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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y on Robber Barons: ‘프레임’이란 이런 것!

내가 <파이낸셜 타임스>를 보는 몇 가지 까닭 중 하나가, 거기에 괜찮은 칼럼니스트들이 있기 때문이다. 존 케이(John Kay)도 그 중 하나다. 이번에 그가 쓴 “라인강의 노상강도귀족들”(Robber Barons of the Rhein)이란 칼럼이 무척 재밌다. 그 내용도 재밌지만, 이 글로부터 저자가 결코 의도하지 않았을 무언가를 읽어내는 재미가 크다.

이제 나는 바로 그 “무언가”에 대해 이야기를 할텐데, 아래 드러날 것이듯이, 이는 비록 저자가 의도한 것은 아닐지라도 실제로 “거기에 있다”. 무슨 뜻인가? 또는, 이로써 무엇이 드러나는가? 일단 한 번 보자.

(가급적이면, 위에서 말한 칼럼을 직접 읽어보시길 권한다. 링크)

먼저 “robber baron”이라는 용어가 생소할 사람도 있을 것 같다. 이 표현이 유명해진 건, 그것이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 미국을 풍미했던 대기업가들, 특히 존 로커펠러(John D. Rockefeller), 제이 굴드(Jay Gould), 존 피어몬트 모건(John Piermont Morgan) 등을 일컫기 위해 쓰인 뒤부터다. 영한사전을 찾아보니 “악덕 기업주”로 번역되어 있다. 그리 나쁜 번역은 아니지만, 약간의 오해의 소지도 있다. 흔히 우리나라에서 “악덕 기업주”라고 하면 노동자들의 임금을 떼어먹는다거나 하는 이들을 일컫지만, 저 위에 언급된 이들이 “robber baron”이라 불린 건 대체로 그들이 시장에서 (시장 바깥에서와는 달리) “비신사적인” 행위–독점, 무차별적 합병 등–를 일삼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John Kay에 따르면 저 “robber baron”이라는 말은 그보다 약 1000년 전 독일의 라인강변 지방에서 먼저 쓰였다고 한다. 당시 이 지역의 주요 운송로였던 라인강을 통과하는 화물선 등은 신성로마제국에 통행료를 내야만 했다. 통행료의 징수권을 주는 것은 황제만의 권한이었는데, 프리드리히 3세가 후계자 없이 죽고 얼마간의 “공위기간”이 생기자 역내의 귀족들은 앞다퉈 통행세를 걷기 시작했고, 바로 이들을 일컬어 “robber baron”이라 했다는 얘기다. 물론 이에 맞서 상인들은 자기들 나름대로 “자위권”을 발동했고, 나중에 합스부르크 왕조가 세위진 뒤에 “robber baron”들의 수효와 세력은 모두 줄어들었다고 한다.

정리하자면, 일단 위 이야기엔 세 부류의 등장인물들이 있다. 선량한 상인들, 황제와 귀족들, 그리고 “robber baron”들. 얘기가 이쯤 진행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저 “선량한 상인들”에 가장 동정심을 느낄 것이다. 이 대목에서 칼럼의 저자 John Kay는 말한다:

The important distinction is not between the free-market robber baron and the authorised and regulated toll gatherers. It is between those who devote effort to activities that create value for others, like the riverside artisans and watermen who offered products and services, and those, such as the baron and the archbishops, who simply used their position to extract a share of the value of the cargoes that passed by.

[간단한 의역] (황제–여기서 황제란 당연히 신의 대리인이다–의 권위를 부여받은) “공인 통행료 징수자들”과 “robber baron”을 구분하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고, 진짜 중요한 것은 “타인을 위해 가치를 창출하는 사람들”과 “특정한 지위를 이용해 그 가치를 빨아먹는 사람들”을 구별하는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눈여겨 봐둘 것은, “공인 통행료 징수자들”과 “robber baron”의 구분은 곧 “규제”와 “시장 자유”의 구분과 일맥상통한다는 점. 즉 정부가 “규제”를 할 것이냐, 아니면 “시장 자유”에 맡겨둘 것이냐 하는 구분. 그런데 저자는 이런 구분이 중요하지 않다고 했다. 왜? 사적 악덕이 공적인 형상을 뒤집어 쓴다고, 또는 그 반대로 공적으로 행해지던 악덕이 사적으로 행해진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그런 악덕 자체가 사라지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구별에 이어 그는 현대의 금융사기꾼들을 고발한다. 그리고 그는 묻는다. 이들이 얻어간 막대한 수입은 “선량한 상인들”의 임금, “공인 통행료 징수자들”의 세입, 아니면 “robber baron”들이 거둔 노획물 중 어디에 해당하는가? 이상의 논의에 따른다면, 당연히 그것은 (구체적인 상황에 따라 다르겠지만) 뒤의 둘 중 하나에 속할 것이다. 그러면서 저자는 다음과 같은 언급으로 칼럼을 마무리한다.

The distinction between the creation and the appropriation of wealth — between those who add value to the cargo and those who help themselves to a fraction of it as it sails by — is vital, if not always clear. But our ability to recognise it will determine, not just the fate of individuals, but the future of modern capitalism.

[번역] 부의 창출과 수취–화물에 가치를 더하는 사람들과 그 화물을 실은 배가 항해하는 중에 그 일부를 뽑아먹는 사람들–를 구별하는 것은 중요하다. 비록 그 구별이 늘 명확히 이뤄질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그것을 우리가 인식해내는 능력에, 단순히 개인들의 운명뿐만이 아니라 현대 자본주의의 미래까지도 좌우될 것이다.

이상이 John Kay의 칼럼이다. 내용이 아주 좋다. 이런 글을 우리나라의 신문에서도 볼 수 있을까? 내가 지나치게 비관적인 것일까? 잘 모르겠다. 하여간, 수준높은 글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저자가 의도하진 않았지만 위 글에 있는 그 “무언가”란 과연 무엇인가? 크게 두 가지 얘길 할 수 있겠다.

첫째로, 저자는 1000여 년 전의 “robber baron”에 대해선 아낌없는 경멸을 표하면서도 100여 년 전의 “robber baron”들에 대해선 판단을 유보하고 있다. 저자의 태도를 일관되게 밀어붙인다면 우리는 역시 로커펠러나 카네기 등도 오늘날의 금융투기꾼들과 마찬가지로 규탄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결론은 무엇인가? 앞서 말했듯이,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 흔히 “도금시대”(Guilded Age)라 불리는 시기 미국의 대기업가들이 “robber baron”이라는 불명예스런 별칭을 얻은 것은 그들이 주로 시장에서 악행을 저질렀기 때문이다. 아니, 적어도 그렇게 여겨지고 있다. 여기서 악행이란, 시장에서 자신들의 독점력을 높이고자 각종 탈법/불법적인 사기는 물론 필요한 경우엔 폭력까지도 불사했던 것을 가리킨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공정하고 자유로운 경쟁을 억압하고 각종 왜곡을 낳는 담합과 독점을 일삼았다. 따라서 우리가 록커펠러 등을 “robber baron”이라 부르며 비판할 때, 우리는 은연중에 “자유”와 “공정함”을 요구하고 있는 셈이다. 부르주아적 의미에서의 바로 그 “자유”와 “공정함”–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둘째, “부[또는 가치]의 창출과 수취”의 구별 문제를 제기하면서도 저자는 부의 “진정한” 창조자가 누구인지를 끝내 밝히지 않는다. 아담 스미스(Adam Smith)와 같은 고전정치경제학자들이 힌트를 주고 뒤에 마르크스(Karl Marx)가 우리에게 분명하게 가르쳐줬듯이, 자본주의 경제에서 부[가치]의 창조자는 노동자다. 따라서 노동자를 제외한 다른 사회계급들이 취하는 수입들은 모두 그가 창조한 부[가치]의 수취분이다. 바로 이런 한에서, “부[또는 가치]의 창출과 수취”의 구별은 굉장히 중요하고, 이 둘을 정확히 구별하고 또 그 의미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은, 저자가 말한 대로, “현대 자본주의의 미래까지도 좌우”할 것이다.

그러나 저자가 위 구별을 말할 때, 그는 우리와는 조금 다른 무언가를 의미하고 있다. 그는 부[가치]의 진정한 창조자, 그것의 궁극적/사회적 유래따위는 아예 신경조차 쓰지 않는다. 기껏해야 그는, 이미 창조된 부를 운반하는 사람들에 대해 언급할 뿐이다. 마치 그들이 진정한 부의 창조자라는 듯이. 그러나 이를 십분 인정한다 해도, 그것을 실제로 운반하는 사람들이 처한 실질적인 사회적 조건따위 또한 저자의 관심사항이 아니다. 그들은 분명 임노동자일 것이다. 따라서 그 “화물”로 표상되는 가치라는 것은 애초에 그들에게 속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무슨 말이냐면, 어차피 그 “화물”이 “공인 통행료 징수자들”이나 “robber baron”들의 방해 없이 무사히 강을 지난다 할지라도, 그 “화물”로 표상되는 부[가치]는 실제로 그것을 운반하는 이들이 아닌 다른 누군가–말하자면 (금융가인 모건이 아닌 산업가인) 로커펠러나 카네기 같은 사람들!–에 속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실상이 이렇다면, 우리가–저자가 그러듯이–과거의 “공인 통행료 징수자들”이나 “robber baron”들, 또는 현대의 금융 사기꾼들을 비판하는 것이 무슨 소용일까? 그런 종류의 비판의 냉철함과 판단력에 의해 좌우되는 “현대 자본주의의 미래”란 과연 무엇일까? 금융 투기꾼들에 대한 비난이 그야말로 “시장 논리대로” 쏟아져나오는 요즘, 현대 자본주의에서 부의 진정한 창조자들을 대변해주는 것은 누구인가?

얘기가 이쯤 되면, 위 저자와 그의 논조에 동의하는 현재 지구상의 수많은 “양심”들은, 모종의 “프레임”에 갇혀 있다고 해도 좋지 않을까. 그들은 여기에서 결코 빠져나올 수 없을 것이며, 그 안에 있는 한 그들은 결코 노동자들을 위한 뭔가를 내놓지 못할 것이다. 저 위의 칼럼과 같은 멋진 글을 쓸 수 있는, 런던 비즈니스 스쿨(LBS)과 옥스포드대를 거쳐갔고 영국학술원 회원이며 현재 런던정경대(LSE)에서 가르치고 있는 John Kay 같은 똑똑한 사람들조차도 말이다.