정부가 비정규직 처우개선이나 최저임금의 대폭적 상승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이 오로지 고용률 수치를 올리는 데만 급급해 야비하게 고학력 경력단절 여성에만 집착하는 것은, 오늘 대한민국 정부의 성격이 어떠한가를 소리없이 웅변해준다. 즉 ‘중산층 70% 복원’이라는 모토에서 언뜻 엿보였던 현 정부의 진보적인(!) 면모는, 그것이 국정과제에서 빠짐으로써, 그리고 사회적으로 상층에 속한다고 해야 할 이들을 중심으로 고용정책을 펴나감으로써, 완전히 탈색되었다. 다시 말해 이번 정부도, 선택된 소수만 키우고 그 외의 사람들은 그들로부터 떨어지는 떡고물을 주워먹게 하는, 이른바 ‘적하효과(trickle-down effect)’에 입각했던 이전의 신자유주의 정부와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다.

현재의 박근혜 정부는 중산층—그것을 뭐라 정의하든—을 두텁게 하는 데 실질적으로 아무런 관심이 없다. 혹여 그들이 ‘중산층 = 중위소득의 50~150%’을 증대시킨다면, 그것은 저소득층을 끌어올림으로써가 아니라 150% 이상에 위치하던 이들을 끌어내림으로써일 것이다. 다름아닌 ‘양질의 시간선택제 일자리’를 통해서 말이다. 그러니까 이때 ‘양질의 시간선택제 일자리’는 고학력 경력단절 여성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대부분의 정규직 노동자를 타겟으로 할 것이다. 그리하여 결과적으로 그것은, 기존 비정규직의 질적 제고가 아니라 기존 정규직의 질적 하락을 야기할 것으로 예상된다. 사실은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양질의 시간선택제 일자리’에 환호할 수 없는 주된 이유다. (끝)

세제개편안 논란에 대하여 (3/끝) 무엇을 할 것인가

4. 세금과 임금: 현실에서는 모든 세금을 자본이 부담하진 않는다

앞에서 모든 세금은 원칙상, 그리고 이론적으로 자본으로부터 나온다고 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다.

모든 세금이 자본으로부터 나온다는 명제의 근저엔 임금에 대한 더욱 근본적인 논의가 전제되어 있다. 바로, ‘임금=노동력의 재생산비용=노동자의 생존비용’ 등식이 그것이다.

일단, 자본으로부터 직접 징수되는 법인세가 자본에서 나온다는 것은 쉽다. 문제는 노동자 각자의 임금으로부터 공제되는 소득세인데, 정의상 임금은 노동자의 사회적 생존비용이므로, 여기에서 한푼이라도 세금으로 나간다면 노동자의 재생산에 차질이 생길 것이고, 이는 결국 자본이 (임금인상이라는 형태로) 보충해줄 수밖에 없다.

그러나 바로 그 노동자의 재생산비용, 또는 ‘사회적 생존비용’이라는 것이 가변적이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일정한 사회적 평균값일 수밖에 없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그러한 평균은 변화하지 않을 수 없고, 나라마다, 그리고 한 나라 안에서도 지역이나 계층마다 다를 수 있다. 결국 ‘임금=재생산비용’이라는 명제는, 이런 모든 차이들을 사상한 매우 추상적인 규정인 셈이다. 마르크스는 임금을 결정하는 이런 모든 요소들을 ‘임금의 역사적, 도덕적 요소’라고 불렀다.

뿐만 아니라, 임금은 적어도 일시적으로 그러한 평균값을 상회하거나 하회할 수도 있다. 갑작스럽게 물가가 올랐을 때, 임금은 명목크기가 유지된다 해도 실질적으로는 하락한 것이며, 이는 곧 노동자들의 생활수준 저하로 나타난다. 즉 정상적인 재생산이 안 되는 것이다. 가장 추상적인 이론의 차원에서 봤을 때, 이러한 상황은 곧 임금인상을 통한 노동자의 투쟁을 통해 해소될 것이기에 그저 일시적인 교란상황에 그친다. 그러나 문제는, 실제 현실에선 노동-자본 간의 계급관계에 따라 그러한 임금인상이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 그리하여 만약 저하된 실질임금 수준이 장기화되면, 그것이 새로운 사회적 평균으로 자리잡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세금의 경우도 다르지 않다. 원칙상으로는, 노동자로부터 걷어가는 소득세가 많아지면, 그 차액만큼을 노동자가 자본가로부터 임금인상을 통해 받아낼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못할 경우엔 정상적인 노동력 재생산에 차질이 생기며, 나아가 그러한 비정상적인 상황이 새로운 ‘정상’으로 자리잡을 수도 있다. 이럴 경우, 세금은 자본가가 낸 것이 아니고, 노동자의 생활수준 저하를 통해 지불된 게 된다. 바로 이러한 까닭에 나는 앞서 소개한 ‘경제위기와 복지국가’라는 글에서 현대적 조세제도“치열한 계급투쟁의 결과 얻어낸 임금인상이라는 ‘전리품’을 자본가계급이 은밀하게 회수해가는 교묘한 방식”이라고 부른 것이다.

5. 세금, 복지, 임금: 증세의 조건?

간단히 정리해보자. 한편으로 세금은 (자본이 직접 지불하지 않더라도) 궁극적으로는 자본으로부터 나온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세금은 (특히 자본이 직접 지불하지 않는 경우에) 노동자 서민대중의 삶의 질 저하를 대가로 하기도 한다.

이것은 하나의 모순인데, 이러한 모순이 집약되어 나타나는 것이 바로 ‘임금’이라는 범주다. 증세 자체는 중요한 게 아니고, 증세의 결과 줄어든 소득을 노동자들이 임금인상을 통해 보상받아낼 수 있는지 여부가 핵심이란 얘기다. 그리하여 현재의 논쟁이나 투쟁도 바로 여기로 집중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 현재 정부의 세제개편안이 포함하고 있는 ‘보편증세’의 문제는, 현재 논쟁의 양 당사자들이 주장하는 대로 저소득 노동자를 털 것이냐 고소득 노동자를 털 것이냐의 문제가 아니라, 증세를 임금인상으로 성공적으로 연결시켜 내느냐 여부의 문제다. 좀 더 평이하게 말하면, 증세의 결과 노동자 서민대중의 삶의 질이 저하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어쩌면 누군가는 이렇게 물을지도 모른다. 지금은 세금을 걷어서 전투기 사자는 것도 아니고 복지를 하자는 것이니, 어차피 노동자가 세금을 내더라도 더욱 큰 복지로 돌려받을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러니 여기에서 임금인상은 별개의 문제 아닌가? 한편으론 맞는 말이다. 이를테면, 정부가 노동자/대중으로부터 세금으로 거둬들인 재원으로 복지정책을 시행하고, 그러한 복지정책이 노동자의 재생산비용을 낮춰 세금인상분을 정확히 상쇄하고도 남는다면, 이러한 증세를 통해 노동자들의 삶이 더 나아질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은 바로 이것이 ‘내가 만드는 복지국가’류의 프로젝트들의 근간을 (명시적으로든 암묵적으로든) 이루는 아이디어가 아닌가 한다.

하지만 이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소리다. 첫째, 현재로서는 노동자와 서민대중으로부터 거둬들인 추가세수가 그들을 위한 복지에 쓰일지, 아니면 자본이 내지 않은 세금을 보충하고 나아가 자본을 위해 쓰일지, 심지어 전투기 구입하는 데 쓰일지조차 확실치 않다. 올초부터 정부에서는 ‘세수부족’을 입버릇처럼 말하곤 하는데, 지금 논의되는 증세규모는 적극적인 복지는커녕 세수부족을 메우는 데도 모자란 수준이다.

둘째, 추가세수가 복지에 쓰이더라도 문제다. 왜냐하면 현재 우리나라의 노동자와 서민대중에게 필요한 것은 현재 삶의 수준의 유지가 아니라 그 대폭적인 상승이기 때문이다. 사실 이것은 자본주의 하에서 모든 계급투쟁이 지향해야 할 바다. 왜냐하면 여기에서 모든 경제적 가치는 노동자와 서민대중이 만들어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많은 세금을 내고, 아무리 많은 복지를 해도, 일하지 않는 자본가가 단 한푼이라도 챙겨간다면 착취는 철폐된 것이 아니고, 따라서 노동자계급은 승리한 것이 아니다.

6. 다시 복지로: ‘어떤’ 복지냐의 문제

여기서 잠시 현재 한국사회에서 복지가 이슈로 떠오르는 배경이 무엇인지를 떠올려보자. 왜 보수정권조차도 복지를 하려고 하는가? 바로 대중의 활력이 극도로 저하돼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신자유주의 때문인지, 경제위기 때문인지는 여기서 따지지 말자. 여하튼 그러한 대중의 활력 저하가 단순히 (일부) 노동자들의 삶을 피폐하게 만드는 것을 넘어 경제의, 그리하여 자본의 원활한 재생산을 방해하고 있고, 이를 보기좋게(?) 해소할 수 있는 가장 유력한 대안이 바로 현재 한국에서 제기되고 있는 복지인 것이다.

현재 우리 사회에서 복지란 자본(주의) 재생산의 위기를 타개해주는 수단으로 제시되는 것이다. 이를테면 비정규직 문제를 보라. 너무 심각하다. 사회의 응집력과 재생산을 크게 방해할 정도다. 어떻게 해결할까? 정규직화? 임금인상? 그렇게 되면 얼마나 좋겠나. 이러한 명확한 해결책을 취하지 않고도 비정규직 문제의 폐해를 피하기 위해 그들은 ‘복지’를 선택한 것이라고 보면 된다. 즉 그들은 비정규직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관리를 위해 복지확대를 추구한다.

이 대목에서 ‘어떤 복지냐’가 중요한 질문으로 떠오른다. ‘체제의 유지와 관리’ 차원에서, 즉 대중의 삶의 수준을 현재의 상태에서 안정적으로 관리하고자 복지를 추구하는 저들과 달리, 노동자계급과 서민대중의 이익을 옹호하는 우리는 어떤 복지를 원하는가? 적어도 현재의 한국사회에서 진보진영의 복지에 대한 태도는, 그것을 바닥에 처박힌 대중의 삶의 질을 높이고 극단으로 치달은 경제적/사회적 불평등을 축소하는 계기로 만드는 것이어야 한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이러한 복지에 대한 인식, 그리고 그를 향한 투쟁은 복지(국가)와 세금이란 것이 그 자체로 계급투쟁의 표현임을 명확히 하는 데서 출발한다. 자본가에 대한 투쟁은 임금을 가지고 하는 것이 보통이다. 어쩌면 그러한 투쟁을 통해 충분한 임금을 확보해낸다면 복지도 필요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오늘 한국의 현실에서 이는 불가능에 가깝다. 최근 최저임금 결정에서 극명히 드러났듯이, 현재 한국사회에서 자본과 노동 간의 힘관계는 현저한 임금인상을 낳을 수 있을 정도가 아니다. 노동은 더없이 취약할 뿐만 아니라 사회의 다양한 주체들로부터 점점 더 고립되고 있다.

바로 이런 현실에서 복지의 확대는 자본가에 대항한 노동자계급의 주요한 투쟁을 되살릴 수 있는 좋은 계기다. 임금 올려달라고 회사를 상대로 투쟁하는 것보다 더 많은 복지를 달라고 국가를 상대로 요구하는 것이 훨씬 더 많은 정당성을 갖는 게 요즘 한국의 현실이다. 이것이 바람직한 현상은 아닐지라도, 노동자와 서민대중의 이익을 옹호하는 좌파는 그러한 복지에의 열망을 대중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한 계기로, 나아가 계급투쟁의 정당성을 새롭게 정의하는 적극적인 계기로 끌어올릴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어떠한 일이 있어도 이제껏 논의되고 있던 복지가 후퇴되는 일은 막아야 하며, 나아가 더 많은 복지를 요구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만약 증세가 필요하다면, 이에 대해서도 적극적인 태도가 필요하다. 중요한 것은 노동자와 서민대중이 제 살을 깎아 복지비용을 대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것이 종국에 그들의 삶을 ‘조금’ 낫게 해준다 해도 말이다. 따라서 증세의 최우선순위에는 자본가, 그리고 그간 제대로 세금을 내지도 않았던 대자산가에 대한 법인세나 재산세, 자본이득세가 올라야 할 것이다.

또한 전술적인 이유에서든, 아니면 위와 같은 증세로는 충분한 복지재원이 마련되지 않아서든, 만약 노동자와 서민대중에 대한 보편증세(소득세/소비세 인상, 그리고 사실상의 보편증세인 사회보험료 인상 등)가 필요하다면, 이것을 받아들일 수도 있어야 한다. 단, 이럴 경우, 엄청난 대중의 저항이 있을 것인데, 좌파들은 그러한 저항이 복지에 대한 저항이 되지 않으면서 자본가와 대자산가 집단을 향하도록, 그리하여 궁극적으로 임금인상에의 대중적 요구로 전환될 수 있도록 유도할 수 있어야 한다. 요컨대, 좌파들은 현재 일어나고 있는 ‘복지’ 국면, ‘증세’ 국면을, 현재의 미약한 계급역관계를 뒤집는 기회로 사용해야 한다.

(※ 사족: 복지비용을 실질적으로 자본가가 부담케 하는 데 있어 핵심이 보편증세와 더불어 임금인상을 관철시키는 것이다. 많은 부동산을 소유한 대자산가들과 관련해서도 마찬가지다. 단순히 그들에게 엄격하게 과세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러한 과세의 결과가 이를테면 세입자에게 전가되지 않도록 전월세상한제 등이 보조적으로 필요하다.)

(끝)

세제개편안 논란에 대하여 (2) 세금의 본질과 계급투쟁

2. 복지재원? 모름지기 모든 세금은 자본으로부터 나온다

어쨌든 복지를 위한 재원이 쟁점으로 되고 있으니, 그에 대해 한번 생각해보자. 결론부터 말하면, 모든 복지재원은, 나아가 모든 세금은 자본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이다. 이것을 깨닫는 것이 가장 중요한 포인트다.

당연히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게 뭔 소리냐, 하실 것. 아니, 내가 열심히 일해서 받은 피같은 임금에서 세금이 나가는데 그게 무슨 개소리냐고! (-_-) 근데 그렇지가 않다.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정치경제학의 대답}이라는 책에 실린 나의 글 ‘경제위기와 복지국가’를 보시면 된다(링크). 책을 구하기가 번거로우신 분은, 이 블로그에 있는 ‘공공요금의 정치경제학’ 씨리즈를 보셔도 되겠고(링크1, 2, 3), 원하시면 앞의 글을 파일로 보내드릴 수도 있다(저 EM의 이메일주소는 우측상단에 있슴다). 핵심을 요약하면 이렇다. ▲자본주의 경제에서 임금이란 본질적으로 노동력의 재생산비용이다(물론 이것은, ‘이론적으로’, ‘평균적으로’ 그렇다는 얘기. 현실에선 당연히 개인적인 차이와 다양한 교란요인이 있다). ▲임금이 그러한 재생산비용에 못 미치면 노동자의 정상적인 재생산은 위협받기 때문에, 원리상 노동자의 임금에서는 세금이든 뭐든 자신의 (사회적) 생존과 관계없는 비용이 지출될 수는 없다. ▲그런데도 현실에서 노동자들은 세금을 내는데, 이는 곧 자신의 생존비용 이상으로 사전적으로 임금상승이 있었음을 의미할 따름이다. ▲따라서 모든 세금은 궁극적으로는 자본에서 나올 수밖에 없다. (다시 말씀이지만, 이러한 사항을 지금 이 글에서 상술할 수는 없다. 더 자세한 논의가 궁금하신 분은 위에서 언급된 글들을 보세요^^)

모든 세금은, 따라서 현재 논란이 되고 있는 추가적인 복지재원도 결국은 자본으로부터 나올 수밖에 없다는 것. 바로 그것이 핵심이다. 이를테면 이번 세제개편안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소득세의 (사실상의) 증세도, 겉보기엔 노동자의 주머니를 터는 것이지만 본질적으로 그러한 재원은 자본가의 금고에서 나오는 것이란 얘기.

말할 것도 없이, 이 경우 증세가 궁극적으로 임금상승으로 이어진다는 가정이 있어야만 한다. 이론적으로는 당연히 그래야 한다. 왜냐하면 기존에 노동자의 세후 임금이 그의 재생산비용(즉 생존비용)이라면, 소득세 증세 이후의 임금은 그러한 재생산비용에 못미칠 것이므로 원활한 재생산을 위해서는 임금인상이 필수적인 것이다. (하지만 이 경우 임금인상분과 소득세 인상분이 일치할 필요는 없다. 소득세 증세의 일부는 노동자에게 혜택으로 돌아올 것이므로, 임금인상은 소득세 인상분보다 작을 것이다.) 이 얘긴 잠시 뒤에 더 하자.

3. 자본으로부터 어떻게 재원을 빼낼 것인가?

이렇게 보면, (‘어떤 복지인가’의 문제는 차치하고) 복지를 위한 재원마련의 방법론은 결국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자본으로부터 복지재원을 빼낼 것인가’의 문제로 귀결된다.

이를테면 법인세를 더 걷는 것은 자본으로부터 직접 수금을 하는 것이겠고, 소득세를 올리는 것은 간접적인 방식이다. 부가세도 마찬가지. 흔히 사람들은 자본이 법인세 인상에는 반대하지만 소득세 인상에는 찬성할 것이라고 짐작할텐데, 전혀 그렇지 않다. 정도야 덜하겠지만 자본은 소득세나 부가세 인상에도 반대한다. 그것은 곧 임금인상으로 자신에게 돌아올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일반적으로 복지나 사회기반시설이 잘 갖춰지면 자본에도 이롭다. 먼저 자본 자신이 여러모로 이득을 보고, 노동력 재생산을 위한 직접적 비용도 줄어들 것. 따라서 자본은 국가지출의 증가에 대해, 이 모든 사항들을 고려해 입장결정을 할 것이다.)

대체로 자본으로부터의 직접적 세금징수인 법인세 인상은 자본이 가진 현실적인 힘을 고려하면 매우 어렵고, 소득세 인상은 자본의 저항은 상대적으로 덜 받지만 정치적 부담이 상당하다. 등등.

그렇다면 이번 세제개편안에 대해 자본이 격렬히 반응하지 않는 까닭은? 정답은,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대중이 알아서 반대하고 있으니 말이다. 사실 이것이, 모든 세금을 자본이 직접 내지 않고 노동자/대중을 통해 간접적으로도 냈을 때 거둘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정치적 효과다. 어떤 의미에서 국가의 지출을 늘리고 복지를 늘리는 것은 계급투쟁의 성과이고, 따라서 노동-자본 간의 투쟁의 표현인데, 노동자 대중을 통해 간접적으로 조세를 납부함으로써 자본은 그러한 계급투쟁을 노동자들 내부의 갈등, 또는 실체도 모호한 ‘국민적 갈등’으로 치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늘날 세금의 문제를 둘러싼 논란에서 노동자 계급을 옹호하는 이들은 기본적으로 거기에 깃든 계급투쟁적인 측면을 복원하는 데서 출발해야 할 것이다. 부연하자면, 바로 이 지점에, 일종의 사회변혁론으로서의 ‘시민증세론’의 가장 핵심적인 허점이 있다. 본질에 있는 계급투쟁을 보지 못하고, 지극히 피상적으로, 즉 복지를 ‘시민적 합의’의 문제로 제시한다는 것이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한가.

(계속)

오늘 신자유주의 비판자들의 역사왜곡과 비과학성 : ‘90% 세율’의 경우

1. 신자유주의는 오늘 ‘공공의 적’이 되었다. 심지어 미국으로 치면 크루그만과 스티글리츠도 신자유주의 비판하고, 한국으로 치면 새누리당 일부를 빼고는 다 비판한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신자유주의가 이렇게 살신성인에 가까울 정도로 모든 욕을 혼자서 먹는 동안, 사람들은 신자유주의 이전의 자본주의에 대한 향수를 술금슬금 키워왔다는 점. 언젠가부터는 스스로 좌파라 칭하는 자들도 신자유주의 이전의 자본주의를 쉽게 ‘황금기’라고 부르는가 하면, 신자유주의 시대에 주로 발달한 ‘금융’에 자본주의의 온갖 악덕을 몰아놓고 반대로 ‘산업’을 찬양하다 못해 신자유주의적 금융에 의해 희생당한, 그래서 우리가 되살려내야 할 무엇으로 묘사하고 있다.

2. 이러한 통념은 역사에 대한 심각한 왜곡 위에 근거해 있다. 그래서 위험하다.

신자유주의 이전의 자본주의는 결코 아름답지 않았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당대를 기록한 자료들을 보는 것이 제격인데, 멀리 갈 것도 없이 마르크스의 {자본론}과 레닌의 {제국주의론}, 룩셈부르크의 {자본축적론}, 바란/스위지의 {독점자본주의론}, 그밖에 제3세계의 종속이론가들의 저작이나 제2차세계대전 이후 제3세계의 민중운동, 산업자본주의 시대의 소외에 대한 여러 논의들… 지금은 마르크스주의의 ‘고전’으로 자리잡은 이런 저작들만 슬쩍 훑어보기만 해도 된다.

이들의 저자들은 저마다 당대의 자본주의야말로 역사상 가장 야만적인 형태이며 지속가능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따라서 자본주의는 곧 종말을 맞을지 모른다는 기대어린 추측을 담고 있다. 물론 그러한 추측이 틀렸음을 우리는 오늘날 몸소 경험하고 있다. 그래서 그들의 시대진단도 틀렸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묘사했던 자본주의를 ‘황금기’라고 부르는 게 정당화되는 게 아니다. 오늘날 관점에서 보아 그들의 분석에 미비한 점들이 있다고 해도, 그들은 각자의 시대에 인류역사상 가장 끔찍한 경험을 하고 있었다. (이쯤 되면, 위 저작들 중에서 당대의 성격을 규정짓는 구절들을 몇몇 인용해주길 기대하실 수도 있을텐데, 그건 독자들께서 직접 찾아보시길 권한다^^)

3. 현재의 부조리를 강조하기 위해 과거를 일정하게 왜곡하는 것, 어느 정도는 허용될만한 일이다. 그러나 그게 지나치면, 특히 그러한 왜곡을 ‘의도적 왜곡’이 아니라 ‘사실’이라고 믿어버리면 곤란하다. 그러한 왜곡 중 하나가 바로 세율과 관련된 거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책소개 기사를 보라.

피지개티에 따르면 1950년대 전후 미국은 ‘중산층 황금기’였다. (. . .) 중산층 황금기는 정부가 부자들에게 높은 세금을 매기면서 시작됐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미국인 중 어느 누구도 세금을 내고 난 후 한 해 2만5000달러 이상의 순 소득을 가져가선 안된다”고 못박는다. 드와이트 아이젠하워가 대통령이었던 시절 세금 최고구간의 소득세율은 90%를 넘었다. (. . .) 그러나 황금기는 끝났고 부자들의 논리는 또다시 힘을 얻었다. (. . .) 이 시점에서 피지개티는 최고 소득세율 90% 정책을 되살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출처)

상위 1%가 퍼뜨리는 ‘신화’들과 이에 대한 스티글리츠 교수의 반박은 다음과 같다. 부자들에 대한 세금을 깎아주면 전체 경제가 좋아질 것이다. 아니다! 레이건 정부 때 소득세 최고세율을 70%에서 28%로 낮춘 뒤부터 불평등만 심화됐다. 현재 35%인 상위계층에 대한 과세율은 70% 정도가 적당하다는 연구결과가 있다. (출처)

위와 같은 주장의 문제는 무엇인가? 일단, 신자유주의가 대대적인 감세정책과 함께 진행됐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어서, 특히 최근엔 MB정권에서의 감세가 두드러졌다. 이른바 ‘부자감세’, ‘재벌감세’가 그것. 그런데 2007/08년에 촉발된 선진국발 경제위기, 그에 뒤이은 ‘점령하라’ 운동 등을 거치면서, 부자와 대기업 및 금융회사 임원들의 부도덕성과 탐욕이 대중의 지탄대상이 되었다. 특히 이 과정에서 1%의 부자들이 충분한 세금을 내지 않는다는 점이 크게 부각되었고, 워렌 버핏이나 조지 소로스 같은 이들이 나서서 동료 억만장자들에게 세금을 많이 내자고 호소하는 기이한 풍경도 연출되었다.

이렇게, 부자들에게 세금을 더 걷어야 한다는 것은 일종의 시대정신과 같이 부상하고 있다. 선진국들 사이에 짙게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재정위기’ 때문에, 증세의 필요성이 더욱 부각되고 있기도 하다. (나 자신도 증세의 필요성에는 공감한다. 그것은 필연적이기까지 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1950~60년대를 위와 같이 미화하는 것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과연 그 당시가 지금보다 훨씬 평등하고 아름다웠던 시절이었는가? 일단, 아래 그림에서 보다시피, 미국의 경우 최고소득세율이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부터 베트남전 직전까지(흔히 ‘황금기’라고 부르는 기간) 90%를 넘었던 것은 사실이다. 지금은? 올해 개정되기 전까지 35%. 다른 선진국들의 경우도 대략 비슷하다. 다음 그림을 보라.

미국 소득세율의 변천

하지만 90% 세율 시절에 부자들이 정말로 자신의 소득 대부분을 세금으로 냈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아주 가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의도’와 ‘능력’의 차원에서만 봐도 말이 안 된다. 즉 세율이 90%인 상황에서는 그 누구라도 탈세의 유혹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고(의도), 과세당국도 현재와 같은 기술적 여건이 미비한 상황에서 그렇게 높은 세율을 실현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을 것이다(능력).

뿐만 아니라, 오늘날 특히 선진 자본주의국들에서 거의 공통적으로 ‘문제’로 인식되는 것들이 바로 그 ‘90% 세율’의 산물—100%는 아니더라도—이라는 점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이를테면, 오늘날 성행하는 복잡한 급여체계가 그렇다. 높은 소득세를 물지 않기 위해 기업들은 과세권이 미치지 않는 기이한 급여항목들을 만들어냈고(예컨대 회사가 임원에게 돈 대신 자동차를 지급하는 것), 이는 오늘날 완벽한 세금징수를 어렵게 하는 요인이 된다. 최근 애플이나 구글 등을 통해 급부상한 조세도피처(tax haven)를 이용한 역외탈세는 또 어떠한가? 물론 조세도피처의 기원은 적어도 19세기로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하지만, 그것이 오늘날과 같은 의미로 본격적으로 발달한 것은 1960년대 이후로 봐야 할 것이다(참조). 좀 더 일반적으로는, 높은 세율은 ‘지하경제’의 발달과 관계가 있음도 지적할만하다.

4. 요컨대, 위에서 소개한 자칭 ‘진보인사’들은 ‘또 다른 세상은 가능하다’의 근거를 과거에서 찾는 것—더구나 그에 대한 면밀한 분석도 없이—이다. 바로 90%의 세율이 존재했던—그것도 매우 오랫동안—미국이 바로 그 증거란 말씀(영국이나 프랑스도 마찬가지).

그런데 그들은, 바로 그 ‘90% 세율의 미국’이, 아무렇지도 않게 노동자를 죽음으로 몰고갔으며, 특히 제3세계에서 폭력적인 수탈을 일삼았다는 것은 언급하지 않는다. 그저 바보같이 입벌리며 ‘으어~~ 자본주의 종주국 미국도 빨갱이였다니!!’라고 외칠 뿐이다. 이런 언급에 깊게 뿌리박혀 있는 공산주의에 대한 혐오는 그렇다 치더라도, 이 정도면 ‘환자’ 아닌가? 매카시즘이 판치던 미국이, 갑자기 빨갱이 나라로 변신하는 순간이다.

또한 그들은, 바로 그 ‘90% 세율의 미국’이, 자국은 물론 세계 곳곳에 ‘조세도피처’를 세워놓고 자국의 기업으로 하여금 자유롭게 탈세를 할 수 있게 해줬음을, 그리고 그러한 기업들은 직원들(특히 관리자급 직원)의 임금을 통해 지불될 세금을 내지 않기 위해서 다양한 회피수단들을 만들어내는 데 매우 열정적이었음을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한 광범위한 조세회피는 단순히 국가의 조세행정을 무력화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자원을 비효율적으로 낭비함으로써 경제에 안좋은 영향을 미쳤다. 50~60년대 미국 비판경제학의 주된 주제 중 하나가 ‘풍요와 낭비’임을 떠올리라. 또한 오죽하면 케네디 대통령이 감세를 주장했겠는가.

끝으로 그들은, 과거에의 향수에 취해 바로 그 ‘90% 세율의 미국’이 오늘날 어떻게 가능한지를 엄격히 따지질 않는다. 위와 같은 온갖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90% 세율의 미국’을 오늘날 건설할 수 있다면야 그것도 해볼만한 일이겠다. 그러나 과연 그게 가능하겠는가? 이를테면 인간사의 30%가 과세대상인 세상과 80%가 과세대상인 세상—물론 이러한 수치들은 삶의 자본주의화의 정도를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에서 ‘90%’의 의미, 좀 더 직접적으로는 용인가능성은 다르지 않겠는가?

5. 신자유주의의 폐해가 좀 더 많은 이들에게 공감을 얻는 것은 좋은 일이다—나는 그들에게 ‘신자유주의가 그렇게 싫다면 왜 당신은 10년 전엔 아무말/일도 하지 않았는가’라고 묻지 않겠다. 그러나 오늘 신자유주의의 지나친 악마화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것의 정밀한 분석을 게을리 하게 만든다. 그들이 신자유주의를 악마화하기 위해 종종 기대곤 하는 역사 왜곡은 바로 그 좋은 증거다.

조금 다른 측면에서 말하면 이렇다. 최근 신자유주의의 위기 내지는 종말을 말하고, 섣부르게 자본주의 자체의 종말, 새로운 대안체제 구상을 내놓곤 한다는 거다. 물론 새로운 세상을 상상하는 것, 그것은 모든 억압받는 자들만의 특권이고, 그것의 실현을 위해 노력하는 것도 그 자체로는 권장할 일이다. 그러면서 역사가 발전하는 것 아니겠는가. 문제는 그러한 움직임이 현실에 대한 올바른 이해에 입각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단적으로 말해, 금융이란, 금융화란 무엇인가, 그리고 그것은 자본주의를 어떻게 변모시켰는가,라는 질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현재의 경우엔, ‘금융’ 자리에 ‘90% 세율’을 넣으면 된다. ‘90% 세율은 당대 자본주의를 어떻게 반영하고 있으며, 또 그것은 자본주의를 어떻게 변모시켰는가?’

무지가 인류에게 도움이 된 적은 결코 없다. (끝)

오늘, 가치이론의 한계와 가능성: 왜 가치이론은 늘 승리하면서도 변화하지 않는가? (A personal note)

어찌어찌해서 제6회 맑스코뮤날레에서 발표를 하나 했다. 이번 행사는 (몇 개의 전체회의에 더해) 참여하는 각 단체에서 독립적으로 세션을 꾸리는 형식이었는데, 나는 사회경제학회 세션에서 발표를 맡았다(링크).

링크된 페이지에서 보다시피 내 발표의 제목은 ‘가치와 현대자본주의’. 제목만 봐서는 뭘 하려는지 드러나지 않을텐데, 사실 그건 나 스스로 뭘 말해야 할지 잘 몰랐기 때문이다. 다른 두 개의 발표들이 나도 최근에 쓴 바 있는 ‘인지자본주의론’에 대한 것이어서, 나도 거기에 숟가락을 얹을까 하고 잠시 생각도 했으나 그냥 접었다. 어쨌든 애초 주어진 제목에 맞게 결국 발표는 했고, 지금와서 돌이켜보면 나름 잘됐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언제고 하고픈 얘기였고, ‘맑스코뮤날레’는 그러기에 적당한 자리였다는 얘기다. 물론 이것은 끝이 아니고 시작일 뿐이다.

다음은 발표에 앞서 준비한 메모를, 당일 발표장의 분위기와 토론내용을 참조해 업데이트시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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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마르크스(주의) 정치경제학은 가치이론으로 자본주의 경제를 설명하고자 한다. 그런데 무엇보다 이 문장 자체의 의미를 올바로 이해하는 게 중요하다. 가치이론(value theory)이란 기본적으로 자본주의 경제에 대한 이론으로서, 스미스나 리카도의 이론도 가치이론이라고 부를 수 있다. 한편 마르크스는 그 특유의 방법을 통해 그들 이론의 불충분함을 밝혀냈고, 이를 통해 그것이 근거해 있는 자본주의 경제의 모순을 드러냈다. 따라서 그는 가치이론의 비판자라고 불리는 게 타당하다. 하지만 오늘날 경제학은 마르크스의 표현대로 지극히 ‘속류화’되었으며 주류경제학에서는 누구도 자본주의 경제를 다룸에 있어 ‘가치’에 기반을 두지 않는다. 이러한 상황에서 마르크스에 근거한 경제논의를 ‘가치이론 비판’이라고 부르는 것은 적절치 않으며, 오히려 현재의 주류경제학 및 그와 방법론적 기초를 공유하는 비주류경제학들에 대해 자신을 차별화한다는 의미에서 나는 마르크스적 경제이론을 일컫기 위해 ‘가치이론’, ‘가치분석’, ‘마르크스(주의) 정치경제학’ 등의 용어를 쓴다. 바로 이것이, ‘마르크스(주의) 정치경제학은 가치이론으로 자본주의 경제를 설명하고자 한다’라는 문장의 의미다. 그러니 이를 두고, ‘마르크스는 경제(학)을 비판하려고 했지, 또 하나의 경제학을 만들려고 한 것이 아니다’라는 식으로 비아냥대는 것(한국에서 대표적으로 조정환, 이진경 등이 있다)은 아무 쓸 데 없는 것으로, 경제학의 그간의 발달사와 현재상태에 대해 완전히 무지함을 드러내는, 누워 침 뱉기일 뿐이다.

2.
‘가치이론의 위기’가 회자된 것이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다. 특히 최근엔 그것이 디지털화된 현대사회를 다루는 데 무력하다는 측면에서 제기되는 것 같다. 디지털/정보상품을 다루는 데도, 그러한 상품이 만연한 사회에서 성행하는 새로운 노동형태들을 해명하는 데도 무력하다는 거다. ‘인지자본주의론’은 그러한 문제제기 중에서 최근 떠오르고 있는 유력한 대안이다. 어쨌든 그런 비판, 일견 타당한 면 있다. 하지만 기존의 이론이 새로운 현상을 다루는 데 어려움을 갖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그러한 어려움을 들어 기존의 이론을 비판하고 오직 자신만이 새로운 상황을 설명해낸다고 주장하는 이론들도 언제나 있어 왔고. 그러나 이런 경우, 논의가 진행되다 보면, 새로운 주장들은 설익은 채 제출된 것이었음이 드러나곤 한다. 실제로 최근 다수의 연구들이 보여주고 있듯이, 가치이론은 오히려 오늘날 새로운 현상들을 다루는 데 있어서도 분석적으로나 비판적으로나 탁월함을 입증하고 있다.

내가 보기에, 그러한 탁월함의 매우 중요한 한 근거는, 가치이론이 예의 그 ‘새로운 현상들’을 반성적으로 다룬다는 데서 나온다. 그런 과정에서 ‘새로움’들은 침잠되고 다져져 ‘낡음’ 속으로 젖어들어가고, 동시에 전에는 자각되지 못한 채 잠들어있던 새로움의 싹들이 낡음 속에서 눈을 뜬다. 즉 기존 이론의 막다른 골목으로 여겨졌던 새로운 현상들이 사실은 그러한 이론에 의해 별 문제없이 설명되더라는 것이다. 물론 이때 동시에 기존의 이론도 일정한 발전을 이룬다. 왜냐하면 ‘새로운 현상들’이 새로운 것은 대체로 기존의 이론이 포착은 했으나 본격적으로 다루지 않았던 그 대상의 면모들이기 마련이어서, 이제 그 면모들을 다룸으로써 이론이 더욱 세심해지기 때문이다. (참조: 김공회, 「인지자본주의론의 가치이론 이해 비판: ‘비물질노동’의 개념화와 측정을 중심으로」, {마르크스주의 연구} 제9권 제1호, 2012. 링크)

이와 같은 ‘이론의 반성’은 사람들이 일상생활에서 행하는 반성과 별로 다를 바가 없다. 이를테면 이성, 즉 반성하는 능력을 가졌다고 해서 모두가 반성을 (의식적으로) 하는 건 아니다. 이론도 그렇다. 반성을 잘 하는 이론, 반성하는 것이 이론 그 자체의 논리에 의식적으로 각인된 이론, 그런 이론이 좋은 이론이다. 마르크스적 가치이론은 바로 그러한 이론이며, 이런 성격은 마르크스 특유의 방법에서 유래한다.

3.
여기에서 한 가지 재미있는 논점이 나타난다. 즉 사정이 위와 같다면, ‘새로운 현상들’과 관련해서 높게 평가돼야 마땅한 가치이론의 힘은, 그것이 몇 가지 올바른 방법론적/원칙론적 기반들을 확보하고 있다고 저절로 생기는 게 아니고, 그것이 기존의 것들을 충분히 다뤄주고 있을 때에만 나오는 것이 아니겠냐는 것이다. 원래 있었던 것들, 예를 들면 ‘노동’에 대한 만족스러운 논의(최소한의 ‘컨센서스’)도 갖춰지지 않는 상황에서 ‘새로운’ 노동형태를 다루겠다고 나서는 것, 또는 다루지 못한다고 비난하는 것은 어불성설 아니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이렇게 물을 수 있겠다. 과연 가치이론은 국가, 노동, 소비 등과 같은 자본주의 경제의 기본적인 범주들에 대한 충분한 이론들을 갖춰놓고 있는가?

이러한 고찰은 왜 이제껏 가치이론에 대한 (조절이론, 네그리/하트의 ‘제국’론, 최근의 인지자본주의론 등과 같은) 문제제기들이 그렇게 성공적이지 못했는지, 그리고 동시에 그러한 문제제기들이 가치이론의 발전을 낳는 데 왜 그렇게 무기력했는지에 대한 (부분적인) 대답을 우리에게 제공한다. 한편으로 그러한 문제제기들은 가치이론이 가지고 있는 것과 같은 이론적 수준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것들의 실패는 처음부터 예정돼 있었다고 볼 수 있지만, 다른 한편으론 가치이론 내부엔 그들의 도전을 ‘생산적으로’ 받아안아낼 만한 ‘컨텐츠’가 없었던 것이다. 이를테면, 어떤 의미에서 인지자본주의론을 노동이 파편화되고 불안정화된 현대의 상황에 대한 문제제기—비록 ‘노동’이나 ‘가치’와 같은 개념들을 그릇되게 이해하고는 있지만—로 볼 수 있을텐데, 가치이론은 그러한 개념들을 적어도 추상적인 차원에서는 올바르게 견지하고 있지만 이를 막상 인지자본주의론이 주목하는 현대의 특수한 상황에서 포착해내는 데 필요한 구체성 내지는 매개개념들은 갖추고 있지 못하다는 얘기다.

바로 그래서, 인지자본주의론과 같은 문제제기들이 가치이론과 관련해서는 언제나 매우 추상적인 개념의 영역에서만 의미있는 논쟁지점을 형성할 수 있었던 것이고, 반대로 가치이론이 그러한 이론들을 격퇴할 수 있었던 것도 언제나 그러한 극히 추상적이고 단순한 영역에서였던 것이다. 이러한 싸움의 결과는 언제나 가치이론의 승리—이것이 대다수의 관객에게도 ‘승리’로 받아들여졌느냐는 또 다른 문제겠지만—였지만, 그런 싸움들 이후 가치이론은 자신의 영역을 넓히기보다는 오히려 기존의 성벽을 더욱 공고하게 쌓는 쪽으로 나아갔다. 그런 의미에서 이것은 진정한 승리가 아닌 것이다. 최근 인지자본주의론과의 싸움에서도 가치이론은, 전자가 틀렸음을 입증한 것 외에 어떠한 성과를 스스로 거두었는가?

처음에 가치이론, 즉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 비판은 ‘주류 가치이론’에 대한 비판에서 출발했다. 그리고 그 비판의 근거를 가치이론은 현실에서 찾았다. 다시 말해 초기에 가치이론은 그 발전의 자양분을 현실로부터도 얻었고 이론 세계에서의 논쟁을 통해서도 얻을 수 있었단 얘기다. 그러나 글의 서두에 지적한 대로, 오늘날 가치이론은 이론의 세계에서 섬처럼 고립돼 있다. 주류경제학이 가치이론에 말을 걸지도 않지만, 후자도 전자에게 더이상 시비를 걸지 않는다. 이는 어쩌면 둘 사이에 공유되는 이론적 지반의 축소에 따른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더욱 애석한 일은 가치이론이 현실로부터 자신의 발전 근거를 취하는 데에도 점차 소홀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 파괴적인 결과를 우리는 오늘날 목격하고 있다. 재벌, 비정규직, 복지(국가), 공공부문・요금, 자영업 등에 대한 가치이론의 이야기를 거의 들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이러한 것들에 대한 개념화 없이 어떻게 한국의 신자유주의를, 나아가 세계 자본주의를 논할 수 있겠는가?

4.
요컨대, 가치이론은 그 비상한 방법론적 원칙 덕분에 엄청난 이론적 가능성을 확보하고 있지만, 그 가능성을 실현시키려는 노력에는 상대적으로 소홀했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받아들이기에 따라선 ‘건전한 문제제기’일 수 있는 것들조차 수용해낼 포용력도 가치이론에는 남아있지 않게 되었다.

그럼 어떻게 하면 가치이론이 그러한 포용력을 회복하고 자신의 가능성을 최대한 실현시킬 수 있을까? 나는 당장 현실과의 치열한 대결에 나서는 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다고 본다. 물론 이 말이, 가치이론에 종사하는 모든 이들이 실증주의자가 되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보다는, (인지자본주의론과 같은 문제제기에 수동적으로만 반응할 것이 아니라) 현실의 운동으로부터 동력을 부여받아 이론 발전의 계기들을 스스로 만들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한동안은 자신과의 고독한 싸움일 수도 있다. 어쩌면 이는 그간의 (절반은 외부에서 강요됐고 절반은 스스로 자초한) 고립의 필연적 결과다.

한편 이론적 고립의 결과 가치이론은 그 비판적 성격을 상당 정도 상실할 수밖에 없었다. 비판의 ‘대상’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에의 개입적 연구가 어느 정도 쌓이고 나면, 가치이론은 오히려 바로 그 현실의 장에서 여타 이론들과의 대결—진검승부(!)—의 기회들을 얻을 수도 있을 것이며, 동시에 그것이 애초에 가졌던 비판적 성격을 회복할 수도 있을 것이다. (끝)

공공요금의 정치경제학 (3/끝) 공공요금에서 나타나는 ‘공공성’이란 무엇인가?

이제까지 썼던 내용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겠다.

  1. 어차피 공공요금의 등락—생필품의 가격 일반의 경우와 마찬가지로—은 임금에 100% 반영될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오르든 내리든 노동자의 삶에는 변화가 없다(링크).
  2. ‘가치’와 ‘가격’을 개념적으로 구분해서 보면, 공공재화/서비스의 ‘가치’는 여타의 상품들과 다름없이 결정되지만 그 ‘가격’은 이윤을 포함하지 않는 수준에서(=원가 수준에서) 결정될 수 있다(링크).

이제까지의 내용은 어쩌면 별로 새로울 것도 없고, 적어도 ‘이론적인’ 수준에서는 별다른 이의도 없으리라 본다. 그렇다면 이제 위 내용을 가지고 무엇을 할까? 조금 더 진행해보겠다.

5. 낮은 공공요금이 ‘공공성’인가?

위에서 요약한 내용에서 시작해보자. 두 번째 글에서 나는 공공요금의 가격은 그 가치에 비해 낮게 설정된다고 했다. 돌이켜보면, 이 경우에 가치와 가격을 구분하는 일은 별로 없는 것 같다. 대체로 사람들은 ‘공공요금은 원가 수준에서 책정된다’라는 정도로만 말할 뿐이다(거듭 밝히지만, 여기서 ‘원가’는 추상적으로 쓴 말이며, 실제로는 공공요금은 원가뿐 아니라 일정한 이윤—인구증가, 시설개선필요 등에 대응해 필요한 일정한 축적을 위한—을 포함한다).

내 개인적 경험과 짧은 독서 등을 바탕으로 요약하면 대충 이런 논리다:

  • 공공요금은 이윤 없이 원가 수준에서 책정되며, 그리하여 공공재화/서비스는 싼값에 대중들에게 공급될 수 있다. —> 이것이 ‘공공부문’이 담보하는 ‘공공성’이다.
  • 위와 같은 이유로 공공부문의 민영화는 절대 안 된다. —> 민영화가 이뤄지면, 기존의 공공재화/서비스의 가격은 폭등할 것이다.

일단 이제까지의 논의로부터, 공공부문이 민영화되어 기존의 공공재화/서비스가 민간 자본에 의해 공급되면 가격이 급등할 것임은 쉽게 도출된다. 이제 가격이 ‘이윤’을 포함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공재화/서비스가 싼값에 공급되는 것이 ‘공공성’이라고 하는 것은 어떻게 봐도 말이 안 된다. 조금 심각하게 말하면, 그러한 논리는 ‘임금’에 대한 일종의 물신주의(fetishism)에 근거해 있다. 임금이란 고정된 크기가 아니며, 사회적 배경, 노동자와 자본가 간의 사회적 세력관계에 따라 얼마든지 변화할 수 있는 양이다. 그저 개별 노동자/자본가 차원에서나 고정된 것처럼 보일 따름이다. 임금을 고정된 크기로, 그리고 ‘분배’ 범주인 임금을 ‘생산’과 같은 경제의 여타 영역과는 무관한 크기로, 그리하여 노동자의 ‘자산’으로 다루는 것은 커다란 잘못이다. 이런 태도에 입각해, 많은 이들은 저가격이 노동자에게 이롭다는 주장을 펼치곤 한다.

하지만 그와 반대로, 이제까지 우리가 논한대로, 공공재화/서비스의 가격이 낮아지면 임금도 낮아진다. 거꾸로 그 가격이 오르면 결국 임금도 오르지 않을 수 없다(즉 가격수준은 기본적으로 노동자의 삶의 수준과 무관한 것이다). 물론 공공요금 인상을 부분적으로만 보전할 정도로만 임금이 오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또한 해당 시기의 노자관계를 반영하는 것으로, 그런 상황이 지속될 경우 우리는 이를 ‘노동력 가치’ 자체의 저하 증거로 간주하지 않을 수 없다.

6. 공공부문에서 생산되는 ‘사회적 잉여’의 행방.

낮은 공공요금이 노동자에게 이로운 게 아니라면, 그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단 말인가? 당연히 그렇지 않다. 앞서 다른 글에서 ‘저물가’ 일반과 관련해 지적했듯이(‘저물가’는 노동자/서민에게 이로운가), 낮은 공공요금은 다름아닌 자본가에게 이롭다. 그런데 공공재화/서비스의 경우엔 일반 상품과는 다른 방식으로, 어쩌면 더욱 심각한 방식으로 자본가에게 이롭다. 그것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게 중요하다.

왜 ‘더욱 심각한’ 방식인가? 보통의 경우 저물가, 정확히는 생활필수품목의 저물가는 그런 품목들을 생산하는 부문을 일정하게 희생시켜 여타 자본가들을 이롭게 한다. 물론 이는 생활필수품목을 생산하는 부문 자본가들의 저항을 일정하게 불러올 텐데, 이를 잠재우기 위해 국가는 그들에게 일정한 ‘보조금’을 제공하기도 한다. 사실은 바로 이러한 사정 때문에, 정부의 ‘저물가 정책’은 대체로 비자본부문(농업)이나 해외부문, 상대적으로 다루기 쉬운 영세부문에 집중되는 경향이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보통의 저물가의 효과가 ‘경제 내부의’ 일정한 역학관계 속에서 (+)와 (–)가 교차하면서 관철되는 반면, 공공재화/서비스의 경우엔 그것의 생산과정에서 발생했지만 그 가격에는 산입되지 않은 ‘사회적 잉여’가 자본가계급 전체에게 분산되는 방식으로 실현된다. 즉 전자가 일정하게 자본 내부의 갈등(즉 필수품 생산자본 v. 그 외 부문의 자본)을 수반하는 반면 후자에서 자본은 전적으로 단일한 이해관계(즉 ‘무조건’ 낮은 공공요금!)를 갖는 것이다.

여기서 잠깐. 윗단락에서 말한 ‘사회적 잉여’가 뭐였던가. 그것은 공공부문에서 분명히 생산되었는데, 그 까닭은 공공부문도 타 생산부문들과 마찬가지로 자본주의적 방식으로 생산이 이뤄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가격의 책정에 있어서는 고려되지 않았는데, 왜냐하면 공공재화/서비스의 생산자는 이윤획득을 목적으로 하는 자본이 아니라 대중(?)의 필요에 의해 추동되는 국가이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공공부문에서는 타 자본부문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저가격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며, 바로 이것이 흔히 사람들이 공공부문의 ‘공공성’이라고 부르는 것의 실체였다.

그러나 지금 내가 주장하는 바는, 바로 그러한 저가격을 통해서 실제로 이뤄지는 일이란, 공공부문에서 생산되었지만 그 생산물의 가격에는 산입되지 않았던 ‘사회적 잉여’가 노동자/서민대중이 아닌 바로 자본가의 주머니를 불리는 데 이용된다는 것이다. 즉 ‘낮은 공공요금’이란 그러한 일이 벌어지는 핵심 고리인 셈이고, 여기에 있어서 모든 자본은 동일한 이해관계를 갖는다. 이쯤 되면, 흔히 ‘낮은 공공요금’을 통해 담보되는 공공성이란 결국 ‘자본의 공공성’이라고 해야 옳지 않겠는가?

7. ‘자본의 공공성’에서 ‘노동자/서민대중의 공공성’으로!

이 대목에서, 다음과 같은 문제가 자연스럽게 제기되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흔히 공공성이라고 부르는 것이 상당 정도로 ‘자본의 공공성’이라면, 과연 그것을 어떻게 ‘노동자/서민대중의 공공성’으로 돌릴 것인가 하는 문제 말이다.

이는 곧 예의 그 ‘사회적 잉여’를 어떻게 취급할 것인가의 문제로 환원된다. 이제까지의 논의를 따라오신 분들은, 공공재화/서비스의 가격을 그 ‘가치’ 수준으로 올리는 것이 하나의 방안이 됨을 쉽게 이해하실 수 있으리라 믿는다. 즉 공공부문에서 생산된 ‘사회적 잉여’를 자본에게 내어주지 말고, 이를 가격에 산입시켜 국가가 받아낸다는 것이다. 이때 공공재화/서비스의 가격은 종전의 원가수준에서 크게 오르지 않을 수 없고, 결과적으로 그 ‘가격’은 그 ‘가치’와 일치하게 될 것이며, 노동자의 임금 또한 공공요금 인상에 발맞춰 오르지 않을 수 없다(이것이 곧장 노동자의 삶의 수준 향상을 의미하지는 않음은 말할 것도 없다). 끝으로, 국가는 마치 자본이 잉여가치(=이윤)을 획득하듯이 ‘사회적 잉여’를 획득할 것이다.

물론 이런 일을 자본주의 국가가 스스로 나서서 추진할 리도 없지만, 그런 시도가 있을 때 자본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국가가 그런 일을 (어떤 경로를 통해서든) 감행하고, 나아가 자본으로부터 제기되는 엄청난 저항을 이겨낼 수 있으려면, 강력한 대중의 힘이 동원되어야 할 것이며, 또한 그러한 국가가 단순한 ‘자본주의 국가’여서는 안 될 것이다. 적어도 그것은 (사전적으로든 사후적으로든) 어떤 이행기적인 형태일 수밖에 없다. 바로 여기서 국가권력 형태의 문제가 제기된다. 또한 바로 이 지점에서 ‘자본주의 국가’와 ‘비자본주의적/이행기적/사회주의적 국가’의 중요한 차이점이 구성된다. 이상의 표현을 빌어 쓰면, 전자는 ‘자본의 공공성’을 지키고 후자는 ‘노동자/서민대중의 공공성’을 지킨다는 것.

그러나 낮은 공공요금을 통해 자본에게 흩뿌려질 ‘사회적 잉여’를 공공요금을 높임으로써 국가가 확보해낸다고 해서 저절로 ‘노동자/서민대중의 공공성’이 담보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을 그 어떤 의도치 않은 방식으로 자본에 내주지 않으면서도 노동자/서민대중을 위해, 또는 실질적인 사회주의로의 이행을 위해 쓸 수 있어야 한다. 예컨대 섣부르게 그러한 잉여로써 ‘복지’를 한다고 나섰다가는 결과적으로 자본을 위한 비용충당책으로 전락할 수 있지 않겠는가(이는 현재의 박근혜정권이 고려할 법한 사항이다). 이럴 경우엔 임금수준이 하락(복지—>임금하락)하지 못하게 만들 강력하고 실효적인 자본 압박수단이 동반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그러한 잉여의 가장 중요한 사용처는 자본의 활동영역을 장악하는 게 아닐까 싶다. 바로 주요한 기업들과 산업들을 국유화하는 것.

이렇게 보면, 공공기관(이 표현이 어색하다면 ‘공기업’ 또는 ‘국영기업’이라고 해도 좋다)이란 노동자/서민대중이 이행기적인 형태의 국가형태를 통하여 이행의 물적 근거(=‘총알’)을 만들어내는 매우 중요한 매개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통상적인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그것은 오로지 ‘자본을 위한 공공성’에 복무할 뿐이다. 낮은 공공요금이란 바로 그러한 ‘가짜 공공성’이 관철되는 핵심 통로다. 바로 이것이 자본주의 하에서 공공기관이 내포한 모순이다.

사정이 이러함에도 오늘 현실은 처참하기 짝이 없다. 진보진영의 많은 이들이 ‘낮은 공공요금’의 신화에 매몰되어 있으니 말이다. 공공기관으로 하여금 노동자와 서민대중을 위한 ‘진짜 공공성’을 담보할 수 있게 하려면 좀 더 과학적이고 깊이 있는 통찰이—가열찬 ‘실천’은 말할 것도 없고—필요하다.

(끝)

[사족 1] 끝부분에서 국유화 얘길 했는데, 그건 그저 하나의 예에 불과하고, 위 글에서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1) 내가 위에서 ‘사회적 잉여’라고 부른 것이 공공부문에서 실제로 생산된다는 점, 그리고 (2) 그것의 ‘의식적 처분’이 매우 중요하다는 점이다. 그런 문제의식 아래 ‘공공성’이라는 개념을 문제삼은 것이고. 다시 말해, ‘사회적 잉여’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처분할 것이냐의 문제—국유화, 복지 등등—는 위 글의 직접적인 관심사는 아니다.
당연히 누구든 이 대목에서 과거 소비에트 등의 경험을 떠올릴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러고는 곧장 ‘국유화’에 대한 알러지 반응을 낼 필요까지는 없다. 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지만, 역사적 경험 내지는 얄팍한 역사지식을 절대화하는 것은 더욱 어리석은 일이니까.

[사족 2] 혹시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 공공부문, 공공기관, 공공요금 등에 대해 궁금하신 분들은 ‘참세상’에 나오는 기사들이나(http://newscham.net) ‘사회공공연구소’에서 나오는 보고서 등을 참조하세요(http://ppip.or.kr/).

공공요금의 정치경제학 (2) 공공요금의 ‘가격’으로서의 특수성

시간이 없어 다 못 썼는데, 앞의 글의 논지는 저번에 썼던 물가에 관한 글과 대동소이하다. 그러나 이번 경우는 ‘공공요금’에 대한 것. 그래서 일반적인 상품(가격)의 경우와는 상이한 분석을 필요로한다. 그래서 계속한다.

(혹시 헷깔리는 분들을 위해 쓰면… 내가 여기서 공공요금이라고 부르는 것은, 수도요금이나 전기요금, 버스요금 등을 말한다. 이렇게 수도/전기/가스/대중교통 등의 공공재화/서비스는 ‘공공기관’에 의해 공급된다. 흔히 ‘공기업’이라고 부르는 것은 공공기관의 일종이며, 현재 우리나라에는 200여 개의 공공기관이 지정되어 있다. ‘공공기관’과 각종 관공서, 정부기관들을 합쳐 ‘공공부문’이라고 한다.)

3. 상품의 가치: 공공재화/서비스의 특수성.

3-1. 보통 상품의 가격은 ‘원가+이윤’으로 이뤄진다. 고전경제학이나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에 어느 정도 익숙한 사람이라면

  • 한 상품의 가치 = 불변자본 + 가변자본 + 잉여가치

라는 공식도 알고 있을 것이다. 당분간 ‘가치’와 ‘가격’ 간의 불일치는 무시하자. 여기서 불변자본이란 상품 생산에 필요한 각종 원료와 반제품, 기계와 설비 등의 가격 총합이고, 가변자본은 곧 임금이다. 결국 일반적으로 경제학에서 ‘원가’라고 하는 것이 곧 ‘불변자본 + 가변자본’인 셈이다. 그렇다면 ‘잉여가치’가 곧 ‘이윤’인데, 보통 경제학에서는 ‘이윤’이 자본가의 수고에 대한 대가 등으로 이해되는 반면, 마르크스적 의미에서 ‘잉여가치’란 노동자가 행한 노동 중에서 ‘임금’으로 지불되지 않은 부분, 즉 ‘잉여노동’에 그 원천을 두고 있다.

사실은 바로 이러한 잉여가치의 존재가 자본주의를 다른 생산양식들과 구별시켜주는 핵심적인 특징이다. 잉여가치의 발생 가능성은, ‘생산과정에서의 노동시간’과 ‘거기에서 소비된 노동력의 회복에 필요한 재화를 생산하는 데 드는 노동시간’이 반드시 같지는 않다는 데서 이미 주어진다. 다시 말해, 내가 책상을 만들기 위해 8시간을 일했다 해서, 책상제작에 쓰인 노동력의 회복(=재생산)에 필요한 샌드위치를 생산하는 데 8시간이 들어갈 필요는 없단 얘기다. 샌드위치 만드는 데는 기껏해야 4시간(곡물의 재배시간을 평균적으로 고려해서) 이상이 들진 않을 것. 따라서 자본가가 노동자를 고용해 8시간을 부려먹은 뒤, 4시간짜리 샌드위치 하나만 던져줘도 이 세상이 돌아가는 데는 아무런 차질이 생기지 않으며, 그 과정에서 둘 사이의 차액인 4시간을 자본가는 ‘공짜로’ 먹게 된다. 그게 ‘잉여가치’이고, 이는 ‘이윤’의 원천이다. 물론 노동자 쪽에서는 샌드위치는 4시간이면 만든다는 걸 알기에 자본가를 위해서 4시간 이상은 일하려 들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체제의 조건—모든 생산수단이 자본가에게 집중되어 있다는—때문에 그는 자본가를 떠나서는 어떠한 생산활동도 할 수 없고, 따라서 다만 ‘먹고 살기 위해서’라도 자본가의 ‘부당한’ 요구에 응할 수밖에 없다.

마르크스는 하루 노동시간(8시간) 중에서 노동자가 자신을 위해 일하는 시간(4시간)을 ‘필요노동시간’, 자본가를 위해 일하는 시간(4시간)을 ‘잉여노동시간’이라고 불렀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루 노동시간 및 그것의 분할(필요+잉여)이 사회적으로 결정되어, 특정한 사회에서, 특정한 시점에는 하나의 ‘사회적 상수(constant)’로 존재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노동시간을 늘리려는 자본가와 이를 저지하려는 노동자 간의 투쟁(=계급투쟁)을 통해 하룻동안의 ‘표준노동시간’이 정해졌고, 그 분할비율 또한 이 투쟁의 결과로 사회 차원에서 시시각각 결정된다.

* 이와 같은 ‘사회적 상수’의 존재가 마르크스경제학을 ‘과학’으로 존재할 수 있게 하는 근거들 중 하나다. 최근 Kenneth Rogoff와 Carmen Reinhart의 ‘실수’를 둘러싸고 말이 많은데(링크), {파이낸셜 타임스}의 칼럼니스트 Samuel Brittan은 이와 관련, “경제학에는 ‘상수’로 취급될만한 ‘매직넘버’가 없다”라는 프리드만(Milton Friedman)의 푸념을 인용하면서 ‘경제학의 비애’를 대변하기도 했다(링크). 그러나 마르크스에겐 그러한 ‘상수’가 분명 있으며, 그것은 물리학 등 자연과학에서의 상수와는 성격이 다르다.

3-2. 보통 상품의 가치(=가격)는 이상과 같은 원리로 결정된다. 하지만 국가나 각종 공공기관이 공급하는 공공재화/서비스의 경우도 그러할까?

여기서 우리가 고려할 점은, 일반적인 상품과는 달리 공공재화/서비스들은 통상적인 자본-임노동 관계에서 생산되지 않는다 사실이다. 물론 공무원들이나 공기업에서 근무하는 준공무원들도 일반적인 임금노동자들과 마찬가지로 임금을 받고, 그들과 비슷한 조건에서 비슷한 시간동안 노동을 행한다. 그러나 그들과는 달리 거기엔 ‘자본가’가 없다. 그것이 중요한 차이다.

앞에서 책상의 예를 들었으니, 이를 계속 가지고 가 보자. 그리고 이번엔 그것이 자본이 아닌 국가에 의해 생산된다고 가정해보자. 생산의 조직자가 자본가에서 국가로 바뀐다고 해서 책상 하나를 생산하는 데 드는 원료/반제품/설비/기계 등의 양이나 종류가 달라질 리는 없다. 노동도 전과 같이 필요할 것이다. 필요노동시간이 4시간이라는 점도 바뀔 이유가 없다. 그렇다면 잉여노동시간은? 잉여가치는? 그렇다. 바로 그것이 문제인데, 왜냐하면 국가는 자본가가 아니기 때문이다. 자본가가 아니기에 국가는 잉여가치 획득을 목적으로 생산을 수행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본이 아니라 국가가 생산을 조직할 경우, 노동자는 잉여노동을 할 필요가 없는가? 원칙상 그래야 할 것이다. 그래서 원칙상으로는 노동시간도 4시간으로 줄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종전과 같은 양의 불변자본을 가동해서 종전과 같은 양의 사용가치를 생산해내기 위해서는 여전히 8시간의 추가노동시간이 필요할 것이므로, 이제 책상 하나를 생산하기 위해 두 사람의 노동자가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물론 이런 일은 있을 수 없다. 단적으로 말해, 일반기업에서는 노동자들이 8시간 일하는데 공기업에서는 4시간만 일한다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그렇게 되면 이 자본주의 경제가 제대로 유지되겠는가? 공기업 노동자들도 일반 노동자들과 마찬가지로 8시간 일하는 것이 현실이다. 따라서 책상 하나 만드는 데 1명이면 족하다. 물론 그는 일반 노동자와 마찬가지로 8시간 일하고 4시간에 해당하는 임금(=샌드위치)만을 받을 것이다. 이럴 경우 문제는 보통의 경우라면 ‘잉여노동(시간)’이라고 불렸을 4시간의 행방이다. 일단, 공기업 노동자가 8시간 동안 일하고도 4시간분에 해당하는 가치액만을 임금으로 받았다면 분명 4시간의 ‘잉여’가 발생했을 것이다. 그러나 국가는 자본가가 아니므로 그러한 잉여를 스스로 취해 개인적 치부에 쓰거나 하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그러한 잉여의 일부는 생산에 재투자돼 ‘확대재생산’의 재원이 되기도 한다. 이러한 (일종의) 축적은 국영기업에서도 필요할 것이지만, 국영기업의 목적은 잉여가치 획득이나 축적 그 자체가 아니고 대중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것이므로 (예컨대 인구감소 등에 따라) 그러한 필요가 증가하지 않으면 투자를 늘릴 이유도 없다.

4. 공공요금의 결정원리.

결국 이상의 논의에 따르면, 공공재화/서비스의 ‘가치’는, 적어도 양적인 측면에서 보면 일반적인 상품의 그것과 다름이 없다. 즉 국가에 의해 생산된 책상이나 자본에 의해 생산된 책상이나 같은 크기의 가치를 갖는다.

  • 자본에 의해 생산된 책상 = 원료/설비 + 8시간 = 불변자본 + 가변자본(4시간) + 잉여가치(4시간)
  • 국가에 의해 생산된 책상 = 원료/설비 + 8시간 = 원료/설비 + 임금(4시간) + 4시간

그렇다면 가격은? 보통은 위에서 결정된 가치에 준해서 가격도 결정되겠지만, 공공재화/서비스의 경우엔 ‘원가’ 수준에서 가격이 결정될 수도 있다(즉 원료/설비 + 임금). 즉 자본이라면 생산의 목적일 잉여가치 획득이 국가에겐 중요한 것이 아니므로, 그것을 가격에 산입하지 않는 것이다. 물론 종종 공공요금이 ‘원가’에도 못 미치는 일도 있겠지만, 그건 특수한 경우로 보자. 아니, 사실은 공기업에서도 기존설비의 보전이나 최소한의 재투자 등은 도외시할 수는 없으므로 가격이 원가보다는 조금 높은 게 보통이겠다. 이런 모든 사정들을 염두에 두면서도, 논의의 단순화를 위해 우리는 ‘공공요금=원가’라고 하자.

  • 국가에 의해 생산된 책상의 가격 = 원료/설비 + 임금(4시간)

한편 사정이 이렇다면, 공공요금도 일반적인 물가상승에 발맞춰 오르는 게 정상일 것이다. 앞의 글에서 살펴본 대로, 물가상승은 곧 노동력 재생산 비용의 상승이므로 이는 임금상승으로 반영되지 않을 수 없으며, 공공요금의 한 구성부분인 임금이 오르면 공공요금 자체도 오르지 않을 수 없다. 석유 등의 원재료 가격상승도 공공요금 인상을 낳는 요인이다. (계속)

공공요금의 정치경제학 (1) 공공요금, 과연 낮은 것이 좋은가?

저번에 ‘저물가정책은 곧 저임금정책’이라는 취지의 글을 하나 썼다(링크). 이 글은 그 후속편이라고도 할 수 있을텐데, 하지만 좀 더 크고 일반적인 주제도 부분적으로 건드릴 것이다. 기본적으로 이 글은, ‘공공요금’에 대한 것이다.

1. 공공요금, 낮게 유지하는 것이 좋은가, 아니면 높이는 것이 좋은가?

정초부터 곳곳에서 공공요금 올린다는 얘기가 흘러나왔고, 공공기관(한전, 수자원공사, 철도공사 등)의 엄청난 부채가 사회적 이슈로 떠오르자 낮은 공공요금이 이를 일으킨 주범 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 보통 진보진영에서는 공공요금 인상에 부정적이지만, 이번엔 그것이 공공기관 부채 문제와 엮이면서, ‘공공요금 현실화(=인상)’에 어느 정도 힘이 실리는 모양새다.

어쨌든 진보진영은 공공요금을 낮게 유지하는 것을 대체로 옹호해 왔고, 이는 그들의 ‘反 물가인상’ 입장의 연장선상에서 이해될 수 있다. 즉 물가가 오르면 서민들의 삶이 고달파진다는 게 그 논리다.

반면 우리나라 공공요금이 다른 선진국들에 비해 턱없이 낮다는 비판도 우리에게 매우 익숙하다. 그러한 낮은 요금 때문에 한국사람들이 전기나 물을 마구 사용한다는 얘기도 심심치않게 나온다. 아닌 게 아니라, 내 경험에 비춰봐도 우리나라에서 전기요금이나 수도요금이 낮은 것은 사실인 것 같다.

그렇다면 공공요금, 올려야 하나, 내려야 하나?

2. 공공요금이 높으냐 낮으냐는 노동자에게 아무 상관 없다.

공공요금이 뭔가? 수도요금, 전기세, 버스/지하철 등의 대중교통 요금 등을 말한다. 즉 누구나 삶을 살면서 이용하지 않을 수 없는 필수적인 재화나 서비스의 가격이다. 필수품인 만큼, 그러한 재화나 서비스의 소비에 필요한 재원은 임금(=노동력 가치)의 일부를 이룬다. 따라서 (앞에서 물가 일반에 대해 말했던 것처럼) 공공요금이 높으냐 낮으냐는 노동자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예컨대 집에서 일터로 가기 위해선 버스를 타야만 하는 노동자가 있다고 치자. 그는 일반적인 정의대로, 노동력 재생산비용에 해당하는 금액을 임금으로 받고 있다. 즉 이 금액에 단 1원이라도 못 미치는 금액을 받으면 곧 노동력 재생산이 불가능해져 정상적인 노동을 수행할 수 없단 뜻이다. 물론 그는 버스를 타고 출퇴근을 하기 때문에, 그에 필요한 금액(=버스요금*승차회수)이 그의 임금엔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이때 버스요금이 두 배로 올랐다면? 말할 것도 없이 그에 상응해 임금이 오르지 않으면 안 된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그는 출근을 하지 못하거나, 제대로 출근을 하기 위해 다른 소비재원에서 자금을 끌어와 교통비로 쓰면 그는 굶어 죽을지도 모른다. 따라서 정상적인 노동력 재생산, 생산활동의 원활한 수행을 위해서는 버스요금 상승분은 정확히 임금에 반영되어야 한다.

이상의 논의를 통해 간단히 중간결론을 내려 보면… 어차피 공공요금의 등락은 임금에 100% 반영될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오르든 내리든 노동자의 삶에는 변화가 없다…가 되겠다(물론 지금 우리는 매우 추상적이고 이론적인 차원에 머물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과 같이 공공요금 인상론이 대두될 때, 진보진영이 대개 그러듯이 이를 낮게 유지해야 한다고 굳이 주장할 필요는 없다. 물론 그렇다고 공공요금을 올려야 한다고 애써 주장할 이유도 없다(하지만 이후 논의에서 이런 당연해 보이는 명제 또한 반박될 것이다).

물론 실제 현실에서는, 공공요금을 낮게 유지해야 할 이유가 충분하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모든 사람들이 위와 같이 정상적인 임금을 받지는 않는다는 것. 최저임금에도 못 미치는 저임금이 사회에 만연해 있고, 그마저도 많은 실업자들에겐 그림의 떡이다. 그러니 정부로서도 울며 겨자먹기로(?) 원가보전도 못하는 낮은 수준에서 공공요금을 책정하기도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런 현실을 모르는 것은 아니나… 당분간 우리는 논의를 추상화/단순화하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