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g Archives: iippe

‘날파리’ 친구들에게

얼마전 조정환 선생과의 토론회 이후 나의 소회를 적은 글을 이곳에 올렸다. 역시 예상대로, 적지 않은 날파리들이 떼로 날아와 똥을 싸지르고 갔다. 이 글은, 그 날파리들한테 평소 하고팠던 말이다. 그러나 미리 말해두건대, 나는 파리도 사랑할 수 있다. :) (하지만 파리대왕은 싫다ㅎ)

그 이른바 ‘토론회’ 때문이었는지, 며칠 전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마르크스주의가 종교라면, 그래서 마르크스가 예수와 같은 존재라면, 나는 뭘까? 가장 먼저는, ‘아니 마르크스주의가 종교라니!’라는 자연스러운 반발이 내 안에서 튀어나왔지만, 이내, ‘뭐 굳이 아니랄 것도 없지’, 라며 불은 스스로 사그라들었다.

그래, 만약 마르크스가 예수님이고 마르크스주의가 기독교라면, 나는 그를 연구하는 ‘종교학자’가 되고자 하는 게 아닐까? 나는 그렇다면 어떤 종교학자인가? 그래도 종교니까.. 나름 신실함을 유지하되, 비판적 긴장을 유지하는 종교학자… 적어도 그런 종교학자가, 나는 되고 싶다. 예컨대 이분처럼.

이렇게 보면, 조정환 같은 이는 뭐라고 해야할까? 그도 종교학자인가? 어떤 면에선 그럴 수도. 그러나, 딱! 하고 떠오르는 이가 있었으니… 그 왜, 기독교로 치면 조x기 목사님, 불교로 치면 석x산 스님, 이런 분들 있지 않은가? 음, 생각할수록 적절하다ㅋ

얘기가 이쯤 되면, 제일 불쌍한 건, 그 조목사님 또는 석스님을 예수나 부처인줄 알고 모시는 ‘신도들’이라는 데는 모두 동의하리라 본다. 이들은 내 블로그에 와서 날파리떼 코스프레를 하고 갔지만(나는 안다. 그들이 실은 파리가 아니란 것을), 사실 그들을 날파리 또는 그만도 못하게 여기는 건—날파리들이여, 잘 알아두셔야 한다—내가 아니라 조목사님들일 게다. (솔직히 우리, 이거 다 알잖아요?)

가만 보면, 이쪽의 사이비 조목사님, 저쪽의 진짜 조목사님이랑 하는 짓도 비슷하다. 신도들 삥뜯어 자기배 불리는 것만 봐도 그렇지 않나? 사이비 조목사님은 경제학을 싫어하시지만, 나는 정말이지 ‘조목사님 재생산의 정치경제학’ 이런거 하고 싶다ㅋ(그렇다. 정치경제학은 이렇게, 그 당사자가 아무리 그것을 싫어해도 거기에 있는, 그런 것이었던 것인 것이다!). 물론 그냥 돈을 갖다바치는 건 아니겠지. 그런데 말이지, 말이 좋아 강의(=설교)니 책이니 하지, 정식 강의야 안 들어봐 모르겠지만, 토론회때 (토론 대신으로) 해주신 그야말로 ‘특강’만 두고 미뤄보면, 그 감동이 진짜배기 조목사님 설교엔 훨씬 못 미친다는 느낌이고(오줌마려운 데다가 지루해 죽는줄 알았다—그래서 그림 그린거다), 책은 뭐 솔직히 내용 없기로 이미 정평이 나있지 않은가?

어디 그뿐인가? 그 수많은 잘난 신도들 중에서 제대로 된 ‘후계자’ 하나 길러내지 않는—그러니까 ‘못하는’이 아니라 ‘않는’이다—것은 또 어떤가?! 사실 이번 토론회만 해도, 조목사님 말고 나와서 나랑 한판뜰만한 주자, 그 팀에 하나라도 있나?

 

에고… 눈물 나올라고 한다. 더는 못 쓰겠다. 하지만 글을 마치기 전에, 한 마디만 더 하련다.

친애하는 날파리님들아, 거기서 사이비종교집단놀이 그만 하시고요, 이제 그만 이리 나오시죠? 저는 기껏해야 일개 종교학자일 뿐이니 ‘이리와 내 품에 안기거라’라고는 말 못합니다. 하지만… 이 블로그 이름이 ‘social and material’이에요. 현대사회를 움직이는 데 있어 그 안에서 우리 인간들이 맺는 물질적 사회관계가 얼마나 중요한지, 그리고 그러한 물질적 메커니즘이 우리의 삶과 생각을 얼마나 규정하는지, 당신들 목사님이 안 가르쳐줘도 당신들도 알잖아요?

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런 규정을 넘어서야 한다고요? 물론이죠. 하지만 어떻게요? 그래, 당신들은 똑똑하니까 넘어섰다고 칩시다. 더구나 목사님께서 ‘인지적으로’ 넘어서는 방법도 알려주셨을테니.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요? 프로그래머 언니랑 간병인 아줌마는요?

네, 거기 계시는 게, 반드시 목사님 때문만은 아니라는 거, 저도 알아요. 친구들이랑 헤어지기 싫다는 거잖아요. 하지만 여기도 친구들 많답니다. 친구들 모두 이리 나와서, 저랑 같이 정치경제학 합시다. 쏘셜! 머티리얼!! ㅆㅂ!!! (끝)

이론: 단순하고도 복잡한 것

이론이란 단순한 것이기도 하고 복잡한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현실과의 관계에서 보면 단순할 수밖에 없다. 이론이란 현실에 대한 이론가의 지적 개입의 산물로, 거기에선 현실에 대한 일정한 추상화와 단순화가 일어나기 마련이다. 따라서 이론의 추상성/단순성 그 자체는 문제가 아니며, 이론에 필연적으로 따라붙은 ‘원죄’와도 같은 것이다.

다른한편, 당분간 이론 그 자체의 영역이 있다고 해보자. 여기에서 이론은, 그러니까 ‘좋은’ 이론은 복잡해야만 한다. 즉 그것은 ‘진짜 현실’과 같은 복잡한 구조를, 그러나 ‘진짜 현실’과는 달리 (왜냐하면 이론은 현실 그 자체가 아니라 그 현실의 ‘지적 재구성’이므로) 체계적인 구조를 갖지 않을 수 없다. 마르크스가 {요강} 등에서 ‘현실/역사의 순서’와 ‘구조/논리의 순서’를 구별한 것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다.

이러한 복잡성을 갖지 못하는 이론은 필연적으로 ‘환원론’이 될 수밖에 없다. 즉 자신의 단순함 속으로 현실을 끌어들이려 하는 것이다. 반대로 복잡한 이론은 현실의 복잡성을 반영하면서 끊임없이 거기에 개입함으로써 끊임없이 발전한다. 그래서 단순하고 환원론적인 이론은 언제나 자신의 완결성을 주장하지만, 복잡하고 체계적인 이론은 언제나 자신의 부족함을 탓한다. 바로 이 부족함의 자기인식이야말로, 이론의 내적 발전을 추동하는 원동력이다. 마르크스가 {자본론}이라는 괴물 저작을 거의 완성해놓고도 그 출판을 미룬채, 그리고 죽음의 위협과 사투하면서까지도 자본주의의 작동과 변모에서 주의를 떼지 않은 것은 이런 의미에서다.

통상적인 부르주아 이론(경제학을 포함해)이 전자와 같은 환원론인 반면, 마르크스의 이론은 바로 이런 후자에 속하는 이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의 이론에 대해 그것이 환원론(경제로의 환원론, 생산중심주의 등)이라고 비판하는 이들은, 이론의 위와 같은 성격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근대사회, 공황, 경제학: 마르크스가 리카도에 가한 하나의 비판

오늘날까지도 경제학자들은 공황을 부정한다. 그들은 심지어, ‘공황’이라는 말 자체를 일부러 안 쓰려고 안간힘을 쓰기까지 했다. 이에 대해선 이 블로그에서 한번 지적한 바 있다(링크).

하지만 눈을 가린다고 어지러운 광경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며, ‘말’을 없앤다고 그 말이 가리키는 ‘현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경제학자들이 그러듯, 어떤 사태를 미봉적으로 부정하려 하면 할 수록 그 사태는 점점 더 걷잡을 수 없이 타오르는 법이다. 그러다가 어떤 국면에 이르면, 누구도 그 사태를 부정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겪고 있는 경제위기도 마찬가지다. 이에 대해 일전에 나는 다음과 같이 썼다.

실제로 세계경제는 적어도 최근 40여 년만 놓고 봐도 끊임없이 공황에 시달려왔지만, 그때마다 이 공황들은 때로는 중동 산유국들의 자원이기주의의 탓으로, 때로는 중남미 포퓰리즘적 정부들의 방만한 재정운영이나 동(남)아시아 나라들의 유교적 잔재의 탓으로 얼버무려지곤 했다. 그러나 세계자본주의의 핵심부에서, 그것도 현대 경제의 꽃이라 할 수 있는 금융분야에서 불거진 이번 공황은 마르크스 따위엔 관심도 없던 대중들에게조차 체제 자체의 문제로 다가가고 있는 것이다. (출처)

그런데 돌이켜보면, 위와 같은 태도, 그러니까 자본주의 경제의 내재적 모순에서 유래하는 공황을, 즉 한편으로는 공황의 이와 같은 본질적 성격을, (그리하여) 다른 한편으로는 공황 자체를 부정하는 태도는,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에겐 꽤 오래된 습관이다. 다음 구절을 보라.

리카도는 공황에 대해, 즉 생산과정 그 자체로부터 발생하는 세계시장의 일반적 공황에 대해 실제로는 아는 바가 없었다. 그는 1800년에서 1815년 사이에 벌어진 공황들을, [나폴레옹의] 대륙봉쇄의 결과 시장이 경제적이 아닌 정치적인 이유로 억지로 축소되었기 때문에, 그것들이 흉작 때문에 일어났다고, 지폐의 감가, 식민지 작물의 감가 등에 의해 일어났다고 설명할 수 있었다. 또한 그는 1815년 이후의 공황들에 대해서는, 그것들이 일부는 흉작 때문에, 그리고 일부는 곡물가격 하락 때문에 벌어졌다고 설명할 수 있었다. 그 자신의 이론에 따르면 잉글랜드가 유럽대륙으로부터 격리되었던 전쟁 동안에 곡물가격에 상승압력을 가했던 앞서의 원인들은 작동을 멈추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 시기의 공황들은 부분적으로는 전쟁으로부터 평화로의 이행이 ‘무역 채널의 갑작스런 변경’을 가져와서 빚어졌다고 설명되기도 했다. 이후에 벌어진 역사적 현상들, 특히 세계시장에서 거의 정기적인 주기를 가지고 일어나는 공황들은, 더이상 리카도의 후계자들로 하여금 사실을 부정하거나 이를 우연에 돌리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 . .] (강조는 EM의 것. 출처: Karl Marx Frederick Engels Collected Works, Vol. 32, pp. 128-29)

그렇다면, 이후 경제학자들이 공황의 주기성, 그것의 본성을 인정하게 되었는가? 마르크스에 따르면, 전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이를테면 ‘자본의 과다'(plethora of capital)와 ‘과잉생산'(overproduction)의 구별(이 사항들에 대해 설명하는 것은 생략)을 도입함으로써, 교묘히 본질적인 물음을 회피해갔다.

이상으로부터 우리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1. 과거 리카도주의 경제학자들이 그랬듯, 오늘날의 경제학자들도 공황의 본질, 자본주의 경제의 모순적 성격을 인정하는 척, 그럴싸한 제스처를 취하다가 끝내는 자신들의 기존 입장을 더욱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말 것이라는 점. (이런 경제학의 성격을 가리켜 Ben Fine은 ‘낡은 경제학 제국주의에서 새로운 경제학 제국주의로의 이행’이라는 표현을 썼다.)

2. 마르크스가 리카도에 대해, 그가 불충분하게나마 19세기 초의 공황들은 설명할 수 있었음을 인정했다는 것이 매우 시사적이다. 이것은, 크게 보면 마르크스(와 그의 훌륭한 선배였던 아담 스미스나 헤겔)이 파악하고 있던 근대사회의 본질, 좀 더 직접적으로는 정치경제학의 본질적 성격에 대해 말해주고 있다. 곧 근대사회란 그 물질적 차원의 운동이 정치나 자연과 같은 경제외적 요인들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경제 그 자체의 내재적인 법칙에 의해 규제되는 사회라는 것, 그리고 정치경제학이란 바로 그러한 경제법칙, 따라서 경제법칙에 의해 규제되는 근대사회의 물적 동향에 대한 학문이라는 것! 이런 생각에 따른다면, 정의상 경제학은 (경제외적 강제에 의해 물적 차원의 운동이 결정적으로 규정되는) 봉건제 사회에 있어서는 온전하게 성립할 수 없다.

공정한 가격, 공정한 소비: 커피값 논란(?)에 대해

요즘에 커피값 때문에 말들이 많은가보다. 뉴스를 잘 보지 않아 몰랐는데, 텔레비전에서도 보도되었나보다. 스타벅스에서 커피값을 올렸나? 잘 모르겠다. 이런 문제와 관련, 다음 기사가 무척 재밌다. 요즘 내가 얼마뒤에 발표를 해야 해서 글을 하나 쓰고 있는데, 그거랑도 관련이 되어, 짬이 별로 없지만 간단하게 한번 써본다.

기사: [왜냐면] ‘반값’ 커피 아닌 ‘제값’ 커피가 필요하다 / 박효원 아름다운가게 공정무역사업처 간사 (링크)

전반적인 문제제기—커피가 당신 손에 쥐어지기까지 고생하는 사람들 많다, 이들에게 적절한 보상을 해줘야 한다—에는 대체로 상식 선에서 동의하나 결론은 물론 추론방식이 좀 이상하다. 아니, 웃기다.

1. 글쓴이가 말하는 ‘반값 커피’를 주장하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모르겠는데, 그에 대한 대안으로 ‘제값 커피’를 주장한다는 게 좀 이상하다. 그래서 스타벅스에서 커피값을 올려야 한다는 말인가, 말아야 한다는 말인가? 처음엔 커피값 올리는 게 부당하다고 말하는 듯 하더니, 뒤에 가서는 올려야 한다니 이상하다.

2. 문제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기업의 이윤(추구행위)에 대해선 아무런 문제제기를 하지 않고 있다는 데 있다. 즉 기업의 이윤에 대해 묻지를 않으니, 결론은 ‘제값 커피’, 즉 ‘커피 가격을 올리자’, 좀 더 노골적으로는 ‘힘없는 제3세계 농부들이랑 커피숍 알바들을 위해 우리가 돈 더 내자’가 될 수밖에. 그렇다면 글쓴이는 ‘알바생 처우개선’이라는 조건만 붙는다면 스타벅스 커피값 인상에 동의한다는 얘긴가? (이쯤 되면, 다음과 같이 일갈하실 분도 계시겠다. “아름다운 가게? 마, 니네 알바생한테나 돈 제대로 줘!” 라고.)

그러니까, 이를테면, ‘기업이 폭리를 취하고 있는 현재 구조상, 농부들이랑 알바생들한테도 돈 더 주고, 동시에 소비자가격도 낮출 수 있다. 당장 시행하라’라고 왜 말 못하나? 후달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기업의 이윤(추구행위)에 대한 긍정은 다음과 같은 글쓴이의 문제제기에서 가장 뚜렷하게 드러난다.

. . . 대기업이 부당하게 너무 많은 이득을 가져간다는 사회적인 불신이 짙게 깔려 있다. 그런데 소비자들이 반값으로 커피를 마시면 그것이 해결책일까?

3. 이게 대체 무슨 심뽀일까? 말이 되게 이해를 해보면 이런 논리구조가 깔려있는 거다. (1) 기업의 이윤추구행위는 자본주의에서 정당한 거다. 그러니 큰 잘못만 없다면 그들의 행위를 인정하자. (2) 하지만 스타벅스 등은 뭔가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 커피농부들이랑 알바생들한테 ‘제값’을 지불하지 않는 것이다. (3) 따라서 이들에게 ‘제값’을 지불해야 한다. 모든 것이 ‘제값’만 지불받는다면 아무 문제 없는거다.

‘제값’이라! 대체 커피전문점 알바생의 제값은 얼마일까? (이봐요, 글쓴이. 당신의 ‘제값’은 얼마요? — 그렇다고 ‘shindan’한테 물어보진 마시고…) 자본의 ‘제값’은 이윤이고, 알바생의 ‘제값’은 임금이다. 그러니 위 저자는 자못 진지하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 셈이다: “자본가가 정당한 이윤을 챙기듯이, 알바생도 그렇게 취급받아야 한다.” 정당한 이윤과 정당한 임금! 마르크스라면, {깡디드}의 한 구절을 인용해 이렇게 비꼬았을 것이다: “가능한 최고의 세상에서는 모든 것이 최선의 상태에 있다!”

4. 글쓴이는 ‘비교우위'(comparative advantage)에 대해서도 말한다. 다음과 같이.

커피 위기가 지나간 지금도 주요 생산지인 남미와 아프리카의 많은 나라들은 저개발국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자유무역이 양국을 모두 부유하게 만든다는 ‘비교우위론’은 하루 3달러 미만으로 생활하는 세계 27억명 인구에게 말 그대로 ‘남의 나라’ 이야기다.

여기엔 비교우위론에 대한 짙은 오해가 깔려있다. 비교우위론은 무역은 거래당사국들을 ‘부유하게’ 만들어준다는 이론이 아니다. 즉 ‘부유하게’가 아니라 ‘전보다 더’ 또는 ‘거래하지 않을 때보다 더 부유하게’다. 따라서 위와 같은 글쓴이의 비판을 만약 자유무역 옹호론자들이 본다면, “그래서 커피무역을 하지 말자는 얘기냐”라고 받아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글쓴이가 비교우위론을 부정하는 것 같지는 않다. 그는 사실상 다음과 같이 넌지시 말하고 있을 따름이다: “커피농부들이 ‘제값’만 지불받는다면, 비교우위론에 입각한 ‘상호번영’이 가능하다. 따라서 우리는 그들에게 ‘제값’을 지불해야 한다. 또한 기업은 오직 자기들의 이윤추구에만 혈안이 되어있으므로—그것은 나쁠 것이 없다—우리 소비자들이 나서서 값을 더 쳐주자!”

5. 하지만 문제는 비교우위가 존재하느냐 여부가 아니다. 이 문제는 좀 복잡한데… 그냥 지금은 간단하게만 언급한다. 많은 이들에게 놀라운 얘길지 모르겠는데, 마르크스는 오히려 비교우위, 좀 더 일반적으로는 ‘무역의 이득'(gains from trade)을 인정하는 입장이다(사실 뭐, ‘입장’이랄 것까지도 없다). 다만 그는, 그것은 오직 사용가치적 측면에서의 이득일뿐이고 가치의 측면에서 보면 모든 교환은 그저 등가물끼리의 교환일 뿐이라고 말한다.

오히려 여기서 문제는, 자본주의적 국제무역, 좀 더 일반적으로는 자본의 범지구적 운동이 지구상의 특정 지역들을 ‘커피재배지’로 영구적으로 고착화시킨다는 데 있다. 그는 이미 젊은 시절에 {자유무역에 관한 연설}(1848년)에서, 서인도 지역을 전세계를 위한 커피와 설탕농장으로 만들어놓은 자본주의의 만행을 고발한 바 있다.

여러분들은 커피와 설탕이 서인도제도의 자연스런 운명이라고 알고 계실 것입니다. 두 세기 전만 해도, 당시까지만 해도 상업에 대해선 신경쓸 필요도 없었던 자연은, 사탕수수도 커피나무도 그곳에 심지 않았습니다.

이제 커피의 원산지가 아프리카/중동이라는 게 많이 알려져 있지만, 사람들은 그랬던 커피가 왜 지금은 브라질과 같은 중남미에서 집중재배되고 있는지는 여전히 묻지 않는다. 그러니까 커피(값)의 문제엔, 글로벌 자본주의의 역사와 구조 그 자체가 깃들어있다는 말이다. 여기에 대해 문제제기하지 않으면, 문제는 결코 제기된 게 아니다.

6. 간단히 요약하자. “커피값 논란의 원인은 자본주의라고, 구조라고, 착취라고, 왜 말 못해!” 이와 관련해 문득 다음 글이 생각나 걸어둔다.

“소비”의 문제가 아니다: “이미트 피자” 논란에 부쳐 (2010년 10월 1일)

(끝)

정치경제학? or 경제학? – 다시 한 번 ‘꼼수’에 대하여

경향신문이 사정이 진짜 어렵긴 어려운가보다. 이런 글까지 다 실어주니까 말이다.

[경제와 세상] ‘경제학’ 용어에 숨겨진 꼼수 (강신준, 2012년 2월 15일)

1. 이 글은 단순한 ‘무개념’뿐 아니라 경제학 교수가 범했다고는 상상하기 어려운 ‘사실관계상의 오류’로 점철되어 있다. 몇 가지 간단히 지적하겠다.

우선 사실관계를 얘기하자면 후자의 용어[economics]는 알프레드 마셜이란 사람이 1890년에 임의로 만들어낸 것이다.

여기서 ‘사실관계’라는 표현은 지나치게 대담한 것이다. 이유는 두 가지. 첫째, 기본적으로, 위와 같은 종류의 용어변천은 누구 한 사람의 작품이라고 할 수 없는, 어떤 집단적인 과정의 결과라고 보아야 하기 때문에 그렇다. 이에 따르면, 우리는 예컨대 ‘economics라는 표현을 저서의 제목에 처음 쓴 사람은 xxx이다’라고는 할 수 있을지언정, 강교수와 같이 ‘xxx가 만들었다’라고 하긴 매우 어렵다. 일반적으로 그렇단 얘기다.

하지만 두 번째 이유가 더 심각하다. 왜냐하면 어떤 기준으로 보든 위 진술은 참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마샬의 1890년 저작이란 말할 것도 없이 그의 {Principles of Economics}일 것이다. 분명 이 책에 ‘economics’라는 표현이 나오고, 또 이 책이 ‘political economy’가 ‘economics’로 대체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을 것임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지만, 불행히도 그것을 ‘만들어낸’ 것은 마샬도 아니고, 또 그의 저 1890년 저작에서 그 용어가 처음 쓰인 것도 아니다. 일단 ‘economics’라는 용어는 다름아닌 마샬 자신이 그의 부인과 함께 쓴 이전 저작 {The Economics of Industry}(1879)에도 쓰인 적이 있다. 그러나 이것이 ‘economics’가 출현한 첫 사례는 아니다. 그 전에 이미 1877년, 1878년에 각각 J. M. Sturtevant 및 H. D. Macleod의 저작의 제목으로 쓰인 바 있다. 특히 Macleod는 이에 앞서 1875년에 발표된 한 논문에서 ‘political economy’를 ‘economics’라고 바꿔부를 것을 제안하면서, economics를 “교환가능한 양들 간의 관계를 지배하는 법칙들을 다루는 과학”이라고 규정하기까지 했다.

(사실 이에 대해선 이미 나 자신이 몇 번 밝혔다. 나는 심지어 강교수가 그에 대해 무려 ‘반론’을 내놓기까지 한 글에서도 이에 대해 언급하면서, 내가 아는 한 현재 우리나라에 나와있는 관련논문 중 가장 훌륭한 이헌창 교수의 글을 소개하기까지 했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강교수께서 위와 같은 오류를 견지하고 계신다니..)

 

2. 다음으로, ‘정치경제학’과 ‘경제학’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보자. 둘은 같은 것도 아니고, 둘의 차이는 단순히 앞에 ‘정치’가 붙었는가 아닌가의 문제로 환원될 수도 없다. 강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경제학과 정치경제학을 구별하는 것은 ‘꼼수’를 진실과 혼동하게 만드는 결과가 되지 않을까? 두 경제학은 서로 독립적인 별개의 과학이 아니라 단지 ‘진실’과 ‘꼼수’의 차이일 뿐인데 이를 서로 달리 부르는 것은 곧 ‘꼼수’의 의도처럼 진실을 외면하게 만드는 일이 아닐까? [. . .] 두 경제학은 서로 다른 것인가?

기본적으로 나는 위 말이 무슨 뜻인지 도통 이해가 가지 않는다. 전혀 논리적으로 말이 안 된다. “‘진실’과 ‘꼼수’를 달리 부르는 것”이 왜 문제가 되는 걸까? 전혀 설득력이 없지만, 그래도 최대한의 아량을 발휘해 그의 의도를 읽어보면, 대충… [‘political economy’와 ‘economics’가 서로 다른 것도 아니고, 나아가 ‘경제학'(=economics)이라는 용어는 마샬을 위시한 경제학자들의 ‘꼼수’의 산물이므로, ‘진실’을 수호하는 우리가 굳이 물러서서 ‘정치경제학’이라는 불편한 용어를 쓸 까닭이 없다]라는 것 같다.

그런데 강교수가 말하는 것과 달리, ‘political economy’와 ‘economics’는 단순히 앞에 형용사 하나가 더 붙었느냐의 차이로 환원될 수 없다. 전자가 후자로 바뀌면서, 이름만 바뀌었으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바보일 것이다. ‘political economy’에서 ‘economics’로의 변화는, 단순히 이름에 대한 게 아니며, 이 과정에서 ‘economics’는 기존의 ‘political economy’에 대해 그 대상과 거기에 접근하는 방법론 자체를 차별화함으로써 자신을 부각시켰다. 물론 이 과정은 누구 한 사람에 의해 이뤄진 게 아니고, 꽤 오랜 기간에 걸쳐 그리고 개개인의 의지와는 어느 정도 별도로 이뤄졌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모든 얘기를 풀어낼 수는 없고, 관심 있으신 분들은 이 블로그에 있는 나의 글(‘IIPPE: 경제학을 넘어 사회과학의 재편으로‘, 특히 두 번째 글)을 참조하시기 바란다.

다행히도 강교수도 둘의 차이가 단순히 이름의 문제라고 보지는 않는 것 같다. 그러나 실망스럽게도 그는 이 대목에서 ‘꼼수’ 드립을 치고 있다. 세상에! 그러니까 강교수에 따르면, 마샬은 뻔뻔스러운 ‘꼼수쟁이’가 된 것인데… 세상에… 왜곡도 이런 왜곡이 없다. 두 가지를 간단히 언급만 하겠다. 첫째, 마샬은 (마르크스 식으로 말하면) 그 부르주아적 한계 안에 갇혀있긴 해도 그 나름대로 노동이나 산업의 다양한 문제들을 두루 시야에 넣으려고 노력했던 인물이다. 둘째, 마샬 부부가 그들의 1879년 저작에서 말하듯(p. 2), 그들이 ‘political’을 뺀 데는 그 용어의 의미가 과거와 크게 변화했다는 사정도 무시할 수 없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가 ‘정치경제학’이라고 했을 때, 이는 ‘정치적인 경제학’이라기보다는 ‘사회적인 경제학’ 또는 ‘사회경제학’이라고 해야 원래의 ‘political economy’와 의미상으로는 통하는 게 된다.)

 

3.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교수는 아마도 그 자신은 의식도 하지 못한 채 하나의 중요한 ‘진실’을 말하고 있다. 즉 그는 스미스와 마르크스를 비롯한 이들이 했던 연구, 즉 ‘political economy’를 ‘경제학’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실제로 한국을 포함한 동아시아에서 ‘경제학’은 원래 ‘political economy’의 역어였던 것이다.

이헌창 교수가 밝혀주는 바에 따르면, 19세기 중엽 서양의 ‘political economy’가 번역될 때 ‘경제학’이 선택되었고, 이에 대응해 이후의 ‘economics’에 대해서는 한때 ‘이재학’과 같은 역어가 부상하기도 했다. 그러나 우여곡절끝에, 서양에서 ‘political economy’가 ‘economics’에 압도되는 것에 발맞춰, 점차 ‘economics’도 ‘경제학’으로 일괄 번역되게 된 것이고, 결과적으로 ‘political economy’는 ‘정치경제학’이라는 다소 괴상한(?) 이름으로 번역되게 된 것이다. 주객전도라는 말이 제격인 상황이다.

 

4. 사정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몇몇 학자들이 굳이 ‘political economy’라는 용어를 살려쓰고, 또 (비록 좀 껄끄럽기는 해도) ‘정치경제학’이라는 단어를 고집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바로, 그러한 이름으로, 오늘날 그야말로 막나가고 있는 ‘경제학’을 견제하고 나아가 비판적 사회과학의 전통을 다시 세우기 위함이다.

어떤 의미에서 오늘날 경제학은 상당히 ‘political’해지고 있다. 원래 마샬 등이 ‘political economy’였던 것을 ‘economics’로 바꾸고자 했던 데는, ‘경제학’이라는 것을 매우 좁게 설정하고자 하는 의도가 깔려있었다. 이것이 바로 그들이 말하는 ‘순수경제학’인 것이다. 이로써 기존의 ‘political economy’는 순수이론과 각종 응용분야들로 나뉘게 되는데, 말하자면 과거에 ‘political economy’가 관심을 두고 있었던 다양한 사회적 이슈들(이를테면 J. S. Mill 같은 이가 열정적으로 다뤘던 분배의 문제)은 ‘순수이론’이 아닌 ‘응용’분야로 밀려나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경제학이 최소한으로 정의되자마자(‘제약 하에서의 선택에 관한 과학’이라는 식으로), 그것은 역설적이게도 일반화할 수 있는 계기를 얻게 되는 것이다(인간사에서 ‘제약 하에서의 선택’이 아닌 것이 무엇인가)! 이리하여 경제학은 그것이 마샬 등에 의해 제안된 ‘협소한 한계’를 넘어, 그리고 과거 ‘political economy’ 시절에 그것을 규정했던 한계도 훌~~쩍 넘어, 경제학이라는 틀로는 쉽게 다룰 수 없는 여타 사회과학들의 영역을 마구 짓밟고 있는 것이다. 이를 일컬어 ‘경제학 제국주의’라고 한다(관련글).

요컨대 오늘날, 영어로 치면 ‘political economy’, 우리말로는 ‘정치경제학’이라는 표제로 우리가 꾀하는 것은, 위와 같은 막나가는 경제학(economics)을 비판하기 위함이다. 그럼으로써, 경제학 내부로 치면 ‘economics’가 ‘political economy’였던 시절에 가졌던 사회적(the social)이고 물질적(the material)인 관심(바로 이 블로그의 이름이다!)을 복원하고, 나아가 그러한 ‘political economy’라는 관점을 다른 사회과학 분과들과 한편으론 공유함으로써 또 다른 한편으론 ‘정치경제학’을 그것이 미처 담아내지 못하는 현대사회에서 인간삶의 단면들에 관한 여타 사회과학 분과들의 성과들과 결합함으로써 ‘비판적 사회과학’의 전통을 새롭게 확립하는 것!! 바로 그것이 우리의 목표다.

 

5. 사태가 이러하기에, 사실 마르크스의 주저 {Das Kapital. Kritik der politischen Ökonomie}를 ‘자본’이라고 할 거냐 ‘자본론’이라고 할 거냐, ‘경제학비판’이라고 할 거냐 ‘정치경제학비판’이라고 할 거냐 등등은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이상에서 지적한 사항을 생각하면, 위 문제, 적어도 ‘정치경제학’이냐 ‘경제학’이냐라는 문제는 중요하기도 한데, 지금까지 대충 밝혀졌듯이, 강교수는 이것이 ‘왜!!’ 중요한지조차 제대로 감지하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오히려 그는 사태를 ‘꼼수’라는 지극히 애매모호한 ‘말’로 뭉뚱그리고 있다. 이 대목에서, 괴테를 차용한 마르크스의 저 구절, ‘개념이 빠진 곳에는 말이 들어선다’라는 구절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나꼼수에 대해서 내가 일전에 주장했듯이(‘나꼼수와 마르크스‘), 사태를 (가카의, 또는 경제학자들의) ‘꼼수’라는 식으로 파악하는 것만큼 단순하고도 그릇된 것도 없다.

마르크스는 그 이전 및 당대의 ‘정치경제학’을 ‘비판’할 목적으로 그의 주저를 썼다. 강교수는 바로 그 저작, 그것도 독일어 원저작의 한국 최초의 완역자다. 바로 그런 분께서 꼼수 운운하는 것이 딱하고, 그분이 번역한 것을 읽게될 선량한 독자들이 딱하다. 그가 보이는 것과 같은 인식으로 (마르크스가 겨냥했던) ‘경제학 비판’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성희롱 발언이나 일삼는 나꼼수 4인방이 비열한 착취를 철폐하고 새세상을 열 거라고 생각하는 거랑 뭐가 다른가 모르겠다. (끝)

 

[201112] 나꼼수와 마르크스

차로 오가며 가끔씩 나꼼수 듣는 게 낙이었다. 나는 그다지 열혈 청취자는 아니었지만(4-5편 들었나?), 정봉주 전의원이 잡혀가게 생겼다니 기분이 그다지 좋진 않다. 뭐 누구는 고소해 할 사람도 있겠지만;;; 어쨌든… 요새 나꼼수 까는 것도 이쪽(?) 바닥에선 유행인 모양인데… 나는 깐 건 절대 아니고ㅎㅎ… 그냥 그걸 소재삼아 (시간을 충분히 갖지 못해 난잡한) 짤막한 글을 하나 써봤다. 고려대학교 교지 “고대문화” 겨울호에 실렸다. (따라서 예상독자는 대학 1~2학년생?) “나꼼수”와 “마르크스”를 대놓고 함께 다룬 첫 번째 글이 아닐까 한다 ㅋㅋㅋㅋ

 

나꼼수와 마르크스: 우리의 ‘가치이론’은 당신의 ‘말빨’보다 강하다

0. 도입

우리는 혼란의 시대를 살고 있다. 연일 신문과 뉴스포탈사이트의 헤드라인을 현란하게 장식하는 경제위기에 관한 각종 지표들, 이러한 위기 속에서 지구촌 곳곳에서 터져나오는 다양한 불만들. 또한 이와 같은 세계적인 흐름과는 다소 동떨어져 보이는 ‘가카’의 온갖 ‘꼼수’들과 그 반대편에서 터져나오는 반값 등록금과 무상급식, 청년실업 해결에의 요구. 이 모든 것들이 어떤 식으로 귀결되느냐에 따라 오늘 한국의 청년들이 앞으로 살아갈 삶의 모습이 상당 정도로 결정될 것임엔 분명하지만, 대체 이런 사태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어떻게 ‘실천’할 것인가는 관두고라도—에 대해선 쉽게 답이 떠오르지 않을 것이다. 이 글은 바로 그런 이해에 약간의 도움을 주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다른 한편, ‘이해’에는 여러 차원이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이를테면 현대 자본주의를 이해함에 있어 19세기 유럽의 사상가 마르크스가 그랬던 것처럼 현실을 규정하는 가장 근원적인 물적 힘(material force)에 주목할 수도 있는가 하면, 요새 온/오프라인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는 인터넷 방송 ‘나는 꼼수다’를 통해 널리 퍼지고 있는 방식, 즉 ‘모든 것은 가카의 꼼수다’라는 식으로 오늘의 현실을 이해하는 것도 가능하다.

1. ‘나꼼수’ 식 현실 인식

‘나꼼수’를 만드는 4인방의 실제 생각도 그렇게 단순하진 않겠지만, 그들에 의해 유포되는 ‘모든 것은 가카의 꼼수다’라는 지극히 단순한 프레임이 오늘 한국사회에서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이를테면 얼마전 보궐선거에서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박원순이 서울시장으로 당선된 일이나 한미자유무역협정(FTA) 반대 집회가 지금과 같이 대규모로 그리고 격렬하게 벌어지고 있는 것에서, ‘나꼼수’와 같은 매체가 상당한 역할을 했음을 부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현실 인식의 한계는 매우 명확하다. ‘어떻게 한 나라의 대통령이 국민의 세금으로…’, ‘회사를 개인의 재산증식수단으로 사용하다니…’ 등이 ‘나꼼수’ 식 분노의 대표적인 형태인데, 이에 따르면 우리는 일단 대통령을 갈아치워야 한다. ‘나꼼수’의 대표격인 김어준이 입버릇처럼 하는 말마따나 ‘지도자의 품성’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오늘의 한국에서 그런 품격 있는 지도자로 거론되고, 또한 ‘나꼼수’를 통해 공공연히 홍보되는 인물은 잘 알다시피 조국, 문재인, 안철수 등이다. 그러나 ‘나꼼수’는 대통령이 저런 인물들로 바뀌면 세상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달라질 것인지는 알려주지 않는다. 그들은 그저 저런 인물들은 ‘비전’과 ‘도덕성’을 가진 인물임을 강조할 뿐이고, 우리는 그저 만약 저들이 대통령이 된다면 ‘BBK 같은 어처구니없는 일은 벌어지지 않겠지’라는 막연한 기대를 가질 뿐이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겪는 어려움이 대체로 BBK 때문은 아니지 않은가? 즉 BBK 사건이 벌어지지 않았다면 세상이 어떻게 좋아졌을지에 대해선 도통 오리무중이다. 적어도 이런 면에서는, 대통령으로 취임하면서 범지구적 자본주의의 일반적 위기 그리고 그 안에서 한국이 겪는 특수한 어려움을 암시하며 국민의 동참을 호소한 김대중이 차라리 솔직했을 뿐 아니라 정확했다고 봐야 한다.

물론 대중이 무엇에 분노하고 있는지를 직시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거기에 집중함으로써 우리는 어쩌면 다음번 대선에서 ‘정권교체’(그러나 ‘어떤’ 정권으로?)를 이뤄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폭발적으로 표출되고 있는 민중의 분노를 해석하는 문제, 이런 사태가 앞으로 어떤 국면들을 맞을 것인지를 예측하는 문제, 현재의 투쟁들을 앞으로 어떤 식으로 이끌어갈 것인가를 결정하는 문제 — 요컨대 앞으로 대한민국 경제와 사회를 어떻게 더 민주적인 방식으로 이끌고 통제할 것이냐의 문제는 ‘나꼼수’가 제안하는 방식보다는 훨씬 복잡한 사고와 세심한 실천을 요한다. 부언하자면, 현재의 사태를 대중의 ‘분노’라는 감수성 또는 막연한 ‘정의 관념’의 문제로, 또는 ‘부도덕한 지도자’의 문제로 묶어두는 것은 사실 저 기득권 층의 이해관계와도 부합하는 것이기도 하다. 예컨대 최근의 ‘점령하라!’ 운동이 국내의 보수언론에 의해 보도되는 방식을 보라. 그것은 ‘부도덕하고 뻔뻔스런 몇몇 금융회사 CEO들에 대한 대중의 분노’라는 식으로 종종 채색되고 있지 않은가. 또한 ‘부도덕한 지도자’로 치면 ‘가카’도 울고 갈 이탈리아의 베를루스코니가 존경받는 학자 출신인 마리오 몬티(Mario Monti)로 바뀌긴 했지만, 몬티 또한 현재 글로벌 위기의 가장 큰 주범 중 하나로 꼽히고 있는 골드만 삭스 출신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는 단순히 인물을 잘못 뽑은 것이 아니라, 현재 위기의 성격을, 즉 특정인의 능력이나 도덕성의 문제로 환원될 수 없는 그 심원함을 말해주는 것은 아닐까?

Pg-12-eurozone-graphic

“골드만 삭스의 유럽 점령도”?
(위 그림이 곁들여 나온 The Independent 기사도 읽어볼 만하다.)

요컨대, 우리에게 정작 중요한 것은, 분노의 근원이 무엇인지, 다시 말해, 분노를 일으킨 직접적 대상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끊임없이 분노를 갖게 만드는 현실의 핵심적인 물적 메커니즘이 무엇인지를 캐내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것이 바로 우리가 ‘나꼼수’와 같은 문제제기의 역할을 부정할 필요는 없지만 그보다 한걸음 더 내딛여야 하는 까닭이다.

2. 마르크스

오늘날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사태들을 심층적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현재의 위기가 총체적이고 범지구적 성격을 가짐을 이해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한국사회를 덮치고 있는 작금의 혼란은 범지구적 맥락 안에서 보지 않으면 해결을 구하는 것은 물론 제대로 이해하는 것도 불가능하며, 이 범지구적 혼란은 단순히 경제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 전반에 관한 것이다.

우리는 지난 1970년대부터만 따지더라도 여러 번의 공황과 위기를 겪어왔지만, 이제까지 그것은 때로는 중동 산유국들의 자원민족주의의 탓으로, 때로는 중남미 포퓰리즘적 정부들의 방만한 재정운영이나 동(남)아시아 나라들의 유교적 잔재의 탓으로 얼버무려지곤 했다. 그러나 세계자본주의의 핵심부에서, 그것도 현대 경제의 꽃이라 할 수 있는 금융분야에서 불거진 2008년 이후 일련의 사태는 마르크스 따위엔 관심도 없던 대중들에게조차 체제 자체의 문제로 다가가고 있는 것이다. 이제는 미국의 국경을 넘어 퍼져나가고 있는 일련의 ‘점령하라(occupy)!’ 운동, 영국이나 칠레 등지에서의 거국적 등록금 투쟁, 그리스의 총파업, 중동과 북아프리카의 ‘아랍의 봄’ 등이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것을 보라. 현재 대중의 불만은 단순히 몇몇 금융기관들의 방만한 경영과 비도덕성이 아니라 경제의 작동과 운영 전반을 겨냥해 제기되고 있고, 나아가 그냥 경제가 아니라 사회 전체의 재생산과 관련하여 분출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오늘날 사회가, 그리고 그 물적 기반으로서의 경제가 어떤 메커니즘을 통해 재생산되는지를 들여다보아야 한다. 비록 지금은 상업광고의 문구 정도로 추락했지만 이와 같은 문제의식을 가질 때 우리는 오늘날 세계를 ‘자본주의’라는 용어로써 묘사하곤 한다. 기본적으로 자본주의란 한 사회의 물질적 재생산이 이뤄지는 방식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즉 우리가 현대사회를 자본주의로 파악한다는 것은, 과거와는 달리 인격적으로는 평등하지만 생산수단의 소유 여부로 구별되는 자본가와 노동자가 생산이라는 영역에서 맺는 관계를 중심으로, 이 관계가 경제적 재생산의 다른 영역들(교환, 분배, 소비)에서, 나아가 사회적 재생산 전체에서 재현되는 역사특수적인 방식에 주목한다는 뜻이다.

사실 위와 같은 문제를 다루는 것은 아담 스미스를 중심으로 한 고전정치경제학(classical political economy)의 주된 과업이었지만, 그것이 가장 체계적이고 비판적인 방식으로 다뤄진 것은 마르크스의 미완성 주저 {자본론}에서다. 이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물질적 부가 자본주의 경제에서는 ‘가치’라는 형태로 나타나며, 자본주의적 생산과정을 통해 생산되는 모든 상품의 가치는 거기 들어있는 노동시간에 다름 아니다. 그런데 자본주의 경제에서 생산은 특수하게도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고용계약에 기반해 이뤄지기 때문에, 가치의 실제적인 생산자인 노동자는 자신이 생산한 가치의 일부를 자본가에게 무상으로 내어줄 수밖에 없고, 자본가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 그가 노동자로부터 받아낸 잉여가치의 일부를 생산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어도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기여한 사회의 각 계급들(잉여화폐소유자, 토지소유자 등)에게 분배해 준다. 이러한 과정에서 마르크스는 자본의 축적, 자본주의 하에서 인구 증가의 의미, 선진 국민경제의 해외로의 팽창, 경제의 전체적인 순환, 생산부문들 간의 경쟁, 생산에서 금융과 상업의 역할, 자본주의 경제에서 구시대의 잔재이기도 한 지대의 특수한 존재형태 등을 전체 경제의 운동과 관련해 다룬다.

사실 여기까지만 놓고 본다면 마르크스가 {자본론}에서 내놓은 이론은 기존의 고전정치경제학의 완성이자 세련화라고 불러도 좋았을 것이다. 실은 그것만 가지고도 커다란 업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진정한 기여는, 위에서 간단히 묘사한 자본주의 경제의 운동 메커니즘이 모순적으로 작동한다는 것을 적시했다는 데 있다. 즉 자본주의는 서로 반대되는 이해관계를 갖는 계급들—자본가와 노동자—의 관계에, 그리고 그런 대립의 일시적이고 잠정적인 ‘화해’에 기초해 있으므로 끊임없는 모순 속에서 발전하는 체계이며, 이 모순은 공황과 위기를 통해 일시적으로 해소되기도 하지만 곧 전보다 크고 복잡한 방식으로 되돌아오는 성격을 갖는다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위와 같은 마르크스의 이론이 과거엔 옳았을지 몰라도 더 이상 오늘날의 사회에는 들어맞지 않는다고 말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는 마르크스의 특유의 방법론을 오해한 것이다. 그의 이론은 현대사회의 물적 재생산의 가장 심층적이고 추상적인 차원에서 출발해 점점 구체적인 규정들을 덧붙임으로써 현실감을 더하는 구조를 취한다. 즉 그가 {자본론} 제1권에서 내놓은 상품의 가치결정이나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착취관계 등에 관한 논의는 바로 그런 심층적이고 추상적인 차원의 문제이므로, 이를 구체적인 현실에 곧장 적용시키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예컨대 여기에서 마르크스는 임금을 노동력의 재생산 비용이라고 정의하면서 이는 역사적/사회적 요소들에 의해 결정된다고 말했지만, 우리가 현실의 임금을 실제로 다루기 위해선 그것을 규정하는 역사적/사회적 요소들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를 밝히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이렇게 보면, 마르크스의 이론은 한편으론 자본주의 경제를 구성하는 좀 더 구체적인 범주들을 도입하는 데, 그리고 다른 한편으론 시간의 흐름에 따라 발생하는 각종 역사적인 특수형태들을 도입하는 데 열려있다고 평가하는 게, 그리고 그런 열린 공간을 채워넣는 것은 우리의 몫이라고 인정하는 게 마땅하다.

사실은 바로 이 대목에서, 우리는 마르크스의 이론이 (틀렸다거나 낡았다기보다는) 미완성임을 인정해야만 한다. 그는 위와 같은 방법론에 입각해 세 권짜리 저작 {자본론}에서 자신의 이론을 어느 정도 밀어붙이는 데는 성공했지만, 그런 작업을 오늘날 경제를 온전히 담아낼 수 있을 정도로까지 충분히 수행하진 못했다. 예를 들어 그의 작업은 오늘날 경제의 핵심적인 동인으로 떠오른 금융이라는 문제, 20세기 중반 이후에 본격적으로 발달한 국가의 경제적 기능, 제국주의, 국제적 착취, 세계화 등의 용어들로 논의되곤 했던 자본주의 경제의 범지구적 측면 등을 충분히 다루는 데 부족함이 있으며, 특히 1980년대 이후 두드러지게 진전되고 있는 이른바 ‘지식기반사회’ 또는 ‘인지자본주의’를 다루는 데도 일정한 한계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이런 한계는 마르크스의 가치이론(value theory) 안에서 충분히 극복될 수 있는 한계이지, 최근 국내에서 일정한 주목을 끌기도 했던 {인지자본주의}의 저자가 주장하듯이 기존 이론의 폐기를 요구하는 한계가 아니다.

3. 가능한 대안들?

이 자리에서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경제에 대한 이론(가치이론)의 현대적 발전방향 또는 동향에 대해 자세히 논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우리가 그가 제안하는 것과 같은 정치경제학적 방식으로 현대의 경제와 사회를 비판적으로 바라보지 않는다면, 현재와 같은 위기국면에서 ‘대안’으로 고려되고 있는 것들이 갖는 의도되거나 의도되지 않은 기만성을 제대로 평가하지 못할 것임을 강조하고자 한다.

금융의 문제를 예로 들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2008년 이후 세계경제에 불어닥친 위기가 금융적인 속성을 갖는다. 그리하여 수많은 비난들이 보통사람들은 쉽게 이해할 수조차 없는 복잡한 금융적 수단들의 무분별한 증식에 돌려지곤 한다. 이에 따라 많은 이들이 국제적 자본이동을 규제하는 토빈(Tobin)세 도입 등을 통해 금융을 규제하자는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그러나 과연 투기적 금융자본은 ‘일부 투기세력’만의 문제일까? 오히려 그것은 특히 ‘신자유주의’라고 불리는 지난 30년 사이에 경제와 우리의 사회적 삶의 구석구석에 스며들지 않았는가? 그리하여 예컨대 2000년대 초중반 한국사회를 괴롭혔던 ‘신용카드 대란’은 그저 ‘대란’일 뿐인 게 아니라 신용카드로 대표되는 ‘신용’이라는 도구가 이제는 개개인들의 삶에 깊숙하게 뿌리내렸음을 알려주는 신호가 아니었을까? 그리하여 우리는 ‘신용’이나 ‘금융’에 대해 (한편으로는 인위적인 규제책의 필요성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전보다는 더 정교한 시각을 가져야만 하는 게 아닐까?

위의 문제와 연관된 것으로서, 자본주의의 탐욕성을 비판하면서 대안적 가치들, 예컨대 생태적 가치를 중심으로 사회를 재편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여기서 재밌는 것은 그간 ‘가치(관)‘으로서 다뤄졌던 생태라는 문제가 최근들어서는 그간 이를 무시해왔던 자본에 의해 점차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지면서 하나의 ‘산업’으로서 고려되고 있다는 것이다. ‘가치관’으로서의 생태는 예컨대 자동차 만드는 회사에 방해가 될 뿐이지만, 산업적인 관점에서 고려되었을 때 그것은 ‘전기차’라는 새로운 ‘시장’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상황반전은 거의 모든 산업분야에서 목격되고 있는 동시에 새로운 산업분야들을 창출하고 있다. 건축물에 대한 생태친화적인 새로운 환경기준이 확립된다고 해 보자. 이런 일이 국지적으로만 일어난다면 그것은 이런 새로운 기준을 받아들인 기업의 이윤추구행위에 걸림돌이 되겠지만, 만약 그것이 전지구적으로 확립된다면 그것은 자본 전체에겐 마치 전쟁으로 폐허가 된 지구를 새로 건설하는 것과 같은 효과를 가져다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경제의 조직형태, 재생산 메커니즘을 관할하는 물적 힘이라는 것은 결코 ‘가치(관)’의 문제가 아님을 절감하지 않을 수 없다.

다음으로 오늘날 한국사회의 향후 발전모델로서 거의 모든 정치세력들에 의해 (조금씩 다른 형태로) 옹호되고 있는 복지국가를 보자. 많은 경우에, 즉 무상급식, 반값등록금, 저출산 등의 문제에서 ‘복지’는 소득이 충분치 못한 계층에 대한 시혜라는 차원에서 주로 접근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서구의 ‘선진국’들의 경험에서 보듯이 복지국가의 핵심은 못사는 사람들에게 뭔가를 베푸는 게 아니다. 그것은 단도직접적으로 말하면, 개별 개인이나 가계에 무질서하게 맡겨져 있던 노동력의 재생산이라는 매우 중요한 사회적 문제를 국가가 나서서 공적인 방식으로 해결하겠다는 거대한 사회적 프로젝트다. 몇몇 서유럽 나라들에서와 같이 이것이 만약 성공적으로 안착한다면, 그 나라의 이른바 ‘국민적 생산성’은 (아이들에게 집에서 각자 밥차려주는 것보다 한 곳에 모아 한꺼번에 먹이는 게 훨씬 효율적이므로) 비약적으로 발전할 수 있으며(참고로 현재 우리나라의 노동생산성은 OECD 평균의 절반 수준이다), 종전엔 주부의 가사노동 등에 의해 비경제적인 방식으로 수행되던 활동들이 경제적 영역 안으로 편입되면서 자본에게는 엄청난 시장을 안겨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이 복지국가 도입을 꺼리는 것은 과거엔 개개인들이 사적으로 부담하던 비용들을 복지국가 하에선 자신이 거두는 잉여가치로부터 직/간접적으로 지출(조세)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여튼 이와 같은 복지국가의 정치경제학적 의미—이는 단순히 돈이 얼마나 들 것이냐 하는 예산책정의 차원을 훨씬 넘어선다—를 충분히 발전시키지 않은 채, 그에 대한 환상이나 편견에 기대 복지국가를 미래의 대안으로 내세우는 것은 매우 위험한 발상인 것이다.

4. 맺음말

어쨌든 분명한 것은 이번 공황과 위기가 어떤 식으로든 자본주의 체제 자체의 커다란 재편을 낳지 않고서는 해소될 수 없을 것이라는 점이다. 물론 재편 이후의 모습은 민중들의 저항이 어느 정도일 것이냐에 크게 의존할 것이다. 실제로 현재 세계 곳곳에서 터져나오고 있는 민중들의 다양한 외침들은 한편으론 앞서 말한 현재 위기의 총체성과 범지구성의 표현이기만 한 게 아니라 다른 한편으론 현재 위기의 총체성과 범지구성을 강화하고 심화시키는 구실을 하고 있다. 따라서 좀 더 나은 세상을 원하는 사람들은, 지금 뒷짐지고 있을 것이 아니라 당장 어떤 식으로든 현재의 투쟁에 참여해야 한다. 이 투쟁은, ‘금융의 횡포’나 (‘나꼼수’가 재기발랄하게 제기하는 것과 같은) ‘가카의 꼼수’에 대한 투쟁이어도 좋고, ‘복지국가’나 ‘생태적으로 좀 더 나은 세상’을 위한 투쟁이어도 좋다.

그러나 좀 더 장기적인 관점에서 보면, 현재 위기가 어떤 식으로든 정리되었을 때—그러니까 ‘혁명’이 나지 않는다면 말이다—우리는, 지금보다는 좀 더 질서는 잡혔을지언정 결코 금융의 힘이 전만 못하진 않은 세상, 자본이 생태적 가치를 마지못해 받아들이기야 하겠지만 유기농음식, 환경친화적 건물, 전기자동차 등의 형태로 생태를 자신의 가치영역 안에 길들여놓을 세상, 복지국가는 되었으되 민중의 고통은 여전한 세상에 살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바로 이런 세상에 대응하는 이론적 무기로서 마르크스는 ‘가카’만 물러나면 자진해산하겠다는 ‘나꼼수’보다 훨씬 더 강력하며, 그것이 바로 우리가 오늘 마르크스에 주목해야 하는 까닭이다.

[IIPPE 국제 컨퍼런스] 2011년 5월 터키에 함께 갑시다!!

[!!이 포스트는 가급적 널리 좀 퍼뜨려 주시기 바랍니다!!]

에… 터키에 가서 놀자는 얘긴 아니고요, 제가 그동안 ‘홍보’하는 데 열을 올리기도 했던 ‘정치경제학 진흥을 위한 국제 발의'(IIPPE)가 내년 5월, 터키 이스탄불에서 두 번째 국제 컨퍼런스를 여는데, 거기에 함께 참여하자는 겁니다. 물론 가면 놀수도 있습니다! ㅎㅎ

모집 대상은 딱히 정해놓진 않았고요, 현실적으로 말하자면 국내 또는 해외에서 대학원 과정(석사/박사)에 재학중이거나 졸업하신 분들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물론 반드시 대학이나 대학원에 다닐 필요도 없고 학교에 적을 두고 있어야 할 필요도 없습니다. 다만 돈문제 등 때문에 학교에 적이 있으시다면 조금은 더 유리하시겠죠. (학생, 졸업생, 강사, 교수 모두 좋습니다!!)

– 이번 학술대회에 대한 자세한 사항은 다음 링크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링크]

– 그리고 IIPPE에 대한 좀 더 자세한 소개는, 요 위에 메뉴 중 ‘IIPPE’를 누르시면 찾으실 수 있습니다. 또는 다음 링크를 누르십시오. [링크]

– IIPPE에 대한 우리말 소개는 다음 링크를 참조하셔도 됩니다. [링크]

이번 학술대회의 주제는 ‘신자유주의, 그리고 경제학의 위기‘입니다. ‘경제학’이라는 말이 들어갔다고 해서 경제학 전공자만 참여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사회과학 전 분야, 그리고 굳이 ‘사회과학’이라고 불리진 않아도 사회과학적 요소가 있는 분야의 모든 분들에게 이번 컨퍼런스는 열려 있습니다. ‘경제학’보다 중요한 건 ‘위기’입니다. 즉 작금의 ‘경제학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선 경제학 자체의 개혁뿐 아니라 사회과학 전반으로부터 다양한 자극들이 필요합니다. 물론 이런 자극들은 단순히 경제학 자체만을 개혁하기 위해 필요한 게 아니라, 자폐적인 사회과학 전체를 갈아엎고 진정으로 ‘사회적인 것’이 무엇인지를 되묻는 데 반드시 필요한 요소입니다. [링크]

제가 많은 국제학술대회 자리를 다녀본 것은 아니지만, IIPPE는 그 어떤 곳보다도 한국의 연구자들에게 호의적이고 관용적인 곳이라 자부합니다. 우리 같은 주변부 꼬꼬마 연구자들이 가서 뭔가를 풀어놓기에 아~~주 ‘만만한’ 곳이라 할 수 있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IIPPE나 거기 오는 사람들이 별볼 일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IIPPE의 홈페이지에서 확인하실 수 있듯이, 올해 9월에 그리스 크레타에서 열렸던 첫 번째 국제 컨퍼런스는 사회과학 각 분야의 현주소를 확인할 수 있는 매우 수준높은 자리였습니다.

– 제1회 컨퍼런스에 대해서는 다음 링크를 참조해 주세요. [링크]

IIPPE는 한국의 신진 사회과학 연구자들에게 자신의 연구를 전 세계적으로 자리매김하고 연구의 시야를 넓히며, 각 분야의 유명 학자들은 물론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가는 신진 학자들과 다양하게 교류할 수 있는 아주 이상적인 자리입니다. 현재 IIPPE는 세계적으로 가장 유력한 학술전문 출판사 중 하나인 Pluto Press와 함께 그 자체적인 Book Series도 내고 있을 뿐 아니라, 자체 저널도 곧 출간될 예정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굳이 하는 것은, 단순히 IIPPE가 여러분들의 커리어를 쌓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정도로 믿을만한 기반을 가지고 있음을 알리고 싶어서입니다.

IIPPE는 열린 모임입니다. 이번 컨퍼런스에 참석하시는 분들은, 단순히 한 번의 참여로 끝나는 게 아니라 각종 working group에 참여하는 등의 방법으로 향후 IIPPE라는 틀 안에서 계속적으로 관계를 맺어나갈 수 있습니다.

*                             *                             *

자… 이상으로부터 IIPPE 및 다음 컨퍼런스에 대해 어느 정도는 설명이 되었으리라 믿습니다. 혹시 참여를 원하시나요? 참여를 원하시는 분은 제게 메일을 주십시오. 메일 주소는 [ghgimm골뱅이gmail점com]입니다. 참여와 관련된 어떤 문의도 환영입니다!!

참여는 개인이 하셔도 좋고, 몇몇이 팀을 이뤄서 해도 좋습니다. 물론 개인 참여자들을 묶어서 하나의 팀을 짤 수도 있겠습니다. 무슨 말씀이냐면, 제가 현재 IIPPE의 organisation에 일정 정도 관여하고 있는데요, 일정한 시간적 여유만 주어진다면 우리 참석자들 중 몇몇을 묶어서 하나 또는 다수의 독립된 세션을 구성할 수도 있다는 말씀입니다.

앞서 링크된 ‘Call for Papers’에 따르면 희망자들은 2011년 2월 15일까지 발표문 초록을 내기로 되어있습니다. 따라서 참석 희망자들이 그 전에 모집이 되어야 몇 가지 조율들을 할 수 있겠죠. 따라서 이 ‘모집’은 일단은 2011년 1월 15일까지 유효한 것으로 하겠습니다.

다른 건 몰라도… 이스탄불, 아주 환상적인 곳입니다. 많은 분들의 관심과 참여 바랍니다! ㅎㅎ

(사족: 노파심에 말씀 드리자면… 이번 건은 저 개인의 성향과는 무관한 것입니다. 혹시 제 블로그를 통해 보신 평소의 제가 맘에 안 드셨던 분이라도, 관심 있으시면 얼마든 환영입니다;;)

[이 문서의 트랙백 주소: http://socialandmaterial.net/wp-trackback.php?p=640]

[201010] ‘경제학 제국주의의 첨병, 사회자본론’

한 대학 매체에 글을 하나 썼다. 원래 청탁받은 제목은 ‘경제학 제국주의의 첨병, 사회자본론’이었는데, 인터넷으로 확인해보니 ‘사회적이지도 경제적이지도 않은 사회자본론’이라는 제목이 더 큰 활자체로 덧붙어 있다. 나쁘지 않다.

원래 저쪽에 보낸 파일엔 각 내용단락 앞에 로마자 대문자로 수자를 붙여두었는데, 인터넷에 올라온 글을 보니 그게 빠져 있다. 어떻게 인쇄되어 나갔는지는 모르겠다. 하여간 인터넷에 있는 것은 조금 산만한 느낌이다. 물론 그건 애초에 내 잘못이기도 하다.

이 글은 <중대신문>에서 기획한, ‘사회적인 것’이 현재 사회과학에서 다뤄지고 있는 현황과 그에 대한 비판에 대한 시리즈물 중 하나다. 여튼 사회학자도 아닌 내게 좋은 기회를 허락해 줘서 고맙다.

(참고로, 글 맨마지막에, 내가 이 블로그를 통해 수차례 소개하기도 했던 IIPPE에 대해 쓰고 싶었지만, 그냥 슬며시 암시를 주는 것에 그쳤다. 소심했나…)

*                         *                         *

I. 최근 영국에서는 보수당 출신의 데이빗 카메론 총리의 주도로 ‘big society’라는 것이―우리로 치면 ‘공정사회’와 같이―커다란 화두로 등장하고 있다. 이는 카메론의 같은 당 대선배 마가렛 대처 전총리의 저 유명한 선언, 즉 “사회 따위는 없다”라는 선언과 재밌는 대비를 이룬다. 후자가 줄잡아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사회’의 ‘과잉’에 대한 반작용이었다고 한다면, 카메론의 최근 기획은 대처의 선언 이후 땅에 떨어졌던 ‘사회’의 권위를 적정 수준에서 바로 세워줄 것으로 기대할 수 있을까?

그런데 우리는 위와 유사한 사태 전개를 지성의 영역에서도 볼 수 있다. 대처의 선언과 궤를 같이 해서 사회의 불가능성을 핵심 테제 중 하나로 삼는 포트스모던적 경향이 지성계를 휩쓸고 지나간 뒤, 오늘날 우리는 다시금 ‘사회’의 과잉을 보고 있는 것이다. 바로 ‘사회자본’이라는 개념을 통해서.

그러나 실제 내용을 들여다보면 카메론의 ‘big society’라는 것이 결국은 개인들의 자조(自助)와 이웃 간의 친목 강화 등을 강조하는, 낡은 대처리즘에 새 옷을 입힌 것에 지나지 않다는 게 드러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회자본’이라는 개념도 그간 특히 여러 사회과학의 분과들이 경제학화(化)하는 과정에서 실추되었던 ‘사회적인 것’의 의의와 권위를 회복시키기보다는 바로 그 경제학화의 새로운 방식으로 채용되고 있을 따름이다. 요컨대, 경제학이 그 특유의 방법론을 가지고 여타 사회과학 분과들의 영역을 침범하고 나아가 이를 자신의 발아래 복속시켜 나가는 현상을 ‘경제학 제국주의'(economics imperialism)라고 부른다면, 특히 최근 20-30년 사이에 그 제국주의의 전위대 노릇을 하고 있는 게 사회자본 개념이라는 얘기다.

II. 최근 사회과학은 그 분야를 막론하고 다양하게 정의되는 사회자본‘들’의 각축장으로 변모하고 있다. 다양한 정의들에서 공통으로 강조되는 것은 바로 ‘인간관계’ 자체다. 즉 “중요한 것은 당신이 무엇을 아느냐가 아니라 누구를 아느냐다.” 더 많은 양질의 인간관계를 맺을수록 당신의 삶은 개선될 것이며, 따라서 이를테면 미국의 백인이 고도비만에 시달리는 것도 수많은 아프리카 흑인이 굶주림에 죽어가는 것도 모두 사회자본이 부족한 때문이다!

바로 이렇게 사회자본 개념의 문제는 그것이 마치 모든 사회적 이슈들의 해결책인 듯이 제시되고 있으면서도 내용상으로는 충분히 ‘사회적’이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자본’도 아니라는 데 있다. 즉 이 개념은 여타 사회과학들의 경제학화를 표상하지만 충분히 ‘경제(학)적’이지도 않고, 다양한 사회과학 분야들에 걸쳐있지만 충분히 ‘사회(학)적’이지도 않다. 뿐만 아니라, 사회자본 개념은 특히 연구자들에게 묘한 안락함을 주곤 한다. 이것이 바로, 사회자본 개념이 지금처럼 많이 쓰이기 전부터 꾸준히 그것을 비판해온 벤 파인(Ben Fine)이 자신의 최근 저작, <사회자본의 이론들>(Theories of Social Capital: Researchers Behaving Badly, 2010)의 부제목을 ‘불량하게 행동하는 연구자들’이라고 지은 까닭이다. 이제 그들은 역사, 계급, 전통, 관습, 사회구조, 그리고 경제적 토대(!)를 참조하지 않고도, 단지 ‘사회자본과 xx’라는 식으로 얼마든지 손쉽게 새로운 연구분야를 개척해나갈 수 있게 되었다. [벤 파인의 이 책은 내년 중에 나의 번역으로 국내에 나올 예정이다. 기대하시라! ;;;]

결국 만약 우리가 ‘사회적인 것’으로써 단순한 ‘인간관계’보다는 역사, 계급, 구조, 경제적 토대 등을 의미한다면, 사회자본 개념이 사회과학들에서 두루 융성하고 있다는 것은 사회과학이 타락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한 징후로 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III. 사회자본은 비록 전통적으로 경제(학)적 의미의 자본이 쓰이기에 적합하지 않은 사항들을 묘사하기 위해 도입되었지만, 여전히 그것은 소비되고 축적될 수 있다는 점에서 ‘자본’이다. 따라서 그것은 태생적으로 사회과학들의 경제학화에 봉사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 가능성이 현실성으로 실현된 것은, 현대적 사회자본 논의의 원조로 꼽히는 부르디외(Pierre Bourdieu)보다는 코울만(James Coleman)이나 퍼트남(Robert Putnam) 등을 거치면서였다. 특히 코울만은 원래 경제학에서 발달된 ‘합리적 선택’ 이론을 사회학에 적용시키는 데 열정적이었던 사회학자, 말하자면 경제학 제국주의의 영역에서 ‘일제의 조선인 앞잡이’에 해당하는 인물인 것이다.

원래 경제학 제국주의란 사회과학의 분과체계가 형성되는 과정(1930년대 초)에서부터 이미 제기되었던 문제였다. 현실의 제국주의와 마찬가지로 여기에도 그 열렬한 옹호자가 있었는가하면 단호한 반대자도 있었다. 그 옹호논리라는 것도, 경제학 제국주의가 ‘계몽적이고 민주적으로’ 이뤄지기만 한다면 이는 억제되기보다는 장려되어야 한다는, 현실의 제국주의의 그것과 꼭 닮아있었다. 그 반대편에는 이를테면 파슨스(Talcott Parsons) 같은 인물이 있는데, 1930년대 경제학에 대해 사회학의 고유의 영역을 확립하려던 그의 노력을 최근 저프 호지슨(Jeoff Hodgson)은 <어쩌다 경제학은 역사를 잊어버렸는가>(How Economics Forgot History: The Problem of Historical Specificity in Social Science, 2001)에서 ‘경제학 제국주의에 맞선 해방투쟁’이라고 묘사하기도 했다.

그러나 경제학 제국주의가 진정으로 융성하기 시작한 것은 1950년대 이후 개리 베커(Gary Becker)를 통해서였다. 기본적으로 그는 사회의 모든 문제들을 개인의 합리적 선택에 관한 것으로, 즉 합리적 개인의 효용극대화라는 문제로 변환시켜 경제학에서 적용된 수리적 방법에 따라 그것에 접근한다는 전략을 취했다. 최근 공전의 히트를 친 <괴짜경제학> 저자들의 “그 어떤 주제도 경제학의 범위 너머에 위치할 필요가 없다”라는 선언도 이런 태도와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괴짜경제학>의 무분별한 유행은 경계심을 가지고 봐야 할 필요가 있다. 특히 이 책이 심지어 진보적인 성향의 사람들 사이에서도 꽤 인기를 모으고 있다는 점은 크게 걱정스럽다. 언젠가 본격적인 비판을 내놓아야 하는데…]

이와 같은 베커의 경제학 제국주의는 우리가 흔히 ‘신자유주의’라고 부르는 것과 더없이 잘 어울린다. 우리도 지난 1997-98년에 겪었듯이, 신자유주의란 세계 모든 나라에 시장만능주의적인 단일 모델에 입각한 경제 및 사회 전반에 걸친 재구조화 프로젝트였음을 떠올려보라.

IV. 그렇다면 경제학 제국주의 또는 신자유주의가 어떻게 사회자본과 연결되는가? 이는 1990년대 중반 이후 이른바 ‘시장의 실패’ 사례가 빈번해짐에 따라 경제학 제국주의가 자체변모를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처한 것과 관계가 깊다. 요컨대, 경제학 제국주의가 지금까지는 경제학의 방법으로 여타 사회과학들을 무지막지하게 식민화해왔다면, 이제 그것은 자신의 한계(‘시장 실패’)를 인정하고 그런 한계가 드러나는 곳, 말하자면 시장이나 가격이 아니라 역사, 전통, 관습, 계급, 경제적 토대 등의 고찰이 필연적으로 요구되는 지점들을 ‘사회자본’이라는 ‘전가의 보도’로 채워버렸다는 것이다.

V. 기실 경제학은 그 자신의 편협한 방법론과 시야로 사회과학 전체에 걸친 하나의 제국을 형성한다는 야심을 가지고 있다. 사회자본 개념은 최근 그런 야심이 드러나는 가장 중요한 통로 중 하나다.

만약 경제학 제국주의와 사회자본이 사회과학 전체를 타락시키고 있다면 이에 대한 저항도 필연적으로 생겨나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 저항이란, 현실의 제국주의에 대한 투쟁이 그렇듯 단순히 민족주의에 그쳐서는 성공할 수 없을 것이다. 즉 그것은 단 하나의 분과학문에만 머물러서는 안 되며, 만약 이 저항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이 ‘사회적인 것’의 복원이라면 더욱 그렇다. 다양한 사회과학 분과들을 아우를 수 있는 지적 기획이 필요한 시점이다. (끝)

Economist on 중국 노동자/노동시장

<이코노미스트>에 재밌는 기사가 났다. 중국 노동자/노동시장에 대한 기사다(링크). “The rising power of the Chinese worker: In China’s factories, pay and protest are on the rise. That is good for China, and for the world economy”라는 제목만 봐서는 마치 중국에서 노동자들의 권익 향상을 반기는 것 같지만, 잘 보면 그렇지 않다. 어쩌면 이 기사가 전해주고픈 핵심적인 철학과 메시지는 다음과 같은 마지막 단락에 들어있는 것 같다.

캐임브리지 경제학자 고 존 로빈슨(Joan Robinson)이 언젠가 썼듯이, “자본가에게 착취당하는 비참함이란 착취당하지조차 못하는 비참함에 비할 바가 아니다”. 1962년에 씌인 이 재치있는 구절은 동남아시아의 과소고용(underemployment) 현실에서 자극받은 것이었다. 그때로부터, 자본은 그 지역과 그 북쪽의 거대한 이웃[중국]에서 노동자들을 분주히도 “착취”해왔으며, 이는 그들에게 크게 이익이 되었다. 이제 자본이 그들에게 투자할 때가 됐다.

1. 한 가지 재밌는 것은, “착취”라는 말에 따옴표를 침으로써 끝끝내 그 용어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는 것. 하지만 이건 뭐 아무래도 좋다. 나는 솔직히 저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아직까지 존재한다는 사실이 그저 경악스러울 따름이다. 멀쩡한 사람들이 굶어죽는 것을 보며 비탄에 가득차서, “차라리 저들이 자본에 착취라도 당했더라면 저보단 나았을텐데”라고 읊조리는 것이 곧장 “자본에 착취당하는 것은 좋은 것이다”라는 명제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2. “이제 자본이 그들에게 투자할 때가 됐다”란 또 무슨 소린가? 기사 전체를 보면 이는, 중국 노동자들도 이제는 “소비”를 해야 한다는 얘기다. 그러려면 그들의 소득수준도 높아져야 하고,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선 현재 불거지고 있는 노사갈등이란 필요악이라는 뉘앙스도 풍기고 있다. 이것이 위 기사가 말하는 자본이 노동자에게 하는 “투자”인가? 넌센스다. 이게 왜 “투자”인가? 노동자들이 투쟁을 통해 얻어낸 것이지!

자본은 그저, 주어진 상황의 (그 결과가 어떨지는 미리 정해지지 않은) 우연한 전개를, 즉 그런 사태의 추이에 따른 외적 강제를, 그 자신 내적 필연성으로 끌어안을 뿐이다. 위 경우, 애초 자본은 미래의 소비자인 노동자에게 “투자”한다는 의미에서 그들에게 “자발적으로 양보”한 것이 절대 아니다. 노동자들의 투쟁에 의한 강제, 또는 자본이 결코 의식적으로 지킬 필요가 없는 모종의 경제적/사회적 논리에 의한 강제(이를테면 노예라 하더라도 계속 굶긴 채 일을 시킬 수는 없다는 식의)를, 어쩔 수 없이, 그러나 동시에 그것이 마치 애초부터 거기에 있었고 또 따라서 자신은 그것을 자발적으로 받아안는다는 듯이 받아들일 뿐이다.

3. 사실은, 위 기사에서도 시사되는 바와 같이, 자본이 정작 어떤 “투자”를 하라고 요구하고 있는 대상은 바로 “중국 국가”다. 즉 그들은 자신들이 값싼 노동력을 안정적으로 공급받는 데 걸림돌이 되는 제반 사회제도들을 중국 정부가 재정비하길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엔 현재 시행되고 있는 중국의 이주에 대한 규제를 완화하는 것은 물론, 위 기사엔 나오지 않았지만 도시를 중심으로 한 제반 사회적 인프라 정비까지 포함될 것이다.

바로 이런 대목에서 끝끝내 드러나고야 마는 것은, 결국 “자본의 본성”이다. 즉 자본은 애초부터 노동자의 “복지”나 그들의 “소비수준” 내지는 “삶의 질”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값싸고 순응적인 노동력의 안정적인 공급“일 뿐. 그들은 오직 그것을 위해 중국 정부를 들볶고, 필요하면 이동도 하고 그러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사항들이 매우 잘 드러나 있다는 점에서, 아이러니컬하게도, 위 기사는 매우 좋은 기사, 한번쯤 읽어볼만한 기사다.

이론의 발전과 이론사가의 중요성에 대한 잡담

얼마전 헌책방에 가서 [의학의 역사: 한 권으로 읽는 서양의학의 역사](Jacalyn Duffin 씀, 신좌섭 옮김, 2006, 사이언스북스)(원저: History of Medicine: A Scandalously Short Introduction, 1999)라는 책을 사서, 심심할 때 보고 있다. 제목이 말해주는 대로, 여러 주제들에 대해 짤막하게, 그러나 매우 감칠맛나게 설명해주고 있어서, 옆서 컴퓨터를 켜놓고 호기심 가는 내용들에 대해 인터넷을 뒤져보면서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그 책은 다음과 같은 인용으로 시작된다. 아마도 인류사에서 의학발달의 아주 중요한 특징을 단적으로 잡아내준다고 저자는 판단했던 모양이다.

“의사 선생님, 귀가 아픈데요.”

  • 기원전2000년: 자, 이 약초 뿌리를 드시오.
  • 기원전1000년: 그 뿌리를 먹으면 부정을 타니 이 주문을 외우시오.
  • 1850년: 주문은 미신이오. 이 물약을 드시오.
  • 1930년: 그 물약은 돌팔이 약이오. 이 알약을 드시오.
  • 1970년: 그 알약은 효과가 없소. 이 항생제를 드시오.
  • 2000년: 그 항생제는 인공 합성물이오. 자, 이 약초 뿌리를 드시오.

— 애넌(Anon)의 ‘의학의 역사’ (1997-1998년 인터넷에 떠돌던 글)

위 대목에서 난 두 번 웃었다. 한번은 위 내용 자체가 재밌어서다. 아무리 과학이 어쩌니 해도, 결국 우리 인간이란 게 무슨 부처님 손바닥 위에서 놀고 있는 것 같아 씁쓸한 기분마저 들었다(여기서 “부처님” 대신, 취향에 따라, “하느님”, “하나님”, “절대정신” 등등을 넣을 수 있겠다).

한번 더 웃은 건 번역 때문이었다. “어, 어디?”라고 당신은 흠칫 놀랐는가? ㅎㅎ 흠… 별로 재미없을지도 모르지만… 함 찾아보시길. 정답은 저 아래에… (-_-) (원문대조 따위는 당연히 해보지 않았지만, 내 말이 맞을 것…;;;)

그런데… 다분히 우스겟소리겠지만, 경제학이나 여타 사회과학들의 발전도 대충 위와 같은 식으로 특징지을 수도 있을 것 같다. 경제이론과 경제이슈라는 게 돌고 돈다. (요새 케인스주의 다시 기어나오는 거 봐…)

흔히 우리는 어떤 “발전”을 묘사할 때 “변증법적”이라는 표현을 쓴다. 이름하여 “이론의 변증법적 발전“. 가장 거칠게 말하면 이는 “정-반-합”의 구도를 따라, “기존이론-대항이론-새로운이론”이라는 식의 발전이 반복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터. 하지만 “변증법”이라는 그 말의 의미대로, 만약 이 과정이 진정으로 변증법적이라면 기존에 한번 나온 것이 “똑같이” 반복되거나 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기존의 것들의 좋은 점은 보존되고 나쁜 점은 걸러진 채 새로운 것이 형성되는 게 변증법이니까.

따라서 설령, 위 예에서와 같이, “이 약초 뿌리를 드시오”라는 겉으로 보기엔 똑같은 처방을 기원전2000년의 의사와 서기2000년의 의사가 내렸다 하더라도, 둘이 품고있는 실제 내용은 엄청나게 다를 것. 말하자면, 2000년의 의사가 내리는 “이 약초 뿌리를 드시오”라는 처방에는, 지난 4천년 동안의 의학의 발전 역사가, 그러니까 그 안에서 행해진 좌충우돌 시행착오의 경험과 그로부터 얻어진 지혜가 압축된 채로 녹아있을 것이란 얘기다.

에… 하지만 이건 “원칙상”, 또는 “심층적인 의미에서” 그렇다는 거고… 실제 그 처방을 내리는 의사 개개인들은 대체로 그런 4천년의 의학발전의 역사에 대해선 거의 무지할 가능성이 높다. 즉 서기2000년의 의사에겐 “인공 합성물”인 항생제보다는 “천연물”인 약초 뿌리가 낫다는, 그러니까 바로 그 당대의 문제만이 눈에 보일 것이다. 그러다가, 이 의사가, 자기보다 무려 4천년 전 고대 이집트에서도 의사들이 자기가 하는 것과 거의 똑같은 처방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어쩌다 알게 됐다고 해보자. 이 의사의 기분이 어떻겠는가? 저 4천년 전의 조상들에게 “무궁한 경외감”을 느끼지 않겠는가? 그리고 그 안에서, 4천년 세월동안 이뤄진 의학의 발전이란 게 덧없고 하찮게 보이지 않겠는가?

그러나 진짜 그런가? 진짜 그 4천년의 우회로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었을까? 당연히 아니다! 그러나 저 가련한 의사는, 그걸 모른다. 그것도 모른 채, 그는, 자신의 후대에, 자신의 그 자신감에 찬 처방 “이 약초 뿌리를 드시오”가 어떤 알수없는 이유로, “이 주문을 외우시요”라는 현재의 자신이 보기엔 그저 말도 안 되는 처방으로 대체되는 것을 저승에서 지켜봐야 할지도 모른다.

세상의 모든 의사들이 이렇게 자신이 종사하고 있는 의학의 역사에 대해 무지하다면, 그리하여 자신이 현재 가지고 있는 처방의 “역사적” 내지는 “의학사적” 의미를 모른다면, 위 인용된 구도에서 의학이란 어쩌면 다람쥐 쳇바퀴 돌듯 그저 반복되면서, 어떤 의미에선 퇴행하는 모습을 보일 수도 있는 것이다.

오늘날 경제학이 처한 사정이 바로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리고 그렇게 된지는 실은 꽤 됐다. 현대 경제학이 정신 못차리고 개죽을 쑤는 것은 바로 이런 측면에서 설명될 수도 있다. 이쯤 되면, 서기2000년의 의사에게, “이 약초 뿌리를 드시오”라는 그의 처방이 얼마나 “역사적으로” 또는 “의학사적으로” 놀라운 것인지를 알려줄, 말하자면 “역사가” 내지는 “의학사가”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이들이 있어야만, 서기2000년의 의학은, 지난 4000년의 발전역사를 조망하며 진정으로 획기적인 한걸음을 내디딜 수 있을 것이다.

같은 논리로, “경제사가” 및 “경제사상가”가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떠맡고 있는 것인지, 그리고 그 역할이 방기되었을 때 어떤 파괴적인 결과들이 나타날 수 있는지, 우리는 충분히 음미해야만 한다.

아참, 정답!

“애넌”은 저자이름이 아니다. 이건 “작자미상”을 저자이름이라고 생각하는 거랑 같은 오류. Anon. = Anonymous. 재미없나? 쩝… (그래도 이 책, 번역 좋고 전반적으로는 잘 읽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